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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라떼에 대한 찬양

등록일 2026-05-14 09:13 게재일 2026-05-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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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 라떼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챗GPT

나에게는 몇 가지 작업 루틴이 있다. 카페에 가서 너무 해가 들지 않는 자리에 앉는 것. 시는 노트에 펜으로, 걸어 다니면서 직접 손으로 쓰는 것. 음악 작업은 데스크탑 또는 노트북으로만 하는 것. 가끔은 이런 반복이 답답해서 완전히 바꿔서 해볼 때도 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면 나 자신이 익숙한 감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수없이 루틴을 바꾼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바닐라 라떼.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작업할 때는 반드시 바닐라 라떼를 시킨다. 그건 어느 카페에 가도 마찬가지다. 친구들이 종종 왜 그렇게 바닐라 라떼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냥 당이 떨어져서라고 답하곤 한다. 거짓은 아니다. 하나 그게 이유의 전부도 아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카푸치노나 카페 모카 같은 것을 시켜보기도 했다. 묘하게도 그럴 때마다 작업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할 때 아메리카노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건 이미 작품 내외적으로 쓴맛을 제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쓴맛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을 중화해줄 수 있는 건 단맛 외에 없다. 다른 걸 하나씩 먹어봤을 때, 카푸치노는 덜 달고 카페 모카는 너무 달았다. 내게 필요한 건 적당한 단맛이다. 아직까지 바닐라 라떼만큼 적절한 단맛을 찾지 못했다.

 

단 음식이 뇌를 활성화하고 인지 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건 지난 세기부터 진행된 수많은 연구에 따라 검증된 사실이다. 뇌는 우리 몸이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소모하며, 그 주요 에너지원은 포도당이고, 혈중 포도당 농도가 적정 수준일 때 기억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섭취하면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킨다고 하니… 내게 적절한 양은 바닐라 라떼 그란데 사이즈(473ml) 정도다. 마감까지 1시간이 걸리든 10시간이 걸리든 나는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양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날씨에 따라 종류는 달라진다. 아이스냐 핫이냐. 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므로 조금만 춥다고 느껴지면 바로 따뜻한 것을 시킨다. 특히 쌀쌀한 한겨울에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딱딱했던 어깨도 조금은 말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닐라 라떼 한 모금은 멍때리기, 인터넷에서 아이쇼핑하기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예열 과정인 셈이다.

 

카페에 갈 여유 없이 집에서 급하게 마감을 해내야 할 때는 조금 난감하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당을 채울 만한 무엇은 보이지 않고 물이나 이온 음료 혹은 맥주만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때에 술을 마실 순 없으니 물로 목을 축일 따름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대비해 내가 쟁여두는 것이 있는데, 그건 초콜릿이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그런 초콜릿은 아니다. 마트나 편의점을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 초콜릿, 특히 가나 초콜릿을 좋아한다. 다른 초콜릿은 가끔 질리곤 하는데 이상하게 가나 초콜릿만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쌓아놓으면 너무 많이 먹게 될까 봐 딱 두세 개 정도만 냉장고에 넣어둔다. 70g이 든 초콜릿 하나가 나의 하루치 정량이다. 바닐라 라떼가 없을 때 당을 수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바닐라 라떼도 없고 가나 초콜릿도 없다면? 그럼 나는 연신 쓴맛을 보기만 한다. 작업물 내에서 느낀 쓴맛은 중화되지 않고 입 안을 내내 맴돈다. 이온 음료를 마셔도 단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마감 시한이 아니다. 마감 시한이 임박했음에도 나를 도와줄 적절한 단맛이 없는 것이 두렵다. 몰입에 꼭 필요한 부품이 빠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하다 여겨질 수 있지만 바닐라 라떼와 가나 초콜릿이 없는 나는 맨발로 현관을 나서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계속 먹으면 뇌의 보상 회로가 변해 무의식적으로 단 음식을 더 찾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단 음식을 통해서 도파민이 나오도록 시스템이 변화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나는 바닐라 라떼를 원해서 마신다기보단 이미 바닐라 라떼의 노예가 된 셈이다. 이미 나의 뇌와 마음은 작업-바닐라 라떼-마감 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닐라 라떼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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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우 시인

하나 아쉬운 건 근래 의사 선생님이 내게 카페인을 줄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럼 저의 작업은요? 저의 바닐라 라떼는요…? 아쉬운 대로 요즘엔 디카페인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있다. 연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 단맛은 다른 음료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글쓰기를 멈추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바닐라 라떼를 끊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구현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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