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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랑을 알아차리기

많은 이들은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설렘이나 열정, 운명 같은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랑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취향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평소에는 숨겨져 있던 불안과 상처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답장이 조금 늦어도 괜찮지만, 누군가는 그 몇 시간 동안 버려진 기분에 휩싸인다. 사소한 농담에도 크게 상처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등이 생기면 대화를 피하고 혼자 숨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과한 반응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감정의 뿌리를 따라가 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서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감정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관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내면아이(Inner Child)’라고 설명한다. 내면아이 이론은 사랑이 단순히 현재의 상대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욕구를 함께 이해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그래서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상대의 현재 모습만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그 사람을 만든 감정의 흔적까지 이해하게 되는 일에 가깝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상대의 강한 모습뿐 아니라 불안하고 여린 모습까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곁에 머무를 수 있을 때, 관계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름다운 기억뿐 아니라 어두운 과거까지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 어떤 외로움을 견뎌왔는지, 때로는 어떤 실수와 후회를 품고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사람이 견뎌온 시간들을 상상하게 되고, 그 안에 있었을 외로움과 두려움을 떠올리게 되면서, 그 순간은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말하는 이에겐 오래된 상처일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날 처음 마주한 상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해가 깊어지는 만큼 마음도 함께 아파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걸까. 어쩌면 그것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상대의 좋은 모습만 수집하는 일이 아니다. 강한 모습과 약한 모습, 자랑스러운 기억과 숨기고 싶은 기억까지 함께 바라보는 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지금의 그 사람이 만들어진 이유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물론 사랑이 상대의 상처를 모두 치료해 주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상대의 불안과 두려움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 노력할 수는 있다. “왜 그렇게 예민해?” 대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느꼈을까?”를 묻는 것, 상대의 감정을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것, 그런 태도가 관계를 조금 더 안전하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가 꼭 연인 사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족, 친구, 동료와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내면아이를 마주한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 친구에게 외면당할까 두려운 마음,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관계의 형태만 다를 뿐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좋은 관계란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보이지 않는 상처와 두려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때로는 조언보다 공감이, 해결책보다 곁에 머무르는 태도가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마주하는 일이 어렵다. 누군가를 이해할수록 그 사람이 견뎌온 아픔과 외로움이 보이고, 때로는 그 감정이 내 마음속에도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사랑은 상대의 상처를 대신 짊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이에겐 오래된 상처일지라도 누군가 진심으로 들어주는 순간, 그 상처는 더 이상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사랑을 알아차리는 것이 때로는 버거운 일일지라도, 그 마음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사랑은 상대의 가장 여린 부분을 발견했을 때 도망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마음에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윤여진(시인)

2026-06-10

멀고도 가까운 결속

오랫동안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있다. 한 사람과의 약속도 있고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눈 약속도 있다. 약속의 무게는 다를지 몰라도 형태는 대개 같다. “언제 밥 한번 먹자.”, “나중에 술 한잔하자.” 이런 종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이런 기약 없음이 다정함이 되기도 한다. ‘언제’가 가까운 시일 내에 도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말만으로도 우리가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이라는 증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이 날리는 그런 공수표가 전혀 싫지 않다.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만난 친구들이 있다. 어느덧 이십 년 넘게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단톡방에 여전히 10명이 그렇게 모여있는 게 징그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같은 전공이나 직업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고 그저 같은 교실에 있던 사이다 보니, 모두 하는 일은 제각각이다. 공업사 및 폐차장 사장, 전기 기사, 경찰, 가구 판매원, 소방관 등 공통점이라곤 없다. 작가 혹은 예술가 친구가 대부분인 내게 이런 친구들이 남아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도 나에게 말한다. “내 주변엔 작가인 애가 너밖에 없어서 신기해.” 그런가? 여기서 작가가 제일 흔한 거 같은데. 우리가 모이면 누구 한 명 빠짐없이 이렇게 떠들곤 한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평범하지.” 모두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사는 지역도 달라서 다 같이 모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1년은커녕 거의 10년째 만나지 못한 친구도 있다. 그 안에서 매년 송년회와 신년회 둘 중 하나는 꼭 챙기려고 하는 친구 H가 있다. 모임 내에서도 H는 내겐 특별하다. H가 주도하지 않았다면 이 모임은 오래전에 와해했을지도 모른다. 연말이 올 즈음 H는 넌지시 한마디를 던진다. “12월에는 모여야 하지 않아? 다들 시간 어떻게 돼?” 의견을 수렴한 뒤 대부분 가능하다고 하는 날에 모이기로 한다. 1년에 한 번이니 웬만하면 다들 참석하려고 하지만 모임 날이 다가올수록 한 명씩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생긴다. 급히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이가 아프다(이건 정말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차표가 없다(연말이라 구하기 힘든 모양이다), 갈 수는 있는데 마감을 다 하고 가면 자정일 것 같다(이건 나의 변명이다). 결국 모임을 주도한 H와 그날 별일 없다는 다른 친구 한 명만 가능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임은 미뤄진다. 꼭 H가 주도하지 않아도 모두 모이려는 의지 자체는 강하다. 올해 송년회가 실패하면 내년 신년회, 내년 신년회가 실패하면 내년 송년회에는 최대한 모이자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한 교실에서 자연스럽게 보던 것처럼 쉽게 모일 수가 없다. 각자의 일이, 저마다의 삶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내심 미안해하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나 혼자였던 것은 아니나 친구들이 서운해하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정해진 모임 날에는 내게 중요한 일이 생기곤 했다. “어쩔 수 없지. 일하고 건강이 먼저야.” L은 그렇게 말했다. 면죄부를 받은 느낌이었으나 그 면죄부에 유효 기간이 있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2023년 초, 그제야 무심하고 이기적인 내가 벌을 받을 시간이 되었던 모양이다. 겉치레에 불과한 약속이 아닌 정말 중요한 약속 두 개가 겹치고 말았다. H의 결혼식과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B의 결혼식이 하필 같은 날에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B의 결혼식은 12시, H의 결혼식은 3시라 하여 무리하면 갈 수 있지 않을까 했다. 문제는, B는 부산, H는 서울에서 식을 올린다는 거였다. 절망적이었다. 한 곳만 가면 다른 한쪽은 너무나도 서운해할 게 분명했다. 서운한 걸 넘어서 살의를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두 곳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어떻게 오가지? 심지어 B의 결혼식에서는 축가도 해야 했다. 내 고민을 알자마자 B는 H의 결혼식에 가기를, H는 B의 결혼식에 가기를 권했다. 나와 얼마나 친한지 알고 있으니 다른 친구에게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더 미안하게 그들은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이 약속은 하나도 어겨선 안 되겠다고. 당일 나는 B의 결혼식에 가 축가를 끝내고 김해 공항으로 간 다음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급히 택시를 타 H의 결혼식으로 향했다. 기념사진을 다 찍은 후에야 도착했지만, 그래도 H의 얼굴을 보고 축하를 건넬 수는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약속을 한다는 건 나와 누군가가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불투명하나 따뜻한 안부 같은 것. 지켜지지 못할 약속도 지켜야 하는 약속도 모두 소중한 이유다. /구현우(시인)

2026-06-10

지방선거, 승리하셨나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 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정말로 모든 것들에게는 제자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는 모습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싶다. 반대로 무언가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위치해 있는 모습은 대부분 썩 보기 좋은 풍경이 아니다. 한동안 거리에 걸려 있던 수많은 선거 현수막과 벽보들, 도로를 누비던 선거 유세 차량들과 거기서 뿜어져 나오던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그랬다. 푸르른 녹음을 가린 홍보물들과, 일상의 고요를 헤집던 소음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누군가는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아침볕을 맞이하였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참담한 마음을 애써 가누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을 낳는 일이다. 이긴 사람은 당선자들이고 진 사람은 낙선자들일 거라고 단정 짓기 쉽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는 출마한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뽑는 사람들을 위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출마자들은 수많은 유권자 중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승패만을 고려하는 것은 다소 편협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라 해야 옳은 말이 되는가. 내가 뽑은 사람이 당선되었다면 이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진 것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정당과 정치인들이 언제나 정직한 마음으로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모를까, 그들 안에서도 나쁜 이들을 좋은 이들로 포장하는 속임수가 오가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속이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가 옳다고 믿고 내린 선택이 정말로 옳은 경우도 있겠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결론을 맞닥뜨리는 경우도 흔하다. 너무나도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선거에서 이긴 사람들은 그 선거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모든 사람들이다. 내가 뽑지 않은 사람이 당선되었더라도 그가 나의 삶에 도움을 주는 정치와 행정을 펼친다면 이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진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직까지 이 선거의 승자와 패자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당선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당선인들이야 각자 마음먹은 바가 있을 것이고 임기 내내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하겠지만 결국 그들 개개인은 인간이다. 사람의 마음과 신념이란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요인에 의해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이가 변절할 수도 있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뛰어든 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유권자들의 태도다.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선거운동기간 내내 후보들 모두 얼마나 절박한 얼굴들이었던가. 그들의 임기를 4년으로 끊어낼지, 아니면 더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도록 허락하거나 더 큰 도전의 가능성을 열어줄지에 대한 결정은 유권자들이 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선거에 출마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자신들의 입으로 약속했던 것들을 지키려 노력하는지, 아니면 얄팍한 눈속임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 하는지 또렷한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들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 가는지, 그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면밀히 살피고 기억해야 한다. 당선된 이들은 대부분 다음에도 우리의 선택을 받고 싶어 할 것이고, 낙선한 이들 또한 대부분 다음번에는 다른 결과를 받아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도로 인해 선거의 결과가 바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022년 지방선거비용으로 4437억원 정도를 지출하였다고 보고했다. 수천 호의 공공임대주택을 지을 수 있고, 수십만 명의 학생들에게 1년간 급식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이다. 게다가 선거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지출 외에도 경제적으로 환산해야 하는 유무형의 가치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투입되는 일이다. 이렇게 큰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치른 선거인데, 이겨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즐겨 보던 한 드라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치란 옳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이 선거의 결과를 승리로 만들어 나갈 시간이다. /강백수 (시인)

2026-06-04

천천히 입을 연다

올해 5월은 내게 힘든 달이었다. 첫 주부터 지독한 목감기에 걸린 탓이었다. 목감기야 살면서 몇 번쯤은 겪어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번 감기는 유독 증상이 심했다. 발작하듯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새벽에도 몇 번씩 잠에서 깼고, 목구멍 안쪽이 따가워 목캔디를 달고 살았다. 가장 문제가 된 건 목소리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완벽하게 나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목소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목이 나가버린 것이다. 생전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는, 흡사 베놈과 다스베이더를 연상시켰다. 그 목소리가 무려 2주 넘게 이어지다가, 3주째가 됐을 무렵에는 반 정도 회복되었다. 한 달이 넘은 지금은, 원래 목소리의 95퍼센트 정도를 되찾았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았지만, 무엇보다도 최대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평소에 말을 많이 하시나요?” “말을 꼭 해야 하는 직업인가요?” 나는 첫 번째 질문에선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가, 두 번째 질문에선 자신 있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분간은 말을 아껴주세요. 그래야 호전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말을 참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려 한 달이나 갈 줄은 몰랐지만… 자의가 아닌 요인으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가장 증상이 심했던 첫 주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상대방에게 보여주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전부 취소했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은 목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자체적으로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히스테릭해졌다. 카페나 식당에 가도 주문하기가 힘들었고, 불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한 번도 소중하게 여겨본 적 없던 일이 힘들어지자, 굉장한 스트레스가 찾아왔다. 목에 좋다는 프로폴리스 사탕과 도라지배즙을 챙겨 먹고, 밤마다 가습기를 틀어놓은 채 잠을 청해 보았지만 목소리는 나를 약 올리듯 주변만 빙빙 맴돌 뿐이었다. 원한 적 없던 묵언 수행을 이어가는 동안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평소 얼마큼의 생각을 거친 후에 말을 꺼낼까? 나는 침묵을 견디는 게 어려운 사람이다. 특히 어색한 사람들,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자리에 모일 때면 대화가 끊기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말을 꺼내곤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채 다듬을 틈도 없이 공백을 채우기 위해 뱉은 말들, 별 의미 없는 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그 말들이 하나씩 떠올라 후회가 밀려왔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됐던 말, 조금만 더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던 말들. 다음엔 이러지 말아야지, 수없이 다짐해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매번 비슷한 고랑으로 흘러 들어갔다. 목소리를 잃은 지 3주쯤 됐을 무렵, 혼자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깜빡하고 이어폰을 두고 나온 탓에 할 수 있는 건 책을 읽거나 휴대폰을 보는 것뿐이었다. 나는 책을 펼쳤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집중력이 계속 무너졌다. 카페 안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단 1분의 침묵도 없이, 대화 주제는 수없이 바뀌었고 웃음소리와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물론 카페에서 대화하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나를 힘들게 한 건, 빽빽한 말 틈 사이 불편하고 불쾌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평소라면 흘려들었을 말이 아무런 방어막 없이 귓가에 꽂혔다. 아마 본인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 역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누군가를 경악에 빠뜨릴 만한 말을 해왔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소설을 쓰다 보면 유독 자주 쓰게 되는 표현들이 있다. 나의 경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은 ‘천천히 말했다’가 그것이다. 시끄러운 카페 안에서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그동안 그 문장을 적으면서, 천천히 입을 여는 인물들의 마음을 나는 얼마나 헤아리고 있었을까?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는 말하기, 내 생각이 올바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도록 돕는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게 질문을 던졌던 의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꼭 말해야 하나요?” 평소라면 벌컥 말을 쏟아냈을 순간, 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연다. /양수빈 (소설가)

2026-06-04

사소한 설렘을 사는 일

딱히 필요한 건 아니었다. 집에 비슷한 건 이미 있었고, 없어도 당장 불편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 눈이 갔다. 쇼핑앱을 몇 번이고 들어가 후기를 읽고, 색상을 비교하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구매 버튼을 눌렀다. 신기한 건 물건이 정말 필요해서라기보다, 사고 있는 그 순간이 왠지 기분을 조금 바꿔주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생각보다 자주 무언가를 사고 싶어했다. 심심할 때도 쇼핑앱을 켰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괜히 사고 싶은 물건이 늘어났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냥 새로운 게 갖고 싶었고, 뭔가를 기다리는 기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실제로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이상할 만큼 설렜다. 현관 앞에 놓인 박스를 열 때면 아주 잠깐이지만 하루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꼭 필요할 것 같았던 물건도 며칠 지나면 금세 익숙해졌다. 새로 산 컵은 어느새 평소처럼 식탁 위에 놓여 있었고, 그렇게 갖고 싶었던 옷도 몇 번 입다 보면 특별함이 사라졌다. 그러면 또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런 내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계속 새로운 걸 원하게 되는 걸까 싶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사고 싶었던 건 물건 자체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행복의 건축’에서 사람이 어떤 대상을 원하는 이유에는 단순한 기능 이상의 감정과 욕망이 담겨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사람은 물건 자체보다 그 물건이 만들어줄 삶의 분위기와 감정을 함께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 문장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컵 하나를 사면서도 전보다 더 여유로운 아침을 상상했고, 새로운 옷을 고르며 조금 더 다른 하루를 기대했다. 물건을 사는 동시에 어떤 새로운 기분을 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은 소비가 너무 쉬워졌다. 몇 번의 터치만으로 원하는 걸 바로 살 수 있고, SNS를 켜면 누군가는 계속 새로운 물건을 보여준다. 검색을 딱 한 번만 했을 뿐인데 알고리즘은 취향을 정확히 파악해서 좋아할 만한 제품을 끝없이 추천한다. 가만히 있어도 자꾸 새로운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소비는 점점 필요를 채우는 행위라기보다 기분을 환기시키는 방식에 가까워진다. 실제로 괜히 마음이 복잡한 날이면 쇼핑앱을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무언가를 산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물건 하나쯤 있으면 지금보다 조금은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지루하게 반복되던 문장에 작은 쉼표 하나를 찍어 보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날은 물건보다도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떤 작은 방식으로라도 기분을 바꾸고 싶어진다. 책상 위에 새로운 조명을 올려두거나, 평소엔 사지 않던 향의 향초를 고르거나, 계절이 바뀔 때 괜히 새로운 옷을 사고 싶어지는 이유도 어쩌면 비슷할 것이다. 삶 전체를 바꿀 수는 없어도 아주 작은 분위기 하나쯤은 바꿔보고 싶은 마음. 소비는 종종 그런 사소한 변화에 대한 기대에서 시작된다. 물론 대부분의 설렘은 생각보다 빨리 일상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순간들이 의미 없는 건 아닌 것 같다. 좋아하는 향의 바디워시를 새로 꺼내 쓰는 일, 마음에 드는 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는 일,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일 같은 사소한 변화들은 생각보다 하루의 기분을 많이 바꿔놓는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거창한 행복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별것 아닌 작은 기대와 사소한 즐거움들이 반복되면서 하루를 조금씩 견디게 만든다. 내일 도착할 택배를 기다리는 마음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기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무언가를 사고 싶어지는 마음을 꼭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게 됐다. 물론 모든 소비가 합리적일 수는 없겠지만, 사람은 때때로 작은 소비를 통해 반복되는 하루에 새로운 기분을 더하며 살아간다. 별것 아닌 변화처럼 보여도 그런 사소한 설렘들은 일상에 작은 활력을 만들어준다. 결국 그런 작은 설렘과 기대들이 반복되며 각자의 삶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윤여진(시인)

2026-05-27

집 꾸미기

벚꽃이 한껏 만개한 올해 봄날 나는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측하지 못한 일로 첫 자취방에서 쫓겨나듯 나오고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첫 자취방은 작은 두 개의 베란다를 포함한 집 구조상 어려움이 있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새로 구한 집은 그와 달리 도화지 같아서 좋았다. 전체적으로 새하얗고, 모난 데 없이 네모난 형태였다. 가장 먼저 한 고민은 색감이었다. 무슨 색에 무슨 색을 더하는 게 좋을지보단 무슨 색을 빼야 좋을지 생각했다. 언젠가 내 뜻대로 집을 꾸민다면 가능한 많은 색을 쓰지 않으리라. 늘 이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텅 빈 방의 벽지 색 그대로 하얀색이 메인이 되었으면 했다. 거기에 검은색을 살짝만 더하고 싶었다. 슬쩍 동네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고개를 저으며 나를 말렸다. 블랙 앤 화이트가 멀리서 보기엔 예뻐 보여도 가까이서 매일 보면 우울해지기 좋다, 흰색 가구가 청소하기 얼마나 번거로운지 아느냐, 금방 심심해질 것이다, 이런 말들과 함께. 나의 마음은 그래도 완고했다. 누구의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울해진다고? 여기서 더 우울해질 수는 없어 괜찮아. 청소가 번거로워? 매일 청소하면 되는 거잖아.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되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망해도 직접 하나하나 해보고 망해야 했다. 그래야 후회를 해도 최소한으로 할 수 있을 테니까. 본가에 살면서부터 나는 내가 미니멀리스트라는 것을 알았다. 눈에 닿는 책상이나 선반에 무언가를 꽉 채워두는 것이 싫었다.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공간을 채워두기보다 벽에 시계 하나 걸어두지 않을 정도로 휑뎅그렁한 게 내 취향이었다. 삶의 여백을, 방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넉넉히 두고 싶었다. ‘오늘의 집’에서 원하는 가구를 하나하나 검색하기 시작했다. 청소기부터 침대 프레임, 매트리스, 소파, 테이블, 선반, 암막 커튼까지. 신중하게 사이즈를 재고 모양을 봤다. 그 모든 게 마음에 들더라도 원하는 색이 없을 경우엔 장바구니에 담지 않았다.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너무 비슷한 화이트로만 채우면 그건 또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소파는 화이트를 살짝 어지럽힌 듯한 아이보리로, 암막 커튼은 벽지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베이지로. 난관은 의외로 그런 눈에 띄는 것들이 아니었다. 예쁜 쓰레기통을 샀지만 거기에 끼울 종량제 봉투가 주황색이어서 별로였다. 이때는 종량제 봉투 대란이 일어났던 때라 다른 색을 어떻게 구할 수도 없었다. 모두 비슷한 톤으로 맞췄더니 쓰레기통 틈으로 삐죽 튀어나온 주황이 너무나도 눈에 띄었다. 방법을 모색했다. 적당한 크기의 반투명한 봉투를 사서 쓰레기통에 끼웠다. 쓰레기가 다 차면 그때 종량제 봉투에 담아 꾹꾹 눌러 버릴 셈이었다. 실행하고 보니 그건 제법 좋은 선택이었다. 방 안에서 나보다 더 존재감을 발휘하던 주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부족할 것 없이 채우고 나니 이번엔 조명이 문제였다. 형광등의 흰빛이 과하게 쨍하게 느껴졌다. 날씨와 기분과 상황에 따라 조명의 색과 밝기를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두 개의 장스탠드 조명과 한 개의 테이블 조명을 샀다. 형광등을 켤 일이 없도록. 세 개의 조명을 나란히 켜자 그제야 은은함이라는 것이 생겼다. 무엇보다 나는 거실에 있는 소파가 마음에 든다. 거기 누워 오후의 한때를 멍하니 보내고 있다 보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잠시 전파가 통하지 않는 고요한 세상에 놓인 것 같고, 내일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된다. 나의 로망은 소파이건만 소파가 아니라 식탁을 둬야 한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제미나이와 챗지피티에게도 자문을 구해 보았는데 둘 다 자취방에는 소파보다 식탁을 두는 게 훨씬 좋다고 했다. 충분히 큰 아파트 거실이면 모를까, 작디작은 내 거실에는 괜한 사치라는 것이었다. 침대가 있는데 소파가 왜 필요하냐고, 식탁이 없으면 밥 먹기 불편하다고도 했다. 거기서 또 오기가 발동했다. “작은 테이블이 있으니 밥은 바닥에 앉아서 먹으면 되잖아? 난 다른 건 몰라도 소파는 포기할 수 없어!” 소파에 눕는 것과 침대에 눕는 건 다르다. 침대는 수면이고 소파는 휴식이다. 식탁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냐고 하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전혀. 내가 원하는 유유자적함은 오직 소파 위에서만 가능하다. 타인과 AI의 말 모두 듣지 않길 잘했다. 나의 로망은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집 꾸미기는 원래 끝이 없는 것일까? 요즘엔 멀쩡히 움직이는 마우스도 가구에 맞춰 바꾸고 싶어진다. 분명 욕심이다. 마우스를 바꾸면 또 다른 물건도 바꾸고 싶어질 것이다. 어떻게 해도 이 집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래도 조금은, 조금만 더, 이 집이 나도 온전히 그리지 못했던 나의 이상향에 가까워지길 바라고 있다. /구현우(시인)

2026-05-27

아카시아 줄넘기

요즘은 어딜 가도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와 어깨 위로 새하얀 꽃잎이 떨어지고 미처 안착하지 못한 꽃잎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점점이 수놓는다. 나는 꽃향기는 좋아하지만 꽃의 종류나 이름을 구별하는 일엔 영 재능이 없어서,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가리키며 “이게 아카시아야.”라고 말한 후에야 이게 아카시아구나, 했다. 요즘처럼 바닥을 가득 채운 아카시아 꽃잎을 볼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2년 전에 지금의 동네로 이사 왔다. 나의 집을 꾸린다는 설렘도 분명 있었지만, 평생을 가족과 함께 살았기에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불안과 공포가 더욱 컸다. “내 인생은 내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읊조리고 다녔던 게 조금 후회될 정도로. 집을 보고, 계약금을 넣고, 이삿짐을 싸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사 온 지역은 본가에서 역 하나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매우 가까웠지만, 살면서 처음 와 보는 동네이기도 했다. 늘 익숙한 곳에 가서 익숙한 음식만 먹는 나였으므로 이토록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폭풍 같던 이사 당일이 지나고, 나는 반쯤 정리된 짐들 사이를 헤집고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정리와 청소에 시달렸더니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동네도 둘러보고 괜찮은 카페를 발견하면 커피라도 한잔 마실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동네는 한적했다. 눈에 띄는 음식점은 없었지만, 퍽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게다가 집 맞은편엔 큰 공원이 있어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집 근처 골목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배경 삼아, 편의점 의자를 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할머니 서너 명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자리한 골목은 해가 비치지 않아 시원했다. 나는 괜스레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곳, 모두가 자기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내지 않는 곳이구나.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골목을 지나쳤다. 차분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카페에서 산 커피를 손에 든 채 나는 탐색을 이어갔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동네라 그런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부 노인이었다. 집에 돌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를 때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무언가를 잃고 배회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나는 생각과 계획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카페 몇 군데를 더 지났을 때 “이렇게 하라니까?” 하고 외치는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골목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아이 한 명과, 그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남자아이 한 명이 마주 보고 선 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골목을 지나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면 슬쩍 만류할 심산이었다. “아이, 답답하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팔목을 꽉 잡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아이의 한 손에 줄넘기가 들려 있었다. 나는 얼음이 거의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들이켜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자, 내가 하는 거 잘 봐.” 남자아이의 팔목을 놓은 여자아이가 줄넘기를 돌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눈 깜빡할 새에 골목 끝까지 다다라 있었다. “쉽지? 이렇게 하면 돼!” 여자아이가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손에 쥔 줄넘기를 만지작거리던 남자아이가 이내 결심한 듯, 줄넘기를 돌리며 뛰기 시작했다. 남자아이가 줄을 돌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카시아 꽃잎들이 튀어 오르듯 휘날렸다. 내가 꽃잎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남자아이는 열심히 줄을 돌리며 달려간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곁에 서 있었다. “봐봐, 할 수 있잖아!” 여자아이가 씩씩하게 말하며 남자아이를 끌어안았다. “못할 줄 알았지? 그런데 같이하면 다 돼!” 여자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쯤, 동거인 Y가 전화를 걸어왔다. Y는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없었다며, 어디 있는 거냐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거의 다 왔다고 대답했다. 집에 가서 같이 정리를 하고, 밥을 먹고, 앞으로의 삶을 잘 꾸려가 보자고 이야기하자 Y가 작게 웃었다. “물론이지.” /양수빈 (소설가)

2026-05-20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모두에게

최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챙겨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있다. 제목은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OTT에 보일 때마다 뭐 저런 제목이 다 있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감명깊게 봤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본을 집필한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었다. 워낙 문학적인 작품들을 써 온 작가라는 것을 알기에 그 독특한 제목을 여러 번 곱씹게 되었다. 소리 내어 발음을 해볼수록 절묘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속 인물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고 스스로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로 항상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직업은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드는 일이다. 때때로 나태해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직업으로 여기고 산 십 수 년을 돌이켜보면 나름 치열하게 이 일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편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나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단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 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뭔가 업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피어났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남루하지 않은 옷을 입고 맛집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며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때에도 그런 종류의 욕망과 조급함에 머리를 싸매곤 했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는 게 조금 힘들다. 자꾸만 스치는 수치심 때문이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인물의 모습이 마냥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행패를 부리는 장면 가운데 어느 시절의 내가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분노를 품었고, 지금도 가끔 마음속에서나마 그렇게 못나게 굴기도 한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가치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아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거나 그 안의 모든 이들의 삶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이들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 정도로까지 위대한 삶을 살다 가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소박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다. 방식과 정도는 모두 다르지만 조금씩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정으로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 모두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위대한 인간도, 아무 것도 안 하던 어느 시절의 나 같은 인간도 그냥 지구를 뒤덮은 수많은 생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른 종의 생물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 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그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상상해본다. 아마도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고 되물을 것 같다. 모든 생물에게 생존은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있어도 무엇을 위해 사는 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최종 목적도 생존인 것이고, 살아있는 모두가 매일매일 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가치까지 창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목표를 초과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것이지,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누군가가 직업을 갖고 살아간다면 어떤 식으로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것을 직업이라 부를 수는 없다. 직업이 없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의 대상이 된다면 그 또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딱히 사랑을 주고받는 이가 한 명도 떠오르지 않더라도 괜찮다.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는 행위도,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도 누군가에게 일거리를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가는 삶도 크고 작고를 떠나 가치가 있는 삶이다. 그 모든 것에 하나도 해당이 안되고 도저히 그런 가치는 내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있음 그 자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울 필요는 없다. /강백수 (시인)

2026-05-20

혼자라는 깊이

사람들은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움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누군가 없이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 여행을 가는 일들을 어딘가 쓸쓸한 장면처럼 여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와 관계 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알게 모르게 상대의 표정과 말투를 살피고, 분위기에 맞춰 반응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계속 조율하며 정작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놓쳐버리게 된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내 안에서 아주 작은 감정들이 요동치고 있음을 미세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무엇 때문에 피곤했는지, 어떤 순간에 괜히 서운했고 무엇이 좋았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감정들이 쉽게 묻혀버리지만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는 그 감정들이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조용히 남아 머무르는 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며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게 된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고,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 자체도 달라진다.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의 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같은 거리를 걸어도 햇빛의 세기나 온도, 공기의 냄새,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대화와 웃음 속으로 흘러갔을 순간들이 혼자일 때는 공들여 찍는 사진처럼 오래 머무른다. 그래서 혼자는 세상을 더 느리게 바라보게 만든다. 빨리 지나쳐버렸던 감정과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느리게 감각하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해지는지를 조금씩 다시 발견하게 된다. 혼자의 가장 큰 힘은 아마 ‘깊이’에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시간은 넓게 퍼져 나간다. 웃고 떠들고 여러 감정을 나누며 바깥으로 확장된다. 반면 혼자 있는 시간은 안쪽으로 깊어진다. 생각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 풍경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 수도 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복잡했던 마음이 혼자 조용히 걷는 시간 속에서 갑자기 정리되기도 한다. 억지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으며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회복의 과정에 가깝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이 언제나 완전한 충만함만 주는 것은 아니다. 혼자 여행을 가거나 낯선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문득 외로움이 밀려오는 순간들도 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무심코 웃음이 나오는 순간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종종 ‘이걸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들이나 연인을 볼 때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기에 오히려 사람의 소중함도 더 선명해진다. 늘 곁에 있을 때는 익숙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존재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 속에서는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 좋은 것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생각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마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는 나를 외롭게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깊게 이해하게 만드는 시간 같기도 하다. 혼자 있는 동안 사람은 내가 결국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 익숙한 사람 곁에 앉아 있을 때의 편안함, 평범해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들이 다시금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어쩌면 혼자의 힘이란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무엇이 자신을 지치게 했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같은 마음의 결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충분히 가까워진 사람은 타인에게도 이전보다 더 다정하고 깊은 마음을 내어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도 더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윤여진(시인)

2026-05-14

바닐라 라떼에 대한 찬양

나에게는 몇 가지 작업 루틴이 있다. 카페에 가서 너무 해가 들지 않는 자리에 앉는 것. 시는 노트에 펜으로, 걸어 다니면서 직접 손으로 쓰는 것. 음악 작업은 데스크탑 또는 노트북으로만 하는 것. 가끔은 이런 반복이 답답해서 완전히 바꿔서 해볼 때도 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면 나 자신이 익숙한 감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수없이 루틴을 바꾼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바닐라 라떼.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작업할 때는 반드시 바닐라 라떼를 시킨다. 그건 어느 카페에 가도 마찬가지다. 친구들이 종종 왜 그렇게 바닐라 라떼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냥 당이 떨어져서라고 답하곤 한다. 거짓은 아니다. 하나 그게 이유의 전부도 아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카푸치노나 카페 모카 같은 것을 시켜보기도 했다. 묘하게도 그럴 때마다 작업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할 때 아메리카노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건 이미 작품 내외적으로 쓴맛을 제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쓴맛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을 중화해줄 수 있는 건 단맛 외에 없다. 다른 걸 하나씩 먹어봤을 때, 카푸치노는 덜 달고 카페 모카는 너무 달았다. 내게 필요한 건 적당한 단맛이다. 아직까지 바닐라 라떼만큼 적절한 단맛을 찾지 못했다. 단 음식이 뇌를 활성화하고 인지 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건 지난 세기부터 진행된 수많은 연구에 따라 검증된 사실이다. 뇌는 우리 몸이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소모하며, 그 주요 에너지원은 포도당이고, 혈중 포도당 농도가 적정 수준일 때 기억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섭취하면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킨다고 하니… 내게 적절한 양은 바닐라 라떼 그란데 사이즈(473ml) 정도다. 마감까지 1시간이 걸리든 10시간이 걸리든 나는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양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날씨에 따라 종류는 달라진다. 아이스냐 핫이냐. 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므로 조금만 춥다고 느껴지면 바로 따뜻한 것을 시킨다. 특히 쌀쌀한 한겨울에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딱딱했던 어깨도 조금은 말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닐라 라떼 한 모금은 멍때리기, 인터넷에서 아이쇼핑하기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예열 과정인 셈이다. 카페에 갈 여유 없이 집에서 급하게 마감을 해내야 할 때는 조금 난감하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당을 채울 만한 무엇은 보이지 않고 물이나 이온 음료 혹은 맥주만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때에 술을 마실 순 없으니 물로 목을 축일 따름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대비해 내가 쟁여두는 것이 있는데, 그건 초콜릿이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그런 초콜릿은 아니다. 마트나 편의점을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 초콜릿, 특히 가나 초콜릿을 좋아한다. 다른 초콜릿은 가끔 질리곤 하는데 이상하게 가나 초콜릿만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쌓아놓으면 너무 많이 먹게 될까 봐 딱 두세 개 정도만 냉장고에 넣어둔다. 70g이 든 초콜릿 하나가 나의 하루치 정량이다. 바닐라 라떼가 없을 때 당을 수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바닐라 라떼도 없고 가나 초콜릿도 없다면? 그럼 나는 연신 쓴맛을 보기만 한다. 작업물 내에서 느낀 쓴맛은 중화되지 않고 입 안을 내내 맴돈다. 이온 음료를 마셔도 단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마감 시한이 아니다. 마감 시한이 임박했음에도 나를 도와줄 적절한 단맛이 없는 것이 두렵다. 몰입에 꼭 필요한 부품이 빠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하다 여겨질 수 있지만 바닐라 라떼와 가나 초콜릿이 없는 나는 맨발로 현관을 나서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계속 먹으면 뇌의 보상 회로가 변해 무의식적으로 단 음식을 더 찾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단 음식을 통해서 도파민이 나오도록 시스템이 변화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나는 바닐라 라떼를 원해서 마신다기보단 이미 바닐라 라떼의 노예가 된 셈이다. 이미 나의 뇌와 마음은 작업-바닐라 라떼-마감 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닐라 라떼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하나 아쉬운 건 근래 의사 선생님이 내게 카페인을 줄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럼 저의 작업은요? 저의 바닐라 라떼는요…? 아쉬운 대로 요즘엔 디카페인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있다. 연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 단맛은 다른 음료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글쓰기를 멈추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바닐라 라떼를 끊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구현우(시인)

2026-05-14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건가요

SNS에서 우연히 어떤 이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누군가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처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에게 어떤 감정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런 중립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려면 이처럼 말이 다소 장황해진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면 될 텐데 꼭 싫어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조금 번거롭다. 그와는 오래 전에 만났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지인의 지인이었는데, 술에 취해 목소리가 커지고 말을 조금 경솔하게 내뱉는 느낌이 있었다. 그냥 술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례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부적절한 언사를 여기저기 난사하다 보니 어떤 말은 나를 향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반응하지 않거나 도망을 가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들이 받아버리곤 하던 시절이었다. 무례에 무례로 대응하자 그는 욕을 했고 우리는 고성을 내지르며 다투게 되었다. 지인들이 우리를 뜯어 말리는 수준에 이르자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해가 질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내 지인에게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자기가 술에 취해 실언을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나도 잘 한 것은 아니니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것도 인연인데 소주나 한 잔 하고 친해졌으면 좋겠다며 내게 괜찮은 때를 정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풀었으면 된 것이지 굳이 술 마시고 내게 행패 부린 사람과 또 술을 마시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둘러대고 흐지부지 넘어갔으면 되었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것을 참 못했다. “서로 나쁜 감정은 다 풀었으니 된 것 아닐까요? 굳이 친하게까지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매정하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와는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류하고 지내는 이가 많은 편이다.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이들도 많고 그만큼 챙겨야 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그것을 잘 해내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팽창해버려 내 그릇의 크기를 벗어나버린 내 대인관계가 언제나 버겁다. 그런 판국에 굳이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이와 친하게까지 지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내 마음의 공간을 그에게까지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싫어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이가 나쁘다고 판단해버리곤 하는 것 같다. 어쩌다가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친해지자고 다가오면 나는 때때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든다.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어야 하지 않냐는 사람들, 인간적인 매력을 알 만한 계기조차 없었는데 갑자기 나이를 묻더니 형 동생으로 지내자는 사람들. 결국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 이따금 우연히 카톡에 뜬 서로의 이름을 보며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애초에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서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고,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동한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사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굳이 누가 누구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는 얼마나 편리한가. 오래전 다투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특별히 반갑다거나 아니면 불쾌하다거나 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그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로 지내고 싶었던 내 마음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다. 그가 여기저기 내 험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도 있고, 그에게 내 번호를 알려주었던 지인에게서 왜 굳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었느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좋지 않은 사람과 나쁘지도 않게 지낸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사정이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애써 좋아하거나 싫어할 생각이 없다. /강백수(시인)

2026-05-06

겁 많은 사람

영화 ‘살목지’가 24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손익분기점의 세 배를 넘어선 엄청난 기록이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호러 장르가 흥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 호러 장르의 호황 시기는 여름이지만 지금은 봄이므로 비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러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일까? 나는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서린 귀신, 악령, 유령 같은 존재가 인간을 공격하는 전개로 흘러가는 순간 김이 팍 샌다. 육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존재들은 생전에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 그게 너무 분하고 서러워서 인간들을 홀려 죽음으로 꾀어낸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개는 어떤 장소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물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시끄러운 저수지나 이사 오는 족족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폐가나 다름없는 저택, 과거 공동묘지였다던 학교, 문 닫은 폐병원 등, 귀신이 상주하는 곳은 일반인이라면 쉽게 접근하지 않을,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할 곳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런 곳은 이전에도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갈 생각이 전혀 없다. 평생 방문할 일 없는 곳이므로, 그곳에 사는(?) 귀신들을 만날 일 또한 평생 없으리라 생각하니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겁 없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겁 많은 사람에 속한다. 어둠을 무서워하고, 바퀴벌레와 비둘기를 무서워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과 우울을 두려워한다. 그중에서 제일 두려운 건 무기력과 우울이다. 특히 지금처럼 봄철이 돌아오면, 익숙하고 지겨운 우울감이 나를 깊이 짓누른다. 실제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 봄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봄이 되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현상을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부르는데, 기온과 일조량이 증가해 신체 리듬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봄은 새로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성취에 대한 압박과 대인 관계 변화 등이 사람들을 더욱 우울한 방향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과 의욕이 깨어난다. 나 또한 매년 1월 1일이 되면 한 해의 목표와 버킷리스트를 적어둔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정리하며 올해는 기필코 다르게 살겠노라 다짐하지만, 2월이 지나 3월, 4월, 그리고 봄의 끝물이라 할 수 있는 5월이 되는 순간 좌절에 휩싸인다. 남들은 벌써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데 나만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온 탓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니.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움츠러들고 작아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사계절 중 가장 환하고 활기차며 생명이 움트는 시기인 봄의 뒷면에 이런 그늘이 있을 줄이야.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가 본다. 매점에서 팝콘과 음료를 고르고 화장실에 간 일행을 기다린다. 상영 10분 전이 되면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상영관 안으로 입장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광고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옆 사람과 수다를 떨거나 휴대폰을 본다. 이윽고 상영관의 불이 꺼지면 일제히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 안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오더라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린 안전하다. 사람들이 호러 장르에 매료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불이 켜지고 상영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귀신과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그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이든 간에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그러나 무기력과 우울은 그런 식으로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올봄에는 가족들과 자주 나들이를 갔다. 한강도 가고 식물원도 갔다. 서울 근교로 나가 사람 많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걸었다. 날이 좋다거나 바람이 시원하다거나 같은 뻔한 말도 없이 그저 걸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꽃이 아름다워서 어쩐지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겁 많은 사람답게 꽃을 밟을까 봐, 빨리 걷다 발이 꼬여 넘어질까 봐 걱정하며 걸었다. 그때 나를 앞질러 뛰어가던 강아지가 우뚝 멈춰 서선 나를 바라보았다. 앞서간 강아지가 인간을 돌아볼 때는, ‘여긴 안전하니 와도 돼’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그 얼굴이 너무나 근엄해 보여서 나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겁 많은 사람이 내디딜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으로. /양수빈(소설가)

2026-05-06

인생은 한 턴씩, 보드게임처럼

보드게임은 요즘 가장 즐겁게 빠져 있는 취미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가벼운 놀이로 시작했으나, 한두 번 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단순히 이기고 지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몰입감,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순간들이 꽤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는 여유 시간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소중한 취미가 되었다. 보드게임은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는 점에서 큰 매력이 있다. 보드게임의 꽃이라 불리는 전략 게임은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자원을 관리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규칙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나만의 방식이 생긴다. 어떤 선택이 더 유리한지, 언제 기다리고 언제 과감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되면서 내가 세운 전략이 예상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꽤 크다. 추리 게임은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거나, 어딘가에 갇힌 상황에서 단서를 모아 방을 탈출해야 하는 이야기들은 늘 흥미롭다.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조각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전체 그림이 보이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또, 방탈출형 스토리 게임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직접 완성해간다는 점에서 더 큰 몰입감을 준다. 보드게임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생각보다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들도 많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원하는 카드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고, 예상하지 못한 주사위 결과 하나로 게임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반대로 큰 기대 없이 던진 한 번의 선택이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보드게임은 늘 계획과 우연이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있다. 우리네 인생도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만 모든 결과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좋은 타이밍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 앞에 멈추기도 한다.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보드게임은 가끔 모든 것을 다 내 뜻대로 할 수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모바일 게임과 비교했을 때 보드게임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직접 손으로 만지고, 상대방과 마주 앉아 함께 한다는 점이다. 카드를 넘기고 말을 옮기고, 상대의 표정과 반응을 읽으며 진행되는 과정은 훨씬 더 생생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이야기하는 모든 감각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참여하게 되고, 그 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와 가까워진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색했던 사람도, 같은 규칙 안에서 웃고 고민하고 작은 실수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대화가 이어진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위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이기고 질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보며 그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된다. 평소의 대화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성격이나 취향이 게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한 판을 마치고 나면, 그 시간만큼 서로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요즘 보드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잘해야 한다’보다 ‘끝까지 생각하고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더 집중했지만, 여러 번 게임을 하다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흐름을 읽고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불리한 상황처럼 보여도 한 번의 선택으로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문제들도 결국 비슷하다. 당장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계속 부딪히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더 나은 선택을 찾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과감하게 새로운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완벽한 상황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순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삶의 문제 앞에서 너무 조급해하거나 결과만 바라보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완벽하게 해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얼마나 진심으로 참여하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갔는지이기 때문이다. 한 턴씩 차근차근 자신의 속도로 인생이라는 게임을 즐기다 보면, 결국 내 삶이라는 게임에도 더 큰 애정이 생기지 않을까. /윤여진(시인)

2026-04-29

밤을 쓰고 싶지 않아

대부분 나의 작업은 해가 진 이후에 이뤄진다. 어둠 속에서 조명을 켜고 모니터의 빛과 함께 밤을 이겨내곤 한다. 어떻게든 마감을 끝낸 뒤 창밖을 보면 먼동이 트며 세상이 눈을 뜨고 있다. 모두가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나는 잠에 든다. 내가 밤에 일한다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역시 새벽 감성으로 쓰나 봐!”한다. 어떤 의미로는 보편적인 작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나도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 정말로 나는 밤에 일하고 싶지 않다. 피곤하기도 하고, 새벽 감성 또는 밤이 주는 영감이란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뇌도 일하기 싫은 시간일 텐데 머리도 안 돌아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내가 헛것을 본 거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단순하다. 낮에 시작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까지 끝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은 할 수 없어도 정해진 패턴이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오랫동안 그 패턴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작품 하나를 쓰고 나서도 부족한 면이 자꾸 보여서 붙잡고 있기 일쑤다. 나를 옭아매는 지독한 강박으로부터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그런 밤 생활의 영향이 몸으로 오는 것 같다. 피부에 자꾸 트러블이 난다.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머리가 무겁다. 물리적인 피해가 커지기 시작하자 내 안에서 비상 신호가 울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이렇게 살다간 골로 갈 거야. 더군다나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아프다. 마감 하나를 끝내도 내부에 쌓인 우울감과 피로감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정말 이대로는 곤란하다. 가벼운 것부터 실천해 보기로 한다. 해가 중천에 떠 있기 전에 눈을 뜨는 것. 그리고 암막 커튼을 걷는 것.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빛을 차단해 왔다면 이제는 빛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다. 다음은 씻고 컴퓨터 앞에 앉지 말고 바로 나갈 것. 이른 시간에 카페든 도서관이든 작업실이든 향해야 한다. 나의 방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방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 감각을 제법 잃어버린다. 오후 두 시든 새벽 두 시든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시간이 흐를 따름이다. 그걸 바꾸려면 방법은 하나다. 빛이 있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실용적인 일이 바로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빛 사이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꽤 중요하다고 느낀다. 당장 뭐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스스로 환기가 되는 기분이다. 밤에는 잠들어야 하니 커피 대신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마신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 문서로 한 번 정리하고 나면 하루의 윤곽이 조금은 보인다. 다음날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오늘치 일을 빨리 끝낸다고 해서 다음날 일을 미리 건드리는 건 에너지의 과용이 될 수 있다. 내일도 같은 에너지로 해낼 수 있단 보장이 없으니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만큼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이때 쓰는 것은 작품이 아니다. 일종의 가벼운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불과하다. 문장을 정돈하지 않는다. 단어를 고르지 않는다. 그랬다간 생각이 감속하고 만다. 거의 무용한 것들로 페이지가 채워지더라도 그렇게 한다. 폴 발레리의 말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작품을 결코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 그 말대로 나는 포기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다. 이게 더 좋은 대안은 아니었을까? 이런 고민은 내일로 미룬다. 생각이 많아지면 다시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작품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오늘 완성될 운명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포기한다.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꺼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의 노력은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여러 마감이 하루에 겹친 탓이다. 낮에 시작했지만 저녁에 전부 끝낼 수는 없었고 다음 낮을 보고서야 마감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변명이다. 미리 시간 배분을 해서 우선순위대로 착착 처리하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낮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났어. 나 자신에게 이런 변명만 하고 있다. 밤의 생활이 계속된다는 게 무섭다. 무섭게도 이 칼럼 또한 밤에 쓰고 있다. 칼럼을 끝낸 후에는 바로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다. 자고 일어나서 하고 싶지만 마감이… 마감이 아침까지다. 지금 잠들면 그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내일까지만 이렇게 하고 모레에는 다시 낮에 일해야지. 아마도 이 계획은 또 금방 실패할 것이다. 작심삼일이어도 좋다. 밤과 내가 친해지지 않을 때까지 이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낮의 빛이 언젠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으면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4-29

오래된 것, 밝은 것, 하얀 것

새벽 4시 30분, 정류장 벤치에 앉아 공항버스를 기다렸다. 이르다고 해야 할지, 늦었다고 해야 할지 모를 모호한 시간이었음에도 거리에 차가 제법 많았다. 아직은 가벼운 캐리어를 끌어안고 꾸벅꾸벅 조는 사이 점차 정류장에 사람이 모였다. 사람들의 얼굴에 머문 기대감과 설렘 덕에 우리가 모두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목적지가 같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버스는 예정된 시각에 도착했다. 일행과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을 눈으로 훑으며 우리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삿포로에서 5일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삿포로는 눈에 의한, 눈을 위한 도시였지만 우리의 목표는 눈이 아니었다. 나에게 눈이란 여행지를 조금 더 여행지답게 만들어주는 작은 요소일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여행을 떠난 3월 말에는 새하얗고 부드럽기로 유명한 삿포로의 눈은 다 녹아 없어진 후였다. 우리의 목표는 학교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학교였지만, 일행에겐 중요한 장소. 일행이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는 스미카와라는 작은 동네에 있었다. 스미카와역은 삿포로역에서 지하철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한적한 역,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거리. 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일행은 들뜬 듯 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일행을 따라 주택과 작은 카페뿐인 동네를 걸었다. 이토록 사람이 없는 거리라니, 나는 점점 고양되어 팔다리를 힘차게 휘저으며 도로를 행진했다. 그러다 작고 귀여운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머니 한 분을 맞닥뜨렸다. 카와이, 내가 감탄하자 할머니는 무어라 일본어로 내뱉고는 조용히 멀어져갔다. 뭐라고 하신 거야? 일행에게 묻자 일행은 웃으며 대답했다. 강아지가 사람과 친하지 않아 미안하대. 학교 건물은 내 생각보다 더 작고 아담했다. 나는 일행을 건물 앞에 세워두고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외부인은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우리는 어색하게 건물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건물을 촘촘히 쌓아 올린 벽돌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일행이 그 학교에 다녔던 시절 품고 있던 외로움에 대해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눈 쌓인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여러 번 꺼내놓았기 때문이다. 낯선 동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그 낯섦이 오히려 어떤 위안이 되어주었다는 것도. 한참 건물을 올려다보던 일행이 이제 됐다고 말했다. 다 봤어? 다 봤어. 나는 앞서가는 일행 뒤에서 몰래 건물 사진 한 장을 더 찍었다. 이른 시간이었던 터라 동네에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다. 동네를 배회하던 우리는 근처에 뮤지엄 액티비티라는 화석 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범해 보이는 입구와 달리 내부에는 거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전시실 안쪽에 자리한 거대한 화석이었다. 데스모스틸루스. 일행이 안내판에 적힌 문구를 소리 내 읽었다. 약 1300만 년 전 신생대 바다에서 살았던 해양 포유류. 데스모스틸루스라는 이름은 ‘결속된 기둥’이라는 뜻이었다. 이빨 구조가 여러 개의 기둥을 묶어놓은 듯 독특한 구조여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는 느긋하게 센터를 돌아다니며 각종 화석과 표본들을 구경했다. 연구실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거운 책을 옮기거나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관찰했다. 관람객은 일행과 나뿐이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일에만 집중했다.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 사람들. 나는 그들을 몰래 바라보았다. 거대하고 화려한 화석보다도 그들의 모습이 더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우리는 천천히 센터를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화석 센터에 기념품이 없던 걸 연신 아쉬워했다. 손에 쥘 수 있는 게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계속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일행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을 떠난 후에도 늘 스미카와에서의 시간을 기억했고, 마침내 다시 찾아왔다. 나는 그때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일행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그곳을 찾았다. 결속과 기둥.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름이 계속 떠올랐다. 3월 말 삿포로에는 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이곳에도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행의 기억 속 외로움도, 자전거를 타고 언 도로를 달리던 감각도. 오래되고 밝고 하얀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남는다. 손에 쥘 수 없어도. /양수빈(소설가)

2026-04-22

숨 쉬듯 무례한 사람들

친구가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줬다. 처음 만난 그는 내게 만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엄청 무섭게 생기셨네요” 라고 했다. 그런 말에는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제가 좀 무섭게 생겼습니다” 하고 너스레를 떠는 것도 좀 우습고, “무섭게 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그 후에도 내 외모에 대해 몇 마디 더 했고 나는 그와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에 기분이 상하지는 않는다. 이 얼굴을 좋아해주는 사람과 연애를 했고 결혼까지 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처음 보는 상대의 외모가 어떻네 이야기 하는 것이 교양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는 초면에 내게 자신의 교양 없음을 드러낸 것이고 나는 그것을 통해 그의 영리하지 못함을 감지했다. 나 역시 마냥 영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 말을 섞고 관계를 쌓는 일은 재미없고 피곤한 일이다. 숨 쉬듯 무례한 사람들이 참 많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실례 되는 말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말한 ‘얼평’이다. 사실 나는 누군가에게는 다소 거칠어 보일 수도 있는 외모를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은 무례한 일을 별로 안 당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별로 섬세해 보이지 않는 탓인지, 누군가의 악평, 비난, 놀림에 무신경할 것 같아 보이는 탓인지 자기가 그렇게 말해도 별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해서 오히려 더 쉽게 그런 말들을 한다. 얼굴이 크다, 뚱뚱하다, 깡패 같다 등등. 별 콤플렉스가 없고 무신경하기도 해서 다행이긴 한데 문득 이런 생각도 들곤 한다. ‘내가 그런 것에 민감하고 상처 받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가까운 내 친구들이야 그런 말을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내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도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 같은 것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 성격을 완전히 파악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면 그런 말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부주의한 것이 아닌가. 또 다른 종류의 무례함으로는 ‘오지랖’이 있다. 두 돌이 되지 않은 아들과 길을 나서면 별 소리를 다 듣는다. 최근에는 놀이터에서 모르는 할머니들한테 호통을 몇 번 들었다. 아들은 아직 위험한 것과 안전한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가끔 위험한 것을 만지려고 떼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아들을 안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한다. 그런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잘 걷고 뛰는 애를 안고 다닌다고 소리까지 치며 나무라는 할머니들을 우리 동네 놀이터에서만 세 분 만났다. 자기들이 키워주지도 않을 둘째를 낳으라는 말과, ‘딸 하나는 있어야지’와 같은 말은 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무릎을 탁 치며 “그렇군요! 둘째를 낳아야겠습니다! 반드시 딸을 낳아야겠군요!”라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의도치 않게 ‘오지라퍼’들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이 하는 말들을 충고라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충고는 할 만한 사람이 들을 만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이가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듣는 이가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는 이는 듣는 이에게 진심어린 애정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듣는 이가 하는 이를 존중하는 마음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요건이 갖추어져도 어디까지나 충고는 할 수 있는 것이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안 하는 것이 나은 경우가 더 많다. 타인이 보기에 개선해야 하는 문제라면 본인도 그것이 문제임을 진작에 깨닫고 있을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개선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개선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굳이 오지랖을 부리지 않으면 내가 몸져 누울 것 같은 상황이라면 세 가지는 자문하고 충고를 했으면 좋겠다. 즉각적으로 개선 가능한 문제인가? 듣는 이의 기분을 충분히 고려하는 방식으로 말을 골랐는가?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내 기분이 상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소통이 부족하다고 이야기 하는 시대다. 그러나 무례와 불필요한 오지랖을 소통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고, 그것이 설령 소통이라 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소통을 하느니 차라리 불통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롭지 않을까. 조상들이 놀라운 통찰을 담아 남긴 한 문장으로 이 글을 맺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강백수(시인)

2026-04-22

요즘 한 생각들

언젠가부터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 애썼다. 예전에는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혹시라도 불편해하지 않을까 신경 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필요하다면 내 쪽을 조금 희생하는 것도 배려라고 믿었고, 그렇게 해야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순간들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배려를 했는데 돌아오는 상황은 오히려 내가 기분이 상하거나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싶었지만, 같은 흐름이 계속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결국 내가 놓치고 있었던 건 정작 나 자신을 제대로 배려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조차 나를 먼저 존중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더 배려하려 했던 건 모순에 가까웠다. 그 이후로는 대화에서도, 관계에서도 한 발짝 물러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감정 이입을 하거나 나를 소모시키는 방식 대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지키려 했다. 그러자 오히려 대화가 더 편해졌고 관계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잘 맞추느냐가 아니라, 서로의 거리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계를 지켜내기 위해 나를 먼저 소모하는 방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조금씩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생각과 연달아 두 번째로는, 나를 좀 더 아끼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배가 고플때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간편한 음식들을 선택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번거롭더라도 직접 만들어 먹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간단한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더라도 내가 식재료를 고르고, 어떤 재료들이 들어가는지 눈으로 확인하며 먹을거리를 만든다. 직접 요리를 한다는건 단순히 식사를 한다기보다 나를 위해 한 끼를 공들여 준비하는 감각에 가깝다. 과정은 번거롭고 시간도 더 들지만 그만큼 나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정성스러워졌다. 몸은 여전히 피로할 때가 많지만, 이런 작은 습관들이 쌓이면서 스스로를 대하는 기준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세 번째는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장에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피티를 받으며 배웠던 동작들을 떠올리고, 어느 부위에 힘을 줘야 하는지, 호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짚어가며 반복한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만 바라보며 같은 동작을 이어가는 순간, 흐릿했던 내가 다시 또렷해지는 기분이 든다. 하루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아닌 시간이나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지나가는데, 운동하는 동안만큼은 그 모든 것에서 잠시 벗어난다. 몸의 변화는 크게 눈에 띄지 않더라도, 기력이나 컨디션이 달라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있다’는 감각이 가장 크게 남는다. 결국 운동은 단순히 몸을 위해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라, 흐트러진 나를 다시 붙잡아주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지자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기분이 좋거나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걸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에게도 그렇고,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정을 말로 꺼내는 순간 그 기억은 훨씬 선명해진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나를 더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좋은 일이 생기면 괜히 들뜬 마음을 눌렀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일부러 들뜨지 않으려 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면서 현재의 감정을 줄일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젠 좋은 순간이 찾아오면 그걸 충분히 느끼고 표현하고 기억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것들에도 더 자주 반응하게 된다. 상대방의 작은 변화, 지나가는 풍경, 계절의 흐름 같은 것들이 예전보다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 장면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말로 꺼내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자연스럽게 달라지고 있다. 마치 하나의 장면을 여러 개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다양한 감정과 순간들이 쌓이고 있다. 요즘 내가 자주 하게 되는 생각들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그 생각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나를 더 잘 돌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고, 그 변화가 크지 않더라도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윤여진(시인)

2026-04-15

전자기기 브레이커

유독 물건을 잘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 잉크가 반 이상이나 남은 볼펜을 못 쓰게 만드는 사람. 신발 한쪽 밑창만 빨리 닳게 만드는 사람. 스마트폰, 컴퓨터 장비, 라디오와 같은 전자기기를 손만 대면 고장 내는 사람. 그 모든 게 나지만 전자기기를 무력화시키는 일에 있어선 특히 권위자에 가깝다. 마감을 위해 타자를 치다가 키보드 자판이 하나씩 안 눌리기 시작하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내가 너무 우악스럽게 누르는 걸까. 어떻게 조금 전까지 잘만 작동하던 ‘ㅇ’이 나의 신호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단 말인가. 한숨을 쉬며 다른 키보드를 가져온다. 새로 가져온 키보드는 곧, ‘ㅏ’와 ‘ㅜ’가 입력되지 않는다. 저주받은 손가락이 따로 없다. 온갖 기기 중에서도 내가 가장 잘 고장 내는 건 이어폰이다. 나는 나의 특성을 알았기에 비교적 싼 이어폰을 사서 쓰다 한쪽이 안 들리면 바로 똑같은 제품의 새것을 사서 쓰곤 했다. 짧게 쓰면 한 달. 오래 쓰면 석 달이었다. 혹시 자연히 고쳐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버리지는 못해 내 책상 서랍에는 한쪽이 묵묵부답인 이어폰으로 가득했다. 이것의 왼쪽과 저것의 오른쪽을 결합하면 완벽한 이어폰으로 다시 태어날 것 같은데. 그들이 스스로 움직여 합체할 리가 없었고, 내게 그들을 매만질 기술도 없었다. 고장 난 이어폰의 개수가 10개를 넘어갈 무렵 나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나의 손길에 따라 망가진 게 아니라 이어폰의 수명이 짧을 운명이었을 뿐이라고. 그런 내가 크게 마음을 먹고 값비싼 이어폰을 지른 적이 있다. 무려 80만원이나 하는 슈어 사의 제품을 구매한 것이다. 슈어 사의 제품 중에서는 그다지 비싼 편이 아니지만 내게 이어폰 하나의 가격으로는 너무 과했다. 원래 쓰던 게 5만원 내외였으니 80만원이면 그걸 적어도 15개는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계속 좋지 않은 이어폰을 쓰는 것도 아니다 싶었고, 비싼 거니까 튼튼할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AS도 가능하다고 해서 오래 쓸 마음으로 구매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순간부터 정말 값어치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사용한 첫날부터 완전 극락이었다. 내 영혼의 뮤지션인 다프트 펑크, 자미로콰이, 레드핫칠리페퍼스의 음악과 그제야 제대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이전까지 내가 들었던 건 음악의 외연에 불과했다. 여기에 이런 소리가 있었단 말야? 역시 좋은 게 좋았다. 그러나 모든 행복에는 끝이 있었다. 일 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한쪽이 먹통이 된 것이다. 매번 케이스에 고이 넣어서 보관했건만. 줄도 꼬이지 않게 열심히 풀어주었는데. 정말 내 손에서 마이너스 전파라도 나오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슈어사의 이어폰만은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이어폰 수리를 위해 인터넷에 알아보니 해당 파츠가 한국에 없어 미국 본사로 연락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여기서 1차 좌절. 영어로 내 이어폰 상태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찾아보는 도중 마우스 왼쪽이 눌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예비 마우스도 없을 때였다. 여기서 아주 큰 2차 좌절. 나는 실소를 머금고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기를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슈어사 이어폰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로 서랍에서 한쪽만 기능하는 수많은 이어폰과 함께 뒹굴고 있다. 검색해보니 이제는 한국에서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인지 의욕이 꺾였다. 내 손에 쥐어진다면 또 얼마 못 가서 망가질 거란 예감이 든다. 불행하게도 슬픈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어제부터는 소니사의 헤드폰과 KRK사의 스피커가 동시에 노이즈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더는 그들의 수명이 거기까지란 말로 치부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 잘못이다. 기계에게는 잘못이 없다. 내 손이 닿지 않았다면 나와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주 오래오래 잘 살았을 거다. 정성을 다해 관리하지도 않았으니 내 손을 탓할 필요도 없다. 내 손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기계 세계의 내부 커뮤니티가 있다면 나는 아마 엄청난 악명을 떨치고 있을 터다. 쟤 손에 들어가면 죽는대- 같은. 다가가면 안 되는 위험하고 불결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오해가 아닌 진실이므로 나로서는 딱히 여론을 뒤집을 만한 변명거리가 없다. 맞아. 내가 죽였어. 이런 드라마나 영화 속 악역의 대사나 다름없는 말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칼럼을 쓰는 와중에 백스페이스가 고장난 키보드 대신 쓸 만한 키보드를 인터넷에 알아보고 있다. 미안해. 또 죽이고 말았어. 나의 기계였던 아이들은 저승에서 철퇴를 들고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구현우(시인)

2026-04-15

부정적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참 아끼는 동생이 한 명 있다. 의리가 있고 언행이 솔직해서 여러모로 믿음이 가는 동생이다. 그런데 그에게 딱 하나 고쳐지지 않는 단점이 있다. 바로 시간 약속의 문제다. 그는 항상 늦는다. 적게는 일이십 분, 많게는 한두 시간까지 늦어 주변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그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나와의 사적인 약속에 늦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지만 그가 아주 중요한 약속에서 늦는 바람에 낭패를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항상 갖고 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자신도 그런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는데,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충고하는 것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마디 했다. “넌 지나치게 긍정적이야.” 그가 나와 오후 두 시에 시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상황이라고 상상해보자. 그의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로 30분을 가서 버스로 갈아타고 30분을 가면 시청에 도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그것을 한 시간 거리라고 생각하고 한 시에 집을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계산이다. 한 시간 만에 그가 도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순간이동을 해야 하고, 역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지하철이 도착해야 하며,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해서 문이 열려야 한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교통체증 같은 것도 절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변수는 언제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고 때때로 최악도 일어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작은 일이 하나 생길 때마다 도착시간은 몇 분 씩 지연되고 그것들이 더해져 한 시간 두 시간을 늦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데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지금은 조금 덜 해진 것 같지만 온 세상이 ‘긍정’이라는 말에 미쳐있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책들이, 당시 티비속에서 ‘긍정! 긍정!’을 외치던 어느 예능인처럼 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유행이 다소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부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는 불만과 걱정이 많고, 세상 사람들과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긍정 일변도의 사고는 일종의 마취제다. 걱정과 불안은 확실히 삶을 괴롭게 하는 일이고,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확실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마취제에는 어떠한 치유효과도 없다. 상황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저 긍정을 외치며 고통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환부가 곪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기보다는 마취제로 버티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통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고, 아니면 애초에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부정적인 사고는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를 인지하고 이것이 심화되었을 때 내가 겪게 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빠르게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부정적인 사고다. 행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를 미리 염려하여 그 가능성을 낮추는 것도, 아니면 그것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부정적인 사고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덕분에 나는 보다 원활하게 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먼 지역에서 공연이 잡혔을 때 최악의 교통상황을 상상하고 여유롭게 출발하거나 전날 미리 현장 근처에 숙소를 잡고 잠을 자는 것, 혹시나 공연장에 갖추어져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장비를 미리 여분까지 넉넉하게 챙기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지켜준 횟수가 꽤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성향이 처음부터 내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긍정이 안일함이 되는 바람에 박살 나 본 경험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게 준 소중한 가르침이다. 긍정과 부정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단어만 보면 ‘긍정’이 긍정적이고 부정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엇이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매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동생의 태도가 부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 나를 지켜준 부정의 가치를 믿는다. 그에게도, 내게도 둘 사이의 균형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길 바란다. /강백수(시인)

2026-04-08

영원 같은 잠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스포를 일부 포함하고 있음을 알린다. 최근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았다. 두 시간 반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인상적인 장면이 꽤나 많았지만,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잠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그레이스(인간)와 로키(외계인)의 첫 만남 후, 로키는 잘 자라는 그레이스의 인사에 자는 모습을 지켜봐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니, 인간의 관점에선 다소 소름 끼치고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레이스도 같은 이유로 로키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로키는 진지하게 덧붙인다. 잠들었을 때는 위협에 대비할 수 없으므로 서로 지켜봐 주는 거라고, 지켜봄으로써 지켜주는 거라고. 이들은 영화 내내 가까이에서 잠을 자며, 서로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또 지켜봐 준다. 그레이스의 지친 잠을 로키가 지켜주고 로키의 영원 같은 잠을 그레이스가 지켜준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잠’은 필수 요소이다. 포유류 중에 가장 잠을 적게 자는 것으로 알려진 코끼리바다표범도 하루 두 시간은 숙면을 취해야 한다. 물론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처럼 수면 시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생물도 있지만, 대부분의 생명체에겐 길든 짧든 일정한 수면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몸은 재정비에 돌입한다. 과학적으로 수면은 뇌와 신체를 회복시키는 시간이다. 수면 중의 뇌는 깨어 있는 동안 쌓인 노폐물을 내보내고, 기억을 정리한다. 우리의 몸은 세포를 재생하고 면역 체계를 강화한다. 잠은 집중력과 기억력이 상승하며 스트레스가 완화될 뿐만 아니라 각종 성인병과 질환을 예방해주는 효과까지 있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활발한 우리의 몸과 달리, 잠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꿈을 꾸기도 하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 그저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 머물기도 한다. 의식은 사라지고 자아는 희미해진다. 잠이 우리의 의식을 꺼트리는 일이라면, 그 시간에 우리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어린 시절 대부분의 인간은 홀로 잠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모는 아이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 옆에서 잠을 청하거나, 아프고 병든 이의 잠을 지켜준다. “잠든 모습을 지켜본다”는 로키의 말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잠을 지켜보며 살아온 것이다. 영화 말미에서 로키는 그레이스를 구해주다 큰 부상을 입고 영원과도 같은 긴 잠에 빠진다. 로키의 잠자는 모습은 꼭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얼굴도 없기 때문에, 그레이스는 로키가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깨어날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레이스는 묵묵히 잠든 로키의 곁을 지킨다. 연구하고 알아낸 것들에 대해 들려주면서 로키가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그레이스는 이제 로키가 부탁하지 않아도 로키의 잠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잠자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 그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당신이 건강하지 않아도, 기쁘지 않아도, 그 어떤 상태일지라도 함께하겠다는 가장 조용하고 깊은 형태의 언어. 나의 무방비한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고, 또 상대의 무방비한 모습을 기꺼이 지켜보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는 신뢰이자 다정한 행위. 그것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일 거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잠들고 또 잠에서 깬다.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의식이 점차 흐려지다가 마침내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소리를 비롯한 감각이 차단되고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다행히 내게도 그 시간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그 사람의 잠을 지켜본다. 가장 무방비하고 연약한 순간을 지켜본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잠들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시간에 깨어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잠든 동안 나는 지독한 불안과 고독감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장 약한 모습을 지켜보려면 반대로 나는 가장 강해져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외롭지 않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원에 가까운 잠일지라도. /양수빈(소설가)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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