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여행을 떠난다. 사실 이주 전쯤 급히 계획한 여행인지라 갑작스레 떠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이왕 떠나는 여행, 그간 가고 싶었던 교토로 가기로 했다. 이 년 전 방문했던 교토의 여름은 뜨겁고 습했지만 아름다웠다. 오래된 담벼락과 새파란 하늘, 좁은 골목과 고택, 사이사이의 기찻길 등 마주하는 곳마다 오래된 것들이 많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한 풍경이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단 점이 무척 경이롭게 느껴졌다.
나는 일본의 소도시에서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며 내가 지금 어떤 걸 위해 살고 있고, 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끝마치기 위해 간다. 하루하루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책상에 앉아 비슷한 업무를 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잠자기 전까지 생각하는 것도 잠이 드는 자세도 모든 게 똑같은 하루. 비슷한 굴레 속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짜증과 화를 삼키고 있다.
급작스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황까지 미처도 그저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고, 출근을 해야 하고, 정해진 업무가 있기 때문에 묵묵히 일을 한다.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고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고, 흔들리고, 또 단순한 것에 마구 웃어버리는 요지부동의 날들. 모두가 이렇게 산다면서, 모두가 비슷한 힘듦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의미 없이 도망을 치다보니 내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퍽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많다면 많고 적으면 적은 나이. 어떤 이는 내게 새로운 도전은 너무나 늦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아직 한참 좋을 나이이기에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응원한다는 말을 한다.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않아야 할테지만 나는 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좋아하는 게 없어서 무슨일을 할지 모르겠는데, 어떡하죠? 말을 꺼낼 때마다 나보다 더 듣는 이가 난처해한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는 것도 언제부턴가 편하지 않다. 집은 계속 살아가는 곳이기에 해결해야 할 집안일, 이메일 확인, 생활비 걱정 같은 현실적인 부담들이 언제나 쌓여있다. 우리 뇌는 매일 반복되는 환경과 자극에 익숙해지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그 자극들을 ‘자동모드’로 처리한다고 한다. 이러한 뇌의 습관적 패턴은 우리가 매일 걷는 출근길의 행동을 자동으로 수행하면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아끼고, 더 중요한 자극에 집중할 준비를 한다. 이러한 습관적 패턴이 많을수록 일상은 단순해지고 생각은 간결해진다. 익숙한 패턴 속에 갇히는 순간부턴 새로운 생각이나 깊은 사유, 내면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 속 자기연민에 호되게 빠져 있다면, 호기롭게 쇼파에서 몸을 박차고 일어나 ‘때가 되었군’ 생각해야 한다. 잠들어있던 여권을 깨우고, 캐리어의 먼지를 닦고, 가장 요란스러운 네임택을 캐리어에 달고선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지를 찾는다. 더는 지체 없이, 더 많은 인지 자원을 사용하기 위해 뇌를 깨워야만 한다.
여행은 일하지 않는 상태를 선언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 아닌, 삶의 방향과 속도를 조정하기 위해 택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맞는 것인지, 현재 나에게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는 늘 삶의 방향을 정하기 전, 답답할 때마다 여행을 떠났다. 처음은 집 근방의 작은 소도시들, 그리고 점차 나아가 기차를 타면서 처음 들어보는 도시들을 골라 누볐다. 혼자 하는 여행은 때로 위험했고 외롭고, 맛있는 걸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열망과 집요함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정말 내가 원하는 선택을 끝끝내 했고, 끝까지 행하면서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삶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꿈과 일상은 다른 것이라고 누군가 선을 딱 그으며 말해도 결국 내가 나의 삶을 결정하고 정의해야 하기에 또다시 중요한 여행을 앞두고 있다.
다가오는 가을엔 하프 마라톤을 뛸 것이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속력이다. 단거리처럼 순간적인 속도가 아닌 오랜 시간 꾸준히 달리는 힘이 필요하기에 체력과 페이스조절이 핵심이다. 체력과 페이스조절을 하기 위해선 우선 같이 뛰는 라이벌들이 아닌 나의 호흡과 마음가짐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빨리 달린다면 후반에 지쳐버릴테고 너무 느린다면 제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기르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힘은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 때론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낯선 곳까지 찾아가 ‘나’를 집중하다 보면 결국 지금보다 훨씬 편안함에 이르를 수 있지 않을까?
/윤여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