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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5월의 토마토

집 냉장고엔 토마토가 가득 쌓여 있다. 후덥지근한 한낮, 창문을 열어두고 커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토마토를 먹는 건, 내게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토마토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설탕과 물을 넣어 간 토마토 주스도 좋고, 알룰로스 시럽과 설탕을 토마토 위에 솔솔 뿌린 토마토 무침, 또는 사이다에 토마토와 바질을 넣어 숙성 시켜 마시는 토마토바질 에이드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간식은 물론 계란과 토마토, 약간의 소금 후추를 넣어 금세 만들어 내는 토마토 계란 볶음, 발사믹 소스로 절여 만드는 토마토 마리네이드까지 근사한 식사로도 활용해 먹을 수 있으니 이맘때의 토마토는 냉장고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초여름이 되면 어쩐지 어린 이파리가 몸속에 자라는 듯 파릇한 기운이 돈다. 연두빛을 띄던 식물들이 점점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왠지 나도 따라 마음이 짙어 진달까. 마음의 여린 부분을 쥐고 하늘하늘 흔들리다 외부 충격에 휘청일 때면 달콤한 토마토로 기분을 달랜다.초여름의 토마토의 맛은 달콤하기보단 새콤함에 가깝다. 토마토를 반달 모양으로 조각내어 한 입에 넣고, 단단한 과육이 물러질 때까지 꼭꼭 씹으면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입 안에 퍼진다. 달콤함과 약간의 짠 맛이 혀에 감도며 감칠맛을 이끌어 낸다. 연한 속살은 씹을수록 시큼함과 함께 풀내음이 난다. 연하게 맴도는 풀내음 덕에 더욱 초여름과 어울린달까.토마토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으로는 하루 1시간씩은 달리기를 꼭 하는 것이다. 사실 겨울 내내 추위를 핑계로 운동을 미뤄왔지만 근래 들어선 주에 4번씩은 기본으로 하고 있다. 운동이라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무작정 런닝 머신에 올라가 뛰는 게 전부지만, 외투가 젖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뜀박질을 하고 나면 토마토가 맛은 더욱 배가 된다.한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동력 또한 토마토에서 나온다. 미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의 질주를 택하기보단, 십오분 뒤 차가운 토마토 먹는 것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달리는 편이 효과가 좋다. 화끈화끈해진 얼굴을 감싸 안으며 집에 돌아와 찬물로 씻고 먹는 토마토의 맛이란! 이제 막 냉장고에서 꺼낸 달콤한 토마토의 맛은 다시금 세상을 너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동글동글한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요즘 루틴 중 하나는 자기 전, 감사 일기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면 작고 소소한 감사한 것들이 많은데, 자꾸만 부정적인 몇몇 가지의 이유에 치여 감사함을 잊고 지낸다. 부정적인 이유를 커다랗게 생각하여 하루의 끝에 침울해 있기 보다는, 전력 질주 후 토마토를 먹는 것과 같이 소소하게 이루어 내는 작은 행복들에 집중하며 일기를 쓴다.일기를 쓰면서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잘 흘러가고 있고,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함을 똑같이 되갚아 주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다. 의외로 생각 정리가 잘 되어서 요즘 기록하는 습관의 힘에 대해 다시금 놀라고 있다.지금은 해가 들어오는 시간, 식물을 황급히 창문 앞에 두어 빛을 받게 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잎을 슬쩍 본다. 지금 집 안엔 그리 시끄럽지 않은 음악이 떠다니고, 바깥은 간간이 들려오는 차 소리 이외에 큰 소음이 없어 적적한 기분이 든다. 이 시간 불쑥 찾아오는 외로움은 늘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그래도 그 외로움 끝에 단단한 힘이 있음을 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불현듯 성경책의 등을 쓰다듬다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떠올린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문장의 행이 8번 반복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라는 문장으로 마무리 되는 시. 외로움은 슬픔을 동반하고 슬픔을 멀리 하려 할수록 그림자와 같이 더는 도망갈 수 없다. 피부 깊이 새겨진 외로움을 속옷처럼 입혀진 상태로, 더 내밀해진 영원의 슬픔으로 향한다. 영원의 슬픔 끝엔 정말 복이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내게 누군가는 기도를 해보라고, 또다른 누군가는 나를 측연하게 여기며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나를 알 수 없는 허공의 눈동자로 물끄러미 보기도 한다. 그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지만, 생과 외로움이라는 거대함에 대해 더 생각하기보단 지금 당장 일어서서 생생한 감각으로 달리고, 기록하고, 토마토를 먹으며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것이 지금 내게 큰 도움이 되는 일임을 안다.짙은 초록과 열기로 들끓는 계절, 여름이 와도 붉게 익은 한 알의 토마토처럼 단단해지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얗고 깨끗한 집,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먹는 토마토의 맛, 식물과 함께 나란히 광합성을 하며 오월의 시간을 느리게 느리게 되감고 있다.

2024-05-06

자본의 영화화, ‘범죄도시 4’

영화 ‘범죄도시 4’의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범죄도시4’가 개봉 일주일만에 600만 관객을 모았다. 한국영화는 곧 상반기에만 두 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된다. 인구 5000만 나라에서 천만 영화가 몇 편씩 나오는 건 기현상이다.‘파묘’는 최소한 상도의라도 있었다. 전국 상영관 점유율이 50퍼센트였다. ‘범죄도시4’는 해도 너무하다. 개봉일부터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약 2861개 스크린에서 1만 5851회 상영하며 상영점유율 82퍼센트, 좌석점유율 85.9퍼센트를 찍었다. 관객들은 선택권을 잃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정순’은 전국 3개 스크린에서 총 관객 3438명, ‘땅에 쓰는 시’는 7개 스크린에서 8549명, ‘여행자의 편지’는 13개 스크린에서 5260명이 봤다.한국에선 영화가 자본주의의 꽃이다. 시장의 영업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다양성 없는 독과점은 전체주의다. ‘범죄도시4’는 재밌는 영화일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한 편의 재밌는 영화를 띄우려고 여러 편의 좋은 영화를 가라앉히는 것은 폭력이다.‘범죄도시’의 알파와 오메가인 마동석은 한국에 ‘리썰 웨폰’이나 ‘다이하드’ 같은 액션 프랜차이즈를 정착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 영화들도 황소개구리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영화 생태계를 말살시켰을까? ‘리썰 웨폰2’와 ‘다이하드2’가 개봉한 1989년과 1990년엔 ‘레인맨’, ‘나의 왼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 ‘7월 4일생’이, ‘리썰 웨폰3’가 나온 1992년엔 ‘용서받지 못한 자’, ‘여인의 향기’, ‘라스트 모히칸’, ‘흐르는 강물처럼’이, ‘다이하드3’가 개봉한 1995년엔 ‘데드 맨 워킹’, ‘가을의 전설’, ‘브레이브 하트’,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었다. 영화 산업의 중심인 할리우드에서도 작품 다양성과 관객들의 선택권은 지켜진다. 소수의 대형 영화사와 다수의 독립 영화사들이 협업관계를 이루며 분리와 평형을 유지하는 게 할리우드의 힘이다.마동석의, 마동석에 의한, 마동석을 위한 시리즈다. “자기 복제를 안 하려고 한다. 재미있다고 계속 하는 건 지양한다”고 했지만 그의 액션 연기와 스토리라인은 진부한 클리셰가 돼 버렸다. 1편은 꽤 신선했고, 2편은 손석구와 박지환의 연기라도 보는 맛이 있었다. 3편부터는 조악한 스토리와 방방 뛰는 활극만 남았다. 4편은 안 봐도 뻔하다. 이 시리즈는 현재 5, 6, 7, 8편의 대본을 한꺼번에 집필 중이라고 한다.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진다. 막장드라마 쪽대본도, 다작과 속작으로 B급 무비를 마구 찍어댄 70~80년대 남기남, 고영남 감독도 그렇게는 안했다. 돈에 혈안이 된 제작사와 배급사, 감독과 배우, 그리고 군중심리가 결합해 ‘범죄도시 8부작’이라는 괴물을 낳았다.‘심야의 FM’이나 ‘범죄와의 전쟁’, ‘부당거래’ 때까지만 해도 마동석은 제법 진지한 배우로 보였지만 이젠 배우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다. 스스로를 공장에서 천만 개 찍어낸 근육인형으로 팔고 있다. 출연하는 영화, 드라마, 광고가 다 똑같은 주먹 자랑이다. ‘대중이 원하지 않느냐’는 반문은 너무 쉬운 출구전략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범죄도시4’의 독과점을 비판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다. “재미만 있으면 늘리지 말라고 해도 극장에서 알아서 늘린다. 억지로 규제 좀 하지마라”, “맛집이라 줄 서 있는 가게 있고 맛없어서 텅텅 비어 있는 가게 있다. 보고 싶은데 스크린 몇 개 없어서 빡빡하게 앉아 봐야 하나?”, “언제까지 이런 구닥다리 기사를 쓸 건지. 다 계산기 두드리고 하는 일인데. 창의적인 기사 좀 보고 싶다”… 지금 박스오피스에서 자본을 앞세워 다른 영화들을 규제하는 것도, 보고 싶은데 스크린 없어 못 보게 하는 것도, 창의적인 영화 안 나오게 하는 것도 다 “재미만 있”고 예술은 없는, 오직 저속한 상품성만 남은 ‘구닥다리 액션 맛집’ 그 시리즈다.김수영은 참여 문학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참여가 불가능할 만큼 난해한 시를 쓴다는 비판에 “읽기 쉬운 글만 읽으면 민중은 성장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파시즘이 예술을 정치 선전의 도구로 악용하는 ‘정치의 예술화’에 맞서 ‘예술의 정치화’를 실현할 장르로 영화를 제시했다. 김수영도 벤야민도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대중을 믿었다. ‘범죄도시’ 시리즈는 자본의 영화화다. 나는 자본의 영화화를 부끄럽게 만드는 개성, 예술, 양심, 자유, 사랑의 영화화를 기다린다. 그것은 분별력 있는 대중과 함께 나타난다.

2024-05-06

거절을 딛고 일어나는 능력

농업 종사자들에게 농번기와 농한기가 있는 것처럼 공연 예술인들에게도 바쁜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다. 우선 1월부터 3월까지 공연계는 꽁꽁 얼어붙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씨가 춥기도 하거니와 지자체와 기업, 재단 등 공연을 기획하는 곳들의 예산이 확정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매년 새해가 밝으면 3개월간의 한가하고도 궁핍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그렇다면 1월부터 3월까지 공연 예술인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봄과 여름을 겨냥하며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국가 지원 사업에 응모하기 위한 지원서와 각종 기획서, 제안서 등을 쓰며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한 해 동안 경제적 어려움 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힘든 해를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문제는 이 지원사업의 응모나 제안들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창작 자체를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은 물론, 공연비를 지원하는 사업, 예술인의 다양한 활동을 주선하는 사업 등의 경쟁률은 매우 치열하다.그래서 공연 예술인들은 여러 곳에 응모와 제안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서류들을 작성하며 비수기를 난다. 그리고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그 결과를 통보받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성공률이 높지 않기에 거절의 말들을 마주하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면 아쉬운 마음도 들고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은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이런 것에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단지 빨리 털고 일어나 다시 창작이나 새로운 기획에 몰입하게 되는 속도가 빨라질 뿐.예술 활동은 거절의 연속이다. 앞서 말한 방식의 거절도 흔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거절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책을 내기 위해서는 글을 쓰기 위한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출판사로부터의 거절을 견뎌내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그렇게 책이 탄생해도 그 책이 대중들로부터 거절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야구선수가 3할만 쳐도 준수한 선수라고 했듯이, 한 출판사 관계자는 내게 ‘작가는 2할만 쳐도 훌륭한 작가다.’라고 귀띔을 해 준 적이 있다. 나머지 8할은 숱한 거절 앞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수들의 음반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오디션에 붙는 배우들보다 떨어지는 배우들이 훨씬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극장에 걸린 영화 중 박스오피스의 정상을 차지하는 작품들이 그렇지 못한 작품들보다 적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어쩌면 예술인들은 이러한 거절에 맞서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잘 된 사람들도 없지는 않으나, 거절을 당하더라도 다시 굳세게 일어서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며 결국 살아남아 걸작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존재한다. 지금은 대중가요계의 정점에 올라 있는 BTS와 아이유 같은 가수들에게도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만 초창기 작품들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첫 작품도, 박찬욱 감독의 첫 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인의 성공이란 무엇일까. 마스터피스를 남기는 것도 성공이겠지만 대부분의 예술가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현실적인 꿈이다. 오래 생존한다면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확률도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 생존이라는 것이야말로 예술가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그것을 위해 갖추어야 하는 자질 중에는 남다른 예술적 재능도 있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도 있고 영민한 비즈니스 능력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거절을 견뎌내는 능력을 이야기하고 싶다.혹시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예술인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고 싶다. 당신 앞에는 무수히 많은 거절과 거절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에 걸려 고꾸라지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될 것이라고. 중요한 것은 거절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거절을 뒤로하고 다시 일어나 걷는 것이라고.

2024-04-29

불화하는 아름다움

화가 르네 마그리트 작품 ‘사람의 아들’. 이따금 내 존재가 잘못 놓인 바둑돌 같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기능하는 와중 나 홀로 삐걱대는 것 같을 때 특히 그렇다. 이런 기분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드라마가 왠지 모르게 따분하고 유명 평론가가 극찬한 작품에서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을 때.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내겐 너무 커다란 이벤트처럼 다가오거나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을 건너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이 지구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처럼 여겨지면, 현실을 추동하는 모종의 질서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대부분의 하루는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지만 어쩐지 불안은 떠나질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과 별 탈 없이 하루를 끝마친 것에 감사하려 노력하다가도 문득 어떤 의심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거, 조금 이상하지 않나?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에 질문을 던지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낯설게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분은 찰나에 그치는 것이며 당장 몇 시간 뒤의 현실이 등을 떠미는 중이니까.그런데 만약 눈앞의 현실을 거부하고 일상의 걸음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원활한 도로에서 급정거한 자동차처럼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흰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미지의 세상과 조우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트 여왕이나 모자 장수를 만나 나 자신보다 훨씬 더 이상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를 낳듯, 외부 세계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처럼 낯설고 불쾌한 기분은 그저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마크 피셔는 본인의 저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문화적 사례를 토대로 설명한다. 특히 H. P. 러브크래프트는 ‘기이한 것’을 설명하기에 탁월한 작가다. ‘기이한 것’이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공존”하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을 포함한다. 어떤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떠올려보자. 이를테면 바다 위를 부유하는 거대한 야자수나 공중을 떠다니는 낙타 같은. 가능해선 안 되는 것이 가능한 존재도 이에 해당한다. 르네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을 예로 들 수 있겠다.‘기이한 것’은 단지 환상적인 영역이 아니다.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을 보자. 그것들은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소를 재결합한 것에 불과하기에 어떤 기이한 감각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기이한 것’이 되려면 완전히 낯설면서도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 어느 날 갑자기 중세 시대의 기사가 되는 것보다 게으른 상사의 정수리에 해바라기가 피어나는 것이 훨씬 더 ‘기이한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 주변의 세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로 “무한하고 무시무시한 미지의 것”을 보려고 하면 오히려 따분해질 우려가 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러브크래프트는 공포 소설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매혹적이다. 소설의 주된 배경인 뉴잉글랜드는 완전히 불가능한 외부 세계가 아니며 친숙한 현장이다. 거기에 난입한 기이한 존재는 허구의 것이나 현실 안으로 들어와 더욱 새로워지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불쾌한 것을 향해 끌리는 충동, 이례적인 사건을 바라보는 즐거움, 일상적인 현실 속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까지.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기도 하다.이렇듯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나란히 놓았을 때, 우리는 기이한 감각과 동시에 낯선 끌림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나와 세계가 불화할수록 빚어지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책상 위 반듯하게 펼쳐진 책보다 모래사장에 파묻힌 텍스트가 더욱 궁금하지 않은가. 왜 거기에 놓였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깊이 탐구하고 싶어지는 충동. 재미있는 사건은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결국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뒤틀리고 엉뚱한 생각이 튀어 오를 때야말로 삶이 가장 강렬해지는 순간이 된다. 낯선 기분과의 조우가 항상 유쾌할 순 없지만, 그것이 가진 특이성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이 예술이 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2024-04-29

동그란 사랑

혼자 사는 집의 동거인이 된 반려 식물. 혼자 살던 집에 동거인들이 생겼다. 바로 작고 작은 반려 식물들이! 하나 둘 씩 모으던 식물이 점차 수를 늘려가며 벌써 다섯이 되었다.집안일을 다 끝낸 무료한 주말엔 집 근처 식물 가게에 간다. 처음엔 분명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지만 왜인지 나올 땐 식물이 하나씩 손에 들려 있다. 아마 식물 가게 주인의 엄청난 영업 실력 덕분이지 않을까.내가 제일 처음에 들인 식물은 스파티필름이다. 어린잎이 하나둘씩 자라더니 갓 파마를 마친 할머니 머리처럼 바글바글 풍성해졌다. 현재는 꽃차례에 하얀 불염포를 피우고 있는데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어린 아이의 말랑한 손가락을 보는 것만 같아 신기하고 설렌달까.그 뒤로 들인 식물은 아스파라거스 나누스, 홍콩야자, 스킨답서스 실버리안이다. 아스파라거스 나누스는 솜털 같은 형태의 보송하고 가느다란 잎을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홍콩야자는 우산 모양의 초록 잎이 길게 자란다. 그 중 애정하는 스킨답서스 실버리안은 벨벳 재질 형태의 잎과 은은한 실버 색상이 눈에 띄는 독특한 식물이다. 다행히 세 식물 다 우리 집 환경이 잘 맞는지 어린잎을 계속해서 내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내가 보지 않는 시간에도 반짝반짝 잘 자라 나를 놀라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식물을 애정으로 키우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가장 최근에 데려왔지만 골머리를 앓게 하는 녀석은 유주나무다. 작은 귤과 흰 꽃이 달리는 과실나무라 계속해서 벌레가 꼬이는데다 햇빛 양이나 물주기가 잘못된 탓인지 살짝 건들기만 해도 잎이 우수수 덜어진다. 힘없이 축 늘어진 잎을 보면 얼마나 눈길이 가는지. 영양제도 꽂아보고 뿌리 파리 벌레를 물리치는 트랩이나 각종 약을 뿌려도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빛이 잘 들지 않는 집이라 겨우 빛이 집 안에 드는 시간대면 유주나무의 자리를 빛이 드는 곳으로 옮겨 둔다. 인터넷 글을 보니 누군가는 이년 내내 아픈 유주나무를 보살피다 어느 샌가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하던데, 넉넉한 시간은 물론 정성과 관심이 없으면 참 어려운 일이다.앞 식물과는 달리 유주나무는 돌봄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하루라도 빛과 바람, 물주기를 신경써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시들해진다. 조금만 눈을 떼면 금방이라도 죽기 쉬운 식물이라 참 애간장을 녹이는데, 또 작은 귤 열매가 새롭게 맺힌 것을 볼 때마다 만 평 대지에 흉년이 든 것처럼 기쁘다. 아직 초보 식집사라 그런지 내게 유주나무는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래도 요즘 나를 바삐 움직이게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랄까.일주일에 한 번, 물주기가 비슷한 식물을 모아 잎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천천히 물을 준다. 이제 막 물을 주어 싱그러운 식물을 따라 편안하고 천천히 호흡해본다. 조금씩 시간이 느려지고 상기되었던 얼굴도 누그러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러다 최근 갑작스레 돌아가신 지인분이 불현듯 떠올랐다. 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그의 메모장을 본 적 있었는데, 그곳엔 온통 불교 경전의 말씀이 가득했다. 필사는 왜인지 긴박히 서두르는 듯 보였고, 특이하게도 ‘ㅇ’ 모음마다 빨간색 동그라미가 덧대어 그려져 있었다. 왜 ‘ㅇ’일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고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을 수 있겠으나 빨간색 동그라미를 그려내며 각지고 날카롭고 뾰족한 마음을 둥글고 부드럽게 다듬고 싶었던 걸까. 동그라미의 틀, 동그란 잎의 식물들, 둥그런 화분의 입구, 동그란 유주나무의 열매, 둥글둥글해지는 마음.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세시 정도였고, 일요일의 오후가 조금 더 남았다는 것에 안심하며 끼니를 챙겨 먹기 위해 천천히 일어섰다.조금씩 빛이 드는 자리에 앉아 마음의 파동을 일으키는 대상을 가만히 생각해보는 것이 내겐 사랑이고, 이 사랑으로 채워진 시간이 오롯이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함을 안다.평온함의 오후, 물 빠진 식물은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놓고 유주나무는 한 번 더 벌레가 기어 다니지는 않는지 체크한 뒤 놓아준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내내 눈길이 가고, 떨어져 있을 때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생각하며 저릿하고도 무력한 마음 같은 것이 나는, 사랑이라 믿는다.

2024-04-22

온몸의 이행, 세월호 세대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Pixabay 기울어진 선체가 캄캄한 물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고작 52시간은 수십 년처럼 막막하고, 차가운 바다에서 학생들이 죽어갈 동안 땅의 어른들이 헛되이 버린 골든타임 72시간은 억겁처럼 까마득했는데 10년은 참 빨리도 갔다. 너무 빨리 지난 10년이 섬뜩하다. 나는 가끔 악몽을 꾼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 위에 섬인지 유령선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검은 형상이 어른거리는 꿈을. 회색 바다 위로 뒤집힌 배의 구상선수 부분만 떠 있는 이미지는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상징이 됐다. 그것은 곧 어른들의 탐욕과 국가의 부재, 세계의 부조리함을 지시한다.작년 9주기 때 희생자 이영만군의 형은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영만아, 밖은 아직도 차고 깜깜하다. 시간이 갈수록 잊혀가는 것 같아 무섭다. 9년 동안의 다짐이 모두한테서 희미해지는 것 같아 너무 무섭다”고 했다. 1년이 지나 이제 10년이다. 10년은 기억과 기념의 단위다. 하지만 세월호는 희미해지고 잊혀졌다. 물밑에 잠겨 있던 선체가 인양됐지만 다시 침몰하고 있다. 이쪽에서 아무리 새기고 기억하려 해도 저쪽에서 지우고 덮고 그만 하라 한다. 그만 하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10년 동안 세월호는 어떻게 다시 가라앉았나.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대통령이 탄핵됐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약속한 새 대통령이 당선됐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임기를 마쳤다. 진상 규명은 불충분하고, 국가 책임자 중 처벌 받은 이는 단 한 명뿐이다. 현 대통령은 10주기 기억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다. 대통령의 빈자리는 뒤집힌 배의 구상선수처럼 오히려 불쑥 솟아 있었다. 그 배는 이미 재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침몰했다.그만 하라고, 지겹다고, 해상교통사고일 뿐이라고, 다른 고귀한 죽음들을 기억하라고 윽박지르는 말들이 너무 드세고 거칠어 기가 죽는다. 세월호가 희미해지는 건 이런 드센 말들이 중심 없거나 여린 다수의 마음을 흔들어 여론이라는 걸 잘못 만든 까닭이다. 단원고에 다니는 이윤지 학생은 말한다. “어떤 어른들은 이제 잊으라고 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세월호를 떠올릴 거예요. 그래야 더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테니까요”라고. 우리 사회의 집단 망각 아래서부터 악착같이 세월호를 띄워 올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들은 아니다. 어른들이 MZ라 부르는 세월호 세대가 바로 그들이다.얼마 전 한 기업의 채용공고에 ‘모집인원 0명’이라고 적힌 문구가 화제였다. 10명 이내 한 자리수를 채용하겠다는 통상적 의미다. 이게 갑자기 문해력 논란으로 번졌다. 0명을 정말 ‘0명’으로 이해해 문제 삼은 누리꾼들을 향해 어른들은 “모르면 배울 생각을 하라”고 충고했다. 충고로 시작해 비난으로 끝난다. 어른들은 MZ세대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혀를 찬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이 없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의 20대들은 10년 전 친구들이, 언니 오빠 형 누나 동생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잘 들어서 죽은 걸 생생하게 봤다. 승객들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선원들이 팬티 바람으로 제일 먼저 탈출하는 걸 똑똑히 봤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국민을 어떻게 버렸는지, 사회라는 곳이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매몰찼는지 다 지켜봤다. 그런데 말을 들으라니, 책임감이라니, 감히 공동체라니.계몽과 훈육이라는 자기도취적 우월감으로 ‘MZ’ 비아냥거림을 일삼는 어른들이여, 세월호를 정치 이데올로기의 화두로 만들어 욕보인 이들이여. MZ세대가 아니다. 세월호 세대다. 당신들의 위선과 거짓, 무능력,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서 세월호 생존 학생들 중에는 진로를 바꾼 이들이 있다. 유아교육과에 가려다 응급구조사가 된 장애진씨도 그중 한 명이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기 위해 캄캄한 바다에 다시 들어갔을 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한다. 몸서리쳐지는 트라우마와 맞서서 끝내 이겨낸 힘은 “누군가를 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하늘나라의 민지와 민정이에게 다짐한 바로 그 약속이다. “친구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고 응급구조사로서 열심히 일을 한다”는 애진씨는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한다. 세월호를, 돌아오지 못한 304명의 얼굴과 이름을, 그들과의 약속을, 그 약속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김수영)임을.

2024-04-22

가볍게 정치 얘기 좀 해볼까요?

최근 열린 22대 총선 개표소 풍경. /경북매일 자료사진 지난 4·10 총선 기간 내내 나는 한 번도 SNS에 나의 정치적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내게 특별한 정치적 의견이 없어서도 아니고 내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람이어서도 아니다. 나는 대중예술인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중예술인은 말 그대로 대중들을 상대로 예술 활동을 펼치는 사람이고 대중들이 외면하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대중들은 자신과 다른 정치색을 가진 예술인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한 결론이다. 비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누군가가 보수 지지자이건 진보 지지자이건 관계없이 사랑받고 싶다. 지금 나와 나의 작품을 좋아해주시는 분들 중에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 그가 몇 번을 찍었건 간에.그렇다고 내가 ‘대중예술인은 정치적 발언을 삼가야 한다.’라는 명제에 찬성하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대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상종조차 하지 않는 문화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민의힘 원희룡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던 한국인 1호 프리메라리가 플레이어이자 2002년의 영웅인 이천수 선수는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축구선수이다.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던 ‘구마적’ 이원종 배우 역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배우이다. 이천수 선수와 이원종 배우를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정치색은 정치색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그의 업적은 업적이다. 모든 국민은 어떤 정당이건 지지할 권리가 있고 그것은 나도 이천수 선수도 이원종 배우도 마찬가지이다.실제로 내 주변에는 다양한 정당에서 일하는 벗들이 있다. 국민의힘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민주당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도 있다. 한 선배는 녹색정의당에서 일하고 있고, 또 어떤 후배는 진보당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중 누구와도 나는 즐겁게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있고 그렇게 해 본 경험이 있다. 어떤 이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즐거웠고, 또 어떤 이들은 나와 다른 철학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어서 새로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이 단단해지기도 하고,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납득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납득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생각이 자라는 일인 것은 분명하고 그 결과 나는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우리 가족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색들이 있다. 우리는 식사를 하거나 술을 한 잔 곁들이며 가끔 정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가끔 의견 대립이 팽팽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을 다치지 않는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지도 않고 단지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할 뿐이다. 우리 아버지가 삼성라이온즈의 팬이고 내가 롯데자이언츠의 팬인 것이 우리 부자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누가 어떤 당을 지지하는지는 우리 가족들의 유대감을 전혀 해치지 않는다. 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상대에게 밉보일까봐, 또는 상대를 미워하게 될까봐 우리는 가급적 정치 이야기는 친구끼리라도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정치 얘기만 나오면 화가 나고 흥분하는 이상한 조건반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어째서 토론이 자꾸만 싸움이 되곤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 이야기는 금지라며 말도 못 꺼내게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정치적 견해 같은 건 들어볼 기회가 없어진다. 서로 간에 정보 교류와 의견 교환이 없다는 것은 물이 한 곳에 고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고인 물이 썩듯이 정체된 정보는 왜곡되기 쉽고 올바른 선택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모두가 자유롭게 서로의 정치적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좋겠다. 그로부터 뻗어 나온 다양한 생각들이 대한민국 정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죽음을 각오하고 지킬 것이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가 말했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거나 생각해 볼만한 말이다.

2024-04-15

우리 못된 일을 하자

아기는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언스플래쉬 최근 내 삶에 생긴 몇 가지 변화가 있다. 그중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단연 조카의 탄생이다. 조카가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우리 가족의 결속력은 단단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조카의 집에 다함께 모여 시간을 갖는 일도 잦다. 처음에는 아이를 안아 드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젠 여러 일에 제법 능숙해졌다. 밥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는 건 기본. 쏟아지는 졸음에 칭얼대는 것과 먹을 것을 요구하는 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팔이 떨어질 것같이 아프다가도 내 품에서 잠든 아기의 체온에 마음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아, 이토록 조그만 생명이 주는 기쁨이란!세게 움켜쥐면 바스러질 것같이 조그만 아기였다. 언제부턴가 몸을 뒤집더니 배밀이를 하고 이젠 네 발로 온 집안을 헤집는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날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듯 꼿꼿하게 앉아 무거운 물건을 쥐고 흔들기도 한다. 한 생명의 뼈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른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실감 난다. 자란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우리 아기 어디 있지? 장난을 치면 몸을 배배 꼬면서 자기 몸 위에 손을 얹는다. 어찌나 영특하고 귀여운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고모인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부모는 오죽하겠는가. 자신들의 아이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다는 부모의 열정이란 실로 대단해서 옆에서 보고 있자면 머리가 아득할 지경이다. 숙지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것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무궁무진하다. 나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 혀를 꾹 깨문다. 나도 모르게 기성의 문법이 불쑥 솟아오르는 나날이다. 오지랖 넓은 우려가 들 때도 있다. 서울 한복판의 높다란 건물에서 태어난 아이가 지겹도록 볼 것들과 끝내 보지 못할 것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더욱 그렇다. 창의성을 길러준다는 태블릿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또한 낭만적인 감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이를 향한 부모의 열렬한 사랑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어느 주말, 아빠에게서 연락 한 통이 왔다. ‘우리 못된 일을 할 거야.’ 연이어 조카의 사진이 도착했다. 노란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탄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 집 근처의 대형 쇼핑몰로 산책을 가려다가 인천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갈매기 때문. 수족관 앞에 놓인 모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짜 갈매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오빠와 새언니의 눈을 피해 조카를 데리고 지하철에 올라타는 아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니 웃음이 났다. 그야말로 불량 할아버지와 손자가 아닌가. 주먹을 꾹 쥔 채 앉아 있는 사진 속 조카가 너무나 의젓하고 결연함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나도 그 일탈에 기꺼이 동참하기로 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렇게 도착한 포구는 꽤 부산스러웠다. 흥성거리는 불빛과 색소폰 연주가 어지럽게 뒤엉킨 저녁이었다. 조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갈매기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수산시장에 들러 도다리회를 떴다. 노래미와 멍게까지 서비스로 받았다. 우리는 회에 소주를, 조카는 이유식을 먹었다. 조카의 오동통한 볼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너희 엄마 아빠가 알면 엄청나게 혼날걸? 위생적이지 못하다거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한참 잔소리 들을 거야.” 키득거리면서 내가 했던 많은 못된 일을 떠올렸다.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던 위험한 동네를 배회하던 일이나 엄마 몰래 불량식품을 숨겨 놓고 야금야금 까먹던 일. 조마조마하고 무서우면서도 얼마나 신났던가. 나의 조카 역시 무수하게 많은 못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잠든 아기의 뒤통수는 동그란 행성 같다. 망망한 우주를 떠돌다 우연히 발견된 어떤 별. 부지불식간에 나타난 이 존재는 내 삶을 대차게 뒤흔들었다. 아이는 걷고 뛰고 말하고 생각하며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테다. 그러다 거꾸로 걷고 싶은 날도 있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그게 나쁘다면 가끔은 나쁜 아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조만간 우리 또 못된 일을 하자. 잠든 조카의 귓속에 속삭인다. 언젠가 반드시 혼날지언정,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비밀스러운 일을 도모하는 친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2024-04-15

주말 골목 여행

산책하기 좋은 연남동 골목 풍경. 1월 말. 창문 밖 폭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신년부터 시간에 쫓기며 조급하게 지냈고, 덩달아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고 말았다. 출근하는 평일엔 무력하게 흔들렸지만 주말이 찾아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바로 조용한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흔적들을 찾는 일, 마음의 여유를 느끼지 못할 땐 연남동의 골목으로 향한다.연남동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동네다. 조선 초기의 3대 이궁이었던 연희궁이 있던 지역으로 조선 세종 당시 서쪽 모악에 수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라 한다. 현재 지리적으론 사람이 많이 붐비는 홍익대학교 거리와 가까워 경의선 숲길 쪽은 늘 시끄럽고 혼잡한 편이다.하지만 연남동의 묘미는 경의선 숲길 안쪽으로 들어가 골목 곳곳에 숨은 보물 같은 가게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지하의 작은 식당들, 간판 없는 카페, 생일 책이 있는 동네서점, 공방, 잡화 상점 등.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그림자 같은 가게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좁은 골목을 누비는 동안엔 마치 모험을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대로변처럼 한 눈에 보이지 않는데다 그 길을 가봐야만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쏘다니며 담벼락에 새겨진 낡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 걷기도 하고, 벽 너머 오랜 시간 살아왔을 사람들이 가꾸는 생활을 조심스레 엿보기도 한다.분명 전에 왔던 곳임에도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 보면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느리게 감기며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골목을 지키는 존재는 조용하고도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다. 불필요하게 과장되어 있다거나 지나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오랜 시간 그 자리 그대로 풍경을 착실히 유지하고 있다.또한 골목은 어딘가 믿음직하다. 비행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눈 감아 주기도 하고, 연인들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한적한 모퉁이를 내어주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비밀을 감싸 안으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골목에게선 배울 수 있는 삶의 자세가 많다.학부 시절 사진 관련 교양 강의를 들은 적 있다. 강의에선 골목 사진을 찍을 때, 골목 모퉁이 사진을 찍어야 잘 찍은 사진이라 배웠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야만 사진을 보는 사람이 그곳에 어떤 게 있을지 상상할 수 있어 호기심을 불러온다는 거였다.최근 나의 일상도 그랬던 듯싶다.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넓은 대로변 속에서 목표와 결과만 추구하며 달렸으나 쉽게 무너졌고 길을 잃었다. 하지만 현재 나에게 필요한 건 천천히 골목을 누비며 길을 파악하고 숨은 재미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연남동의 골목은 생각보다 더 좁아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경의선 철길에 다다른다. 경의선은 서울역-능곡-일산-문산-장단군-개성시-사리원시-평양-신의주까지 이어지던 철도로, 1905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목적으로 부설되었다고 한다.이후 1950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운행이 종료되었고, 2009년이 되어서야 용산-문산까지 운행을 시작하며 경의중앙선으로 바뀌었다. 경의선이 다니던 철길은 현재 땡땡거리, 책거리, 전망테크, 기찻길 옆 예술마을 등 각각의 테마를 지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길 따라 볼거리가 있어 좋다.철길을 따라 출판사별로 큐레이션한 작은 서점도 방문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곳도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이 많아 골목길 산책과 더불어 여행을 오는 듯한 경험과 새로운 재미를 준다.연남동 곳곳의 이런 힘과 여유로움이 숨어 있다. 잦은 공사로 땅이 고르지 못하고, 좁고, 고생스럽지만 언제 어느 때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여유를 주는 곳. 동맥처럼 선명히 퍼진 골목길과 그 속에서 언제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존재들 속에서, 이번 주말에도 여행을 즐기려 한다.

2024-01-22

릴케의 전집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언스플래쉬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김건홍, ‘릴케의 전집’)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된다”고 말했다. 관계가 자아의 성숙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다. ‘나’라는 인격체는 타자와 교감하고 상응할 때,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성장할 수 있다. 위 시는 사랑의 힘이 한 사람을 살리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면 연애하고 싶어진다. 결혼하고 싶어진다.천장이 낮은 집에 키가 작은 목수가 살고 있다. 키 작은 목수는 자신의 키에 맞춰 협소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천장이 높아봤자 목수는 자기 키만 한 물건밖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타거나 줄에 매달리는 방식의 작업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목수가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운명을 받아들일수록 천장이 낮은 집은 자폐적 고립의 세계로 점차 봉쇄되어 간다.목수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한다. ‘죽은 나무’는 목수가 매일 만지는 것이고, 목수의 삶은 죽은 나무에 예속되어 있다. 연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뿐이다.그런데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목수가 필요로 할 망치나 톱 대신 엉뚱하게도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온다. 유용성만을 추구해온 목수의 보수적 세계관을 연인은 책이라는 ‘무용한’ 선물을 통해 새롭게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다. ‘죽은 나무’로 상징되는 물질의 세계에 고립되었던 목수는 대뜸 ‘릴케 전집’이라는 정신의 연장을 받아들게 된다.연인이 책을 들고 목수의 집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책장을 만들려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는 목수의 고백이 힌트를 준다. 목수는 책이, 책으로 함의된 정신성의 세계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는 중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수는 이제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연인을 위해 지붕을 높일 게 분명하다. 세계와 불화하던 한 존재가 마침내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존재의 근원적 한계인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한다. 목수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린”다. 시인은 오후의 눈부신 햇빛에 무덤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풍경을 감각적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목수는 연인이 가져 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한”다. 이 과감한 행동이 시를 읽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책은 꼭 읽는 데만 그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냄비받침이 될 수도 있고, 파리채나 망치로 쓸 수도 있다. 하물며 키스를 위한 계단이라니, 얼마나 유용하고 낭만적인가? 목수의 연인은 책을 사랑하지만 책에 함몰된 고리타분한 인간이 아니다. 목수가 책 더미를 밟고 올라 입술을 내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 걸 보면 알 수 있다.그것도 무려 릴케의 전집을 말이다. 둘이 키스를 나누자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난”다. 평생 ‘죽은 나무’를 만지고 살던 목수에게서 살아 있는 나무의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연인의 사랑이 ‘죽은 나무’의 우울에 갇혀 지내던 한 사람을 살렸다. 목수는 나무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리라.

2024-01-22

네고 가능한가요?

최근 작업실을 정리하게 됐다. 계약한지 반년이 겨우 넘어가는 공간이었다. 더불어 ‘당근 마켓’의 알림이 불티나게 울리는 중이다. 오랫동안 공간을 유지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구입한 가구며 가전제품은 모두 새것에 가깝지만, 어쩔 수 없이 팔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작업실의 물건은 집으로 들이기엔 불필요하고 헐값에 처분하기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중고 제품을 한 번에 매입한다는 사이트에 문의하자 반의반 값도 안 되는 견적을 받았다. 망연한 얼굴로 결심했다. 내가 직접 팔아야겠다고. 힘차게 기합을 넣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간 구입한 것들을 다시 하나씩 차분히 살피고 다각도로 사진을 찍었다.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고 했던가. 멀리서 보았을 땐 그저 흥미롭게만 보였던 판매의 현장에 직접 뛰어드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중고 거래 플랫폼을 애용하는 사람이지만, 그간 내가 판매했던 것은 필요 없지만 버리기 아까운 살림살이나 더 이상 입지 않는 옷가지같이 아주 소소한 것이었다.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임했기에 큰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거금을 주고 산 물건이었기에 아무래도 본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이트에서 얼마에 구입했는지, 사용감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구체적인 정보를 최대한 꼼꼼하게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의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대부분의 첫 질문은 이렇게 시작했다. ‘네고 가능한가요?’이처럼 중고 거래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네고’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영어 단어인 ‘negotiation’을 줄인 것으로 협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영화 ‘대부’에서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돈 꼬넬리오는 자신의 서재에 사람들을 불러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다. 제안이라는 말로 던지는 협박에 가까운 협상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힘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협상이기도 하다. ‘대부’만큼은 아니어도 중고 거래의 협상 역시 꽤 은밀하고 무겁게 진행된다. 서로의 제안을 들으면서 주고받는 숫자는 긴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물론 평화적으로 끝나는 기분 좋은 협상도 있다. 얼마쯤 빼 드릴게요, 하고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면 상대도 고맙다고 대답하면서 깔끔하게 거래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도 왕왕 생긴다. 자신이 원하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그렇다. 정중하게 거절하는데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채팅을 보내면서 피로감을 주는 상대를 만나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이 협상은 결렬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소리 지르고 싶어진다. 단단히 상해버린 마음을 추스르는 것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무엇보다 나의 정신 건강을 지키면서 물건을 거래하는 몇 가지 요령을 습득했다. 첫째, 물건의 원가에 집착하지 말자. 내가 구입했을 당시의 가격에 관해 생각하는 순간 어떤 연락이 와도 달갑지 않다. 아깝다는 마음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되도록 빨리 버려야만 한다. 둘째, 이제 더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 기억하자.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중고 거래 플랫폼에 업로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필요한 사람이 물건을 갖게 된다는 걸 기억하면 속상한 일이 현저히 줄어든다. 셋째, 늘 승리할 수만은 없다는 걸 기억하자. 가끔은 상대의 기세에 밀려 예상보다 훨씬 값싸게 판매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럴 땐 자신의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보다 상대의 협상 기술이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래를 진행하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오히려 물건을 가져가는 상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여전히 나의 판매 목록에는 물건이 가득하다. 딴엔 다 필요하다고 구입한 것이었을 텐데. 무슨 욕심이 그리 넘쳤던 걸까. 물건을 하나씩 팔아갈 때마다 아깝다고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돌이켜보게 된다. 물건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렇다. 미련에 가까운 감정의 찌꺼기를 처리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문제기도 하다. 비워야만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으니까.글을 쓰는 와중에도 당근의 경쾌한 알림이 울린다. 이번에는 어떤 물건이 어떤 협상을 거쳐 누구에게 가게 될까. ‘네고 가능한가요?’ 하는 물음이 날아온다. 이번만큼은 서로 승리하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싶다. ‘네고 가능합니다. 얼마 생각하시죠?’ 돈 꼬넬리오의 확신에 찬 표정을 흉내 내며 협상에 돌입한다. 상대가 숫자를 부른다. 자, 이제 시작이다.

2024-01-15

세상의 뒤에 남겨진 채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감독 샘 에스마일, 2023)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루만 일람의 소설 ‘세상을 뒤로 하고’(2020)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인데, 설정이 꽤나 흥미로웠다.즉흥적으로 휴가를 떠난 가족이 휴가지에서 사이버 테러로 인해 모든 전자기기가 고장 난 채 고립된다. 가족은 추락하는 비행기들과 원인 불명의 소음 테러, 동물들의 대이동, 자세한 설명이 생략된 재난 방송 등을 마주하지만 외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기에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결국 가족은 휴가지의 집으로 돌아오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머지 않아 세상이 멸망하게 되리라는 암시와 함께 끝이 난다.사실 영화는 평범한 재난 스릴러의 양상을 반복한다.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주인공을 포함한 일행은 직면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소중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외부인과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다. 대개의 재난 스릴러 영화는 이러한 상황의 연속 속에서 주인공의 기지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위기를 탈출하며 에필로그와 같은 형식으로 평화로운 자택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의 결말을 보여준다.이러한 문제 양상은 가족 형태를 비롯한 현대의 공동체가 마주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법 한데, 대개의 스릴러 영화가 해체된 가족 공동체가 위기를 극복하며 재건되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 스릴러 영화에서 나타나는 재난은 해체된 전통적 공동체를 다시 봉합시켜주는 계기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이 영화가 독특한 건, 어떠한 위기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끝없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상황에 직면하지만 정보가 차단된 상황으로 인해 원인을 알 수 없고 그렇기에 탈출구 또한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소중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위기에 처하지만, 약조차 쉽사리 구할 수가 없어 절규할 따름이다. 물론 여타의 재난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일련의 위기 상황을 가족애를 바탕으로 극복하기도 하고 조금은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이들은 재난의 현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기존의 재난 영화가 문제의 해결을 통한 카타르시스와 해체된 가족의 봉합을 통한 안정감을 선사한다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건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원하는 무력감에 가깝다.어쩌면 이와 같은 변화는 재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여러 사태에 대한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하다.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간 대립의 격화와 무력 충돌, 기후변화로 인한 세계 권역의 지각 변동,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감과 전자기기 사용에 대한 극심한 의존도, AI를 비롯한 기술 환경의 변화가 자아내는 두려움 등, 세상은 전례 없는 변화의 시기에 놓여 있다. 어쩌면 지금의 변화들은 한 개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앞서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세상의 속도 앞에 뒤처져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고작 5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자연의 의미에서도 그렇고, 문명의 의미에서도 그렇다. 변화가 단지 삶의 편의성의 증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힘으로 따라가기엔 점점 벅차지고 있다는 것 또한 체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쉽게 설명해줄 누군가를 원하며 유튜브 속으로, 혹은 다른 종류의 매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렇게 생각하자면 ‘세상을 뒤로 하고’라는 소설의 원제는 참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주인공과 그의 가족이 일상에 지쳐 휴가지로 떠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그렇게 떠나온 곳에서 정보 고립으로 인해 세계에 뒤처진 채 남겨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건, 굳이 사이버 테러를 비롯해 영화 속에서 일어난 테러 상황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언제든 우리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단지 인터넷이 끊어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게 되지 않는가.

2024-01-15

갈치를 주니까 중매가 온다

중매라는 선물을 받게 해줄지도 모를 갈치. 층간소음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다. 바닥과 천장이, 벽과 벽이 맞붙은 아파트나 연립주택에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사르트르가 말한대로 ‘지옥’으로서의 타인만 남는다. 소음은 보복소음을 불러오고, 소음의 나비효과는 주먹과 발길질, 흉기가 되어 피를 보게까지 한다. 인터넷에 층간소음 복수법을 검색하면 온갖 방법들이 나온다. 천장에 설치하는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가 품절 현상을 빚을 만큼 잘 팔린다. 스피커로 귀신 흐느끼는 소리, 불경, 찬송가, 아기 울음소리, 심지어 음란물 소리를 틀어두라는 조언이 넘쳐난다. 천장이나 벽을 두드리는 고무망치도 인기 상품이다. 이웃들을 마주칠 때마다 조현병 환자인 척했더니 층간소음이 사라졌다는 경험담까지 있다.나는 연립주택 4층에 사는데 5층의 생활소음이 잘 들린다. 샤워할 때마다 음정 박자가 엉망인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는 윗집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새 거주자가 이사 온 뒤론 그쪽은 평화롭다. 최근엔 층간소음보다 벽간소음이 문제다. 옆집 402호에 새로 이사 온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현관문을 너무 세게 닫는다. 문돌쩌귀가 잘 안 맞는 데가 있는지 여러 번 열었다가 닫았다가 한다. 하루에도 열댓 번, 늦은 밤에도 그 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나고 욕설이 뱉어진다. 가서 따져야지 하고 단단히 벼르는 와중에 복도에서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저거 저렇게 두면 누가 안 가져가요?” 문 앞에 쌓여 있는 소포꾸러미를 걱정하신다. 집으로 책이 너무 많이 와 둘 곳이 없어 현관문 앞 구석에다 놓은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와는 서로 한 번씩 도운 일이 있다.하루는 거실서 음악 들으며 쉬는데 창밖에서 누가 큰소리로 “401호 아저씨! 도와줘요!” 외쳤다. 창을 열어보니 옆집 베란다에서 아주머니가 자동방범창이 잠기는 바람에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402호에 들어가 방범창을 열어 아주머니를 구출했다. 옆집이 이사 온 지 며칠 안됐을 때다.지난 가을엔 제주 바다 위에서 열심히 낚시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안양동 지구대 경찰이었다. 집 문은 열려 있고, 택배는 잔뜩 쌓여 있고, 혹시 무슨 변고가 생긴 건 아닌지 싶어 옆집에서 신고했단다. 낚시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렜으면 칠칠맞게 문단속도 안하고 헤벌레 나섰을까. 다행히 사라진 물건도 없고, 누가 들어온 흔적도 없다. 옆집서 대신 문단속을 해준 게 참 고마웠다.도움을 주고받으며 피어난 작은 따스함 따위는 쿵쿵거리는 소음에 묻혀 기억도 나지 않았나보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는 “총각이 잘생겼네. 장가 안 갔어요?” 살갑게 말을 걸었다. 두세 마디 대화 나누자 문 닫는 소리 시끄럽다고 따지려던 마음이 사그라졌다. 널찍한 테라스가 있는 우리 집 내부 구조가 궁금하다기에 들어와 구경하시라 했다. 그리고 지난번 문단속해준 보답으로 그때 제주에서 잡아온 갈치를 몇 토막 드렸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말한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는 말은 정상적 삶을 사는 성인들의 전략적 교훈이 되어버렸다. 이 교훈은 이방인이 말 걸기의 거부 대상이 되는 삶의 현실을 하나의 신중한 규칙으로 만든다”라고. 말을 거는 순간 관계가 시작되고, 관계는 성가시고 불필요한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므로 지옥의 문을 굳이 열 이유는 없다. 혼밥과 혼술이 편하고, 타인의 곤경을 봐도 섣불리 도와선 안 된다. 코로나 시절 타인은 병균 덩어리였고, 전염병이 종식된 지금은 경쟁자, 귀찮은 오지랖쟁이, 또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사물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웃’이라는 이름을 잃어간다. 언젠가는 사전에서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이렇게 잘생기고 훤칠한 총각이 왜 혼자 살아. 내가 주변에 좋은 아가씨 있으면 중매 서줄까?” 갈치를 주니까 중매가 온다. 이건 꽤나 남는 장사가 아닌가. 중매보다 더 값진 건 이웃의 탄생이다.이제 지옥으로서의 타인은 없다. 갈등을 갈치로 바꾸고 적대감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한 건 그저 “안녕하세요” 한마디로 시작된 소소한 대화다. 갈등과 혐오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 지금 절실한 건 안녕을 묻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이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옆집서 갈치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이웃이 저녁밥을 짓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2024-01-08

가장 바깥쪽에 놓인 서점의 책처럼

근사한 삶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언스플래쉬 지난 12월 31일엔 광화문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광화문과 덕수궁 그리고 서촌을 말할 수 있다. 그곳의 주변엔 취향을 가득 담은 카페와 음식점, 동네 서점, 각 종 소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특정 장소들이 있다. 세 곳 모두 많은 이야기와 사람과 감정이 얽혀 있다. 어느 계절에 누구와 가도 좋은, 애정이 가득 담긴 곳이다.2024년을 정말 잘 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지난해의 마지막엔 아침이 되자마자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공들여 책을 골랐고 읽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했다.그리고 베스트셀러 매대 앞에 서서 그곳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는 책의 모습을 바라봤다.매대위 같은 책일지라도 제일 바깥쪽에 있는 책과 가장 안쪽에 책은 컨디션 차이가 꽤 난다. 제일 바깥에 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탓인지 책 표지가 더 물렁물렁하고 모서리가 약간 닳아 있다. 종이를 넘길 때의 질감과 촉감도 다르다. 새 종이책 특유의 빳빳함을 잃고 훌렁훌렁 가볍게 넘어가며, 종이를 넘기며 생기는 미세한 자국이 새겨져 있다.반대로 가장 안쪽인 끝에 위치한 책은 진열된 지 얼마 안 된 듯 상처 없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새 책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어딘가 모서리는 더 날카로워 보이고 빳빳하며 유연해 보이지 못한다. 읽는 이의 손아귀에 잡혀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이 왠지 근래의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달까.나는 사람이 어렵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그들이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느끼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보단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 말이 무례하진 않은지 조금은 생각해보고 단어와 문장을 골라 말을 건네는 편이다. 그러니 대화의 흐름은 무언가 매끄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만약 누군가 나와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날 유독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고 아마 집에 가자마자 타이레놀을 입에 털어 놓고 잠에 들기 바빴을 것이다.처음 보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어도 자신의 아픈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가 겪은 상처나 아픔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동요되고 전이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하지만 의무적으로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제스처와 뉘앙스를 충분히 드러낸다. 너무 반응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안해질테고, 또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면 그에게 가식이라는 무례를 범할 수 있으니까. 너무 과하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도록, 나보다는 상대를 위한 너무 많은 고려와 생각에 빠진다.더 큰 문제인 건,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행동을 미덕으로 여기며 경청과 조언을 할 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좋은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의사를 의존했고 지나치게 수용했다. 상대가 평상시 자주 쓰는 말과 표현, 관심사를 익히 파악하여 주로 상대에 맞춰 주기 바빴을 정도였으니까.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판단이며,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타인의 의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인간 정신의 정점이라 말했다.또한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단 타인이 떨어트린 몇 마디 말을 빠르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길 즐겨한다고도 했다. 스스로 통찰을 통해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 손쉽게 타인의 그럴듯한 판단을 마치 제 것인양 행한다는 것이다.그간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은 애매했다. 그래서 올해엔 서점 매대의 가장 바깥에 놓인 책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형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보려 한다. 타인의 인정과 판단보단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더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니까.

2024-01-08

새해에는 꿈과 희망을

어린 시절, 나는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 같이 마법 소녀가 등장하는 만화를 좋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정의롭고 강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동경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가.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마트 한복판에 배 깔고 누워 엉엉 울기 신공으로 마법 소녀 변신 장난감을 얻어내는데 성공. 손에 넣은 요술봉을 힘차게 휘두르면서 외쳤다. 악의 무리는 내가 처단한다! 앙큼하게 포즈를 취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무력한 아이였으니. 정해진 학교에 가고 학원을 다녀와서 숙제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가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삶을 반복해야만 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소녀들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이 잔뜩 있어.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악의 무리를 처단하기는커녕 허리 통증으로 골골대는 슬픈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 내게 숨겨진 힘이라곤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적의 게으름과 동네의 숨은 맛집을 발견해 내는 신묘한 레이더가 전부다. 어렸을 때 꿈꾸던 미래는 이보다 훨씬 극적이었던 것 같은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빠진 만화처럼 내 삶도 맹숭맹숭한 느낌이다. 희망을 꿈꾸며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지만 축 처진 일상에 낙관이라는 마법의 가루 한 스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와하하 웃는다. 언제부터 꿈과 희망을 말하는 것이 유치한 일이 되었을까? 가족과의 대화는 늘 답답하게 끝이 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만 나누게 된다. 아무래도 다들 낭만 없이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무턱대고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을 이기적인 몽상가로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현실감각이 없네, 하고 혀를 차면서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돈에 대해 말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쩌면 꿈과 희망이라는 관념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무거운 것이기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마법 소녀를 꿈꾸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설가라는 또 다른 꿈을 품게 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문학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읽고 쓰는 일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일들은 다 우습게만 보였다. 누가 쿡 찌르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공기가 과도하게 주입된 풍선 같았다. 저는 소설만 쓸 수 있으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그런 이야기를 버릇처럼 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포기한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그때의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세계를 구하려는 마법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내던져서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겠다는 어떤 결연함을 품고 있는 소녀들. 나는 이제 그들이 안쓰럽다. 어깨 위에 얹힌 짐이 너무나 거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짊어지고 사는 아틀라스의 형벌을 스스로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마법 소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건 세상을 구한다든가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정말이지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 같다. 내 삶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다. 시간이라는 파도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오랫동안 꼭 붙잡고 있는 꿈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 잘 살고 싶다는 건 작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건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우치는 중이다.거짓말처럼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보다 운전 걱정부터 들고 가슴 아픈 사건을 보고서도 숨 한 번 길게 내쉰 뒤 다시 할 일에 몰두하는 새해 아침이다.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내 삶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고 믿지 않지만 좋은 세상을 바라며 요술봉을 휘두르던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각자가 품은 아주 작은 꿈, 그거면 한 해를 살아낼 충분한 동력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작년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길 기대해도 좋겠다. 그러니 어른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

2024-01-02

너의 절망을 바라는

EBS에서 제작한 ‘대학입시의 진실’은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육다큐멘터리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5부에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해당 장면에서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한 ‘격차사회’라는 현상을 다룬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회자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부모의 학력과 연수입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상관관계를 표현한 단어이다. 평균적으로는 사립대학 루트를 밟은 부잣집 아이와 공립교육 루트를 밟은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가 3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데, 이는 부모의 경제적 계층이 아이에게 세습되는 현상으로 직결된다.계층 이동의 통로가 막히면 사회의 역동성이 감소하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 이는 자녀의 인식 수준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 있어 상속부자 자녀의 경우 47.3%가 긍정 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4%만이 긍정 응답을 하였으며, 노력의 보상에 대한 믿음 역시 계층에 따라 각기 61.4%와 26.8%로 집계되었다. 가난의 책임에 대해서도 상속부자 자녀들은 52.2%가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8%만이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하였다.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도 상속부자의 74.1%는 긍정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단지 23.2%만이 긍정응답을 하였다. 조금의 추상화를 거쳐 말하자면, 계층에 따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흥미롭다고 느낀 건 이와 같은 부분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제도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한 일본 니트족의 사례이다. 프로그램에서는 나다 요시후미라는 자발적 니트족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수입이 없음에도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 달 100만원 가량의 생활비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그는 미래 대신 지금의 행복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낮에는 파친코, 밤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하는 그는 남는 시간에는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며 시간을 보낸다.비록 수입도 없고 생활도 궁핍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은 ‘3주 이후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 이상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싫은 일이나 힘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꽤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가? 불안하진 않은가? 그런 여러 종류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놨기 때문이다. 만약 중병에 걸린다면? 혹은 사고를 당한다면?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에게 불쑥 찾아든 불행에 그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떤 재난과 불행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을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심 한심하다고, 혹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현실에 가장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먼 미래에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을 막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삶인 것일까? 어쩌면 내심 나는 나의 삶의 상시적인 불행에 대한 보상을 그의 삶에 대한 힐난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심 그의 삶이 나보다 불행해지길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라도 나의 삶을,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솔직해지자면, 나는 어느새 그에게 재난과 불행이 닥쳐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현재를 긍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상하지, 그의 삶이 불행해지는 것과 나의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낸 것이고 그것에 맞춰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왜 그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행복의 조건도 삶의 방향도 선택하지 못한 ‘나’의 문제인 건 아닐까?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나의 모습이 문득 씁쓸하기만 하다.

2024-01-02

크리스마스 기도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를 포함, 모두가 행복했으면. 세상 돌아가는 데 무심한 나도 크리스마스에는 저절로 들썩인다. 산타클로스, 오색찬란한 트리, 흥겨운 캐럴, 코미디 영화, 외식, 선물, 데이트 등 동화적인 축제 분위기가 사람을 괜히 들뜨게 한다.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 가고 싶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만30대의 마지막 성탄절에 약속 없이 집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이다. 늦게 일어나서 고춧가루 팍팍 넣고 짜파게티 끓여 먹었다. 창문을 여니 간밤에 눈이 내렸다. 곱게 쌓인 눈을 보니 짜증부터 난다. 집단축제를 싫어하면서도 축제에 끼고 싶은 아웃사이더의 양가감정은, 낄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비틀린 심술이 된다. 눈 대신 비나 실컷 와서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면 좋겠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면 좋겠다. 건물 외벽을 통째로 성탄 특집 디지털 아트로 만들어 구경꾼이 넘쳐 나는 명동 백화점에 정전이나 되면 좋겠다.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연휴의 나른함에 원고 마감을 깜박하고 있다가 급히 책상에 앉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나 홀로 집에서 보냈다. 30대를 돌아보니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이 없다. 낚시를 가거나 혼자 포장마차에서 허파볶음에 소주를 마시거나 티브이 보다 쓰러져 잠들었다. 대학 강사가 되면서부터는 성적 입력하느라 자체 가택연금이었다. 20대 때는 나가 놀기라도 했는데, 그래봐야 같은 공기 마시는 것조차 짜증나는 친구들이랑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 들이부은 게 전부다. 오늘 저녁엔 뭐 할까. 그래도 성탄전야인데 소고기 구워서 와인이라도 마실까? 혼자라고 생각 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몇 해 전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종종 생각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처음부터 저만치 뒤쳐진 채 출발한 흙수저라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서울 명문대 국문학과에 다니는 선혜씨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방세 치르고 공과금 내고 독서실 끊고 하면 생활비도 안 남는다. 근사한 외식이나 쇼핑은 사치다. 그런데도 그 빠듯한 용돈으로 엄마 선물부터 고른다. 착한 친구들은 이렇게 답답하도록 착하다.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많고 멋 부리고 싶은 20대에 포기부터 배운다. 그래서 아예 밖에 안 나간다. 나가면 보이고, 보면 사고 싶어지니까. 유진목의 시 ‘누란’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 난다. “엄마 엄마는 맛있는 것 다 먹었어? 가고 싶은 곳 다 갔어? 하고 싶은 것 다 했어? 나는 못했어”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 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빈곤에 의해 비생산적 활동인 사교 모임, 여행, 외식, 문화생활 등을 금지당하고, 그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만 움켜 쥔 채 좁은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무기력함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 마침내 너무 많은 결핍들은 아예 결핍을 무화시켜서 주체로 하여금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욕망 불구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이 돈 안 드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슴 설레는 축제가 아니라 찬란한 빛에 더욱 짙어지는 유폐, 춥고 초라한 그늘의 감정일 뿐이다.한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가장 좋아한 복음성가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가난한 영혼 억눌린 영혼 지극히 작은 영혼까지 주의 사랑을 전하리라. 아름다운 그 사랑을…. 주님 사랑 그들에게 전하리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 사랑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온 세상에 가득히.” 앞에서 몽니를 부렸지만 진심이 아니다. 주님 사랑은 됐고 축제의 흥겨움이나 온 세상이 함께 나누면 좋겠다. 수많은 선혜씨들은 왜 크리스마스의 들뜸까지 포기해야 하나. 그들은 가난한 영혼도 억눌린 영혼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만이라도 돈 걱정, 사치라는 죄의식 다 집어던지고 즐겁게 보내면 좋겠는데, 산타할아버지 가능해요? 안 울면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안 울게. 제발, 제발 좀 모두 행복하게 해줘요.

2023-12-26

마음의 서랍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서랍은 조금씩 깊어진다. /언스플래쉬 2023년도 끝나간다. 올 해는 조금 특별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예기치 못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쓸쓸함이 감돈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방문했던 미술관 앞을 우연히 지난다거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나누었던 카페를 예기치 못하게 들리는 등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불쑥 겹쳐질 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마주한 듯 난처해진다.A는 여전히 시를 쓸까? 늘 퀭한 얼굴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걷던 사람이었다. 말을 걸기 전까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처음엔 다가가기 참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로 다니던 거였다. 강의도 자주 빠져서 게으름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밤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읽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와 A는 대학 졸업 이후 더 가까워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음도,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 A의 안부가 궁금해지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어떤 일은 그대로 묻어두어 침묵으로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나의 서랍 한 칸엔 미안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성숙함으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강을 조심스레 빌어본다.올 해의 나는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주기적인 상담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중한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며 조금 더 변화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스스로 마주하는 횟수도 점차 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미성숙한 것들, 강박에 가까운 것과 나의 취약점, 그리고 동시에 나의 장점 나만이 가진 특징, 나의 능력도 살펴보게 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설렜다. 머릿속의 안개가 차차 걷히며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고 그 실체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는지 기대 되기 시작했다.물론 그날그날의 사정에 따라 머릿속의 안개는 포악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급작스레 온 몸을 젖게도 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이 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흐르고 변화하니까.이 시간들이 반복되며 여유를 보관할 마음의 서랍이 칸칸이 생겼다. 이젠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한 외로움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지난 사람들의 안부를 죄책감 없이 빌어볼 수 있으며 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지고, 좋고 싫음을 구분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의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것,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물론 내가 너무 다치지 않을 만큼 건강할 정도로만.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나는 본가로 향한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더 들어가서 영암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가면 부엌 식탁 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다. 나를 기다리며 삼일 내내 장을 봤다는 엄마. 본가 왔을 때 많이 먹어두라며 툴툴거리는 아빠, 그리고 다섯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우리 가족이 만난 한 시간 정도는 늘 평화롭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대화는 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는 늘 커다랗게 자리한 화를 누르기 바쁘다. 하지만 곧 무력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는 걸 아니까. 사랑의 형태는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곧 깨어질 듯 불안정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내며 도망치지만, 이젠 이 또한 보통의 사랑의 형태임을 안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며 저 멀리 있는 사랑을 불러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의 서랍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2023-12-26

정의롭지 못한 희생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Pixabay 그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납치당했다. 납치범들은 인질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다면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수치스러운 내용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것을 요구한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12시간. 당신은 순순히 납치범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이와 같은 상상이 너무 손쉽다고 느껴진다면, 몇 가지의 가정을 더 덧붙여보자. 당신은 영국의 총리이며, 인질로 잡힌 사람은 공주이다. 납치범이 협박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버린 탓에 전 세계의 시민들마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왕가에서는 ‘총리가 공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 믿는다’는 언질이 전해온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신은 영원히 당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을까?어쩌면 당신은 ‘사람을 살린다’는 명제로 인해 이와 같은 순간에 대해 손쉬운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영상’인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민들 또한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므로, 시민들 또한 당신에게 그리 심한 인격모독을 저지르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사실 이와 같은 가정은 실제 상황이 결코 아니다. 이건 그저 영국의 TV쇼인 ‘블랙 미러’의 한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이 TV쇼는 우리에게 흥미롭고 불쾌한 통찰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그건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가정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통해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옳은 결정을 하고자 시도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잠시 TV쇼의 내용을 살펴보자. 물론 총리는 현명한 사람이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총리는 최후의 순간에 영원토록 자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촬영해 대중에게 공개하길 선택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의 선택이 결코 사람을 살린다는 대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실업률을 비롯한 경제적 문제로 인해 하락하는 국민들의 지지도와 왕가의 압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문제들이 대의보다 더 큰 압력이 되어 총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영상을 찍기에 앞서 국민들을 향해 ‘하지만 저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결함이 아니다. 거기에서 엿보이는 것은 압력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는 선택을 해버린 순진한 희생양의 모습만이 화면을 가득 채울 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단지 불쾌할 따름인 이 TV쇼가 현실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고도 강력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다이버즘(Godivaism)과 같은 정치 역학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모두 대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 어쩌면 이러한 수사들마저 철지난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 현재라는 시대라는 것이다.하지만 과연 이게 다일까?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은 한 걸음을 디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대의가 타자의 논리를 수용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해져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다시금 삶의 이유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주류 언론과 인터넷에 넘쳐나는 ‘주류 의견’에 대한 지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의 논리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선택의 자유를 지불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희생양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이 말은 결코 반지성주의·반계몽주의적 입장에 서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사유는 정녕 우리의 것일까? 우리는 단지 ‘주류 의견’에 스스로의 사유마저 내맡겨버린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로부터 선택을 감행하며 결과마저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예컨대, 자기에 대한 책임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2023-12-19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요? 이따금 받는 질문만큼 난감한 것은 없다. 백과사전식 답을 구한다기보다 문학에 관한 생각을 묻는다는 걸 알기에 괜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쓰는 사람이면서 읽는 사람이고 소설은 오랜 시간 내 옆에서 특별한 의미로 존재했다. 사적인 감상을 넘어 소설이라는 거대한 장르가 쌓아온 역사와 의미가 여타의 장르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문학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장르다. 영상이나 이미지로는 구현해 낼 수 없는 언어적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문학 작품의 묘미다. 소설은 언어로 ‘이야기’를 쓴다.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이야기를 내어놓는 사람, 즉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어떤 사건이나 생각 등을 내어놓는다. 독자는 화자를 따라가며 소설의 세계를 이해한다. 일련의 흐름 끝에 작품은 결론에 닿고 독자는 당연하게 누군가(등장인물 혹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그러나 소설을 이야기라고만 규정한다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다. 줄거리만 두고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공존하는 무수한 서사 장르는 소설보다 더욱 명확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야기’ 앞에 ‘시의성을 가진’ 혹은 ‘징후를 짚어내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면 어떨까? 물론 그런 것들이 좋은 글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순 없으나 소설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완벽한 것 같진 않다.여기 소설은 ‘사고’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의미의 축제’ 등의 작품을 썼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가, 밀란 쿤데라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노라면 어째서 소설을 ‘사고’라고 말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한 편의 이야기를 감상한다기보다 철학적 논고 혹은 독특한 형태의 에세이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응당, 소설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쓰는 사람, 그러니까 작가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설에서 작가는 완벽하게 숨어야 하는 존재다. 작가가 보이는 순간 독자는 그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쿤데라는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건 어리석다고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속에서 직접 기술한다. 이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테레자는 꾸르륵 소리로부터 탄생했으며 토마시는 “한 번은 중요치 않다”는 문장에서부터 시작됐을 뿐이다.이제 소설은 모두 가짜이며, 이야기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인물을 통제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충돌하며 벌이는 사건과 그에 따른 결과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 거기서 작가는 또다시 인물과 세계의 해설자 역할을 자처한다.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만드는 이야기,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훌륭한 소설임에는 이러한 내막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소설과 다른 낯선 형식을 통해 도리어 소설이 가진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설이 ‘사고’라는 쿤데라의 선언은 다만 형식적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논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임을 이해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독자가 한 작가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행위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 그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나아갈수록 작가의 발화가 영글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독자는 작품 내부의 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순간 소설의 이야기는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소설이 무엇인지 묻는 것. 이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내린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 또한 문학이 주는 모종의 재미다. 끝나지 않는 질문과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는 답이 섞여 매력적인 소설의 세계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202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