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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을 사랑하기

등록일 2024-07-08 18:15 게재일 2024-07-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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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언스플래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일은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인물의 감정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으며 얼마간의 사건을 만들어내기 적격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이 변화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삶은 우리를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두 가지 상반된 진실이 섞이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고 결말을 알면서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쾌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사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의 경험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이들이 앙앙 우는 소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괴로운 소음이라던 친구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놀랍도록 어른스럽고도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며 싸우던 단짝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지인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내 경우엔 반려견을 들 수 있겠다. 내가 동물과 함께 산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 없었는데, 어느 순간 내 삶에 틈입한 이 존재는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강아지는 사랑하기에 너무 쉬운 존재가 아닌가. 동그란 코와 부드러운 털, 무엇보다 녀석은 먼저 마음을 주는 쪽에 가깝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존재에게 냉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곤히 잠든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을 든다. 언젠가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게 정말 가능한 영역일까?

최근 나는 의외의 인물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보면서였다.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던 시리즈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아마 내가 일련의 사회생활을 경험하게 되면서 겪은 일들과 겹치는 지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오피스’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화를 다룬다. 마치 실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진행되는 것이 큰 특징인데 덕분에 카메라 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나 인물의 숨겨진 감정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게 된다.

나는 항상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이나 지점장 보조를 자처하는 드와이트 슈르트 같은 괴짜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로맨스를 담당하는 짐과 팸 커플의 서사도 꽤 좋아했다. 어쨌든 이들은 주인공 격에 속하고 카메라에 자주 비추어졌으니까. 이번에 다시 ‘오피스’를 시청하면서 의외의 인물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왔으니, 다름 아닌 영업사원인 필리스다.

필리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다. 극 내부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기에 길게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하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더 많았다. 일을 처리할 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하는 여자. 타인의 소문에 쉽게 키득거리고 가끔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짓궂게 구는 사람. 그러나 새롭게 포착된 모습은 조금 달랐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누구보다 행복해하며 타인을 위해 손수 뜨개질을 하는 마음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으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실제로 그녀가 나의 삶에 끼어든대도 이런 애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필리스를 같은 동료를 직장에서 만난다면 나는 그녀의 오지랖 넓은 태도에 기가 질려버릴 것이다. 아주 괴로운 사람으로 여기면서 누군가가 그녀를 두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단박에 고개를 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타인의 일면을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내가 든 카메라가 찍을 수 있는 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 절친한 친구들과 나누는 농담이 얼마나 유쾌한지 나는 알지 못한다. 카메라 밖에서 짓는 눈물의 의미나 긴 시간 혼자만이 품고 있던 비밀 같은 것도 모른다. 등장인물의 뒷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엉켜있던 오해도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조금씩 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나는 내 주변의 인물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친구에게 오랜만의 연락을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식의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반가운 일이다. 내 삶에 등장하는 인물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쉽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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