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첫 번째 생일이 지났다. 이맘때쯤 되니까 육아에 있어 새로운 어려움이 찾아온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어떻게 놀아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꿍까꿍만 해줘도 꺄르르 웃던 아들은 이제 자꾸만 새로운 것을 원한다. 집이 비좁아질 정도로 새로운 장난감을 구해다 바쳐도 한계가 있다.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이 미디어의 유혹. 새로운 것이야 휴대폰에 깔려 있는 유튜브 어플에 무궁무진하게 있지 않은가. 돌쟁이 아기를 홀릴만한 신나는 콘텐츠들은 차고 넘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아직 이러한 유혹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기껏 조성해 놓은 TV 없는 거실이 아깝기도 하고, 뭔가 이제 와서 항복을 선언하기에는 자존심도 조금 상한다.
아기에게 미디어를 보여주는 시기를 미룰수록 좋다는 이야기는 지겹게 들었다. 그 이유도 여러 가지 들었지만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노는 방법을 터특하는 일이 아이의 지능과 정서 발달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손쉽게 자극이 주어지는 일이 반복되다보면 아이가 새로운 놀이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렇게 되는 것이 아이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문득 이러한 이야기가 단지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변변한 취미도 없고 사람들과 소통하는데서 즐거움을 찾을 줄 모르는 사람들. 세상에 널려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 반면에 참 잘 노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저기 관심도 많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품고 사는 사람들.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사람들. 이것은 삶이 얼마나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가와 직결되지 않는다. 돈도 시간도 많은데 ‘노잼’인 사람들이 있고, 분주한 일상 틈틈이 재미를 감춰두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구분은 뻔한 이야기이지만 얼마나 놀아봤는가, 그 경험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세상은, 그리고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중에 놀라고 조언한다. 지금 놀면 나중에 실패하게 되지만 지금 인내하면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성공 이후에 더 풍요롭게 놀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 말이 꼭 옳은 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아기들이 미디어를 비롯한 손쉬운 자극 없이 놀아 봐야 노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듯이 어른들도 성공과 풍요가 아직 찾아오지 않은 젊은 시절에 없는 살림 속에서 어떻게든 노는 연습을 해야 나중에 더 잘 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삼십 만원 생활비로 살던 대학시절, 단돈 만원 한 장으로 데이트를 해 보았다면 함께 김밥 한 줄 씩 사 들고 공원을 거닐며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편의점 앞에서 과자 한 봉지에 작은 캔 맥주 한 캔씩을 아껴 먹으려면 여름밤의 정취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기차 입석에 올라 힘들게 도착한 낯선 고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던 여행은 그 시절이 아니면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이 뒤늦게 성공해서 경제적 풍요를 얻게 된 다음 놀아보려 애쓰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환상적인 야경을 바라보며 데이트를 할 수 있겠지만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밤새도록 서로의 사이를 오갈 수 있을까. 분위기 좋은 루프탑 바에서 비싼 위스키를 시켜 먹으면 맛이야 있겠지만 진짜 여름밤 냄새를 맡을 수는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대륙으로 떠나서 호화로운 여행을 즐기며 그곳의 풍경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기억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물론 풍요로운 삶은 좋은 삶이지만 그 이전에 실컷 놀아본 사람이라면 그 풍요를 훨씬 낭만적이고 알차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걸 하나도 모르고 단지 풍요롭기만 하다면 그 풍요를 탕진하며 놀더라도 어딘가 공허할 수 있지 않을까. 가끔 마주하는 씁쓸한 소식들이 있다.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을 살던 사람이 도박, 마약, 아니면 그 어떤 부도덕한 행동을 통해 무너져버리고 마는 소식.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본질은 어쩌면 삶의 진정한 쾌락을 얻는 방법을 몰라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부정한 쾌락을 향해 손을 뻗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노랫가락 차차차’라는 노래가 있다. 가수 황정자가 1962년 발표한 곡인데, 제목이 낯설어도 노래의 첫 소절 가사만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우리의 풍요가 완성되기 전부터, 한 살이라도 젊을 때부터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춰 노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강백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