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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온몸의 사랑

성현아 문학평론가가 경향신문 11월 22일자에 기고한 글 ‘무해함에 햇살 비추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비폭력적이고 잔잔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현상을 짚으면서 “무해함을 요구하는 독자 및 시청자에 맞춰 고통당하는 이들의 비명을 말끔히 도려낸 고요한 진공 공간만을 전시하는 작품들이 쏟아진다는 점”을 우려하는 내용이다.성 평론가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소극적인 무해함보다 나의 유해함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개선해 나가는 적극적인 무해함”의 예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언급했다. 정신병동 환자들을 편견 없이 사랑으로 보살피던 간호사 ‘다은’이 우울증에 걸려 정신병동에 입원한 후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하곤 다르다”고 호소하며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기 내부의 편견과 마주하는 장면에다 “편견이란 우리 몸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밝힌 소박한 내면의 촛불로는 결코 찾아낼 수 없다. 외부의 무엇과 부딪쳐 깨어질 때 비로소 번뜩이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아름다운 문장을 겹쳤다.“무해하기만 한 서사보다는 무해함의 허상에서 벗어나 다종다양한 해로움을 조명하되, 그것에 잠식되지 않고 덜 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서사가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김초엽의 단편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떠올렸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배아디자인’이 상용화돼 부모들은 태어날 자녀의 신체, 성격 등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된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이 기술을 활용해 성격의 결함이나 신체적 장애가 없이 탁월한 두뇌능력과 예술적 감성과 피지컬을 갖추고 태어난 이들은 ‘개조인’, 돈 없는 부모에게서 자연적으로 태어난 이들은 ‘비개조인’이 된다. 개조인들은 지구 밖에 그들만의 완전무결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비개조인들은 가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얼룩진 디스토피아 지구에 남는다.무해한 유토피아에서 성년이 된 개조인들은 일종의 성년식으로 조상들의 행성인 지구에 순례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그런데 지구에 견학을 간 개조인들 중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고, 주인공인 데이지는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추적해나간다. 그리고 알게 된다. 평화롭기만 한 유토피아엔 오히려 사랑이 없다는 것을, 지구에 남기로 결정한 순례자들은 사랑 없는 유토피아보다 사랑이 있는 디스토피아를 택했다는 사실을 말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사랑의 조건으로 ‘비대칭 관계’를 제시한다. 비대칭 관계란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희생과 책임을 말하지만 상호 보완의 의미에 더 가깝다. 결핍이 없으면 채움도 없다. 나의 부족함을 당신이, 당신의 해로움을 내가 서로 감당하면서 끌어안는 것이다. 완벽하기만 한 사람들 사이에선 연민이라는 감정이 생길 수 없다. 연민과 사랑은 타인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순간에 불꽃이 튄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구정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새하얀 옷을 입고 현실이라는 땅에서 발을 뗀 채 마치 천사처럼 환하고 가볍고 평화롭기만 한 사랑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8년째 누워 계신다. 이젠 눈이 보이지 않고 귀는 원래 들리지 않았으며 걸을 수도 없어 침상과 한 몸으로 지낸다.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침대 위에 스마트폰을 던져두고 조명을 끈다. 그러면 방금 던진 스마트폰을 찾지 못해 어둠을 더듬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이런 세계에 계속 갇혀 있구나’ 생각에 울컥한다. 감성이 풍부한 밤에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할머니를 생각한다. 꼬옥 안아드려야지. 그런데 면회를 가면 이상한 국면이 펼쳐진다.생각 속에서 작고 연약하고 불쌍하던 할머니가 만져지는 눈앞의 현실에서는 작고 연약하고 불쌍하고 냄새가 나고 끈적거리는 할머니인 것이다. 나는 할머니 몸에서 나는 악취와 분비물에 얼굴을 찡그리며 안는 것도 놓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다. 그 냄새와 타액은 내게 유해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냄새와 끈적거림을 참으면서 기어이, 끝까지 할머니를 끌어안는 것.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멀찌감치 떨어져서만 애틋하고 순정한 관념의 사랑이 아닌, 가까이 가 만지고 껴안고 견뎌대는 온몸의 사랑.

2023-12-12

나는 완벽하지 않아

최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내가 완벽주의자임을 깨달았다. 스스로 완벽한 상태가 존재하다고 믿으며,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기준을 세워 그것을 실패할 때마다 번번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검사지를 보며 이정도 스트레스는 현대인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수준이 아니냐며 반문했지만 선생님은 그 정도가 다르며, 노력이 실패할 때마다 자기 비난으로 이어지며 우울감으로 빠져 들기 쉽다며 짚어 주셨다.사실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적 공허함은 기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실은 내 스스로 만든 완벽한 기준치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 내가 완벽주의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칭찬을 할 때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칭찬을 하는 이유는 그저 예의상 건네거나 또는 분위기상 듣기 좋은 말을 골라 건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들이 말하는 칭찬의 정도까지 내 스스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아직 부족한 게 참 많다고 늘 스스로 여겨왔으며 어떠한 성과를 보여도 남들 하는 만큼 했을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최근에서야 점점 깨닫고 있는 건, 완벽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은 받아들이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권하는 방법은 바로 완벽주의를 인정부터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일의 효율을 높이고 좋은 성과를 이끌어 오는 긍정적인 성격도 있기에 건강한 완벽주의의 장점을 바라보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그리곤 건강이나 외모, 성공이나 행복에 관한 기준을 적어보고 지금 조금씩 이룰 수 있는 목표만을 놔두고 과감히 지워버려야 한다고 한다. 실현 가능한 목표만 지향하여 성공 확률을 높여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심어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가 있어도 되고 실패해도 된다.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선 실수는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므로 새로운 시도 앞에서 실패는 반드시 따른다.두려움의 뿌리는 과연 내 깊은 곳 어디까지 침범했을까 생각하다보면 아득해진다. 나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며 노력했을 뿐인데 친구관계도 사회생활도 늘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늘 실패에 가닿을 때마다 나의 노력과 운이 부족했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실패의 이유는 나 자신에게서 더는 찾을 수 없다.요즘 일을 할 때에도 나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다. 그래서인지 늘 목표를 내 기준치보다 훨씬 더 높게 잡곤 했다. 높게 잡은 목표를 어떻게든 혼자서 잘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썼으나 일의 경험이 적은 내가 혼자 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시점부턴 주위 타인들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자책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듯싶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하지만 이번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실은 내가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 직시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자마자 왜 그토록 일을 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는지, 왜 해결할 수 없는 일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것만 같은지, 집에 돌아가자마자 온 기력이 빠져서 잠에 들기 바빴는지 이 모든 게 차차 이해되기 시작했다.나는 완벽할 수 없다. 특히 혼자서는 더욱 완벽해질 수 없다. 스스로 지금 당장 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만을 세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때론 실패할 수 있고 실패에 가까워지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으면 된다. 좋은 사람이라면 분명 도와줄 것이고 나 또한 그 도움을 받아 일을 잘 해결하면 된다. 서로 간의 도움을 통해 우리 사이의 신뢰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일과 사람이지만 점차 조금씩 나와 타인을 믿으며 나아가다보면 점차 더 나은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완벽한 상태는 존재 하지 않지만 스스로 만족할만한 온전한 상태는 존재할 것이다.

2023-12-12

누구를 위해

2030 엑스포 유치에 실패했다. 2030 엑스포는 경쟁 초기부터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로 꼽혔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제적 행사인 엑스포를 유치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엑스포 관련 주식으로 꼽히던 건설주, 항공주, 숙박 및 유통 관련 주식들이 일제히 하락세에 빠졌다는 소식마저 전해진다. 유치 실패의 파장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작용하리라는 예측이 들려온다.그런데 궁금하다. 우리는 왜 엑스포를 유치해야 했던 걸까. 물론 전 세계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엑스포 유치가 갖는 장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외의 보도 자료를 살펴보자면 단순히 많은 관광객이 방문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전망 외에는 별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부산광역시는 엑스포 유치가 지역 개발 및 성장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 판단했다고 하지만, 그 또한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는 매한가지이다. 오히려 지역 개발이 장기적인 발전 계획 없이 국제적 행사 유치 여부에만 달려있는 것이라면, 이 또한 이상한 이야기이다.그래서일까. 이번 2030 엑스포의 부산 유치와 관련된 PT 및 영상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설명을 찾기 어려웠다. 왜 엑스포를 부산에서 해야 하는지, 부산은 어떤 곳이고 어떤 강점이 있는지 등의 구체적인 정보 대신, 유명 배우와 아이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가득 차있을 뿐이었다. 배경음악으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사용된 것도 의아하다. 미래를 지향하는 엑스포의 가치가 무색하게, 구태여 10년 전의 유행가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어야만 하는 걸까? 그것도 부산에 대한 노래도 아닌 서울 ‘강남’에 대한 노래를? 대체 왜?이처럼 부산 엑스포의 PT 영상에는 부산에 대한 로컬리티 대신 조악한 국뽕만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영상을 보고 있자면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영상인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 각국의 투표자를 시청자로 가정하고 만들었다기에 이 영상은 너무나도 조악하다. 어떠한 설명도 서사도 없이 단지 유명 인사들이 ‘부산!’하고 외칠 뿐인 이 영상을 보고, 어느 누가 부산에 투표하겠는가.이것이 비단 PT 영상만의 문제는 아닐 듯 싶다. 관련 보도 또한 한심하긴 매한가지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유력 신문에서는 이번 엑스포 유치 실패를 오일 머니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라 평가하며, 아쉬운 석패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다. 엑스포 유치 투표에서 부산은 2차 투표도 치르지 못했다. 리야드가 119표, 부산이 29표, 로마가 17표를 얻음에 따라, 전체 2/3의 득표를 얻은 리야드의 유치가 1차 투표만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과연 아쉬운 패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이런 구차한 워딩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유치 시도는 엑스포라는 행사에 대한 몰이해와 우리가 가진 역량과 장점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엑스포의 취지에 걸맞는 홍보를 하지도 않았고, 부산이라는 도시의 강점을 세계에 알리지도 못했다. 필수적인 정보가 담겼어야 할 자리에는 유명 인사들의 해맑은 웃음만이 가득 찼을 따름이다. 하기사, 정작 같은 나라의 국민들마저 부산 엑스포 유치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세계의 어느 누가 그 당위성과 필요성을 알아준단 말인가.문제는 또 있다. 과연 우리나라에 지금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를 유치할 역량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엑스포와 같은 국제적 행사는 단지 유치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가진 미래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행사 및 전시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는 국제적 행사인 세계 잼버리 축제를 파행으로 마무리 지은 경력이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가 세계 엑스포를 유치했더라도, 그런 국제적 행사를 잘 개최하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을까? 차라리 유치에 실패한 것이 다행인 것은 아닌지 하는 안 좋은 생각마저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토록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세계 잼버리 축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 행사 유치라는 치적 쌓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치적 쌓기였던 걸까. 누구를 시청자로 가정한 것인지 모호했던 PT 영상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2023-12-05

목욕탕이라는 세계

평소처럼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하던 중이었다. 익숙한 카페와 음식점이 늘어진 구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가슴을 뛰게 하는 문장 하나가 보였다. ‘목욕 됩니다.’ 세상에, 우리 동네에 목욕탕이 남아 있었잖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이후로 대중목욕탕은 운영되는 곳보다 폐업한 곳이 더 많았으니까. 참 어려운 시기를 굳건하게 버텨주었구나.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그럴 수밖에. 나와 목욕탕 사이에는 오랜 시간 쌓아온 유대감이 있었다. 우리의 진득한 재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어린 시절, 주말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집 앞에 있는 허름한 목욕탕은 물론이고 번화가에 들어선 신식 찜질방, 지리산 암반수가 흐른다는 온천까지. 그야말로 목욕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탕 포장지처럼 부스럭대는 옷은 벗어 던지고 얕은 탕에서 찰박찰박 물장구를 치면 얼마나 재미있던지. 목욕탕에서 만난 아주머니들이 귀여워해 주는 것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서 함께 노는 것도 마냥 즐거웠다. 몸을 오래 담그고 있으면 손끝이 쪼글쪼글해지는 것도 신기하고, 목욕이 다 끝나고 먹는 바나나 우유의 단맛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입안에 오래오래 머금고 있기도 했다.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는 법. 엄마의 손 위로 때타월이 씌워지면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공포의 때밀이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젊은 시절 엄마의 손은 맵기로 유명했으니, 나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엄마는 내 몸을 한 손으로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팔다리가 벌게지도록 박박 때를 밀어주었다. 국수 가닥처럼 줄줄 밀려 나오는 때를 보면서 잘 좀 씻고 다니라고 등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어린 나는 ‘시원하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목욕탕을 오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고행이라고 여기며 이를 꽉 깨물었다. 엄마가 때타월을 집어 들면 나를 찾지 못하도록 구석진 곳으로 후닥닥 도망가기도 했다.언제부터였을까. 목욕탕에 가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의 육체가 타인에게 보인다는 게 부끄럽다 못해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옷을 벗은 여자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껄끄러웠다. 그곳은 더 이상 재미있는 장소가 아니라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목욕탕에 가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속이 시끄럽던 날, 나는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목욕탕을 떠올렸다. 주택가 골목의 지하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그 대중탕을. 카운터에서 수건 두 장을 받아 들고 여탕 문을 열기까지는 꽤 용기가 필요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사람이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샤워기로 몸을 적시면서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샤워를 마치고 열탕에 들어가자마자 불편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휘발되었다. 온몸이 계란프라이처럼 주욱 퍼지는 것만 같았다. 내친김에 냉커피도 한 잔 시켰다. 투박한 물통에 담아 나온 커피를 한 입 들이키는 순간 여기가 극락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을 하고 목욕탕 밖으로 나오는데 공기가 어찌나 상쾌하게 느껴지던지. 그때 알았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내 손을 잡아끌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엄마의 기분을.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이 가볍다는 말의 의미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나는 한 달에 두 번, 꼬박꼬박 목욕탕에 출석 도장을 찍는다. 자연스럽게 목욕탕 아주머니들과 안면을 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목욕탕에 와?’라고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지. 혼자 고민했는데 그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말이지 경쾌한 것이었다. 동네에 숨은 맛집이 어디인지, 강아지 미용은 어디에서 시키는지, 아들보다 딸이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뭔가를 질문하면 곧바로 답이 돌아온다. 어떤 고민거리도 순식간에 해결 가능한 마성의 사우나! 쭈뼛대는 내게 애정 어린 인사를 건네는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네 목욕탕을 누비던 꼬마가 된 기분이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다.목욕탕에 가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욕장은 금방 사람들로 채워진다. 분주하게 자기 몸을 씻는 손짓. 사우나에 앉아 있으면 들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선풍기 앞에서 머리카락을 말리며 깔깔대는 여자들. 역시 나는 이런 세상이 좋다. 생각이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해지는 때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목욕 바구니를 집어 든다. 수증기가 부옇게 피어오른 목욕탕에 입장하는 순간, 나를 한 겹 벗겨내는 신비한 세계로 발을 디딘 것만 같다.

2023-12-05

정의의 탈을 쓴 희롱과 저주

교사와 여고생이 실랑이하는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을 제지하려 교사가 가방을 붙잡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함께 잡힌 게 발단이 됐다. 학생은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따졌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여고생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영상을 찍는 친구의 킥킥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교사의 훈계는 맥 빠진 듯 들렸다.난리가 났다. 댓글창엔 “교권 추락의 현주소”라며 서이초, 호원초 사건과 묶어 탄식하는 글, 학생인권조례와 촉법소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 가정교육을 질타하는 글이 넘쳐났다. 다수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 백여 개에서 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만큼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이다. 특이한 건 다른 이슈들은 기사마다 ‘베댓’(공감수가 많은 댓글)이 다양한 데 비해 이 사건 기사들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한결 같다. “꼬락서니 보니 어떤 인생을 살지 뻔하다”는 것.영상 속 학생은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 모범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선생님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 없음’이 합해지면서 물어뜯기 좋은 빵이 됐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 어른들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타올라 말했다. “룸망주”(룸살롱 유망주), “귀한 딸 밤마다 어디 출근하는지 알면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 “자퇴하고 술집 취업?”, “노래방 도우미”, “교복 보면 수준 보임. 앞으로 막 살겠군”, “탬버린 흔들고~”, “나가요”(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은어)라고.정의라는 가면을 썼지만 혐오의 민낯이 고스란히 보인다. 저열한 인상비평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천박한 성희롱이다. 성별 및 세대별 댓글 비율을 보면 40대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복 치마 줄여 입었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었다고 딸뻘 여학생더러 “나가요” 운운하는 게 과연 올바른 훈육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인상비평이니 관두겠다.치마가 문제인가 행실이 문제인가? 이미지와 행실이 짝을 이뤄 확증편향에 박차를 가했겠으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면 점집을 차려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황 안에서만 판단한다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장차 보이지 않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교사에게 대든 걸 나무라면 된다. 교복이 불량한 걸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봐라. 고작 한 순간 인상으로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폄하하고 저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대들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다면? 교복 치마는 상대적 조건일 뿐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댓글을 단 이들은 “모든 룸살롱 여종업원은 짧은 치마를 입는다. 여고생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므로 여고생은 룸살롱 여종업원이 될 것이다”라는 유치한 삼단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솔직해지자. 훈육이 아니라 희롱하고 싶었다고, 걱정이 아니라 저주하고 싶었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행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에고가 강하고 별 이유 없이 기성세대에 피해의식을 가질 때다. 당신들은 안 그랬나? 1990~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오토바이 폭주하고, 교복을 ‘쫄바지’, ‘항아리바지’로 줄여 입거나 아예 ‘똥 싼 바지’로 늘여서 “온 동네 다 쓸고 다닌다”며 등짝 맞던 세대가 지금의 40대다. 선생님한테 대드는 일이야 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교권 추락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낭떠러지로 몬 결과가 아닌가? 정작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자식 귀한 걸 모르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40대다.사진과 영상은 많은 걸 말하지만 파편이자 단면일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나중엔 실재와 무관하게 자립한다. 영상 하나가 한 소녀의 미래에 ‘막장 인생’ 낙인을 찍은 것처럼. 해당 학생과 영상을 촬영한 학생 모두 선생님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다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잘한 건 없으니 반성해야지. 그 반성을 통해 성숙해야지. 검정고시든 취업이든 꿈을 향해 나아가야지.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모르겠다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렴. 너는 귀한 딸이다.

2023-11-28

삶의 진주 목걸이 꿰기

급작스레 떨어진 기온 탓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겨울날. 느릿느릿 산책하던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캄캄한 어둠으로 잠긴 아침은 평소보다 더 눈을 뜨기 힘들게 되었다. 급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는 ‘나약함을 드러내라’며 말을 건네 왔다.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필 스터츠(Phil Stutz)와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윌 스트리트’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등장한다. 조나 힐은 스터츠 박사와 만나 습득한 심리 치료 기술을 소개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불가능을 상징하는 목소리를 스터츠 박사는 X-파트로 명명한다. X-파트는 비판하는 자아이다. 반사화적이며 불가능을 상징한다. 스터츠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X-파트를 없앨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X-파트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를 마주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면 성장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의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가지 측면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을 인정하고 행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럴 때 스터츠는 ‘진주 목걸이 기법’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진주알 하나다. 진주알 하나하나에 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진주알로 대입해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어찌저찌 진주알을 실에 꿰었지만 진주알 속에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이물질 탓에 진주알은 매끄럽지도 못하고 거무튀튀한 탓에 유독 튀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진주알 꿰기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진주알 속엔 이물질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진주알은 진주알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진주알 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 진주알을 꿰어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발판 삼아 진주알 꿰기에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믿음만 있다면 삶이라는 진주 목걸이는 꽤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는 환경 탓에 혼란스러웠고, 현재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공했고 실패했느냐의 초점에 맞추어 오랜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고 빠른 흐름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X-파트에 가두어 더욱 나약해지기만 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습득한 ‘진주알 꿰기’ 기술은 X-파트를 마주하는 데에 진취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도와주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 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의 나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거의 대부분 수치스러운 기억이거나 타인은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저 그림자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다시 뒷걸음치게 된다. 스터츠 박사는 그림자는 결국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과거의 수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스스로 파괴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터츠 박사 또한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어렵다. 그 또한 어린 스터츠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X-파트가 있었고 그 속에선 그저 힘없이 나약한 인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터츠 박사 또한 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취약성을 더 세밀하게 마주한다. 그는 취약성을 마주하며 마치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발견한 건, 그는 그림자를 드러내어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거듭 진주 목걸이를 꿰어가며 고통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찰나의 장면에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기가 생겼고 동시에 삶의 방향이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11-28

Long live the King

그는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직감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는 세간의 평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16년 ‘플레이어 트리뷴’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부담감에 대해 토로했다. 그의 이름은 이상혁, 본명보다는 페이커라는 닉네임으로 더 유명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게이머이다.사실 나에게 페이커는 동시대의 스타는 아니다. 삼십대 중반의 아저씨에게 이상혁은 왠지 다음 세대의 스타 같다는 느낌이다. 내가 한창 리그 오브 레전드를 보던 2013년 무렵, 페이커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다만 좀 남다른 신인. 데뷔 첫 해에 리그와 롤드컵을 모두 재패하고 리그 MVP를 석권한 천재 신인의 등장. 하지만 페이커의 등장이 나에게 썩 달갑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의 등장은 세대교체의 순간과도 같았고, 이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거라는 선언과도 같았으니까. 실제로 페이커의 등장 이후 평균 데뷔 연령이 갈수록 낮아지기 시작했고 프로게이머들의 평균 연령 역시 급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통계를 보자면 그 느낌이 마냥 느낌뿐이었던 건 아닌 것 같다.이후로 나에게 페이커는 단지 어린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한 프로게이머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했던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이십 대 중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정말 달랐다. 평균 연령이 극도로 낮아진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프로 씬에서 이제 그는 고령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선수로 손꼽히며 SK T1이라는 강팀의 주장 겸 파트 오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제 그는 세계 최초의 첫 30대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를 바라보고 있다.이쯤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가 더 이상 평범한 선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한, 리그 오브 레전드를 비롯한 모든 E스포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다.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는 종목에 국한되지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마치 조던이 시카고 불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면서 NBA를 대표하고, 궁극적으로는 농구라는 종목 자체를 대표하는 스타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걸 넘어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전해준 사람이었던 것처럼.내가 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자신의 말을 증명하고자 항상 노력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선수 생활이 항상 탄탄대로였던 건 아니다. 매년 그는 슬럼프 설에 시달려야 했고, 이제는 퇴물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모든 선수가 그를 노리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가 항상 승리했던 건 아니다. 그는 때때로 패배했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으며,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시작했다. 자신의 직감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순간에도,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에도, 다른 선수들이 자신을 앞질러 가고 있다는 평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부담감에 시달리고 자신을 향한 부정적 평가와 의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할 뿐이다. 그렇기에 2016년에 그가 쓴 기고문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건 그가 단지 천재 선수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는 것, 우리와 똑같은 부담감과 고뇌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번민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컴퓨터 게임에 국한된 스타가 아니다. 그는 세대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어쩌면 지금 모든 시련에 빠진 모든 사람들조차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메시지이다. 우리를 둘러싼 부정적인 메시지에 결코 휘둘리지 말라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지금의 패배가 너를 규정짓는 게 결코 아니라고.잠시 후면 그의 통산 여섯 번째 롤드컵 결승 경기가 펼쳐진다. 아마 이 글이 게재될 무렵에는 우리 모두 결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가 패배하더라도 혹은 승리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그의 마지막이 아니니까. 그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고, 그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 Long live the king. 언제까지고 그의 삶을 응원한다.

2023-11-21

자신에게 안녕을 고할 때

요즘 아버지는 자주 마지막에 관해 말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퇴직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반평생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온 힘을 다해 일궈왔던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마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나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보단 주변부를 두리번거리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손에 쥔 것이 없기에 놓을 것도 없다. 나는 시작을, 아버지는 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아버지는 후련해 보이기도 아쉬워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선 떠나는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고 매시간 후회 없이 보냈다는 아버지. 그렇기에 일터를 벗어나는 것이 섭섭하지만 귀하고 기쁘다고 했다. 그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미래의 나 역시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나의 세계에 안녕을 고할 수 있을까?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마지막 작품으로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마케팅을 하지 않는 마케팅으로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꽤 흥미롭다. 은퇴작이라는 표제를 내어놓은 만큼 자기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태도에 감명 받기도 하고, 이전 작품들만큼 난해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든가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영화라는 평도 있다.미야자키 하야오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는 이번 작품을 무척이나 애틋하게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이제 정말 그를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전쟁 중인 일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전개된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을 하게 된 것이다. 현실이 탐탁치 않은 마히토는 정체불명의 왜가리 한 마리를 만나고, 탑에 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중 사라진 새어머니를 찾아 탑으로 향하게 된 마히토는 새로운 세계에서 일련의 놀라운 사건을 겪는다.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죽음에 관한 기조가 흐른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여주는 도입부터 주인공인 마히토가 향하는 낯선 세계 역시 시공간이 완전히 뒤엉킨,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죽음의 이미지는 조금 더 거시적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개인의 실존적인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은 마히토가 빠져나온 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전언과도 같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라는 왜가리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떤 세계가 닫히면 또 다른 세계는 열리게 되어 있다. 탑의 이야기는 끝났고 마히토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 소년이 만나게 될 세계는 결코 이상적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계속될 것이며 도처에 악의의 흔적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마히토에겐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갈 힘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친구를 사귀는 일이라는, 소년의 외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늘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그렇기에 모두는 특별하고 소중하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역시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다. 서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마지막이 누군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마지막이 있기에 시작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나의 아버지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 소진하지 못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씩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터를 떠나는 일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아버지처럼, 또 마히토처럼 언젠간 나 역시 나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 역시 스스로가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떻게 마무리를 할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2023-11-21

한 번 더 질풍 같은 용기를, 싱어게인!

JTBC 예능 프로그램 ‘싱어게인 3’의 인기가 뜨겁다. 과거에 활동을 했지만 무대에서 멀어져 잊혀진 가수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를 불러 목소리는 익숙한데 이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얼굴 없는 가수’들, 그리고 대중의 주목과 관심이 없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묵묵히 자기 음악을 해온 무명 뮤지션들이 싱 어게인(sing again), 다시 노래 부를 기회를 얻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이다.화제가 된 참가자들이 있다. 우선 1회에 출연한 참가번호 5번 가수다.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깊고 묵직한 허스키 음색으로 주목을 끌더니 전설적인 블루스 아티스트 B.B.킹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블루지 기타 연주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자신만의 색채로 완벽하게 소화한 그는 경연 최초 ‘올 어게인’(모든 심사위원의 합격표)을 받으며 2라운드로 진출했다.그의 정체는 실력파 뮤지션 김마스타다. 홍대를 중심으로, 또 전국을 돌며 노래를 부르는 방랑가객이다. 무대에서 보여준 뛰어난 음악성,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음색도 여운을 남겼지만 무대 전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은 큰 울림을 줬다.“다들 요즘 음악을 너무 목숨을 걸고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목숨 걸고 안 합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거지. 목숨은 하나지만 인생은 기니까.”꿈을 위해, 성공을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하다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의지를 잃은 채 꿈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속적 성공을 못 이루면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절망하는 이들 또한 많다. 그런 세태 가운데 인생을 걸고 온전히 노래 한 곡을 부르는 게 최종 목표라는 김마스타의 말은 아름다운 잠언, “speaking words of wisdom”(비틀즈, ‘Let it be’)으로 들린다.며칠 전 방영된 3회에서는 2030세대의 애국가나 마찬가지인 만화 주제가를 부른 가수가 등장했다. 참가번호 74호. 1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라고 했다. 몹시 긴장한 그는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몸을 떨었지만 전주와 함께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대한민국 전체를 전율시켰다. 그가 부른 노래는 바로 응원가로 익숙한 ‘질풍가도’. 특히 2030세대는 청소년기와 사회초년생 시절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드넓은 대지에 다시 새길 희망을 안고 달려갈 거야 너에게. 그래 이런 내 모습 게을러 보이고 우습게도 보일 거야. 하지만 내게 주어진 무거운 운명에 나는 다시 태어나 싸울 거야. 세상에 도전하는 게 외로울지라도 함께해 줄 우정을 믿고 있어. 한 번 더 나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5년 만에 다시 잡은 마이크임에도 엄청난 성량과 단단한 고음으로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결과는 올 어게인. 심사위원 선미, 코드쿤스트, 규현, 사회자 이승기 등 ‘질풍가도’와 함께 성장한 세대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유튜브에 공개된 방송 영상은 하루만에 370만 조회수가 넘고, 댓글 1만개가 달렸다. 하나 같이 “신나고 힘이 나는 노래인데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살하려는 마음을 되돌려준 노래, 또 누군가에게는 실패를 극복하게 해준 노래, 힘겨운 시절에 많은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를 준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코드쿤스트는 “이 노래로 저희에게 용기를 주셨으니, 이젠 용기를 받으실 차례”라며 74호 가수를 격려했다.유정석. 애니메이션 주제가 외에 별다른 활동을 못한 무명가수다. 만화 방영 후 7년이 지나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유명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식도암에 걸린 누나를 간병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누나도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도 루게릭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중 전신마비와 우울증을 앓다 겨우 회복했다. 그 슬프고 아픈 시절을 지나 15년 만에 “질풍 같은 용기”를 우리에게 외친 그의 무대야말로 ‘싱 어게인’이다. 최종 우승자를 가릴 때까지 경연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 희망의 노래를 다시 들려준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이미 ‘올해의 방송’이다. 오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다시 노래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질풍 같은 용기 있기를!

2023-11-14

삶의 틈 속에서

수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집 근처 카페에 앉아있다. 한참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많은 수요일 오후에 왜 한가롭게 이곳에 앉아 있느냐 하면, 오늘따라 유독 하루를 버텨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요즘 들어선 잠을 도통 잘 못자고 있다.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나는 것도 같은데 일어나면 그 꿈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나쁜 찝찝함이 남아 있을 뿐. 오후 반차를 쓴 김에 밀린 잠을 자볼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날씨가 너무 좋기도 하고 햇빛을 좀 쐬어야 할 것도 같아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 이 카페는 5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으로, 통유리창이 있는 고층 카페에 커피도 맛있어서 꽤 좋아하는 곳이다.수많은 버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짧은 주기로 바뀌는 신호등과 흔들리는 나무, 형형색색 커다란 간판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얼마나 적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북적이는 대도시의 거리를 동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날은 내가 얼마나 작은 인간인지 지나치게 화려하게 비춰지는 탓에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니 일순간 유리창에 스무 살 중반의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일하느라 더러워진 흰티를 두터운 외투 속에 꽁꽁 숨겨 놓고 시집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줄 씩 읽어 내려갔던 오기의 순간이.그리곤 지금 다시 멍하니 내가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벌써 이곳에 자리 잡은 지 5년이 흘러가고 있었고, 2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 서른을 앞두고 있다. 서른을 앞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워졌을까? 생각하다보면 잘 모르겠다. 그저 기차 탑승 시간을 자꾸만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반복적으로 나의 어떤 부분이 변화했는지, 또 어떤 게 변하지 않은 것인지 거듭 생각하며 초조해지고 있는 것이다.지금 카페 테이블 위엔 최지은 시인의 시집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가 놓여 있다. 빛 속에 잠긴 활자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내가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는 뜨겁고 후덥지근한 세계. 몇 편 읽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딴청을 피우고 만다.어린 날 내가 꿈꾸었던 글쓰기의 열망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당혹스럽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바뀐 건 어떠한 희열도 바람도 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무거운 뒷목과 굽은 등, 자꾸만 앞으로 말리는 어깨 등 못난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최근 5년 전 친하게 지냈던 사람에게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 반갑고 기쁘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큰 공백이 생기며 아주 많은 부분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이의 변하지 않은 신뢰나 배려, 특유의 말버릇 같은 것에 대해 찾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고, 결국 머쓱하게 웃으며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른 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다시금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이곳도 알게 모르게 많은 곳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지인이 일하던 휴대폰 매장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많던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 했던 호프집은 화려한 헬스장이 들어섰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 풍경이 처음은 흥미롭다가도 과거가 지워지는 것만 같아 쓸쓸해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앞자리가 바뀌는 나이 때문일까.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아 벽에 기대어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게 다가와 잠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사람이 있다. 근래 가장 크게 변화한 건 이렇게 다정하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고, 덕분에 성급한 불안감을 아무렇지 않게 잠잠히 눌러 볼 수 있다는 것이다.별다른 대화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영화 한 편을 튼다. ‘우리도 사랑일까’의 마지막 장면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야. 그걸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다 메꿔가면서 살순 없어.) 삶의 권태를 느끼는 주인공 마고에게 언니 제럴딘은 삶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허망하고 부족한 부분을 느끼면서도 감내하고 채워가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마고에게 알려 준다.지금 잠시 꿈과 이상, 그리고 열정을 잃어버렸다 한들 인생엔 틈이 있기 마련이니 더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심란해지지 않아도 된다. 삶은 완벽하지 않고 이 또한 작은 해프닝이 될 테니까.

2023-11-14

어른의 아지트, 순대국집

나의 취미는 요리다. 그렇다고 집에서 빵을 굽거나 파스타를 하는 건 아니다.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먹는 게 좋달까. 코로나 시절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어렵다보니 집에서 혼술을 하는 취미가 생겼는데, 매번 시켜먹기가 부담스러워 간단한 요리를 해먹다 보니 생긴 취미다. 처음에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찌개 종류부터 해먹기 시작했는데, 요즘엔 유튜브에 편리한 레시피가 많아 이것저것 해먹어보는 중이다.하지만 그런 나도 집에서 도저히 해먹기를 포기한 술안주(?)가 두 개 있는데, 감자탕과 순대국이다. 둘 다 30대 남자의 소울푸드 같은 요리인데, 집에서 하자니 손이 너무 많이 가기도 하고 냄새가 온 집안에 남다보니 집에서 해 먹는 건 아예 포기했다. 하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인지라, 감자탕이나 순대국에 혼술이 땡기는 날이면 집 근처의 가게에서 포장을 해 먹곤 한다.그러다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사실 순대국밥은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감자탕은 그래도 포장을 해서 먹어도 우거지며 고기며 참 맛있게 먹고 밥까지 뚝딱 볶아먹는데(배가 아무리 불러도 볶음밥은 못 참는다. 소주 안주로 볶음밥을 어떻게 참아) 이상하게 순대국은 집에서 먹으려면 손이 안 간다. 분명 가게에서 먹을 때랑 똑같이 해먹어도 도저히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희한한 일이다.사실 나에게는 좋은 순대국 집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맛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술을 마시고 할 때는 맛보다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가 있다.하나는 냄새. 자고로 순대국 집은 돼지고기와 부속고기를 오래 삶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색. 벽지며 천장에 살짝 누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주인이 너무 친절하지 않아야 한다. 가끔 말을 걸고 필요한 거 있냐고 묻거나 반찬을 아무 말 없이 리필해주는 경우들이 있는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친절이라면 친절일 테지만, 이상하게 부담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반찬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로썬, 그런 친절은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어쩌면 순대국의 맛이라는 건 단지 음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요소를 통해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적당히 허름해서 격식 차릴 필요 없는 그 느낌 속에서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야구를 보며 순대국을 기다릴 때의 그 여유로움. 시게 익은 김치와 깍두기를 한 입씩 먹어보고, 양파와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 따라 미리 마실 때의 그 알싸한 느낌.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순대국에 숟가락을 미리 담궈두고, 정구지와 새우젓, 다대기와 들깨가루, 모자란 간은 소금 살짝 넣고 고추기름과 마늘 다진 게 있는 집에선 그것들을 살짝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재료들이 잘 섞이게 만들 때의 그 기분. 숟가락을 꺼내 입으로 슥 해주고, 그 맛에 소주를 한 잔 비우곤 국물을 마실 때의 그 따끈한 맛이란….그렇게 소주를 한 잔 한 잔 비우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 일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분도 든다. 어쩌면 내가 순대국에 소주를 좋아하는 건 맛보다는 그런 일련의 느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오늘 열심히 살았다, 이제 술도 한 잔 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그냥 쉬자하고, 뇌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지는 그 기분이 너무나도 좋다. 그런 나에게 순대국집이란 지치고 힘들 때, 구석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찾는 나만의 작은 아지트인 셈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작년 이사를 했을 때에도 나는 제일 먼저 순대국 집부터 찾아다녔다. 맛과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허름함을 갖춘, 혼자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숨어들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 신기하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순대국 집을 하나 찾고 나면, 비로소 새로운 동네와 친해진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도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들고. 여기서도 이런 저런 일이 많겠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뚝딱하면 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오늘도 순대국 집에는 수많은 혼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문득 그 모습들이 살아고자 힘껏 힘을 내는 모습들 같아 측은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런 장소가 하나쯤 필요한 것 아닐까?누구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따끈한 국물과 차가운 소주에 온 몸을 느슨하게 풀어줄 시간.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간과 장소가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2023-11-07

그림 밖에 있는 사람

얼마 전, 동생이 참여한 회화전이 벨기에에서 열렸다. 여러모로 기쁜 일이니만큼 나도 동행하여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오프닝이 끝나면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할 계획도 세웠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모름지기 먹고 마시고 아무렇게나 늘어지는 시간에 가깝지만, 이번엔 달랐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다른 것보다 역시 가장 기대되는 건 미술관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명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모조리 섭렵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배낭을 짊어졌다. 다리가 퉁퉁 붓고 온몸이 지끈거려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떠한 미적거림도 없이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것들을 마주할까, 어떤 작품이 나를 놀라게 할까,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 덕분이었다.참 신기하다.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작품이 그 작가 자체를 명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또 무엇을 감추고자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는지. 작가는 작품 내부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사실 모든 것을 발화하고 있다. 그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 또다시 느꼈다.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박물관과 미술관을 들락거리는 내내 우리는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책에서만 봤던 작품들이 바로 앞에 놓여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그리스 조각부터 중세 회화, 르네상스를 거쳐 근현대 미술사를 빛낸 작가들의 작품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발길을 멈췄다. 작품을 한참을 보고, 또 들여다봐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였다.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굉장한 감흥을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매체에 이르기까지 고흐의 작품을 인용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고흐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상했다. 넘치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작품이 슬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서, 그림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만 그려졌기 때문이었다.‘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정신병동에 입원하기 일 년 전에 그린 작품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고흐는 미래에 관한 낙관을 꿈꿨다. 부서지는 햇빛이 아름다운 프로방스 지역으로 이사를 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실패만 거듭하던 예술가에게 희망적 예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여전히 호기롭게 캔버스 앞에 서서 붓을 쥘 수 있었던 건, 캄캄한 어둠 속 저 멀리 보이는 한 줄기 빛의 존재 덕분이었으리라. 그림의 시간적 배경은 밤이다. 강변으로 늘어진 집을 밝히는 불빛이 있다. 하늘을 수놓는 별빛도 있다. 강의 표면에 빛이 눅진하게 번져간다. 멀리서 보면 강과 하늘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하늘의 별빛이 모두 하나인 것만 같다.고흐의 밤은 푸르다. 푸른 밤은 차갑다. 그리고 외롭다. 푸른 밤을 밝히는 무수한 빛이 있다. 그렇다고 쓸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극대화된다. 반짝이고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는 관찰자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 빛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채로 차갑고 외로운 공간 속에 서 있다. 그저 물감을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서. 어둠이 있기에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나고, 슬픔이 있기에 강가의 풍경은 눈물겹게 아름답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의 오랜 후원자이자 동생인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밝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이렇듯 그는 빛을 고통이라고 말한다. 밝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아프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고 있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 고흐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야말로 그가 해석한 빛에 가까울 것이다. 아름다우나 고통스러운 것. 고통스럽기에 아름다운 것. 마침내 그는 자신을 끈덕지게 따라다니는 하나의 질문을 꺼내놓는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거기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흐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붓을 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덧붙인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텅 빈 캔버스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낙관과 무의미로 끝날 수 있다는 불안. 어쩌면 그건 삶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본다. 그림 밖에 서서 그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캔버스가 채워지면서 어떤 이야기가 탄생하게 될지 말이다.

2023-11-07

가을 장미와 음악 생각

가을은 음악을 깊은 사색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숨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에 텅 빈 공명을 만드는 계절이다.햇빛은 녹슬고, 바람은 속을 시리게 한다. 불현듯 쓸쓸해지거나 쉽게 회상에 잠기는 것을 두고 흔히 가을을 탄다고 한다. 날씨와 풍경의 변화 등으로 신체의 리듬이 변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증후군인데, 감성이 풍부해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지며,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그렇다면 이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가을을 타는 이에게 음악만큼 좋은 약은 없다.가을엔 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듣는다. 폴 사이먼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과 노랫말이 아트 가펑클의 솜사탕 같은 하이 테너 보컬로 울려 퍼질 때, 귀에도 단풍이 든다. 아침엔 ‘Wednesday morning 3AM’이나 영화 ‘졸업’에서 밴 크로포드가 연기한 로빈슨 여사의 테마곡 ‘Mrs. Robinson’을 듣는다. 무명 시절, 폴 사이먼의 연인이었다가 그가 유명해지자 그 명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며 사이먼을 떠난 캐시라는 여인을 노래한 ‘Kathy’s song’, 또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그린 ‘April come she will’을 오후에 들으면 눈물이 맺힌다.이 계절 노을이 지는 안양천변을 걸을 때는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에른스트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좋다. 타오르고 퍼붓고 맹렬하던 것들이 쇠잔해지는 풍경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바이올린 선율에 붉은 넝쿨로 열리는 여름의 마지막 장미를 떠올리면서, 내가 가진 음악의 기억은 엘튼 존으로 비약한다.장미는 여름꽃이지만 가을에 피는 경우도 있다. 가을 장미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다. 낙화를 앞둔 쓸쓸함에 꽃잎의 빛깔은 어둡고, 차가운 서리를 머금으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가을 장미처럼 쓸쓸하게 진 두 여인에게 바치는 노래다. 한 사람은 노마진 베이커, 즉 마릴린 먼로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다이애나 스펜서,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비다.이 곡은 원래 마릴린 먼로를 애도하는 곡인데,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 때 다이애나와 절친했던 엘튼 존이 자신의 원곡을 개사해서 불렀다. 원곡의 첫 소절인 Goodbye Norma Jean(노마진 베이커는 마릴린 먼로의 본명)을 Goodbye England’s Rose로 바꿔 부른 이 곡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비가 내리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모르면서. 당신을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난 아이에 불과했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고 당신의 전설도 꺼져버렸죠”라는 원곡의 후렴구는 “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해가 져도 사그라지지 않고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 당신의 발자취는 영국의 가장 푸른 언덕을 따라 항상 이곳에 깃들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지만 당신의 전설은 영원할 거예요”로 개사되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엘튼 존은 공연에서 종종 원곡을 부르긴 하지만, 1997년 버전의 ‘Candle in the wind’는 부르지 않는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추모하는 곡을 상업적인 자리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 곡을 라이브로 부른 건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마릴린 먼로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둘 다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화려한 장미처럼 보인 삶이었지만 사실 바람 속의 촛불 같은 생이었다. 대중에 의해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로 살아야 했던 노마진 베이커, 영국 왕실의 정치적 목적과 대외 선전의 도구로 살아야 했던 다이애나 스펜서. 이 둘의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르면서도 꼭 닮아 있다. 노마진 베이커는 20세기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다이애나 스펜서는 전 세계의 헐벗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전해준 봉사와 희생의 상징으로 인류에 기억되고 있다. 둘 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로 세상에 남은 것이다.가을은 음악을 깊은 사색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세피아톤으로 펼쳐진 가을 햇살 아래,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팍팍하고 지루한 것인가.

2023-10-31

조용하고 열렬한 싸움

나를 빛내게 하는 것은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아니다. /언스플래쉬 지난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 슬슬 새로운 운동을 도전해볼까 싶어 주말마다 배드민턴장에 나가고 있다. 배드민턴을 많이 쳐본 적이 없어 막상 코트 위에 서니 다소 자신감이 떨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드민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배드민턴을 치는 동안은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날쌔게 날아오는 공을 끈질기게 바라보다 정확한 타이밍에 공을 쳐내야만 상대의 공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잠을 깨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지 아니면 든든하게 배를 채워줄 따뜻한 라떼를 마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불현 듯 떠올라도 잽싸게 저 멀리 날려 보내야 한다.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동안 날아오는 공은 어느덧 바닥에 구르고 있으니 말이다.상대에게 공을 보내는 흐름 또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다 공을 치기 쉽게 주면 상대는 그 틈을 타서 강한 스매싱과 스트로크를 사용하여 거센 공격을 퍼붓는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으면 이미 승리의 흐름은 상대의 손에 쥐어져선 상대가 예측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 게임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선수들의 시합 영상을 보면 숨 쉬는 법을 잊을 정도로 몰입된다. 수비를 하는 동안은 춤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다가도 공격할 타이밍이 되면 다이빙하듯 등을 구부리며 잽싸게 공을 보내기 위해 돌진한다. 그렇게 공이 오가는 동안은 마치 둘이 하나가 되어 추는 쌍무(雙舞)가 펼쳐지는 무대를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배드민턴은 몸을 던져 수비를 함과 동시에 공격의 방향까지 생각해 내어야 한다는 것도 참 매력적이다. 방어와 공격이 빠르게 오가는 동안은 땅과 부딪히는 운동화의 마찰 소리와 라켓으로 공을 칠 때의 타구음 소리만 날 뿐. 코트라는 주어진 반경 안에서 불필요한 소음 없이 이어지는 조용하면서도 열렬한 싸움이란 점이 더욱 마음에 든다.최근 여러 모임 자리를 가게 되면서 불필요한 상황에 놓여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또는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다거나, 필요에 따라 타인을 낮추어 스스로 돋보이게 만드는 거친 언행을 보며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그런 부담스러운 대화에 비하면 코트 속 불필요한 소음이 제거된 채 열렬히 경기에 임하는 배드민턴 플레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배드민턴 경기에서 욕심은 과한 공격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공이 코트 밖으로 벗어나는 범실을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이기고 싶단 욕망만으로 힘을 너무 많이 주거나 공격의 흐름만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돌아오는 건 실패라는 결말뿐이라는 것이다.그러니 낮게 몸을 웅크리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공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든 빠르게 칠 준비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급하면 공을 빠르게 치게 되고 불필요한 생각에 빠져 들면 타이밍을 놓쳐 공을 쳐낼 수 없게 된다. 나의 실력과 장점을 잘 아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어떤 점에 강하면서 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의 흐름을 이끌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잠이 들기 전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의 안세영 선수 경기 영상을 본다. 결승 전 경기도중 심한 무릎 부상이 크게 왔음에도 그녀는 기권하지 않고 오히려 경기를 리드한다. 자신의 소신과 기량을 펼쳐 오히려 상대를 위압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하고 스스로 개척해나갔을 노력의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나를 빛내게 하는 것은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아니다. 타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미리 내가 쥐었다고 해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아닌, 그 사람만이 가진 특유의 정신력 그리고 고난을 대하는 집념과 기량에서부터 오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일요일 오후, 점심에 다다를 때 쯤 라켓과 셔틀콕을 챙기고서 실외 배드민턴장으로 향한다. 저 하얀 코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수많은 고난 사이에서 어떤 집념을 가지고 저 수많은 공을 쳐낼 것인지. 금요일 아침부터 든 생각을 일요일 오후가 다되어서야 황급히 마무리 지어 본다. 고귀한 기량은 불끈 쥔 두 주먹과 튼튼한 다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월요일을 조금 더 가뿐하게 맞이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스매싱해본다.

2023-10-31

생존 너머

좀비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는 의외로 사람에 대한 드라마다. 물론 좀비가 주인공일 수는 없으니(그들은 지성이 없고, 따라서 말을 할 수도 없다) 인간이 주인공인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 여타의 좀비물과 달리 ‘워킹 데드’는 시즌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의 흐름이 달라진다. 처음으로 이야기가 달라지는 건 ‘가버너’라는 적대적 인물이 등장할 때이다. 좀비들로부터 살아남고자 사투를 벌이고, 잃어버린 생존자를 수색하고, 궁극적으로는 안전지대를 찾아가는 것이 목표였던 1~2시즌과는 달리, 3~4시즌은 서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에피소드가 중심에 놓인다.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은 시즌 4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종착역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기차의 종착역에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생존자를 포섭하기 위해 “모든 이를 위한 안식처. 모든 이를 위한 공동체”라는 문구와 함께 자신들의 위치를 새긴 홍보물을 도시 곳곳에 부착하고 다닌다. ‘가버너’와의 싸움 이후로 살 곳을 잃어버린 주인공 일행은 홍보물에 새겨진 경로를 따라 종착역을 향해가지만, 그들이 도착한 종착역이라는 곳은 사람을 위한 안전지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먹는 식인종들의 캠프였다.작중 짤막하게 스쳐지나가듯 설명되지만, 쉽게 말해 이들은 강도들에 의해 죽을 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처럼 변해버린 사람들이다. 타인의 생존물자를 약탈하고,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생명마저 빼앗는 강도들에게서 살아남으려 싸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타인의 생명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되어버렸다는 설정은 ‘워킹 데드’ 세계관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라는 니체의 격언을 떠오르게 만든다.그렇기 때문인지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애쓰던 주인공 일행은 이들과 조우한 이후 완전히 변해버린다. 더는 타인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이후엔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생각마저 하는 주인공 일행의 모습은 좀비들이 창궐한 세계에 맞는 현실적인 모습이기에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이제 그들에게는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시즌 종착역 주민들이 등장하는 시즌 5~6의 이야기는 유독 비참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생존에 매몰되어 서로 반목하고 타인을 위협하고, 때로는 자신의 일행을 통솔하기 위해 앞선 적대적 인물의 면모를 고스란히 반복하며 전체주의적인 태도마저 보여주는 주인공의 태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계가 좀비의 창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시즌이 지속됨에 따라 이들은 나름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어디에도 그들을 위한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안전지대를 구축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거듭 인간과 사람의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고 고뇌하며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된 사회에서, 사람은 타인에 대한 개념을 축소시킨다. 타인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제거해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사람을 오직 경쟁자로 인식한다는 건 그 사회가 생존 외에 어떠한 가치도 더는 존속할 수 없게 된 위험 상황임을 의미한다. 생존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세계에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다.동물의 한 종으로서의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경쟁 상태. 그건 ‘워킹 데드’의 한 에피소드가 그러했듯 문명이 아닌 야만의 세계에 불과하다. 한 사회가 어떤 수준에 위치하는가는 이처럼 타인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증상적으로 나타난다. ‘워킹 데드’라는 드라마가 현실에서 더욱 씁쓸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좀비가 없는 세계임에도 오직 타인을 경쟁의 대상으로밖에는 느끼지 않는 현실이 어쩌면 좀비들로 가득한 세계보다 더 무서운 세계인 것 같아서. 그런 세계에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증오하는 인간들을 거듭 닮아간다. 살기 위해,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를 닮아가듯 식인을 하게 된 인간들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2023-10-24

유령을 믿을 때

동생이 물었다. 언니는 유령을 믿어? 재밌는 말이었다. ‘유령’이라는 실체 없는 존재보다 ‘믿음’이라는 행위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유령을 믿든 그렇지 않든, 그게 중요한 문제일까? 동생은 중요하다고 했다. 뭔가를 믿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스산한 기분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유령은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찾아온다고 하던데. 뒷덜미가 차가워졌다. 가을을 맞아 한껏 서늘해진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다.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중에 나는 법률가이며 일요일 낮에는 적어도 음악가이다. 그리고 저녁부터 아주 깊은 밤까지 나는 아주 괴상한 작가로 산다.”그의 말대로다. 호프만의 낮과 밤은 완전히 달랐다. 낮에는 유능한 법관으로서 현실적인 삶을 살았지만, 밤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로 지냈다. 반듯하고 공명정대했던 낮의 모습을 밤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골 술집에서 폭음하고 내일 따윈 찾아오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어떤 작가보다 밤의 세계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모래 사나이’가 수록된 소설집의 제목 역시 ‘밤의 이야기’다.낮은 밝고 가시적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많은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밤은 어둡다.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충동적이고 불안하다. 낯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다. 이렇듯 밤은 우리를 완전히 낯선 세계로 이끈다.호프만의 작품은 이러한 기이함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그를 환상 문학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환상 문학은 전통적인 형식의 동화와는 다르다. 환상 문학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현실적인 일상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비현실적인 요소가 일상으로 과감하게 들어온다. 이러한 뒤엉킴을 통해 기이하고 이질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그의 대표작인 ‘모래 사나이’는 불길하면서 충격적이다. 주인공 나타나엘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유모에게 모래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모래 사나이는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리”는 존재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고,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서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다. 어린 나타나엘은 모래 사나이를 목격한다. 기억 저변에 묻어두었던 모래 사나이는 그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나타나엘은 괴로워한다. “무언가 끔찍한 것이 내 삶에 들어왔다”다는 것이다. 그런 나타나엘에게 찾아온 청우계 장수는 ‘눈’을 판다며 안경과 망원경을 내어놓는다. 그에게 구입한 망원경은 나타나엘의 눈을 홀린다. 그리하여 인형을 진정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신을 믿고 도와주는 연인은 생명 없는 나무 인형으로 보게 된다. 사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망원경은 오히려 그의 판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나타나엘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눈!”이라고 소리친 채 난간 너머로 뛴다.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주인공과 모래 사나이로 대변되는 인물이 서로 겹치면서 소설은 끝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가 겪은 일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일까? 독자들로선 알 수 없다. 작품 내에서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경계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건 없지만, 작가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화하고 있다.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 한 인간을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두려움, 우리가 실제라고 믿는 것을 정말 확신할 수 있는지를.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꿈과 현실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세계를 지탱하고 있으니까. 작품의 주인공은 환상 때문에 현실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환상 없는 현실은 진짜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현실과 환상, 낮과 밤이 모두 필요하다.깊어져 가는 가을밤,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들에 관해 생각한다. 으스스하지만 왠지 모르게 즐겁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긴 밤이 지루하지 않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유령을 믿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2023-10-24

반타블랙, 찰나의 푸른빛

인도 예술가인 애니쉬 카푸어의 ‘BLACK’은 검은색 원형 조각품이다.카푸어는 반타블랙(VANTA Black)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반타블랙은 영국의 한 기업이 나노기술을 통해 개발한 새로운 색상 소재인데, 빛의 99.965퍼센트를 흡수할 수 있는 물질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이라 할 만한 순도 높은 암흑으로 만들어진 카푸어의 작품은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기묘한 매력을 지녔다.작품 앞에 선 감상자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실제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처럼, ‘BLACK’은 빛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빛마저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절대적이면서 매혹적인 검은색이다.그런데 이 완벽에 가까운 검은색도 완벽은 아니어서, 다르게 파악될 0.035퍼센트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매일경제신문 문학담당기자이기도 한 김유태 시인과 술 마시는데, 그가 대뜸 서울국제갤러리 ‘애니쉬 카푸어展’에 다녀왔다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BLACK’을 내게 보여줬다.“이 완벽한 검은색이 옆에서는 묘하게 청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몇 걸음 떨어져서 보면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하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친구의 흥분한 모습을 즐거워 하면서, 나는 스마트폰 속 카푸어의 ‘BLACK’과 김 시인이 입은 올블랙 셔츠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검은색은 오직 어둠일까?‘, ’검은색은 끝일까?’, ‘검은색은 죽음일까?’얼마 전 전남 구례 섬진강으로 쏘가리 낚시 갔다가 늦은 밤까지 강변에 있었다. 원래도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물가인데 그날따라 구름이 달을 가려 그야말로 칠흑이었다.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물소리와 몸을 뒤채는 강의 살내음 뿐. 그런데 아주 잠깐 구름의 두께가 야위는 순간 강 전체가 은은한 푸른빛이 되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때 우연처럼, 쏘가리의 입질을 받았다. 그 찰나의 푸른빛이야말로 김유태 시인이 ‘애니쉬 카푸어展’에 전시된 ‘BLACK’에서 봤다던 어둠 속의 빛이 아닐까?세상에 완벽한 검은색은 없다. 2019년 MIT 연구진이 개발한 신물질은 빛 흡수율 99.995퍼센트로 반타블랙의 효율을 압도적 갱신했는데, 그 물질 역시 0.005퍼센트 빛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세상은 점점 더 짙은 어둠이 되어 가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선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 가지만, 학폭 피해자인 20대 여성이 스스로 삶을 버렸지만, 주윤발은 전 재산 9600억 원을 기부하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휘영 김상우 두 청년은 장기기증으로 각각 3명, 5명의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그렇기에 암흑 같은 절망의 심연 속에도 빛이 자라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검은색은 어둠이 아니다. 검은색은 끝이 아니다. 태초의 빛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광채가 검은색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검은빛인 어둠 위에 다른 빛이 입혀질 때 색(色)과 상(象)이 태어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러므로 검은색은 심연의 입구이자 출구다. 빛은 검은색에 삼켜졌다가도, 다시 검은빛에서부터 무수한 빛이 파생되고, 압도적인 덧칠색이지만 검은색은 모든 색을 돋우는 바탕색이기도 하다.우리 사회의 약자, 소수자, 아브젝트적 존재들은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안에 있다. 때로 빛은 너무 환해 물상을 분산시키지만, 어둠은 상과 상, 그림자와 그림자를 밀착시킨다. 순백의 빛이 설맹(雪盲)을 만드는 데 비해 암흑처럼 보여도 어둠은 늘 암중모색(暗中摸索)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렇게 어둠과 어둠이 서로 끌어안을 때, 새벽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부화할 때, 그 빛이야말로 빛보다 빛나는 어둠일 것이다. 타자와 연대하는 것이, 사람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일지라도 우리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으면서, 빛보다 빛나는 어둠을 온몸으로 밀면서 나아가야 하리라.지금 어둡다면 그 암흑은 곧 나타날 찬란한 빛의 암시일 것이다. 상투적인 문장이지만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던 말을 믿는다.일찍이 검은색에 관해 오래토록 탐구한 한 시인을 빌리자면 “검은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송재학, ‘주전’).

2023-10-17

쓰임에 맞게 사는 일

최근 장염을 오랜 기간 앓았다. 평범한 식사가 어려웠고 앉아 있기도 괴로울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심했다. 몸이 아프다보니 퇴근 후에는 바로 집에 가서 잠들기 바빴고, 주말엔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집은 이사 온지 세 달이 다 되어갔지만 아직도 어수선한 짐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옷장 속 서랍 안, 컴퓨터 책상 아래, 신발장 구석 등 물건들이 규칙 없이 멋대로 굴러 다녔고, 특히 냉장고 안은 언제 사두었는지 각종 식재료들이 형체만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장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어수선한 집 안에 내내 있다보니, 불필요한 물건과 청소가 필요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 뒤론 조금씩 닦고 청소하며 쓸모없는 건 비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런 나의 변화를 읽었는지 각종 청소법과 살림하는 법 영상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살림 고수들의 살림법은 대단했다. 깨끗하게 씻은 페트병을 반으로 갈라 계란 보관함으로 쓴다던가, 커피 트레이를 활용해 신발을 보기 좋게 보관한다거나 일회용 쓰레기봉지를 청소용품으로 재활용해서 화장실 벽을 닦는 등 재사용 할 수 있는 것들은 모아 한 번 더 쓸모 있게 쓰고 있었다. 수십 개의 영상을 보다보니 나 또한 재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아끼며 필요에 맞게 정리해 나가는 생활 습관은 궁상맞기 보단, 삶을 조금 더 공들여 가꾸어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살림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스스로 여러 규칙을 정하게 되었는데, 우선 외식을 자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의 고단함을 자극적인 음식으로 해소하려 했으나 이젠 가능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 꼭 살이 덜 찌고 건강한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직접 식재료를 손질하고 불에 구워 간단하게라도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저녁 식사와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도 싸고 가능한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려니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래도 건강한 음식과 깨끗한 주방, 필요한 양념과 그릇들을 언제나 여유롭게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에 안정감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또 채소와 과일은 집 근처 마트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다. 예전엔 매번 먹고 싶은 음식을 때에 맞춰 반나절 만에 배송해주는 인터넷에서 주문을 했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딱 한 번 금요일 퇴근길에 장을 본다. 기존 식재료는 모두 다 먹어치우고선 장을 보는 규칙을 세우고 필요한 재료는 미리 체크해서 필요한 것만 사서 집에 돌아온다.집으로 돌아와선 채소와 과일 손질을 한 후 야채 통에 넣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미루고 했던 청소나 정리정돈이 이젠 조금은 익숙해져 전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이곤 한다.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일정한 루틴을 통해 삶의 노하우는 생기고 노하우가 쌓일수록 점점 더 생활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나간다.늘 루틴대로 깨끗한 주방과 삶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다면 참 좋지만, 실은 몸이 아픈 날이나 피곤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배달 어플을 켜며 스스로 항복하고 만다. 아직 완벽한 살림 고수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며 그날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을 시킨다. 배달 온 음식 양이 너무 많으면 우선 용기에 소분부터 하고선 딱 먹을 만큼의 일인분만 남기고선 먹는다. 오롯이 그릇에 담긴 일인분의 몫은 오늘의 집안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줄여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집이라는 공간은 변화하고, 그럴수록 집은 나의 취향과 성격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누군가 집이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많이 나는 날에는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서랍 안의 먼지를 털고 닦으며 물건을 재정돈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닦아내고 나면 겉으로 드러나는 화가 줄고 불현듯 덧없게 느껴진다.청소는 짧게 해도 금방 허기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분노 대신 부엌 앞에 서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끌어준 건강한 간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나의 삶은 조금 더 단순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꼭 필요한 쓰임에 맞게 물건과 감정을 활용하고 소비하며 쓰는 삶,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만족감을 느끼며 가을날을 보내고 있다.

2023-10-17

꽉 닫힌 마음

명절이 지나면 자취방의 냉장고가 풍성해진다. 엄마가 싸준 음식 때문이다. 갈비부터 시작해 김치찜, 전복장, 닭발, 육개장까지. 어느 것 하나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게 없다.내가 만들면 왜 이런 맛이 안 날까? 엄마 등 뒤를 괜스레 기웃거리고 요리 비법을 배워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도 내가 만든 음식은 묘하게 싱겁거나 짜다. 엄마는 그런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다. 김치찌개 그거 김치에 물만 넣으면 되는 건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 내 말이 그 말이니까. 똑같은 재료로 맛을 내지 못하는 내 문제가 뭔지 나도 참 궁금한 것이다.그런 고뇌가 길어지면 휴대전화를 들고 배달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게 된다. 거기엔 온갖 종류의 음식이 다 있다. 한식, 일식, 중식, 양식… 휘황찬란한 요리는 물론, 아이스커피 한 잔도 속전속결로 배달되는 시대 아니던가. 태국 여행 중 먹었던 것과 똑같은 맛을 자랑하는 똠얌꿍부터 프랑스 유학파 파티시에가 만든 마카롱, 요즘 유행하는 마라탕이나 탕후루도 클릭 한 번이면 집안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그러니 몸이 지치고 힘든 날엔 자연스레 배달을 찾게 된다. 식재료를 썰고 볶아내고 가지런히 담아서 먹고 치우는 것을 생각하면 배달 음식의 가격이 꽤 합리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먹고 나서 항상 후회한다는 것. 집에서 만든 밥을 먹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다.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하다. 한두 입은 맛있는데 그 후엔 물려서 쳐다보기가 싫다. 배는 부르는데 어쩐지 헛헛한 기분도 든다. 플라스틱 용기에 음식이 담겨온다는 것도 달갑진 않다. 나의 한 끼에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저번에 주문한 동태찌개는 포장 용기가 덜 닫혔는지 국물이 흥건하게 흘러있었다. 그걸 받아들었을 때의 난감함은 배고픔마저도 잊게 했다. 가게에 항의할까 하다가 그만두지 싶었다. 일부러 뚜껑을 닫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실수한 거지. 누구나 그렇듯이.그러고 보면 엄마의 음식이 담긴 용기는 하나같이 꽉 닫혀 있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도무지 열기가 힘들었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 낑낑대고 숟가락으로 텅텅 두드려도 요지부동이던 뚜껑을 만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신경질적으로 쏘아댔다. 왜 이렇게 세게 닫았어? 아무리 해도 못 열겠단 말이야.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고맙다거나 잘 먹겠다는 말보다 반찬통 못 열겠다는 말이 먼저 나간 것에 후회하는 것도 잠시, 어떻게 알아서 잘 좀 해보라는 엄마의 말에 발끈해서 몇 마디 더 쏘아붙이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꽉 닫힌 반찬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여겨진다. 뚜껑 하나 못 여는 사람. 내가 먹을 음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걸까. 거기다 뭘 잘했다고 엄마에게 신경질을 내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너그럽게 넘어가면서 왜 엄마에겐 유독 박하게 구는 걸까. 탓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탓한 내 모습이 참 못났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엄마는 이제 반찬통의 뚜껑을 적당히 느슨하게 닫는다. 대신 비닐로 몇 번이고 감고 또 감는다. 뭐 이렇게까지 쌌대. 괜히 쓰레기 많이 나오게. 나는 또 그렇게 툴툴대면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담긴 용기를 열어본다. 맛깔스러운 냄새가 확 끼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역시나 맛있다. 감히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맛이다. 간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 적당히 달짝지근해서 감칠맛이 돈다. 이런 반찬이면 입 짧기로 유명한 나도 공깃밥 두 그릇 뚝딱 비워낼 수 있다.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면 자연스레 엄마의 손이 떠오른다. 투박하리만치 길고 곧은 손. 가끔은 엄마가 미련하다고도 생각됐다. 직장 한 번 쉬지 않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집에서 한 밥을 꼬박꼬박 먹였다. 지금도 그렇다. 명절이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내온다. 왜 맨날 저렇게 음식을 해. 그냥 사 먹지, 하면서 혀를 내둘렀던 적도 있다.알고 있다. 온 힘을 주어 반찬통을 꽉 닫는 엄마의 마음을. 외부의 먼지가 들어갈까, 내부의 것이 흘러넘칠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얼굴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난 엄마 밥이 제일 맛있더라. 나의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이 소녀처럼 와르르 웃는 엄마.그 웃음을 완벽히 밀봉된 용기에 꽉꽉 채워 아주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요즘이다.

2023-10-10

시달리는 마음

타인에게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못하는 말. ‘원래 모든 사람은 부족한 점이 있어. 부족하다는 사실에 너무 얽매이면 안 돼. 네가 가진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지.’ 친구에게든, 같이 문학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학생에게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준다. 그게 세상을 사는 꽤 좋은 마인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면서 사는 삶이라니, 너무 지치지 않나?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런 건 그저 타인의 질투어린 시선이나 동경어린 시선 속에서만 있는 것이고, 그 시선에서 살짝 벗어나보면 모든 사람은 잘난 점 한 두 가지와 부족하고 미진한 여러 가지 결여를 제각기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불완전하고, 어딘가 비틀려있고, 혹은 자신이 저지를지 모를 실수에 불안해하는 사람.그러니 너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어차피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자라고, 약간은 바보 같고, 혹은 비틀린 구석이 한 두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라고. 단지 서로 모자란 부분이 다르고 바보 같은 구석이 달라서 네가 눈치 채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게 온전히 타인을 위한 말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오히려 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타인에게 해주며 내 모자란 마음을 채우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나는 늘 내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나라든 그렇겠지만, 한국은 유독 나이에 따라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것들을 잘 충족시키며 살아오진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때가 되면 대학에 진학하고, 때가 되면 면허를 따고, 때가 되면 군대를 가고, 때가 되면 취직을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한 번도 제 때에 해보거나, 잘 이뤄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신 나름의 경력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도 있지만, 그것들이 과연 등가로 비교될 수 있는 것들일까?딱히 자기 비하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은연중에 타인에게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다. 30대 중반이 된 이후로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아직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거나,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뭔가 결격사유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처음엔 이게 나의 자격지심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나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저 필사적으로 자신이 이뤄낸 것들을 평가받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해낸 결혼을 너는 못했지. 내가 이룬 정규직을 너는 못했지. 내가 해낸 것들을, 너는 해내지 못했지 하고.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고 싶은 사람들. 예전엔 그런 사람을 만날 때면 ‘성격 참 이상하네’하고 생각하곤 넘겨버리곤 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절대 다수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그들도 자신의 결점이 두려운 건 아닐까. 그래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대신에 어떻게든 자신이 이뤄낸 요구들을 생각하고,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면서,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기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는 건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는 건 꽤 즐겁고 나름의 쾌감을 주는 일이니까.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이 꽤 괜찮은 삶을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하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조금 우울해지게 되더라도,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걸까, 아니면 극심하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걸까. 스스로든 채울 수 없는 자족감을 채우고자 타인의 삶을 멋대로 재단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적어도 건강한 마음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에 시달리는 똑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도 나도, 결국엔 똑같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시달리는 사람들인 셈이다.우리의 결여와 결점들은 누구의 시선에서 결정된 것들일까. 우리가 구태여 비슷한 수준으로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하면서, 타인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너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건 대체 누구에 의한 것일까. 내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 삶도 꽤 괜찮은데. 좀 부족한 거 있어도 제법 살만한 인생인데. 고민이 많아지는 30대 중반의 하루다.

202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