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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소리 안에서

등록일 2024-11-04 18:27 게재일 2024-11-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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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한 삶의 불안에게서 도망치는... /언스플래쉬
무미건조한 삶의 불안에게서 도망치는... /언스플래쉬

삶이라는 거대한 미션 속에서 너무 도망치고 싶거나 의기소침한 마음이 들 때쯤 영화 ‘졸업’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졸업’에선 상류층 가정에서 부모님 뜻대로 착실히 살아온 스무살 초반의 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학 수석 졸업을 마치고 집으로 금의환향한 벤은 부모님이 마련한 성대한 파티에 참석한다. 그는 상류층 집안에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착실히 순종적으로 지낸 아들이면서, 명문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명석한 두뇌의 엄친아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그의 스펙이지만 실은 벤은 계속해서 물에 잠겨 있거나 넓은 바다 위를 홀로 외롭게 부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어쩐지 떨어뜨릴 수 없다.

무언가 단단히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벤. 하지만 그런 착잡한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 시간이 흐를수록 거듭 외로워질 뿐이었다. 그러한 불안의 상황속에서 갑작스레 벤 앞에 나타난 로빈슨 부인. 그녀는 의도적으로 벤과 부적절한 관계를 취하고 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녀의 손아귀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공허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벤이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소개로 로빈슨 부인의 딸 일레인과 만나게 되고, 일레인과의 데이트 도중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점차 자신의 감정이 깊어져 가던 도중 일레인에게 벤자민 부인과의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지만 일레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니던 대학으로 멀리 떠나게 된다.

벤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일레인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대학까지 쫓아가 일레인을 다시금 붙잡아 보지만 일레인의 마음은 이미 혼란스러운 상태. 벤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일레인이라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일레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한다.

하지만 일레인은 결국 벤을 떠나 은신하며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게 되고 이를 알아챈 벤은 소식 없이 사라진 일레인의 뒤를 쫓아 결혼식장까지 난입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장면인 웨딩드레스를 입은 일레인과 손을 잡고 도망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결국 도망치는 데에 성공한 벤과 일레인은 버스를 잡아 타고선 서로를 향해 활짝 웃어보이는데 영화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둘은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착잡과 두려움, 혼란과 절망이 모두 담긴 표정이 클로즈업 되며 영화는 생뚱맞게 막을 내린다.

그 장면 속에 삽입된 폴 사이먼의 The Sound Of Silence의 곡 또한 “반갑네, 내 오랜 친구 어둠이여. 다시 한 번 말을 나누려 왔다네”, “현자의 말이란 오직 지하철 역사의 벽이나 노숙 시설의 벽 따위에 적혀 있도다. 그렇게 속삭였네, 침묵의 소리로”라는 가사가 등장하며 인생의 공허와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어우러지며 삶의 불안은 언제나 누구나 겪는 것이며, 삶의 불안에게선 절대 도망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단 메시지가 드러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벤과 일레인, 그들은 여전히 미래로부터 불안하고 현재라는 삶의 불확실함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 메시지를 전달한 영화 ‘졸업’은 1967년 개봉작이며, 개봉 당시 60년대 미국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벤은 자신의 부모님인 기성세대의 뜻에 반하여 자신의 커리어와 재력을 모두 버린 채 오직 일레인만을 선택한다는 행동이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또한 60년대 말은 베트남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로 꿈과 희망을 담은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기 보단 혼란스럽던 시대 그대로를 고스란히 담은 영화가 흥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열풍이 불었던 아메리카 뉴웨이브 시네마는 당시 미국 사회 현실을 냉철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결국 해피엔딩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굵직한 주제의 영화가 주로 등장했으며, ‘졸업’도 그 중 하나의 대표작이라 볼 수 있다.

무미건조한 삶의 불안에게서 벤과 일레인처럼 마냥 도망칠 수만은 없을 터. 그렇다고 슈퍼히어로처럼 막대한 힘으로 이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지며, 또는 언젠가는 두 눈을 부릅뜨며 유연하게 나아가는 수밖엔 없지 않을까. 가수 아이유의 아이와 나의 바다라는 곡의 마지막 가사처럼. ‘그럼에도 여전히 가끔은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만’,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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