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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내는 신호

등록일 2024-08-26 19:02 게재일 2024-08-2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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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대상을 하나씩 감사하게 기억할 때 삶은 다정한 것임을 느낀다. /언스플래쉬

최근 한 심리상담센터에서 TCI(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 성격유형검사를 받고 왔다. TCI는 Robert Cloninger 박사가 개발한 성격 평가 도구로 개인의 기질과 성격을 7가지 요소로 나누어 분석하는 심리검사다.

생물학적 요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기질’ 그리고 환경적 요인과 개인 경험에 의해 형성되는 ‘성격’을 각각 나누어 평가하여 개인의 강점, 약점, 그리고 본인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객관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검사를 마친 후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는데, 바로 기질의 위험회피(HA)부분에서의 예기불안이 만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인생에 만점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하필 심리 검사에서의 불안 부분이 만점을 받다니. 게다가 높은 두려움과 낯선 사람에 대한 수줍음까지. 나의 못난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아 와중에 얼굴이 자꾸만 붉어졌다.

그 뒤로부턴 나는 불안도가 높은 사람임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 취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멀리 떨어져 걷거나, 지나치게 좁고 거울이 없는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는다거나, 카페 테이블 모서리에 아슬아슬 걸쳐 있는 컵을 보기 어려워하는 등,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신경 쓰는 행동들이 모두 불안도가 높아서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유전적인 기질이라니 뭐 별 수 있나. 불안이 높다는 건 그만큼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거겠지, 싶어 조금씩 나에게 너그러워지고 있다.

나를 조금 더 알며 지내고 있는 요즘이지만,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좁고 어둑한 엘리베이터를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는 날에, 유난히 지독한 사람을 지하철에서 만날 때, 뭘 해도 일이 자꾸만 꼬일 때에 맞이하는 하루의 끝은 다시금 쓸쓸히 난처해진다.

그럴 때 꺼내 드는 것이 감사일기다. 감사일기는 말 그대로 감사한 것들을 일기장에 부려놓는 것으로, 하루에 감사한 몇 가지들을 떠올린 뒤 단어로만 짧게 나열한다. 그날의 감사함은 친절한 사람에게 느꼈던 고마움일수도 있고, 우연히 마주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일수도 있고, 또는 오늘 나를 편안하게 해준 물건일 수도 있다.

조금 유난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루를 돌아보면 감사한 것들이 은근히 있다. 예를 들자면 이른 새벽의 맑은 숨,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 한 모금, 버스에서 마주한 친절한 사람, 좋은 사람과의 건강한 대화 등. 종이 위로 기록되는 순간 그러한 것들이 선명해지며 불쾌한 불안보다 작은 기쁨들로 가득찬 하루로 기억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선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라 말한다. 이처럼 저자는 ‘어려운 시절에 죽음을 생각하고’,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간다’는 다짐을 한다.

저자가 죽음을 생각하며 삶을 다잡는 것처럼 나의 삶의 갈피는 감사를 기억하는 일이다. 기쁨을 주었던 날씨나 물건, 고마움을 느끼게 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 등 낯설고 불안했던 대상들을 하나씩 감사하게 기억할 때에 삶은 다정한 것임을 느낀다.

또한 감사함을 기억하는 동안 따라오는 기쁨은 물을 길어 올릴 때의 마중물을 붓는 것과도 같다. 깊은 곳에서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많은 힘이 들지만 위에서 조금의 물을 부어준다면 금세 아래의 물이 빨려 올라온다. 소소한 감사함을 느끼는 동안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삶의 즐거움은 불안 속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시절이 와도 삶에게서 온 편지에 회신을 남길 수 있다. 오늘도 작은 감사함을 느끼며 삶의 희열을 길어 올릴 것이라고. 다행히 삶은 답장을 바라지 않고 꾸준히 신호를 보내므로 나는 계속해서 편지를 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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