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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라는 괴이한 알레고리

등록일 2024-10-07 19:13 게재일 2024-10-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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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의 시비.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이질감이 드는 기사를 봤다. 서울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 단지 내에 세워진 두 개의 시비(詩碑)에 대한 것이다. 구성달 시인이 쓴 ‘영원한 파라다이스-래미안 퍼스티지’라는 시는 이러하다. “서울은 나라 얼굴 반포는 그 눈동자/ 우면산 정기받고 한강의 서기 어려/ 장엄한 우리의 궁궐 퍼스티지 솟았다/ 해 같은 인재들과 별 같은 선남선녀/ 뜨거운 열정으로 냉정한 이성으로/ 겨레의 심장 되시는 고귀하신 가족들/ 반듯한 삶을 위해 따뜻한 내 정성을/ 씨 뿌려 가꾸면서 고운 꿈 키운 낙원/ 웅지를 품은 이들의 꽃숲속의 이상향” 이런 글을 시라고 해도 될까, 이런 걸 쓰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다음 시에 비하면 그래도 낫다. 나은 이유는 단 하나, 짧아서다.

박영석이라는 분이 쓴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천년의 보금자리’다. “반포천 물길이/ 처음으로 강을 찾아 흐르고/ 서기로운 꿈들이 이 땅에서 자라날 때/ 한강변 남쪽 안자락에/ 희망을 묻어둔 준비된 땅/ 이제 사 염원의 물길이 호수를 이루고/ 포연의 역사를 가슴으로 건너온/ 천 년의 느티나무가 영겁의 뿌리를 내렸다/ 반도의 등뼈를 차지하고/ 웅대한 역사가 대륙으로 뻗어나가든/ 척량 산맥 금강의 집에서/ 풍상의 세월을 살던/ 빼어난 자태의 진수가/ 폭포를 품은 아름다운 꿈 동산이 되어 (…) 영원한 우리들 꿈의 보금자리/ 반포 래미안 퍼스티지” 염원의 물길, 포연의 역사, 풍상의 세월 타령이 마치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죤 앵커의 웅변 같다. 표현들이 낡고 고루하다 못해 썩었다. 하지만 진짜 썩은 건 언어가 아니라 정신과 태도다.

저 시비들 앞에서 입주민들은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과 래미안퍼스티지인(人)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낄까? 그래도 설마, 그 정도로 천박할까. 그런데 주민 동의 없이 저런 걸 세우진 않았을 테니, 역시 자본주의의 물신(物神)은 인간에게서 사유하는 능력을 제일 먼저 앗아가는가 보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걸 어떻게든 과시해서 타인에게 질투와 인정을 받고 싶은 속물근성이 저들 공동체의 집단적 정체성인 모양이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현대사회의 상품들은 모두 텅 비어 있는 알레고리이며, 자본주의시대에 개인들의 꿈은 상품으로 공동화된다고 말했다. 알레고리는 문학작품 내의 어떤 기호가 작품 밖 현실에서 그것이 나타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는 ‘다르게 말하기’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설렁탕은 우리가 맛있게 먹는 한 그릇의 든든한 음식이 아니라 아내를 향한 김첨지의 사랑과 회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남루하고 비참한 삶을 나타내는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설렁탕인데 설렁탕이 아니다. 벤야민은 현대사회의 상품들이 상품 그 자체의 효용이 아닌 자본시장구조의 인간 소외와 착취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알레고리적으로 팜유는 ‘지구의 눈물’이고, SPC의 빵은 노동자의 절단된 손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아파트는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거주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계급 명찰이자 구매력을 드러내는 액세서리다. 설계도나 자재에 대한 설명 없이 근사한 ‘이미지’만 보여주는 아파트 광고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다. 이 이미지의 환상에 매료된 이들은 왜 거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모두가 바라는 선망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아파트를 꿈꾼다. 래미안퍼스티지라는 상품으로 공동화된 이들의 꿈은 사실 속물근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삶의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적 실존이 아닌,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자신을 맞추어가는 노예적 속성에 불과하다.

서울대 부모들이 차량에 붙이고 다닌다는 ‘서울대 대디’, ‘서울대 맘’ 스티커도 마찬가지다. 명문대에 입학한 것, 고급 아파트에 사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고 가장 귀한 가치인가? 이토록 천박한 돈 자랑, 학벌 자랑이 팽창할 때, 각자 자리에서 저마다의 취향과 개성, 주체적 가치관으로 삶을 가꿔나가는 이들은 그 팽창하는 운동의 바깥으로 밀려나 패배자, 잉여인간, 게으름뱅이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고, 그 추방과 소외가 두려워 사회의 모든 이들이 ‘영원한 파라다이스-래미안 퍼스티지’만을 꿈꾸는 세상에는 경찰관과 소방관도, 음악가와 시인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영웅들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적당히 하자. 부끄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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