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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봄과 여름 사이를 지나며

봄에서 여름 사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폭식을 끝낸 것처럼 공허함이 자리한다. 소화시키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인데, 가슴팍을 두드려보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아 몸을 움직여 보아도 목까지 차오른 더부룩함은 사라지지 않는다.요즘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집에서 쉬고 있는 와중에도 해치워야 할 집안일이 차례대로 떠올라 괴롭다. 이번 주말엔 겨울 내내 가장 많이 붙어 있었던 전기장판을 정리해야 하고, 겨울 이불도 빨래해서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야 한다. 7월 말엔 4년 간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해서 그간 창고 속에 쌓아 둔 쓸모를 잃은 짐들은 버리거나 나누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야 하는 번거로운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와중에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신을 차리면 달력이 넘어가고 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낮과 밤이 바뀌어 있다. 이 길이 출근하는 길인지 퇴근하는 길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매일매일 꿈결 같은 몽롱한 삶을 살고 있다.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대체로 6시. 샤워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고 잠을 잔다. 다시금 눈을 뜨면 오후 9시.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빵 한 조각이나 요거트를 대충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엇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재미와 자극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오늘도 어김없이 무료함과 피로를 소화시키고 있는데 재채기가 나와 쉼을 방해했다. 요즘 미세먼지가 심한 탓인가 싶어 인터넷에 날씨 검색을 했더니, 5월 6일자로 입하에 들어섰다고 한다. 24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후다.봄과 여름 사이, 환절기는 꼭 미열을 앓고 있는 것만 같이 달뜨고 불편한 감정이 든다. 예상치 못하게 여름의 냄새가 훅 퍼질 때에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몇 가지가 있다.여름이 되면 가족끼리 수영장에 놀러 가곤했다. 내가 살던 지역의 커다란 야외 수영장이었다. 그곳은 얕은 물과 깊은 물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당시의 나는 키가 작아 깊은 물에 들어갈 수 없었다. 늘 얕은 물속에서 깊은 물에서 놀고 있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튜브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호기롭게 깊은 물가를 서성였는데, 하필 어떤 대학생 무리의 손에 잡혀 예고도 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세 네 번 머리가 수면 바깥과 안을 드나들었을 때 쯤 그들은 단순히 장난이었다며 해명했지만 어린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무리 중에 한 명이 겁에 질린 나를 알아채고선 물 밖으로 꺼냈고, 내팽겨치듯 홀로 물 밖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맵고 뜨거운 목구멍 속 일렁이는 분노와 나약함으로 산산조각 부서지던 그때의 여름. 처음으로 크게 겁을 먹은 때였고, 이후로 겁을 먹을 때면 누군가 밀어 버리기 전에 스스로 깊은 물로 뛰어들어 버리곤 했다. 물론 본질적으로 타고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여름이 깊게 남긴 쓸쓸함은 가라앉아 있다가도 계절이 찾아오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에게 여름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몸처럼 억눌린 통증이 시작되는 계절이라고 해야 할까. 실은 몇몇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여름은 정말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40도 가까이 육박하는 무더위는 걸어 다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이마에 맺히는 땀 때문에 애써 드라이한 앞머리는 볼품없어 진다. 자외선에 자극받아 올라오는 빨간 두드러기들은 얼마나 가렵고 신경 쓰이는지. 장마철 엄청난 비를 퍼부었다가도 다음날 뜨거운 태양빛을 쏟아 붓는, 시시때때로 날씨를 바꾸는 심술궂은 변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무력하게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오는 여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여름날 쓸쓸했던 여럿 기억들은, 트라우마를 마주할 때까지 그 쨍하고 눈부신 빛 속에서 잔인하게 빛나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눈부심을 마주해야 한다는 듯이.상처는 아물 때 가렵다. 쓸쓸함을 긁다보면 애틋함으로 번진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서툴고 쓸쓸한 기억들이 여름이 지나 가는 동안 다시금 내면 깊이 가라 앉아 나를 이룬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변화할 때마다 쓸쓸함을 간직하는 내면의 깊이가 미묘히 깊어지고 있다. 그러니 봄과 여름 사이에서 그저 유유히 흔들리는 수밖에.

2023-05-09

어떤 청년들의 시대

이서수 작가의 소설 ‘미조의 시대’는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조가 어머니와 함께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는 이야기이다. ‘미조’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5천만 원이 있다. 하지만 5천만 원은 2020년대 서울에서 그리 크지 않은 돈이다. 더군다나 괜찮은 집을 구하기엔 더더욱 더. 때문에 ‘미조’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낙후된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그나마 나은 환경을 찾아다닌다.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세계를 헤매는 민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다. 아마 그 기원을 찾자면 이집트인들의 핍박으로부터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키고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 모세의 이야기가 시초에 가깝지 않을까. 시초로부터 무한히 반복되어 온 ‘터전 찾기’의 서사. 이러한 서사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를 포함한 공동체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타자로부터 해방을 ‘원하고’, 그리하여 모진 수난 끝에 그것을 ‘얻는다’.무언가를 ‘원하고’, 또 그것을 결국에는 ‘얻어낸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서사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얻어낼 것에 대한 필요성과 갈망이다. 얻어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서사는 당위를 획득한다. 모세의 민족 서사가 그러한 당위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집트인들의 도저한 핍박과 수탈이다. 그것이 잔인하게 묘사될수록, 인물의 갈망과 그에 따른 행위는 설득력을 얻는다.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플롯을 드라마나 영화 따위의 미디어물로 만들 때에는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최대한 악랄하게 묘사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이에 대한 가장 정교한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악당들은 자신의 악랄한 의도를 숨기지 않고 말과 표정으로 드러내며, 주인공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행위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과한다. 예컨대 그와 같은 악당의 얼굴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권리인 ‘자유’를 억압하는 타자의 형상이다.하지만 ‘미조의 시대’에서 악당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미조’는 재개발이라는 수난을 피해 자신과 어머니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떠나지만, 소설은 결코 악당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세의 서사가 이집트인이라는 명확한 타자를 제시함으로써 탈출의 당위성과 목표를 확고하게 드러내주었다면, ‘미조의 시대’는 그러한 타자를 감춤으로써 이 서사를 더욱 도저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소설의 구체적인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도저함은 더욱 구체적이게 되는데, 가령 이들은 모세의 민족과 같이 현실보다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이들이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5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물려주었지만, 그 돈은 서울에서 이들이 원하는 것을 현실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때문에 둘은 ‘더 나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 그 흘러듦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속도 속에서 5천만 원이라는 돈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이들은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구체적인 악당이 제시되지 않는 서사 속에서, 이들을 향한 핍박과 수난, 폭력의 역사는 훨씬 교묘하고 저열하게 제시된다. 이집트인의 구체적인 폭력이 자리하던 곳에는 ‘문제는 충분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라는 불투명한 폭력과 죄의식이 분출된다. 때문에 핍박과 수난은 이들에게 동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책감과 무기력함을 불어넣는다. 문제의 원인을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교묘한 폭력이 만연하는 곳.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무대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최근 어떤 조사에서 30대의 평균 소득이 월 500만원이라는 조사결과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월 500만원을 버는 사람이 과연 그토록 흔할까? 그럼에도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나’에게 닥친 경제적 불행과 그로인한 수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금 ‘네’가 불행한 것은, 네가 평균에도 못 미치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통계와 평균의 마법이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눈속임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집트인’은 차라리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악행을 자행할 때에도 인간의 얼굴과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이 모든 불행이 오직 너의 탓이라고 속삭이지는 않았으니까.

2023-05-02

감자수프를 먹는 오전 열 시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능력은 중요하다. /언스플래쉬 “최근 심하게 스트레스받는 일 있으셨어요?”의사의 말에 고개를 저으려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간 얼마나 무수한 질문에 괜찮다고 답했던가. 특히 직장에서 그랬다. 상사의 무례한 언사를 웃어넘겼고 부당한 요구를 묵묵하게 받아냈다.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면 응당 피곤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만 입 다물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되뇌었다. 다 이렇게 산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건 유난이라고.“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아요.”나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며 흐흐 웃었다. 몸 여기저기가 망가졌다는 진단을 들으면서도 생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경련으로 응급실을 들락거리고 염증 때문에 수술하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인가 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타고난 체력이 약하다는 것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졌고 내가 어떤 면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 학생으로 머물렀고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관계 맺는 일보단 책상 앞에 앉아 읽고 끼적이는 시간이 더 길었다. 현실을 살아내려고 하니 몸이 아픈 것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엄살 부리는 것이라는 혐의를 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그런 생각이 병을 깊어지게 하는 주범이에요.”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사의 조언이었다. 다른 생각은 불필요했다. ‘몸이 아프다. 그러니 푹 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이유를 덧붙이게 되면 그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교묘하게 본질에서 벗어나기 마련이었다.특히 어떠한 결과에 따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건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했다. 능력 이상의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해내야 한다고 막연하게 외치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것에 최선을 다하되 그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가뿐하게 털어내는 것. 어렵지만 평생에 걸쳐 훈련해야 할 인생의 과제였다.긍정과 낙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많은 것이 술술 풀릴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소설 쓰기의 시작이라고 외쳤지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괴로웠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고 스스로가 위선자처럼 여겨졌다. 항상 그랬다. 나를 가장 열심히 괴롭히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올해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돌보겠다고 결심했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아팠던 시간, 나는 나의 어려움을 알고 도와주는 사람들의 다정함을 경험했고 그러한 선의가 늘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평소였다면 침대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을 오전 열 시에 노트북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자주 가는 카페에 들러 감자수프를 주문했다. 수프는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나왔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 정성으로 끓인 것이었다. 숟가락으로 떠서 꿀꺽 삼키자 뱃속 깊은 곳까지 따끈따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기사를 통해 아이돌 가수의 비보를 접했다. 전날 새벽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 알 것 같다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 속에서 헤매는 감각. 그건 최근의 내 상태와 비슷했다. 두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렸다. 상실감은 뱃속을 데워주는 수프의 온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였다. 동시에 햇볕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고 초여름이 가까워져 온다는 실감이 들었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빛과 파도처럼 일렁이는 나무 그늘을 바라봤다.나는 앞으로 몇 번의 계절을 지날 것이며 그때마다 무수히 아프고 슬플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오전 열 시의 찬란함과 온 몸에 퍼지던 감자수프의 온기를 떠올리겠다. 이토록 사소한 하루가 생을 버티게 하는 달콤한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2023-05-02

지옥이 된 도시

유튜브에서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좀비처럼 흐느적대는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를 봤다. 펜타닐은 헤로인보다 50배 이상 강력한 마약인데, 원래 말기 암 환자가 고통을 덜기 위해 쓰는 진통제라고 한다. 몇 해 전부터 미국 사회에 조용히 확산되더니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버렸다. 펜타닐은 강력한 뇌 손상을 일으키고, 중추신경을 파괴한다. 이 마약에 중독되면 허리를 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해 제자리를 맴돈다.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살풍경 너머로 익숙한 배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2019년 10월,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Rocky’의 흔적을 찾아 하루 종일 걸었다. 영화 속 록키의 비좁고 냄새나는 아파트, 트레이너 미키의 체육관, 거리의 아카펠라 싱어들이 노래를 부르던 모퉁이가 모두 켄싱턴에 있다. 그곳이 미국 동부 최대의 마약 시장인 줄도 모르고, 몰라서 용감한 건지 아니면 언뜻 험악해 보이는 거리의 인상에도 객기를 부린 건지 홍대 거리 걷듯 혼자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며칠 뒤 밴쿠버에 가선 현지 지인 부부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 숙소가 있는 웨스트엔드에서 약속 장소까지 한 시간 남짓 걸어가는 동안 이스트 헤이스팅 스트리트와 차이나타운을 관통했다. 걸어서 왔다고 하니 부부가 놀랐다. 밴쿠버에서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를 지나왔다는 것이다. 하긴, 지나는 길에 경찰로부터 소지품을 검사 당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긴 했다.필라델피아에서도 밴쿠버에서도 자칫 험한 일을 겪을 뻔했다. 지금 다시 걸어 다니라면 안할 것 같다. 겨우 4년이 지났는데, 나이 든 것이다. 미 동부 최대 마약시장과 살인, 강도, 총기 사고가 빈번한 밴쿠버 우범지대를 쏘다니며 위험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것은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라는 데서 어떤 안정감 같은 걸 얻은 까닭일 테다. 아니면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쉽게 낭만과 환상에 취하게 해 현실감각을 둔화시킨 탓인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 어리석다. 그저 운이 좋아 아무 일 없었다.그런데 사람이 좀비가 되어 버린 도시는 그냥 우범지대가 아니다. 우범지대나 치안부재 같은 말은 인간 이성이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나 쓴다. 유튜브 영상 속에 펼쳐진 지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고장 난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느릿느릿 경련하는 사람들 모습 아래 ‘참혹한 인간 추락의 거리’라는 자막이 섬뜩하다. 그 자신이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자살한 헤밍웨이의 문장을 생각하는 새벽이다.“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글쎄, 이제는 파멸과 패배가 다르지 않은 세상인 듯하다. 펜타닐에 중독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노상방뇨를 해 켄싱턴 거리에는 소변 웅덩이가 곳곳에 생길 정도라고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서울 강남의 클럽에서는 암암리에 마약이 거래돼 강간, 강도, 불법촬영 등에 이용되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서 마약 중독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가 5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가 배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또 며칠 전에는 호텔과 클럽 등에서 필로폰을 투약하고 집단 환각 파티를 벌인 남성 60명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 더는 마약 청정국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인 불안감과 시민들의 요구에 비해 마약사범 처벌은 솜방망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켄싱턴의 악몽이 서울에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자유의식은 이곳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을 뿌리로 한다. 뉴욕, 워싱턴, 보스턴과 함께 손꼽히는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도시가 지금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이다. 4년 전 가을, 미스트 같은 가을비를 맞으며 걸었던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는 신시가지에 비해 쇠락해 스산했지만, 크고 근사한 명소나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 화려한 다운타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정감과 투박한 온기가 있었다. 마약상들이 판치는 우범지대라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사람으로 계속 살 수 있을까? 그 지옥이 우리의 일상으로까지 전염될까 두렵다.

2023-04-25

일상 속 낭만 더하기

낭만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낭만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실은 그 전까진 낭만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낭만이란 어린이의 허무맹랑한 상상력에 가까우며 오히려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꿈꾸는 꿈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지난날의 나는 삶을 비관적인 것으로 대했다. 때때로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좋지 않은 일이 더 큰 크기로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다가올 불행에 대처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도 생을 대했다. 좋은 운이 찾아와도 차분함을 유지하려 불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불운이 찾아올 때는 고통이 지나갈 때까지 슬픔으로 깊게 잠겼다.실은 나는 우울감을 쉽게 느끼는 본성을 지녔지만, 우울에서 금방 빠져 나와 다시금 씩씩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우울 속을 옅게 부유하다 다시 수면 바깥으로 나와 유유자적 수면 위를 헤엄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이면을 보며 무기력하게 방바닥을 기어 다니다가도 바깥 산책을 하면 금방 눈을 반짝이고 만다. 대가 없는 친절과 배려, 그리고 오랜 기간 묵묵히 선을 지향하는 이들을 마주하면, 그래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이라고 고갤 끄덕이며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하지만 작년 한 해의 나는 지나치게 무기력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부터 모든 의욕을 잃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너무 많은 신경과 노력을 쏟아버린 탓일까. 쓸쓸하게 타 버린 성냥처럼 또 다른 쓸모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망해했다.도피와 외면을 일삼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이 와버렸을 땐, 내가 택해버린 건 잠이었다. 하루 온종일 잠의 뿌리를 내리는 동안 나를 질타하는 이도 회피하는 이도 있었으나 나를 깨우기 위해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자주 집에 찾아와 잠을 깨우고 밥을 먹이고 산책을 하며 심심한 농담과 함께 주말 약속을 잡던 고마운 사람이다.나의 우울은 같은 크기를 지닌 우울이 나를 알아보고 진정 나를 이해해줄 수 있으며, 슬픔은 슬픔을 구원할 수 있다 여겼으나 실은 슬픔은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외려 깊은 슬픔은 옆에 있는 이를 슬픔의 늪으로 깊게 끌고 들어갈 뿐이다. 슬픔에 처한 타인의 심정을 공감하고 헤아릴 순 있겠으나, 타인이 지닌 슬픔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두드려 나를 깨우던 이에게도 타인을 절대 구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외로움만을 안겨줄 뿐, 그렇게 계속 실패로 기록되는 관계는 머지않아 단절된다.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외로움은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고 깊고 복잡할수록 타인에게 이해 받고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한결 삶이 편해졌다. 외로움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겪는 고행이자 의무로 여기니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낭만에 대해 오히려 시선이 갔다. 삶을 무턱대고 비관하기보단 유연하게 대처하며 세상의 긍정적이고 밝은 면도 궁금해졌다고 해야 할까.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요즘은 일상의 낭만을 더하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 쓸모없을수록 의미 또한 부재할수록 좋다. 꽃 한 다발을 사서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 작은 꽃의 이름을 익히는 것, 서점에서 즉흥적으로 골라온 시집을 사서 읽는 것,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여행 계획을 짜는 것,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한 일정을 짜는 것, 프로틴 쿠키나 그릭 요거트 바 만들기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동안 일상은 더 디테일해졌고 행복으로 가까워졌다.4일 전에 사온 꽃이 금방 머리를 숙여 시든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시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제철음식을 먹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 수고가 들더라도 마음의 결은 더 촘촘해지고 부드러워진다.5월에는 놀이공원을 갈 것이고 6월엔 오사카와 교토 여행을 간다. 주말에는 다시 러닝을 하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한 레시피를 뒤적인다. 이 모든 걸 즐기기 위해선 또 일을 해야 한다. 건강히 일하며 일상의 낭만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누리는 삶, 이렇게 적어 놓고 나니 현재 나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다.

2023-04-25

AI라는 미지

OpenAI社에서 개발한 프로그램 ChatGPT가 화제다. 사용자의 질문에 답변해주는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인 ChatGPT는 생활과 관련된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어학, 공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각종 분야의 전문학술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답변할 수 있는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러 분야 직종에서 활발하게 사용될 것으로 전망된다.나 또한 글쓰기 강사이다 보니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ChatGPT를 부분적으로 학습시키고 있다. 복잡한 부분까지 가르치기에는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 무리이기에, 프로그램의 간단한 구조와 답변 방식, 글쓰기에 있어 활용할 수 있는 부분 등을 가르치고 있다. 시의성 높은 화제를 찾는 방법에서부터 ChatGPT가 답변해준 화제를 바탕으로 개요를 짜는 방법 등 글쓰기에 필요한 사전 작업에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헌데 일선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ChatGPT를 가르치다보니, 예상외의 반응이 느껴져 신기했다. 아이들은 내 생각과 달리 ChatGPT를 활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컸다. 레포트를 쓰는 데에 ChatGPT를 활용했다가 감점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반응에서부터, ChatGPT를 쓰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는 반응에 이르기까지. 예컨대, ChatGPT를 쓰는 건 정당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다. ChatGPT는 결국 검색 엔진이고, 검색 결과를 문장 형태로 출력해 보여주는 것일 뿐인데, 아이들은 ChatGPT를 일종의 치팅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글을 쓰고 결과물을 만드는 데 있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출판물만을 제 가격을 지불하여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ChatGPT에 대해서는 이런 반감을 느끼는 걸까. 이런 반응은 아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나와 같은 세대들도 회의용 문서를 작성하거나 연구를 하는 등에 있어 이러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치팅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사실 ChatGPT가 해주는 일이란, 인터넷을 검색하고 정리하고 요약하는 과정을 대신해주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들을 ChatGPT가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존재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사실 ChatCPT는 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인간의 주관적 감각에 기반한 정보, 예컨대 대상에 대한 호불호를 비롯한 주관적 정보를 출력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터넷을 통해 접근 불가능한 정보는 취급할 수 없으며, 인간이 만든 정보를 바탕으로 답변하기에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ChatGPT 또한 답변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ChatGPT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바로 결정과 책임이다. 그들은 우리의 일 가운데 일부를 대신해주는 것일 뿐,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결정과 책임. ChatGPT가 항상 올바른 답변만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모델 자체의 한계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건 모든 인간이 만든 도구가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어떤 도구도 인간을 대신해 결정하고 책임을 져줄 수는 없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만이 결정과 책임을 질 수 있다. 지금보다 훌륭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되더라도, 결정과 책임이라는 최소한의 자유의 영역은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 장치의 신. ChatGPT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인용하며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사용자로서 느끼는 인상은 ChatGPT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계 장치의 신도 아니고, 아주 간단한 답변조차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그럼에도 사람들은 ChatGPT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반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자신의 업무를 대신해버릴 것이라는 공포에서부터, 그들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SF적인 공포, 혹은 프로그램이 잘못된 답변을 제공하면 어떡하냐는 공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런 설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공부를 해야 하고, 지식을 계속해 축적해 나가야만 한다고. 우리가 ChatGPT를 비롯한 인공지능이 내놓는 답변의 정당성과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에 준하는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건 기술이 아닌 지식이다.

2023-04-18

평점으로 평하지 않기

책상 앞에 앉아 활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고단하게 느껴지던 주말, 강원도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짙고 푸른 바다를 기대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막상 몇 시간이고 운전하노라니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저릿저릿했다. 고생한 것에 비해 해변에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이렇게 힘들게 와서 아무거나 먹을 순 없지’하는 생각으로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별점과 평가로 점철된 음식점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내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렇게 보고 싶던 바다를 앞에 두고 네모반듯한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보기만을 반복, 평점에 따라 선택한 식당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했다.그러한 경험은 여행지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전반에서 평점에 의지하는 우리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배달앱의 별점을 따져가며 음식을 주문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도 후기를 따라간다. 좋아하는 평론가가 높은 별점을 주었다는 영화를 우선순위로 선택하며 좋지 않은 평을 했다고 하면 ‘유치한 작품인가 보다’하고 지레짐작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그렇다. 평론가들이 손을 들어주는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것처럼 읽히고 각종 출판사에서 부여한 상을 받은 작가들의 신작 위주로 작품을 찾아 읽게 된다.어쩌다 이렇게 평점에 의지하게 되었을까? 인생은 시험이 아니라고, 만점을 받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뭔가에 너무 쉽게 점수를 매기고 또 거기에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무언가를 별 다섯 개로 평가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개개인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일은 꼭 필요하기도 하다. 평점에 도움을 받는 일도 많다. 정말 좋은 것들이 선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꼭 부정적으로 보아야만 하나 싶기도 하다.바야흐로 정보 과잉의 시대다. 뭔가를 구매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하면 비슷한 상품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현명하게 골라내지 못하면 우매한 소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따져보다가 하루가 다 가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이미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들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이제 큐레이터의 활동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를 선별하여 전달해주는 전문가의 필요성이 늘어났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떠나 생활면으로 확장되었다. 가구, 식물, 의복, 음식과 생필품에서도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전문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가다 보면 편리하고 무언가를 소비할 때 실패할 위험성이 낮다. 동시에 새로운 무언가를 편견 없이 직접적으로 겪어보는 일이 드물어질 수밖에 없다.매일매일 최신의 것이 자꾸자꾸 등장한다. 바쁘고 빠르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소비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안전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전형성이라는 틀에 갇히게 된다. 유연함은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실패에 관대하지 못하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하루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고 취향이 아닌 영화를 보면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린 것만 같다. 그것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지만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실패해야 한다. 그러한 실패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시선과 판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그것은 성공에 가깝다.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에 차등을 둔다. 높은 별점을 받은 식당이나 물건이 더 많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것은 마치 공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물건이나 공간을 넘어서 인간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개개인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까지도 수치화된 세계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가깝다.무언가를 선택할 때 평점에 현혹되지 말자는 당연하고도 어려운 결심을 해본다. 놀라운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근사한 관계는 오해에서부터 시작된다. 별 다섯 개로 규정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 비로소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2023-04-18

봄꽃의 에피파니

산수유와 매화가 먼저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고, 목련 핀 다음 벚꽃과 라일락 피던 시절은 추억이 됐다. 지구 환경을 생각하면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상고온으로 개화 순서가 뒤죽박죽이 돼 한꺼번에 핀 봄꽃들을 보며 어쨌든 눈과 마음 즐거운 봄이다.벚꽃과 개나리가 색을 나누어 늘어선 강변을 걷는데, 내가 보는 봄꽃 풍경이 불현듯 특별하게 느껴졌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의 엄마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열어보기 전에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한 대사를 아직 기억하는지 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초콜릿 상자’가 떠올랐다. 봄꽃은 매년 피지만 2023년의 봄꽃은 오직 이 봄에만 볼 수 있다고,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찰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했다.상상해보자. 인간이 100년을 산다고 했을 때, 우리는 초콜릿 100개가 든 상자를 선물 받은 것과 같다고. 칸 하나에 든 초콜릿은 그 해에 먹지 않으면 폐기된다. 누군가는 100개를 다 먹고, 또 80개를 먹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한 개도 까먹지 못한 채 상자를 반납한다. 이때 ‘초콜릿’은 봄꽃의 화사함, 여름의 무성한 녹음, 가을 단풍, 차고 맑은 첫눈의 다른 이름이다. 매년 돌아오지만 그해의 초콜릿은 오직 그 해에만 먹을 수 있다.제임스 조이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이 갑자기 그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벗고 진리의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불렀다. 에피파니는 ‘나타남’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피파니아(epiphaneia)에서 유래한 단어다. 종교에서는 순간적으로 계시를 느끼거나 비전을 보게 되는 직관적 경험, 즉 ‘신’을 보는 체험을 말한다. 문학작품에서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 혹은 독자가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며, 작가가 일상 속의 평범한 소재를 통해 독자에게 계시나 깨달음을 주는 기법을 뜻하기도 한다.조용필의 ‘고추잠자리’에는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라는 노랫말이 있다. 볕 좋은 가을날 야트막한 뒷동산에 올라 네잎클로버 찾고, 코스모스 꺾으며 놀던 한 소년이 잠깐 낮잠에 들었다 깼다. 때로 낮잠에서 깨면 무서울 정도의 이질감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런 모양이다. 저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존재의 기원과 실존의 유한함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한 순간 근원적인 고독감과 혼란감이 소년을 집어삼킨다. ‘가을빛 물든 언덕’이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벗고 섬뜩한 진리를 드러낸 에피파니의 순간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걸…”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에는 데이트 하는 연인이 등장한다. 영화 보고, 맛집 가고, 사진도 찍고,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중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자기야,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나도 오늘이 생각날까?” 정말 그 ‘나중’이 됐는데, 그녀는 내 곁에 없고, 아무 기억도 없다. 사랑의 기억과 애틋한 약속들, ‘의미’를 지닌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각적 인상인 동시에 일종의 상징 언어인 미소 또한 흩어진다. 긴 세월이 흐르고 남은 것은 그저 ‘웃음소리’뿐이다.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오직 소리라는 감각만 주체에게 남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떠다니는 어느 추억의 거리에서, 남자는 에피파니를 경험한 것이다.이 봄,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나란히 피어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잉어들이 연안에서 헤엄치고, 오리가 수면에 내려와 앉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내가 기다리는 건 에피파니의 얼굴이다. 평범한 일상적 장면이 특별해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의 빛깔과 질감과 음악이 달라진다. 그 체험을 통해 나는 너무 오래 묵은 내 세상을 갈아엎고 새 꿈과 새 맘을 가져보려는 것이다. 초콜릿 상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에피파니는 초콜릿을 열심히 꺼내 먹으려는 이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나가서 걷고, 열고, 보자.

2023-04-11

취향 넓히기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분명히 고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옷을 고를 땐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고 좋아하는 커피 취향은 어떤 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 수고를 들여서라도 지식을 익히고 깊게 파고든다. 선호의 기준과 취향이 명확해서 그들이 사는 삶은 무언가 견고하고 완벽해 보인다.취향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취향을 갖고 있던가? 내 주변 인물들은 어떤 단어로 나를 설명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거지?나는 내 자신이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다. 이것저것 일을 벌리는 건 많이 하지만 꾸준히 한다거나 뛰어나게 잘하는 것이 없다. 좋아하는 운동도 잘 모르겠다. 한때 런닝이 너무 좋아서 동호회도 가입하고 런닝용 운동화와 운동복까지 다 갖추었건만 날이 추워지면서부턴 뛰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관심사 밖으로 밀려났다. 좋아한다며 요란을 떨던 마음이 식을 때 무언가 심심한 듯한 허무함이 든다. 그래서 런닝복이나 운동화를 안 보이는 곳에 깊게 숨겨두고 외면하고 있다.최근 퇴근 후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침대 위에 누워 하루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가벼운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짧게 압축한 게임 영상이나 예능 편집 영상 등 무언가를 이해하고 행하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주로 찾아본다. 또는 피로감과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유명 패션 브랜드 사이트에 접속 후, 실시간 옷 인기 순위 기준으로 마음에 드는 옷을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그러면서 인기 순위에서 고른 패션 아이템들이 곧 나의 취향이자 센스 있는 안목이라 생각하며 으쓱해진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고민조차 할 수 없도록 스스로 취향과 개성을 실종하게 만드는 못된 습관임이 분명하다.하지만 취향을 갖는다는 건 어렵다. 취향을 갖기 위해선 일정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을 끊으려면 회원권 비용을 내야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각종 활동비부터 내야한다. 비즈십자수나 펀칭니들 같은 새로운 취미를 도전해볼까 싶으면 만만치 않은 재료비부터 든다. 여유 없이 생활에 쫓기게 되는 순간 취향은 사치라 여겨진다.그래서 나는 새로운 취향에 관심이 가면 얼마 못가 금방 시들해졌다. 취향을 위한 지속적인 소비나 수집을 하는 이들을 보면 낭비를 일삼는 피곤한 삶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취향을 위한 소비는 과한 지출이라 여겼으며, 내가 당장 얼마나 벌며 얼마나 저축을 하는 지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어긋나 있었는지, 올바르고 분명한 취향을 지닌 이들을 보며 깨달아 버렸다. 취향을 확보한다는 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즐겁고 유쾌한 것을 인지하여 취향에 자유롭게 빠져들다 보면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소중히 다루게 된다. 아리송한 삶 속에서 취향의 가치를 발굴하여 지속하는 것은 건강하고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세상의 불합리함을 보며 삶은 불공평하고 덧없다며 심드렁하게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보단 삶의 유한함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끈질김이 중요한 태도였다. 취향을 찾기 위한 호기심으로 나의 가치를 닦아 빛내어 나아가 더 올바른 이념과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음이 분명했다.이번 주말에 나는 내 취향에 걸맞은 반지를 3개 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각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 집에 가는 내내 호들갑을 떨었다. 언젠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옷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이 잘 정돈되어 삶을 살아가는 만족감이 강하게 드는 때가 올 것이다.집에 돌아와 반지를 벗어놓고선 타인의 취향으로 덧칠된 방을 둘러보았다. 나를 찾기 위해 깊이 파고드는 과정은 궁극적 목표에 비해선 다소 요란해 보이지만, 그런 어설픔도 무언가 애틋해서 벗어둔 반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당시의 얼굴빛은 근래 들어 가장 환했을 것이다.

2023-04-11

여전히 우리는 삶이 서툴러서

삶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있을까? /Pixabay 한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친구가 전화로 하소연을 해왔다. 아이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수업이야 당연히 지루한 거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번엔 유독 아이들이 무시하는 것 같다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아이들은 쳐다보질 않는 것 같다고. 분명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화면보호기가 켜진 모니터처럼, 그런 눈빛으로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속상할 일도 아니고 직업이니 익숙해져야 하는 일인데도, 아이들이 자꾸만 자기를 헛것처럼 바라보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고.친구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긴 했지만 딱히 떨리지도 않았고,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오래전 안 좋았던 일을 말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속상하다’는 말을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미안했다. 해줄 얘기가 딱히 없어서, 그런데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아서.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다가, ‘최소한 너라도 편했으면 좋겠어. 수업을 좀 대충하더라도 말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위로인 척 건네주었다.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수업을 한 날 밤이면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수업은 이미 끝이 났는데도, 내 머릿속은 계속 수업을 하던 상태 그대로다. 개념을 설명하고, 개념에 맞는 예시를 들고, 예시에 맞는 농담을 던지고, 아이들이 웃던 안 웃던 혼자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고, PPT를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손동작을 하고, 그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넘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 2시고, 내일은 9시에 수업인데 하는 부담감까지 더해져 부정적인 생각들이 샘솟기 시작한다.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나는 이름과 얼굴을 외운 학생이 참 드물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학생들 이름이야 있지만, 얼굴과 함께 외운 학생은 거의 없었다. 수업 시간이면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과장된 목소리와 억양으로 크게 떠들며 학생들을 일일이 바라보는 척 했지만, 사실 내가 바라보는 건 늘 아이들 사이의 빈 공간이나 시계, 벽, 창문, 교실 바닥,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들 눈을 제대로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졸고 있을 때면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나를 평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내가 누구를 가르쳐도 되는 걸까, 난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못 느끼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떠오르곤 한다.친구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학생들이 그 친구를 바라보듯 학생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날들도 있곤 하니까. 마치, 내 과장되고 거짓되고 부풀려진 자아를 아이들이 늘 꿰뚫어 볼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으니까. 늘 수업을 할 때면 학생들에게 미안해진다. 나는 너희에게 좋은 선생님은 아닐 것 같구나.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너무 부담스럽구나. 그냥,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버티는 아저씨 한 명에 불과한 것만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얼마 전 10년째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물론 술김에.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야기들 배부른 소리인 것만 같고 못할 소리인 것만 같으니까. 헌데 친구는 진지하게 들어주곤 이런 말을 했다. 너 그거 딱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고. 원래 회사 다니는 애들도 2년차에 딱 너 같은 소리 한다고. 처음 1년은 멋모르고 지나가고, 2년차 돼서 일이 좀 익숙해지니 내가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익숙해지는 과정이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답해줬다.우리는 종종 익숙해지는 과정이 선형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하지만 어쩌면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게 선형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을 지 모르겠다. 익숙함의 과정에는 종종 이런 시기가 있을 지도 모르는 셈이다. ‘잘 해나가다가도 한 번씩 꼬꾸라지기’, ‘어처구니없는 실수 한 번씩 저지르기’,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리기’ 등등. 어쩌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의 일을 지속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익숙함이라는 걸 지도 모르겠고. 나도, 친구들도, 모두 그 과정 속에 놓여있다 보니, 아직은 삶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니까. 그러니 마음이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속상해지더라도, 늘 속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2023-04-04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시인이 보내는 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언스플래쉬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박연준 시인은 자신의 시 ‘밤의 식물원’에서 말한다. ‘시 쓸 때 내 얼굴엔/밤/비/뱀이 내리고/층층나무 열한 그루 사이를/옮겨 다니며 숨는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시는 ‘밤의 머리카락’처럼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하며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기 쉽고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일지도 모른다.나는 시인들이 좋다. 시보다 시인이 좋을 때도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시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고뇌하는 밤. 빈종이 위로 채워지는 낯선 언어. 그것을 쓰는 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시인에 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하였을 테다. 아버지는 시를 썼다. 썼다는 말은 이미 종결된 사건으로 느껴지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는 지금도 시를 쓴다. 이따금 그것을 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적 불씨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다.나의 아버지는 멋을 아는 사람이다. 외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에도 능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안다. 삶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고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부단히 노력한다.돌이켜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딜 가도 멋지게 차려입는 것은 물론이었고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중심을 차지했다. 언젠가는 뒷머리를 말꼬리처럼 길러서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백석의 시집이 잘 어울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 다니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봐, 우리 아빠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여전히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싶다.아버지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사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그런 불행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로 인해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나는 나와 닮은 어느 청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제대로 된 삶을 손에 쥐기 위해서 부단히 발을 구르던 한 남자를. 어느덧 나는 그의 나이와 비슷해지고 그의 몸짓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낭만에 매몰되는 순간 무너지는 현실적 삶이 있다. 이상만큼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알고 있다. 책상 앞에 앉은 시인의 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을 견디면 모든 걸 마주했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낯선 언어를 쓰는 손은 현실과 뒤엉켜 생채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밤을, 그 손을, 어떤 본질을 끝끝내 움켜쥐려는 애달픈 마음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떤 고민이 찾아오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그가 내어주는 답은 늘 명쾌하고 선명하다. 그는 현실을 살면서 낭만을 꿈꿨던 어른이다. 내가 글 쓰는 삶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위경련이 일어났다던 아버지. 나의 예민함과 날카로운 기질까지 작가적 영역으로 치환시켜준 아버지. 그는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고마운 조력자다.감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가 내뱉었던 문장으로 구성된 딸이다. 세상의 유려한 문장에 마음이 요동쳐도 중요한 순간엔 내 안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보일 리 없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마음. 그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건네준 것이다.

2023-04-04

꿈의 물고기를 만나다

세상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인생이 나를 배반한다. 노력의 결과는 허망한 실패이고, 뜻밖의 고난에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올해 마흔이 됐는데, 내 꼴이 딱 그렇다. 한 대학교의 전임교수 공개채용에서 최종 3인까지 올라갔지만 공개강의와 면접까지 치르고서 탈락했다. 내 나름으로는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다시 기회가 있을까? 찢기고 패인 마음을 우선 달래야만 했다. 구두와 양복을 눈에서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고 낚시 장비를 챙겼다. 제주도에 열흘쯤 내려가서 아무 생각 없이 낚시만 하다 오려고.낚시에서 마음을 비우면 인생도 좀 달관하지 않을까? 하지만 넙치농어만큼은 꼭 잡고 싶었다.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꽤 오랜 세월 낚시를 하면서 바다와 강에 사는 온갖 물고기들을 만났다. 2019년에는 러시아 아무르강에 가서 타이멘과 파이크, 레녹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늘 마음 한켠엔 어두운 방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리한 은빛 섬광이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그 매혹적인 섬광은 넙치농어의 것이다. 2017년 초, 제주 현지 전문가의 넙치농어 낚시 영상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 멋진 물고기가 있다니!그 당시 겨울 제주도에 가 ‘맨땅에 헤딩’을 감행했다. 넙치농어는 난류성 어종으로 회유하는 성질이 있는데, 제주 남쪽인 서귀포 일대와 가파도, 지귀도, 마라도 등에서만 잡을 수 있다. 그 위쪽으로는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렵다는 넙치농어 낚시에 도전한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언 손이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그 와중에 실수로 낚싯대를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4박5일간의 넙치농어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건 내가 할 낚시가 아닌가보다 하고 단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서귀포에 넙치농어가 꽤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6년을 기다려 넙치농어에 재도전하는 날이 밝았다.몇 개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겨우 포인트에 진입했다. 거센 파도가 사방을 뒤덮는, 야성적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첫 캐스팅(낚시를 던지는 행위) 후 릴을 감으며 지형을 파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캐스팅, 천천히 릴을 감는데 퍽! 하는 입질, 넙치농어를 걸었다.꾹꾹 처박으면서 암초를 향해 돌진해 낚싯줄을 끊으려는 질주가 굉장했다. 어느 정도 힘을 빼 거의 제압했다고 생각한 그때, 그만 놓쳐버렸다. 넙치농어의 필사적인 바늘털이에 당하고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경계심이 강한 넙치농어는 잡았다가 놓치게 되면 다른 개체들까지 예민해진다. 나는 또 다시 교수 채용 탈락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 돼 버렸다.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지런히, 아니 처절하게 두드려보기로 했다. 우측에서 좌측, 좌측에서 우측 부채꼴 모양으로 30분쯤 캐스팅을 반복했을까? 흰 포말에 덮였다가 검은 이마를 드러내는 암초 옆에서 또 한 번의 강력한 입질을 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넙치농어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챔질을 확실하게 하고 낚싯대를 옆으로 눕혔다. 수중 암초를 향한 폭발적인 질주가 몇 차례 있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녀석이 허공으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했다. ‘오냐, 살려는 몸부림이 처절하구나.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한다. 네 얼굴을 봐야만 내가 살겠다. 그러니 오너라!’끌려오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거칠게 저항했다. 발 앞 바위틈으로 처박는 바람에 낚싯줄이 날카로운 바위에 쓸리기 시작했다. 줄이 끊어질 것 같아 서슴없이 물로 들어가 바위 반대편에 서서 침착하게 릴을 감았다. 한 평생 같은 십 초가 지나고, 드디어 은빛 실루엣이 수면에 넘실거렸다. 빛나는 은린 갑옷을 입은,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 넙치농어였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68센티미터. 큰 사이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는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인생고기다. 대학 교수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대학 교수보다 넙치농어를 잡아본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을 것이다. 누가 더 귀한가? 나는 넙치농어를 잡은 사람이다. 거친 제주바다가 내게 준 선물은 넙치농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용기와 의지,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다.

2023-03-28

절망적인 희망

착하다는 말이 싫다. 나는 3자매 중 장녀이면서 동생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난다. 동생들은 늘 보살펴야 하는 존재였으며 가장 소중한 물건은 거듭 양보해야만 했다. 자연스레 나는 물건과 사람에 대한 애착을 줄였다.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친구가 생기게 되는 순간 얼마 못 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다.동시에 동생들을 보살핌으로써 착한 언니, 착한 딸로 인정받는 것이 당시엔 큰 칭찬으로 여겨졌다. 타인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인정받는 사랑은 동생들뿐만 아니라 늘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나의 덕목이자 행동지침이 되었다.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그들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지나치게 조용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과장하여 행동했다.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지만 나쁜 길로 빠져 부모의 마음을 속 썩이는 나쁜 딸만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엄마와,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착하게 커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아빠의 말을 제일 좋은 칭찬으로 여기던 때였다.나는 착하다는 말이 정말 싫지만, 사실 지금도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선 극도로 말을 아낀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타인의 하는 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귀담아 들으려 노력하며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신경을 쓴다. 조금이라도 나의 허점을 보이게 된다면, 그래서 실수가 많은 허무맹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져 결국 쟤는 참 괜찮은 애야, 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또는 감정에 대해 주도적으로 사고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을 착한아이 콤플렉스라 부른다. 착한아이 콤플렉스란 늘 위축되어 있으며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가 원하고 느끼는 것을 지속적으로 억누른 것을 말한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나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하지만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하는 순간이 쌓이고 결국 나조차 스스로를 인정해 주지 못하게 되면 타인과의 관계 단절이 찾아온다. 실은 타인을 위한 진짜 호의가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그 가식적인 비좁은 마음이 드러났을 때에 내면이 위축되고 쓸쓸함만이 남아 자리한다.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닮고 싶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닮고 싶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만18세 나이에 MBC 강변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가수 이상은의 ‘담다디’는 밝은 멜로디이지만 가사를 뜯어보면 그대는 나를 떠나려고 하는 상황이다. 그대가 나를 떠나려고 하는 원치 않는 상황임에도 이상은은 나를 떠나지 말라며 쾌활한 노래를 부른다. 곡에서 가장 명랑한 부분이면서 계속 반복되는 가사인 ‘담다디’엔 의미가 없다. ‘담다디’의 뜻을 정확히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나를 떠나려는 커다란 상실을 열렬히 해석하여 젊은 날 이별의 슬픔을 자유롭게 노래하기 때문이다.강변가요제 당시 날씨는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상황이지만 대부분 많은 이들에게 쾌청한 날 속의 밝은 무대로 오래토록 기억된다. 실연의 아픔과 슬픔을 행복한 멜로디로 표현하여 신나는 무대를 만들어 내는 것, 흐린 곳에서의 밝고 환한 멜로디는 얼마나 닮고 싶어지는지 모른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프랑스 문학가이자 ‘슬픔이여 안녕’으로 알려진 프랑수아즈 사강은 삶은 하나의 끔찍한 농담이며, 인간이 공포에 질린 고통에 가장 좋은 해독제로 유머를 꼽은 바 있다.사강은 사람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희망이며, 삶은 공연이 끝난 희극처럼 그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유쾌한 극으로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여기서 사강이 말하는 희망은 생존을 희망하라거나 고통을 극복하자는 단순한 희망이 아닌, 절망적인 희망이다.절망적인 희망이란 용납할 수 없는 타인이 있을지라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여 유쾌한 농담으로 희망을 지향하는 것이다. 유쾌하고 터무니없는 행동엔 이유가 없으며, 때문에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동이라 말한다.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무런 대가도 보답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동일지 모른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펼치고서 이상은의 ‘담다디’를 듣는 주말 오후, 괴로움 속에서 무상의 ‘담다디’를 흥얼거려 본다.

2023-03-28

‘덕질’은 구원입니다

‘덕질’이라는 말이 있다. ‘수집가’의 뜻을 가진 신조어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행위를 뜻한다.쉽게 말하자면 그냥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기도 하고,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하자면 뭔가에 미쳐하는 행동을 ‘덕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미친 듯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는 건 포켓몬 스티커 덕질이고, 미친 듯이 아이돌 관련 굿즈를 사 모으는 건 아이돌 덕질인 셈.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취향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것, 그걸 위해 얼마든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그게 덕질인 셈.최근엔 ‘진격의 거인’에 미쳐 하루 종일 그것만 보고 지냈다. 집에 콕 박혀서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그 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가슴 졸이면서. 그렇게 한 일주일을 살고 나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그게 중요해? 지금 엘런이 거인이 됐는데? 아르민이 불타 죽게 생겼는데?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나한테는 나름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힐링인 셈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쁜 시즌이 되면 흐름이 뚝 끊어지게 돼서, 강제로 ‘탈덕’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3월은 바야흐로 ‘탈덕’의 계절이다. 강의가 시작되고, 계간지의 새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니까. 프리랜서는 일 할 수 있을 때 일해 둬야 비시즌에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취미나 취향이나 애정보다 일이 앞서는 시기인 셈이다. (물론 이런 말을 했더니 출판사 팀장님은 나에게 “방학이 있는 삶에 감사하라”고 잔소리를 하시긴 했지만...) 좋아했던 모든 일로부터 멀어져 강의를 준비하고, 특집 원고를 준비하고, 새로 시작할 연구를 준비하고. 그나마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삶이 싫진 않지만, 바쁘게 일만 하면서 살다 보니 사는 낙이 없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때엔 술마저 맛이 없다. 마치, 일찍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먹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기분이 든다.최근엔 1학년 대상의 글쓰기 수업을 위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하는 수업이다 보니 왠지 재밌게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 생글생글 웃기도 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나름 많이 준비해 가곤 한다. 그렇다보니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할 때에는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곤 하지만, 막상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혼자 있을 때면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내일 수업을 또 준비하고, 다른 할 일들도 해야 하는데, 정작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지친 것인지 침대에 몸져눕듯 쓰러져 한 시간쯤 잠들어버린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먹기 싫은, 어른의 투정인 셈.그런 하루 중에 유튜브 알림이 울린다. 좋아하는 인디 밴드의 뮤직 비디오가 유튜브에 공개되었다는 알림. 겨우 손가락 움직일 힘만 남아, 가까스로 알림을 클릭한다. 검은 창에 유튜브의 마크가 뜨고,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와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와, 음악 진짜 좋다. 영상 진짜 멋있게 찍었네. 대박. 대박. 보컬 엄청 잘생기게 나왔어. 얘들 왜이래. 진짜 대박 나겠다. 이제 나만 아는 밴드 아니겠다. 속상한데 더 성공했음 좋겠다. 너네라도 성공해라. 난 이번 생은 글렀다. 와 근데 노래 진짜 좋네. 영상 대박 멋있어. 완전 대박. 어, 이거 만화 오마쥬인가? 소년 만화 주인공 같네. 멋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실리카겔’이라는 밴드의 ‘Mercurial’을 그렇게 하루 종일 보고 들었다. 가사의 의미와 뮤비에 나온 오브제들을 보며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면서 이상하리만치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 버티길 잘했다 싶은 기분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심미적인 만족감 같은 걸까? 사실 잘은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들뜨고 내일도 또 들어야지 싶고.내일도 또 들어야지, 지하철에서 뮤비 봐야지, 영상도 더 찾아봐야지. 어디 인터뷰나 코멘트 한 거 없는지 찾아봐야지, 그런 소소한 생각을 하다 잠들었다. 그런 때면 왠지 어릴 때 생각이 난다.좋아하는 게임 하나에 몰입해, 혼자 게임 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이런 저런 살을 붙이고,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계획하며 두근거리던 기분. 분명히 별 것 아니지만,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1인용 위안 같은 것들. 참 별 것 아니긴 한데, 그 사소하고 작은 ‘덕질’ 하나에 하루의 의미가 바뀐다. 버티고 버틸 뿐인 삶에서, 내일을 두근거릴 수 있는 삶으로. 그렇게, 오늘 나의 하루는 구원받는다. 사소한 애정이 나의 하루를 이토록 두근거리게 해줄 수 있다니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2023-03-21

나는 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보면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들 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물론이고 대중의 내밀한 욕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인터넷 서점 사이트만 들어가 봐도 그렇다. 읽으면 부를 거머쥐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책과 욕심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바람처럼 살아가자는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러한 양극의 발화야말로 우리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외침과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기 쉽다. 세상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으나 보이지 않는 손에 어퍼컷을 맞고 KO패 당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살면서 누구나 냉소와 허무를 맞닥뜨리기 마련이고 그날그날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렇게 나태하게 살 순 없다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혼란한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명백한 답을 찾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런 면에서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고 집단적인 폭력에 관해 파헤치는 내용의 프로그램은 공개와 더불어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그 어떤 이유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행위들. 어떠한 가치를 향한 의지가 크면 클수록 자기 존엄성보다 희생이 앞설 수밖에 없다.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가감 없이 벌인다.다큐멘터리에서는 눈이 찌푸려질 만큼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피해 상황을 보여준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상황이나 권위를 내세우던 사람이 몰락하는 과정, 한 인간을 무분별하게 신격화하는 것의 위험성과 사람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모습까지. 모두 인간이 행한 일이며 종결되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진리를 알고 그를 통해 구원받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정답을 나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만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 당장의 현실은 고달플지 몰라도 믿고 따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또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책을 덮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라는 자기계발서의 조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나가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 정답이 있다고 보장되어있는 한, 누구나 자신만만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적극적인 자기 확신과 맹목적인 자기 믿음은 다르다. 한 사이비 교주를 체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애써왔던 사람은 그의 실체를 마주하고 이렇게 보잘것없고 겁 많은 사람을 쫓던 것이 허무했노라고 고백한다. 어떤 인간도 완전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붙잡는다.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에 가깝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했던 그 유명한 변론을 떠올려 보라. 그가 유일하게 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의문하고 의심하고 전복하면서 철학과 과학과 종교는 발전되어 왔다. 사랑과 행복 같은 관념은 늘 선행적으로 존재한다. 결국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본질이다.언젠가 외부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써야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보다 거기에 무언가를 대답하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정답이라고 내어놓을 수도 있던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질문자의 얼굴에서 실망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나는 그때 어떤 답을 주려고 했던 걸까. 어쩌면 이제껏 그것을 답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모르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어떤 상황에선 모르겠다는 발화가 명쾌하고 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끝끝내 어려운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의 영역보다는 앎의 영역에 가깝다.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는 그 걸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2023-03-21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아직까지도 글은 솔직함이고, 폭죽처럼 진실이 절정을 향해 터뜨려질 때에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시는 더욱 그렇고 에세이나 칼럼 같은 산문도 마찬가지다.하지만 난 이 모든 걸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모든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시 쓰기가 그랬고, 모든 사물과 대상과 사람에 대한 본질을 꿰뚫을 수 없다면, 나아가 이야기 속 진실을 모른 채 쓰는 글쓰기라면, 그것은 어리석고도 우스운 객기라 생각하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그래서 나는 기록을 멈췄다. 읽기를 멈추고 사유를 멈추고 시 쓰기를 멈췄다. 단 몇 줄짜리 시에 이토록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니 환멸이 났다. 진실이 빠진 글은 누군가의 생각과 글을 그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글쓰기는 당장의 나의 월세가, 밥이, 옷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대학 졸업 이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화장품을 팔거나 음식을 나르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했다. 필요하다면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를 쪼개어 바삐 움직였다. 글 쓰는 것 외에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고 지금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후회되는 점은 그 일을 하기에는 너의 재능이 아깝다는 무례한 말을 받아치지 못하고 오히려 거듭 무기력해졌다는 점이다. 동시에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타인에 대한 눈맞춤도, 정작 나의 마음도 모르면서 써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채 더듬더듬 햇빛이 드는 자리에 앉으려 애쓴, 당시의 혼란과 오기에 너무 집착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일을 하다 간혹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 년에 세 네 번, 문예지에서 청탁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나를 시인이라 칭하며 작품을 청탁할 때의 민망함, 잊히지 않았다는 안도감, 어떤 작품을 써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 마감일이 다 되어서야 급히 써내려가는 초조함, 그렇게 마주했을 때 내 것 같지 않은 문장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있는지 되짚을 여유와 용기가 없다는 진실을 마주하며, 불현듯 이 모든 게 쓸모없다고 여겨졌다.좋아하는 책을 모아둔 책장도, 서점 베스트셀러 칸에 자리 잡은 책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볼 때에도, 안면만 튼 작가들의 신작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쏟아지는 광경에 느끼는 소외감도.하지만 이런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건 아직까지도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속해서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고 나는 어떻게든 쓰고 있으며, 글을 쓰고 다루는 모든 이들이 묵묵히 빛나고 있다고 있는 점에서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나는 현재 그 빛남에 출발조차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고 돌아 내가 책장 앞에서 책을 만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제 미련한 유난스러움을 멈추고 묵묵한 글쓰기를 하겠다는 머쓱한 결론에 도착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속 같은 짧은 시간 안에 즐거움을 주는 인스턴트식 만족감이 나를 기쁘게 하는 건 맞지만, 영상이 끝나고 검은 화면에 내가 잠깐 비출 때의 스스로를 못나다고 생각하는 것, 방구석에 앉아 혼자 너무 편하게 생각 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분명히 할 말이 있는 사람이고, 그 말을 정확히 세상에 던지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요즘은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생활 유지를 위해 써야만 하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기업의 홍보성 글이나 광고 카피 등의 업무적인 글쓰기는 광고에 따른 타겟층이 정해져 있기에 사용자에게 기대하는 의도나 목적, 그로 인해 얻어지는 예측성과를 정확하게 설정한다. 문구 또한 소비자가 카피를 읽는 즉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작성한다. 호기심을 자극하여 즉각적인 참여나 구매 등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다행히 일은 꽤나 적성에 맞다. 치밀하고 정확한 글쓰기와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 사이에서 공통점과 적절한 균형을 찾아 애쓰고 있고, 모든 글쓰기가 꽤나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단 점에서 요즘의 나는 글과 함께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23-03-14

2층 아저씨의 참기름

시각, 청각 장애인인 할머니에게 제공된 국민임대주택에서 엄마가 산다. 할머니 부양하는 동거인이라 입주 자격이 된다. 옥상에 빨랫줄 당기고, 스티로폼박스 화분을 놓아 상추, 고추 심을 수 있는 그 집에서 14년째 사는 중이다.영어유치원 급식 일하러 갔더니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가 “할머니가 언니 돈 모으라고 안 돌아가고 버티시는 거”라 했단다. 하긴 최소한의 월세와 공과금만 내면 되니 주거비용을 많이 아끼긴 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 들어간 후 엄마는 반려견 순돌이랑 둘이서만 지냈는데, 순돌이는 3년 전 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시어머니 병구완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밖에 나가 일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직 변변히 자리 잡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3층짜리 낡은 연립주택 1층에는 1년에 몇 천 건씩 민원을 넣어 ‘민원왕’으로 티브이에도 나온 악성 민원인 아주머니가 살고, 2층에는 80대 중반 어르신이 산다. 3층에 사는 엄마는 ‘2층 아저씨’와 살갑게 지냈다. 그분은 젊어 재혼 후 자식들에게 버림 받았다. 아내 되신 분이 금방 돌아가셔서 쓸쓸히 혼자 늙었다. 옥상 오르내리며 이불빨래 널 만큼 정정하셨는데 암 수술 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몸피가 반으로 홀쭉해졌다.엄마는 영어유치원 급식 반찬 남은 게 있으면 비닐에 싸서 아저씨 갖다 드리고, 할머니 면회 갔다가 병원 1층 죽 가게에서 소고기죽 사서 갖다 드리고, 행정복지센터에서 김 두 상자 받으면 한 상자 드리고, 내가 낚시로 잡은 생선 갖다 주면 그것도 나눠 드리고, 명절 음식 해다 드리고, 내 생일날 일부러 잡채 더 해서 갖다 드리고 했다. 좋았다 나빴다 하다가 또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을 안 하신다. 며칠 전 집 앞으로 이삿짐 차가 오고, 수십 년 연락 끊고 지낸 딸이 와선 엄마에게 고맙다고…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셨단다.얼마 전,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 살던 80대 여성이 분신을 시도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미처 하지 못해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오랜 기간 생활고에 시달렸다. 관리비가 7개월이나 연체된 상황에서 방을 비워줘야 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다.지난 1월엔 생활고를 겪던 70대 어머니와 40대 딸이 함께 극단 선택을 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장사를 할수록 빛만 늘어나고, 월세는 밀려가고,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 계층임에도 전기요금 등을 성실하게 납부해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이 오히려 찾아내지 못했다. 유서에는 “장사하면서 빚이 늘었다”, “보증금 500만원으로 밀린 월세를 대신해달라”고 적혀 있었는데, 더 가슴 아픈 건 “폐를 끼쳐 미안하고 미안합니다”라는 문장이다.“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그 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윤동주는 ‘팔복’의 마지막 문장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썼다. 멀찌감치 관망하는 자의 손쉬운 위로가 아니라 슬퍼하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 슬픔에 영원히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이웃의 고통을 보며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는 사람, 더운 가슴에 바람이 이는 사람, 고운 마음에 아픈 노래 울리는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을 나는 엄마에게서 본다.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늙은 사람이 더 늙은 사람을 보살피고,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 곁에 있다.2층 아저씨 냉장고를 열어 보니 파 썰어놓은 것, 참기름, 된장 따위가 있어서, 아까워 챙겨오셨단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버렸을 텐데 가족처럼 지낸 분이니까 챙겨왔다”고. 엄마는 오랜 이웃을 잃었고, 이웃이 남긴 참기름, 된장, 대파로 저녁을 지을 것이다. 누군가 살려고 가꾼 것들이 다른 이의 삶을 마저 가꾼다. 삶이 없어도 삶이 이어진다.“봄에 옥상에다 뭐 안 심어?”라는 내 물음에 엄마는 “2층 아저씨가 화분이랑 다 해놨으니까 엄마가 상추 고추 심고 호박도 심어야지” 했다.

2023-03-14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프로게이머를 불러다 면박을 주는 일들.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면 실제로도 사람을 죽이고 싶으냐고 묻고, 게임 머니를 얼마나 가지고 있냐 묻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냐고 묻고. 물론 그때엔 사회 전반적으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소했던 시기였긴 하다. 하지만 무례한 질문들을 던져댄 패널들의 모습이란, 무지가 얼마나 사람을 무례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런 질문들은 흡사 도박 중독자에게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지금은 사람들의 게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나 배틀 그라운드 같은 게임의 흥행과 맞물려 한국 게이머들이 세계무대에서 선전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이제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싶냐는 등의 무례한 질문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문화를 대변하는 사람들이면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 잡게 됐다.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하지만 정말 그럴까? 게임 시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종종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얼마 전 문제가 됐었던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조작 문제나, 과도한 과금 유도, 사행성 논란뿐만 아니라, 블록체인이나 NFT를 융합하여 게임을 통한 수익 모델을 홍보하는 경우들을 보라. 이런 게임 시장의 세부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이 게임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문화의 융성이나 즐거움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부 게임이라 하기엔 대다수의 한국 개발 게임들이 비슷한 루트를 걷고 있기에 우리가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게임은 문화인 동시에 산업이다. 더불어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수익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것이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돈이 벌려야 다음 게임도 만들고 할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왜 게임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가. 게임으로 돈을 벌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흔히 캐시 카우로 불리는 일부 게임을 통해 게임사는 과연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물론 모든 게임사가 그렇다는 건 일반화의 오류다. 분명 적지 않은 회사들이 더 나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회사들은 게임을 단지 돈으로 밖에 바라보지 않는다. 익명 게시판에 달린 수많은 게임회사 직원들이 게임 소비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라. 그들은 게이머들을 단지 호구로만 바라볼 뿐, 자신들이 이끌어가는 문화의 향유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의 게임 회사들이 이런 관점으로 유저들을 바라본다면, 그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대만 해도 동아시아 게임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평가받던 한국 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 이제 한국 게임은 더 이상 동아시아 게임 업계의 강자가 아니며, 단지 뽑기를 비롯한 사행성 게임과 과도한 과금 유도에 주력할 뿐인 도박성 게임만이 판치는 국가란 인상이 강하다. 그 10년 사이, 중국과 일본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꾸고 스타일을 만들어갔던 것과 대조된다.그와 같은 국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게임 회사가 유저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한국 게임 회사는 좀처럼 유저들이 왜 게임을 하는가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단지 유저들이 비교 우위를 통한 우월감을 원해 게임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근 10년 사이에 변화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만이라기 보단, 게임 회사가 자신들의 상품의 목적과 판매 방식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그건 단지 비교 우위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적, 시각적, 청각적 재미나 손맛이라 불리는 컨트롤의 재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게임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유저들이 원하는 건 그처럼 다양한 재미지, 단순히 내가 남들보다 강하다는 느낌이 아니다.그래서 한국 게이머들은 점점 한국 게임을 떠난다. 재미의 요소는 보강하지 않으면서 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는 한국 게임 회사들에 지쳐서. 유저를 단지 돈주머니로 바라보는 게임회사들에 정이 떨어져서. 이게 단순히 게임의 문제뿐인 것은 아니다. 문화를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볼 때는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한국 게임 업계의 몰락은 이런 태도의 부재가 어떻게 시장을 망가뜨리는가에 대한 선례가 될 것이다.

2023-03-07

우연과 필연 사이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 책장을 덮은 후에도 꼼짝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감각인데 그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나를 읽고 쓰는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필립 로스의 소설을 처음 읽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대던 스무 살이었고 도서관의 책장을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나는 젊은 날을 휘발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떤 우울, 무기력,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발붙이고 서 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묘한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날 책장에서 꺼내든 책이 필립 로스의 ‘울분’이었던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울분’의 주인공인 마커스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으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마커스에게 말한다. “너는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둔 청년이야. 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것은 어쩌면 자식을 둔 흔한 부모의 염려일지도 모르고 시대적인 필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아버지는 마커스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마커스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는 일밖에 없다고 여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마커스의 발악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마커스는 집을 떠나 대학에 입학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고 어떤 규정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의 목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전쟁에 끌려가지 않고 법대에 진학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중했고 조심했다. 어떤 부분은 미성숙하기도 했고 또 어느 부분은 놀라우리만치 자기중심적이기도 했다.그런 마커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 하나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채플 수업에서의 대리 출석이 발각되었을 때, 반성문과 매주 수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학생과장의 말을 수용할 수 없던 것 역시 일순간의 치기가 아니다. 삶의 이면에 고요히 잠복하던 어떤 울분이 그의 마지막 선택을 추동하게끔 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퇴학당하고 징병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 결과 마커스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이러기만 했다면 또 저러기만 했다면, 모두 함께 모여 오랫동안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그렇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의 룸메이트나 애인이 아니었다면, 채플 수업이 아니었다면, 마커스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비극으로 향하지 않는 길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것, 감정을 억누른 채 어떤 것도 분출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는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좆까, 씨발.”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만약 마커스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른다. 학생과장의 뜻대로 하여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했다면 그는 윤택한 삶의 법률가가 되었을 수 있다. 여러 선택의 끝에는 무수한 마커스의 미래가 있고 그것이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삶을 살든 그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마주한 아버지가 외쳤듯이. “내가 옳았잖냐, 마커스. 내 눈에는 그게 오는 게 보였단 말이다.”위대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혀 다른 결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아주 사소하게 벌어지는 우연적 사건으로 인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운명으로 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이.미국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던 스무 살의 청년에게 닿게 된다. 청년은 작품을 읽으며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매우 평범한 어느 날의 사건이 삶의 어느 곳에 잠복해 있다가 어떠한 결과를 이끌게 될지는 끝내 두고 볼 일이다.

2023-03-07

기억의 알맹이를 여러 개 갖고 있다는 것

올해 나는 한번도 도전해 보지 못했던 취미를 시작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하며 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새해부터 새로운 일을 잔뜩 벌려 놓고 보니 사실 과거의 익숙한 것이 훨씬 나아 보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예전에 했던 익숙한 일과 취미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다보니 시작선 앞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움츠리는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결국 올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우연히 책 한권을 마주했다.김영하의 ‘작별 인사’ 작품 속 주인공 철이는 안드로이드 휴먼이다. 철이의 아버지는 유명한 IT 회사의 연구원이며 휴머노이드를 만들어 인류의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 철저히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라 굳게 믿고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있는지 의문도 없이 살아가다 어느 날 사건에 휘말려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모든 것이 생소한 날 것 그대로의 수용소에서 철이는 금방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혹독한 현실 속에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재정립하며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을 성장이라 깨닫는다.철이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만나 우정의 관계를 맺으며 소속감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추억이란 개념을 처음 입력하게 된다.동시에 철이는 의식과 존재란 무엇이며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파고들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다시금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므로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통과 수반된 사건은 기억되기 쉽다. 예기치 못한 순간과 갑작스런 변수는 분명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이라는 깊은 자국을 남긴다. 물론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 또한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지만, 내겐 행복의 기쁨이 기억에서 차지하는 크기보다 조금 더 고통의 기억이 깊게 새겨진다.고통과 함께 동반되는 좌절과 우울감은 분명 괴롭지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중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의 의식은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는 경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기억에 깊이 남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되게 하고, 다시금 장애물 앞에 도달했을 때의 유연성과 여유를 가지게끔 한다. 고통을 이겨내 의연하게 생을 살아가는 기억의 알맹이를 여럿 갖고 있는 것이 내겐 중요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오랜 기간 써내려 갈 숙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영화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전에 없는 고난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이 처한 공간을 청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마녀배달부 키키’ 속에서 주인공 키키는 어린 나이에 아무 능력도 없는 채로 집을 떠나 마녀수행을 가는 장면에서 위기가 시작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주인공은 어느 날 이유 없이 인간 세상과 다른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 가버리고 만다. 불현듯 낯선 세계에 진입한 것도 당황스럽지만 갑작스레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여 홀로 위기 속에 남겨진다.그러한 위기 속에서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는 첫 단추로 청소를 택한다. 고통의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건의 위기와 절정을 지나 결론에 도달하여 씩씩하게 이야기를 완성한다.삶의 고통 뒤에 따르는 가치는 대부분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때문에 고통을 자세히 보고 사유하며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과 가치는 아주 긴밀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사실은 지금 나를 둘러싼 수많은 스트레스에 적절히 나를 던질 필요가 있다는 안도를 마주하게 된다. 고통을 향신료처럼 요리하여 고독을 즐기는 방법은 늘 생소하고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202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