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끝나간다. 올 해는 조금 특별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쓸쓸함이 감돈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방문했던 미술관 앞을 우연히 지난다거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나누었던 카페를 예기치 못하게 들리는 등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불쑥 겹쳐질 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마주한 듯 난처해진다.
A는 여전히 시를 쓸까? 늘 퀭한 얼굴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걷던 사람이었다. 말을 걸기 전까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처음엔 다가가기 참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로 다니던 거였다. 강의도 자주 빠져서 게으름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밤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읽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와 A는 대학 졸업 이후 더 가까워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음도,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 A의 안부가 궁금해지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은 그대로 묻어두어 침묵으로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나의 서랍 한 칸엔 미안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성숙함으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강을 조심스레 빌어본다.
올 해의 나는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주기적인 상담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중한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며 조금 더 변화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스스로 마주하는 횟수도 점차 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미성숙한 것들, 강박에 가까운 것과 나의 취약점, 그리고 동시에 나의 장점 나만이 가진 특징, 나의 능력도 살펴보게 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설렜다. 머릿속의 안개가 차차 걷히며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고 그 실체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는지 기대 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날그날의 사정에 따라 머릿속의 안개는 포악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급작스레 온 몸을 젖게도 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이 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흐르고 변화하니까.
이 시간들이 반복되며 여유를 보관할 마음의 서랍이 칸칸이 생겼다. 이젠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한 외로움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지난 사람들의 안부를 죄책감 없이 빌어볼 수 있으며 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지고, 좋고 싫음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의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것,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물론 내가 너무 다치지 않을 만큼 건강할 정도로만.
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나는 본가로 향한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더 들어가서 영암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가면 부엌 식탁 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다. 나를 기다리며 삼일 내내 장을 봤다는 엄마. 본가 왔을 때 많이 먹어두라며 툴툴거리는 아빠, 그리고 다섯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
우리 가족이 만난 한 시간 정도는 늘 평화롭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대화는 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는 늘 커다랗게 자리한 화를 누르기 바쁘다. 하지만 곧 무력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는 걸 아니까. 사랑의 형태는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곧 깨어질 듯 불안정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내며 도망치지만, 이젠 이 또한 보통의 사랑의 형태임을 안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며 저 멀리 있는 사랑을 불러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의 서랍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