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1일엔 광화문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광화문과 덕수궁 그리고 서촌을 말할 수 있다. 그곳의 주변엔 취향을 가득 담은 카페와 음식점, 동네 서점, 각 종 소품을 파는 가게 그리고 특정 장소들이 있다. 세 곳 모두 많은 이야기와 사람과 감정이 얽혀 있다. 어느 계절에 누구와 가도 좋은, 애정이 가득 담긴 곳이다.
2024년을 정말 잘 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지난해의 마지막엔 아침이 되자마자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공들여 책을 골랐고 읽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도 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 매대 앞에 서서 그곳에 반듯하게 세워져 있는 책의 모습을 바라봤다.
매대위 같은 책일지라도 제일 바깥쪽에 있는 책과 가장 안쪽에 책은 컨디션 차이가 꽤 난다. 제일 바깥에 있는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탓인지 책 표지가 더 물렁물렁하고 모서리가 약간 닳아 있다. 종이를 넘길 때의 질감과 촉감도 다르다. 새 종이책 특유의 빳빳함을 잃고 훌렁훌렁 가볍게 넘어가며, 종이를 넘기며 생기는 미세한 자국이 새겨져 있다.
반대로 가장 안쪽인 끝에 위치한 책은 진열된 지 얼마 안 된 듯 상처 없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새 책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어딘가 모서리는 더 날카로워 보이고 빳빳하며 유연해 보이지 못한다. 읽는 이의 손아귀에 잡혀 꼿꼿하게 서있는 모습이 왠지 근래의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달까.
나는 사람이 어렵다. 특히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선 그들이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느끼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보단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 말이 무례하진 않은지 조금은 생각해보고 단어와 문장을 골라 말을 건네는 편이다. 그러니 대화의 흐름은 무언가 매끄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만약 누군가 나와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날 유독 더 공을 들였기 때문이고 아마 집에 가자마자 타이레놀을 입에 털어 놓고 잠에 들기 바빴을 것이다.
처음 보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어도 자신의 아픈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가 겪은 상처나 아픔을 들여다보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동요되고 전이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
하지만 의무적으로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제스처와 뉘앙스를 충분히 드러낸다. 너무 반응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무안해질테고, 또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면 그에게 가식이라는 무례를 범할 수 있으니까. 너무 과하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도록, 나보다는 상대를 위한 너무 많은 고려와 생각에 빠진다.
더 큰 문제인 건,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는 행동을 미덕으로 여기며 경청과 조언을 할 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내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상대에게 좋은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 타인의 의사를 의존했고 지나치게 수용했다. 상대가 평상시 자주 쓰는 말과 표현, 관심사를 익히 파악하여 주로 상대에 맞춰 주기 바빴을 정도였으니까.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은 판단이며, 판단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타인의 의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 인간 정신의 정점이라 말했다.
또한 인간의 나약한 정신은 자신의 이해와 통찰을 동원하기보단 타인이 떨어트린 몇 마디 말을 빠르게 주워 담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몰래 삼킨 후 배설하길 즐겨한다고도 했다. 스스로 통찰을 통해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 손쉽게 타인의 그럴듯한 판단을 마치 제 것인양 행한다는 것이다.
그간 내가 생각했던 ‘좋은 사람’은 애매했다. 그래서 올해엔 서점 매대의 가장 바깥에 놓인 책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형태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보려 한다. 타인의 인정과 판단보단 주체적이고 독립적이고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더 근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