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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뒤에 남겨진 채

등록일 2024-01-15 19:53 게재일 2024-01-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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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단지 삶의 편의성 증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Pixabay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감독 샘 에스마일, 2023)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루만 일람의 소설 ‘세상을 뒤로 하고’(2020)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인데, 설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즉흥적으로 휴가를 떠난 가족이 휴가지에서 사이버 테러로 인해 모든 전자기기가 고장 난 채 고립된다. 가족은 추락하는 비행기들과 원인 불명의 소음 테러, 동물들의 대이동, 자세한 설명이 생략된 재난 방송 등을 마주하지만 외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기에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결국 가족은 휴가지의 집으로 돌아오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머지 않아 세상이 멸망하게 되리라는 암시와 함께 끝이 난다.

사실 영화는 평범한 재난 스릴러의 양상을 반복한다. 알 수 없는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주인공을 포함한 일행은 직면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소중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외부인과의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다. 대개의 재난 스릴러 영화는 이러한 상황의 연속 속에서 주인공의 기지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위기를 탈출하며 에필로그와 같은 형식으로 평화로운 자택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의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 양상은 가족 형태를 비롯한 현대의 공동체가 마주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법 한데, 대개의 스릴러 영화가 해체된 가족 공동체가 위기를 극복하며 재건되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 스릴러 영화에서 나타나는 재난은 해체된 전통적 공동체를 다시 봉합시켜주는 계기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독특한 건, 어떠한 위기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끝없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상황에 직면하지만 정보가 차단된 상황으로 인해 원인을 알 수 없고 그렇기에 탈출구 또한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소중한 사람이 부상을 당해 위기에 처하지만, 약조차 쉽사리 구할 수가 없어 절규할 따름이다. 물론 여타의 재난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도 일련의 위기 상황을 가족애를 바탕으로 극복하기도 하고 조금은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이들은 재난의 현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기존의 재난 영화가 문제의 해결을 통한 카타르시스와 해체된 가족의 봉합을 통한 안정감을 선사한다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건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원하는 무력감에 가깝다.

어쩌면 이와 같은 변화는 재난 스릴러 영화의 문법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여러 사태에 대한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는 듯하다.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가 간 대립의 격화와 무력 충돌, 기후변화로 인한 세계 권역의 지각 변동,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감과 전자기기 사용에 대한 극심한 의존도, AI를 비롯한 기술 환경의 변화가 자아내는 두려움 등, 세상은 전례 없는 변화의 시기에 놓여 있다. 어쩌면 지금의 변화들은 한 개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앞서 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세상의 속도 앞에 뒤처져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고작 5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자연의 의미에서도 그렇고, 문명의 의미에서도 그렇다. 변화가 단지 삶의 편의성의 증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힘으로 따라가기엔 점점 벅차지고 있다는 것 또한 체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쉽게 설명해줄 누군가를 원하며 유튜브 속으로, 혹은 다른 종류의 매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면 ‘세상을 뒤로 하고’라는 소설의 원제는 참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주인공과 그의 가족이 일상에 지쳐 휴가지로 떠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그렇게 떠나온 곳에서 정보 고립으로 인해 세계에 뒤처진 채 남겨진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건, 굳이 사이버 테러를 비롯해 영화 속에서 일어난 테러 상황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언제든 우리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단지 인터넷이 끊어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는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게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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