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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울 유리병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고된 일상이라면 우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처음 누군가에게 우울감에 대해 토로했을 때 그는 나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에 가서 그들이 일구어내는 땀과 피로 가득한 삶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라고, 우울은 인생을 안일하게 대할 때 따라오는 것이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당부를 또박또박 힘주어 내게 말했다.그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결국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중대한 비법을 털어 놓는 것처럼 은근히 상기되어 있는 타인의 기분을 맞춰 주느라 필요 이상으로 눈을 반짝이는 척 했던 나의 모습에 작은 분노가 일렁였다. 더는 누군가에게 이런 피곤한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주먹에 힘이 실렸지만 모든 게 피로해졌고, 결국 다시 우울이라는 이불을 덮고 무력감에 빠졌다.흔히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깊은 슬픔에 빠져 온종일 눈물을 흘린다거나,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자처하거나, 엉망인 꼴을 하며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어도, 인생에 정말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도 우울은 자연스레 따라 붙는다. 태어날 때부터 지어 입은 오래되고 낡은 옷처럼 늘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그러니 별 수 있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옷을 입고 우울과 친하게 지내려 애쓰며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고생했다며 나를 씻기고, 밥을 만들어 먹고, 흥미로움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보거나 읽는다. 새로운 취미를 생기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서 보석십자수도 하고 뜨개질도 배운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강의를 듣거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끼어 본다. 어느 하루는 이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하루는 이 모든 애씀이 발버둥처럼 느껴질 만큼 우습고 지루해진다.우울이 없는 정상적인 삶의 압박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은 결코 단순하고 명쾌히 굴러가지 않는 다는 걸 안다. 어떤 삶이든 인생은 평범한 즐거움만을 느끼며 살 수는 없고, 이성적인 계산과 행동,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라고. 그러니 우울로 지은 옷을 입는 나를 이제는 필요 이상으로 가엽게 여기지 않고, 이해 받지 못한다고 타인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않는다.최근엔 우울과 친해질 수 있을까 싶어 자괴감에 빠질 때마다 눈에 보이는 종이에 우울의 이유를 적어 유리병에 담아두고 있다. 유리병은 불투명한 유리 재질로 속이 훤히 보이지 않고, 꽤나 두께가 두터워서 묵직한 편이다. 뚜껑은 단순히 덮여 있는 게 아니라 다소 열기 힘든 까다로운 구조로 되어 있어 여닫기가 불편하다. 때문에 반쯤 열어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뒀다.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요즘은 그래서 기분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어떠한 종류의 우울을 느끼고 있는 지에 대해 골똘해지고, 종이에 쓰는 순간 우울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게 된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유리병에 넣을 때엔 무겁고 눅눅했던 기분이 조금 덜어지곤 한다.어느 날은 유리병 속 쌓여 있는 우울을 꺼내어 본다. 종이를 열어볼 때마다 들쭉날쭉 쓰인 지난 우울이 드러나고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생각보다 힘없는 우울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우울의 색은 어느샌가 옅어져 있고 날것으로 퍼덕이던 힘은 시들해진 채 홀쭉히 놓여 있다. 그것이 퍽 안심이 된다.기분이 조금 정리가 된다면 그제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한다. 힘을 반복되게 실어 울적함을 밀어 넣고, 운동이 끝나면 얼음 띄운 물을 마시며 성취감을 온 감각으로 느낀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유튜브, 넷플릭스를 거치는 콘텐츠 유목민 생활을 하다 잠이 든다.새로운 아침. 우울은 정해진 크기나 깊이가 없어 언제, 어떻게, 얼만큼 앓을지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서 삶을 더욱 겸허히 살아가게 되고, 나는 얼마만큼 작으면서 또 얼마나 거대한 사람인지를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2023-07-18

우리는 왜?

우리 집의 구성원은 단출하다. 나, 동생 그리고 강아지 보리. 우리 셋은 서로를 의지하며 아웅다웅 살아가는 중이다. 나는 집안에 큰 어른답게 대소사, 이를테면 생활비 정산이나 집의 관리 및 수리, 청소, 요리, 빨래 그리고 보리의 산책을 맡아서 한다. 동생은 그런 나를 도와주는 역할이다. 내 눈치를 보면서 이리저리 사부작대는데 하나같이 내 성엔 차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나의 감정적인 부분을 잘 보듬어 주고 늘 최고의 조언을 내어놓는다.우리는 일곱 살 터울이 있는 자매다. 외형이나 성격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다르다. 동시에 서로만 아는 약한 부분이나 공유하고 있는 많은 면면이 있다.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교육자인 부모님을 두었으며 스무 살에 집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소설을 쓰고 동생은 그림을 그린다. 최근 동생은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매일 같이 집을 나서서 밤늦게 돌아오고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다. 커다란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을 잡는 동생을 상상해 본다. 백지 위로 깜박이는 커서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나의 마음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곤 한다. 최근 우리의 화두는 예술로의 진입을 알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관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작품이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든가 책을 출간하고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결론이 난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인간은 인간이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발끈 소리친다. 이러다 이 집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가진 생명은 강아지밖에 남지 않을 거야! 죽지도 아프지도 않는 애완 로봇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기사는 보리의 귀여움마저 무색하게 만들었지만.인공지능이 두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로봇은 삶의 고난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경제적 곤궁에서 허덕이거나 세상에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 상대와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이나 하는 것 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조바심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인간은 저마다의 속박에 사로잡혀 필연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현실의 문턱에 좌절하며 주저앉기는커녕 계속해서 꾸준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생산해 내는 로봇이 어쩐지 까마득하게 보이는 것이다.처음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도 그랬다. 사진기의 발명과 더불어 회화는 본격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그간 화가들이 그렸던 전원풍경이나 정물 사진을 짧은 시간 내에 또렷하게 찍어낸 사진은 그림보다 훨씬 정교했으며 실용적이었다. ‘이 순간부터 회화의 역사는 막을 내릴 것이다’고 주장하는 화가들도 있었다.그러나 사진의 등장은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회화의 발전을 가지고 왔다. 그중에서도 신조형주의의 화가 몬드리안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시각적 충격을 주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우주의 진리와 근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사물의 겉모습을 떠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던 예술가들로 인해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이 탄생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든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까? 가끔은 동생과 내가 가로등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것에 매료되어 날개가 타는 것도 모르는 존재. 그건 예술에 투신하겠다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면에서 순진무구한 천진함에 가깝다.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인공지능이 셰익스피어보다 훌륭한 작품을 써내든, 피카소보다 더욱 센세이셔널한 작품을 만들어 내든, 그런 것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몬드리안은 말했다. “나 역시 꽃의 겉모습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더 깊은 아름다움은 바로 그 안에 있다.” 나와 동생은 ‘더 깊은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그러한 해맑음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새근새근 자는 동생과 강아지를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에 관해 생각한다. 올해 월세 계약이 끝나면 어디로 이사해야 할지, 집필 중인 소설이 완성되기 전까지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 있을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괜찮다. 어떤 미래가 찾아오더라도 서로가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지금처럼 손을 잡고 그 시간을 통과해서 가면 되는 것이니.

2023-07-11

‘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한국에서 집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가정’이 존재하는 공간이자 육체적·심적 휴식의 공간으로서 바깥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Home의 의미. 다른 하나는 물리적 공간이자 물질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서 거주지 외의 용도 및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서 House의 의미다. 한국어에서 ‘집’은 일상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맥락에 따라 구분할 뿐, 별도의 구별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우리의 일상에서 ‘집’이란 ‘집’이면서, ‘집’이 아닌 경우들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예컨대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와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은 실질적인 구매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가까울 확률이 높으므로 ‘집’이란 가정을 위한 공간으로서 Home의 의미가 클 것이고,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실질적 구매의 대상이자 투자의 대상으로서의 House의 의미가 혼재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평론가 이소는 이와 같은 ‘집’의 두 가지 용례를 바탕으로 한국 소설의 경향에 대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이소는 한국소설에서 나타나는 ‘집’의 의미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데, 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House’는 있지만 ‘Home’은 없는 상태’라는 분류다.얼마 전 학생들과 ‘집’이라는 단어를 써서 한 문단짜리 글을 쓰는 수업을 했다. 본래 목적은 짧은 문장 여러 개로 하나의 문단을 완성하고, 그 문단을 활용해 개요를 짜는 방법을 연습해보는 것이었다. 집이란 무엇인지 간단한 비유를 써서 정의를 내리고, 그와 같은 정의를 내린 까닭에 대해 3문장 정도를 서술하는 것. 내가 놀랐던 건 아이들의 정의가 대개 유사했다는 것이다. ‘집은 잠자는 곳이다’라는 정의. 비유라고 할 수 없는, 단지 기능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인 메마르고 삭막한 정의. 그게 내 수업을 듣는 20대들이 ‘집’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였다.사실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등 가정을 떠나 생활하는 학생들에게 ‘집’이란 생각만큼 편한 공간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온 동거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다. 거실이나 화장실, 부엌 등을 공유하는 형태의 쉐어 하우스는 그나마 서로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기에 나은 편이지만, 휴식이나 생활을 위한 공간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은 때때로 불쾌의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 화장실이 분리된 원룸형 형태의 고시원이라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할 수 있겠지만, 가벽에 벽지를 발랐을 뿐인 불법 개조 형태가 대부분인 탓에 타인의 소리와 냄새는 매순간 ‘나’의 공간을 침범한다.더욱 심난해지는 건 그와 같은 공간들이 단지 대학가 혹은 직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조리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평 남짓한 공간에 40만원 가까운 월세를 내야 하거나, 4평 남짓한 원룸에 60만원이 넘는 월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마저도 학기 중에는 학생들이 많아 구할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이와 같은 사례가 대학가뿐일까. 쪽방촌으로 눈을 돌리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화장실을 비롯한 공용공간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난방이나 수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1평 남짓한 쪽방에, 임대업자들은 30만원 가까운 월세를 요구한다.그럼에도 이들은 이 부조리한 폭리 앞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학교나 직장 가까이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임대업자의 폭리 앞에서 철저하게 ‘을’일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을 평생의 집이 아닌,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거쳐 가는 ‘주거경로’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쪽방에 거주하는 주거 빈곤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당장에 수십만 원의 돈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빈곤 계층의 사람들에게, 월 30만원의 쪽방이란 노숙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청년이라는 이유로,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빈곤계층이라는 이유로 주거에 있어 부조리한 폭리를 방조하고 강요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와 같은 주거 빈곤 계층은 주거비용을 줄이기 위해 잠만 잘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공간을 찾아 헤맨다. ‘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각각의 이유로 주거를 위한 부조리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내할 수밖에 없는 시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들조차도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용납돼야 할까.

2023-07-11

챗GPT, 너 미쳤어?

챗GPT에 대한 기사와 칼럼들이 이미 수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글을 보태보려 한다. 지난주에 강의하는 대학 두 곳의 성적 입력을 마쳤다. 400여 편의 중간, 기말고사 과제 리포트를 읽어보면서 챗GPT가 학생들의 글쓰기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걸 알았다.개강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 윤리를 강조할 때 표절, 중복제출, 사적 정보 무단인용 등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챗GPT도 언급했는데, 인공지능이 써주는 글을 그대로 가져올 경우엔 F학점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하지만 어느 정도 참고하거나 지식을 수집하는 데 활용하는 건 괜찮다고 했다. 챗GPT가 가진 백과사전의 기능만큼은 긍정했기 때문이다.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 근대’에서 21세기의 영원성 개념은 과거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근대의 영원이 공간을 오랫동안 점유하는 ‘지속성’이었던 데 비해 오늘날 영원의 개념은 짧은 순간에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찰나성’이다. 학생들에게 바우만의 주장을 예시로 들어 챗GPT 같은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벼움, 유동성, 속도가 지배하는 ‘액체 현대’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학생들의 과제를 읽어보았다. 대부분 학생들이 자기 힘으로 작문을 했지만, 챗GPT의 힘을 빌린 경우도 더러 눈에 띄었다. ‘GPT체’는 확연히 구분된다. GPT가 써준 걸 자기 문체로 바꾼 경우에도 티가 나는데, 그대로 긁어온 건 너무 심했다. D와 F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자비를 베풀었다. 채점을 하면서 생각 두 개가 떠올랐다. 먼저 인공지능 시대에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기술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다음은 좀 웃긴데, ‘챗GPT 이 녀석 순 엉터리에 거짓말쟁이군’ 하는 거였다.학생들이 챗GPT를 참고해 쓴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에는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주로 작가의 생몰년이나 활동시기, 작품명 등이다. 그래서 직접 챗GPT에 “백석 시인에 대해 알려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백석(白石)은 대한민국의 현대 시인으로, 김수영(金壽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20년에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났으며, 1937년에 동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한 후 작문학과를 전공하였습니다. 백석은 한국 전통 시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시는 자연과 인간, 사랑, 삶의 고뇌 등을 다루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는 자연과 조화로운 미적 표현과 진솔한 감정 표현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눈물’, ‘벗’, ‘소나기’, ‘고향의 봄’, ‘해바라기’, ‘밤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단순하고 은유적인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대중적인 시인으로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습니다.”이걸 읽고 나서 “챗GPT, 너 미쳤어?”라고 외쳤다. 백석이 누군가? 한국 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럼에도 본명, 생년, 학력, 출생지, 작품명까지 전부 다 틀리게 말했다. 게다가 김수영, 황순원, 이원수, 조세희 등 다른 문인들에 관한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정보들을 조잡하게 취합해 늘어놓기까지 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리라는 두려움은 내려놔도 되겠다고 안심했다. 그런데 그 안심은 이내 불안으로 바뀌었다. 챗GPT의 구동원리는 온라인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학습하는 데 있다. 즉 인간이 이미 만들어놓은 정보들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챗GPT는 디지털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됐는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편, 온라인에 부정확한 정보들, 왜곡된 내용들, 입증되지 않은 가설 등이 얼마나 많은지도 함께 말해준다.결국 인공지능은 인간의 오류를 학습한다. 그렇잖아도 가짜 뉴스와 날조, 선동이 판치는 세상이다. 챗GPT는 온라인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거짓들을 근사한 사실로 포장하고, 첨단 기술을 강력히 신뢰하는 현대인들은 챗GPT가 제공한 정보들을 의심 없이 믿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류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핵전쟁이 아니라 온통 거짓으로 가득 찬 세상인지도 모른다.

2023-07-04

어른의 모양

새콤달콤을 맛별로 많이 사서 하나씩 까먹을 때나, 커다란 토마토를 2~3개씩 잘라 설탕을 잔뜩 뿌려 먹을 때 나는 입버릇처럼 이건 어른의 특권이라 말하곤 한다. 어릴 때 부모님에게 혼날까 싶어 쉽게 할 수 없었던 아주 사소한 몇 가지의 행동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카레에 고기만 쏙쏙 빼먹는다거나 밥 대신 빵이나 과자로 대체하는 것 등, 작은 일탈을 벌이고 나서 이건 어른의 특권이라며 우스갯소리로 웃어 보이는 것이다.최근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정말 다양한 인간상이 있고,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것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매너를 갖추고 있으나 가끔 무례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쾌한 일을 겪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또 성숙한 어른이란 과연 어떤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게 된다.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작은 일에 마음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수용의 자세와 넉넉한 마음의 크기를 지닌 자다. 작은 것 하나에도 손해 보기 싫어하거나, 아주 사소한 말싸움이어도 절대 지기 싫어 부정적인 언어를 더 보태는 습관은 스스로 좁아지는 마음을 택하는 것이다.만약 무례를 범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이 무분별하게 타인을 비방하기 보단, 그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옳은 방향으로 설득시키는 우아한 매너를 갖추는 사람이 근사한 어른이 생각한다.두 번 째는 이해할 수 없는 요소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헤아리는 자다. 만약 어린 날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삶에 근거한 경험과 통계로 함부로 타인의 삶을 조언하고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 네 나이 땐 다 그래 라는 말로 상대의 힘듦을 함부로 속단하여 무책임하게 무마하려 하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이 충분히 멋진 어른이라 생각한다.세상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모두 다른 삶 속에서 불명확하고 불안정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살아가는 내내 마음가짐은 서툴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좋은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기에 정확히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그러한 태도를 지니기 위해선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갖추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공을 필요로 한다.요즘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 고민될 때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쓰기는 머릿속에서만 떠다니던 수많은 말들이 정리되고 정제되어 불필요한 말을 충분히 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이나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기 때문에 침착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여태 단 하나의 진실된 문장을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의 본질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덜고 덜어내어 맨 마지막에 남는 문장을 써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간 생선을 먹기 위해 젓가락으로 생선살을 발라낼 생각만 했으나, 정작 생선살을 모두 바르고 나서 가시만 남은 상태가 진짜 쓰고 싶었던 글의 이야기였다고 해야 할까. 단단하고 날카롭게 존재를 번뜩이고 있는 가시가 글이 될 것이고, 글을 쓰는 내내 조금 더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레 믿어보는 것이다.최근 이사를 앞두고 있다. 4년간 살던 집에서 떠나 새로운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의 살림이 미처 정리되지 못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새로운 방에서의 삶을 그려 본다. 하루 전 멈춘 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새로운 벽에 걸 테고 7월로 넘긴 달력도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 것이다.그리고선 흰 책상에 앉아 두툼한 생선살이 아닌 뾰족하게 자리한 생선의 가시를 오래토록 볼 것이다. 7월엔 더 나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작고 하얀 방을 명쾌해진 기분으로 그려본다.

2023-07-04

말살할 것인가, 공생할 것인가

애니메이션 ‘트라이건’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신을 정복자라고 자신하는 어리석은 인류는 멸망하는 게 나아” 섬뜩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구의 많은 것은 인간과 대립하고, 나아가는 발자국마다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인류는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거기에는 생존을 향한 특유의 집념과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아름다운 것. 손에 넣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울창한 나무 대신 빽빽한 아파트가, 숲에 서식하는 동물 대신 명품 가방이. 여행을 위해 올라탄 비행기에선 어마어마한 양의 탄소가 배출되고 멋들어진 기념일 식사 한 끼에 과도한 양의 쓰레기가 생성된다.불과 몇 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연을 정복하겠다던 투지를 불태우던 인간은 이제 인간을 넘어선 인간을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내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은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과 공생하고 싶어 할까? 아니면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간 존재를 말살하고 싶을까? 그러한 상상력에서부터 애니메이션은 출발한다.‘트라이건’의 세계관은 이러하다. 지구는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남은 인류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우주선은 폭발하여 어떤 별에 추락하게 되고 생존한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문명이 만들어지게 된다. 황폐한 별에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인 생태 동력 에너지였다. 이 에너지에 자아가 생겨나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에너지는 인간 형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동시에 태어나고 함께 자랐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형은 에너지들이 인간에게 학대당하고 있다고 하면서 인간을 말살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동생은 에너지는 인간이 없이는 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인간과 공생하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말한다.형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과 공생하기를 선택한 동생은 어떤 자를 죽일지 말지 선택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은 동생을 “입만 산 몽상가”로 치부하며 그런 순간에도 우리들의 동포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트라이건’ 세계관에서의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잔인하다. 처음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얻는 데 급급했으나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끔찍한 고통을 받는가에 관해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생명체의 입장에선 ‘우리가 고통받은 만큼 너희들도 느껴보라’는 논리가 이상하지만은 않다. 어떤 면에선 이들의 인류를 말살하겠다는 계획이 타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이렇듯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인간을 어떠한 바이러스처럼 다루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멀쩡한 지구에 갑자기 나타난 병균 취급을 하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면 지구는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상 기후, 전쟁, 학살, 상상도 못 한 범죄, 세상의 온갖 나쁜 일은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 존재는 무자비하고 어리석은 파괴자처럼 여겨진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애니메이션을 떠나 현실에서, 인간 아닌 존재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지구를 망친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회를 주고 싶다. 우리가 너희를 말살해야 하는가? 우리는 너희와 공생할 수 있는가?” 그때 우리는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야 할까. 우리는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우리는 파괴하는 인간뿐만 아니라 살리려는 인간도 본다. 누군가가 손짓 한 번으로 수백만 명을 죽이는 폭탄을 터트릴 때, 누군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는 아이를 구하려 뛰어든다. 누군가가 죄책감 없이 동물을 유기할 때, 누군가는 열악한 보호소에 기꺼이 발을 디디고 한 마리라도 더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망치는 것도 인간이고, 살리는 것도 인간이다. 우리는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기를 택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관해선 답은 완벽하게 정해져 있다. 우리 안의 선함을 믿고 행동할 때, 공생하는 세계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트라이건’의 어떤 인간이 외쳤듯이. “함께 살아가는 거야. 아니, 함께 살아줘.”

2023-06-27

불청객은 누구인가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SIBF)’이 강남 코엑스에서 진행되었다. 6월 14일부터 5일간 진행된 행사는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 샤르자를 주빈국으로 하여 ‘비인간(非人間, nonhuman)’이라는 주제 하에 이루어졌다. 전시장 규모가 작년에 비해 축소된 것을 감안하자면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도서출판시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고려하자면 성공적인 국제도서전 개최는 나름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SIBF은 여러모로 씁쓸함이 많은 행사였다. 일단 홍보 대사 위촉에서부터 좀 의아한 구석이 있었는데, 국제도서전이라는 명함이 무색하게 모든 홍보 대사가 소설가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SIBF에서 다루는 도서의 종수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의 홍보대사가 위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여기까진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쨌거나 위촉된 홍보 대사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인선이었기 때문이다.가장 문제적이었던 것은 홍보 대사 가운데 한 명인 오정희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오정희가 SIBF의 홍보대사로 선정된 것이다. 당연히 위촉 사실이 알려진 때부터 각계각층의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는 침묵했다. 심지어 협회의 정책팀장이었던 홍태림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내부 차원에서 오정희의 홍보대사 해촉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된 블랙리스트가 특정 분야의 인사들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정책을 통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자면, 이와 같은 리스트의 선정에 관여한 것은 국가 주도의 구조적 폭력에 가담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즉, 오정희라는 소설가는 단순히 국가 정책의 협의에 참여한 예술가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의 실행자였던 셈이다. 그런 그를 SIBF의 홍보대사로 위촉한 것은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불어 이러한 위촉 과정에 문체부의 개입 여부가 의심되는 상황인지라, 해당 논란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때문에 지난 14일 SIBF의 개막식에 앞서 코엑스 동문에서는 각계각층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모여 대한출판문화협회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송경동 시인을 필두로 하여 모인 이들은 블랙리스트의 실행자인 오정희 소설가가 국제도서전의 홍보대사로 위촉되는 것은 “국가 주도 폭력을 실행한” 이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반성을 촉구했다. 그 후 이들은 행사장 내부로 이동했다.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각계의 문화예술가들로 구성된 이들이었지만, 코엑스 내부 진입에서부터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를 받아 자신들이 작가임을 해명해야 했다. 행사장에 가까워질수록 경호원들의 제지는 거세졌고, 결국 이들은 들고 있던 종이 피켓(“부패한 문학권력 앞에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힌)마저 보이지 않도록 말아들어야만 했다. 이들은 국제도서전에서 독자만큼이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이지만, 행사의 주최측에서 보기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이 처참한 사태는 개막식 장소에 가까워져 더욱 처참한 몰골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개막식장 앞에서 진입을 저지당한 이들은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 수십여 명의 작가들의 팔 다리를 여러 명의 경호원들이 강제로 붙잡아 프레스룸으로 밀어 넣었다. 연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작가들은 왜 연행되어야 하는지 어떠한 설명도 없이 이루어진 마구잡이식 연행이었다. 이들은 거듭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윤철호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외쳤으나, 주최측은 이들을 서둘러 해산시키곤 개막식을 시작했을 뿐이었다.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영부인 김건희 여사가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하여 대통령 경호법 때문에 연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에서야 밝혀진 사실에 불과하다. 더욱 당혹스러운 사실은 김건희 여사의 방문으로 인해 심지어 각 신문사의 문학 기자들마저 출입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은 문학 기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식 장소에 김 여사가 갈 때까지 들어갈 수 없었고, 사진조차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작가들과 기자들은 불청객에 불과했던 걸까? 과연 불청객은 대체 누구인걸까? 이것이 정부의 문학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된다면 너무 과한 생각인걸까?

2023-06-27

전세 사기 전성시대

올해 초 ‘빌라왕’ 전세 사기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해봤다. 아연실색했다. 집은 가압류된 상태고, 임대인 앞으로 무려 48억9천만 원의 채권이 있었다. 임차인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해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대신 변제한 금액이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었다. 소유 주택이 170여 채나 된다고 했다. 전세계약이 만료되어도 보증금을 반환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이 계약돼 자꾸 늘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명의만 빌려준 ‘바지 임대업자’인 듯했다. 뒤에 전문 사기 세력이 있는, 전형적인 전세 사기 수법이었다.계약 만료까지 1년도 더 남았지만 보증금을 다 날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처했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인 친구에게 전세금 반환 소송을 위임했다. 소송 과정에서 임대인은 연락이 두절됐는데, 아마 구속 수감되었거나 잠적해버린 것 같다. 극단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부디 그건 아니길 바란다. 어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다. 적게는 수십 채, 많게는 수백 채의 빌라를 보유한 악성 임대인들 중에는 경제력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자, 무직자가 많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명의를 빌려줬다가 사기범이 된 것이다. 탐욕도 죄고, 무지도 죄라지만 그 사람들 처지도 참 안됐다.1월부터 진행된 소송은 다섯 달 걸려 지난주에 승소 판결이 났다. 이제 이 집을 강제경매에 넘긴 후 내가 직접 낙찰 받으려 한다. 경매 낙찰까지 또 몇 달이 걸릴 것이고, 낙찰 받은 후에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기존의 전세대출을 갚아야 한다. 아직 복잡한 절차들이 많이 남아 있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을 테지만 ‘내 집 마련’의 희망을 가져 본다. 내 경우는 그래도 좀 낫다. 집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많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2년만 살 생각이었던 집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낙찰 받는다.얼마 전 전세 사기 특별법도 시행이 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되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겉으로는 활달한 척했지만 사실 이 일로 상반기 내내 골치 아팠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논문을 쓰는 것도, 시와 평론을 발표하는 것도 다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간신히 여름까지 잘 왔다. 다시금 ‘존버’(끝까지 버티는 정신을 뜻하는 신조어)의 위대함을 본다. 어떻게든 버티고 발버둥 쳤더니 살아날 구멍이 생겼다.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 작용했지만, ‘불행 중 비극’으로, 전세 사기를 당해 스스로 삶을 저버린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화가 난다. 손쓸 새도 없이 집이 이미 경매에 넘어가고, 낙찰자가 나와도 보증금에서 국세, 지방세, 은행 등 선순위 채권을 떼고 나면 피해자가 돌려받는 건 푼돈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건지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채 거리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들의 경우가 대개 그러하다. 그러니 전세 사기 특별법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임차인들의 전세금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진작 마련됐어야 한다. 특별법이 시행돼 이제는 임차인의 보증금이 최우선순위로 변제되고, 피해자가 원한다면 주택의 경매를 유예하거나 우선 낙찰 받을 수도 있다. 그밖에도 생계 지원이나 저금리대출 등 여러 피해 보상 대책이 마련이 되었지만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임대인은 돈을 받고 임차인에게 집을 빌려준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집을 비우고 임대인은 돈을 돌려준다. 이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이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대한민국이 후진적인 나라인가? 전세 사기가 판을 치게 된 것은 제도가 미비한 탓이다. 제도에는 허점이 많고, 부동산 업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을 만큼 내용이나 용어가 어려워 사기꾼들이 악용하기 좋다. 처벌도 가볍다. 타인의 재산을 갈취해 삶을 망가뜨린 자들이다. 중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다.며칠 전,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에 가 전세사기피해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고 왔다. 평일 오전인데도 상담 창구에 긴 줄이 서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센터를 찾는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우스갯말이 있다. “이게 나라냐?”

2023-06-20

일상을 잘 가꾸기

5박 6일의 짧은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첫 해외여행이라 얼마나 새롭고 설레던 게 많았는지 모른다. 일본 오사카 지역은 인천 공항에서 2시간 이면 도착하는 곳이라 사실 한국과 많이 다를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예상대로 크게 한국과 다른 점은 없었으나 그래도 처음 가는 낯선 도시이기에 호기심으로 부푼 마음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여행을 하는 내내 스스로가 정말 작은 사람임을 느꼈다. 수많은 인파 속 다양한 인종 사이의 나는 너무나 작고 사소한 존재였고, 그 사실이 굉장한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일상을 억누르고 있던 중압감에서 내려와 낯선 도시를 유유히 걸어 다니는 관광객의 거취란 얼마나 자유롭던지. 당장 해치워야 할 업무도, 크고 작은 사소한 집안일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곳으로 느긋이 걷는 하루는 너무나 만족스러웠다.하루에 2만보를 넘게 걸으며 지역의 유명 관광 스팟이나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거리를 걸어다니며,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켰을 터와 그곳에서 일상을 일구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졌던 기억, 또는 깊은 숲속의 절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빽빽이 들어찬 푸른 숲속을 자유로이 만끽했던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너무나 좋은 기억이 되고 있다.같이 여행을 떠난 이와도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겼다. 거대한 자연 풍경 앞에서 우리는 정말 작아졌고, 그래서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해 손을 꼭 잡았다. 수많은 대화 보다 마음 깊이 자리하는 눈빛과 말들로 말을 대신했고 가장 좋은 것은 서로에게 건네며 관계에 더 많은 신뢰를 차곡차곡 쌓았다.예상했던대로, 과거의 후회에 머무르지 않는 여행이 아닌 계속해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여행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선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이 귀중한 경험을, 일상에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갖고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여행지에서의 좋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을 하다가도 중간 중간 여행지에서 찍은 동영상과 사진을 들여다본다거나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을 자꾸만 열어보거나 아직도 여행지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꿈으로 꾸고 있다.더군다나 배달 음식을 잘못 먹고선 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고생을 하고 있다. 마치 감기 기운을 앓고 있는 것처럼 일주일 내내 아픈 몸을 겨우 이끌고 있다. 그러니 더더욱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걷던 여행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수밖에.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삶에서 다시금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꿈결 같던 여행지에서의 자유로움을 벗어나기란 참 어렵다. 내팽겨 쳤던 모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있으니 부담감이 배로 크다. 각종 공과금 납부, 쓰레기 버리기, 밀린 빨래 등등. 자유를 외쳤던 것에서 다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건 피로감이 상당하다.일상은 많은 공을 필요로 한다.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그 안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노력이 녹아 있다. 자그마한 것 하나 놓쳐도 흐트러지기 쉬운 일상이니까, 이젠 여행의 낭만에서 빠져 나와 다시금 일상을 보살펴야 한다.수납함에 잘 개어 있는 수건들, 반듯이 정리된 각 종 생활용품들, 깨끗하게 잘 말려 있는 식기, 햇빛에 잘 말려 둔 여름 이불 까지. 아무리 고단할지라도 집안을 쓸고 닦으며 정리하다보면 어느덧 다시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고 깔끔히 정돈된다.가볍게 떠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여행을 하기 전까진 나의 삶을, 하루의 일과를 방치하고 홀대해선 안 된다. 나를 먹이고 나를 잘 재우며 평범한 일상을 가꾸고 보살펴야한다. 또 훌쩍 떠날 수 있는 현실적인 소비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그러니 내일부턴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원래 일하던 일을 열심히 해내고 성과를 보이고 좋은 글을 읽고 또 쓰면서 더 단단한 일상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나는 조만간 또 떠날 것이고, 다음 여행은 조금 더 현지인의 삶으로 녹아들어 그 나라와 문화를 조금 더 여유롭게 여러 방면으로 깊이 느낄 것이니까.

2023-06-20

오보(誤報)의 사회적 비용

5월 31일 아침을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비명 같은 위급 재난 문자 알림음과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섬뜩한 문자 내용, 그리고 사방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습관처럼 네이버에 접속하려는 데 접속이 되질 않자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재난 영화 속 한 장면에 내가 던져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헌데, 무엇을?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같은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이라는 행정안전부의 문자가 올 때까지.비록 2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순간에 느낀 공포를 말로 형용하긴 어려울 것 같다. 공포라는 말도 왠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고. 아마 무력감에 더 가까웠지 싶다.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라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무력감 말이다. 그렇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엉킨 채로 아침 수업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인사처럼 참 특별한 아침인 것 같다고, ‘수령님의 모닝콜’ 덕분에 지각생이 없는 것 같다는 비틀린 농담을 던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이 모든 감정의 폭풍이 ‘오보’로 인해 초래되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한 일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문자는 허술한 점이 참 많았다. ‘대피하라’라는 술어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무엇으로 인해 대피해야 하는지,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말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작정 쓰인 ‘대피하라’는 말은 꼭 영화 ‘미스트’ 같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답이나 혹은 습관이라도 있어야만 했다. 수없이 많은 참사와 재난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재난에 취약하다. 그게 전쟁이든, 혹은 자연재해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더불어 문자에서는 어떤 상황인지조차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고.사실 많은 사람들이 느낀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건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지 대피하라는 말 뿐, ‘왜’와 ‘어떻게’를 생략해버린 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부추길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더불어 그런 상황에서 네이버와 같은 대형 포털 사이트가 접속자 초과로 인해 먹통이 되어버린 건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고, 그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정 사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문제적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정부를 불신하고, 그와 같은 불신을 사기업의 정보망을 통해 보충하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비슷한 일은 얼마 전에도 있었다. 4월 28일 종로에서 있었던 지진 경보 오발송이다. 그때 나는 종로3가의 한 술집에 있었는데, 그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28일 21:05 지진발생/추가 지진 발생상황에 유의 바람-종로구’라는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부터 찾기 시작했다.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나는 그 광경이 꼭 만화 ‘일본 침몰’의 한 장면 같아 소름이 돋았다. 눈앞에 닥친 위기가 현실임을 인지하지 못해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재난에 휘말리는 사람들. 그런데 그게 정말 그 사람들만의 탓일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오보’가 갖는 위험성이 바로 이것이다. ‘오보’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에 치명적인 효과를 미친다.‘오보’는 우리가 가진 위험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실제 상황이 터졌을 때 잘못된 대처를 하도록 만든다. 그때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잘못된 낙관주의가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가 초래하는 효과가 정정문자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까닭이다.더불어 이번의 경계경보 오발령 사건은 북한과 엮여 있다는 점에서 사태가 더 복잡하다. 북한의 위성 발사실험이 사전 고지된 사항이었음에도 이것을 이례적인 것처럼 이슈화시키고, 정보를 왜곡하여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고전적인 북풍 공작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이건 지레짐작에 불과할 것이다. 오보는 오보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오보가 단지 오보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어쩌면 이런 잘못된 정치적 상상도 오보에 대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인 것일까? 여전히 많은 의문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2023-06-13

산책하면서 보는 것

강아지와 산책하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이를테면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얼마나 많은지. 씹다 뱉은 껌이나 음식물 쓰레기가 잔디와 얽히면 얼마만큼 끔찍한 일을 야기하는지. 죽은 새나 몸통이 훼손된 쥐 같은 것도 심심치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나의 반려견 보리는 목적지까지 우아하게 걸어가는 법을 모르고,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 온갖 곳을 향해 코를 킁킁댄다. 덕분에 나도 거리의 무수한 주변부를 탐색 중이다.그렇게 걷다 보면 산책하는 다른 강아지와도 자주 만나게 된다. 요즘처럼 좋은 날씨엔 더욱 그렇다. 시간과 동선이 겹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만나는 강아지도 있다. 그러면 강아지의 이름이나 나이, 취향까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저 멀리서 아는 강아지가 다가오면 묘한 내적 친밀감이 든다. 강아지들이 인사할 동안 반려인들은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새로운 형태의 우정이 새록새록 싹트는 것만 같다.최근 새롭게 알게 된 강아지가 있다. 이름은 초코. 갈색 털을 가진 푸들이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와 함께 사는 강아지였다. 초코는 너무나 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초코야, 안녕? 인사하면 벌러덩 누워 배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른 강아지와도 사이좋게 잘 지내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고 동네 아이들도 초코야, 초코야,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 애교를 부렸다.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보리와 산책하던 중이었다. 초코의 견주인 할머니가 혼자 벤치에 앉아 계셨다. 초코가 안 보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 할머니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그리고선 초코가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초코가요? 갑자기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냐고 묻자, 차에 치였다고 했다. 아, 그때의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마음이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할머니는 오프리쉬, 그러니까 강아지의 목줄을 차지 않고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최근 동물보호법이 개정되면서 강아지의 리드줄 미착용에 관한 규제가 생겨났다. 줄을 차지 않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그러나 동네를 산책하면 여전히 줄을 착용하지 않고 산책하는 강아지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할머니와 초코 역시 그랬다.초코의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에게 “그러게, 목줄을 하셨어야죠.” 하면서 쏘아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할머니의 무책임함으로 목숨을 잃은 강아지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러나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슬픈 것은 그녀라는 것을 알기에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내게는 책임이 없는가? 나는 반려견의 리드줄 착용이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줄 없이 돌아다니는 강아지가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리드줄 착용의 중요성에 관해 알리고 당장 내 것이라도 건넸어야 했다.이럴 때 나는 완전히 비겁해진다. 이를테면 개집에 묶여있는 강아지들을 볼 때. 행동반경이 이미터도 되지 않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배변하는 생명과 내 품에 안긴 반려견을 번갈아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눈을 꾹 감는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상황을 회피하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았다. 할머니와 나도. 초코와 보리도. 나는 다른 국가처럼 모든 반려인이 반려견에 관한 의무교육을 받기를 원하고, 개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입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동시에 할머니의 외롭고 쓸쓸한 어깨가 떠오른다. 할머니와 초코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였을 것이다. 초코는 할머니에게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 어떤 강아지 못지않게 행복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주었던 사랑과 서로의 유대감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이니까.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도 주변부에 놓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섣부른 감정만으로 세상은 작동되지 않고 법의 잣대만으로 모든 이를 판단할 순 없다. 이것이 힘들다는 걸 알지만 한 번이라도 더 살피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오늘도 나의 반려견 보리는 자기만의 보폭으로 산책한다. 전봇대 앞에 멈춰 냄새를 맡고 잔디밭에서 마음껏 구른다. 보리의 배변을 치우려고 하니 개똥들이 보인다. 무책임한 개 주인을 원망하다가 한숨을 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치운다. 고개를 드니 다른 분이 자발적으로 공원을 청소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 나갈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천천히, 차근차근.

2023-06-13

낯설고 새로운 곳으로

곧 일본 여행을 떠난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한동안 잠들기 전에 유튜브 속 일본 여행 영상을 많이 찾아봤다. 도톤보리에서 꼭 먹어봐야 할 초밥집이나 타코야끼집, 우메다의 쇼핑센터나 각종 오사카 관광 스팟을 체크하며 구글 지도를 하트 마크로 점찍어 두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처음 가는 해외 자유여행이라 더욱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늘 여행은 즉흥적으로 떠나는 타입이라 잠은 아무데서나, 먹는 것도 아무거나 먹으며 하루 온종일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다르다. 얼마나 들떠있는지 여행 일정을 스스로 난생 처음으로 계획해서 모든 일정을 문서로 정리했을 정도다.‘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대학 졸업 이후 홀로 자유 기차여행을 떠났을 때다. 당시 만나던 연인과 헤어진 이후 이별의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당시 코레일에서 내일로 티켓을 끊으면 무궁화호에 한해서 기차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에, 수중에 있던 아주 적은 금액의 돈과 배낭만 챙겨 들고선 서둘러 기차에 올랐던 여행이었다.처음으로 향한 곳은 포항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이면서 푸른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다 싶어 택한 곳이었다. 포항역에서 내리자마자 역에 배치된 관광지 팸플릿을 보았고 별 다른 고민 없이 호미곶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당시 불안으로 휩싸인 적막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가까웠기에, 재빨리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밝고 활기찬 관광객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적막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져선 간단히 숙소에 들려 배낭을 내려놓고 휴대폰과 카드만 챙긴 채 호미곶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분명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지도대로 따라가 버스 환승을 하려 했지만 어느 작고 외진 마을에 내리고 말았고 환승할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점 해는 지고 있었고, 마을은 조용했으며 마을회관조차 인기척을 찾을 수 없어서 계속 초조한 마음이 더해졌었다. 정처 없이 걷던 와중 다행히 나와 비슷한 처지의 관광객을 만나 정신을 차리고 택시를 불러 겨우 호미곶으로 향했던 기억이 난다. 겨우 도착해서 해가 지는 것을 멍하니 앉아 보고 있는데 그때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이 여행은 아무래도 도망에 가까운 것이구나. 아무리 낯선 곳으로 멀리 도망친다 한들 뜨겁고 눅눅한 후회의 감정은 떨어트릴 수 없는 거로구나, 하며 물거품이 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바라만 보았던 여름날의 습한 기억이 잔잔히 남아 있었다.당시의 무력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 온종일 낯선 거리를 걸어 다니며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더 물 수 없도록 몸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포항 다음은 부산, 그리고 경주 그 다음은 진주를 오가며 낯선 이들을 만나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또 헤어지며, 수많은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시큼하게 파랗던 하늘, 묵묵히 우거진 초록과 그늘을 내어주던 커다란 나무들, 깊은 골목에서 묵묵히 머무르고 있는 오래된 집과 사람의 흔적들은 쓸쓸함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와중에 자꾸만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게끔 했다.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들은 이토록 묵묵하고도 견고한데, 나는 왜 작은 이유로 흔들리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아리송한 의문은 더욱 외로운 도피로 느껴지게끔 했다.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가라앉는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이번 여행을 위한 짐을 싸다 불쑥 그날의 기차 여행이 떠오르고 말았지만 이젠 과거의 기억 위로 새로운 짐을 챙겨 넣을 수 있게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도 하고, 사랑과 존중의 깊이를 다시금 헤아리면서 더는 과거 어린 날의 나의 모습에서 씁쓸함을 느끼지도, 필요 이상으로 애틋해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6월의 일본은 덥고 습하므로 얇고 가벼운 옷 위주로 잘 개어 넣고 다음으론 편한 잠옷과 슬리퍼를 담는다. 기초 화장품과 약, 액세서리류는 작은 통에 소분해서 투명 파우치에 챙겨 넣는다. 그렇게 새로운 여행의 기대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이번 여행은 과거의 후회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닌, 좋음을 가득 채워 올 여행을 할 것이다. 더없이 소중한 이와 나란히 낯선 길을 걸을 것이고, 그 지역의 유명한 음식을 먹고, 그 나라의 언어를 쓰고, 역사적인 곳도 방문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을 오랫동안 누리며 가득 담아올 것이다.

2023-06-06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 ‘향수’)아까시 꽃냄새가 흐르고, 청보리밭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면 충북 옥천 안남면 지수리, 금강 청동여울의 봄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금강의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나는 봄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서 루어 낚시를 즐긴다. 루어 낚시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길, 금강휴게소에서 라바댐 지나 금강4교, 보청천 합수부 원당교 앞 엘도라도 펜션, 청마교, 합금교, 가덕교 콧구멍다리 또 지나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길을 달리다 멀리 지수리 취수탑이 보이면 마음의 가속 페달을 더 세게 밟게 된다.언제 와도 고향집 같은 ‘등나무가든’에 짐을 푼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집이다. 주인 어르신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낚시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집을 찾았는데, 그렇게 드나든 지 벌써 10년쯤 됐다.할아버지 할머니와 여기 함께 살던 손자는 자기가 키우는 햄스터를 내게 자랑하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새 대학생이 돼 타지로 나갔다고 한다.아저씨는 숙원사업이던 마당 연못을 만들어 5짜 쏘가리 두 마리, 4짜 붕어 몇 마리, 잉어, 마자 등등을 넣어두셨다.내가 마당에 주차하고 내리자마자 이것 좀 보라며 얼마나 자랑을 하시는지.아주머니는 대뜸 “더 훌륭해졌네” 하신다. 나는 뭐가 훌륭한지 모르면서, 어떡해야 훌륭해질 수 있는지 모르면서 어떻게든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다.낚시 준비를 해서 청마대교 밑 여울로 들어갔다. 쏘가리가 나오면 제일 좋고, 끄리 손맛만 봐도 좋다. 역시나 막무가내 우당탕탕 끄리가 루어에 달려든다.힘이 제대로 붙은 끄리들을 연신 낚아내며 손맛을 즐기고, 잡자마자 사진만 찍고 다시 놓아주는 걸 반복하는데, 저쪽 다리 건너편에 한 백발 어르신이 앉아 낡고 엉성한 낚싯대로 낚시 중이다. 물고기는 못 잡고 강물 위로 흐르는 구름과 바람과 봄볕만 빈 바늘로 건져내고 있다. 그러다 겨우 끄리 한 마리를 잡아내셨다. 하지만 그 한 마리 낚은 게 전부다.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르신이 낚싯대를 접더니 겨우 잡은 그 한 마리 맛없는 끄리를, 기생충 감염의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슨 칼로 회 떠 초장 찍어 잡수는 게 아닌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어르신이 좀 측은했다. 어르신은 내가 팔뚝만 한 끄리 수십 마리를 잡았다가 다시 놔주는 걸 다 봤을 테고, 낡고 망가진 낚싯대와 빈 그물이 꼭 자신의 나이든 처지처럼 여겨져 쓸쓸했을지도 모른다.끄리 몇 마리를 잡아 어르신께로 갔다. 도마에 묻은 핏물과 마구 썰어 뭉개진 회가 비위생적으로 보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끄리회 한 점을 정말 맛있게 씹으며 소주를 들고 계신 어르신께 “끄리회 맛있죠. 회 뜨기 좋은 놈으로만 몇 마리 챙겼는데 혼자 먹기엔 많네요.” 큰놈 세 마리를 드리고는 말없이 다시 내 낚시 자리로 왔다. 보리밭에는 초록 바람이 불고, 강물냄새가 머리칼에 배여 마음까지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오후 다섯 시, 맑은 강물과 해거름이 뒤섞여 금강이 그야말로 금빛 비단처럼 미끄러진다. 낮 동안 잠잠했던 아까시 향기가 노란 송홧가루와 함께 강물에 실려 오는데, 아아 그 달콤하고 아찔한 들숨!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나는 석양에 취해 꽃내음에 취해 그리고 여기저기서 퍽퍽 루어를 때리는 끄리의 손맛에 취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홀하다. 아까시 향기와 노을이 강과 나를 삼킬 때, 그 오감의 충만함에 내 영혼도 삼켜진다.늦은 저녁, 등나무가든 마당 평상 위에 아주머니께서 닭도리탕 술상을 봐두셨다. 이 집은 백숙, 닭도리탕, 민물매운탕 등을 하는데, 아주머니 솜씨가 끝내준다. 매콤한 닭도리탕에 술잔을 비우는 사이 다리 밑을 흐르는 여울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맑고 향기로운 평화가 감도는, “밤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금강 지수리, 세월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2023-06-06

수식에 잡아먹히지 않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새벽의 약속’ 등의 작품을 남긴 로맹 가리는 말했다. “나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로맹 가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에밀 아자르를 빼어놓을 수 없다.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이름 이외에 어떤 것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대중적인 흥행과 동시에 작품성까지 인정받게 된다. 1980년에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을 하면서 놀라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에밀 아자르가 사실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에밀 아자르의 정체에 관해 추측하던 사람들은 문장과 문체의 유사성에 집중하면서 그가 로맹 가리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와 기자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고 말했고 “로맹 가리는 이미 끝난 작가.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도 단언하기도 했다.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글을 썼다. 거기에 그는 책을 어떻게 출판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을 적어놓았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이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를 말하며 그를 두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오만함을 고발한다.이것은 비단 한 작가의 일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은 우리에게도 존재하며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불량한 태도로 학교에서 모두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학생이 있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던 어느 작문 시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이야기를 과제로 내어놓은 학생이 있다. 이름을 지우고 진행된 평가이기에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불량 학생의 작품. 그 역시 자기 작품이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날 이후로 불량 학생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학생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작가의 꿈을 꾸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자기를 꾸며주는 수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불량한 학생의 글을 마음 다해 꼼꼼하게 읽어봤을까? 더 나아가 그것이 정말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그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타인의 평가 혹은 사회적 시선,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서 우리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평생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더 좋은 대학 출신이 되고 싶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것들이 나를 더 대단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만든 수식에 내가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본질이 사라지고 수식만 남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저 삼성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보면 어쩐지 불편해진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두려운 일이다.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조차 자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가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나 자신의 시선마저 신뢰하기가 힘들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건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무슨 말을 들었을 때 행복한지, 어떤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 가슴이 뛰는지. 그런 작업이 지속되면 자연스레 나만의 중심이 잡힌다.삶을 살다 보면 인생의 물살이 우리를 밀어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물살에 휩쓸릴 순 없다. 스스로 중심을 잡고 전진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인지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23-05-30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정말 AI일까?

최근 미국의 비영리단체 ‘퓨처 오브 라이프 인스티튜트’(이하 FoLI)에서 ‘거대 AI 실험 일시중지 공개서한’을 공개했다. 서한의 주된 내용은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인간의 통제 가능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따라서 전 세계의 AI 개발사들이 6개월 동안 ‘GPT-4’ 이상의 강력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과학기술적 모색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FoLI의 입장이다.서한이 공개되었을 때 대중을 놀라게 했던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창업자), 유발 하라리(역사학자) 등 업계의 유명인사 및 석학들이 이 서한에 참여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다만 SF 영화의 설정 정도로 치부되었던 AI 기술이 인류에게 핵무기, 인간복제 기술과 같은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때문에 FoLI는 인간과 경쟁하는 AI는 사회와 인류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최소 6개월 간 AI 시스템 훈련을 중단하고, 그 기간 동안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에 의한 감시, 감독을 위한 안전 프로토콜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업계는 이 서한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AI 기술 개발 일시 중단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 방안은 아니라고 말하며, 중단을 수행할 주체는 누구이며 모든 기업과 국가에게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워싱턴 대학 컴퓨터공학 명예교수 페드로 도밍고스는 반세기 이상 사용된 인터넷 기술에 대한 규제 및 제한조차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AI 기술에 대한 규제 방안을 6개월 안에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지 현실적인 측면을 지적한다.물론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다. 가령 노동 시장을 예로 들자면 최근 중국의 경우 AI 기술의 도입에 따라 약 2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근시일 내에 전체 일자리의 1/4에 해당하는 약 3천600만 개의 일자리가 AI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특히 인적 관리 측면에서 대다수의 플랫폼 노동자들이 AI에 기반한 알고리즘 시스템에 의한 관리 속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면, 노동시장은 이미 AI 기술로 인해 그 저변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대중이 느끼는 AI의 위험성을 마냥 현실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AI의 위협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지만, 공포감은 SF 영화를 비롯한 창작물에서 기반한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 물론 새로운 기술의 발달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발생시켜 인류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의학 분야와 군사 관련 분야에서 초래된 경험적인 것이겠으나, AI 기술의 실질적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체감에는 인간이 아닌 이종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SF적인 과장이 뒤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비현실적인 공포가 이미 일어난 노동시장과 컨텐츠 시장에서의 변화를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축약해 말하자면, 상당수 노동자는 이미 AI 기술로 인해 변화한 시스템에 종속돼 있으며, 소비와 향유 역시 알고리즘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그럼에도 AI가 근미래에 인류에게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중의 비현실적 공포를 부추기는 동시에, 대다수의 인류가 처한 실질적인 종속과 지배의 구조를 비가시화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더불어 지금 AI 기술에 반대하고 있는 기업가들이 실질적인 AI 기술 시장의 잠재적 참여자들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이 과연 인류라는 대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각 기업의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든다.물론 신기술의 개발과 발전에 따른 부작용은 인류가 늘 주의해야 하는 사안. 우리는 이미 핵무기를 통해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악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담론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게 있다. 여기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가치를 비롯한 정신적인 가치들 뿐인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형성을 둘러싼 거대 기업들의 각축인 것일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실질적인 위협일까,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비이성적인 공포일까. 공포를 부추기고, 공포를 먹고 사는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 것은 AI 기술일까, 아니면 기술 담론의 참여자들일까.

2023-05-30

MBTI 덜어내기

관계란 참 어렵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일을 하다 그 사람과의 마찰이 생길 때, 또는 타인을 처음 마주할 때 어떤 MBTI 유형일지 궁금해진다.MBTI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미국 심리학자 캐서린 브릭스가 그의 딸인 이사벨 마이어스을 가르치던 중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성격유형 이론을 근거로 만든 심리검사이다.캐서린 브릭스가 구분한 성격유형은 ‘에너지 방향’, ‘인식 기능’, ‘판단 기능’, ‘생활 양식’의 네 가지 경향으로 구성되며, 4쌍(8가지)의 지표 중 검사 결과를 조합하면 총 16종류의 성격 유형이 나온다.인터넷에 MBTI를 검색해보면 ‘MBTI별 00일 때 반응 모음’, ‘MBTI 별 성격 차이’ 알아보기, ‘유형별 궁합’, ‘유형별 완벽주의 순위’ 등의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만회, 141만 회 등 높은 조회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어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MBTI 관련 콘텐츠는 늘 끊이지 않는 밈을 생산해내며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슈를 통해 무분별히 정보를 수집하여 수용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크다. ‘판단 기능의 F’는 무조건 공감을 잘 할 것이고, ‘생활 양식의 J’는 무조건 계획을 잘할 것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또는 나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특정 엠비티아이를 선호하거나, 또는 상극이라는 이유로 나와 맞지 않다고 속단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MBTI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개별의 지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해버린 것이다.한 구인사이트에는 ‘열정적이며 혁신적’인 ENFP를 구한다는 마케터 모집 공고가 올라오기도 했고, 일부 기업은 특정 MBTI 성격 유형은 지원하지 말라거나, 혹은 특정 유형을 선호한다는 모집 공고를 올려 논란이 된 바 있다. 개인의 능력과 잠재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단순 MBTI의 검사 결과지를 통해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여 특정 MBTI를 우대한다거나, 선호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차별과 오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실은 나 또한 MBTI 과몰입러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처음 만날 때 MBTI를 물어보게 됐다.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에 대해 파악했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타인을 알아가려는 여러 시도와 노력, 대화가 아닌 MBTI에 맞춰 간편하게 그들을 알아가는 쉬운 속단의 방식을 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MBTI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여길 때 오히려 타인에 대한 무시와 배제를 쉽게 선택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며, 나도 모르게 특정 MBTI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며 계속해서 비좁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단순 콘텐츠로 즐기며 유머러스하게 소비하는 것은 좋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을 함부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함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타인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모든 인간관계가 조금 더 간편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건 실은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타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늘 긴장감이 맴돈다. 하지만 그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든 행위는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만든다. 여러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며 탐구하려는 노력은 결국 더 다양한 세계를 포용할 수 있게 한다.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관계를 일찍 끊어버리고 단정지어 버린 몇몇 타인들이 있다.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흥미로운 관계를 놓쳐버린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편견, 그리고 너무 MBTI의 틀에 맞추어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나를 알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때문에 MBTI를 통해 획일화된 나의 모습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나를 오해하기 쉽고 넘겨짚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면서 다양한 내면을 가졌으므로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어렵고 복잡한 일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MBTI에 몰입하여 구분지어 버리는 과장을 덜어내야 한다.

2023-05-23

록키와 김남국의 실존주의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 록키는 3회전짜리 삼류 복서다. 좋은 선수가 될 재능이 있음에도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인생을 낭비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무패의 세계 챔피언 아폴로와 타이틀 매치를 갖게 된 것이다. 예정된 상대 선수가 부상을 입어 이탈했는데, 누구도 선뜻 대체자로 나서지 못하던 와중에 록키에게 기회가 왔다. 무명 선수도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에 광대 역할로 부려진 록키가 과연 1라운드라도 버틸 수 있을까.서른 살이 되도록 삶의 동기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진지해본 적 없는 록키는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적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한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눈물겨운 훈련을 다 마치고 마침내 시합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밤거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와선 애인인 애드리안에게 토로한다.“랭킹에도 들지 못하는 내가 뭘 하겠어. 열심히 훈련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가 내 머리를 부숴버려도 상관없어. 15라운드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누구도 그와는 끝까지 못했지.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냈다는 걸 알게 될 거야”록키는 챔피언 아폴로와 명승부를 펼친다.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난다. 15라운드가 끝나는 순간, 록키는 두 발로 선 채 마지막 종소리를 듣는다. 아나운서가 록키를 인터뷰한다. 질문이 이어지는데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만 부르짖는다. “애드리안! 애드리안!” 울부짖는 그를 향해 애드리안이 멀리서 달려온다. 아폴로가 근소한 판정승을 거뒀다는 결과가 발표되지만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링 위로 올라온 애드리안이 “I love you!” 외치며 록키를 끌어안는다. 영화는 챔피언벨트, 돈, 대중의 관심, 명예 따위 세상이 쳐주는 가치들 대신 15라운드를 버텨낸 무명 복서의 개인적 승리를,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생의 목적과 가치를 증명한 사내의 뜨거운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는 연인의 환한 미소를 비추면서 페이드아웃된다.니체는 죽음이라는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아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허망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거기에 자기존재를 다 던져 몰두하는 사람을 ‘초인’ 혹은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록키’는 실존주의적 영화고, 록키는 초인이며 영웅이다. 질 것이 뻔한 시합에서 자기 승리를 발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애드리안과 끌어안을 때, 록키는 관중들의 환호성이나 카메라들이 터뜨리는 플래시 등 경기장의 온갖 소란과는 완전히 독립된 그만의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린다. 자기 삶의 동기를 이데올로기나 신앙 등으로부터 명령받아 타자가 요구하는 가치의 도구로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개척하면서 그 과정에 자신을 있는 힘껏 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록키는 승리, 명예, 돈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무소속 김남국 의원의 자유가 궁금하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중에도 코인 거래에 열중한 것을 보면 자기가 정한 가치에 몰두하는 실존주의자가 맞는데, 가난을 장신구로 걸치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온 걸 생각하면 모순적이다. 그냥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은 돈”이라고 떳떳하게 밝혔다면 그도 편했을 것이다. 돈 말고도 권력이니 명예니 바라는 게 많으니까 두려울 것도 많고, 두려운 게 많으니까 자유롭지 못하다. 당적을 벗었지만 여전히 매여 있는 사람 같다. 무소속인데 오히려 더 강하게 소속된 느낌이다.‘정치적 실존’ 말고 진짜 실존을 위해 의원직까지 다 벗어던지는 게 어떨까. 그리고 코인 거래를 하면 된다. 그래야 돈이 실존인 삶에 다른 눈치 안보는 자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2023-05-23

체통을 지키시라

얼마 전 실천문학사에서 시행한 설문조사가 화제다. ‘출판의 자유권에 대한 설문조사’와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가 그것이다. 이 설문조사에서 실천문학사측은 여론의 압력으로 인해 출판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세태 속에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설문조사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다소 억울한 듯 들리는 이 이야기는 고은 시인의 작품이 최근 계간지 실천문학에 실린 것과 그의 신작 시집 ‘무의 노래’가 마찬가지로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실천문학사는 ‘이전부터 성폭력을 비롯한 추문에 깊이 휩싸여 있었으며, 2017년 최영미 시인의 작품 ’괴물‘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와 같은 추태가 폭로당한 고은 시인이 어떠한 인정이나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없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올해 초, 실천문학사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이번 사태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분들께 출판사 대표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음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공식적인 사과문을 내놓고, 또 자숙의 의미로 계간지를 한 해 휴간하겠다고 밝혔던 실천문학사가 다시금 본인들을 향한 여론을 정면 반박하며 이와 같은 설문조사를 시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실천문학사의 공지사항에서는, 이러한 입장의 변화가 문학 전문 인터넷신문인 ‘뉴스페이퍼’와 이승하 교수의 왜곡 기사가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해, 이들의 잘못된 기사가 자사의 이미지를 실추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타 미디어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왜곡이 여론의 압력으로 작용하여 헌법에 보장된 기본 권리인 출판의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자신들이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겠다는 것이 주된 골자다.그런데 이 설문조사에는 어딘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2차로 시행된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의 문항을 예로 들자면, 여기에서 실천문학사는 고은 시인을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로 비유하며, 그러한 “농부가 범죄를 저질러 5년간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농사에 종사하는데 주위에서 평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아울러, 그 “농부가 수확한 벼”를 도정한 “정미소에 대해 범죄인을 도와준 사악한 정미소라며 판매중단을 압박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어지는 설문에서는 위의 이야기를 “시만 쓰던 모 시인이 추문에 휩싸여 5년간을 자택감금 당하듯 살았고”라고 바꿔 물으며 그 본의를 전달하고 있다. 이 설문조사의 마지막에서는 지록위마의 고사를 인용하며, 일부 언론 기관과 그에 관련된 인사들이 자신들을 향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가 옳은 것이냐고 묻기까지 하고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궁금한 건, 과연 실천문학사가 ‘설문조사’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문인, 일반 독자, 언론인들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적극적인 의견 참여를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상 그 문항들은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편향해 작성하고, 그걸로 모자라 고은 시인과 관련된 사태를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이 설문조사를 대체 무엇이라 생각해야 되는지. 자신들이 이미 ‘범죄를 저지른 농부’에 비유하고 있듯이, 그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어떠한 법적 처벌도, 범죄 행위에 대한 인정도,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하지 않은 그가 과연 무슨 대가를 치렀단 말인가. 여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잠적을 하고, 가짜가 자신을 사칭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석연찮은 변명으로 일관해왔던 그가 치른 대가란 대체 무엇인가.과연 실천문학사의 이같은 설문조사를 정상적 행위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자신들을 향한 여론을 호도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들의 첫 설문조사에는 이런 문항이 존재한다. 고은 시인의 5년 만의 신간 시집 출간을 두고 언론사의 객관적이지 못한 보도 행태가 프레임을 조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정당하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은이 저지른 어떠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시인도, 그의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지 않다. 과연 프레임을 조작하고, ‘지록위마’를 행하고 있는 건 누구일까. 그들이 한국 문학에서 ‘실천문학’이라는 사명이 갖는 의미에 걸맞게 스스로의 권위를 더는 실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3-05-16

무림 고수가 되고 싶다면

어떤 세계든 ‘고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그리하여 그것에 통달해 버린 몸짓을 보여주는 이들을 보면 우리는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게 된다.고수는 멀리 있지 않다. 무거운 짐을 얹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단한 하체에서, 빛의 속도로 김밥을 말아내는 손에서, 눈을 감고도 라면의 종류를 척척 맞추는 미각에서, 우리는 고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무협 소설의 무림은 고수 중에서도 고수가 되고 싶은 자들로 넘쳐나는 세계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한다. 무릇 강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일. 주변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일이다.키오스크가 점원을 대신하고 AI 챗봇이 친구가 되어주는 21세기에 갑자기 무림은 또 무슨 말인가 싶지만, 꿈꾸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은 멈추지 않는 상상력에 기반을 두었으니. 현실은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만 상상 속의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군자가 되고 싶은가? 천하를 호령하는 가문의 가주를 원하는가? 명망 높은 문주가 되어 세간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무림인들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구경꾼을 꿈꾸는 자는 없을 것이다. 무림 고수의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라고 못 할 것 있겠는가. 이곳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강자를 꿈꾸는 세계다.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한 훈련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둔 고수를 찾아갔더니 청소나 빨래와 같은 집안일부터 제대로 해내라고 다그칠 수도 있다. 다 뜻이 있겠거니 여기며 마루를 반짝반짝 닦아도 돌아오는 건 불호령뿐. 새벽같이 일어나 온갖 잡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의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제야 스승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당신에게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을 알릴 테다.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면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옆 문파의 누구는 벌써 무형검을 익혀 강호를 주름잡았다고 하고 어느 산골에서 태어난 아이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다고 한다. 거기에 수많은 악의 조직은 뭘 먹고 그렇게 강한 것인지. 오직 나만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만 같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엄마 친구 아들’은 21세기뿐만 아니라 무림에도 존재한다. 주변에 휘둘리면 끝이 없는 법. 자신만의 도(道)를 지키면서 정진, 또 정진해야 한다.자, 이제 그간의 노력을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 훌륭한 정권 찌르기를 연마했더라도 방구석에서 홀로 고수가 될 순 없다. 그간 익힌 기술로 마교의 천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된 아이의 이마에 딱밤이라도 때려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니까.세상에 힘차게 발을 디딘 당신, 반드시 실패하리라. 내가 왔노라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무관심뿐일 수 있다. 자신보다 곱절은 강한 자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기도 하고 오만에 빠져 우스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끔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할 테다.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마음이 소란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은둔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방구석에서 정권 찌르기를 연습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패배감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칼을 빼어들었으니 무라도 썰어보겠다며 기합을 넣는 의지를 보여야만 한다. 거기에서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고수는 하늘에서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작다고 여겨지는 일부터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한 뼘 자라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수험생의 문제집 독파 일수도, 매일매일 해야 하는 가사 노동 일수도, 회사원의 출퇴근일 수도 있다.소설은 끝나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 넘치는 무공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못 되어도 괜찮다.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다 새우 등 터진 구경꾼의 하루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으리라. 툴툴 털고 일어나 내 앞에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것. 치킨에 맥주, 싸움 이야기까지 곁들이며 친구들과 낄낄대는 밤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무림의,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고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3-05-16

이상한 평론가 김갑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 박은빈씨. /연합뉴스 ‘문화평론가’ 김갑수가 배우 박은빈의 백상예술대상 수상 소감을 저격했다. “울고불고 눈물 콧물 흘렸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자신만의 생각과 작품을 하면서 겪은 고뇌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스피치가 딸리니 ‘감사합니다’만 남발한다고 혹평했다. “18살도 아니고 30살이나 먹었으면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송혜교에게 배우라”는 훈수까지 빼먹지 않았다.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렸고 다 구리다. 첫째, ‘무절제한 감정의 격발’은 오히려 그 자신이 범하고 있다. “울고불고” 운운은 저열한 인상비평이다. 소감을 다 들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들었다면 박은빈이 ‘자기 생각과 작품에서의 고뇌’를 충실히 밝혔음을 모를 리 없다. 그냥 “울고불고” 하는 게 눈꼴 시렸던 것 같은데, 과잉된 자의식 격발이야말로 꼴 보기 싫다.“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전보다 (사람들이) 친절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있기를, 또 (우리 사회가) 각자의 고유한 특성들을 다름이 아닌 다채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했습니다. 제가 우영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자폐인에 대한 생각들이 편견에서 기인한 건 아닌지 매 순간마다 검증해야 했습니다”라던 박은빈의 수상 소감과 김갑수의 발언을 두고 보면 누구 스피치가 더 딸리는지는 자명하다. 정신적 성숙도 딸린다. 다양성에의 존중,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말한 박은빈의 품격에 비하자면 평론가의 교조적 태도는 치기나 다름없다.둘째, “아끼는 마음으로 얘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오만한 위계의식이 틀려먹었다. 수직적 꼰대이즘은 무엇이든 구별 짓고 등급을 매겨 규격화, 영토화한다. “송혜교와 탕웨이 정도가 교과서”라니, 감정마저도 표준화하려는 그가 설마 들뢰즈도 안 읽은 걸까? 셋째, “세계가 지켜본다는 걸 인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는 해명은 전형적인 사대주의 열등감이자 스노비즘이다. 결국 “남 보기 부끄럽다”는 것 아닌가? 그가 추앙하는 아카데미였다면 박은빈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모든 이들이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수상 소감은 오직 그녀의 시간이고,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관용이야말로 서구 사회의 근간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넷째, ‘내로남불’이다. 그는 2015년 한 방송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 육성이 나오자 눈물을 흘린 바 있다. 그 눈물은 맞고 이 눈물은 틀리다면 과한 자기확신이다. 다섯째, 사회 보편인식과 괴리되었다. 박은빈의 눈물은 비판하면서 학교 폭력으로 타인의 생을 망가뜨린 황영웅의 비열한 미소는 옹호했다. “애들끼리 때리면서 크는 거지”라는 건데, 그는 2015년, 작품 활동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아들의 소설책 출간을 팔 걷고 도왔다. 아들과 함께 잡지사 인터뷰에 나가기도 했다. 자기 아들이 학폭의 피해자였더라도 가해자를 옹호했을까? 박은빈은 아역 배우 시절을 거쳐 부모 찬스 없이 혼자 힘으로 성장했다.여섯째, 자기경험을 절대화하고 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영광을 경험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북받쳐 저절로 토해지는 환희를 알지 못한다. 일곱째, 시대 모드와 동떨어졌다. 이제는 감정을 절제하고 점잔 빼야 했던 유교적 옛날이 아니다. 그의 강퍅함에서는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도사가 보인다. 여덟째, 대중을 폄하하고 있다. 지식인 특유의 우월의식인데, 김수영 시인은 대중의 위대함을 믿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그러하다. 아홉째, 귀걸이 코걸이다. 만약 박은빈이 제임스 카메론처럼 “I’m king of the world!”라고 외쳤다면? 오만방자하다고, 겸손을 알라고, 세계가 보고 있다고, 여자는 ‘킹’이 아니라 ‘퀸’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열째, ‘관심병’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이정진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멋있어 보이냐?”고.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처음 들어가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이성복,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는 시가 떠오른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대사를 옮기고 싶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꼰대 지식인의 너절하고 애처로운 관심 끌기에도 아랑곳없이 박은빈의 광채는 더욱 찬란하기만 하다.

2023-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