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고된 일상이라면 우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처음 누군가에게 우울감에 대해 토로했을 때 그는 나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버스를 타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에 가서 그들이 일구어내는 땀과 피로 가득한 삶의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라고, 우울은 인생을 안일하게 대할 때 따라오는 것이고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당부를 또박또박 힘주어 내게 말했다.
그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잘 이해했다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결국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중대한 비법을 털어 놓는 것처럼 은근히 상기되어 있는 타인의 기분을 맞춰 주느라 필요 이상으로 눈을 반짝이는 척 했던 나의 모습에 작은 분노가 일렁였다. 더는 누군가에게 이런 피곤한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주먹에 힘이 실렸지만 모든 게 피로해졌고, 결국 다시 우울이라는 이불을 덮고 무력감에 빠졌다.
흔히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깊은 슬픔에 빠져 온종일 눈물을 흘린다거나,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자처하거나, 엉망인 꼴을 하며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들이 곁에 있어도, 인생에 정말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도 우울은 자연스레 따라 붙는다. 태어날 때부터 지어 입은 오래되고 낡은 옷처럼 늘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
그러니 별 수 있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옷을 입고 우울과 친하게 지내려 애쓰며 살아간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선 고생했다며 나를 씻기고, 밥을 만들어 먹고, 흥미로움을 느끼기 위해 무언가를 보거나 읽는다. 새로운 취미를 생기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해서 보석십자수도 하고 뜨개질도 배운다.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키는 강의를 듣거나,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끼어 본다. 어느 하루는 이 정도면 괜찮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하루는 이 모든 애씀이 발버둥처럼 느껴질 만큼 우습고 지루해진다.
우울이 없는 정상적인 삶의 압박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은 결코 단순하고 명쾌히 굴러가지 않는 다는 걸 안다. 어떤 삶이든 인생은 평범한 즐거움만을 느끼며 살 수는 없고, 이성적인 계산과 행동,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인생의 굴곡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라고. 그러니 우울로 지은 옷을 입는 나를 이제는 필요 이상으로 가엽게 여기지 않고, 이해 받지 못한다고 타인에게 분노를 느끼지도 않는다.
최근엔 우울과 친해질 수 있을까 싶어 자괴감에 빠질 때마다 눈에 보이는 종이에 우울의 이유를 적어 유리병에 담아두고 있다. 유리병은 불투명한 유리 재질로 속이 훤히 보이지 않고, 꽤나 두께가 두터워서 묵직한 편이다. 뚜껑은 단순히 덮여 있는 게 아니라 다소 열기 힘든 까다로운 구조로 되어 있어 여닫기가 불편하다. 때문에 반쯤 열어 책상 위, 잘 보이는 곳에 뒀다.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
요즘은 그래서 기분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다. 지금 어떠한 종류의 우울을 느끼고 있는 지에 대해 골똘해지고, 종이에 쓰는 순간 우울을 더욱 자세히 파악하게 된다. 종이를 반으로 접어 유리병에 넣을 때엔 무겁고 눅눅했던 기분이 조금 덜어지곤 한다.
어느 날은 유리병 속 쌓여 있는 우울을 꺼내어 본다. 종이를 열어볼 때마다 들쭉날쭉 쓰인 지난 우울이 드러나고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생각보다 힘없는 우울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우울의 색은 어느샌가 옅어져 있고 날것으로 퍼덕이던 힘은 시들해진 채 홀쭉히 놓여 있다. 그것이 퍽 안심이 된다.
기분이 조금 정리가 된다면 그제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한다. 힘을 반복되게 실어 울적함을 밀어 넣고, 운동이 끝나면 얼음 띄운 물을 마시며 성취감을 온 감각으로 느낀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 유튜브, 넷플릭스를 거치는 콘텐츠 유목민 생활을 하다 잠이 든다.
새로운 아침. 우울은 정해진 크기나 깊이가 없어 언제, 어떻게, 얼만큼 앓을지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그래서 삶을 더욱 겸허히 살아가게 되고, 나는 얼마만큼 작으면서 또 얼마나 거대한 사람인지를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