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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필요한 건 당신 근처에

빈티지 물건을 좋아한다. 공장에서 생산된 각 잡힌 새 상품보다 사람의 손을 타고 구겨진 것들에 더 매력을 느낀다. 연식이 오래된 물건을 만나면 너는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니, 하고 질문하고 싶어진다. 누군가 사용했던 물건이 시공간을 타고 이리저리 흘러 내 앞에 나타나는 일. 그건 일종의 운명적 만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스무 살 무렵에는 광장시장이며 동묘를 습관처럼 방문했고,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면 벼룩시장에 들르는 코스도 빼놓지 않았다. 그곳에는 별별 것들이 다 있었다. 다양한 물건들은 편안하고 익숙한 감각과 함께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멀쩡한 것들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슬프기도 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태어나는 세계 속에서 오래된 물건만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매력이 있다고. 어쩌면 나 역시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감상에 빠지면서.중고물품을 피하는 사람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썼던 물건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게 만약 평생을 불운하게 살았던 사람의 접시면? 죽기 전에 입었던 코트면? 하지만 그런 것쯤은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에는 행운보다 불운이 더 자주 찾아오고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니. 나는 중고서적을 자주 구입하는 편이다. 뻣뻣한 종이의 질감보다 누렇게 변색하여 버석버석한 느낌이 더 좋다.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새 책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책을 읽다 문득 발견하게 되는 낙서도 어떤 설렘을 몰고 온다. 책장 귀퉁이의 고불고불한 글씨를 마주하며 손끝이 맞닿은 이의 막연한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그런 내게 ‘당근마켓’의 등장은 정말이지 반가운 소식이었다. 매일같이 온라인으로 열리는 동네 벼룩시장이라니! 그야말로 인터넷 공화국다운 면모가 아닌가.다양한 중고거래 앱이 있지만, 그중에도 당근마켓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서비스 시작 5년 만에 월간 실 이용자 수 800만 명을 끌어모으며 현재 국내 중고거래 앱 중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성장의 이유로는 단연 거래의 편의성과 접근성을 들 수 있다.당근마켓은 ‘당신 근처의 마켓’을 줄인 말이다. 이용자가 사는 지역에서 앱을 접속해서 GPS 인증을 받으면 가까운 이웃과 소통할 수 있게끔 되어있다. 이들끼리 중고 물품을 사고팔 수 있으며 동네 생활에 대해 잡담을 나누고 숨은 맛집이나 편의시설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기능도 있다. 특히 당근마켓의 주목할 점은 거래의 지역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온라인 중고 장터와의 확실한 차별성이 보인다. 집 근처의 이웃을 직접 만나서 거래하기 때문에 물건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직거래 시스템은 중고 거래의 고질적 문제였던 사기 피해의 가능성을 현저히 낮췄다. 사용 방법도 간편하다. 가입하고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 끝이다. 그렇기에 뭐든 부담 없이 매물로 올릴 수 있다. 정말 이런 걸 산단 말이야? 하는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지만, 정말 사는 사람이 있다.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다.내가 처음으로 당근마켓에 판 물건은 머리핀이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나니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물건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느 구석에 처박아놓거나 쓰레기장에 버렸을 것이다.나는 머리핀을 깨끗하게 닦은 뒤 사진을 찍어서 당근마켓에 올렸고 몇 시간 만에 거래하자는 연락이 왔다.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마스크로 가려진 얼굴 사이에서도 구매자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저 혹시 당근…?” 쭈뼛쭈뼛 다가가니 “네. 당근….”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머리핀과 현금을 교환했다. 나는 그 돈으로 와인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쓰지 않는 머리핀을 와인과 바꾸다니. 정말이지 만족스러운 교환의 경험이었다.과거의 나는 물건을 깨끗하게 쓰는 편이 아니었다. 어차피 소모품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질 좋고 튼튼한 상품을 사서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절약이었다. 하지만 중고거래를 일상화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내가 구입한 물건을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다시 쓸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내 습관에도 사소한 변화를 불러왔다. 내가 완전히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 정립되자 어떤 것이든 허투루 대하지 않게 되었다.누군가에겐 필요 없어진 것이 내겐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있다. 당근마켓은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에도 좋다. 중고 상품의 메리트는 역시 저렴한 가격이다. 새 상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구입하는 이점을 누릴 수 있다. 이뿐 아니다. 거래를 하다 보면 이따금 사탕꾸러미나 ‘잘 사용하시길 바라요’ 하는 쪽지같이 달콤한 선물을 받기도 한다.그런 다정한 마음을 받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다. 맞아, 우리는 근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었지, 하는 당연한 사실이 떠오른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들이 성큼 가깝게 다가오게 된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무엇보다 중고 거래는 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지속가능한 소비다. 우리는 현재 환경오염과 쓰레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환경문제는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창문을 열면 마주하는 미세먼지와 급격한 기후 변화는 인류가 지구에 발 디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문처럼 여겨진다. 미세플라스틱이 바다를 점령하고 해양생물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 와중에도 어디선가 쓰레기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특히 SNS는 거대한 백화점이나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에 전시된 인플루언서의 삶의 방식이나 유명 유튜버의 ‘쇼핑하울’은 매일같이 새로운 소비를 부추긴다. ‘이 물건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카피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는 소비 이후에 대해서는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 나를 설레게 했던 상품이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숨 쉬고 있다.실제로 당근마켓에서는 중고거래로 인해 누적 19만t에 달하는 온실가스 감소 효과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자원의 재순환으로 환경을 보호한 좋은 사례다. 서로가 서로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물건을 공유하는 것. 이런 행동은 이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타인이 사용했던 상품을 단순히 ‘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윤리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를 토대로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환경오염의 문제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요즘,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소비에 관하여 골몰해 보아야 한다. 갈수록 소비는 편리해져 간다. 손가락 하나로도 값비싼 제품을 뚝딱 결제할 수 있다. 찰나의 순간에 내 몫의 거대한 물건을 떠안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늘 의식적으로 경계하며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의 틈새를 걸어가야 한다. 내가 행하는 소비가 합당한가. 이 욕망이 정말 내 것이 맞나.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보자. 필요한 건 항상 우리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2020-11-10

아이린, 이미지의 왕국에서 추방되다

아이돌그룹 레드벨벳의 멤버인 아이린(배주현)이 한 잡지사 에디터에게 폭언과 삿대질 등 ‘갑질’을 해 화제가 됐다. 갑질을 폭로한 에디터의 SNS 글이 삽시간에 퍼지며 파장을 일으켰는데, 그 글에 다른 에디터들과 스타일리스트, 백댄서 등 업계 종사자들이 ‘좋아요’를 눌러 공감을 표시했다. “나도 당했다”는 댓글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동안 업계에서 쉬쉬해온 게 이번에 제대로 터진 모양이다. 아이린은 사실을 인정하고 “어리석은 태도와 경솔한 언행으로 마음의 상처를 드려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올렸다. 갑질 피해자인 에디터를 찾아가 직접 사과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린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티브이 화면에서는 청순하고 선한 이미지였는데 실제로는 인성이 나쁘다는 이유다.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는 실재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상품과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성, 즉 시뮬라시옹의 세계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현대인들은 이미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벤츠를 타고 싶어 하는 것은 주행 성능과 승차감 때문이 아니라 ‘벤츠’라는 이미지를 갖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경기도 안양의 호화 아파트보다 서울 강남의 낡은 아파트에 살고자 한다. 집의 주거환경이라는 실체를 떠나 ‘강남’이라는 이미지가 ‘안양’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이 가상성의 세계에서 대중들은 그동안 ‘아이돌 걸그룹계의 얼굴천재 여신 아이린’이라는 이미지만을 볼 수 있었는데, 어쩌다 이미지 뒤편에 가려진 실체를 확인하게 되면서 실망하고 분노했다. 반성하고 또 자숙하고,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면서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 한 번 깨진 환상은 복원되기 힘들다.연예인은 사진 속 인물이다. 사진이 구겨지면 아무리 펴도 자국이 남기 마련이다. 이미지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아이린이 다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가상성, 아니 환상성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을까?아이린의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미성숙한 인격 문제가 오직 그녀 개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마음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아이돌 업계라는 쇼윈도의 왕국에서 ‘걸그룹계 여신’이라는 이미지를 아이린에게 입히기 위해 ‘이미지 메이킹’을 해 온 연예기획사와 방송제작자들에게 따져 묻고 싶다. 아이돌 가수들에게 춤과 노래와 외국어와 예능감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이미지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스캔들에 의한 상품성 파손 주의’는 강조하면서 왜 ‘미성숙한 인격이 초래할 인생 파손 주의’는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화면에 비치는 ‘아이린’의 매력 발산보다 화면 뒤의 인간 ‘배주현’의 내적 성숙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왜 일러주지 않았느냐고.대부분 아이돌 가수들은 10대 때 기획사에 캐스팅되어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다. 회사 내 숙소에서 엄격한 감시와 통제 아래 마치 군인처럼, 운동부 선수들처럼 합숙 훈련을 받는다. 그때부터 철저히 ‘상품’으로 준비된다. 춤, 노래, 랩, 화술, 패션, 외국어를 배우고, 인터뷰 요령과 스캔들 대처법, 팬서비스 등도 연습한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 이상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기획사 안에서 보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나 사회보다 연습실이 더 익숙하고, 평범한 또래집단 친구들보다 ‘업계’ 관계자들과의 소통과 교류가 훨씬 잦다. 자아를 탐색하며 사회화 과정으로 나아가야할 청소년기에 아이돌 연습생들은 진짜 자기 대신 기획사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나’, 이미지에 불과한 시뮬라크르 복제품을 자기존재로 받아들인다.아이린도 그랬을 것이다. 무수한 유리들이 빛을 난반사하는 이미지의 궁전 속에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진짜 자신인 줄 알았을 것이다. 기획사도, 방송국도 최고의 상품인 ‘걸그룹계 여신’을 계속 판매하기 위해 금지옥엽 다루듯 했을 게 뻔하다. 행여나 깨질까봐 조심조심, 방송을 앞두고 혹시라도 심기가 불편해보이면 이리저리 어르고 달래면서. 그러니 매니저도, 코디네이터도, 백댄서도, 스타일리스트도, 에디터도 다 알아서 기었을 테고, 아이린은 그들의 굴종이 자신이 마땅히 누릴 권리인 줄 착각했을 것이다. 현장 스태프들 사이에서 ‘인간’ 배주현이 어떤 평판을 얻고 있는지 모르는 채, 화면에 비친 ‘여신’ 아이린에 열광하는 팬들의 사랑이 자신을 대하는 타인들의 공통된 태도라고 오해했을 것이다.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가상 상황이라도 깊이 몰입하면 그것이 실제 상황인 줄 혼동한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나 스탠퍼드대학교 감옥 실험 등이 이를 증명한다. 역할극에 집중하다가 극 속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떤 아이돌 가수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라는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채 ‘진짜 세상’으로 나오는 법을 잊어버린다. 도박, 탈세, 원정 성매매 의혹 등으로 얼룩진 빅뱅의 승리가 그렇다. 마약 투여 혐의를 받은 탑, 지드래곤, 비아이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처럼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연예인들도 있지만, 언론의 자극적 보도와 네티즌들의 악플로 인해 생을 저버린 설리, 구하라 같이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유리로 지은 궁전이 깨졌을 때, 날카로운 조각들이 마음을 찔러 얼마나 아팠을까. 부서진 유리의 성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방법을 정녕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그들을 키워낸 기획사와 방송국의 어른들은 ‘양육’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은 채 새로운 ‘상품’을 발굴해 대중을 매혹시킬 이미지를 입히는 데만 몰두했을 것이다.하긴 누가 누구를 훈육하겠는가. 지금 기획사 대표와 임원들 중에는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2000년대 2세대 아이돌 출신들이 많은데, 그들 중 상당수가 과거 부끄러운 사건 및 사고로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자들이다. 과거를 청산하고 성숙한 인격으로 거듭나면 좋으련만 여전히 범죄에 연루되거나 소속 가수와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는 등 그들만의 작은 왕국에 갇혀 철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쪽 업계에는 어째선지 제대로 된 어른이 없다.방송제작자들도 마찬가지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를 조작해 연습생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다.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영상만 송출해 시청률을 올리고 어린 가수들이 받을 상처는 나 몰라라 한다. 오직 잘 팔리는 이미지만을 만들어내는 데 여념 없다.이병철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아이돌 가수들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자기 소속사 대표 성대모사 하는 것 좀 그만 보고 싶다. 그게 자기들한테나 재밌지, 도무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그들이 모사할 만한 모델이라고 해봤자 기껏 소속사 대표인 것이다. 하나도 재미없는데 방송 진행자, 패널들이 웃어주니까 그 웃음이 정말 자신을 향해 지어주는 천사의 미소인 줄 안다. 그토록 순진하다. 하루가 영원인 줄 알고는 부지런히 날갯짓하다 가는 하루살이처럼, 그렇게 한철 춤추다 이미지가 다 소비되면 진짜 세상으로도, ‘이미지의 왕국’으로도 가지 못한 채 허깨비처럼 과거의 환상 언저리만을 배회한다.공정함과 평등, 정치적 올바름, 공인의 성숙한 사회인식에 대한 기준이 높은 요즘 젊은 세대가 아이돌 가수의 팬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음악만 잘한다고, 연기만 잘한다고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시대는 지났다. 팬들이 아이돌의 이미지를 소비하며 내는 비용 안에는 그들이 인격적으로 성숙하리라는 기댓값도 포함되어 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여신’ 아이린이 ‘조현아’와 연관 검색어로 묶일 줄이야. 한 번 망가진 이미지는 회복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녀가 진정성 있는 반성을 거쳐 다시 복귀를 희망할 때, 팬들이 너그러이 받아주는 것 역시 아이돌 음악 산업이라는 고립된 왕국이 현실 세계에서 괴리되지 않게 하는 소중한 노력이 될 것이다.

2020-11-03

깡 신드롬과 환불원정대를 탄생시킨, 댓글 ‘판’ 짜는 MZ세대

사회적 거리 두기의 영향으로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플랫폼의 시장이 더욱이 급성장하고 있다. 나 또한 하루에도 적지 않은 시간을 스트리밍 플랫폼에 사용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의 시리즈물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는 이미 본 것이라도 습관적으로 틀어 놓는 편이다. 영화가 보고 싶을 땐 ‘왓챠’ 서비스를 애용하고, 연재 중인 만화를 다시 보고 싶을 땐 ‘라프텔’을 이용하고 있다.OTT 플랫폼인 ‘디즈니 플러스’는 최근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공개했다.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란 각기 다른 곳에 있는 이용자들이 같은 영상을 보며 실시간으로 댓글을 나눌 수 있는 서비스다. 가까운 지인이나 연인과 함께 장소나 시간의 구애 없이 영화와 TV쇼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실제로 한 공간에서 수다를 떠는 듯 흥미롭고 생각보다 영화의 몰입도 또한 나쁘지 않다. 최대 7명까지 시청할 수 있으며 PC나 모바일, 스마트 TV에서 사용할 수 있고, 영화의 몰입감에 방해된다면 이모티콘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다.‘넷플릭스’와 ‘왓챠’도 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한다. ‘넷플릭스 파티’는 크롬 기반의 웹브라우저를 통해 URL을 생성하고,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가 접속해 같은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채팅방에 입장한 모든 이들이 동영상을 멈추거나 돌려볼 수 있으며 실시간 채팅도 가능하다. 각자의 공간에서 함께 보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새롭고도 안정된 시청 환경을 느낄 수 있다.‘왓챠 파티’ 또한 공유 링크를 통해 이용자들이 입장할 수 있다. 왓챠에서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를 왓챠 파티로 감상할 수 있어 영화 감상 모임을 꾸리거나 아이돌 영상을 찾아보는 특정 팬덤이 만나 작은 콘서트를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언택트 시대에 걸맞은 색다른 소통법이자 함께 콘텐츠를 공유하고 교감하며 늘 플랫폼으로 연결되어 있는 MZ세대의 소통법과도 무척 닮았다.그룹 스트리밍 서비스는 게임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인 ‘트위치’가 앞서 시작했다. 게이머는 스트리머(Streamer)로 불리며, 스트리머가 게임을 하면 실시간으로 시청자들은 댓글을 달며 소통에 참여한다. 게임을 이기는 조건으로 후원금을 걸거나 특정 행동을 주도하는 등 흥미 요소를 일으키고 분위기를 이끈다.댓글 달기는 혼자가 아니라 다 함께 즐기고 교류하며 MZ세대 사이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콘텐츠를 그저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댓글 문화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크다. 가수 비는 지난 2017년 미니 앨범 ‘MY LIFE愛’의 타이틀 곡 ‘깡’을 발표했다. 음원을 발표한 당시 일관성 없는 가사와 독특한 안무로 혹평을 들으며 빠르게 묻혔지만 호박진서연이란 유튜버가 1일 1깡 챌린지(하루에 한 번씩 춤을 추는 )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이후에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의 춤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우스꽝스럽게 춘 것인데 의외로 이 동영상에 많은 이들이 몰렸다.그들은 오히려 역대급 혹평에 관심을 가지며 댓글을 달았고,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 동조하며 또 하나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비의 노래 제목인 ‘깡’에 걸맞게 ‘깡’으로 끝나는 과자 제품 광고를 찍어야 한다는 댓글에는 실제로 의견이 반영되어 과자 회사의 마케팅으로 활용됐다. 가수 비에게 제2의 전성기라 불릴 만큼 새로운 밈(meme)을 일으켰다.MZ세대는 센스 있고 재미있는 댓글을 발견하는 ‘댓글 맛집’ 영상을 찾아다닌다.올해 초 ‘숨듣명’이라는 유행어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숨듣명이란 ‘숨어 듣는 명곡’이라는 뜻으로 나에게는 명곡이지만 밖에 나가 듣기에는 꺼려지는 노래를 일컫는다.주로 2010년대 발표작이며 독특한 음과 난해하고 모순적인 가사로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노래가 주를 이룬다. 비의 ‘깡’을 시작으로 제국의 아이들의 ‘마젤토브’, 틴탑의 ‘향수 뿌리지마’, 유키스의 ‘만만하니’ 등 발표된 당시 잠잠했던 곡들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해당 영상뿐만 아니라 반응이 좋은 동영상의 댓글을 모은 ‘댓글 모음’ 콘텐츠는 현재까지도 성행하고 있다.숨듣명은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문명특급’은 숨듣명 콘텐츠로 MZ세대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2010년 전후 당시 괴작 취급을 받았던 가요를 재발굴해 새롭고도 신선한 콘텐츠를 이끌어 냈다는 평을 받았다.MZ세대는 2010년 전후에 즐겨 들었던 가요를 중심으로 추억 여행을 한다. 노래가 출시되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노래 가사와 얽힌 웃긴 일화를 댓글로 공유한다.여기에 B급 정서의 노랫말과 일반인은 소화하지 못 할 가수의 의상, 한때 유행이었던 패션 소품을 보는 재미를 나눈다. 그간 완벽한 발라드곡에 지친 이들이 심플한 댄스곡이나 B급 감성이 느껴지는 단순한 곡을 선호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그렇게 MZ세대는 콘텐츠를 소비하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그들만의 ‘판’을 짠다. MBC ‘놀면 뭐하니?’의 회심작 그룹 ‘환불원정대’는 SNS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다. 한 댓글인은 한 때 가요계를 대표했던 여성 가수와 현재 강한 인상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가수를 모아 환불원정대의 데뷔를 제안했다.댓글을 본 가수 이효리의 긍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 등 4명의 가수가 빠르게 모여 그룹이 탄생했다. 환불원정대는 데뷔 과정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 속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MZ세대는 어디에서나 그들만의 판을 다양한 콘텐츠로 이끌어 가고 있다. ‘에브리타임’은 전국 대학생의 휴대폰에 하나씩은 꼭 깔려 있는 애플리케이션이다. 대학교 시간표 스케줄을 보기 쉽게 정리할 수 있으며, 여기에 대학교 커뮤니티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대학생들 사이에서 이용률이 매우 높다.앱을 사용하여 휴대폰 배경화면에 시간표를 띄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점 계산기, 강의평 열람도 가능하다. 주로 사용하는 건 커뮤니티인데 그들만의 강의 후기를 공유하거나 취업 이야기, 편입 상담, 스터디 모집, 중고 서적 거래, 드라마 추천, 물건 나눔 등 고루 이루어진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익명성이 보장되는 댓글 문화 덕분에 자신만의 경험이나 노하우 등을 빠르게 공유한다. 학교별 커뮤니티의 경우 이메일로 재학생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나누는 댓글은 신뢰도가 높다.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만드는 문화의 비중이 중요해졌다. 참신하고 독특한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은 환영이지만 익명성에 기대어 차별과 혐오의 장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도 하지 못할 말은 아무에게도 아무 곳에서도 하지 말자.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문화가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20-10-27

‘오그라들다’, 그리고 ‘진지충’이라는 말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우지마라 하고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저 산은 내게 잊으라잊어버리라 하고내 가슴을 쓸어내리네아 그러나 한줄기바람처럼 살다 가고파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떠도는 바람처럼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내려가라 하네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양희은의 ‘한계령’ 중가을이 되면 나는 꼭 가수 양희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특히 이 노래, ‘한계령’은 가을에 세상을 떠난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노래 중 하나여서 더욱 사무친다. 올해도 별 생각 없이 가을을 맞아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이 노래가 언제 나온 것인지 궁금해졌다.1985년. 이 노래를 부를 당시 양희은은 지금의 나와 같은 서른네 살이었고, 그 노래를 좋아하던 우리 엄마는 스물여섯 살이었다.정덕수 시인의 ‘한계령에서’라는 연작시로부터 영감을 얻어 하덕규가 작사, 작곡한 ‘한계령’의 주제는 인생이다. 세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바람처럼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나는 새삼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1985년 당시에는 이와 같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곡이 2030세대의 히트곡이 될 수도 있었구나.또 하루 멀어져 간다내뿜은 담배 연기처럼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점점 더 멀어져간다머물러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중1994년 김광석의 앨범을 통해 발표된 강승원 작사, 작곡의 노래 ‘서른 즈음에’ 에도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나타난다. 나의 기억을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내 가슴 속은 공허해지기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삶 자체를 관통하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이토록 진지한 질문을 김광석과 강승원은 그야말로 ‘서른 즈음에’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이러한 이야기들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신기하기까지 한 것은 그런 진지한 대화가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도통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유튜브에서 본 재미난 동영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어느 연예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어여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새로 개봉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르기 전에 팔아버린 주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진작에 샀어야 했을 부동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나이를 관통하는 인생 자체에 대한 이야기나 사랑과 이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건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대중가요에서도 그런 진지함은 찾아보기가 어렵다.우리는 확실히 점점 진지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학부시절 과 학생회실에서 오래된 노트 수십 권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1980~90년대 학번 선배들이 학생회실에 방문할 때마다 적어 내려간 공동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저마다의 고민과 사상을 진지하게 장문으로 적어낸 노트는 이후 개인 홈페이지로 대체되었고,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거치며 활자의 양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활자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SNS매체인 인스타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활자의 양이 줄었다는 것은 할 말이 줄었다는 것이고, 할 말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진지한 사고의 빈도가 줄었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우리가 진지해지는 것을 가로막는 말들이 있다. 하나는 ‘오그라든다’는 말이다. 예전에 친구와 술을 마시다 ‘오그라든다’는 말을 듣게 될까봐 삼키게 되는 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표현은 2002~2003년 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유행하게 되었고 꾸준히 확산되어 이제는 일상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원래는 어느 유머 게시물의 ‘손발이 오그라든다’라는 문장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후 ‘오그라든다’는 축약형이나 ‘오글오글’이라는 의태어로 매우 창피한 기분이 들었을 때, 충격과 공포를 느낄 때,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만 한 것을 보았을 때, 유치한 것을 마주할 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누군가의 진지한 언행을 마주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진지한 언행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의 어색함을 동반한다. 그때 누군가 ‘어휴, 오그라들어’ 하고 말한다면 받게 될 타박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도저히 진지해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한 술 더 떠서 ‘진지충’이라는 표현이 있다. 웃자고 하는 말에 과도하게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사용했던 ‘진지병’이라는 말로부터 비롯된 말이다.‘진지병’은 원래 부적절한 상황에 진지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에게만 사용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진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곤 하는 이를 일컬어 그 상황의 적절성을 막론하고 ‘진지충’이라 부르는 풍조가 생겼다. 여기서 ‘-충’은 명백한 혐오의 표현이다. 요즘 우리들이 진지한 분위기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어째서 우리는 이처럼 진지한 대화를 혐오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추측하건대 나는 그것이 우리가 처한 경제적 상황과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군가는 우리 세대를 일컬어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라고 했다. 그에 따른 박탈감은 우리에게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막대한 양의 고민을 선사했다. 그런데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 세대에게 그런 식의 에너지 소비는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일 수 있다. 진지한 대화에까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은 것 아닐까. 철학이니 인생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지.나는 우리 세대에게 제안하고 싶다. 우리 머릿속의 사전에서 ‘오그라들다’와 ‘진지충’을 삭제할 것을. 진지한 대화의 실종은 우리의 삶을 인문학적으로 피폐하게 만든다. 누구도 이 두 단어를 두려워함으로써 진지한 대화를 삼키고 마는 일이 없도록, 서로에게 건네는 진지한 대화를 반기며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하고 싶다. 삶이 아무리 각박해도 각자가 각자의 삶에 대해 어설픈 철학이나마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2020-10-20

1인 가구의 탄생

가족의 형태를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그 시절 나는 굉장한 우등생이었다. 난 백 점인데 넌 몇 점이야? 시험지를 앞에 두고 좌절하는 친구를 약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대답하는, 그야말로 얄미운 짝꿍의 전형이었다. 아마 사회 교과를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대가족과 핵가족의 개념을 설명했다. 가족은 다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대 사회는 급속도로 핵가족화되어 간다고. 멀쩡한 구조가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세상에는 가족 만들기를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아주 특수한 형태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 혼자 사는 건 이상한 일이구나.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름지기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배웠던 나는 백 점의 어른, 기성세대가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완벽한 미래를 고대했다.굴뚝이 있는 이층집에서 다정한 남편, 올망졸망한 아이들, 애교 많은 강아지와 함께 멋진 가족을 이룰 것이라고 다짐했다. 생을 살아내는 것도 우등생답게 거뜬히 해낼 줄만 알았다.시간은 무럭무럭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나 한심하게 생각하던 혼자 사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난 이모랑 살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면 될 것을 “왜?” 하고 질문해서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나의 되물음에 친구는 우물쭈물하다가 몰라, 그냥 나는 그렇게 살아, 하고 말을 맺었다. 그가 내보이던 난처함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나는 그가 사회가 인정한 ‘정상 가족’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바랐다. 악의를 가진 말보다 더 날카로운 무지로 친구에게 상처를 줬다. 그 죄책감은 마음 한구석에 묵직하게 남아있다.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피를 나눈 사람들, 그러니까 조부모, 부모, 형제, 자매가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이 그랬고 옆집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건너편 집의 누군가는 사돈의 팔촌과, 애인과, 햄스터와,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미국 ABC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던 패밀리’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보여준다. 각기 다른 성향을 지닌 삼 남매를 키우는 부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백인 남자와 재혼한 라틴계 여자, 게이 커플과 그들이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어렴풋이 만들어낸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에서 등장하는 가족은 사회 규범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이들은 이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 우리가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족보’ 따위 없는 이들은 그 무엇보다 가족에게서 요구되는 이해와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현대적 가족이 의미하는 것은 혈연으로 묶인 공동체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홀로 살아가기를 택한 1인 가구는 어떨까. 1인 가구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비율은 꾸준히 증가하여 작년에는 무려 30.2%에 다다랐다.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내 주위에도 혼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현하는 연예인 역시 그렇지 않은가. 이들은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을 가꾸며 충만한 하루를 보냈다고 자부한다. 불 꺼진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으로 받아들이며 허심탄회하게 나 자신과 마주 앉아 사색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습에 우리는 모종의 대리 만족을 느낀다.혼자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럽던 시대는 지났다. 홀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상품은 시장에 즐비하게 나와 있다.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테이블을 배치한 식당은 물론이고 1인 분량의 재료를 소분한 상품을 여러 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화, 독서, 코인 노래방, 컬러링북, 다이어리 꾸미기 등 혼자 노는 방식도 무궁무진해서 집에서 보내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무엇보다 혼자여서 좋은 점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과 강하고 다정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는 1인 가구에 대한 무례한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노처녀’ 혹은 ‘노총각’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말인지에 관해 잘 알고 있다. 마치 어떤 하자가 있기 때문에 가족 제도에 편입하지 못했으며 출산과 같은 복잡한 일은 피하는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었다.물론 아직까지 이런 교묘한 시선은 남아 있어서 명절과 같이 친인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그래서 너는 결혼 언제 한다고?”와 같은 구시대적 질문을 들어야만 한다. 혼자 살 거라는 대찬 포부를 밝히면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되묻는다. 사람이 어떻게 혼자 살 수가 있어?한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주요한 특징처럼 보이지만, 이는 인간성이라기보단 동물성에 가깝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아프리카의 얼룩말이나 우리나라의 겨울 철새는 모두 무리를 이뤄 사는 동물이다. 이들은 다양한 이익을 얻기 위해 무리를 형성한다. 포식자의 공격을 빨리 알아차리고 먹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종족 번식을 할 수 있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이유, 생존을 위함이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다. 이것이 여타의 동물과 다른 지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무리 생활을 넘어 한 차원 높은 형태인 가족을 형성한다. 가족 공동체는 사회로 국가로 뻗어 나간다. 언어와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간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이해하며 삶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건 인간의 권리 중 하나다.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1인 가구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비자발적으로 떠밀린 경우도 있다. 사별로 혼자 된 사람들이나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노인 계층이 그렇다. 또한 제도 속에 편입되고 싶지만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이를테면 동성 부부의 경우는 1인 가구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이성 부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지만 제도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성 커플이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규약을 거부하고 동거 형태를 유지하는 이들 역시 1인 가구에 포함된다. 요즘에는 하우스 메이트를 구해 함께 사는 방식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공간을 쉐어하는 목적으로 만나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경제적 절약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반려동물이나 반려 식물과 함께하는 삶도 있다.인생은 정답이 있는 시험지가 아니다. 선입견에 갇혀 타인의 삶에 빗금을 긋는 과오를 저질러선 안 된다. 또한 비자발적으로 1인 가구로 편입된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시대적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가족의 형태와 그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관해 골몰해야 할 때다.문은강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은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주)티캐스트

2020-10-13

아, 훈아 형!

추석 전날 낮잠 늘어지게 자다가 해질 무렵에야 마스크 쓰고 집 앞 안양천을 산책했는데, 천천히 걷던 어르신들이 갑자기 경보선수마냥 빠른 걸음으로 나를 추월하시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일까? 다들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는 “나나”, “나오나” 중얼거렸다. 뭐라는 건지 궁금했는데, 가만 들으니 그 소리는 “나훈아”였다.어르신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나훈아 공연을 보려고 축지법까지 쓰면서 귀가를 서두른 것이었다. 아직 노래는 시작도 안 했는데, 어르신들에게 청춘을 돌려주는 나훈아의 위력에 감탄했다.나훈아 노래 한 곡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1966년 데뷔한 이후 60년 가까이 최정상 가수로 군림해온 ‘트로트의 전설’이다. 생긴 것도 꼭 시베리아 호랑이상이라서 ‘군림’이라는 말이 적확하다. 중학교 때부터 ‘잡초’, ‘건배’, ‘갈무리’ 같은 노래들을 따라 부르기도 했고, 짙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 큰 머리, 벌어진 어깨가 닮았다는 소리 꽤 들은 나 역시 팬의 한 사람으로서 막걸리 한 병과 동태전을 늘어놓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공연을 보면서 후회했다. 나훈아 콘서트는 ‘모엣 샹동’ 같은 고급 샴페인을 마시며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현장 공연은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던데, 방구석 1열에서 즐기는 이 디너쇼는 어쩌면 코로나가 준 선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메뉴 구성에서 ‘가황(歌皇)’을 맞이할 준비가 다소 미흡했지만, 장면 하나 소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 타이틀에서부터 급이 다른 위엄이 느껴졌다. ‘대한민국’과 자기 이름을 나란히 걸고 명절 지상파 방송에 공연을 송출할 수 있는 뮤지션은 나훈아와 조용필 둘 뿐이다. 스케일이 크고 무대연출이 화려한 나훈아의 공연은 올림픽 개회식 뺨친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커다란 여객선을 몰고 등장했다. 이래저래 마음 헛헛한 추석 전야, 기차 경적소리와 함께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이 울려 퍼졌다. 고향 못 간 이들의 마음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전 신청제로 모집된 국내외 1000명의 관객들이 스크린과 마이크를 통해 비대면 객석을 이루었다. 언택트(untact) 시대의 진풍경이었다.아직도 근육이 탄탄하게 박힌 구릿빛 몸에 주름 없이 팽팽한 이마, 찢어진 청바지와 하얀 셔츠는 칠십이 넘은 그의 나이를 의심케 했다.고음과 저음, 단음과 장음을 자유롭게 오가며 미세한 음 하나 하나에 감정과 서사를 싣는 특유의 가창력은 변함없었다. 아니 소리가 예전보다 더 짱짱한 느낌이었다. 노래 부르면서 춤도 추고 점프도 하고 기타도 치고 북도 때렸다.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홍시’, ‘무시로’, ‘18세 순이’, ‘갈무리’, ‘영영’, ‘잡초’, ‘청춘을 돌려다오’, ‘번지 없는 주막’ 등 총 30곡을 세 시간 가까이 열창했다. 트로트를 헤비메탈, 펑크록, 댄스, 가스펠, 뮤지컬 등과 결합하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훈아’라는 장르로 바꿔냈다. 대체 뭘 드시기에 저렇게 기운이 넘쳐날까, 궁금했다. 공연 끝나고 다시 안양천에 나가보니 낮에 그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팔굽혀펴기와 맨손체조를 하는 것이었다.순간 최고 시청률 40퍼센트를 넘겼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과 뉴스란을 잠식했다.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공연 후 여기저기서 “테스 형!”(나훈아 신곡 ‘테스형’에서 ‘소크라테스’를 칭하는 가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에서 그가 한 발언들은 정치권의 화두가 되었다. “세월에 끌려가지 말자”, “안 해 본 일들에 도전하자”, “의료진들이 우리의 영웅이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나쁜 위정자들이 생길 수 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들이다” 한 사람의 대중음악가가 코로나로 지친 온 국민을 위로하고, 계층과 세대, 남녀노소, 지역, 종교, 이념을 모두 뛰어넘어 사회 전체에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했다. 나훈아 말고 누가 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대체 대중을 휘어잡는 어떤 마력이 있는 걸까?‘나훈아’라는 신화를 떠받치는 부력은 그의 철저한 자기관리다. 몸매, 체력, 가창력,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함께 그는 대중가수로서의 상품가치, 최고의 스타만이 갖는 희소성을 지키고자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아 왔다. 재벌가로부터 내밀한 공연 요청을 받고는 “표 사서 봐라”라고 단칼에 거절했다는 일화는 ‘나훈아’의 값은 오직 그 자신 나훈아만이 매길 수 있다는 고고한 예술가적 자존, 대중을 위해서만 기꺼이 상품이 되겠다는 대중연예인으로서의 직업의식 등 그의 철학을 함축해 보여준다. 국가가 수여한 훈장을 거부하면서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권력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문화예술인들이 들으면 부끄러울 것이다.‘신비주의’로 오해 받을 만큼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는 그는 스타는 밤하늘에 별로 떠 있을 때에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평소 신념대로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는 일이 없었다. 반세기 넘도록 대중과 친밀하게 호흡해온 ‘나훈아’는 오직 노래 안에, 무대 위에만 있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곡 작업을 위해 그가 두문불출할 때마다 흉측한 루머가 돌았다.그래도 그는 대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일부 언론이 무책임하게 뜬구름을 부풀리는 사이 소문과 전혀 무관한 지중해 해변이나 중앙아시아 고원을 걸으며 낯선 풍경들로 묵은 감각과 상상력을 씻어내는 데만 몰두했다.문화예술계 거장이나 유력 정치인들이 스캔들로 평생 일궈온 명예와 경력을 잃는 일이 많은데, 온갖 루머와 “이제 끝났다”는 평가가 끈적끈적한 콜타르마냥 이름을 뒤덮을 때마다 나훈아는 극적으로, 자기를 불살라 다시 날아오르는 불새처럼 더 환한 빛과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돌아왔다. 그렇게 많은 루머로부터 공격 받았는데도 여전히 최정상에서 건재하다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기도 한다는 걸 이제는 세상이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이질적이고 낯선 것들을 향해 열린 태도는 그의 음악이 ‘뽕짝’에 머무르지 않고 락, 클래식, 댄스, 가스펠, 리듬앤블루스, 힙합, 뮤지컬, 국악, 마당놀이 등과 결합한 새로운 장르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타자성을 수용하는 열린 세계관은 단순히 음악적 시도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의 예술가적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식소가 되었는데, 영남을 대표하는 가수인 그가 5·18 광주를 추모하기 위해 지난 1987년 ‘엄니’라는 곡을 썼다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연, 학연, 계층이라는 울타리를 쌓아 기득권을 유지해온 정치 이기주의, 지역 및 집단 이기주의가 한국 근대사를 지배해왔다면, 나훈아의 노래는 도시빈민,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이주노동자, 일용직 근로자, 샐러리맨, 농사꾼 등 시대의 ‘잡초’들 사이를 흐르면서도 부자, 권력자, 지도자, 교육자, 사상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음악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명제는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홍시’)는 노래가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곡성 오일장에 두루 퍼질 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오며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킬 때 성립된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무대 연출, 장치, 소품, 컴퓨터 그래픽, 출연진의 동선까지 무대의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한 음절마다 감정과 표정을 싣는 연기력 또한 세밀하게 준비된 것이리라. 이러한 완벽주의는 ‘나훈아’라는 상품을 구매한 관객들에게 지금껏 단 한 번도 실망을 주지 않았다.이번 공연은 ‘다시보기’ 없이 오직 단 한 번만 방영되었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작품이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이 뿜어내는 일회적인 빛”을 아우라(aura)라고 불렀는데, 현장성이 아닌, 텔레비전 화면이라는 기술복제 안에서 뿜어지는 나훈아의 빛은 아우라 그 자체였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것이 근대성이라던 보들레르의 말을 떠올리면, 나훈아는 근대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예술인이 틀림없다. 아우라,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는 어떤 것의 영적인 광휘, 나훈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 곁에 있지만 저 높이, 저 멀리 있다.

2020-10-06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절실한 생략은

많은 이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코로나19를 두고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증을 겪고 있다. 사소한 일에도 자극을 받아 울컥하거나, 감흥을 느끼지 못하거나, 자주 체하거나 소화가 되지 않는 몸의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최근 수도권 거리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던 때에는 내면의 침잠이 한꺼번에 부서지려는 듯 휘청였다. 어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쫓기듯 들자 홈트레이닝을 시작하고,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새로운 자격증 공부를 도전해보기도 했지만 모두 집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었고, 쉽게 무료해졌다.‘쉼’은 어렵다. 그동안 열정이라는 이유로 욕심껏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데에는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쉬고 싶단 이유로 하나씩 내려놓다 보면 결국 그간 쥐고 있던 모든 걸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마음 깊은 곳에 이고 진 짐들 때문에 작은 움직임에도 방해를 받는다. 최근 유튜브를 보며 가벼운 요가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지만 집중력이 모자라 빈번히 무너졌다.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도 문제였지만 습관처럼 따라오는 잡생각은 왜 이렇게 물리치기 어려운지. 유튜브 속 요가 선생님은 이마 위에 작은 점을 그려서, 그 점을 일정한 힘으로 응시하며 자세에 집중하라고 했지만 그 작은 점 하나도 그리기 어려워 시계를 보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그러다 휴대폰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결국 적당한 쉼은 무엇이고, 어떻게 행해야 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이 시작되었다.티브이 속 ‘여름 방학’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두 배우는 아주 느릿느릿 여유를 두고 살아가는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 속 오래된 집을 개조해 여행 같은 삶을 즐기는 이들은, 꼭 필요한 물건만을 그때그때 사서 쓰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life)’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미니멀 라이프란 불필요한 물건이나 일을 줄이고,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으로 살아가는 ‘단순한 생활방식’을 지향하는 것을 일컫는다.가장 적은 물건으로만 살아가는 것. 문장만 보면 쉬워 보이나 사실 주변을 잘 둘러보면, 내 몸 하나 존재하는 공간이 너무 많은 사물과 관계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여름 방학’은 떠들썩한 움직임도, 큰 사건도, 반전도 없는, 오롯이 ‘먹고 자고 살아가는’ 잔잔한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직접 시장이나 마트에 들려 식자재를 고르고, 제대로 된 한 끼를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든다. 많은 시간이 들여야 하는 일을 행하고, 졸음이 몰려올 땐 잠을 잔다. 이외에도 평소 배우고 싶었던 빵 만들기 기술을 익히거나 서핑을 배워 파도 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하는 동안 하루가 끝나면 그림으로 자신의 하루를 기록한다. 나무 책상에 앉아 색색의 연필을 들고 하루를 기록하는 일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더듬더듬 과거를 돌아보게 만들고, 고민 없이 지냈던 어느 평온한 나날을 자연스레 떠올려보게끔 한다.최근 많은 예능 프로그램은 코로나 시대에 발맞춰 ‘언택트(untact) 예능’을 택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대면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은 시골 마을로 찾아가, 집에서 머무르는 시청자에게 실제로 여행을 하는 듯한 자연경관과 여유로움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실제로 여행을 하진 않지만 화면 속 느릿한 일상과 거대한 자연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바퀴 달린 집’은 커다란 캠핑카를 타고 전국을 유랑하며 자연 속에서 하루를 살아보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물멍(물속에서 멍하니 넋을 놓거나), 불멍(불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는) 등 한가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게스트와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며, 제한된 물을 쓰고 간소화된 물품을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은 바쁜 도시 생활을 벗어나 진정한 휴식을 실현하고 싶은 현대인의 욕구를 대변해주는 듯, 그저 먹고 이야기하고 자연 속에 놓여 있는 장면뿐인데도,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다시 미니멀 라이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쉼을 위해서는 마음 비우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집 안을 살폈고, 쌓인 어마어마한 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나에게 꼭 필요한 것’, ‘필요하지 않지만 가지고 싶은 것’, ‘폐기해야 할 것’이라 적은 3개의 상자를 나란히 두고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정말 내가 이걸 다 산 걸까? 싶었던 건, 책이었다. 일 년 전 이사를 하면서 많은 책을 처분했지만 아직도 집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이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글을 쓸 때 필요한 참고 자료가 되지 않을까? 이 책은 소중한 이와 함께 서점에 들러 고른 책이었는데 등등. 한 가지의 물건 속에는 불명확한 목적, 그때의 기분이나 시간, 기억 같은 게 들어있어 버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조금씩 비우니 보이는 게 있었다. 생각보다 입지 않는 옷이 많았고, 필요 없는 책은 끈으로 묶어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다. 현재 생활 습관에 맞춰 가구를 재배치하여 더 넓은 공간을 만들었다. 남은 옷은 몇 벌 되지 않아서 모두 옷걸이에 걸어두고, 양말과 수건은 색깔별로 잘 개켜 서랍 안에 세로로 줄 맞춰 넣었다.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쉽게 버릴 수 없는 것 또한 있었다.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던 기사문, 동아리 일지, 의미 있는 편지, 신춘문예 기간에 시를 보내고 받은 우체국 영수증 등 내게 많은 것을 안겨다 준 물건들이 멋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래전에 받은 게 많아서 이미 프린트나 글씨가 벗겨진 것도 많았다. 좋은 노하우를 참고해 작은 크기의 종이는 속이 비닐로 된 파일 안에 집어넣어 정리하였고, 다소 크기가 큰 종이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A4 용지의 크기로 뽑아 파일 안에 넣었다. 많은 종이와 인쇄물이 한 권의 사진첩으로 정리되자 책장 속 딱 한 칸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필요한 자리에 알맞게 위치하는 것. 그 적당한 위치와 무게가 어쩌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코로나19로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면서 충만을 누리는 새로운 생활양식이 확산하고 있다. 집 안에 있는 불필요한 물건을 비우고 나니, 소비습관이 조금씩 달라지고 대체 용품을 찾게 되었다. 이제 조금씩 실천하고 있지만, 가장 많이 바뀐 부분은 물건을 고를 때 5년 정도 쓸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 구매를 결정하게 되었다. 또 손수건을 사용하여 휴지 사용을 줄이거나, 장바구니 사용으로 비닐봉지를 쓰지 않는다던가, 식당에서 먹지 않는 반찬은 미리 말해두는 등 실천 가능한 습관을 생각해보고 있다.비워지는 물건의 이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이들은 ‘제로웨이스트(zero-waste)’ 움직임을 실천하고 있었다.제로웨이스트는 일회용 포장재, 완충재 등의 사용을 줄이고, 자원과 제품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사회 운동이다. 많은 클렌징 용품을 대체해 천연 비누를 쓰거나, 세제나 섬유유연제 대신 ‘소프넛’을 대체해 사용한다. 소프넛은 솝베리나무(soapberry·무환자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로 수질오염, 환경오염 없이 생분해되는 천연 계면활성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또는 비닐봉지를 줄이기 위해 매립 후 90일 이내 물과 이산화탄소로 바뀌는 생분해 봉지를 사용한다. 편리하게 사용하는 물티슈 또한 생분해 행주로 대체하고 플라스틱 빨대는 소독으로 재사용이 가능한 스테인리스 빨대를 쓴다. 그간 행하던 습관들을 한 번에 고치기는 어렵다. 계산 후 영수증이나 플라스틱 빨대를 받지 않거나 텀블러 사용, 다회용 장바구니 사용, 생분해되는 대나무 칫솔을 쓰는 등의 작은 실천부터 해볼 수 있다.조금만 눈을 돌리면 불필요한 것을 구매하지 않고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활을 채워 넣을 수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줄이면서, 아주 최소한의 물건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끼는 삶도 있다.비워낸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환경을 위해 함께 상생하자는, 같이 살아가자는 건넴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온전히 마음에 꼭 드는 것으로만 채우고, 불필요한 것은 생략하는 법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다.세상은 시끄러우나 내 안의 고요는 비워둔 곳에서 온다. 코로나19로 인해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태도나 자세를 느린 시간 속에서 선명히 그려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을 반듯하게 지키며, 무해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더 고민해야 한다.

2020-09-22

우리 안의 인종차별

요즘 미국에서는 프로농구 리그인 NBA 플레이오프 경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경기에 출전해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의 유니폼 등판에 이름과 백넘버가 아닌 구호들이 적혀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적혀있는 글들은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Equality (평등)’, ‘Vote(투표하라)’등으로, 모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구호들이다. 선수들 대다수가 흑인이거나 흑인 혼혈로 구성된 NBA 리그이기에 선수들이 직접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움직임의 발단은 올해 5월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었다.편의점에서 2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혐의로 백인 경찰관은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려 하였다. 플로이드가 저항을 하자 경찰관은 그를 바닥에 눕히고 무릎으로 목을 짓눌렀다. 목이 졸린 플로이드는 숨을 쉴 수 없다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결국 그는 현장에서 의식을 잃었고 그날 밤 병원에서 사망했다. 경찰의 과잉진압 과정은 현장을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 고스란히 촬영되었고 플로이드가 격렬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이러한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었던 흑인들의 전국적 시위의 방아쇠가 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해당 경찰관에 대한 처벌 뿐 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흑인에 대한 차별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NBA선수들은 이러한 시위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시위대의 구호를 유니폼에 새긴 것이다.이런 인종차별 이슈는 단일민족국가라는 환상에 젖어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곤 한다. 우리나라가 정말 단일민족국가인가는 논의가 필요한 이야기이지만 그렇다 치고, 그로 인해 인종차별 이슈가 적을 수밖에 없는 국가이기에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러한 무지로 인해 최근 필리핀 누리꾼 사이에서는 #CancelKorea(한국을 취소하라) 라는 해시태그를 다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한국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위한 구호인데, 이것은 필리핀계 미국인 스타인 벨라 포치가 올린 한 영상이 발단이 되었다. 그가 공유한 영상 속 그의 팔에는 욱일기를 연상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한국인들은 댓글을 통해 그 문양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포치는 한국인들을 향해 사과문을 올렸다.사과문의 내용은 “한국인들에게 6개월전에 새긴 붉은 태양과 16개의 광선 문신에 대해 사과한다. 그때는 내가 역사에 대해 무지했다. 그러나 내가 깨닫자마자 즉시 나는 이것을 가렸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한 일정을 잡았다. 나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며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그런데 이러한 충분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누리꾼들은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쏟아내고 말았다.포치의 출신 국가인 필리핀에 대해 “못 배워먹고 키 작은 사람들”, “가난한 나라”, “못생긴 민족”이라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쏟아내고 만 것이다.이에 항의하기 위해 필리핀 누리꾼들이 #CancelKorea(한국을 취소하라) #ApologizeToFilipinos(필리핀 사람들에게 사과하라) #Apologizekorea(한국은 사과하라)와 같은 해시태그를 달고 있는 것이다.포치 역시 “나를 공격하는 것은 괜찮지만 필리핀에 대한 공격과 비난은 참을 수 없다”며 항의의 뜻을 내비쳤다. 이에 뒤늦게 일부 네티즌들이 #SorryToFilipinos(필리핀 분들에게 사과한다)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수습을 하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이미 국제사회에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고 말았다.인종차별적인 시각은 앞으로 더 큰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한민족’이라 불리는 단일민족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미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이주결혼여성들이 우리 곁에서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다문화 가정의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완득이’라는 소설이 나온 것이 벌써 12년 전이다. 수많은 완득이들이 이미 대한민국의 사회구성원이 되어 우리 주변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인종차별적 시각을 거두지 않는다면 언젠가 대한민국에서도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행동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우리 안의 인종차별의 씨앗은 아주 사소한 태도로부터 싹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른 국가 출신의 사람이나 다른 인종의 사람을 만났을 때 개인으로서의 그 사람보다 그의 국가와 인종에 먼저 집중하는 습관이다.학부시절 교양수업을 같이 듣던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저한테 궁금한 게 중국 얘기 밖에 없어요?” 그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나는 술자리에서 한참동안 그와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의 대부분이 “중국은 어때?” “중국 사람들도 그래?”같은 식이었다.그는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사실 그는 중국인이기 이전에 스물한 살, 내 또래의 여자애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애나 진로에 대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런 고민들을 나누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에게만은 오로지 중국 이야기만 묻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자기는 중국 국가대표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나와 같은 학교 학생일 뿐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느꼈던 그 부끄러움은 외국에서 온 친구들을 대할 때 나의 태도의 기준점이 되었다.지금 내게는 두 명의 절친한 외국인 친구가 있다. 한 명은 우크라이나에서 왔고, 한 명은 영국 맨체스터에서 왔다. 그 둘 모두 내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우크라이나에서 온 친구는 그놈의 ‘김태희가 밭 가는 나라’라거나 ‘장모님의 나라’와 같은 이야기를(이 얼마나 부끄러운 차별 발언인가), 영국에서 온 친구는 ‘두 유 노우 박지성?’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는 것이었다.그들은 나와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내가 그들의 나라에 대해 묻기보다 그들 자신을 궁금해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다가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내게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가 아니고, 그저 ‘내 친구’일 뿐이다. 외국인 친구와 마음 터놓고 지내는 비결은 다름 아닌 그들이 외국인임을 잊는 것이다. 그들과 나의 피부색이나, 성장 배경 같은 차이에 집중하기 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끼는 동질감에 집중하는 것이다. 차별은 차이에 집중하는 태도로부터 출발한다. 차이에 집중하지 않으면 차별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우리가 받아온 차별을 생각해보자. 일제강점기 내내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아직도 못 배워 먹은 일부 서양인들은 우리를 향해 눈을 양쪽으로 찢는 액션을 보이며 조롱한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면 우리부터 우리와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 우리와 이 넓은 지구를 나눠 쓰고 있는 이들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글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우리와 함께 싸워준 국가 필리핀 국민들에게 #SorryToFilipinos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강백수싱어송라이터·시인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2020-09-15

멈춘 시간을 보내는 법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최근 서울·경기 지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자 정부는 강화된 방역 조치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격상했다. 수도권의 음식점은 오후 9시까지 운영되고 프랜차이즈형 카페나 베이커리는 포장만이 가능하다. 헬스장이나 각종 실내체육시설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개강 시즌이 무색하게 대학가는 고요하고 밤낮으로 북적이던 번화가 역시 텅 비었다. 이렇듯 모두가 힘을 모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자타공인 집순이인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으니. 분리수거를 하러 나서는 잠깐의 순간도 방역 마스크를 써야 한다.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업을 해왔는데 이젠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단골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잔을 맞대던 여름밤도 다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바깥 공기를 좋아했던가. 이전엔 미처 몰랐던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요즘이다.상상해본다. 내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떨까.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시간을 정지한 뒤, 나 혼자만이 움직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이를 구할 수 있다. 얄미운 상사의 이마에 꿀밤을 날려줄 수도 있겠다. 이런 과대망상이 현실이 된대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거리를 걸으며 지상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겨본 적 있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피곤하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건 자유보다 고독에 가깝다.나는 인류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천재 과학자도,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좀비를 무찌르는 전사도 아니다.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니다. 요즘 내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리는 재난문자를 확인하며 전전긍긍하는 것뿐이다.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며 혀를 쯧쯧 차다가 익숙한 지명에 화들짝 놀란다. 내가 거기를 다녀왔던가. 과거의 발자국을 헤아리며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역시 ‘집콕’이 가장 마음 편하다. 간단한 모임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 필요한 식료품도 배달을 이용한다. 몸이 뻐근하면 유튜브를 켜고 스트레칭을 따라 한다.이런 와중에도 눈앞의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원고 마감일은 째깍째깍 다가온다. 일주일에 두 번 화상 회의 도구인 줌(zoom)으로 학생들과의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모니터 너머의 아이들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코로나 대체 언제 끝나요?” 그러게 말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몇 시간이고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속이 울렁대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힘들다고 투덜대는 것도 잠시, 일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가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며 자신을 채근하게 된다.‘K-직장인’이란 이런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긍정적인 뜻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나 자연재해, 심지어 사람을 물어뜯는 좀비가 출몰할지라도 한국의 직장인은 꾸역꾸역 회사를 나갈 것이라는 자조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로 홍수 때문에 물이 허리까지 찬 상황에서 물살을 가르고 출근하는 이들의 영상은 전설처럼 내려와 인터넷을 떠돈다. 양복에 서류가방을 들고 일터를 향해 용맹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아파도 학교에서 아파라. 몸담은 직장에 뼈를 묻어라.’ 이것은 비대면 시대에도 유효한 듯하다. 뼈를 묻어야 하는 장소만 바뀌었을 뿐이다. ‘아파도 화상 강의는 참여하고 아파라. 컴퓨터 전자파를 받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라.’완전히 지쳤다. 휴식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라버렸다. 생전 처음 접하게 된 ‘거리 두기’의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지면서 더더욱 일과 휴식을 분리하지 못하고 있다. 안락한 소파와 침대가 이젠 더 이상 쉼의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인 중 한명은 주말의 휴식 시간을 철저하게 계획한다고 했다. 국가공무원으로 일하는 그는 자신만의 ‘휴식 루틴’을 가지고 있다. 10시까지 늦잠 자기. 2시간 운동하기. 6시까지 레고 조립하기. 30분 동안 목욕하기. 일기 쓰고 잠자리에 들기.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휴식을 충실하게 이행해야만 제대로 쉬었다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다. 쉬는 것마저 계획적이라니.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K-공무원’입니다.”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마다 휴식의 방식은 다르니까요.”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모바일 게임이나 온라인 동영상의 유저가 급증했다. 대표적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의 사용자는 끊임없이 증가하며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나 역시 넷플릭스, 왓챠,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굉장히 감사해하고 있다. 동영상 서비스 없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휴식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현재의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낸다는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명상 앱을 켰다. 편안한 음악이 흐르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불안해졌다. “당신은 무한한 우주를 홀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명상 안내자의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앱을 종료했다. 집에서도 혼자 있는데 우주에서도 혼자라니. 그건 너무나 가혹하지 않은가.사실상 완벽한 고립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정치·사회면은 어떤 사건이 장식하고 있는지, 연예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인터넷 기사와 댓글, 각종 소식과 정보는 침대 위에서도 끊임없이 쏟아진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메인 기사부터 시작해서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트판까지 정독해야 직성이 풀린다. 모니터 너머의 이야기에 파묻혀 정작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이와 함께 우울감을 호소하는 ‘코로나 블루’에 빠진 이들도 생겨났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나타난 현상이다. 일상생활의 제약이 커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호도, 가짜 뉴스 등으로 심각한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슬픔이나 분노 또한 삶의 원동력일 수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아무것도 진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냉소와 허무의 늪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무기력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된다.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점을 꼽아보기로 했다. 순전히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함이다. 먼저 강아지와 보낼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확보되었다. 나의 반려견 보리는 종일 헥헥대며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의 연락이 설레어졌다. ‘어느 날 아침, 내게 초능력이 생기면 어떨까’와 같이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내던 당연하게 존재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는 무엇을 할까 계획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물론 이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극단적인 자기 암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우리는 어떤 메시아적 전언을 기다린다. 시련은 모두 끝났다. 이제 우린 안전하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고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좋겠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일시 정지’된 시간을 ‘빨리 감기’하여 낙관적인 미래로 훌쩍 건너뛰고 싶다. 이 역시 상상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상황을 응시하고 현재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많은 이들이 예측하듯 세상은 이전과 같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고.문은강‘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2020-09-08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킹덤’은 조선시대 좀비물이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오랜 기근에 굶주린 백성들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솥에 고아 나눠먹으면서 역병은 시작된다. 카니발리즘에 동참한 이들은 사지가 뒤틀리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가 밤이면 좀비로 변해 산 사람들을 문다. 좀비에 물린 이들은 좀비가 되어 또 누군가를 물고…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하는 역병은 최초 발생지인 경남 부산을 넘어 경북 상주와 문경을 완전히 집어삼키더니 결국 한양까지 지옥으로 만들고 만다.어떤 계시적 직관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전파 경로가 겹치는 건 흥미로운 우연성일 뿐이지만 ‘킹덤’의 좀비 역병과 코로나19 사이에는 근원적인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욕망을 숙주 삼아 자라난다는 것이다. 굶주림을 못 견뎌 인육을 먹은 사람들이 좀비가 되었던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국 우한에서 박쥐를 잡아먹은 사람들의 몬도가네에서부터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1월 최초 확진자가 나타난 후 물류센터와 콜센터 등 노동조건이 취약한 생계의 현장에서 전염병이 집단 유행했다. 먹고사는 일의 엄혹함 앞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무용하고 무력했다. 정부가 방역 체계를 완화하고 대체공휴일 지정 및 소비 쿠폰과 외식 환급금 지원 등 내수경제 활성화를 선택한 것 역시 ‘먹고사니즘’ 때문인데, 소비가 적극 장려된 8월 황금연휴 동안 사람들은 밀집했고, 밀접했고, 밀폐된 공간에서 경계심을 풀었다. 당연한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는 2차 대유행을 앞두고 있다.전염병이 특정 집단 세력에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 역시 드라마와 현실이 닮아 있다. ‘킹덤’에서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왕비와 영의정이 좀비 역병을 은폐하려 하고, 나아가서는 일부러 퍼뜨리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천지와 보수 개신교가 코로나19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키는 주범이 되었는데, 이들은 종교 활동을 빙자한 정치 개입을 위해 방역당국이 금지하는 대규모 집회와 소모임을 강행했다.종교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신도들은 감염 사실을 은폐한 채 사회시설을 이용해 시민들에게 바이러스를 옮기고, 이만희와 전광훈 등 종교지도자들이 전염병 확산의 책임을 회피하며 ‘음모론’과 ‘종교 탄압’을 주장하자 예배 자제를 당부하는 방역 지침을 ‘사탄의 거짓말’로 여겼다.‘킹덤’에서 왕비는 결국 좀비가 되고 마는데,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것도 드라마틱하다.코로나 2차 대유행 국면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상이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났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사탄이 형님이라고 하겠다”는 세간의 조롱이 나돌 만하다. 이웃에 대한 희생과 헌신, 사랑을 실천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세상에 혐오와 갈등, 분쟁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목숨 걸고 현장 예배를 드리겠다”는 외침은 마치 결사항전을 각오하는 군인처럼 서슬이 퍼랬는데, 결국 침과 비말 등 타액과 섞인 통성기도는 신에게 닿는 대신 선한 이웃들의 폐혈관 속으로 침투해 이 땅에 수백, 수천의 지옥을 확장하고야 말았다. 보수 개신교가 보여준 종교이기주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갖는 의미, 나아가 신의 위상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교회에 갔다. 좋아하던 이성친구가 교회에 다녔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웃는 얼굴 외에는 모든 것이 따분했지만, 날이 갈수록 중고등부 예배와 소모임, 수련회가 즐거워졌다. 부모와 자주 떨어져 지내던 나는 공동체에 속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다. 형제자매들의 중보기도와 따뜻한 환대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신을 본 것도 같았다.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종교 활동은 점점 그럴듯한 신앙의 모습을 갖춰서, 20대 시절 나는 제법 큰 장로교회에서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 회장으로 신을 섬겼다. 그때 눈을 감고 두 팔을 높이 든 채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났다.내가 교회를 떠난 것은, 바리새인식 형식주의, 신앙을 패션인양 걸치고 과시하려는 속물근성, 비신앙인들에 대한 도덕적 우위 주장, 종친회 또는 향우회 모임이나 다를 바 없는 떼거리 문화, 수능 입시 기도회를 열거나 복을 내려달라며 산에 가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 등 예수가 아니라 무당이나 점쟁이를 바라는 기복신앙과 신비주의에의 맹목적 집착이 싫어서였다. 장로와 권사들은 자기 자식에겐 고시 공부나 취업에만 전념하라고 하면서 남의 자식에겐 봉사와 사역, 일꾼으로서의 헌신을 강요했다. 교회 내에서 비밀 연애를 하다 들킨 한 연인은 교회 어른들에 의해 강제로 갈라졌다.그런 모습들을 목격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흘리던 내 눈물이 종교적 파토스의 산물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깨달았다. 진리와 구원, 아가페적 사랑, 종말론이라는 신비주의가 극적인 장치를 지닌 음악과 결합할 때, 내 안에서 요동친 것은 신에 대한 순전한 믿음과 사랑이 아니라 이해가 결여된 비이성적 정념이었을 뿐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안다고 착각했던 것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원사이즈 기성복처럼 선택이 배제된 채 얌전히 입었던 기존 교리를 벗고, 신과 알몸으로 마주앉아 합리적 이성을 통해 그를 내 방식으로 이해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파토스에 가려졌던 교회의 민낯이 보였다. 한국교회가 기득권 집단임을 고발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신은 죽었다”던 니체의 선언 이후, 이제 사람들은 ‘죽은 신’(슬라보예 지젝), ‘침묵하는 신’(엔도 슈사쿠),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오늘날 신이 몰락한 데에는 사회 공동체의 실재감 상실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에밀 뒤르켐은 종교와 사회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며, 종교는 결국 교회라는 도덕적 사회 공동체를 원천으로 삼는다고 말했다.사람들은 교회에서 초월적인 신의 현현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포용’과 ‘연대’라는 공동체적 감각을 통해 희미하게 표상된 신의 이미지를 추종하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교회는 사회에 분열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데 앞장섰다.이처럼 교회라는 도덕적 교사의 타락은 신에게서 위로와 연대의 감각을 마비시켜버렸다. 코로나 이슈뿐만 아니라 지난 십여 년 동안 한국교회가 어떤 정치적 스탠스를 취했는지, 성소수자와 미혼모, 팔레스타인 난민을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려보면 대한민국에서 종교는 집단유대의 유지라는 사회적 기능을 상실했음이 더욱 자명해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교회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내리라 믿는다.“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는 찬송을 부르면 아직 눈물이 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 어떤 계명보다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다. 우리는 바이러스보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혐오와 더 오래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타자 윤리가 마비된 곳에서 창궐하고, 분노와 혐오, 갈등도 거기서 비롯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던 예수의 가르침은 곧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 레비나스가 말한 비대칭적인 관계의 한 모범이다. 드라마 ‘킹덤’에서 좀비 역병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백성을 살리려 한 세자와 의녀, 개인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한 이름 없는 영웅들에 의해 종식된다.김학중의 시 ‘요셉의 서’에서 신은 말한다. “인간은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에 “나는 아직도 신이어야 한다”고.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때 비로소 신은 그 존재의 당위를 초월하여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알 수 없는 이름으로 호명되고, 아무도 모르게 간절한 기도들의 수신자가 되고, 마주보는 사람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어느 아침빛이 될 것이다. 부활과 구원, 천국은 오직 사랑으로만 닿을 수 있다고… 나는 사랑을 믿는 유신론자다. 이 시대의 이웃들과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0-09-01

유튜브의 이면, 진정성 찾기 위해서는

유튜버 ‘뒷광고’ 논란이 연일 화제다. ‘뒷광고’란 유튜버가 특정 업체로부터 광고 대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공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콘텐츠에 상품을 소개, 노출하는 것을 말한다.최근 유명스타일리스트는 유튜브에서 자신이 직접 샀다는 신발을 소개했으나 수천 만 원의 광고비를 받은 제품으로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명가수도 자신이 직접 샀다는 속옷을 소개했지만 추후 유료 광고임을 정확히 표기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유명 연예인을 시작으로 인기 유튜버와 인플루언서(온라인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 또한 뒷광고를 받았다는 사실이 줄줄이 드러났다.게임, 먹방, 뷰티, IT, 패션, 수험, 음악,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유튜버들이 사과문, 해명문, 입장문 등을 줄지어 발표했다. 대부분은 유튜브 안에서 구독자들이 쉽게 찾아 읽기 힘든 더보기란이나 고정 댓글을 통해 교묘히 광고나 협찬임을 표기했다. 광고나 협찬의 차이를 몰라 정확히 표기하지 않은 점의 문제도 있었다. 제품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내돈내산(내가 직접 돈주고 산)’을 밝히며 ‘그만큼 믿고 사는 좋은 상품’을 강조했지만, 결국 광고임이 밝혀져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비판 여론이 더욱 거세졌다.먹방 유튜버 사이에서도 뒷광고는 그들만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지난 8월 1일, 먹방 인기 유튜버인 ‘홍사운드’는 광고주가 전체메일로 유튜버들에게 광고 제안을 전달할 정도로 뒷광고는 만연한 일이라며 폭로했다.이번 뒷광고 논란의 파장은 계속되고 있다. 이름만 대면 대부분이 알 법한 유명 유튜버들이 뒷광고를 오래전부터 꾸준히 만행했다는 점도 충격이었지만, 처음 뒷광고 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부분의 유튜버가 ‘자신은 그럴 일이 없다’며 무시를 하거나 댓글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대두되자 계속되는 말의 번복과 사과문 대필 의혹, 잠적 등 태도의 문제가 불거져 더욱 분노와 비판을 받았다.그간 유튜브에선 의료행위나 건강기능식품 관련 광고 등 처벌수위가 높은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례가 빈번했다. 의료인이 아닌 개인이 시술을 받는 체험기, 수술 부위 노출, 해당 병원을 조금씩 언급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다수 유튜버가 처벌을 받기도 했다. 초기 유튜브에 먹방을 알렸던 한 유튜버는 식품 관련 광고를 무분별하게 진행해 논란이 되었고 이후 시청자의 신뢰를 잃어 꾸준히 하락세를 띄고 있다. 이에 대한 5년 이하의 징역,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의 처벌 기준이 있지만 처벌에 비해 얻는 이익이 훨씬 크기에, 지속적으로 불법이 자행되는 현상을 빚어 논란이 일고 있다.뒷광고를 행한 유튜버들은 처벌을 받을 수 있을까? 드라마나 예능에서 자주 보이는 간접광고(PPL)는 방송법상 방송 프로그램 안에서 상품을 소품으로 활용하여 상품을 노출시키는 형태를 광고로 규정하고 있다. 간접광고는 해당 방송 프로그램 시간의 100분의 5를 초과할 수 없고, 화면 크기의 4분의 1을 넘을 수 없으며, 간접광고가 포함되어 있음을 자막으로 표기하여 시청자가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하는 철저한 규제를 받는다.그러나 유튜브는 방송이 아닌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정보통신망법이 적용된다. 방송법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간접광고’ 규제 또한 받지 않아 사실상 유튜버에 관한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표시광고법 제3조인 ‘기만적인 표시·광고’에 대해서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정명령이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으나, 사업주만을 처벌 대상으로만 하고 있는 모순을 띈다. 이처럼 뒷광고는 만연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언젠가 크게 터져 나올, 누구나 예상 했을 법한 문제였다.오는 9월 1일부터 ‘뒷광고’를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추천·보증 등에 관한 표시·광고 심사지침’ 개정안을 시행한다. 이번 개정안에 따라 유튜브 콘텐츠에는 게시물 제목이나 영상 시작과 끝 부분에 경제적 대가를 받았다고 표시해야 한다. 해당 문구는 영상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잘 보이도록 넣어야 한다. 현재까지는 광고를 의뢰한 광고주만을 처벌이 가능해 어설픈 제재가 아니냐는 문제가 있었지만 다음달부터는 막대한 수익을 얻은 유튜버, 인플루언서를 ‘사업자’로 인정해 처벌하는 것도 가능하다.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는 지침을 꼼꼼히 확인하여 영상 제작에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시청자와 소비자 또한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SNS의 인플루언서, 그리고 유튜버에 대한 제재가 어떻게 촘촘히 적용될지 지켜보아야 한다.이번 유튜브 뒷광고 사태를 보며, 나는 그간 유튜브에서 느껴온, 한 문장으로 명징할 수 없는 괴이와 이질감을 느꼈다. 뒷광고 폭로가 줄지어 이어지자, 뒷광고 정황이 없는 유튜버의 댓글창에도 ‘뒷광고 하셨어요?’라는 댓글이 연이어 달렸다. 어떤 이들은 유료광고 배너, 제목, 더보기란, 댓글을 해당 유튜버가 수정하거나 삭제한 것 같다는 추측글을 거듭 올리며 무작위로 비판을 가했다.뒷광고를 받지 않은 유튜버는 자신의 의혹을 겨우 해명하지만, 의문을 제기하던 이들은 아무런 책임 없이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처럼 대부분의 유튜버들에게 “뒷광고 했지?”라고 몰아붙인 뒤 ‘아님 말고’식의 의혹제기가 빈번히 나타났다. 근거 없는 루머와 추궁, 무분별한 비난이 난무하며 한 인간에 대한 평가와 잣대뿐인 댓글 창을 읽으며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주 가까이 그 말을 마주한 듯 혼란스러웠다.유튜브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유튜브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유명 유튜버들의 말은 유행어가 되기도 하고 그들이 입은 옷과 신발, 화장품, 먹는 음식이 주목 받기도 한다. 방송연예계나 각 프로그램에서도 유튜브 채널을 만들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로 다가가는 시도를 하고 있다. 유명 유튜버들이 많은 사랑을 받는 건 1인 방송 안에서 친구이자 자매, 형제, 남매 등 가깝고도 친밀한, 솔직한 모습을 내세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그간 티비나 스크린에서 본 연예인이나 배우는 내 이상과 가까운, 어쩌면 다른 곳에 있을 존재라 여겨지는데 비해, 1인 방송안의 유튜버는 자신의 일상을 드러내고, 소개하고, 소통하려 하기에 언젠가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로 느껴지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작년 6~7월 한 달간 교육부가 7500명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직업을 조사한 결과 유튜브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초등학생 희망 직업 3위에 올랐다. 이는 전문직 의사를 밀어낸 결과였다. 희망직업이 있다고 한 학생들은 그 직업을 고른 이유에 대해 약 50%가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약 20%가 ‘내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할 정도로 유튜버에 대한 친밀감과 호감도를 높게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유튜브 속의 광고는 더 자연스럽게, 또 더 정확하게 구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표기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광고를 더 드러낸다던지, 오히려 개그 소재로 사용해 돋보이게 하는 등의 홍보 기법이 눈에 띄고 있다. 이는 광고를 숨기고 자신이 직접 산 것처럼 흉내 내는 것보다 훨씬 호쾌하게 받아들여진다.100만을 훌쩍 뛰어넘는 구독자 수, 팬들과 나누었던 시간과 소통,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의 첫 마음, 그리고 공을 들여 만들었을 동영상은 뒷광고와 함께 전부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되었다. 정직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거짓으로 인한 불신은 한순간 소용돌이가 지나간 듯, 홀연히 사라지고 없다.

2020-08-25

집 사서 부자 되는 사회를 살아가며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중.친구들과의 술자리는 내겐 가장 큰 낙이었다. 신해철 노래처럼 ‘고흐의 불꽃같은 삶’이나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에 대해 이야기 한 건 아니지만 설익은 머리로 쥐어짜낸 개똥철학을 나누는 게 좋았다. 아니면 재밌게 본 영화 얘기, 재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뒷담화, 요즘 만나고 있는 사람 이야기, 야구 이야기, 음악 이야기, 그냥 영양가 없는 우스갯소리들. 그렇게 다채롭게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이 좋아 그렇게 술을 마셔대곤 했다. 그런데 서른이 지나고 언젠가부터 술자리의 재미가 뚝 떨어져버렸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밤새워 침 튀어가며 떠들던 이야기들이 머물던 곳에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우량주니 잡주니 하는 주식 이야기, 누구랑 누구의 팔자를 고치게 해 주었다는 가상 화폐 이야기, 그리고 요즘은 뭐니 뭐니 해도 부동산 이야기. 어제 만난 친구들도, 그 전에 만난 친구들도 한참을 부동산에 대해서 떠들었다.친구 A가 무리한 은행 대출로 집을 사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를 말렸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더 큰 집이 필요해질 텐데, 무리해서 집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고. 이미 천정부지로 올라버린 서울 집값이 설마 더 오르겠냐고. 그런 나의 이야기를 비웃듯 집값은 폭등했고, 친구는 그 재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A 본인에게는 성공신화일지 모르겠으나 자리에 있던 나머지들에게 그 이야기는 다소 허탈했다. 늘 그랬다. 가상화폐 투자로 누가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어디 어디 주식을 사서 재미를 쏠쏠하게 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나는 무언가 허탈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투자가 성공신화로 다가올 때, 대부분에게는 그때 빚을 내어서라도 했어야 하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해 원통한 것이 되어 돌아온다.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1년으로 날아가한창 잘 나가던 30대의 우리 아버지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아버지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해요 사업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차라리 잠실 쪽에 아파트나 판교 쪽에 땅을 사요 이 말만은 전할거야-강백수 ‘타임머신’ 중.사회적 성공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대개는 비약적인 경제적 성취를 사회적 성공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노동이나 자영업, 소규모 사업 같은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분야는 어떤 때는 주식이었고, 어떤 때는 가상화폐였으며, 언제나 부동산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부동산에 투자하지 않고 작은 ‘사업만 너무 열심히’하다가 ‘6년 후에 우리나라 망’하며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우리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도 글 쓰고 노래를 지어 부르는 노동을 통해 언젠가는 대단한 부는 아니더라도 가족들 번듯하게 건사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는 나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만다.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현재를 버텨나갈 수 있는 동력과 미래에는 현재보다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것을 위한 일이 아버지에게는 작게나마 사업이었고, 내게도 어설프게나마 대중예술이다. 현재를 살아나가기 위한 동력으로서도 위태롭기만 한 직업인데, 지금보다 미래에 상황이 비약적으로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언제나 희박하기만 했다. 그나마 ‘좋은 직업’이라 여겨지는 안정적인 직업들을 가진 친구들 역시 현재를 살아나가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까마득하기만 하다고 말한다. 노동으로 삶이 나아질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방법은 오로지 투자, 부동산일 수밖에 없다.정부는 8월 4일, 새로운 부동산 대책을 내어 놓았다. 그런데 이 대책이 정말 새로운 대책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포털사이트에 ‘부동산 대책’이라고 검색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8.4 부동산 대책만 있는 게 아니라 7.10부동산 대책이 있었고, 6.17 부동산 대책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대책까지 현 정부는 스무 번이 넘는 대책을 내어놓았다는 것. 현 정부만 그랬을까, 여태까지 어떤 정부도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막아낸 적이 없다. 그러니 내 친구들은 누구도 이번 대책이 부동산 폭등 현상과 투기를 훌륭하게 막아낼 거라고, 집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 될 거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현실화 할 거라고, 20년 넘게 이루지 못한 숙원을 정부가 이루어낼 거라고 믿지 않는다.나라의 똑똑한 분들이 다 같이 모여 머리를 맞대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나라고,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어쨌거나 우리는, 동풍에 나부껴 눕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떼기 같은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고, 그 와중에 헌법에 적혀있는 것처럼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라도 정보랍시고 주고 받아야 하고, 집 잘 사서 부자 된 친구들을 칭송하며 그들로부터 뭐라도 비결이 있을까 기웃거려야 하고,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빚을 져서라도 내 인생을 역전시킬 집 한 칸을 살 궁리를 해야 하고, 그 조차도 어렵고 어두운 나 같은 애들은 멍한 얼굴로 그렇게 재미없는 대화들이 오가는 술자리에서 아무래도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나 하며 지루함을 견딜 수밖에.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중.여러 정부를 거치며 많은 분들이 개선을 위한 노력이야 해 오셨겠지만, 나는 진실로 이러한 현실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발 빠르게 집을 얻고, 그 집의 가격이 오르는 것으로 우리 인생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난다는 것은 사회 구조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동산을 비롯한 투자정보가 풍요롭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제 자리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하는 것만으로 남부럽지 않은 풍요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즐겁기 위해 모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누군가가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하며 ‘불안한 맘’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부디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어 모두가 투자, 혹은 투기에 목메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 모든 일들은 과연 가능할까.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부와 의회의 역할이겠지. 나는 그런 세상을 기다리며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부동산과 주식과 가상화폐의 은혜로부터 소외된 이들과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을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인 이들이 꼭 그렇게 해 주리라 한 번 더 믿어보며.

2020-08-18

익숙함과 새로움의 경계에서

레트로 열풍이 한창이다. ‘김희선 곱창밴드’로 시대를 풍미했던 헤어 스크런치가 다시 유행하고 배꼽티와 통 넓은 바지가 옷가게 여기저기에 걸려있다. 추억의 경양식 돈가스를 전면에 내세운 식당은 인테리어며 식기며 심지어 콜라병조차 이전에 생산되었던 모양을 고수한다. 음악은 또 어떤가.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혼성그룹 ‘싹쓰리’로 활동하고 있는 이효리, 유재석, 비는 90년대 느낌이 물씬 나는 청량한 노래를 발표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비트를 듣고 있노라면 코끝이 찡해진다. 눈을 감으면 새하얀 백사장과 파도가 일렁이는 어느 여름 바닷가가 펼쳐지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지? 사실 미디어에서 주입하는 추억은 내 추억이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리움마저 답습해버린 세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나의 추억에는 멋이 없다. 초등학생일 때부터 휴대전화를 썼고 방과 후엔 컴퓨터 학원에 다녔으며 만화영화로 ‘스폰지밥’과 ‘파워 퍼프 걸’을 즐겨봤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보다 빅뱅의 ‘붉은 노을’이, 산울림의 ‘너의 의미’보다 아이유의 노래가 익숙하다. 종로의 LP바에서 “아, 심신 최고였지”하는 선배의 넋두리를 들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미안해요. 난 이 노래 몰라요. 나 때는 동방신기가 최고였다고요.11학번의 문학도로 나는 꽤나 갈팡질팡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대학생이라는 자아와 문학도라는 자아가 만나 이상하리만치 비대한 자아가 탄생했는데, 그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 하는 사람’의 흉내를 냈다. 옆구리에 보들레르 시집을 끼고 미간을 살짝 찌푸려 고뇌에 빠진 표정을 짓는 건 기본이었다. 윤동주와 기형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통기타에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남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학생운동 시절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문선’이란 것이 있었다. ‘바위처럼’이나 ‘가자, 노동해방’과 같은 노동요에 맞춰 정해진 율동을 하는 행위였다. 학교 축제가 되면 무대에 올라 사회에 저항하는 몸짓을 선보이는 것이 관습이었다. 나는 무려 문선장을 맡아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르고 “마침내! 노동 해방!”을 부르짖었다. 문선을 가르쳐주던 선배들은 말했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만 한다.” 나 역시 후배들에게 그렇게 일렀다. “너희들은 이 명맥을 꼭 이어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 진 몰라도) 아주 큰 일이 날 것이다.”실제로 우리는 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강제로 남아 빈 강의실에 모여 밤늦게까지 율동을 익혔으며 완벽한 ‘칼군무’를 위해 주말에도 학교에 나왔다. 시큼한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바위처럼’을 오백 번도 넘게 들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의 율동을 열심히 연습하던 친구가 운동화를 벗어 자신의 양말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아이돌그룹 샤이니의 멤버인 태민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은강아, 사실 나 샤월(샤이니 월드)이야. 태민이 최애야.” 그랬다. 그녀는 유재하도 김광석도 아닌 샤이니의 팬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내 모닝콜도 ‘누난 너무 예뻐’야.”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노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지? 무엇을 위하여? 어쩌면 과거의 선배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을지도 모른다. 세상에나, 너희 아직도 이거 해?나는 왜 “노동 해방”을 외치면서 “문선 해방”은 외치지 못했는가. 그야말로 구시대적 행위를 대학 시절 내내 고수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멋있어 보였다. 자신을 내던져서 정치적 열망을 부르짖는 행위는 내가 생각했던 진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문선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체제에 저항하며 대단한 일을 행한다는 자기애에 빠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유튜브 동영상 박제라는 끔찍한 벌을 받게 되었지만.돌이켜보면 그랬다. 가끔은 이전 세대를 지나왔던 이들을 질투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시청하며 내 것이 아닌 향수에 잠기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내러티브를 살아보고 싶었다. “겪어보지도 못한 네가 뭘 아느냐”며 배제 당하는 일은 억울하지 않은가.뉴트로의 탄생엔 이런 맥락도 있을 것이다. 뉴트로란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과거의 것을 새롭게 향유하는 현상을 말한다. 레트로가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를 느끼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과거의 모습에서 색다름과 신선함을 느낀다.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콘텐츠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현재의 시선을 통해 전혀 색다른 종류의 질감을 가지게 된다. 미지의 문화를 직접 발굴해낸다는 일종의 고고학적 감수성과도 궤를 함께하게 되는데, 나는 이 강렬한 경험에 공감한다.나는 첫 번째 장편소설의 주인공을 50대 여성으로 설정했다. 1980년대를 청년 세대로 살아온 그녀를 표현해내는 것은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존재했던 시간이 내겐 불가해한 우주를 탐사하는 것과 같았다. 집필을 하며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은 부모님이다. 나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정치적 열망이 가득했던 그때를. 사랑과 낭만이 흐르던 어느 밤을. 동시에 부모님 역시 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가 생각하는 시스템의 문제와 나를 억압하는 시선에 관하여. 우리는 한곳에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각자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의 삶은 더 이상 상상의 영역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시야를 공유하면 확장된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큰 세계를 알게 되는 일. 다양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 그것은 단순한 답습도 강요도 아니다. 함께 공존하며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가치다.어쩌면 미래의 아이들은 지금의 일상을 신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할머니 세대에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다녔다면서요? 분리수거도 운전도 직접 했다면서요? 완전 멋지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으이구 무지몽매한 어린 것들”하고 혀를 쯧쯧 차는 할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때의 나는 샤이니의 노래가 얼마나 좋았는가에 관한 연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말한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래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런 거니까.”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추억은 아름답다. 우리는 거꾸로 된 거름망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일상을 집어넣으면 무겁고 커다란 절망이 가장 먼저 빠져나가고 아픔이 점점 퇴색되어 고통은 지워지고 가볍고 빛나는 것들만 남게 된다. 그것을 아름다움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어쩌면 그리움은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생산품일지도 모른다.나의 여름은 현재진행형이다. 바지런히 살아가며 미래의 추억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조악하게만 느껴지는 현실도 언젠가는 역사가 될 테다. 얼마 전, 엄마와 함께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이효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그녀의 타투가 조금 무섭다고 했고 나는 너무나 간지난다고 했다. 엄마는 그녀가 핑클로 활동했을 때를 추억했고 나는 효리네 민박에 출연했던 모습에 대해 말했다.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며 자기 소신을 지키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라디오에서 싹쓰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효리가 40대라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다며 엄마는 작게 웃었다. 가사를 흥얼거리며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지. 그중 하나는 과거의 시간을 지나온 이들을 향한 존경의 마음일 거라고.

2020-08-11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른바 ‘2030세대’는 기성세대와는 전혀 다른 시각과 촉수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본다. 고정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경제·정치·문화적 현상을 해석하고 있는 20~30대 4명이 ‘21세기 오늘의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고전적 매체인 종이신문에 젊은 감각을 더해줄 이병철(시인), 문은강(소설가), 강백수(뮤지션), 윤여진(시인)이 이어갈 새로운 연재에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묻고, 만나는 이들에게 질문하고, 그러다보면 갑론을박 토론이 되는데, 나는 여전히 낙관주의자여서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내 주변엔 비관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더디기만 한 백신 개발 현황이라든가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 등 객관적 사실을 논거로 내 막연한 희망을 무참히 짓밟으면 “그럼 계속 이렇게 살자는 거야?” 역정을 내며 자리를 뜨곤 한다.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와 ‘죽음의 중지’에서 그려낸 ‘기능 마비 사회’를 우리는 현실에서 체험하는 중이다. 최초 확진자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는 동안 전염병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 삶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 소설 같다. 기업, 공장, 상점 등의 생산과 소비가 멈추면서 경제가 침체되었다. 국가 간 입출국이 막히면서 무역, 여행, 문화교류가 중단되었다. 국가고시들은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어렵게 개학한 학교들은 다시 문을 닫고 있다. 종교시설은 집단감염의 온상이 되었고, 공연 및 전시, 스포츠도 집단감염 우려로 취소되거나 관객 입장이 제한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필수 에티켓이 되자 이제는 마스크 쓴 사람들이 안 쓴 사람들을 혐오하고, 안 쓴 사람이 착용을 요청하는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배출할 창구들이 막히면서 분노와 우울 같은 감정들이 점점 압력을 견디지 못해, 여기저기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올 게 염려되는 요즘이다.보편적 삶의 양상들이 달라진 만큼 개인의 내밀한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나는 ‘국경 없는 세계’를 지향하며 한 해에 한 두 번씩은 꼭 외국엘 가곤 했는데, 마음껏 여행할 수 있던 시절이 몹시 그립다. 여행이 사라진 세상은 너무 뻔하고 지루하다. 이 권태를 견디기 위해 인디밴드의 공연장이나 클래식 연주회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을지로 만선호프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에 가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던 날들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헬스클럽에서 마스크 쓴 채 운동하느라 숨이 턱턱 막힌다. 외출하는 길에 마스크를 두고 온 게 생각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다. 컨디션이 조금만 안 좋아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까봐 노심초사한다. 지난해 한 매체에 경북 바닷길 기행문 연재한 것을 올해 책으로 낼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직격탄을 맞은 지역에 관한 여행서적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해 결국 무산되는 일도 있었다.가장 안타까운 것은 요양병원 면회가 금지되면서 할머니를 뵙지 못하는 슬픔이다. 고관절 골절 수술 후 침상에 누워만 계신지 4년째다. 앞을 못 보는 데다 흡인성 폐렴을 앓은 후엔 콧줄로 식사를 하기에 오직 청각이 세상을 감지할 유일한 감각이지만, 그마저도 가족들이 면회를 가 보청기를 끼워드려야만 가능하다. 며칠 전 괴로운 낮잠 끝에 “병철이!”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며 꿈에서 깼다. 할머니 귀에 대고 “할머니, 나 ㅂ, 벼, 병” 말하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힘껏 쥐어짜 겨우 외쳤다. 그런 잠꼬대는 말이 아니라 울음에 가깝다. 요양병원에 부모를 모신 이들 누구나 그런 속울음을 우는 중이다.요즘 몇 분의 공연기획자, 축제기획자, 무대감독, 연극연출가들과 함께 ‘평화의 이야기를 마주하는 작은 움직임’이라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시각예술, 다원예술, 전시, 축제, 음악, 무용, 문학 등 각각 예술 분야에서 ‘평화’에 대해 고민해보는 협업이다. 평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특히 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위협 받고 있는지, 평화를 회복하고 널리 함께 나눌 방법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연구하는 중이다. 홀로 머무는 공간에서 쓴 글을 온라인으로 전송하면 그만인 문학과 달리 공연과 전시, 특히 축제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이 필수적이다. 관객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비무장지대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음악 축제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의 김미소 총감독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국내 25개 음악 축제 중 17개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취소 또는 아예 개최되지 않았다. ‘피스트레인’ 역시 취소되었다. 이틀간의 축제를 준비하는 데 1년 가까운 시간과 상당한 제반비용, 1만 명에 달하는 인력이 소요된다고 하니 스태프와 뮤지션들, 축제를 기다려 온 관객들의 상실감이 클 것이다. 물론 안 하는 게 맞다. 코로나 극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서로 이질적 타자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자유, 평화, 인권, 소수자의 더 나은 삶, 정치적 올바름을 한 목소리로 외치고,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의 온도를 나누는 마당이 사라지는 것은, 이미 코로나에 잠식된 우리 일상은 물론 이따금 일상 밖에서 하루쯤 선물처럼 주어지던 평화마저 빼앗기는 일이다. 우리는 다시 모일 수 있을까?사실 나는 코로나 시대를 양가적 감정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이 글 내내 코로나를 원망하며 투정했지만, 나쁜 것만도 아니다. 대학 수업이 비대면 온라인 강의로 진행되면서 강의실이라는 제한적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오프라인에서는 활용할 수 없던 영상, 소리, 이미지, 자막 등을 통해 보다 알찬 수업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강사 생활 5년 만에 강의평가 최고점을 받았다. 강의평가 결과를 확인한 순간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228.56이라는 꿈의 점수를 받고 놀라던 김연아 풍으로 활짝 웃었다. 이런 얘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 보편적이기도 하다. 오프라인 수업이라는 재현 불가능한 원본이 온라인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무한히 반복되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거나 다른 공부를 함께 하거나 기숙사를 나와 고향집에서 수업을 듣는 등 학생들에게 다양한 삶의 선택권이 생겼다. 100년 넘도록 현장성과 일회성을 무기 삼아온 대학의 강력한 권위가 도전 받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코로나가 가져 온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역설적이게도 사람의 차단이다. 앞에서 한 말을 뒤집는 것은 아니다. 축제에 가는 것은 개인의 자발적 의지이지만 회식이나 회의에는 강제성이 있다. 어쩌면 사회적 격리야말로 코로나 시대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회식과 모임이 사라지고 개인이 자기 시간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공공장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안전거리’가 생겼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집단 안에 개인을 편입시키는 폭력적 스킨십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생각한다. 해병대 체험이나 단체 래프팅 따위 ‘애사심과 단결력 고취’를 위한 전체주의적 행사는 물론 ‘술잔 돌리기’ 같은 비위생적 회식문화는 진작 구시대 유물이 되었어야 했다.너무 많던 경조사들이 듬성듬성해진 것도 반가운 일이다. 황금 주말에 교통체증을 견디며 예식장에 가 축의금 내고 지루한 주례사가 언제 끝나나 하품이나 하다가 뷔페 음식 두어 접시 먹고 오는 결혼식만큼 한심한 의식이 또 있을까? 있다. 돌잔치가 그렇다. 결혼도 아이 돌도 가족들끼리 모여 기념하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꽉 조이는 색동옷 입고, 억지로 웃어 사진 찍고, 저급한 유머나 던지던 행사 MC로부터 판사봉 잡아라, 청진기 잡아라 강요받는 건 아동학대라고 생각한다. 결혼도 못하고 애인도 없는 나로서는 결혼식보다 짜증나는 게 돌잔치 청첩이다. 이참에 선언한다. 이제 안 간다!이병철 시인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간절히 돌아가고 싶다. 여행하고, 공연장에 가고, 전시를 관람하고, 축제에서 춤추던 때로 가고 싶다. 온라인 수업이 아무리 강의평가 점수를 잘 받아도 현장에서 학생들과 묻고 답하고 토론하고 싶다. 요양병원에 가 할머니 귀에 보청기를 끼우고 ‘도라지 타령’ 들려드리고 싶다. 노래방에 가고 찜질방에도 가고 싶다. 북콘서트와 낭독회에서 독자들과 만나고도 싶다. 그러면서 또 간절히 돌아가기 싫다. 회식과 회의와 온갖 쓸 데 없는 모임과 경조사와 오지랖과 훈수와 원치 않는 스킨십이 있던 시절로는 가고 싶지 않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노력하는 것은 ‘거리두기’이다. 코로나가 종식되더라도 우리 삶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 건강한 간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 필요하다. 육체의 질병보다 마음의 감염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2020-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