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오지 않는 청탁 전화만 기다리다가 하루가 끝나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일 년에 두어 편의 소설을 발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이었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먹는 일도 고심했었다. SNS에 접속하면 가까운 친구들의 소식이 와르르 쏟아졌다. 먼 나라로 여행을 간 친구, 결혼식을 준비하는 친구, 성과급으로 명품 가방을 산 친구, 바쁜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친구. 나는 그들의 숨 가쁜 시간을 바라보며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나의 일상을 돌아보곤 했다.
그날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었다. 마음이 베이듯 쓰린 순간이 찾아와도 쓰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글을 쓰는 데는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밑창이 떨어진 슬리퍼를 신고 매일같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손에 잡히는 책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노트에 끼적였다.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홀가분하기도 했다. 뭔가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았고 큰 것을 얻고 싶어 안달 내지 않았다. 넘쳐흐르는 시간을 오직 읽고 쓰는 일에만 썼다.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 꼭꼭 씹어 먹던 도시락과 근처 공원에서 만끽하던 바람의 감촉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은 어떠한가. 그때와 비교하자면 삶은 훨씬 안정되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일정한 돈이 있고 쾌적한 오피스텔에서 머물고 있으며 내 명의의 자동차도 생겼다. 고민 없이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며 고마운 지인에게 선물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당장 내일의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다. 나는 이러한 일상에 만족스러워하면서도 또 다른 걱정을 느끼고 있다. 오로지 나를 위해 쓰이던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매일 바쁘게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소유하는 물건들도 많아졌다. 사회적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것들이 생겼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조차 내 역할이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주식이나 코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만으로는 집 한 채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온종일 직장에서 일해 봐야 남는 건 하나도 없다고. 이제 겨우 남들만큼 돈을 벌기 시작한 나는 의문한다. 정말 그런가. 건강한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이 제한적이라면 우연에 기댄 일확천금을 노려야 하는 것밖에 답은 없는 것일까.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돈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냉소적인 농담을 곱씹어본다. 물건뿐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조차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요즘 사회에 만연한 듯하다.
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현대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기사를 마주한다. 대표적인 것이 프리터족이다. 자발적 프리터족은 특정한 직업 없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아르바이트로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간다.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로만 자신을 구성한다. 기성세대의 걱정처럼 그들은 단순히 게으른 젊은이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남들만큼 살아가는 것에 두지 않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골몰한다. 유한적인 삶을 그저 노동에 묶인 채 살아가지 않겠다는 신념에 가까운 것이다.
동시에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강제로 좁아져야만 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타인에게 나눠주는 다정함을 포기하는 것, 다양한 맛을 경험하는 대신에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단단한 자존심이 무너져 내려야만 하는 것.
나는 이 모든 일을 경험했었다. 가볍고 자유로운 만큼 고독하고 불안해지는 삶과 다양한 것을 누리고 무거워지는 만큼 책임과 구속이 늘어나는 삶. 어떤 것을 택할 것인지는 결국 선택의 문제다.
어제는 내 실수 때문에 자동차 범퍼가 망가졌다. 수리 센터에 가는 내내 수리비는 얼마나 나올까 전전긍긍하며 자책했다. 수리 기사님은 차 상태를 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곤 나를 향한 위로의 한마디를 던졌다. “괜찮아요. 차 끌고 다니려고 돈 버는 거죠, 뭐.” 수리를 맡기고 나오면서 나는 씁쓸한 뒷맛을 삼켰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가 고민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살아가야 했고 자의든 타의든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어깨가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