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당연한 사랑은 없다

등록일 2021-08-10 19:05 게재일 2021-08-11 16면
스크랩버튼
가스라이팅 피해자들이 하루 빨리 일상을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언스플래쉬

하늘이 맑다. 그럴 땐 커피나 차, 과일을 띄운 탄산수를 큰 컵에 담아 창문가로 간다. 느릿느릿 풍경을 곱씹어도 마음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때가 있는데,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얽힐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서 길을 잃은 경우에 그렇다.

최근엔 모르는 전화번호로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 친구였다. 오랜만에 목소릴 들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떻게 지냈느냐고 이것저것 묻기 바빴다. 내 물음은 열 가지가 넘은 반면, 그녀는 ‘다행히 나 안전 이별 했어.’ 라는 한 마디로 대답을 대신했다. 더는 어떤 말도 나누지 못하고, 엉뚱한 리액션만 하다 전활 끊었다. 그녀가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목소리를 되새기며, 안전 이별이란 말은 얼마나 이상하고 슬픈 것인지. 그녀는 어떤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친구는 오래 전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했다. 가스라이팅은 늘 대두되는 문제였으나 1970년대 이전엔 이것이 심각한 범죄로 인식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만연하고 당연했기에 그저 신체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정상인으로 치부되고 인정받기도 했다.

가스라이팅이란 1938년 연극 ‘가스등’에서 처음 나온 용어다. 극 중 남편은 집 안을 어둡게 만든 다음, 아내가 집이 너무 어둡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네가 잘 못 본거야.’로 시작해서 ‘네가 문제야’라며 아내를 정신병으로 몰아세운다. 그럼 결국 아내는 자신이 잘 못 봤다고 판단하며 무력감에 빠진다. 결국은 아주 밝은 방에서도 ‘방이 왜 이렇게 어둡지?’라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입맛대로 조종하며, 피해자 스스로 감정과 본능을 의심하게 하는 엄연한 감정 학대다. 그렇게 피해자는 심각한 우울증, 자기 결정 장애에 빠진다. 이것이 끔찍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아주 서서히 발생되어 은밀하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처음은 아주 사소하고 약한 정도로, 그러면서 서서히 피해자의 말을 듣길 거부하거나, 언어 폭력을 가한 적이 없다며 반박하거나 피해자의 말과 정신을 의심하며 최종적으론 모든 걸 부정하며 신체적인 폭력을 가한다. 피해자는 이 과정을 처음부터 지배당해오므로 결국 현재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든 결정권을 스스로 내리지 못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의 사례는 가정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식에게 헌신적인 동시에 다정한 모습을 연기한다. 그렇게 다정하고도 불쌍한 인간상을 연기하다가도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란 구실을 내세워 피해자를 억압한다. “우리 딸은 착하잖아”라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통제하는 경우나, “아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 부모 잘못이니, 내가 죽어야지.”라며 오히려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일례들이 그렇다. 물론 역으로 자식이 부모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경우도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사회적인 가스라이팅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깎아 내리면서 자신이 우월해지는 도취감에 빠진 이들은 피해자를 몰아세우며 자신이 추앙받길 원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해자를 통제하며 스스로 가스라이팅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즐긴다. “내가 널 위해 해주는 말이지만”이나, “네 소문이 너무 안 좋게 도니 마음이 아파서 하는 말이지만” 하며 피해자를 불쌍한 입장으로 만들고 자신이 영웅이 되려 하는 진부한 케이스가 그렇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성은 야생마에 끌려가는 기수의 상태라 말했다. 인간의 본능이 사고를 치면 이성은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을 합리화 하거나 수습을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본능에만 집중한다. 늘 드는 의구심이지만 본능에 충실하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는가. 다만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나누어 이성과 본성을 동일 선상에 두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궤변만 늘어놓는 비논리적인 인간이다. 왜곡과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피해자들이 하루 빨리 온전히 회복했으면 좋겠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소한 가스라이팅을 마주할 땐, 기꺼이 무관심으로 답을 한다. ‘네, 저는 먹던 케이크나 다시 먹으러 가보겠습니다’란 표정을 예의상 곁들이면서.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