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겨울이었다. 책 관련 강의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합정을 다니던 때였다. 수업 첫 날 수강생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 중 단발머리를 여성분은 가장 최근에 결혼식을 올렸다며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혼주의자였으나 마침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만나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식을 올렸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수강생들은 일순간 어떤 눈빛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이를 알아챈 그녀는 자신은 행복하단 말을 힘주어 덧붙였다.
나도 조금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저 때만 해도 결혼과 출산은 일생의 기쁨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던가. 축구선수가 고대하던 골을 넣듯, 비련한 여주인공이 완벽한 남자를 만나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동화책이나 드라마를 끊임없이 보고 자라온 나는, 결혼은 고결한 끝맺음이란 공식을 당연히 지니며 살아 왔다.
그러나 자연스레 누군가와 만나고 몇 번의 헤어짐을 겪은 뒤로는 여러 사람의 유형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홀로 존재하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생되는 가까운 이들을 보며 내 생애 결혼은 없다며 어설픈 마음을 갖기도 했다.
한달 전에 유튜브로 서새롬씨와 박재용씨의 결혼식 영상을 접했다. 영상 제목은 지속가능한 결혼식. 그들은 서울시가 무료로 제공하는 공원에서 중고로 구매한 보라색 수트와 흰 원피스를 입고선 식을 진행했다. 꽃장식이나 조명은 찾아볼 수 없었고 피아노 연주, 축가, 주례 같은 과정도 없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신부가 입장해서 신랑에게 건네는 퍼포먼스도 없으니 양가 부모님이 앉는 혼주석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혼주석엔 그들 주변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인들이 결혼 자문 위원으로 자리했다.
두 사람은 비혼주의지만 생활 동반자로써 결합을 택했다. 현재 존재하는 법적 제도에 순순히 응하여 속하는 것이 아닌 어떤 걸 원하고 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이에 따른 책임을 지며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결혼 제도는 두 사람 몫의 희생과 수용을 필요로 한다. 식을 진행하며 의례적으로 오가는 예물과 예단, 두 가족을 내 몸보다 아껴야하는 의무감, 임신과 육아 등 모든 과정이 정해진 공식처럼 뒤따른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의 결혼은 결속이 아닌 여전히 둘로 존재하며 개인과 개인이 만나 이루는 조화와 화음에 집중한다. 후에 찾아본 인터뷰에선 이성애자 여성과 남성의 단순한 결속을 넘은 지속 가능한 관계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 이 영상을 보는 내내 큰 충격을 받았다. 비혼주의인 두 사람이 만나 결합을 이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모습은 신선하고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결혼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누고만 있던 내 편협한 생각에 강력한 균열을 내는 듯 했달까.
밀레니얼 세대가 결혼을 택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돈도 없고, 살 수 있는 집도 없고, 애도 낳기 싫고, 모든 것에 책임지기 싫으니까? 그러나 정말 이러한 이유들로만 결혼을 택하지 않는 걸까? 내 인생에 결혼이라는 게 필요한 건지.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이 모든 걸 한탄 없이 책임 질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 건지. 무엇보다 한국 이성 남녀와 정상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성원만이 법적 제도에 해당된다는 것에 깊은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관습으로 굳어진 제도에서 지속가능성을 주장하는 건 누군가에겐 허무맹랑한 농담으로 들릴 수 있겠다. 그러나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결혼과 육아를 선택한단 것에 집중해야 한다.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나타낸 것만으로도 놀랍다. 그것만으로도 용기 있고 가치 있는 행보다.
현대 사회에 여러 가족 형태가 등장할 때마다 나는 이전과 다른 포용과 이해를 알게 되었다. 그건 분명 복잡한 일이지만 이 사회가 조금 더 다양해졌을 때의 풍부한 기쁨을 알게 해주었다. 가족의 의미는 나날이 확장되고 있다. 그만큼의 속도로 제도적 보완과 문화가 뒤따랐으면 좋겠다. 단단한 땅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내심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