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한파와 함께 폭설이 쏟아진 지난 6일, 제주도에서 부고 하나가 날아들었다. 제주 ‘봄 연구소’ 장경식 소장이 새해 첫 날 뇌출혈로 쓰러진 후 결국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역사나 인명사전에 등재될 수 없는 한 개인이지만, 이 땅에서 60년을 지내온 그의 삶을 공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싶다. 그는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며 특히 제주 지역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그가 지향한 ‘발전’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연대의 감각이 지역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에 봄비처럼 퍼지는 일이었다. 아내인 봄 정신건강의학과 신윤경 원장과 함께 그 봄비의 마중물이 되어 왔다.‘장경식 추모’ 단체채팅방에는 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슬픔과 위로를 나누며 고인을 추억했다. 빈소에는 대안학교인 제주 볍씨학교 학생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생전 고인이 좋아했던 노래 ‘그대와 함께 평화가 되어’와 ‘아침이슬’을 울먹이며 합창했다. 유가족들은 너무 이른 이별에 황망해 하면서도 더운 파도처럼 밀려오는 조문객들의 손을 잡고 의연하게 슬픔을 견뎠다. 청소년, 이주노동자, 영세상인, 가톨릭 신부, 스님, 작가, 교수, 음악가, 공무원 등 수많은 이웃들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발인일에는 솜뭉치 같은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장경식의 친구들’은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손에 손 잡고 하늘 향해 “안녕, 안녕!” 외쳤다. 고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지 짐작할 만하다.2008년, 아내와 제주도로 온 후 이주민이라는 제한적 위치에도 아랑곳 않고 ‘불의 전차’처럼 달리며 지역을 위한 활동들을 펼쳤다. 그가 걷어 부친 굵은 팔뚝은 척박한 땅을 일구는 개척의 호미나 다름없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활달한 생명력이 우렁우렁 넘치는 그의 호탕한 웃음은 끝내 여러 장벽과 빗장을 열었다. 아내가 개원한 봄 정신건강의원에 별도의 사무실을 두고 ‘돌봄’, ‘들여다봄’, ‘새싹이 돋는 봄’이라는 뜻의 봄 연구소를 열어 지역민들에게 인문학을 통한 마음 치유와 회복을 선물했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볍씨학교 등을 물심양면 후원하며 아동과 청소년 봉사에 힘썼다. 또 제주에 온 예멘 난민들을 향해 혐오와 적대감이 일어날 때 그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고, 지역사회 인식을 바꾸어 난민들이 안전하게 정착하도록 밤낮없이 일했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유목민’이라는 인문학 모임을 이끌며 독서와 영화 감상, 명사 초청 강연 등을 펼쳤고 그 모든 활동 안에는 반드시 토론이 자리 잡게끔 했다. 그가 꿈꾼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다양한 생각들이 막힘없이 흘러 큰 바다를 이루고, 그 바다에서 생명과 평화가 탄생하는 ‘행복의 나라’였다. 그는 물리적인 연대보다 정서적, 정신적 연대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연대를 위해 불쏘시개, 마당발, 스피커를 자처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감정표현에 거침없으며,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 센 데다 ‘투머치토커’라 때론 일부러 피해야했지만, 그는 어린아이에게도 늘 배우려 했고,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에도 귀 기울이는 열린 사람, 넓은 사람이었다.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인권운동가 서승 교수 등을 아버지처럼 모셨고, 청소년, 어린아이, 여성, 이주노동자를 살뜰하게 챙겼다. 단체채팅방 인원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그에게 신세를 졌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었다. 막걸리와 꽃과 사람을 뜨겁게 사랑한 참사람, 장경식 소장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 윤리,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이라는 비대칭적 관계를 온몸으로 살다 갔다.그는 떠났지만, 그가 수많은 이들에게 남긴 감명은 늘봄처럼 환한 빛이 되어서, 그를 기억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변의 10명에게, 그 10명이 다시 10명에게, 그렇게 또 10명, 10명씩 빛을 나눌 때, 볍씨학교 학생들이 그의 영전에 바친 노래처럼, 제주를 넘어 “온 누리 흘러넘치는 평화의 물결”이 될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안녕, 안녕!
202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