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NS에서 화제가 된 영상이 있다. 미국의 무명배우 루카스 게이지는 집에서 화상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간절함을 담아 마지막 대사 연습을 하고 카메라 테스트를 마칠 무렵, 마이크 끄는 것을 깜빡한 감독의 부적절한 말이 들려왔다. “가난한 사람들은 저런 작은 아파트에 사는군. 저 낡은 티브이 좀 봐” 당혹스러울 만도 한데 게이지는 “음소거가 되어 있지 않네요. 저도 알아요. 형편없는 아파트죠. 제가 좋은 집에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라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감독은 즉시 사과했다.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느낀다는 감독에게 게이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예요. 저는 작은 상자 안에 살고 있지만,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주신다면 우리는 괜찮아질 겁니다”라며 오히려 위로를 건넸다. 막말을 한 감독은 트리스트램 샤피로. 1966년생인 그는 루카스 게이지보다 서른 살 더 많다. 나이, 경력, 지위, 물질적 풍요와 인격의 성숙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부패한 정치권력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 있다. 어느 국회의원 후보가 티브이 연설을 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여러분을 섬기고 사랑하겠습니다” 온화한 얼굴로 연설을 마친 그는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돌변한다. “멍청한 개돼지들이 뭘 알기나 해? 이만큼 먹고 살게 해주는 걸 감사할 줄 알아야지” 곧이어 재래시장을 방문해 억울한 일을 겪은 상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 연민의 표정을 짓는 그에게 상인은 와락 안기며 눈물을 쏟는다. “제가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상인의 등을 토닥여주던 그는 재래시장을 나서자마자 보좌관의 뺨을 때린다. “더러운 것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막지 않고 뭐했어?” 썩은 오물이라도 묻은 듯 신경질적으로 옷을 터는 국회의원 후보를 보며 관객들은 씁쓸함을 느낀다. 영화 속 가상인물이지만, 현실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공직 근처에는 평생 가볼 일 없는 내게도 부끄러운 ‘막말의 추억’이 있다. 15년 전쯤인가 다니던 교회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한 바자회 겸 야외 음악회를 열었는데 내가 기획 및 MC를 맡았다. 이전에 트로트나 사물놀이를 공연했을 때는 반응이 좋더니 바이올린과 첼로 등 클래식 연주를 한 그날은 영 썰렁하고 산만했다. 연주자들이 정성껏 연주하는 동안 누구도 음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연주자들 보기 민망하기도 하고, 화도 났던 것 같다. 미성숙한 이십대 초반, 왜곡된 문화의식을 가졌을 때다. 다른 진행 스태프에게 “이런 공연은 강남 같은 데서 해야지 우리 동네랑은 수준이 안 맞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나가던 한 주민이 그걸 듣고는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항의했다. 그 즉시 여러 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해명할 것도 없는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분이 사과를 받아주어 일단락됐지만 그 말실수를 떠올리면 아직도 부끄럽다.
그 일을 통해 나는 말의 경솔함을 경계하게 됐으므로 실수도 좋은 경험이겠지만, 깨달음의 대가로 부끄러움은 평생 안고 가야 할 몫이 됐다. 한 번 뱉어진 말은 발화자의 입을 떠나도 세상에 내내 떠돌기 마련이다.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의 막말 논란이 여전히 뜨겁다.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사망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 군을 두고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걔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며 사고의 책임을 김 군에게 돌렸다. 노동자와 노동 현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 막말이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공공임대주택 공유주방 사업 논의 중 “못 사는 사람들은 밥을 집에서 해 먹지 미쳤다고 사 먹냐”라면서 임대주택 입주 대상자인 서민들을 비하했다. 얼마 전 그걸 해명한답시고 한 말은 더 가관이다. “특히 여성은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 아침을 먹지 않으려 한다”고 했는데, 그가 평소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대충 짐작이 된다.
각각의 막말마다 그럴듯한 해명을 내놓긴 했지만, 말이라는 것은 뱉어지는 순간 그 소유관계가 달라진다. 말한 사람이 말의 진의를 ‘가나다라’ 주장해도 듣는 사람이 ‘아자차카’ 들으면 그 말은 결국 ‘아자차카’가 된다. “엎질러진 말은 주울 수 없다”라든가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격언은 초등학교 때 배우는 건데, 너무 오래되어 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말 한 마디로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도, 상처와 절망을 줄 수도 있는 공직자라면 자기 말에 부드러운 깃털이 달렸는지 아니면 날카로운 가시와 이빨이 달렸는지 철저한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특히 그는 주거와 교통 등 국민의 기본 생활을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나 같은 삼류 시인의 글도 1차, 2차, 3차 교정을 거쳐야만 세상에 나오고, 막걸리 한 병을 생산하기 위해 양조장의 설비 시설은 수차례의 품질 검사를 진행한다. 변 장관 막말의 경우, “말이야 막걸리야”라는 속어는 막걸리 입장에서 치욕이다. 음가를 가지고 유치한 이름 풀이를 해보자면, 변창흠은 ‘말로 흠을 만든 사람’이 된다.
말의 진의가 어떻든 국민이 듣는 ‘아자차카’는 이렇게 풀이된다. “걔가 조금만 신경 썼으면” 운운은 “위험의 외주화 등 열악한 노동 현실을 계속 쉬쉬하며 덮을 수 있었는데 재수도 없게 노동자 하나가 사고를 쳐서는 골치 아프게 됐다”, “못 사는 사람들” 어쩌고는 “공공임대주택 입주자들은 ‘임거(임대아파트 거지)’들인데 분수도 모르고 무슨 외식을 하겠냐”, “여성은 화장을” 저쩌고는 “여자들은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한다. 화장을 안 하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그게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다. 그렇게 들리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말을 가려 했어야 한다. 말의 무서움을 알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야 한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결국 가치관과 인식의 표현이므로, 한 인간의 사고는 어떻게든 말을 통해 표출된다. 말에 나타난 변 장관의 노동인식, 사회인식, 여성인식은 공직자의 것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동안 많은 공직자들이 막말과 말실수로 몰락했다. 2008년 당시 한나라당 정몽준 의원은 “버스 요금이 70원쯤 하나?”라고 했다가 민생을 전혀 모른다고 맹비난을 받았다. 그 말실수는 정 의원의 정치 여정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서민과 괴리된 재벌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한편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 그분들이 꼭 미래를 결정해 줄 필요는 없단 말이에요. 그분들은 어쩌면 곧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돼요”라고 했는데, 노인을 폄하했다며 거센 반발을 불렀고 그 결과 정 의장은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의 아우라를 상실하고 말았다. 정몽준 의원과 정동영 의장의 말은 막말이라기보다 말실수에 가깝고, 변창흠 장관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2016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은 “민중은 개돼지”라고 했고, 이듬해 충북도의원 김학철은 “국민은 레밍”이라고 했다. 이런 게 진짜 막말이다. 무슨 이솝우화도 아니고 국민을 개, 돼지, 쥐에 비유한 상소리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두 사람의 사퇴 및 제명을 촉구했다. 변창흠에게도 똑같이 해야 하거늘 정부와 여당은 국민의 분노와 실망에도 불구하고 장관 임명을 강행했다. 변창흠의 장관 임명은 이번 정부의 도덕성과 직결된 문제다. “저쪽은 더 심했는데…”라는 볼멘소리가 이번만큼은 씨도 안 먹힐 듯하다. 변창흠 장관의 막말은 비교불가 ‘역대급’이다.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부디 정부와 여당에서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변 장관이 조금만 말에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다”고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막말도 문제지만 말만 번지르르한 것도 곤란하다. 국민들은 도덕성과 청렴성, 철학, 능력을 두루 갖춘 인사를 원한다. 대단하고 특별해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공직자가 갖춰야 할 기본 자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