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계가족이라도 주소가 다르면 5인 이상 모일 수 없는 관계로 우리 가족은 각자 사는 곳에서 따로 명절을 쇠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한 일시적 이산가족인 셈이다. 아버지는 충남 당진에, 엄마는 서울 신림동에, 결혼한 여동생은 김포에, 나는 안양에 살고,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병원이야 면회 금지라 어쩔 수 없고, 동생과 매제, 조카까지 함께 모이면 6인이 되는지라 이 또한 별 수 없다. ‘핵가족’, ‘1인가구’라는 말이 등장한 지 꽤 오래 됐지만, 1년에 한두 번 모이는 것마저 어렵게 되니 그 단어들에 함의된 고독감이 더 짙게 느껴진다.
비록 한 자리에 모이진 못하지만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있다. 이번 설에 우리 집은 명절 음식을 준비한다. 축산업을 하는 친구가 한우 갈비 10kg을 선물로 줬고, 그동안 낚시 가서 잡아온 참돔이 냉동실에 여러 마리 있다. 이 귀한 재료들을 신림동 집에 가져다주고, 재래시장서 장을 보고, 엄마가 음식 하는 걸 옆에서 도왔다. 갈비찜, 도미찜, 소고기무국, 삼색전, 나물무침, 잡채, 조카가 좋아하는 백김치 등이 완성됐다. 양껏 나눈 음식을 스티로폼 아이스박스에 잘 포장해서 아버지께는 고속버스 택배로, 김포 동생네는 운전해서 직접 갖다 줬다.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이 한 데 모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과 돈과 힘을 들여 명절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이때 가족이라는 말을 ‘식구(食口)’로 바꾸면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사전에서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한 집에서 함께”가 불가하니 “끼니를 같이”만이라도 함으로써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것이다.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 뽁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백석, ‘여우난곬족’)
가족이 모일 수 없는 설을 앞두고 시 읽는 마음이 축축해진다. 아버지한테 택배 보내고, 동생네 갖다 주고 오니 남은 내 몫의 갈비찜을 엄마는 김치통에 담아 보자기로 싸뒀다. 어디서 많이 보던 보자기가 반가웠다. 어릴 적 ‘슈퍼맨’ 흉내 내며 육교 아래서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망토처럼 목에 두르던 것이다. 엄마의 패션 스카프는 이제 음식 보자기가 됐지만 엄마 갈비찜 맛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맛있는 걸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들은 각자 사는 곳, 사는 형편에서 먹으며 가족 해체 시대에 ‘식구’의 유대를 지켜낼 것이다.
음식은 가족을 통합하고 외부 집단과 구별시키는 고유하고 내밀한 문화다. 음식의 향미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수용되는 양상이 천차만별인 주관적 감각 작용인데,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라든가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 또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의 맛은 ‘여우난곬’ 가족들에게 공통의 만족감과 유대감을 제공한다. 음식은 가족 집단의 특징적 취향을 넘어 유전 형질로까지 확장된다. 음식은 뼈와 살을 이루고, 나아가 DNA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여우난곬’ 가족들은 한 솥에 끓인 ‘무이징게국’을, 우리 가족은 한 냄비에 끓인 소갈비찜을 나눠 먹음으로써 ‘혈육’, ‘식구’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특정한 음식의 맛과 냄새는 가족의 해체 또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상황에서도 과거 온가족이 함께 지내던 시절을 재생시킨다. 오늘 저녁 한 그릇의 갈비찜은 내 어린 날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명절 음식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한 충남 당진과 서울 신림동과 김포와 안양의 식구들은 또 살아갈 ‘똑같은 힘’을 얻어 코로나 시대에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