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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적 대상화 않기

이산하 시집 ‘악의 평범성’. 최근 우리 시에서는 ‘대상화하지 않기’가 일종의 캠페인처럼 전파되는 중이다. 타자를 섣불리 시적 대상화해 시인의 주관대로 비참함이니 아름다움이니 페이소스 따위를 부여하지 말자는 것이다. 대상화에 반대하는 기조는 기성 시단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다. 그동안 기성 시들이 민중이니 양심이니 하는 윤리적 우월감, 또 미적 완결성에 대한 왜곡된 신념에 도취되어 타자를 쉽게 대상화하고, 그 과정에서 특히 여성의 신체나 약자의 고통을 미의 대상으로 사물화, 도구화해온 비윤리적 관습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젊은 시인들에게는 ‘재현의 윤리’가 창작의 중요한 기율로 자리 잡았다.지난해 출간된 시집들 중 가장 의미 있는 작업으로 이산하의 ‘악의 평범성’을 꼽고 싶다.주지하다시피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장교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법정에 선 그가 지극히 평범하고 왜소한 한 중년 남성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악은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의 표층적 함의라면, 그 심층은 보다 복잡하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실행에 그 어떤 고민이나 반성,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던 것이다. 나치 친위대 고위 장교라는 직책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그저 열심히 수행했을 뿐이었다.이산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 일상의 매너리즘과 소수적·개인적 평화에 젖어 타자와 외부세계에 가해지는 폭력들에 무감각해질 때,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절규하지 않고, 울지 않을 때, 타인의 비극마저도 정치적 성향이나 계층 이익 실현을 위해 이용할 때 악마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안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예컨대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지난번처럼’), “모두 장밋빛 꿈의 복선을 적당히 깔며 정서적 타협을 할 때”(‘멀리 있는 빛’),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새로운 유배지’)될 때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이 된다. 이산하는 5.18과 세월호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인터넷 게시물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악의 평범성 1’)이라는 것을, 그게 곧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악의 평범성 2’)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이 세계에 반복되어져 온 무수한 ‘악’을 고통스런 언어로 재현하고, 민족과 국가, 세계라는 거시 역사가 개인이라는 미시 역사에 가한 폭력들을 통시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악의 본질을 탐구한다.이러한 시적 작업에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의 피해자들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이 ‘먼지의 무게’라는 시에서 “네팔의 한 화장터”의 끔찍한 풍경, “여기저기 불길 속으로 머리들이 터졌고/ 사방으로 흩어진 뇌수를 개들이 핥아먹”는 “가난한 집의 시신들”을 묘사한 것은 ‘가난’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인간의 존엄을 얼마나 참혹히 훼손하는지 증언하기 위함이며, 풍족한 환경 속에 살면서 “시를 짓듯 죄를 짓고/ 죄를 짓듯 시를 지”은 ‘도시문명인’으로서의 자기존재를 반성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현실에 비추어 ‘나’를 성찰하게 하는 과정에서 타자의 대상화와 감정이입은 불가피한 법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밤마다 바이올린 선율이 수용소에 울려퍼졌다/ 죄수들은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위안했다./ 어느날/ 죄수들은 모두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에게는 연주가 금지된 베토벤의 곡이었다./ 모두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들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흐르던 선율이 갑자기 멈췄다./ 다음날 아침 굴뚝 옆의 교수대에/ 어린 소년과 바이올린이 매달려 있었다.”(‘마지막 연주’)와 같은 시에서도 교수대에 매달려 죽은 어린 소년의 이미지는 독자에게 전쟁의 참상을, 동일성이라는 원리로 타자를 배격하는 순혈주의의 폭력성을 생생하게 감각시킨다.미학적, 정치적 욕망보다 인간을 향한 연민, 타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쓰인 이러한 시를 ‘선한 대상화’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이산하의 시집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고, ‘마이클 잭슨을 닮은 여인’ 같은 불온한 ‘저질 대상화’ 또한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2022-02-22

퇴사하겠습니다

퇴사를 결심했다. 첫 회사이고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되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퇴사 결정을 내렸다. 회사를 그만두는 데엔 너무 많은 이유가 있지만 간단히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우선 중간 관리자의 연달은 퇴사에 1년 차 신입이 맡기엔 부담스런 업무가 주어졌다는 점이었다.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건, 과도한 업무에 대한 피로함과 압박감은 직장인으로썬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사사로운 일임을 잘 안다.그러니 회사 내 급격히 변화하는 여러 사항에도 수긍했고, 필요에 따라 야근을 자처하며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애써 왔다. 물론 이 야근이 나중엔 너무나 당연시하게 자리 잡게 되는 듯하여 당황스러웠지만.내가 견디기 난감했던 건 맡은 업무에 있어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는 결정권과 통제권이 없었단 점이었다. 보고를 위한 보고, 회의를 위한 회의, 검열을 위한 검열이 계속 되는 동안 뚜렷한 결과물 없이 시간은 지나갔다.연달은 피드백에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데 같은 공간에 있던 상사와 동료가 줄줄이 떠나가 버렸고, 겨우 남은 나는 어느덧 ‘책임자’라 불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불시에 보고를 해야 할 때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응당 나의 책임이 아닌, 나를 포함한 구조적인 문제인데도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었다.여러 어려움을 느끼면서 면담을 요청해보았지만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상호작용의 부재였다. 내 모든 요청에 대해 ‘임금을 받는 노동자라면 이 정도 업무는 감당해야 한다’는 대답을 엇비슷하게 할 뿐이었다.A에 관련된 사항을 물어봐도 위의 대답을 해줄 뿐이었고 B에 관련된 문제를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회사에선 내가 원하는 일만 할 수 없고 임금에 따라 정당한 노동을 부여해야한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지시하는 방향으로, 매뉴얼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도 안다. 이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피력하고 있음에도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창구가 미흡하고, 조직 소통이 불통일 때에 계속해서 의욕이 좌절되었다.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입사 1년차 신입사원의 퇴사율은 2010년 15.7%에서 2016년 27.7%로 상승했다고 한다. 연이어 2019년 취업 플랫폼 ‘사람인’에서 실시한 조사에선 1년 미만의 신입사원의 퇴사 비율이 48.6%로 훨씬 더 높은 비율을 드러냈다. 퇴사의 이유는 41.7%는 이직, 26.2% 업무 불만, 15.4% 잦은 야근과 워라벨 불가 순으로 나타났다.그럼 신입사원인 밀레니얼 세대가 입사와 동시에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뭘까. 나는 직장 내 세대에 따른 이해관계와 소통의 부재가 중요 요인 중 하나라 말하고 싶다.밀레니얼 세대는 역대급 취업난과 스펙 경쟁을 겪었고 이를 통과하여 취준에 성공했다고 한들 내 집 마련조차 불가능한 실패에 익숙한 세대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에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조직 시스템에 희생과 충성을 요하는 것에 대해 비합리적이라 느낄 수 있다.또한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되기에 무작정 높은 연봉을 받는 것보다는 적절한 대우와 존중 그리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곳을 우선 순위로 두는 경향이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물론 1955년에서 1963년까지의 출생자인 베이비붐 세대의 입장도 충분히 수긍해볼 수 있다. 급변하는 경제 성장을 겪으면서 이를 적응하기 위해 책임감 다해 일해 왔고, 필요에 의해 희생을 감내하며 노력에 따른 성과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어떤 한 세대를 비판하고 수긍하기 보단,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갈등의 문제만 놓고 보고 싶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입장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선 기업이 앞서야 한다.각기 다른 세대를 어떻게 인정해주고 보상해줄 것인지 구조를 재설계하여 모두의 업무 환경과 조직 문화가 조금이나마 나아졌음 좋겠다.나는 이제 겨우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뎌 아직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경험을 하며 새로운 걸 또 다시 배워 간다. 퇴사로 인해 새로운 시작 앞에 놓여 있으니 이제 또 다른 기회를 잡으러 부지런히 나아가야겠다.

2022-02-22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이 화제다. 방영 초기에는 폭력성이 논란이 되었다면, 지금은 이 작품이 ‘오징어 게임’의 위상을 이어받을 K-콘텐츠가 될 수 있을지가 화제다. 어쩌면 이런 저런 논란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논란의 핵심에는 ‘지우학’이 학생들의 모습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있다. 10대들을 재앙 속에 밀어 넣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전시하며, 그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세월호에 대한 알레고리를 차용하고 있다는 경향신문 위근우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우학’이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방식을 포르노에 비유하며 강도 높게 비판한다.위근우의 문제제기는 타당하다. 분명 작품은 개연성과 핍진성에 있어 세월호 사건에 대한 윤리적 부채에 상당 부분을 기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때문에 위근우가 해당 칼럼의 말미에서 이 작품에 대해 “디스토피아를 향한 무기력의 학습”이라 평가하는 부분은 핵심을 짚어낸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지우학’을 잘못된 재현 양상의 예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정녕 ‘지우학’은 우리 사회의 트라우마를 건드림으로써 모자란 부분을 보충할 뿐인 재난 포르노에 불과한 것일까?작품에서 ‘미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꼭 살아남으라고, 그래서 고3이 더 힘든가, 좀비가 더 힘든가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좀비보다 수능이 중요하고, 좀비에게 죽는 게 대학 못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이 캐릭터를 통해, ‘지우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극명하다. 진짜 재난은 ‘좀비’가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평범한 현실이라는 것. ‘좀비’는 비가시적이었던 구조적 폭력을 가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좀비가 없을 때에도 이들은 서로를 물어뜯고 반목하며 배제해야만 했으며, 사회는 그들에게 결과로서의 ‘생존’을 강조할 뿐 그 과정은 알려주지 않는다.같은 맥락에서 ‘지우학’이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이 지나치다고, 혹은 신파를 위한 소재로 다룰 뿐이라 평하는 것은 타당한 것일까? 자식을 구하기 위한 행동으로 인해 좀비가 되어 도리어 자식을 위협하거나, 혹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학부모의 모습은 학교폭력의 당사자인 학생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 죽음으로 내몰거나, 혹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이를 구하려 시도하는 현실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은가.더불어 학생이 같은 또래 학생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살로 내모는 장면이나, 폭력의 구조를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해 절망하는 모습 역시,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의 결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모든 장면을 신파, 내지는 고통 포르노라 일갈하는 것은, 그와 같은 현실의 일부를 도려내거나 혹은 자신이 논지에 타당한 방식으로 재현하라는 억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물론 그와 같은 재현의 방식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우학’이 그러한 사건의 재현에 있어 고심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너무 가혹하다. 작품은 분명 그와 같은 피해자의 모습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비추며 이들의 고통을 다각화하여 재현하고자 노력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렇다면, ‘지우학’은 피해자의 고통을 순간의 스펙터클을 위한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담론을 위한 이니시에이션을 시도하고 있다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음의 이야기로는 나아가지 않은 채, 서둘러 잘못되었다 말하고 단죄하기만을 원하는 것인가. 우리가 사건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은 그와 같은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성급한 일갈과 단죄의식인 것은 아닌가.문제는 또 있다. 비록 ‘지우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재현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게라도 우리는 사건을 재현하고 반성하며 계속적인 의미화를 해나가야 한다. 한 작품을 향해 “역해진다” 비난하며 대상을 성역화하여 박제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 하는 영역이다.그와 같은 반응 그 어디에 ‘더 나은 현실’을 위한 대안적 상상력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는 그 역함에 대한 해답마저도 지금, 우리, 학교에 요구하며 단지 일침을 가하는 논자로 남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칼럼리스트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 때문일까? 그와 같은 일침으로 인한 고통에 칼럼리스트는 무엇을 책임질 수 있을까?

2022-02-15

시시하고 치사한

최근 친구에게서 “회사는 자아실현을 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회사에서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생각으로 임하게 되면 상처받는 상황에 부딪히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온 힘을 다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쓸모없는 취급을 받거나 옆자리의 동료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을 때의 상실감을 견디기 위해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그렇다면 왜 회사를 다니는 거야?”내 물음에 그는 이토록 한심한 질문을 하는 것도 재주라며 혀를 츳츳 찼다. “돈 벌려고 다니지.”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던 것도 같다.“그렇지만 월급은 진짜 돈이 아니야.” 그가 덧붙였다. 회사를 다니는 이유는 돈 때문이지만 월급은 진정한 돈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묻자 그는 내가 진정한 사회인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답했다.그러니까 그가 설명하는 회사에 다니는 이유는 ‘시드머니’를 벌기 위함이었다. 정당한 노동으로 받는 돈으로는 내 집 마련은커녕 남의 집에 얹혀사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코인이나 주식을 통한 ‘한 방’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그러한 ‘한 방’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과연 그랬다. 친구는 시 쓰는 일을 사랑하는 청년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 않았다. 시를 쓰는 것보다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것이 더 돈이 되었다. 회사에서 온종일 일하는 것보다 클릭 몇 번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것이 더 돈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나는 돈을 버는 일이 무언가에 굴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숭고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제안받으면 ‘고작 이거 벌자고 이런 일을 해?’ 하고 거절하기도 했다.고고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행색은 궁색해졌으며 작은 일에도 쉽게 초라해졌다. 수많은 작가들이 예술가이기 전에 생활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경험했던 오만한 시간이었다.그 누가 돈 버는 일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을까. 타인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별 수 없이 타협하고 마는 것. 그보다 더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들이 넘쳐흐르는 것이 다름 아닌 돈 버는 일이다. 그리하여 월급날의 통장을 보면 뿌듯함보다 허망함이 앞선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할까. 더 멋있게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산다는 게 참 시시하고 치사하게 느껴진다.그럴 때면 문명의 이기가 닿지 않는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살고 싶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만끽하고 싶다.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오션뷰가 펼쳐진 호텔에 놀러 가고 싶다거나 아이폰의 새로운 시리즈를 가지고 싶다는 것과 다름없다. 안빈낙도의 삶이야말로 기득권만이 가질 수 있는 기만적인 태도다.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서 드는 돈을 듣고 입이 딱 벌어졌더랬다. 고요와 평화를 만끽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 백화점과 커피숍, 요란한 옷을 파는 상가로부터. 밖을 나서면 가장 먼저 쾌적하고 세련된 곳을 찾게 되고 무가치한 소비를 하면서도 자본주의에 비판의식을 가진다. 매일매일 이중성을 경험하고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친구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 어지러운 세계를 돌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비관하는 대신 돈 버는 일과 자아실현을 위한 일을 완전히 갈라놓는 것을 택했다. 그것은 몇 배나 힘든 싸움이지만 동시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 놓인 가련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청년 세대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희망을 꿈꾸기 때문에 각자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어느 쪽도 쉽게 판단 내릴 수 없다.요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누가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대. 코인으로 대박 난 친구는 얼마 전에 퇴사했다더라. 로또 당첨되고 싶다.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다. 아아, 머릿속엔 오직 돈, 돈 생각뿐이야. 그런 이야기에 깔깔대다가도 순식간에 우울해진다. 결국엔 또 돈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구나. 그것 참 시시하고 치사하다, 하고 끝내기엔 너무도 찜찜한 기분이다.

2022-02-15

잠자코 기다리는 일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밥을 만들 때엔, 몇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우선 요리하기 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깡그리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칼을 이용해 식재료를 다듬을 때엔 달팽이의 속도로 아주 느리게 썰어야 하고, 무언가 볶거나 구울 땐 반드시 약한 불로 해야 한다.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로 요리를 하면 반드시 다치기 마련이다. 빠르고 거칠게 칼질을 하면 손가락을 깊게 베어버리기 쉽고 잡생각에 빠져 들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데이고 만다.저녁 식사를 만드는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요리 시간이 은근 긴데다 어느 때엔 고된 노동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고 대충 끼니를 때우다 보면 빈혈이 더 심해질 게 뻔하니, 무슨 수를 쓰던 건강한 밥을 만들어 먹기 위해 부던히 노력중이다. 물론 그만큼 두 손과 팔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날이 늘고 있지만.언제부터였을까. 학창시절 별명이 고구마일 정도로 답답할 만큼 행동도 느리고 만사태평하던 내가, 지금은 모든 상황에 쫓겨 ‘빨리 빨리’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다음 열차를 타도 되지만 굳이 떠나려는 열차에 몸을 구겨 넣는다거나, 빠르게 오가는 환승 구역에서 천천히 걷는 사람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만다.씻는 것도 빨리, 먹는 것도 빨리, 업무조차 빠르게 끝내기 위해 점심시간마저 쪼개어 일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과다한 업무량과 무의미한 결과물뿐이라 현재는 나 몰라라 포기 상태에 이르렀다.대체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나는 자꾸 화가 나 있었다. 장소불문 누군가 말만 걸어도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어서, 내 꼴이 약간 우스워 보였을 지도 모른다.게다가 짧고 자극적인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이 유일한 취미가 되는 동안 날카롭고도 생소한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너무 쉽게 잊어 버렸다. 이젠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외로운 해독처럼 느껴지는데다, 읽고 쓰는 행위에 있어 떠오르는 의문이나 생각을 저 멀리 던져버리는 요령이 생겼다. 내 생활 패턴과 생각은 나날이 심플해지고 단순해지는데 어느 때엔 이게 좋다가도 어느 때엔 아득히 암울해진다.아주 가끔 글 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특히 또래의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이들을 마주하면 피해갈 수 없는 몇몇 질문들이 있는데, 그럴 때면 정말 아무 구멍이든 파고선 들어가고 싶다. 그 어떤 물음에도 명확히 대답할 수 없는데다가 이 모든 게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아무리 조심히 요리한다 한들, 예기치 못하게 생겨버리는 몇몇 개의 물집이 있다. 모두 나의 조급함에서 생겨나버린 크고 작은 상처들. 약간의 힘만 주어도 뜨거운 물을 흘리며 터질 물집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니 일단 그대로 둔다. 시간이 약이라는 간단명료한 막연함을 믿으며.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2018년 나는 원인모를 피부 알레르기를 얻었다. 단순한 자극이나 마찰이 생겼을 때 두드러기가 올라오는데, 요즘은 별 다른 이유 없이 작고 빨간 수포가 피부 위로 일어나고 있다.돌연 생긴 수포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유발하는데 이럴 때에 처방 받은 약을 먹기도 하고, 스테로이드 연고도 발라보고, 세라마이드가 함유된 차가운 로션을 듬뿍 발라 온 몸을 도배해보지만 사실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건 기다림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얄밉게 쏙 사라지고 마니까.지금 내 손에 맺혀 있는 물집들도 그렇다. 다른 일을 하다 문득 물집을 보면 이미 터져버리고선 반투명한 막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이다. 웅크려 있던 뱀이 허물을 벗고 홀연 사라진 듯이.불청객 같은 상처가 사라지고 불그스름한 새 살이 돋아난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간단하게 일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식상하고 단촐한 물집 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잠자코 기다려보기로 한다.

2022-02-08

세상의 모든 불빛

배달 대행 아르바이트를 한 지 벌써 5개월이 됐다. 일은 익숙하지만 날씨는 적응하기 힘들다. 종일 겨울비가 내린다. 우비도 챙겨 입어야 하고, 빗길 안전에도 유의해야 한다. 비 오는 날 신경 써야할 것은 또 있다. 고급 아파트 단지는 배달 오토바이의 지상 출입을 막는다. 이런 날 지하 주차장은 위험하다. 에폭시로 마감된 바닥면에 물기가 생기면 몹시 미끄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갑자기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 있다. 그러면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손님이 주문한 음식이 엉망이 된다. 특히 국물 음식은 더 조심해야 한다.절대 넘어져선 안 돼. 천천히, 두 발을 땅에 디디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울 때처럼, 엉금엉금 오토바이를 몬다. 땀인지 빗물인지 몇 방울의 물이 눈썹을 타고 뺨으로 흐른다. 차가운 겨울비와 우비 안의 열기가 섞이면서 하얀 김이 오른다. 107동 지하 현관 앞에 간신히 오토바이를 세운다. 40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나도 40층에 가야 하는데, 아마 음식을 주문한 손님이 조금 전 귀가한 모양이다.신축 고급 아파트여선지 지하까지 엘리베이터가 금방 내려온다. 40층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힌다. 40층은 처음이다. 이렇게 높은 아파트가 있는 줄 몰랐다. 아기가 자고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달라는 요청에 조심스레 음식을 문 앞에다 내려놓는다. ‘배달완료’ 버튼을 누르고 돌아서는 등 뒤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감사합니다” 마음 환해지는 한 마디. “맛있게 드세요” 속삭이듯 말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지하 2층에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40층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복도 끝에 창문 하나가 열려 있다. 창문 밖 야경을 바라본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건 이 일의 기쁨 중 하나다. 40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물기를 머금어 보석처럼 빛난다. 상자에서 마구 쏟아진 사탕 같고, 엉킨 채로 콘센트 꽂은 크리스마스 전구 같고…. 글씨가 됐다가 얼굴이 됐다가 어느 한 시절 혹은 잃어버려 그리운 무엇이 되는 저 불빛들이 애틋하기만 하다.현재 우리나라 자가보유율은 61퍼센트다. 얼마 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한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자가보유율을 80퍼센트까지 올리겠다고 말했다. 자가보유율이 80퍼센트가 되어도, 90퍼센트가 되어도, 아니 99퍼센트가 되어도 내 집은 없을 것만 같다. 10명 중에 6명이나 집을 갖고 있다는데, 왜 내 주변엔 집 없는 사람들뿐인가. 나도, 아버지도, 엄마도, 동생도 자기 집이 없다. 고철 주워 월세 보태던 할아버지는 12년 전 돌아가셨는데, 저세상에 ‘내 집’을 구하셨을까?화장한 분골더미 속에 철심 몇 개가 녹지도 않고 널브러진 걸 보며 ‘저세상에서도 방세 치를 걱정에 쇳덩어리를 지니고 가시려 했구나’ 안쓰러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없이 많은 불빛들 중 내 것은 하나도 없구나. 나는 문득 내가 데이빗 보위의 노래 ‘Space Oddity’에 등장하는 우주비행사 ‘톰 소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톰 소령은 비행선이 고장 나 캄캄한 우주를 끝없이 표류한다. 지구는 점점 멀어져 희미한 한 점 불빛이 되고, 그는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지기 직전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제 톰 소령은 망망한 암흑을 영원히 떠도는 우주 먼지, 나도 “Can you hear me, Major Tom?”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저 무수한 불빛들 중 내가 돌아갈 별이 어디 있을까 찾아본다. 불빛들이 한꺼번에 뭉치면서 윤곽 없는 색채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하 2층으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중력 없는 우주공간의 깡통우주선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다음 배달 콜이 울린다. 짧은 공상, 그리고 긴 감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갈 때다.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내게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세상 어딘가에 환하게 빛나고 있을 내 불빛을 찾아서, 나도 쏟아지듯 달려가야지. 비에 젖은 채 뭉개지는 저 불빛들을 보면서 시구 하나를 외운다. “이제 불 켜진 집에 돌아가게 허락해주십시오. 고통이신, 그리고 사랑이신 적막한 황혼의 하나님이여”(장석주, ‘완전주의자의 꿈’)

2022-02-08

왜 나의 고통에 침묵해야 하나

대다수 한국 남성의 의식 구조는 군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조화 된다. 남성의 삶은 군대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의미화 되며, 사회생활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와 같은 재구조화는 군복무 경험이 한국 남성에게 있어 치유될 수 없는 상처, 극복될 수 없는 트라우마, 돌이킬 수 없는 왜상임을 의미한다.현재 한국 사회는 군복무의 피해 당사자가 스스로의 경험을 발화하는 것을 제한한다.표면적으로 이러한 발화 행위는 군복무 경험을 특권화시킴으로써 한국 사회 내 남성 화자의 위치를 특권화 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한국 사회가 구성원의 남성성을 착취하는 구조를 은폐시키는 역효과 또한 발생시키며, 한국 남성의 젠더 이슈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합리화시키는 내적 기제를 형성하고 공유하게 만듦으로써 동성 간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군복무 경험에 대한 발화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젠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기제이기도 한 것이다.군복무 피해를 사회적 이익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인 너는 그러한 피해로부터 충분한 사회적 이익을 취했으니 그에 대한 발화를 멈춰야 한다’는 논리와 동일한 것으로, 이때 피해자는 이익의 실제적인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전제된다.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실증적인 것이 아니며, 공동체를 위해 너의 사적 피해를 공공연히 드러내지 말라는 전체주의적 태도를 대리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는 군복무 피해자를 향한 이차 가해의 한 사례일 뿐이다. 과거에 비해 군대가 편해졌으니 군복무 경험을 트라우마라 말하는 것은 과잉된 해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자. 그와 같은 논리는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고 이를 인격에 통합하는 과정에 있어 불필요한 왜곡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발언 역시 2차 가해의 한 사례인 셈이다.한국 사회에서 군복무 피해의 당사자들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정당한 의미화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동일한 경험을 한 피해 당사자들의 집단 내에서만 의미화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러한 구조 속에서조차 개인의 트라우마는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롤에 맞춰 왜곡된 형태로 의미화 된다. 동성 내 담화 속에서 개인의 트라우마는 수평 구조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역할에 기인한 수직 구조의 형태로 의미화 되며, 그러한 기제 속에서 피해자의 발화는 동성에 의해서도 다시금 제한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동성 간 군복무 경험에 대한 담화에서도 2차 가해는 발생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한국 남성은 최근의 위문편지 문제와 같은 젠더 이슈에 대해 언어를 통한 성폭력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반응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합리적 언어로 의미화 시키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격에 통합하는 과정을 원활하게 수행하지 못하여 형성된 인격의 병리적 사례라고 생각한다.타인의 언어를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남성성이 훼손되었다고 느껴 이를 회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언어를 통한 성폭력을 수행하는 구조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나 이를 군복무라는 트라우마에 따른 병리적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의견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는 한국 남성 대다수가 경험하는 자기 인식으로서의 남성성이 한국의 기형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병리적 증상임을 전제한다. 군 복무를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예정되어 있는 사람에게도 증상은 동일하게 나타난다.)위문편지 문제를 ‘단순화된’ 젠더 갈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오판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 내속된 문제를 일차원적인 젠더 갈등의 사례로 치환하여 본질적인 문제를 은폐시키며, 실존하는 젠더 갈등의 복잡성을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젠더 갈등의 복잡성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면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설정하고 이를 소비하는지, 기형적 사회 구조의 영속화에 기여하고 있는지 따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군복무로 인한 피해 경험을 왜 언어화 시켜야 하며, 어떻게 언어화 시킬 것인지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금-여기’의 군복무 피해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2022-01-25

새롭게, 더 새롭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정적으로 시청했던 때가 있었다. 목표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하는 참가자들을 응원하는 재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시기였다. 가수, 요리사, 패션 디자이너, 슈퍼 모델 등등 다양한 꿈을 가진 이들이 등장해서 저마다의 사연을 내어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 시간 소망하던 것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그 타오르는 열망은 지난한 일상의 신선한 자극이었다.라운드가 계속될수록 오디션 참가자들은 더욱 간절해 보였고 한편으론 괴로워 보였다. 짧은 시간 내에 기존의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업물을 내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기성의 틀을 깨는 새로운 발상으로 극찬을 받던 참가자가 진부하다는 혹평을 받게 되면 어쩐지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이룩해놓은 반짝이는 작업물 또한 언젠가는 식상하고 진부한 과거의 것으로 남겠구나 하는 슬픔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신선함은 영원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결국 썩어버리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새롭다는 말은 칭찬이라기보다 오히려 독에 가깝지 않은가. 찰나의 싱싱함을 붙잡고 일말의 위안으로 삼는 것은 아닌가.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어느 시대이고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도 마찬가지다. 서점가를 강타했던 ‘90년생이 온다’부터 현재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MZ세대’라는 용어까지, 이것은 새로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전언이며 일말의 두려움 혹은 기대감이다.그러나 새로움의 주체가 되는 이들을 그저 새롭다고 규정짓는 것은 일종의 속박일 수 있다. 실제로 MZ세대로 대표되는 한 연예인은 세대를 구분 짓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욕심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새로운 세대로 특징지어지는 이들은 특별하다고 취급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을 내어놓을 것을 요구받으며 그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특히 젊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의를 피해가기 힘들다. 새로운 얼굴로 세상에 나온 예술가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이며 기성세대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주기 마련이다. 더욱 발랄하게, 더욱 난해하게, 더욱 친근하게, 더욱 폐쇄적으로. 계속해서 더 새로워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며 젊음의 역할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사회가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떠밀게 된다면, 그러니까 계속해서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면, 분명 건강하지 못한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젠가를 쌓듯 높게 더 높게 허상을 붙잡고 단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릴지도 모른다.새롭다는 가치 평가 자체가 문제일까? 기존의 체계에 브레이크를 걸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이들 역시 어느 순간 자신이 가진 안정된 위치를 지키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본다.그들은 이제 전혀 새롭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기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끝도 없이 매일매일 새로워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어떠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 아니며 사회구조적으로 약속된 일이다. 그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인 약속이다. 고정된 값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새로운 것들도 언제든지 진부해질 수 있는 것이며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도 언젠가는 새로워질 수 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냉소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야말로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고 세상을 밝히는 불꽃과 같기 때문이다.그러니 세상을 규정짓는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로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는 허상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진부한 무언가가 자신에겐 새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당장의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만의 올바른 가치를 찾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많은 것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요즘이다.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기 주관을 갖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안다. 복잡하고 모호한 사색을 멈추지 않고 그 리듬 자체를 즐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이전에는 없던 놀라운 생각을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

2022-01-25

#위문편지는 이제 그만

최근 진명여고에서 군인을 향해 보낸 위문 편지를 보내 큰 논란이 일고 있다.편지 내용은 “군 생활이 힘드신가요? 그래도 열심히 사세요 앞으로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 “저도 X지겠는데 이딴 행사나 참여하고 있으니까 님은 열심히 하세요.”,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이 편지를 받아든 군 장병이 불쾌함을 느껴 해당 편지를 인터넷에 올려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했다.더 심각한 문제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해당 여학생을 찾기 위해 신원 조사를 시작했고 신상 정보를 유출한 것에 이어 SNS에 성희롱 메시지를 보내었다는 것이다.더군다나 해당 학교 졸업생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언을 가하고 있을 정도다. 문제의 본질이 위문편지가 아닌 특정 학교 비하와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는 것은 심각하게 재고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이러한 제반의 사태가 발생한 후 머지않아 서울시교육청 시민청원 게시판에 ‘미성년자에게 위문편지를 강요하는 행위를 멈춰주세요’라는 청원이 올라가 이에 동의하는 사람들 숫자가 2만 명이 넘었으며, 청와대 국민 청원에도 ‘여자고등학교에서 강요하는 위문 편지 금지해주세요’라는 글이 동의자 13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여기서 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마찰을 일으킨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누구 한편의 잘잘못을 따져들며 극단적으로 비방하며 조롱하기 보단 시대착오적인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옳은 비판을 해야 함이 우선이다.진명여고 학교 측은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국군 장병을 위한 위문 편지는 1961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해마다 이어진 행사라는 입장을 내놓았다.그러면서 원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사태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며, 앞으론 본래의 목적에 맞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는 전형적인 나 몰라라 방식의 입장문을 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전통성을 앞세우며 위문편지라는 악습을 진행한 학교측이 두 손 놓고 두어 발자국 물러나 있는 동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남녀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며 유치한 말싸움과 감정 싸움이 난무하는 동안 정작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는 공들여 외면하고 있으니, 제3자인 이들끼리 계속해서 과열화 되고 있는 이 상황이 내가 보기에는 그저 답답할 뿐이다.서울시 교육감은 이 문제에 대해 편견이 반영된 교육활동에 고려하지 못한 지점을 돌아보았다며, 해당 학생에 대한 괴롭힘을 멈춰 달란 입장을 밝히기까지 했다.해당 학생이 위문편지를 쓰게 된 정확한 이유와 사정, 그리고 학생과 학교 편지를 받아든 국군장병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사실관계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정말 확실한 팩트를 알고자 하려면 무조건적인 비방은 멈추고 진실을 바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다 싶어 당사자들의 이해 없이 제3자들끼리 악랄하게 비난하는 일은 이쯤해서 멈추어야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더군다나 위문편지라는 악습을 이젠 학교 측이 나서 먼저 끊어내었으면 한다.학계의 입장에 의하면 학교에서 군대로 보내는 위문 편지는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며, 중·일 전쟁을 시작으로 본격 강제화 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굳이 일제시대 잔재인 위문 문화를 이어오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까? 그것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한 시점으로 느껴진다.편지 쓰기는 사실 미디어가 발달된 시대에서 성장한 10대와 20대에겐 늘 어려운 숙제 같은 존재다. 글을 읽는 것도 난해한데 그것을 넘어 생판 모르는 남에게 진심이 담긴 응원의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다.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은 위문 편지라는 방식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젠더 갈등 양상을 띄지 않는, 조금 더 온전하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시대에 맞추어 고안해보아야 할 것이다.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고, 존중과 배려로 문제가 잘 해결되어 상처 받은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회복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2022-01-18

백파이프 선율 속에서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한 곳이 스코틀랜드다. 내게 스코틀랜드를 처음 각인시킨 건, 어릴 적 AFKN으로 본 미국 프로레슬링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 연주곡에 맞춰 등장하던 레슬러 ‘로디 파이퍼’였다. 그 선수를 좋아해서 사탕 봉지에 그려진 백파이프 연주자도 늘 반가웠다. 그 사탕은 초록색 바나나 맛이 맛있다.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첫 장면, 미국 사립 명문 고등학교인 웰튼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울려 퍼지던 백파이프 연주는 ‘전통’, ‘명예’, ‘규율’, ‘최고’라는 제도권의 교훈과 ‘카르페 디엠’이 끝내 어긋나는 불협화음을 암시한다. 윌리엄 월레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처절한 전투 장면에 흐르던 백파이프 선율은 내 가슴을 뛰게 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악기에 소질이 없어 금방 마음을 접었다.늘 패배하기만 하던 로디 파이퍼도, 학생들에게 ‘시인의 마음’을 가르쳤다가 학교에서 해고당한 키팅 선생님도, 키팅 선생에 경도되어 연극배우의 꿈을 꾸다 권총 자살한 닐도, 민중봉기를 일으켜 잉글랜드에 대항하다 처형당한 윌리엄 월레스도 모두 비주류다. 스코틀랜드 역사도 그렇다. 그래서 백파이프는 마이너리티의 악기, 울음 섞인 행진곡, 서글픈데 힘차고, 울면서 웃는, 저녁 황혼보다 새벽놀의 소리다.19세기 독일 작곡가인 막스 브루흐의 ‘스코티시 판타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환상곡이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무수히 많이 연주되었는데, 나는 클라라 주미 강이 성시연 지휘의 서울시향과 협연한 것을 주로 듣는다. 스코틀랜드 민요를 차용한 이 곡 4악장엔 로버트 번즈의 시에 곡을 붙인 전쟁가 ‘스코트 사람들은 월레스의 피를 흘렸다(Scots Wha hae wi Wallace bled)’가 바탕 선율로 흐른다. ‘집시의 악기’여서일까? 바이올린에서는 묘하게 백파이프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백파이프 이야기를 꺼낸 건 사실 영화 ‘분노의 역류’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순직한 소방관들의 장례식을 메우는 백파이프 행렬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소방관이나 경찰관의 장례식 운구 행렬에 백파이프 악단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한다. 이는 19세기 말엽부터 미국에 정착한 스코티시, 아이리시 이민자들이 당시 3D 업종이었던 소방관, 경찰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이다.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백파이프 선율은 미국 다문화, 다민족, 다인종 공동체를 위해 앞장서 희생해온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사람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그 헌신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인 것이다.얼마 전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 평택의 한 냉동창고 공사장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 세 분이 화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순직한 이형석 소방경, 박수동 소방장, 조우찬 소방교의 마지막 사진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짧은 휴식 시간에 검게 그을린 얼굴로 환하게 웃던 소방관들은 그것이 생의 마지막 사진임을 알았을까? 짧은 휴식 후 그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시커먼 연기와 빨간 불길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홍을 겪던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이준석 대표가 순직 소방관들의 빈소에 함께 방문하는 것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원팀’을 다시 선언했다. 빈소를 찾아 소방관들을 추모한 것은 잘 한 일이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정치적 쇼맨십을 위해 소방관들의 죽음을 이용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탓이다. 그런가하면 한 여고에서 군인들에게 조롱의 내용을 담은 위문편지를 보내 논란이 됐다. 이는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구시대적 관습을 아직까지 강요하는 학교 잘못이다. 하지만 군인들을 폄하하는 단어들이 어린 학생들에게마저 보편화된 현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마지막 장면에서 참전용사 크리스 카일의 실제 장례식 영상을 보여준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미식축구 슈퍼볼과 팝 스타들의 공연이 열리는 댈러스 카우보이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장례식, 운구차가 도로로 나서자 시민 수만 명이 성조기를 흔들며 영웅을 추모했다. 자신들을 위해 고통 속에서 삶 전체를 희생한 이에게, 단 몇 분이나마 평온한 하루의 일부를 내어주며 존경과 감사를 보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최근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가 개봉했다. 순직한 소방관들은 물론이고 경찰, 군인, 제복을 입은 모든 분들이 우리 사회의 진짜 ‘어벤저스’들이다.

2022-01-18

내가 바라는 삶

인생을 살면서 종종 길을 잃어버린 기분을 느낀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특별한 사건이 벌어져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았고 특별한 일도 없을 때, 모든 것이 평소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면 그런 기분을 느낀다. 전에는 이런 기분을 느낄 때면 친구들에게 그 기분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네가 살만해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이후론 그런 이야기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그건 한편으로 맞는 이야기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을 때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내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나?’하는 기분은 들지라도, 완전히 길을 잃고 떠밀려가고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버리곤 하니까. 오히려 그럴 때면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더욱 확고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일에 치이며 정신없이 흘러가는 지금과는 다른 삶의 모습 말이다.그때 내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하고 명료했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삶,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공부를 하고 삶을 이어가며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였다.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게 한편으로 허무맹랑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공부를 계속하고 글을 계속해서 써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이루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종종 힘겨웠던 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원했던 삶이라는 걸, 지금의 나는 반쯤은 이룬 것 같다. 적은 돈이지만 글을 쓰며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공부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완전하게 글을 쓰는 일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다른 일을 하는 비중은 점점 줄고 있으니까. 좀 더 지출을 줄이고, 삶을 소박하게 꾸려간다면 지금도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지향했던 삶의 목표에 어느 정도는 다다른 것이 아닐까 싶다.그런데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원했던 삶이라는 건 참 단조롭고 볼품없는 삶이었구나 하는 생각. 종일 집에 머물면서 타인과 마주칠 일 없이 혼자 글을 읽고 쓴다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만큼 행복하지는 않다. 그런 순간이 기쁘고 행복하게 그려질 수 있었던 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삶’이라는 사이에 숨겨진 괄호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우리는 종종 꿈과 삶의 외관을 착각하곤 한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과학자처럼 살고 싶다는 것을 착각하는 것처럼, 혹은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과 연예인처럼 살고 싶다는 것을 착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과 작가처럼 살고 싶다는 삶의 외관을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린 내가 바랐던 것은 좋은 글을 쓰려 분투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작가의 삶이 아니라, 조금의 여유를 갖고 우아하게 책을 읽고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그런 삶이었던 것 아닐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삶’이라는 선망 사이에 숨겨진 괄호는 바로 그 여유와 우아함이었을 것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내가 그때 꾸었던 것은 꿈이 아니라 타인의 삶의 외관에 대한 동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건 글 쓰는 일에서 나오는 매혹이 아니라, 내가 가정한 여유로움과 우아함에서 나오는 착각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건 지난하고 무기력하며, 패배감 넘치는 사투의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나는 내가 꾸었던 것이 꿈이 아니라 막연한 동경이나 선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원했던 삶이라는 건 다음과 같이 수정되는 것이 마땅하리라.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삶’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여유롭고 우아하게) 먹고 사는 삶’으로. 내가 길을 잃은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는 건, 그 괄호를 인식하지 못해 생긴 방향감각의 상실이었던 것 같다.이제 나의 삶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은, 그런 생각을 해야 할 시간이라는 알림 같은 것이었으리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여유롭고 우아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쓰고 싶은 글이 있는 것인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 것인지. 그 질문들 사이에서 삶의 목표를 재설정해야 할 시간이다. 나의 삶을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줄 하나의 문장을, 여유롭고 우아한 삶의 외관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걸고 싶어질 만큼 매력적인 질문을 찾아내고 싶다.

2022-01-11

1월에는 1월의 일을

1월은 이상한 달이다. 연말만큼의 설렘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각오하게 만든다. 한 해의 시작이면서 가장 조급한 마음이 드는 때이며 하루하루가 버려지고 있다는 생각에 매분 매초가 아쉽고 아깝게 느껴진다.작년을 반성하며 올해는 제대로 살아내겠다고 다짐한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문득 오늘이 며칠이더라, 하고 달력을 마주한 순간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벌써 1월이 이렇게나 지났어? 이러다 곧 2월 되겠어!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절규해보지만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째깍째깍 흘러갈 뿐이다.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염연히 같지만 12월 31일의 나와 1월 1일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차이와 비슷하다. 온몸에 덕지덕지 쌓여있던 케케묵은 먼지를 씻어낸 뒤의 가뿐한 기분.개운한 발걸음으로 찬바람을 맞을 때의 희열.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왜인지 모를 힘이 퐁퐁 솟아오른다. 어제의 나라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도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세포 구석구석을 휘감는다.어쩐지 강인한 힘을 가지게 된 것 같은 나는 신년을 맞이하면서 올해의 다짐을 빼곡하게 적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조깅하자. 빈속에 커피 마시는 일은 그만두자. 귀찮더라도 아침밥을 꼭 챙겨 먹자. 원고는 미리미리 써놓고 마감 날짜가 닥치면 괴로워하지 말자. 읽으려고 마음먹었던 작가들의 책을 독파하자. 청소와 빨래와 설거지를 미루지 말자. 자극적인 배달음식을 줄이고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섭취하자.이러한 다짐을 계획하는 순간만큼은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의기양양해진다. 그래, 이제는 정말 달라지겠어. 모두가 나의 부지런함에 깜짝 놀랄 거야. 주먹을 꽉 쥐고 허공에 흔든다. 올해만큼은 다르다고 자부하며 당차게 고개를 끄덕인다.이 굉장한 결의는 침대에 눕는 순간 모두 휘발되어 버린다. 해야만 하는 일은 어째서 미루고만 싶은 건지. 뜨끈한 전기장판에 등을 지지면서 보는 유튜브 영상은 왜 이렇게 재밌는 건지. 새콤한 귤을 까먹다가 스르르 빠져드는 단잠은 얼마나 달콤한지.눈을 떠보면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고 고요한 방 안에 놓인 건 평소와 다름없는 한심한 나 자신이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재빨리 고개를 젓는다. 이불 밖은 너무 춥고 어쩐지 온몸이 쑤시는 것만 같다. 함부로 밖에 나갔다가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손해이지 않은가.죄책감이 뱃속을 쿡쿡 찌른다. 이러다간 작년과 똑같은 한 해를 보내게 될 거라고 누군가 귓속에 속삭이는 듯하다. 잠시나마 몸을 일으켜 억지로 움직여보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영 불편하다.결국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 간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조용히 되뇐다. 아직 1월은 지나지 않았으니 내일부터는 정말 열심히 살아보자고.작년의 나도 재작년의 나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새해의 다짐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를 분명 깨달았음에도 또다시 새로운 나를 기대한다. 내년의 나도 내후년의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나를 다짐하고 몇 시간 뒤에 침대에 누워 시간을 허비할 것이다. 애당초 새해라는 건 사회가 편의에 의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시간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자조하면서.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올 한 해를 현명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어리석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지키지 못할 계획일지라도, 이뤄지지 않을 소망일지라도, 우리는 자꾸자꾸 무언가를 바라야 한다. 내가 달라지기를 기대하고 세상이 나아지기를 원해야 한다.바뀌지 않는 것들에 분노하고 덧없는 시간 속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또 일어나서 새로운 마음으로 결심하고 계획해야 한다.그렇다. 좌절은 이르다. 아직 1월이 지나지 않았으니. 후회는 2022년 연말의 내가 해야 하는 몫이다. 지금은 여러 계획을 다짐하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할 때다. 그렇게 1월이 가고 2월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결심하고 후회하고 포기하고 다시 기대하면서. 부지런히 매월의 몫을 해내다 보면 느리게 나아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2022-01-11

호랑이가 되자

새해가 밝았다.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해다. 호랑이만큼 아름다운 동물이 또 있을까? 커다란 근육질의 몸, 석양이 흘러든 주황빛 털, 묵죽을 친 것 마냥 거침없이 뻗은 검은 줄무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화톳불 안광까지…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말은 오직 호랑이에게만 유효하다. 그는 무리 짓지 않고 단독생활을 즐기며 무려 1000제곱킬로미터 밀림을 다스리는 왕이다. 코끼리, 코뿔소, 악어도 호랑이 앞에서는 한낱 잡짐승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중 호랑이만이 영웅의 이미지를 갖는다.어느 시리얼 회사 광고처럼 모두에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우리 모두 호랑이가 되자! 코로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쓰러트리고, 불황의 머리를 찍어 누르고, 불행과 불운과 좌절 따위 포효 한 방에 쫓아버리는 호랑이가 되자. 생각해보면 호랑이가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동굴을 뛰쳐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인간이 돼서 뭐 하나?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아수라장, 인간으로 살기 참 힘든 세상이 아닌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인간보다 호랑이가 되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물속의 범인 쏘가리라도 되어야겠다.호랑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시인들이 많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1794년에 “호랑이, 호랑이, 밤의 숲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어떤 신의 손 또는 눈이 너의 무서운 균형을 빚어냈을까”(‘호랑이’)라고 예찬했다. 호랑이라는 압도적 생물에서부터 장엄함, 숭고함을 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보르헤스의 시다. “한 마리 호랑이를 생각하네. 어스름은 분주하고 광대한 도서관을 예찬하고 서가를 아득히 멀어지게 하네 (…) 나는 상징들의 호랑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진짜 호랑이를 대비시켜 보네”(‘또 다른 호랑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보르헤스는 지식과 기술의 현대문명이 인간을 즉물적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을 비판하면서 체험이 결여된 상징과 상상, 유약하기 짝이 없는 합리적 이성 대신 피 냄새를 풍기며 무심하게 사냥하고, 교미하고, 그러다 무심하게 죽는 야생 호랑이의 자연 본능을 동경했다.장석주 시인은 “페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내 핏속에/ 야생의 호랑이는 살아 있다 (…) 게으름과 잡식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살아 있다/ 내 핏속의 호랑이는/ 가끔은 영감과 상상을 낳는다”(‘내 핏속의 야생 호랑이’)라고 노래했다. 보르헤스의 ‘호랑이’가 원시적 자연 세계를 상징한다면 장석주 시인의 ‘호랑이’는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도시 삶, 자본논리, 대중주의 등과 맞서는 예술가의 정신성 그리고 고독한 반골기질을 은유한다. 한편 홍성식 시인은 “다시 생겨난다면 신림동 독신가구주가 아닌 아무르 강변 어슬렁대는 호랑이로 살고 싶다. 포수 총에 맞고도 제 울음만으로 산천을 떨게 하는”(‘신림동 사람들’)이라고 기도했는데, 이는 무통문명의 보호 안에서 오히려 기쁨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잊고, 괴로움과 아픔도 모른 채 가축처럼 평온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을 향한 포효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호랑이처럼 살아야 할 이유는 많다. 어떤 상대와도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는 용맹함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끊임없이 걷고 달리고 나무를 오르며 육체를 단련하는 성실함 또한 배워야 한다. 함부로 무리 짓지 않으며 단독자로 살아가는 고고함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무엇보다 호랑이는 쑥과 마늘 먹기를 거부한 채 동굴 밖으로 나와 자기존재를 보존한 진짜 승리자다. 보편사회가 나만의 고유한 기질과 개성, 취향을 포기시키려 할 때, 참을성이니 끈기니 ‘노오력’ 따위를 강요할 때, 남들 다 하는 거니까 너도 해야 한다며 겁박할 때 우리는 호랑이처럼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획일적 가치에 종속당한 인간이 일평생 제 집과 일터를 벗어나지 못할 동안 호랑이는 무려 1000제곱킬로미터 반경에 영역 표시를 한다. 우린 협소한 삶을 벗어나 호랑이처럼 경험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새로움에 도전해야 한다.난 지금 인간이 호랑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아득한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엉뚱한 제안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모든 구속과 억압, 제약을 찢어버리자는 얘기다. 고여 있는 우리 삶의 적폐들을 날려버리자는 것이다. “나는 내 모든 것들이 찢어지는 순간, 이 세계의 썩어 있는 것들이 표표히 흩어지는 것을 본다”(이병일, ‘호랑이의 숲’)고 시인은 말했으니, 나는 새해 첫날, 영화 ‘록키3’ 주제가를 들으면서 얼어붙은 안양천변을 달려야겠다. ‘Eye of the tiger’, 호랑이의 눈으로!

2022-01-04

‘한정’이라는 유혹

2022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이들의 새로운 마음으로 원하는 목표를 세운다거나 큰 소망을 빌었을 테지만 올해의 첫 날, 나는 자그맣고 소소한 소원 하나를 조용히 빌어 보았다.최근 회사 동료들 덕분에 한정판 운동화에 푹 빠졌다. 말 그대로 한정 수량으로 출시되는 신발이라 당첨되어야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암만 돈이 많고 시간이 많아도 절대 구할 수 없는 희귀성 덕분에 운동화 공모(라플)은 MZ세대 사이에서 늘 핫한 이야깃거리다.할로윈 시즌, 크리스마스, 유명 가수와의 콜라보 제품 등 시기와 컨셉에 따라 출시되는 덕에 브랜드별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한정판 정보나 출시일을 공유하는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는 백만 명이 훌쩍 넘는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명 맘 카페에서도 발매 정보나 판매 매장 리스트를 활발히 공유할 정도다.한정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왜 이렇게 애간장 태우는 걸까.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시되어도 ‘리미티드’란 단어가 붙으면 괜스레 후광이 비치면서 구매욕을 자극하게 한다.물론 나도 처음엔 신발 하나에 그리 공을 들여 사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 괜히 더 머리 아프게 살 필요 있느냐며 코웃음 쳤으나 슬슬 한정판 운동화만의 새롭고도 묘한 매력에 빠져 들고 말았다.한정판은 브랜드를 상징하는 로고를 반대로 뒤집어 고유화 된 이미지의 틀을 깬다거나 독특한 컬러웨이를 보여준다. 운동화의 갑피, 힐탭, 아웃솔, 밑창 등 눈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 특별한 디테일이 자리하여 완성도 높은 퀄리티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간택된 이만 살 수 있단 제한을 둠으로써 소비자의 구매 심리를 자극한다.정용진 신세계 그룹 부회장 또한 라플의 유혹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지난해 8월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벼렸슴’이란 글과 함께 나이키와 미국 가수 트래비스 스캇이 협업한 한정판 운동화 사진을 공개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 신발의 출시가는 약 19만원대지만 시간이 흐른 뒤의 거래가는 190만원을 호가했다.높은 수요에 비해 한정된 공급을 유지하니 몇 가지 인기 제품은 리셀가가 꽤 높은 편이다. 한정 운동화는 통상 정가보다 2-3배는 거뜬히 뛰는 가격대로 되팔 수 있을 정도니 슈즈+제테크의 합성어인 슈테크를 행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빅뱅 멤버인 지드래곤의 사인이 들어간 스니커즈의 판매 가격은 본래 22만원으로 출시되었지만 리셀 가격은 무려 1300만원으로 판매되기도 했다.하지만 한정판 운동화를 구하기 위한 과정은 굉장히 험난하다. 우선 수시로 해당 브랜드의 온라인 스토어를 계속해서 접속해야 한다.원하는 제품 공모를 할 수 있는 날짜와 시간 정보를 알아냈다면, 해당 날에 맞추어 접속한 뒤 공지된 조건에 맞추어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선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데, 접속자가 대거 몰리다 보니 꼭 인터넷 속도가 빠른 장소에서 시도해야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겨우 운이 닿아 당첨이 되었다면 이젠 드디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 과정 또한 조금 복잡하다.우선 정해진 매장에서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가서 사야한다. 아무렴 직접 매장에 가서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응모 가능한 매장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렇게 운이 좋아 당첨되어 매장을 찾아갔다면 이젠 운동화를 수령하기 위한 기나긴 대기 줄에 합류해야 한다.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면 인터넷으로 응모했던 회원 정보와 구매하려는 사람이 일치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본인인증이 시작된다. 신분 확인 후 마지막으로 사이즈를 체크해본 뒤 드디어 수령 받게 된다. 이런 번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운동화 컬렉터가 아닌 이상 굳이 프리미엄 가격을 붙여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라플을 하나의 놀이로 인식하여 재미로 응모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나도 여러 번 응모하다 보니 조금 욕심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진 트렌드에 발맞추어 즐기고 있는 정도다. 그치만 해가 바뀌며 운의 흐름이 조금 바뀌었을 테니 당분간은 조금 기대해보기로 한다.

2022-01-04

마지막 장을 쓰는 마음

마지막 구절의 마침표를 가뿐하게 찍는 작가가 존재할까? 구상 단계에서는 분명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를 헤매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더듬거리며 지나가는 감각과 함께 한없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그렇게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작가는 계속해서 이야기의 끝을 생각해야 한다. 끝내기에는 아쉽고, 소설적 사건의 봉합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만 같고, 자신의 편협함과 모자람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도 말이다. 작품을 끝내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마지막 장을 쓰지 못한다면 작품은 미완으로 남는다. 제아무리 빼어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그것은 뛰어난 작품은커녕 완성품 자체로 인정받을 수 없다. 매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떠하든 창작자는 나름의 마무리를 기필코 내어놓아야만 한다.이따금 여러 자리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이들도 있지만 힘차게 시작했던 이야기의 완결을 도무지 지어낼 수가 없다는 고민도 적지 않다.스스로 구축한 세계에 애착을 두게 되면 허투루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거기에서 오는 미련으로 이야기를 한없이 붙잡고 있다 보면 그것은 완성작이 아니라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하드웨어 깊은 곳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소설뿐만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끝을 내는 일은 어렵다. 끝이라는, 어쩐지 발음마저도 단호한 이 단어는 냉정하고 무정하며 쌀쌀맞은 느낌까지 든다. 희망찬 포부를 안고 시작했던 일이 끝날 수밖에 없을 때의 참담한 심정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올해는 더욱 그랬다. 꿈꿔오던 것들을 펼쳐낸 이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기 일을 끝내는 상황을 목도할 때마다 마음이 시려왔다. 마지막을 결정하기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깊은 고뇌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시절의 마무리는 어떤 방식으로 지어지는 것일까 의문하면서 우리는 한 해를 보내왔다.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다. 끝끝내 함께일 것만 같았던 주변의 누군가도 언젠가는 보내주어야 할 때가 온다. 관계의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이 또 있을까. 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역시 괴롭다. 그러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찾아올 수도 있고 부스러지는 가루처럼 조금씩 천천히 다가올 수도 있다.어떠한 것이든 끝을 내는 일에는 항상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따라오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이 수반되며 상상과는 다른 자비 없는 현실이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이런 이야기가 위로가 될까. 모든 마무리는 매끈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를 해냈다는 사실이다.가수 ‘별’의 노래 ‘12월 32일’에서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돌아온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가 나온다. 온다고 약속했던 이는 결국 오지 않았고 새해가 밝았기에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 지금은 새해가 아니라 12월 32일이고, 다음날은 33일이라고, 그리하여 그가 올 때까지 영원히 12월에 남겠다는 절절한 마음을 고백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유예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그것이 일이든, 시간이든, 관계이든. 충분히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 끝을 고할 수 있었다면 삶은 이렇게나 복잡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시간을 붙잡으려는 미련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시간 밖에서 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로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들은 나만의 하드웨어에 끝도 없이 쌓여갈 것이며 막무가내로 흐트러진 관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변을 괴롭힐 것이다.다사다난했던 2021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마지막 구절을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두렵고, 아쉽고, 서운하면서도, 잘 가, 고마웠어, 다음에는 좀 더 잘 해볼게, 다시는 오지 마,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쓰는 마음으로.

2021-12-28

서툰 삶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 나의 인생을 내 손으로 망치고 말았다.’ 연말이면 매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했나. 또다시 감당하지 못할 일에 손을 대고,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보낼 따름이었지 않나.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당장 급한 일에 목이 매달려 스스로를 재촉하며 살아왔을 따름은 아닌가. 1년을 바삐 움직이고, 무언가를 마구잡이로 해치워왔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은 부러진 나의 마음이다.나의 마음은 쳇바퀴처럼 돌고 돌아서,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마음과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마음이 매일같이 빙글거린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고, 그렇다고 무언갈 하고 있을 때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빈정거리게 된다. 의욕은 그 순간 속에서 빠르게 타버린다. 정성들여 시작한 일도 어느새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일로 뒤바뀌어 있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것처럼 끝내버리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해진다. 처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단지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기만을 소망하는 무기력한 마음.처음부터 나도 그런 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엔 좀 더 의욕적인,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단지 비례의 문제에 불과할 따름인 것을. 언제고 나의 마음은 손쉽게 쏟아져 텅 비어버리고, 지금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주길 바라게 되는 것을. 마음을 가득 채워줄 그런 순간을 기다리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그때쯤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공도 감독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단지 내 삶의 관리인에 불과해져버렸다는 것을. 나는 내가 살아가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늘 내 주변에는 문제가 가득했고, 그런 문제들을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삶은 더욱 피폐해져갈 따름이었으니까. 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던 인생. 그게 나의 지난 삶이다. 딱히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지 나의 삶에는 남들도 겪는 문제들이 조금 복합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많을 뿐이다. 나보다 더 많은 문제들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손 쓸 수 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것이 단지 앎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나는 내 삶에 대해 부정하거나 빈정거리기보다는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애쓰고 싶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내 삶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지금의 내가 부러진 마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온 탓이다. 나는 왜 살아가는 가에 대해 생각했어야만 했다. 단지 관리인으로 머물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올 한 해 내가 쓴 글들을 천천히 읽어본다. 나의 마음이 부러진 지도 꽤 오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온전하지 못한 문장들과 충분하지 않은 의미들. 그건 나의 마음이 오래도록 부러져 있었다는 뜻이다. 글은 잔인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의미가 아닌, 문장의 형태로 말이다. 단단하게 끝맺지 못하고 길게 늘어져 긴장을 잃어버린 문장들을 바라본다. 이것이 나의 책임, 이것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핑계로도 갈음될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잘못이다.내년이 되어도,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의미 따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걸음을 멈출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의미라는 건 그걸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다시 소박해지고 싶다. 한두 가지 문제쯤은 누구나 안고 가는 것이라고, 모든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낼 필요는 없다고.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나쯤은 손에 꼭 쥐고 있으라고. 그것만은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부러진 마음에 마음을 덧댄다.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걸음을 멈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긴 밤을 보낸다.

2021-12-28

아버지와 부대찌개

아버지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가방공장 사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을 보냈다. 우리 집이 있었고, 옥상엔 아버지의 골프 연습 시설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엄마는 평일 오전에 에어로빅과 꽃꽂이를 했다. 그러나 IMF 사태로 아버지 공장은 부도를 맞고, 집안 곳곳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아버지가 일 년여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에어쇼 행사장에서 무슨 일을 한다며 놀러오라고 했다. 아버지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토요일 방과 후 성남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기들이 일으킨 모래바람 너머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파인애플을 꼬치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던 군것질거리를 실컷 먹는다며 마냥 즐거웠고, 아버지는 웃었다. 빨간 모자챙 아래 그 웃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돼 있었다. 머리가 굵어 아버지가 어려웠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됐다. 같이 목욕탕에 갈 수 없을 만큼 멀고 어색해졌다.아버지는 십 여 년 전 충남 당진 대호만 물가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정착했다. 된장과 청국장을 담가 팔고, 낚시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서툰 손으로 닭도리탕이나 라면을 끓여 내고, 평생 좋아한 낚시 실컷 하면서 편하게 사시는 듯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하는 날까지 나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만큼 무뚝뚝한 분이다.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이 잘 됐다. 위를 절제했으므로 식사량이 줄어 몸집이 작아진 아버지, 약해진 아버지는 아들이 감당해야 할 슬픈 풍경이다. 그해 여름 대호만에 갔더니 아버지가 전복을 넣고 옻닭을 삶아주셨다. 고기에는 손도 못 대고 국물만 뜨는 아버지, 아버지 앞이라 울진 못하고 그저 먹기만 하는 나, 내가 먹어 치운 닭 한 마리, 뼈대만 남아 앙상한 낚시 좌대, 아버지 따라 야윈 대호만 물, 먼지 쌓인 아버지 낚싯대, 햇살 내려앉은 장독대, 덜 마른 빨래, 일찍 덮어버린 에어컨, 아무것도 모르는 뒤란의 닭과 개들, 유난히 푸른 하늘, 반짝반짝 빛나는 약통… 내게 각인된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어린 나를 목마 태우던 젊고 건강한 사내에서 힘없는 촌로로 대체된 지금, 나는 빨간 모자를 쓰고 소시지를 굽던 옛날의 아버지 나이가 됐다.얼마 전, 아버지가 천안 단국대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수면내시경 검사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떤 내색을 잘 안하는 아버지는 그동안 동네 친구분과 함께 병원에 다녔는데 이번엔 추수철이라서 동행이 어렵다고, 그래서 “혹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10시면 끝날 거야” 내게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동네 친구분을 보호자로 하여 병원에 다니셨다니, 아들 눈치를 보시다니, 속상하고 죄송했다.차가 막혀 30분 늦게 도착하니 당진서 먼저 온 아버지는 노란 검사복을 입고 병원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청력이 약해져서 간호사가 묻는 말에 내가 몇 번 대신 대답했다. 혈압 재고 내시경실로 가 검사 받으실 동안 나는 수납하고 원내 약국에서 약 처방을 받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잘 부축해드리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오늘 내내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쳐보였다. 아버지를 부축하고 걸었다. 힘껏 붙잡고 싶은데 힘껏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들의 마음이다. 부축도 견인도 아닌 동작으로 아버지 팔에 손을 얹은 채 말없이 걸었다.밥 먹고 가자 하셔서, 검사 2시간 이후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먼저 올라가…” 아버지 혼자 식사하실 게 눈에 밟혀 병원 권고를 무시하고 근처 백반집에 들어가 앉았다. 아버지 입맛에 맞게 청국장이나 우렁된장을 시키려는데, 아버지가 부대찌개를 가리켰다. 햄과 소시지 같은 걸 드시는 줄 몰랐다. 아버지의 뜻밖의 취향, 세월은 흐르는데 내가 모르는 아버지가 너무나 많다.어쩌면 아들 입맛에 맞추려고 부대찌개를 시키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부대찌개를, 아들은 우렁된장을 생각하는 어긋남이 아버지와 아들의 평생이다. 지금은 어정쩡한 부축에 실린 아들의 가벼움과 아버지의 무거움 사이를 걷고 있지만, 부대찌개를 먹고 아들은 살찌고 아버지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부축하는 팔에 점점 힘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늘 그랬듯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주앉은 밥상 위에 부대찌개 끓는 소리만 들렸다.

2021-12-21

겨울의 기억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어떤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겨울”이라 답한다.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우선 눈 내리는 풍경을 마주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봄과 여름, 겨울에 미뤄둔 고민이나 일들을 한꺼번에 실행하기도 하고, 고마운 이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용기내어 보내기도 한다.그렇게 한 해를 얼렁뚱땅 마무리 지으며 새 시작 앞에서 겨우 의연한 척 해본달까. 그게 일 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절인 겨울에 내가 해보곤 하는 일들이다.눈을 보며 먹는 겨울 간식도 좋아한다. 겨울밤만 되면 속이 답답하다는 엄마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잦다. 군고구마나 옥수수, 감자 같은 걸 한 솥 크게 삶아 쟁반 째로 내어오면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가족은 금세 거실로 모여든다. 겨울 간식이 가족간의 따스한 정을 나누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고구마의 맛이 심심해질 때쯤엔 손으로 찢은 잘 익은 김장김치를 올려 먹고, 목이 막힐 쯤엔 차가운 동치미 한 사발을 들이켜 퍽퍽함을 씻어낸다. 이불 안에서 손이 노래 질 때까지 까먹는 귤의 맛도, 폭닥한 외투 속에 붕어빵을 안고 뒤뚱뒤뚱 집으로 향하는 것도 이 계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이쯤 되니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만성 비염을 앓고 있는 난 매일 코가 닳아 있지만, 그래도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무렴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겨울에 태어났단 점이다.2001년 겨울이다. 엄마는 셋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엄마는 출산 시기가 앞당겨 오자 나와 둘째를 데리고 잠시 외할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어느 새벽 급격한 태동을 느낀 엄마는 급히 나주병원으로 옮겨갔고, 어린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하자마자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럽게 울음을 쏟아냈다.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외할머니는 허벅지를 찰싹 때리더니 언니는 동생 앞에서 절대 울어선 안 된다며 쏘아봤다. 열손가락 모두 금과 옥반지를 끼고 있던 할머니의 손은 얼마나 맵고 매몰찼던지. 동생이고 뭐고 내 마음 하나 이해 못해주는 할머니가 미워 더 큰 소리로 울어대면 할머니는 애써 등을 진 채 외면했다.외할머니는 동네에서 멋쟁이라 불릴 만큼 반짝이는 옷을 즐겨 입었고 그만큼이나 흥도 많으셨다. 누가 보건 말건 기분이 좋으실 땐 춤을 추곤 하셨는데, 검정색 라디오를 이리저리 똑딱이다 보면 댄스의 시작을 알리는 시끄러운 트로트가 쿵광거리며 흘러나왔다.실크 소재의 검은 상하의를 갖춰 입고선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내밀며 나아가는 그 스텝은 어린 내가 보기엔 얼마나 난해하고 우스꽝스러웠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다 유쾌했던 어린 날의 추억들이다.외할머니는 호랑이 선생님 역할도 하셨다. 넌 이제 초등학생이니 구구단 정도는 눈을 감고서도 외워야 한다며 2단부터 9단까지 엄격히 가르치셨는데,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그 특유의 리듬감에 맞춰 낮게 외는 소리는 그때 외할머니에게 눈물 콧물 빼며 배운 것이다.추가로 전국 8도 지도를 펼쳐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경기도-평안도-황해도-함경도 순으로 한 번에 외는 수업도 들어야만 했다. 무사히 수업을 이수한 덕분인지 지금도 낯선 지명을 들을 때면 아아, 거기 경상북도에 있는 곳? 하며 직감적으로 알아맞히곤 한다. 이런 게 조기교육의 결과인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장난감이나 책 한 권 없는 지루한 일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창문을 내다보는 일이었다. 엄마는 열 밤을 자고 온다고 했고, 그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분명 동생을 품은 엄마가 등장할 거라 생각했으니까.그때부터 창문을 보는 습관이 생겼달까. 사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 몰랐지만 글을 쓰다 보니 틈만 나면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이유가 위의 경험 때문이란 걸 방금 깨달았다.눈이 잔인할 만큼 거세게 내리는 날엔 늘 크고 작은 이별이 있었다. 늘 예고 없는 헤어짐은 한 겨울 속이었고, 극단으로 스스로를 몰아 방치하는 것도 전부 극심한 추위 속이었다.거듭 돌이켜 보면 이별과 슬픔으로 이루어진 계절인데도 어쩐지 나는 차갑고 매운 바람 부는 겨울이 와야 비로소 나의 오랜 집 안에 들어선 듯하다. 다시금 떠올려보자면 분명 울적하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그것이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안다.

2021-12-21

비판하기의 책임감

타인의 장점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Pixabay 글을 쓴다는 직업의 특성상 내 글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 보았다는 인사치례 정도의 말이 대다수이지만, 개중에는 나의 글을 세밀하게 읽고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고마우신 분들도 있곤 한다. 그런 의견을 들을 때면 소중한 독자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런 지적들에 괜시리 서운한 마음이 들어 마음에 상처를 받곤 한다. 비판과 비난은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 귀는 종종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문제점을 찾아낸 후 이를 개선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비판이라면, 비난은 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힐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다. 분명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보면 둘을 구분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건설적인 비판을 가장하고 대상을 깎아내릴 뿐인 경우도 적지 않으며, 비난하듯 감정적인 표현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이면엔 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전제돼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비난인지, 혹은 조금은 감정적인 비판인 것인지를 구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비판은 수용하고 비난은 멀리하라는 건 누구든 알고 있지만, 그건 내가 나의 마음을 지킬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면 타인의 비판은 얼마든지 내 마음을 꺾어버릴 방아쇠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타인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지적인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타인의 작품에 대해 마치 폭로하듯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나의 행동이 나의 가치를 올려주기라도 한다는 듯 말이다.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런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한낱 식사를 하더라도, 그 음식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더 나은 사례를 말하느라, 그들은 종종 내가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이런 종류의 평가들은 대개 그것을 만족하며 먹는 이를 향해 “네가 제대로 하는 집을 안 가봐서 그래”라는 비난 아닌 비난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아 함께하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곤 한다.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건 비판이 단지 대상에 대한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판이라는 건, 타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다른 대상에 대해 말한다는 건 생각 이상의 책임을 요구한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점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 말을 듣게 될 타인이 경험하게 될 감정적 소요에 대한 책임.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태도와 말을 잘 정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한 것과 무책임한 것은 다르다. 굳이 일침을 날린다며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들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내가 당신의 비판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어쩌면 이런 나의 태도 자체가 굉장히 유아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지적받고 싶지 않고, 평가받고 싶지 않은 그런 아이 같은 생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더 잘할 수 있잖아’라는 식으로 무책임한 비판과 비난을 듣는 것이 때로는 나를 지치게 만든다. 왜 나는 구태여 글을 쓰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몰려올 정도로 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실 나는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근근이라도 꾸준히 잘 해나가고 싶은 것이고, 그런 종류의 비판이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한 칭찬도 때로는 구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과 작품에 대해 평가할 때면 자신에 대한 것보다 수십 배는 엄격해져 무책임한 비판을 쏟아내기 일쑤다. 마치 창작을 하는 사람보다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처럼.사람들은 때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은 감수해야 한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건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도, 앞에 나서 본 적도 없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타인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정말로 어려운 건 타인의 장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타인보다 우위에 서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자신을 증명하는 건 그 사람이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지, 쉬운 일을 반복할 때가 아니다.

2021-12-14

술 한 잔의 힘

술 마시기를 즐기는 편이다. 술에 관한 대단한 지식이 있다든가 그렇다고 소주를 궤짝으로 마시는 엄청난 술꾼도 아니기에 정말이지 ‘즐긴다’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술의 세계는 넓고 주당은 많지만 나의 식견은 짧으니 이렇게 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지. 어쩌겠는가. 감히 외쳐본다. 나는 술이 좋아.어쩌다 나는 술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집안 내력은 아니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그들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늦은 저녁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아버지가 “통닭 사 왔다!”고 외치는 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술사랑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얻게 된 후천적 결과물인 셈이다.나를 술의 세계로 인도하고 혹독하게 단련시킨 건 대학 동기들이다. 우리는 서울 아현동과 신촌 일대를 누비며 어제도 내일도 마시고 또 마셨다. 따로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 단골 술집에 가면 나의 동료들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지는 해를 보면서 건배를 외치고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귀가하던 날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어느 술집 사장님은 우리가 자리에 착석함과 동시에 서비스로 모둠 튀김을 내어줄 정도였다.그때의 나는 술보다 술자리가 더 좋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글 쓰는 청년들, 어딘가 이상하고 비뚤어진 구석이 있는 인간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찌나 재밌던지. 날이 어두워지면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과 함께 실컷 떠들면서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눴다. 술 한 잔에 낯선 이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목소리가 커졌으며 선명한 정신일 때는 하기 힘든 이야기들도 술술 흘러나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함께 술을 마시는 행위가 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술병이 쌓여갈수록 더 그랬다. 이성이 풀어지면서 드러나는 민낯은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사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벌컥 내 거나 남들과 시비가 붙는 사람, 집에 가겠다고 택시를 부르는 사람,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함께 술을 마시는 일에는 서로의 흑역사는 묻어두자는 암묵적 약속이 수반되는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행동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자면 끝이 없으니.나 역시 다양한 술버릇이 있다. 그나마 공개할 수 있는 버릇 중 하나는 극도의 감정 과잉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다지 재미없는 상대의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고 별로 슬프지 않은 일에도 펑펑 눈물을 흘린다. 눈앞에 있는 땅콩이 너무 조그매서 눈물이 나고 금이 간 소주잔의 모양에 마음이 깨질 듯 아프다. 창피한 모습이지만 널뛰는 감정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언제부터일까.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던 술자리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나 자신의 행동을 극도로 검열하게 되었으며 아무 옷이나 훌렁훌렁 걸쳐 입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들이켜는 술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주종과 관계없이 꼴딱꼴딱 잘 들이키는 편이지만 요즘에는 특히 와인을 즐겨 마신다. 계속 들이켜도 배가 부르지 않고 이렇다 할 안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좋다. 길쭉한 잔에 와인을 꼴꼴꼴 따른 뒤 입안에 잠시 머금고 목구멍 뒤로 꼴깍 넘기면 고단한 하루가 서서히 끝나는 것이 느껴진다. 술기운이 스르르 온몸을 감싸면 아,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곤 하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술을 마시니 알겠다. 온전한 정신으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두침침하게만 느껴지는 고민에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날들이 늘어간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 날에는 술 한 잔의 힘이 필요하다.항상 취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술기운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던 나는 다음 날이면 다시 소심하고 무력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취기로 걸었던 전화를 후회하고 상대에게 뱉은 말을 자책하며 내가 아닌 내가 한 약속에 발목이 잡힌다.그럼에도 아직 술 한 잔은 내게 여전한 위안이 된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골라 담는 맥주와 샤워를 마친 후에 마시는 와인, ‘요즘 일 때문에 힘들지? 저녁에 만날까?’ 친애하는 친구에게 오는 연락이 가진 위로의 힘이 소중하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한 잔의 술을 마신다. 내일의 나는 나약할지라도. 일단 지금은 건배.

2021-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