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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혐오해도 마땅한?

피터 스완슨의 소설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서 주인공 릴리는 말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생명이 너무나 많다. 나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빈번하고 무고한 이들은 피해를 본다. 법은 약자를 완벽하게 보호하지 못하므로 누군가가 직접 나서서 단죄해야 한다.” 릴리는 심판자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살인을 실행한다. 그녀가 살해하는 대상은 무고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저질렀으며 도덕적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그 때문에 독자는 릴리의 행동을 마음속으로 은근하게 응원하게 된다.소설은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일부 사람들은 타인에게 세상에서 사라지라고 발화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며 분명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여긴다. 나아가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기 자신이 그들을 단죄하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대상을 향해 멸시의 시선과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그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한다.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감정이며 이를 토대로 전염이나 오염의 상황을 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혐오 감정이 위험 요소가 없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게로 투사되면서 본격적인 문제가 된다.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순식간에 오염물로 치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시선만이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인 가치가 개입된다.사회적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혐오를 떠올려 보자. 그들은 시스템과 구조의 대변인으로 존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을 향한 혐오 표현은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하기 쉽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문제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로도 난도질당하기 마련이다. 상대를 혐오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저 혐오하는 행위 자체가 동기가 되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최근 연예인들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며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는 연예 기사면의 댓글 기능을 없애기도 했다.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명인은 마땅히 자리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늙었다, 멍청하다, 못생겼다 등 혐오에 근간을 둔 표현을 적절한 비난이나 비판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인터넷을 떠나 현실에서도 혐오 표현이 범람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효과를 본다. 그런 점에서 혐오 표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과는 분명히 구분된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혐오는 인간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이것이 혐오의 가장 무서운 점이다. 대상이 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그저 오물과 같이 취급한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원한다. 더럽고 불결한 것들이 사라지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판단한다. 쓰레기가 모조리 사라진 완벽하게 깨끗한 거리를, 청결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혐오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특정 집단과 사람을 배척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등의 끔찍한 비극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겨주었다. 증오와 폭력, 배제와 방관은 답이 될 수 없다. 고통을 고통으로 갚아주는 것, 혐오자를 혐오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우리는 세상의 문제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한다. ‘나’와 구별되는 ‘너’, ‘우리’가 아닌 ‘그들’이 상정될 때, 나의 반대편에 있는 집단은 열등하고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치부된다. 나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상대편은 그렇지 않다. 이렇듯 선을 긋고 편을 나누는 것은 검열에 의해서다. 검열에 의해 결함이 생긴다. 납득할 수 없는 결함을 가진 타자를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밀어내게 된다.혐오를 통해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일은 쉽다. 그리고 게으르다. 감정을 지탱하는 근거 역시 지극히 애매하고 추상적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혐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상대에게 가하는 하나의 폭력으로 끝날 뿐이다.그러니 ‘우리’라는 개념을 넓혀야 한다. ‘나’로부터 시작된 이해가 집단과 인종, 국가를 넘어 지구적인 공감까지 확장될 때 우리는 모두 비로소 존엄성을 가진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성실함이다.

2021-04-26

20대가 선생이다

서울·부산 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야당인 국민의힘 후보들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후보들에 압승을 거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박영선 후보에 57.5대 39.18로, 박형준 부산시장은 김영춘 후보에 62.67대 34.42로 이겼다. 이로써 국민의힘은 비록 1년여의 짧은 임기지만 우리나라 수도와 제2도시의 시장을 배출했다. 이번 선거가 내년 대선의 전초전 성격임을 감안하면, 여당이 국회 180석을 차지한 압도적 여대야소 정국에서 야당의 대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지난 9년 동안 박원순 3선 시장이 재임한 서울은 유권자들의 진보 성향이 강한 도시다. 작년 총선에서 지역구 총 49곳 중 41곳에 민주당 깃발이 꽂혔고, 2030세대가 몰표를 주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선 2030세대의 표심이 야당을 향했다. 특히 20대 남성의 72퍼센트가 오세훈을 선택했는데, 진보 진영은 문재인 정권의 여성우대정책에 ‘이남자(20대 남자)’들이 분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일부 지식인들도 거기 편승해서 20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한다. 틀려도 한참 틀렸다. 그렇게 어리석으니 선거에서 진 것이다. 어리석은데 교활하다. 20대 남성들을 여성에 열등감과 질투심이나 갖는 졸장부로 만들면서, 남성과 여성을 갈라치기해 지지 세력을 다지려는 속셈이다. ‘우리가 남이가’로 지역감정을 정치에 끌어들인 김기춘과 뭐가 다른가? ‘저쪽이 그랬으니 우린 안 그래야지’가 국민들이 민주당에 기대한 상식인데, ‘저쪽이 그랬으니 우리도 그런다’로 화답했다. 이게 패배의 이유다.20대 남성들은 왜 야당을 지지했을까? 야당을 지지한 게 아니라 여당을 심판한 것이다. 20대 여성들의 51퍼센트는 박영선에게 표를 줬다. 20대 여성들은 왜 여당을 지지했을까? 여당을 지지한 게 아니라 야당을 심판한 것이다. 20대는 진영에 투표한 것이 아니라 정의에 투표했다. 최선도 차선도 없고 최악과 차악만 존재한 선거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차악에 표를 던진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보기엔 국민의힘이 차악이고, 여성들이 보기엔 민주당이 차악이었을 뿐이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세월호 참사 당시 또래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성세대의 무능한 민낯을 똑똑히 목격한 세대다. 몇 개의 계절 동안 “진실을 인양하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박근혜 국정농단에 맞서 추운 겨울 내내 촛불로 광화문을 밝혔다. 군복무에 성실하고, 여성의 주체성 확장과 소수자 연대, 동물권 신장, 저탄소 환경보호에 앞장서는 세대, 그러면서 학점관리하고 영어공부하고 자격증 따고 고시 준비하며 스펙을 쌓는 세대, 이처럼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더불어 사는 것을 실천하는 세대, 하지만 취업도, 결혼도, 작은 방 한 칸도 감히 꿈꿀 수 없는 세대, 다 포기해야 하는 세대가 20대다.20대는 자기 밥그릇이 위태로워졌다고 분노한 게 아니다. 어른들이여, 특히 40대 ‘젊은 꼰대’들이여, 20대 청년들은 당신들과 다르다. 20대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세대라 폄하하는 것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20대는 밥그릇을 두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게 만든 불공정과 불합리, 비상식에 분노한 것이다. 조국 전 장관 부부의 자녀 입시비리 문제,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 변창흠 국토부장관의 노동자 비하 발언, 거듭된 주거 정책 실패와 김의겸, 김상조, 박주민, 손혜원 등 고위공직자 및 여권 인사들의 부동산 논란,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 당시 나타난 ‘국가’라는 이름의 전근대적이고 낡은 감수성, 박원순, 오거돈, 안희정의 성추문과 피해자에게 가한 2차 가해,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사태까지….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세력이 그래선 안 된다고, 이번 선거는 20대가 부끄러운 어른들을 준엄하게 꾸짖은 ‘기성세대 각성’의 교실이다.그러니 부디 20대에게 배우라. 철부지들이 아니라 당신들의 선생이다. 케케묵은 진영논리 대신 공정과 정의, 양심을 선택하는 세대, 보수와 진보 따위 이데올로기 대립 너머 상식과 올바른 가치를 위해 그 무엇과도 싸울 수 있는 세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 아무리 캄캄해도 오직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노력들로 자기 생을 밝히며 저마다의 간절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세대, 개인의 주체성과 자기감정을 분명히 나타내면서도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는 세대, 앞선 세대가 이루지 못한 성숙하고 세련된 근대 시민…. 모두 20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2021-04-19

보복소비와 양극화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며칠째 600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 4차 대유행의 초기 단계로 들어섰고 경기 침체는 계속해서 지속되고 있지만 이와 다르게 명품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 최근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2조4000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프런(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을 서거나 뛰는 행위)을 해야 겨우 제품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적지 않은 언론매체가 이런 현상을 여러 차례 보도한 바 있다.TV나 냉장고 등 값비싼 가전제품의 구입 또한 전년도 대비 눈에 띄게 늘었다. 삼성전자는 1분기 영업이익에서 9조3천억 원의 예상 초과의 실적을 기록했다. 중고차 판매와 수입차 판매량 또한 역대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최근 여의도에 서울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많은 인파가 몰렸다. 개장 1시간 전부터 인근 도로가 정체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백화점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었고, 잇단 감염자 확진에 입장객을 감축하는 방안이 세워지기도 했다.이에 비해 마트에서는 최저가 경쟁에 불이 붙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창고형 할인 매장에 인파가 몰리고, 온라인 유통업계 또한 최저가 경쟁과 신규 회원 이벤트 등을 펼치며 나서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생활비 절약이나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노하우 영상이 조회수 1.9만을 기록할 정도다. 생필품 시장에서는 최저가를 선호하며 소비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계속되는 고용난과 실업자 증가로 인해 심각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자영업자의 회복은 여전히 더디다. 집 근처에 있던 가게도 하나 둘 씩 문을 닫거나 때에 따라 영업을 하지 않는 날도 늘었다. 일용직 일자리센터를 지나갈 때마다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 청년 취업난으로 인해 자격증 학원에 몰리는 젊은 인파를 보며 이와는 반대로 명품을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 있거나, 유명 관광지나 꽃나무 주변에 너나 할 것 없이 돗자리를 펴고 5인 이상 모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급여와 일자리가 유지되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의 양극의 차별은 더욱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MZ세대의 ‘플렉스(flex)’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기이한 문화 현상도 눈에 띈다. 플렉스는 힙합 문화 중 하나로 자신의 성공이나 귀중품을 과시한다는 의미로,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값비싼 소비로 이어지는 현상이다.한국은행과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30세대의 재무적 목표에 대한 질문에 답변자들은 61%의 선택으로 주택 구입을 위한 재련 마원을 꼽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청년 고용 불안정과 고용난, 부동산 자산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 상실감으로 인해, 청년들은 ‘플렉스 문화’에 눈을 돌려 명품 구입이나 단순 소비 욕구를 택하고 있다.유행처럼 번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과 욜로(YOLO)문화 또한 현재의 만족감과 개인의 행복에 의미를 둔다. 주택 구입, 취업, 결혼 등 미래의 불투명함을 생각한다기보단, 일상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삶을 즐겁게 살려는 욕구에 치중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소비형태는 교묘히 바뀌어 점심시간 포장 용기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유행에 맞춰 계절마다 구입하는 옷, 시즌마다 구입하는 텀블러와 리유저블 컵, 패션 아이템으로 전락한 에코백, 손쉽게 허기를 채우는 배달음식 등 단순하고도 빠른 소비 형태로 이어진다. 손쉬운 소비는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코로나로 인한 플라스틱 용기 사용 증가와 일회용 마스크 증가는 이미 심각한 환경 문제로 대두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이한 문화 현상으로 인해 전염병이 확산되었지만, 개인위생을 위한 일회용품 사용과 마구잡이식 보복소비로 인해 또다시 심각한 환경오염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이상 기후 현상은 전 세계 곳곳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사하라 사막은 수년간 눈이 내리는 이상 기후를 겪고 있다. 아열대 기후인 대만은 급작스러운 한파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처 대처하지 못하여 피해를 입은 이들은 대부분 노인이었다. 이 멈출 수 없는 굴레에 인류가 있다. 인류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제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2021-04-19

‘왜’를 기억한다는 것

무슨 일을 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이유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가 해 나가다 보면 다른 욕망이 끼어들게 된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겠다며 취업을 했는데, 나보다 앞서 나가는 동료들을 보며 조급해진다.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소홀해져버린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교육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일이라며 교사가 되어서는 대기업 다니는 친구의 연봉을 부러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만나기만 하면 주식이나 가상화폐같은 이야기만 늘어놓곤 한다. 돈 벌어서 세계여행 가는 게 소원이라더니 힘들게 번 돈이 아까워서 못 간다는 친구도 있다. 모두가 처음 그 일을 시작할 때 마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고, 불행하다.나는 분명 즐거워서 음악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기타를 메고 홍대 놀이터나 이대 앞 공터 같은 곳에 나가 앰프도 마이크도 없이 매일 노래를 불렀다. 팁 박스라도 하나 가져다 놓았다면 간혹 천원짜리건 만원짜리건 넣어주는 이들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팁을 주면서 신청곡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청곡을 부르는 것보다 자작곡을 부르고 내 이야기에 호응하는 사람들을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었다.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없진 않았는데, 이름을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게 간절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다른 욕망이 끼어들기 시작했다.“너는 언제 뜨냐?”“네 노래는 언제 노래방에 나오니?”“너도 뜰 수 있을 것 같은데...”“이제 슬슬 TV에도 나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한 해 한 해 갈수록 그 목소리들은 점점 커지고 많아졌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넘기던 나도 나중에는 그런 말들에 부담을 느꼈고, 언젠가부터 마치 그 ‘떠야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내 욕망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그 무렵 한창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 불었다. 슈퍼스타K, K-Pop 스타, 보이스 코리아 같은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이 하늘을 찔렀고, 스타도 많이 배출해내던 시절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가보라고 부추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 주입된 ‘떠야한다’는 욕망이 나를 오디션 프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오디션에서 예선탈락만 반복하던 어느 날, 드디어 TV에 출연하게 되었다. MBC ‘위대한 탄생 3’의 최초 예선을 통과하고 드디어 방송 오디션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어느 작가는 내게 따로 제작진이 기대하는 바가 크니 오디션을 잘 보라고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이미 슈퍼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방송 촬영 당일, 나는 처참하게 탈락하고 말았다.“너무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들으면서 화가 났어요. 정말 그냥 뜨고 싶어서 나온 것 같아요.”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용감한 형제’의 심사평이었다. 그 독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뜨고 싶어서 나왔냐는 말이 백 프로 사실이었으니까.그날 많이 울었다. 단지 오디션에서 떨어져서가 아니라, 뭘 해도 뜨지 않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음악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무렵, 편도선 수술을 받고 입원을 했다. 목이 아파 노래는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음악과 멀어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실에 누워 잠자고 책읽기만 반복하다가 지겨워 휴대폰 어플을 뒤적거렸다. 예전에 깔아둔 피아노 어플을 발견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건반을 누르고 놀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욕심이 생겨 곡을 하나 쓰기 시작했고, 끝내 곡을 완성했다. 시간을 보니 두 시간이 훌쩍 가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올렸다. 음악이 이렇게 재미있었다고. 나는 그래서 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 뜨기 위해 음악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그때 그만두지 않았던 것은, 그리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때의 기억이다. 유명해지고 싶고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야 여전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재미있어서 음악을 시작했다. 그것을 망각하자마자 음악을 하는 게 힘겨웠다. 여전히 재미만 있다면 계속 해 나갈 이유는 충분한 것인데, 그것을 망각한 채 다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다.여전히 내 귀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들리고, 다른 욕망들은 언제건 마음을 단숨에 잠식해버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처음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던 기억, 그리고 병실에서 곡을 만들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의 나와 마찬가지로 왜 그 일을 시작했는가를 잊고 괴로움만 남은 채 일하는 친구들에게도 그런 기억들이 문득 찾아가길 바란다. 어쨌거나 우리는 행복해져야 하니까.

2021-04-12

개인의 시대, 불안과 함께하기

결혼을 앞둔 친구를 만났다. 직장생활 7년 차에 접어들었다는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듯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긴장 속에서 끝마친 상견례와 주고받은 예물, 예단, 어렵사리 계약한 신혼집의 위치와 남편 될 사람에 관한 이야기들. 헤어지기 직전, 친구는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딱히 괜찮지 않을 것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내가 걱정이라고 했다. 미래가 불안하지는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누군가에게 내 인생은 유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나는 2019년을 프놈펜에서 보냈다. 거기에서 소설을 썼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고향에서 지냈다. 사교활동이나 일을 하는데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내 생활을 좌지우지할 만큼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인터넷이나 전화로도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 가능했다. 그런 생활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나다. 소속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유로웠고 동시에 불안하고 위태로웠다.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장을 가진다. 그곳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약속된 월급을 받는다. 이러한 조직의 형태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과거에 비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코로나19의 여파로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장소에 제약을 받지 않고 일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하나의 직업을 가지지 않고 다양한 일을 개척하는 잡(Job)노마드나 파트타임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프리터 등도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직장에 고용되지 않고 일하는 자발적 프리랜서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조직사회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가 창출하기를 자처하며 삶을 디자인한다. 기업에서 원하는 학벌이나 토익점수, 자격증에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찾고 그것을 노출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회사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어 만든 콘텐츠를 내보인다. 우리는 주변에서 플랫폼을 통해 투자자를 찾는 크라우드 펀딩이나 단독으로 일하는 1인 크리에이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근무 체계에서는 조직의 형태가 흐려지고 오롯이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게 된다.개인의 역량이 중요해졌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하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직의 보호 아래에서 일을 분담하는 것과는 다르다. 업무적인 실수는 곧바로 개인의 무능과 연결된다. 감당하기에 벅찬 중대한 일 역시 오롯이 혼자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게다가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우리의 경쟁 대상은 인간을 넘어 로봇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벌써 그렇다. 키오스크로 대체되는 단순 노동 일자리부터 인공지능, 자율주행, 블록체인 등 첨단 기술 데이터까지. 조직이 만들어놓은 틀을 그대로 따라가면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개인이 해낼 수 있는 생산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누구나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능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따르지 못할 수 있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은 이렇듯 연약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이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사실 불안이라는 것은 회사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말이 아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생산을 종용하며 결국 일종의 무대만 바꾸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는 전언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은 태초부터 어쩔 수 없는 불안함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두려움을 물리칠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안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것이다.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세상 밖으로 나온 우리는 사회가 녹록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테다. 길을 잃고 실수도 할 수 있다. 그럴수록 두려움과 손을 잡고 자신의 고유한 길을 완강하게 걸어가면 된다. 불안을 딛고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1-04-12

밟고 가라, 밟고 가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군대 이야기라고 한다. 3월 26일은 천안함 피격 11주기였다. 천안함 피격 사건 재조사를 두고 일어난 논란에 대해선 이 지면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생존 장병들은 패잔병이 아니라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불편해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꼭 군대 이야기를 해야 한다.내가 군 복무를 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박왕자씨 피살 사건’,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있었고, 그때마다 분단 현실이라는 비극에 대해, 또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천안함이 침몰하기 17개월 전인 2008년 10월, 나는 육군 장교 생도로 영천 3사관학교에서 유격훈련을 받고 있었다.어둠 속으로 하나 둘 스러졌다 다시 나타나길 반복하는 동기들의 뒷모습은 마치 유년의 기억들처럼 손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한나절 영천댐의 숨결을 빨아들인 밤안개가 입김을 뿜어내고, 별들은 캄캄한 하늘에서 눈을 부라렸다. 습기가 등골을 따끈하게, 때론 서늘하게 하던 자정 무렵, 쇠닻마냥 무거운 발걸음은 69번 국도에 간신히 끌려가고 있었다. 이미 유격훈련 입소 행군에서 60km를, 또 훈련 2주차 산악 행군에서 사흘간 90km를 걸은 우리에게 80km의 복귀 행군은 처절한 싸움이었다.열 시간쯤 걸었을까. 행군 초반의 패기는 사라지고, 행군을 격려해주던 영천 시민들도 모두 잠든 밤. 육체의 고통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낙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멀리 보이는 불 켜진 집들의 온기, 동기들과 함께임에도 문득 내려앉는 외로움, 엄마… 갈증보다 더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었다. 무뎌진 발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행군 대열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비틀거렸다.발바닥에 가득 잡힌 물집이 통증을 온몸에 전송했고, 완전군장의 무게는 점점 육체와 정신을 짓눌렀다. 포기하고 싶었다. 낙오자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를 인솔하던 훈육대장이 대열 중간까지 왔다. 나는 일부러 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훈육대장을 바라보았다.“힘들면 열외하고 차에 타라”라는 말을 기다리는데, 훈육대장이 입을 열었다. “힘드나?” 우리들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발에 물집이 잡혀 걸을 수가 없나?” 웅얼웅얼, 대답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제 “힘든 인원은 뒤로 열외해라”라는 훈육대장의 한마디가 나올 차례, 그러나 기대가 여지없이 깨진 순간, 나는 뭐랄까, 정신의 벼락을 맞은 듯했다.“밟고 가라, 밟고 가!”그 음성을 아직 잊지 못한다. 무언가 뜨거운 게 가슴에서 솟구쳐 올라 결국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 눈물이 진주알보다 귀한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동기들을 바라보았을 때, 어둠 속에서 시커먼 위장크림을 칠한 얼굴들이 전부 눈에 횃불을 밝혀두고 있었다. 훈육대장의 그 외침이 행군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군 생활, 그리고 살아갈 모든 날들 동안 우리 앞에 나타날 숱한 장애물과 함정, 가시밭길 앞에서도 망설이지 말고 밟고 가라는,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밟고 나아가라는 요청임을 다들 알았던 것이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천안함 장병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천안함 피격 소식을 들었을 때 ‘최후의 5분’이라는 군가가 맴돌았다. “숨 막히는 고통도 뼈를 깎는 아픔도” 다 견디며 “버티고 버텨”주기만을 간절히 바랐지만, 46명의 청춘들은 끝까지 싸우다 스러졌다. 매년 3월 26일이면 천안함 희생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올해는 ‘서해 수호의 날’과 함께 치러졌다. 그런데 천안함 용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는커녕 정쟁과 진영논리의 장이 되고 있다. 추모제니 재조사니 하는 ‘형식’보다, 하찮은 정치적 입장 따위보다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이라는 ‘내용’만 청년 세대에게 기억됐으면 한다. 화염에 싸인 조타실 안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키를 놓지 않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처럼 청년들이 캄캄한 현실의 절망을 돌파해내고자 한다면 그 용기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추모가 될 것이다.LH 투기에 허탈감을 느낀 청년들이 비트코인 시장에 몰려 ‘한탕’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죽음과 싸운 장병들에 비하자면 오늘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문제들은 한 판 붙어 이겨볼 만한 것이다. 나는 나에게, 청년들에게 외치고 싶다. 절대 낙오하거나 포기하지 말자고, “밟고 가라, 밟고 가!”라고.

2021-04-05

내 안의 가장 가까운 혐오

‘비혼모 출산 부추기는 공중파 방영을 즉각 중단해주세요!!!’ 지난 3월 25일 국민청원에 위와 같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현재 방송인 사유리 씨는 자발적 비혼모로 공중파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자발적 비혼모란 결혼 없이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한 것을 말한다. 청원의 내용은 이렇다. “비혼모를 등장시켜서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에게 비혼 출산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라는 일본 여자를 등장시키려 하고 있습니다.”방송인 사유리 씨의 출산 방식이 올바른 가족관이 아닌 비정상적이며 청소년이나 청년의 비혼자 출산을 부추긴다며 공중파에서 출연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모호하다. 국립국어원의 사전에서는 정상을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말한다. 또는 ‘있어야 할 상태에 바로 있는 것. 또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사전적 의미의 정상은 그대로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대로 있는 상태라는 뜻은 대상의 위치를 뜻하는 건지, 대상은 정확히 무엇인지 의미조차 모호하다. 때문에 정상과 비정상이 아닌 ‘이상’과 ‘비이상적’이라고 판단하는 게 더 올바르다.비혼모 출산을 두고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염려하는 의견도 많다.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며 부재한 가장의 자리에 결핍을 느껴 늘 자신감 없는 아이로 자란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여기서도 부모 중 한쪽이 부재하는 삶은 불행할 것이라며 섣불리 판단한다. 아이를 이끌어줄 수 있는 역할에는 ‘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아이가 혼란을 느끼는 데에는 혼란을 부추기는 어른의 시선과 입장뿐이다. 아이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면 정상 가족에 대한 프레임을 걷어낼 수 있도록 앞선 어른들이 노력해야 한다.정상적인 가족은 무엇일까. 단순히 부모-자식 간의 3~6인을 유지한 구성 형태가 정상 가족일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체벌, 학대, 과거로부터 당연시되어 왔던 희생, 억압, 규칙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정말이지 가족이라는 관대한 이름 아래에 용서와 화해는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것일까.몇 달 전 처음 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뜸 한 사람은 내게 부모의 존재 여부와 직업, 본가의 위치를 물었다. 가족 구성원의 여부에 따라 나는 딱하거나 딱하지 않거나, 온전하거나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됐다. 낯선 자리에서 가족을 묻는 이들은 가족의 형태에 매달린다. 동시에 가족사 없는 집은 없다며 그 안에 일어나는 희생과 결핍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많은 이들이 가족이라는 형태가 유지되기까지의 소외된 이름을 묵인한 채 가족이라는 타이틀 앞에선 한없이 연약해진다.세상엔 많은 형태의 가족이 있다. 조립식 가족, 비혼모 가족, 다문화 가족, 동성 부부, 반려견·반려묘 가족 등 다양한 모양의 가족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다. 자신이 속해있지 않은 범주 바깥의 존재는 모두 비정상적이라고 무차별적으로 비난할 순 없다. 다양한 형태로 가족을 이루는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사유리 씨는 자신의 삶과 아이를 택했다. 한 사람의 충분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아이는 가정의 형태와는 무관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올곧은 삶을 살 것이다. 혐오와 배제가 만연한 비이상적 사회가 두렵다면, 당장 스스로 해보아야 할 것은 조금씩 자신을 다듬고 고쳐 세상을 다시금 바로잡아 보는 것이다.나 또한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차별과 실수를 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더욱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나의 생각이 내가 만든 편협한 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보고 살피며 불공정한 것에 대한 목소리를 올바르게 내야 한다. 한 사람이 옳은 방향을 정립하여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을 존중하고 인정한다면 전보다 조금 더 나은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2021-04-05

너의 MBTI가 궁금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으레 나누게 되는 말들이 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등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저런 것을 묻고 답한다. 혹자는 ‘호구조사’를 하는 것이냐며 냉소를 보내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행동이 상대를 향해 손을 내미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대의 일면을 파악함과 동시에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컨대 중앙동에 거주한다는 말을 들으면 “아, 거기에 슈크림 빵이 맛있는 제과점 있잖아요”와 같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소소하고 작은 공감이 조금씩 쌓여가면서 서로를 향한 친밀도가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요즘은 이 ‘호구조사’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된 것 같다. 상대의 MBTI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MBTI 성격유형 검사는 꽤 이전부터 밀레니엄 세대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잠깐의 성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관심은 지금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청년층 사이에서는 이 검사를 안 해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인간을 판단하는 과학적 근거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MBTI는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성격 유형 검사 도구이다. 12분 이내에 주어진 질문에 따라 답을 내리게 되고 그에 따라 개인을 16가지 심리 유형 중 하나로 분류한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자신의 MBTI가 무엇인지 알려주면 단번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상대가 자신을 ‘ENFP‘라고 한다면 그는 외향적이고 직관적이며 감정적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시도하는 전망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나요?” 혹은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한 편인가요?” 같은 질문을 하는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요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의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이런 현상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MBTI 테스트가 유행하기 전, 우리는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개인의 성격을 규정짓곤 했다. A형은 소심하고, O형은 활발하고, AB형은 종잡을 수 없이 독특하다는. 혹은 황소자리는 고집이 세고, 물병자리는 지적 호기심이 많다는 식으로. 거기엔 과학적 근거가 없지만 우리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왜 우리는 자꾸만 자신을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일까? 자기 존재를 타인과 분별할 수 없이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우리는 평생에 걸쳐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골몰한다. 그건 너무도 관념적인 일처럼 여겨진다. 당장 눈앞의 먹고사는 문제와 비교하면 사소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일이다. 그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꼭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존재에 관한 질문을 간직하고 있다.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낸다. 살면서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것은 삭제할 수 없다. 그것이 바보 같고 멍청한 일일지라도. 나라는 사람을 임의로 규정짓고 거기에 따라서 내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꼭 필요한 일이다.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엇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나와 같은 유형의 동료가 있다는 건 감정적 유대를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문을 품게 한다. 짧은 질문과 답으로 개인을 완전하게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양한 문학 작품은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생물인지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분명하고 환한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갈지 모른 채 표류하는 인간들을 보여주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모호한 결론에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존재라고 말이다.그러니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정의 내릴 필요는 없다. 그건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두는 것이 된다. 그보다 내 안에 다양한 면이 있다고 인지하고 그에 관해 얘기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관계란 상대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가까워지고 싶은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런 질문도 좋겠다. 당신은 어떤 날씨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먹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는지. 타인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건 알면서도, 매번 무력하게 미궁 속에 빠질지라도 말이다.

2021-03-29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올 초엔 내내 우울했다.가깝게 지내던 K형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형은 마흔을 앞 둔 나이에 암을 발견했고, 일 년 정도 병마와 싸우다 잠들었다. 누구의 죽음이 슬프지 않겠냐마는 형의 죽음은 유독 안타까웠다. 삶을 마감하기에는 너무 젊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동안 너무나도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형은 의사였다. 뒤늦게 시작한 의학전문대학원 시험 준비가 좀 오래 걸린 편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한 번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국가고시에 매달리고, 고되다는 전문의 과정을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엿한 의사가 되었고 재작년에는 사람 좋고 능력도 있는 분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그 고생을 해서 의사가 되었으면 사치도 좀 부리고 이래저래 으스댈 만도 한데 형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초창기에 나온 스마트폰을 십 년 씩이나 쓰고, 차 욕심이 없다며 버스와 지하철을 고집하다가 끝내 300만원 짜리 중고차를 하나 샀다고 자랑을 하던 사람이었다. 생전 멋 한 번 부릴 줄 몰랐고, 비싼 술 한 번 먹으러 가자고 이끄는 일도 없었다. 나는 도대체 형은 의사 월급 어디다 쓰는 거냐며, 그 돈 쌓아뒀다 도대체 뭐할 거냐고 놀리곤 했다. 원하던 바를 이룬 뒤에도 성실하고 검소했던 사람. 누구도 형의 찬란한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그런 형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을 때 형을 아는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공부에 이십대를 통째로 바치지도 않았을 거고, 공부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누릴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며 지냈을 텐데. 그랬더라면 이렇게 떠났더라도 조금이나마 덜 아쉬울 텐데. 그런 생각에 나는 더 깊이, 오래 속상했다.몇 해 전에도 나는 가까운 형을 한 명 잃었다.S형은 얼마 전 떠난 K형과 비슷한 나이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S형의 삶은 K형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른 나이에 모두가 부러워 할 만 한 직장을 얻어 순탄한 생활을 했지만, 형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결국 형은 모두의 ‘미쳤다’라는 이야기들을 외면하며 퇴사를 했고 마음껏 배우 생활을 했다. 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그래도 회사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간 것이 그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두 형의 삶과 죽음이 내게 던지는 메시지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당장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데 미래를 위한 투자나 희생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가끔 주변 친구들의 앞날 걱정을 들어보면 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금방 마흔이 되고 시간은 점점 빨리 가니까 또 금세 쉰이 될 텐데, 만약에 그때 더 이상 우리를 찾아주는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기술 없는 노년의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래 봐야 몇 가지 안 되고, 그러니 사람들은 그 직업들을 향해 모여들어 치열하게 경쟁할 텐데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돈을 모아 자영업을 해도 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고, 그렇게 망하면 또다시 그 경쟁 속에 던져질 것이 분명하다. 혹시 모를 노후를 위해 일찌감치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 둬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자격증을 따야 나이가 들어서도 일을 할 수 있을까. 행사장으로 가는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농담처럼 시작한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우리 둘 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나는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다.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일 따위 하지 않고 지금 당장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즐기며 사는 삶이 정답인지, 아니면 혹시 모를 미래를 미리 착실하게 대비해가며 살아가는 삶이 정답인지. 애초에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지금 내게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2021-03-29

불의와 부정의 낙수효과

150년 역사의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난 2019년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2017 월드시리즈 당시 우승팀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전자기기를 사용해 상대팀 사인을 훔쳐 타석의 타자에게 전달한, 일명 ‘사인 훔치기’ 내막이 2년 만에 들통 난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더그아웃 내 전자기기 반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인 훔치는 것을 비신사적 행위로 간주한다. 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메이저리그를 넘어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 방법의 교묘함과 비열함 때문이다. 전광판에 숨겨둔 고성능 카메라로 상대 포수 사인을 찍은 후 더그아웃에 몰래 설치한 티브이로 송출, 그리고는 양철 쓰레기통을 두들겨 타자에게 투수의 다음 공이 변화구인지 직구인지 소리로 알려준 것이다. 이 속임수가 만천하에 까발려지자 단장, 감독, 코치가 옷을 벗었고, 선수들은 사기꾼, 범법자, 배신자라는 비난 속에 경기를 치를 때마다 상대팀 투수로부터 빈볼을 맞는 신세가 됐다.부정하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이익을 얻는 모리배들은 메이저리그 말고도 어디에나 있다. 선생님 심부름하러 교무실에 갔다가 시험 문제지를 미리 보고는 백점 맞은 초등학생이야 따끔하게 훈계해 버릇을 고치면 되지만, 대입 시험이나 공모전 등에서 인맥과 돈을 이용해 출제 문제를 빼내거나 심사자를 회유하는 입시 비리는 도무지 근절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기업의 핵심 기술을 경쟁사에 넘겨주고 대가를 받는 산업 스파이, 군사기밀을 외부에 팔고 방산비리를 저지르는 군 장교와 군무원들도 있다. 증권가 내부에서 캐낸 정보로 서민 투자자들을 모아 한몫 크게 챙기고 빠르게 손을 뗀 애널리스트들 때문에 재산을 잃고 가정이 파탄 나고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부당 편취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양산한다.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온 이들의 시간과 노력과 꿈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그들을 절망에 몰아넣는 최악의 ‘인간 실격’이라 할 수 있다.집단적 ‘인간 실격’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내부 정보망을 통해 신도시 계획을 사전 입수, 개발 예정지의 토지를 대규모로 사들인 투기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인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와 정확히 반대되는 불평등, 불공정, 불의 앞에 국민들은 분노와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다. 정부 합동조사단은 조사 결과 20명 정도의 직원이 투기에 연루된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는데, 그 말을 믿는 국민은 드물다. “니들이 암만 열폭(열등감 폭발의 준말)해도 난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다니련다. 이게 우리 회사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니들도 우리 회사로 이직하든가”라는 한 인간쓰레기의 조롱 글에 담긴 사고방식이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 다수가 가진 ‘LH 멘탈리티’, ‘LH DNA’라고 생각하면 한심하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가 ‘혜택’이자 ‘복지’로 자리잡은 기업문화에서 투기 연루자가 20명에 불과할까?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에 달할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이번 ‘LH 스캔들’은 임기 1년을 남긴 문재인 정부의 명운을 쥐고 있다. 공사 해체에 준하는 강력한 엄단이 있지 않는 한 문재인 정권은 불평등, 불공정, 부정의 시퀀스를 남긴 채 페이드아웃 되고 말 것이다. 정권 이미지 쇄신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 우려되는 건 불의와 부정의 낙수효과다. 얼마 전 대형마트 정육 코너에서 일하는 친구와 술 마시다가 “한우 좋은 부위 있으면 가격표 싸게 붙여서 좀 줘봐” 했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규정상 안 된다고 하자 나는 “야, LH 애들 해먹는 거에 비하면 고기 좀 싸게 먹는 건 장난이지. 우리는 그런 거라도 해먹어야 되지 않겠냐?” 우스개로 한 말이었지만, 이 사회가 정직하게 최선 다해 노력해봤자 협잡꾼들에게 다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정직이니 노력이니 양심이니 하는 가치들을 휴지조각처럼 구겨버릴 사람은 나 하나 뿐이 아니다.사인 훔치기로 우승팀은 갈렸어도 승리한 휴스턴 선수들이나 패배한 LA 다저스 선수들은 다 고액연봉 받고 잘 산다. 스포츠는 양쪽의 정직한 노력과 열정이 서로 맞부딪는 경쟁일 때 아름답다. 그래봤자 삶의 축소판일 뿐이다. 삶이라는 싸움과 감히 그 규모와 치열함을 다툴 수 없는 작은 놀이터에 불과하다. 그렇다. 이건 삶의 문제다. 투기로 인해 삶이 추락해 산산이 부서지는 이들의 이름이 ‘국민’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2021-03-22

새로운 세상으로 접속, 메타버스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조 바이든 대통령은 닌텐도 기반의 게임인 ‘모여봐요 동물의 숲’에서 선거 유세를 펼쳤다. 바이든 섬으로 놀러가면 그의 캐릭터가 있었으며, 방문자는 총 다섯 가지의 지지 팻말을 받을 수 있었다. 선거 유세를 게임 플랫폼을 통해 펼친 것은 이례적으로 처음이었다.미국 유명 래퍼인 트래비스 스캇은 게임인 ‘포트나이트’를 통해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했다. 동시접속자 1천230만 명을 기록하며 게임 속 판매 굿즈 금액으로 2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창출했다. 동시에 콘서트 이후 음원 이용률 25% 상승하는 성과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이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펼친 곳은 가상공간인 ‘메타버스’에서 이루어진것이다. 메타버스는 가공, 추상을 를 뜻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Verse)’의 합성어를 뜻한다. 메타버스는 1992년 공상과학작가인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러쉬’ 소설을 통해 처음 등장했다. 이 작품에서 ‘아바타’라는 용어가 거론되었고, ‘메타버스’는 가상의 아바타로 들어갈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뜻했다.2003년에는 ‘스노우 크러쉬’에 영감을 받은 ‘세컨드라이프’가 등장했다. 세컨드라이프는 현금으로 환전할 수 있는 사이버 머니가 존재했고, 사업을 구상하여 사이버 머니를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모바일로 주도권이 넘어갔고, 속도가 느린 점과 단조로운 콘텐츠로 인해 2년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이후 3D, AR/ VR의 발달과 5G의 등장, 대형 화면이 일반화됨에 따라 최근엔 양방향으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메타버스가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다. 또한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의 일상이 제한되면서 메타버스 속으로 새로운 경험과 욕구가 확장되었다. 최근엔 순천향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생이 아바타로 등장하여 참석한 가상 입학식이 열리기도 했다.사실 AR과 VR의 기술은 10년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현재 주목받는 메타버스는 단순한 가상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메타버스 플랫폼들은 현실과 공존할 수 있는 생활 공간으로의 기능을 일부 갖추고 있다. 가상 현실에서의 일부 활동으로 실제 경제활동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현재 메타버스 세계가 활발히 구축된 곳은 게임과 엔터테이먼트 분야다. 모바일 기기와 소셜미디어에 익숙한 MZ세대는 이미 메타버스 세계를 자유롭게 즐기고 있다. 일명 ‘초통령 게임’으로 알려진 ‘로블룩스’는 미국과 한국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로블룩스의 특징은 높은 자유도와 유저와의 연결성이다. 그저 마우스 클릭 몇번으로 블록을 쌓아 화려한 건축물을 쌓고, 세계 유명 도시를 지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블록 놀이를 하는 듯한 이 게임은 블록이 부족하거나, 없어지거나, 더는 만들 공간이 부족하지도 않다. 애니메이션이나 음악, 게임을 제작하여 게임 내 유저들과 공유하며 즐기며, 게임 프로그래밍과 옷 판매를 통해 수입을 창출한다.국내에서도 비슷한 플랫폼으로 네이버 ‘제페토’를 볼 수 있다. 제페토는 2018년 8월 출시되었으며 2021년 현재 약 2억 명 이상의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제페토는 사용자와 닮은 캐릭터를 생성하여 표정과 몸짓, 패션스타일까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그들은 학교나 매점, 공원 등 제법 잘 갖추어진 공간에서 문자나 음성, 이모티콘으로 소통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화나 상황극을 통해 일상 브이로그나 제페토 드라마 영상을 만든다. 놀라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 콘텐츠의 흐름을 주도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다양한 브랜드에서도 MZ세대가 모여드는 메타버스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게임 내 구찌 빌라를 신설하여 신상품 컬렉션을 선보였다. 한 달 만에 방문객 130만 명을 기록했으며, 콜라보를 통해 MZ세대가 가장 선호하는 브랜드 1위로 꼽히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구글, 마인크로소프트 등 현재 수많은 기업이 메타버스 세계에 주목하고 있다. 앞으로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렌즈나 안경 하나로 가상 현실에 접속하여 다양하고 질 높은 콘텐츠를 소유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콘텐츠를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용자가 콘텐츠를 만들고 메타버스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에서 더욱 무궁무진한 성격을 띤다.현재는 메타버스 세계가 한정적이고, 현실과 가상세계가 완벽하게 이어지진 않았지만 앞으로 어떤 콘텐츠로 채워질 것인지 기대된다. 이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영향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2021-03-22

브레이브 걸스, 그 역주행의 의미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국내 최대의 음원사이트에 들어가 음원 차트를 확인해보았다. 1위를 달리고 있는 곡은 오랜 음원 강자 아이유의 곡도 아니고, 빌보드차트를 수놓은 BTS의 곡도 아니다. 다소 생소한 걸그룹인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발매된 지 4년이나 지난 이 곡이 갑자기 역주행 하여 음원차트 1위까지 차지한 것은 뜬금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2011년 데뷔한 브레이브 걸스는 지난 10년간 단 한 곡의 히트곡도 내어 놓지 못한 그룹이다.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도 이들이 꾸준히 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군 위문 공연이다. 4년 전 발매된 롤린이라는 곡으로만 국방TV의 ‘위문열차’ 프로그램에 출연한 영상들이 유튜브에 공개된 것이 33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를 가리지 않고 백령도부터 후방부대까지 4년간 무려 33개 부대를 방문하여 공연을 펼친 것이다.그러다보니 국군장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되었고, 노래와 안무를 따라하는 것이 선임으로부터 후임에게 ‘인수인계’되기를 반복하며 우스갯말로 ‘밀보드(밀리터리+빌보드)’차트 1위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수많은 위문공연을 반복하면서도 무대 하나 하나를 결코 허투루 하지 않는 것이 브레이브 걸스의 매력이다. 모든 무대에서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질 만큼 활짝 웃으며 국군장병들에게 뛰어난 무대 매너를 보여주곤 했다.이러한 과거 무대 영상들이 최근 들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힘든 군생활의 활력소가 되어 준 그들에게 이제는 자신들이 보답할 차례라며 수많은 예비역들이 그들의 무대영상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타고 대중들에게 확산되어 어느덧 몇몇 영상들의 조회수는 각각 수백만에 이르게 되었다. 데뷔 후 10년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던 탓에 해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브레이브 걸스는 롤린의 역주행으로 인해 뜻밖의 전성기를 맞게 되고 각종 매체들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브레이브 걸스와 그들의 노래 ‘롤린’의 역주행 소식이 인상적이고,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까지 와 닿는 이유는 이것이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묵묵히, 열심히, 즐겁게 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그것을 최고의 미덕이라 배워왔지만 실제 사회가 어디 그러한가. 성실하게 꾸준히 해온 사람들의 성공담을 들어본지 오래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야기는 노력보다는 재빠른 판단으로, 주식이나 비트코인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는 부정과 비리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신도시 개발이 예정되어 있던 시흥과 광명의 땅을 미리 사 두었다는 LH 직원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얼마나 허탈하게 만들었던가.투자와 투기의 가치가 커질수록 노력의 가치는 하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부동산 가격이 치솟아서야 성실하게 노력만 해서는 평생 집 한 채 가져보기 어렵게 되는 것이고, 노력의 가치가 하락하는 바람에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서툴게 투자시장으로 진입해 쓴 맛을 보고 마는 것이 흔한 이야기이다. 성실함과 꾸준함만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 동화 같은 이야기가 브레이브 걸스를 통해 실현되는 광경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그래서 더 반갑고, “그렇지, 세상이 이래야지.”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 성공의 공정함을 우리는 알기에 더욱 그들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2021-03-15

노력과 성공 사이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실 나는 외계의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닐까.지구라는 행성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게임의 목적은 캐릭터가 얼마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생을 마감했느냐에 있다. 게임의 유저는 캐릭터의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경험치를 올린다. 언어를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고, 그러다 보면 직업이 생기고, 소중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은강이라는 캐릭터는 조금씩 성장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것이 행복은 아닐까, 어렴풋하게 알 때가 되면 팝업창이 뜬다. ‘이쯤에서 게임을 종료하겠습니까?’ 유저가 ‘YES‘ 버튼을 누르면 나의 존재는 소멸하는 것이다.이런 실없는 상상을 지속할 수는 없다. 현실의 나는 억지로 침대 밖을 빠져나와 세수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가끔은 너무 글이 쓰기 싫어서 엉엉 울기도 한다. 공과금과 보험료는 무섭도록 정확한 날짜에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날씨가 흐린 날에는 몸 구석구석이 쑤신다. 너무나 지쳐버린 어느 날에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나 너무 힘들어. 어서 빨리 이 게임을 종료해줘!” 하고 외치고 싶다.당연하게도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체 나는 왜 살아가는가.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수 세기를 걸쳐 철학자들이 골몰했던 이 주제는 2021년에도 유효하다.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에 관해 묻곤 한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대답이 주를 이룬다. 돈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좌표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아이들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친다. “노력해야죠.”‘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인터넷 밈이 유행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개개인의 노력을 강조한다. 밤을 새워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꼬드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존재가 불평등의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노오력’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룬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노오력’으로 만들어낸 부와 명성을 그들의 자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세습하고 있다. 그 모습은 희망찬 미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던 청년들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최근 ‘롤린’이라는 노래로 4년 만의 역주행에 성공한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를 보면서 나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의 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면서 무명이던 이 걸그룹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조명됐다.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노력하는 사람은 결국 빛을 본다’는 은근한 소망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그렇다면 ‘노력=성공’이라는 완벽한 공식은 가능할까. 세상의 모든 일이 노력한 만큼의 정확한 보상이 돌아온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는데 왜 빛을 보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충분히 유의미하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을 뛸 때 단 세 가지의 목표를 상정한다. 골인하는 것, 걷지 않는 것, 그리고 레이스를 즐기는 것. 그는 스스로가 정한 목표를 향해 충족감을 가지고 달려간다.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오래 능력과 활력을 유지하는 모습에 자기만족을 얻는다.우리는 오늘도 하루라는 트랙을 달린다. 다른 사람보다 멀리 나아가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적어도 걷진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불어오는 봄바람을 온몸으로 느끼자.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2021-03-15

Everything will be Ok

미얀마 전역에서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군부는 유혈진압에 나서 비무장한 민간인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현재까지 3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난 3일, 미얀마 제2도시 만달레이의 시위 행렬 속에는 19세 여성 치알 신(Kyal Sin)도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댄서로 활동하는 꿈 많고 씩씩한 소녀였다.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와 총탄이 빗발치는 사선에서 검은색 바탕에 하얀 글씨가 프린팅된 셔츠를 입고 왼손에는 코카콜라를 쥔 채 군부를 규탄했다. 그녀는 끝내 군부의 총격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피 묻은 셔츠에 적힌 ‘Everything will be Ok(다 잘 될 거야)’는 평화를 염원하는 저항의 문구가 되었고, Angel(에인절)이라는 영어 이름을 지닌 신은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신은 자기 죽음을 미리 알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녀는 2월 28일 페이스북 계정에 혈액형과 비상 연락처를 남기며 자신이 사망할 경우 장기와 시신을 기증해달라고 적었다. 지난해 11월 8일 생애 첫 투표에 참여한 뒤 ‘투표 인증샷’을 올리며 “나의 첫 투표.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내 나라를 위한 내 의무를 다하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2월 11일에 작성된 게시물이다. 신은 ‘Justice for Myamar(미얀마의 정의를 위해)’, ‘Save Myanmar(미얀마를 구하소서)’, ‘Democracy(민주주의)’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길게 말하지 않을 거야! 아빠 고마워요. 이 한 마디만”이라는 글을 남겼다. 사진 속 아버지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딸을 막는 대신 옳은 신념을 향해 나아가는 딸의 손목에 저항의 상징인 붉은 끈을 매어주었다. “다 잘 될 거란다 딸아”, “다 잘 될 거예요 아빠”KTX 열차 내에서 마스크를 벗고 햄버거를 먹은 여성이 화제가 됐다. 방역수칙을 지켜달라는 승객의 항의에 “천하게 생긴 게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알아?”라며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논란이 커지고 비난이 거세지자 사과했지만, 씁쓸함은 가시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받고는 왜 다짜고짜 아빠부터 내세운 걸까?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는 평소 딸에게 “다 잘 될 거야. 아빠가 다 해줄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몸은 컸어도 정신은 유아기에 머문 ‘어른이’가 된 것이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제 아들이 연세대 원주의대 해부학교실의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연구조교수가 아닌 조교수) 순천향대 의대를 졸업하고, 아주대 의대에서 제 도움으로 의학박사를 받았습니다. 1989년 9월생이므로 만31살에 조교수가 된 셈입니다. 이제 집안에서 정 교수라고 부르면 두 사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만화가 의사’로 알려진 아주대 해부학과 정민석 교수가 지난 1일 트위터에 올린 천박한 글이다. 이런 한심한 아버지가 있으니 ‘수저계급론’ 따위 정신병이 시대를 좀먹는다. 자식 자랑하려고 놀린 펜이 도끼가 돼 제 발을 찍었는데, 아버지의 논문 다수에 아들이 ‘제1저자’로 등재된 것이 알려지며 ‘아빠 찬스’를 넘어 특혜를 의심받는 중이다. 꼴사나운 자식 자랑 글을 황급히 삭제했지만 논란은 또 다른 데서 터져 연재한 웹툰의 저급한 성희롱, 여성 비하 내용이 문제가 됐고, 성매매 계정 팔로우 의혹도 제기됐다. 지금 ‘정 교수’는 칩거한 채 ‘정 교수’에게 “다 잘 될 거다 아들아”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Everything will be Ok’의 잘못된 사례들을 보면서, 자기 영달과 이익만을 위해 사는, 졸렬한 세습과 상속에 매달리는 이들을 생각한다.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을 고슴도치 부모들에게서, 또 부모 찬스에 기대는 의존성 인격장애자들에게서 빼앗고 싶다. 삶 앞에 부끄러운 부모 자식들이여,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치알 신의 피 묻은 셔츠를 보라.미얀마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국제사회의 관심과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한다. 하늘로 올라간 천사 치알 신과 미얀마 국민들에게 인사하고 싶다. “Everything will be Ok.” 다 잘 될 겁니다.

2021-03-08

사실과 가상 사이, 딥페이크의 덫

최근 SNS에서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았다. 그런데 사진 속 눈, 코, 입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게 아닌가. 늘 멈추어 있던 유관순 열사의 눈이 두어 번 깜빡이더니 순간 맑은 빛이 어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오며 옅게 웃는 듯한 모습이 실제 눈앞에 마주한 듯 생생했다.윤봉길 의사의 얼굴은 더욱 생동감 있어 보였다. 광대뼈가 움직이며 고개가 돌아가기도 하고, 눈동자가 위아래로 흐르기도, 닫히는 입술은 곧은 결의를 보여주는 듯했다.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움직이는 독립 열사의 영상은 모두 딥페이크(Deepfake) 기술이 사용된 결과물이다.딥페이크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활용한 이미지 합성 기술이다. 기존에 있던 인물의 얼굴이나 특정 부위를 합성한 영상편집물을 일컫는다. 여러 인물의 얼굴을 합성하여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특정 인물의 얼굴을 원하는 영상에 합성하기도 한다. 과거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대의 한 현상이다.딥페이크 기술은 빠르게 인간 생활 가까이에 스며들고 있다. 이미 SNS상에서는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버추얼 인플루언서(Virtual Influencer)’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버추얼 인플루언서’란 컴퓨터 그래픽으로 생성된 가상의 디지털 인물들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릴 미켈라(Lil Miquela), 일본의 이마(Imma)를 꼽을 수 있다. 최근엔 LG전자에서도 가상인물인 레아 김(Reah Keem)을 선보였다. 레아 김은 서울에 거주하는 23살의 여성으로 음악 작업을 하는 인플루언서다. 레아 김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실제 MZ세대가 흔히 쓰는 언어 사용과 패션을 선보이고, 이태원이나 대림미술관을 방문한 사진을 남긴다. 이들은 유명 브랜드와 협업하여 의상과 소품의 유행을 선도하며, 얼굴 특징, 피부색, 신체 타입, 헤어스타일 등에서 다양하고 무궁무진한 모습으로 인간들 앞에 서고 있다.딥페이크 기술은 나날이 놀랍게도 현실과 가까워지고 있지만 그에 따른 여러 문제점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인물 합성은 물론 표정이나 이목구비의 움직임, 목소리까지 똑같이 복제할 수 있다. 최근엔 기존 포르노 영상에 유명 연예인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포르노’가 급증하고 있다. 영국 BBC는 2019년 기준 딥페이크 비디오 중 96%는 포르노로 소비되고 있다고 밝혔다. 얼굴 합성 피해자는 미국과 영국의 여배우, 그 다음으로는 25%의 수치로 K-POP 여자 가수가 해당된다. 더욱 심각한 건 인터넷상에서 쉽게 인물의 이미지 데이터를 구할 수 있기에, 일반인에게도 피해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딥페이크 기술은 꽤나 정교하다. 일반인이 맨눈으로 딥페이크 기술이 적용된 가짜 인물을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누구나 쉽게 딥페이크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데, 최근엔 스마트폰으로도 딥페이크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그간 인공지능에 대한 윤리 문제는 늘 대두되어 왔다. 그럼에도 인간이 가져야 하는 윤리의식이나 교육, 구체적인 법적 제도의 준비 없이 시간이 흘렀다. 다행인 건 올해 6월부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 처벌법) 개정으로 포르노 딥페이크 영상 제작과 유포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제도가 실시된다.딥페이크를 활용한 인공지능은 나날이 인간과 비슷해지고, 어쩌면 머지않은 날에 인간이 가진 놀라운 능력을 완벽히 베낄 것이다. 앞서 말한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버추얼(virtual)은 ‘가상의’ ‘현실적인’이라는 뜻으로, 두 가지 상반되는 의미를 지녔다. 사실과 가상의 경계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진짜와 가짜의 판가름이 더욱 중요해지는 지금 시기에, 인간과 인공지능은 어떻게 공생하며 살아갈까. 인간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딥페이크가 던지는 여러가지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해 나가야 할 숙제다.

2021-03-08

의도하지 않은 상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최근 여러 유명인의 학교 폭력 논란이 잇달아 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꼬깃꼬깃 접어놓았던 상처를 간신히 펴서 내어놓는 사람들을 본다. 대부분 다수가 소수를 짓누르거나 힘으로 위계관계를 정립한 경우다. 그럴 때의 참담함을 잘 안다. 나 역시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던 사람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나 역시 무수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처를 받았다.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함도 있었고 비수로 꽂히는 것을 알면서 정확하게 던지는 말도 있었다. 그때의 괴로움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하지만 상대의 표정과 공기와 감촉은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다. 상처받은 과거를 허공으로 탈탈 털어버렸다고 자부했지만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끝끝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동시에 나 역시 타인에게 뾰족한 무언가를 겨누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특히 글을 쓸 때 그런 죄책감은 강해진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단순한 소재로써 함부로 다루고 있는 건 아닌가. 이 모든 것이 내 결핍을 채우려는 욕심은 아닌가. 정말 그렇다면 그건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명백한 과오다. 지면에 글을 발표한 뒤에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의 방식으로 다가갔다면 그것보다 참담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스스로가 너무 서투른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상대와 사이가 깊어질수록 어쩐지 실수와 실언이 늘어 가는 것만 같았다. 문을 닫고 누구도 내 세계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이렇듯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혼자만의 세상에 남기를 자처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고립을 선택한 청년이 작년 기준으로 13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6개월 이상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사회에서 마주한 다양한 상처의 경험이 있다. 당연히 학교 폭력의 피해자도 존재한다.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법과 제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동시에 가해자의 과오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피해자에게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고 건네는 힘이 된다.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문제는 가해자가 그런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일방적인 폭력이 아니라 단순한 다툼이나 학창 시절의 싸움 정도로 치부하기도 한다. 과거는 자신에 의해 재구성되기 쉬우므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질 수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앞서 ‘의도하지 않았다’라는 변명만을 내어놓는 것은 자신이 게으르며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방증이나 마찬가지다.나는 반려견 보리와 산책하면서 비슷한 상황들을 자주 직면한다. 공원을 걷다 보면 이따금 보리가 귀엽다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무게가 고작 3kg에 불과한 이 작은 개는 한 번 버려진 아픔이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란다. 하지만 그들은 보리의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기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는다. 그러면 보리는 이빨을 드러내고 매섭게 짖는다.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예뻐해 주려는데 넌 왜 그래?” 하고 오히려 몰아세우는 사람도 있다.그것이 일방적인 대화의 전형적인 예시다.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내 행동이 상대에게 폭력으로 받아들여졌다면 그 또한 잘못일 수 있다. 당시의 상황과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매번 서로가 그저 대화하는 줄로만 알았을지도 모른다.우리는 필연적으로 생긴 것이 어쩔 수 없는 모난 존재이기에 기어코 상대를 아프게 찌르고야 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면 삶은 끝끝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다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고.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또다시 사람과 사랑을 믿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2021-03-01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바로 다음에 따라 오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이, 사는 곳, 관심사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은 보통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최근 한 술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도 직업을 물었다. “저는 가수 겸 시인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직장인이거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에게 내 직업은 생소하게 여겨지곤 한다. 금융권에 종사한다는 그 역시 내 직업을 듣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독특했다.“시를 쓴다고 다 시인은 아니잖습니까. 시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별로 어려운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2008년에 계간 ‘시와 세계’에 시를 발표한 이후로 시인이라 소개하기 시작했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으니까.“아,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가수가 되는 것에도 그런 기준이나 절차가 있나요?”가수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시인처럼 등단이라는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나 의사처럼 라이선스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가수임을 인증할 수 있는 국가공인 기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가수라는 직업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가수란 무엇일까.노래를 불러 소득을 올리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가수일까? 아니, 내 주변에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며 업계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이 소득으로는 연결되지 못해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동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앨범을 내면 가수가 될까? 그 또한 틀린 말이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단지 취미나 호기심으로 앨범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들을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첫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나는 홍대 앞의 작은 무대에 서서 “안녕하세요, 가수 강백수입니다” 하고 소개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나 스스로 ‘그래, 나는 가수야’라고 생각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가수라는 말은 사회적 위치인 직업과는 별개로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인 것이다. 앨범을 내지 않은 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스스로 가수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가수일 수 있고, 취미로 낸 앨범이 어쩌다 화제가 되어 수익을 창출했더라도 정체성이 없다면 가수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소속이나 사회적인 위치보다 삶에 있어 훨씬 강력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직업이나 소속이 정체성과 일치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치와는 별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박 대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전자회사 사옥에서 보내지만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반도체건 아메리카노건 귀여운 아들, 딸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줄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박 대리라는 사회적인 위치보다 아빠라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지 못한 채 그의 회사와 직함만을 기억하는 건 그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독립음반 기획사 대표 송 형은 언제나 자신을 음반제작자라 여기며 살아간다. 비록 그가 꾸려가는 음반제작사의 매출이 가계를 책임지고 있지 못하고,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그는 음반제작사를 통해 자아실현을 해나가고 있다. 그에 대해 알기 위해 더 중요한 것도 그가 무엇을 통해 먹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새로운 사람을 알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내가 그가 하고 있는 일이나 사회적 위치만큼 그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가 아니라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했던 것이다.

2021-03-01

누가 해이한가?

2001년 미국 HBO에서 방영된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수행한 연합군 ‘이지(Easy)’ 중대의 처절한 전투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실제 작전에 참여한 생존 노병들의 인터뷰와 각종 사료(史料)들을 바탕으로 1940년대 전쟁을 거의 논픽션처럼 담아낸 이 드라마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 서사물 가운데 불후의 명작으로 회자된다.이지 중대를 이끄는 중대장 소블 대위는 무능하기 짝이 없다. 보병장교임에도 군사지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모의훈련 때마다 어이없는 작전 지시로 부대원들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실전에서 도무지 믿고 따를 수 없을 만큼 지휘 능력이 떨어짐에도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개선의 노력을 하기는커녕 부하들 탓만 한다. 부당한 지시를 내려 부대원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외출을 금지하고, 주말에 구보를 시키고, 자신보다 훨씬 유능한 부하 장교 윈터스 중위에게 온갖 허드렛일을 맡긴다. 가혹행위라 할 만한 ‘갑질’, 원칙도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내던지는 황당한 지시, 게다가 결과가 잘못되면 부하 탓까지 하는 최악의 리더인 것이다.2014년부터 2017년까지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은 슈틸리케 감독이 꼭 소블 대위 같았다.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이란과의 경기에서 졸전 끝에 0대 1로 패한 후 자신의 전술적 패착을 돌아보는 대신 선수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경기에서 질 때마다 선수 탓부터 하던 슈틸리케는 결국 경질됐고, 이후 부임한 중국프로리그 팀에서도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지금은 현장을 떠나 있다. 반면 2002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는 단 한 번도 선수 탓을 한 적이 없다. 평가전에서 상대에게 대패하며 ‘오대영’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었을 때도, 체력 훈련만 시키자 전문가들이 “기술 훈련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비난했을 때도 그는 묵묵히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팀 운영 원칙을 가지고 선수들을 지도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믿고 따라올 것을 주문했다. 그 결과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썼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히딩크는 세계무대에서 유능한 감독으로 각광받고 있다.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며칠 전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다시 600명대로 올라섰다. 이에 정세균 국무총리는 “방역 의식이 해이해졌다”며 국민들을 탓했다. 뉴스를 보다가 눈을 의심했다. 저게 이 나라 행정부의 2인자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었다. “긴장이나 규율 따위가 풀려 마음이 느슨하다”는 뜻의 ‘해이’라는 말을 참 오랜만에 들었다. ‘기강 해이’ 같은 고압적인 표현은 군대에서나 접하던 것이다. 단순히 부적절한 어휘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코로나 확산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돌리는 뻔뻔함에 화가 났다.지난 1년 여 동안 우리 국민들만큼 방역 수칙을 잘 지킨 사례가 세계 어느 나라에 또 있던가? 통계청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시민들의 이동량은 오히려 줄었다. 귀뚜라미보일러 아산공장과 종교시설의 집단감염으로 인해 확진자 수가 늘어난 것이지 국민들은 명절에도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마스크 쓰고 손 씻고 가게 문을 내리는 등 방역수칙을 철저히 따랐다.국민들을 탓하기 전에 정부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원칙도 없이 고무줄처럼 줄였다 늘이는 거리두기 단계 조정으로 국민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준 것을 사과해야 한다.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이상 사회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일부 유흥업소의 돌출적 감염 사례를 침소봉대해선 그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방역수칙을 지켜온 대다수 국민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국민들과 의료진의 희생을 빼면 ‘K-방역’은 한낱 우스운 흰소리,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면서 전 세계 코로나 일일 확진자수가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OECD 37개 국가 중 백신 확보도 가장 늦고 접종 시작도 꼴찌다. 소블과 슈틸리케가 떠오르는 이유다. 해이한 것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다.

2021-02-22

클럽하우스의 두 가지 얼굴

최근 많은 이들의 관심사인 클럽하우스를 사용해 보았다. 클럽하우스는 음성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오직 실시간 음성으로만 소통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 내에서는 어떤 문자도, 사진도, 동영상도 공유할 수 없다. 오로지 실명성을 기반으로 자신의 목소리로만 대화를 주고받는다.클럽하우스는 앱이 개발된 미국을 시작으로 중국, 일본, 브라질, 터키 등 전 세계를 아우르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대화방에서 가상화폐 비트코인에 대해 발언을 하며 화제로 떠올랐다. 여기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설립자, 오프라 윈프리 등 해외 유명인이 앱을 사용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국내에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 토스 창업자 이승건 대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유명인사와 각 분야의 전문가, 정·재계 인사들이 가입했다. 지난해 연말에는 60만 명 수준이었지만 올해 1월에는 200만을 넘겼다.많은 이들이 클럽하우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럽하우스는 유명 연예인부터 정치인, 인플루언서, 창업가, 전문가 등 영향력을 가진 인물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방의 성격 또한 다양하다. 백색소음 방, 마피아 게임 방, 성대모사를 뽐내는 성대모사 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 노래방도 있다. 원하는 주제를 다양한 깊이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클럽하우스는 코로나19로 인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끊임없는 소통하려는 욕구가 발현된 장소라고 볼 수 있다.클럽하우스를 가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준비물이 필요하다. 하나는 클럽하우스 가입자로부터 받는 초대장과 또 다른 하나는 아이폰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클럽하우스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클럽하우스 가입자로부터 초대장을 받아야만 입장 할 수 있다. 클럽하우스는 아직 베타버전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아이폰 유저만 사용 가능하다.클럽하우스에 초대를 받아 가입하게 되면 관심사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관심 있는 분야를 고르고 나면 본격적으로 클럽하우스에 접속하게 된다. 여느 SNS와 다를 것 없이 관심사와 팔로우에 기반을 둔 대화방 목록이 뜬다. 호기심이 이는 방에 들어가면 동그란 모양의 프로필을 가진 이들이 상하로 나누어져 위치해 있다. 한순간 휴대폰 안에서 여러 명의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온다.클럽하우스의 방을 살펴보자면 방을 만든 사람이자 대화의 흐름을 이끄는 모더레이터, 방장이 선택하여 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스피커, 말을 할 수 없고 듣는 권한만 가진 리스너로 나누어져 있다. 모더레이터와 스피커는 최상단에 위치해 있고, 말을 듣는 리스너는 그 아래 목록에 자리한다.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클럽하우스의 방은 빠르게 생기고 사라진다. 전체적인 방 분위기는 활발하고 부드러운 생기가 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한다. 목소리를 직접 듣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고 호감도도 빠르게 생긴다. 강연장이나 모임에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질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고, 불필요한 화장이나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거리두기로 인한 이동 제한이 있다면 온라인에서는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다.그렇지만 서둘러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클럽하우스를 쓰지 않으려 한다. 무엇보다 나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 앱을 처음 사용하려는 이들에게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에도 거부감이 느껴진다. 마치 초대장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유행과 무리에 뒤처져 소외되거나 도태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클럽하우스에 소속되어 가입된 것만으로도 어떤 권력을 얻은 것처럼 기세등등해 보이는 아이러니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대장이나 아이폰이 있더라도 청각장애인은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과 사용자의 연락처와 정보를 수집하여 어느 곳에 활용되는지 불투명하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게다가 클럽하우스는 방 내에 발언권이 있는 사람만 말할 수 있다. 방을 관리하고 이끄는 모더레이터가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권력화되어 있고 위계질서 또한 잡혀 있다. 실제 모더레이터가 되는 사람은 현실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나 많이 알려진 사람이 계속 연장해서 권력을 쥐는 구조다.그럼에도 클럽하우스는 우리에게 어떤 경험과 문화를 가져다줄 것인지 기대되는 것은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아직 베타 버전인 클럽하우스를 두고 비즈니스 모델 설정에 따라 광고물이나 입장료, 구독제 등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많은 이들을 유치하고 지속하기 위해 어떤 진화를 택할지, 클럽하우스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2021-02-22

사과의 골든타임

나는 스포츠 관람 마니아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야구, 겨울철에는 농구와 배구까지. 어지간한 구기종목 프로 스포츠는 다 챙겨보는 편이다. 요즘 특히 재미있게 보고 있는 종목은 배구인데, 최근 들어 포털 사이트 배구 기사란에 참담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배구 선수들의 ‘학폭’논란이 그것이다. 논란은 여자부 리그에서 시작되었다. 며칠 전 한 게시판에 한 누리꾼이 현재는 스타 반열에 오른 선수들에게 학창시절 당했던 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해당 구단과 선수는 빠르게 사과문을 올렸지만 누리꾼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남자부에서도 마찬가지의 사건이 일어나 구단과 선수가 사과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잇따른 학폭 논란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나 역시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그늘 아래 있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7교시 종이 울리면 눈앞이 캄캄해져모두가 웃으며 가방을 싸는데나는 고갤 숙인 채 화장실로 가야 해그곳엔 너희가 기다리고 있어공처럼 온 몸을 웅크린 채주먹과 발길질을 받아내면서더러운 바닥을 나뒹굴었지화장실 창문 밖에 빛나는태양과 구름은 저리도 예쁜데왜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지-강백수 ‘나쁜 노래’ 가사 중2013년 발매된 1집 앨범의 수록곡인 ‘나쁜 노래’의 노랫말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다.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동급생 몇몇에게 상습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당하곤 했다. 불과 몇 달 정도 겪었던 일인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 느꼈던 참담한 감정들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아직 그들 대다수를 용서하지 않았다.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딱 한 명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이가 있었으니 그는 이제는 내 친구가 된 H다. H는 세월이 흘러 이십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 SNS를 통해 나를 찾았다. 그가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서야 그는 나를 만나 고개를 떨구며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이 철이 없었다고. 나이를 먹고서야 그때의 행동들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지 알게 되었다고.굳이 나를 찾고, 만남을 청하고, 안 하고 살았어도 상관없었을 사과를 하는 H가 나는 참 대단해 보였다. 어린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그의 사과 덕분에 어느 정도는 씻겨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이제라도 진심어린 사과를 해 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를 용서할 테니 이제는 나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다. 이제 H는 언제라도 불러내어 함께 소주 한 잔 할 수 있는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H가 내게 했던 사과의 말과 그리고 스타 배구선수들의 사과문을 번갈아 떠올린다. 그 둘을 똑같은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과오가 만천하에 드러난 뒤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한 사과를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을까. 선수들이 진정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뉘우침에는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사과를 하는데 있어 진정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사과의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폭로와 논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은 뉘우치고 사과했어야 했다.선수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뉘우치고 사과했어야 할 시기를 놓친 것 역시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일이다. 소속 구단과 협회 차원에서의 무거운 징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과오가 있는 다른 모든 이들 또한 이 사과의 골든타임에 대해 한 번씩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21-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