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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호랑이가 되자

새해가 밝았다. 2022년 임인년은 호랑이의 해다. 호랑이만큼 아름다운 동물이 또 있을까? 커다란 근육질의 몸, 석양이 흘러든 주황빛 털, 묵죽을 친 것 마냥 거침없이 뻗은 검은 줄무늬,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화톳불 안광까지…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말은 오직 호랑이에게만 유효하다. 그는 무리 짓지 않고 단독생활을 즐기며 무려 1000제곱킬로미터 밀림을 다스리는 왕이다. 코끼리, 코뿔소, 악어도 호랑이 앞에서는 한낱 잡짐승에 불과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 중 호랑이만이 영웅의 이미지를 갖는다.어느 시리얼 회사 광고처럼 모두에게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 우리 모두 호랑이가 되자! 코로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쓰러트리고, 불황의 머리를 찍어 누르고, 불행과 불운과 좌절 따위 포효 한 방에 쫓아버리는 호랑이가 되자. 생각해보면 호랑이가 인간이 되길 포기하고 동굴을 뛰쳐나온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인간이 돼서 뭐 하나?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아수라장, 인간으로 살기 참 힘든 세상이 아닌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인간보다 호랑이가 되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물속의 범인 쏘가리라도 되어야겠다.호랑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시인들이 많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1794년에 “호랑이, 호랑이, 밤의 숲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어떤 신의 손 또는 눈이 너의 무서운 균형을 빚어냈을까”(‘호랑이’)라고 예찬했다. 호랑이라는 압도적 생물에서부터 장엄함, 숭고함을 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건 보르헤스의 시다. “한 마리 호랑이를 생각하네. 어스름은 분주하고 광대한 도서관을 예찬하고 서가를 아득히 멀어지게 하네 (…) 나는 상징들의 호랑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진짜 호랑이를 대비시켜 보네”(‘또 다른 호랑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보르헤스는 지식과 기술의 현대문명이 인간을 즉물적 세계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을 비판하면서 체험이 결여된 상징과 상상, 유약하기 짝이 없는 합리적 이성 대신 피 냄새를 풍기며 무심하게 사냥하고, 교미하고, 그러다 무심하게 죽는 야생 호랑이의 자연 본능을 동경했다.장석주 시인은 “페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내 핏속에/ 야생의 호랑이는 살아 있다 (…) 게으름과 잡식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살아 있다/ 내 핏속의 호랑이는/ 가끔은 영감과 상상을 낳는다”(‘내 핏속의 야생 호랑이’)라고 노래했다. 보르헤스의 ‘호랑이’가 원시적 자연 세계를 상징한다면 장석주 시인의 ‘호랑이’는 보편적이고 획일적인 도시 삶, 자본논리, 대중주의 등과 맞서는 예술가의 정신성 그리고 고독한 반골기질을 은유한다. 한편 홍성식 시인은 “다시 생겨난다면 신림동 독신가구주가 아닌 아무르 강변 어슬렁대는 호랑이로 살고 싶다. 포수 총에 맞고도 제 울음만으로 산천을 떨게 하는”(‘신림동 사람들’)이라고 기도했는데, 이는 무통문명의 보호 안에서 오히려 기쁨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잊고, 괴로움과 아픔도 모른 채 가축처럼 평온함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을 향한 포효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호랑이처럼 살아야 할 이유는 많다. 어떤 상대와도 두려움 없이 맞서 싸우는 용맹함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끊임없이 걷고 달리고 나무를 오르며 육체를 단련하는 성실함 또한 배워야 한다. 함부로 무리 짓지 않으며 단독자로 살아가는 고고함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무엇보다 호랑이는 쑥과 마늘 먹기를 거부한 채 동굴 밖으로 나와 자기존재를 보존한 진짜 승리자다. 보편사회가 나만의 고유한 기질과 개성, 취향을 포기시키려 할 때, 참을성이니 끈기니 ‘노오력’ 따위를 강요할 때, 남들 다 하는 거니까 너도 해야 한다며 겁박할 때 우리는 호랑이처럼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획일적 가치에 종속당한 인간이 일평생 제 집과 일터를 벗어나지 못할 동안 호랑이는 무려 1000제곱킬로미터 반경에 영역 표시를 한다. 우린 협소한 삶을 벗어나 호랑이처럼 경험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새로움에 도전해야 한다.난 지금 인간이 호랑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아득한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엉뚱한 제안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모든 구속과 억압, 제약을 찢어버리자는 얘기다. 고여 있는 우리 삶의 적폐들을 날려버리자는 것이다. “나는 내 모든 것들이 찢어지는 순간, 이 세계의 썩어 있는 것들이 표표히 흩어지는 것을 본다”(이병일, ‘호랑이의 숲’)고 시인은 말했으니, 나는 새해 첫날, 영화 ‘록키3’ 주제가를 들으면서 얼어붙은 안양천변을 달려야겠다. ‘Eye of the tiger’, 호랑이의 눈으로!

2022-01-04

‘한정’이라는 유혹

2022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이들의 새로운 마음으로 원하는 목표를 세운다거나 큰 소망을 빌었을 테지만 올해의 첫 날, 나는 자그맣고 소소한 소원 하나를 조용히 빌어 보았다.최근 회사 동료들 덕분에 한정판 운동화에 푹 빠졌다. 말 그대로 한정 수량으로 출시되는 신발이라 당첨되어야만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암만 돈이 많고 시간이 많아도 절대 구할 수 없는 희귀성 덕분에 운동화 공모(라플)은 MZ세대 사이에서 늘 핫한 이야깃거리다.할로윈 시즌, 크리스마스, 유명 가수와의 콜라보 제품 등 시기와 컨셉에 따라 출시되는 덕에 브랜드별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한정판 정보나 출시일을 공유하는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는 백만 명이 훌쩍 넘는 회원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명 맘 카페에서도 발매 정보나 판매 매장 리스트를 활발히 공유할 정도다.한정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왜 이렇게 애간장 태우는 걸까. 비슷한 디자인으로 출시되어도 ‘리미티드’란 단어가 붙으면 괜스레 후광이 비치면서 구매욕을 자극하게 한다.물론 나도 처음엔 신발 하나에 그리 공을 들여 사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 괜히 더 머리 아프게 살 필요 있느냐며 코웃음 쳤으나 슬슬 한정판 운동화만의 새롭고도 묘한 매력에 빠져 들고 말았다.한정판은 브랜드를 상징하는 로고를 반대로 뒤집어 고유화 된 이미지의 틀을 깬다거나 독특한 컬러웨이를 보여준다. 운동화의 갑피, 힐탭, 아웃솔, 밑창 등 눈이 닿지 않는 부분까지 특별한 디테일이 자리하여 완성도 높은 퀄리티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간택된 이만 살 수 있단 제한을 둠으로써 소비자의 구매 심리를 자극한다.정용진 신세계 그룹 부회장 또한 라플의 유혹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지난해 8월 인스타그램 게시글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벼렸슴’이란 글과 함께 나이키와 미국 가수 트래비스 스캇이 협업한 한정판 운동화 사진을 공개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 신발의 출시가는 약 19만원대지만 시간이 흐른 뒤의 거래가는 190만원을 호가했다.높은 수요에 비해 한정된 공급을 유지하니 몇 가지 인기 제품은 리셀가가 꽤 높은 편이다. 한정 운동화는 통상 정가보다 2-3배는 거뜬히 뛰는 가격대로 되팔 수 있을 정도니 슈즈+제테크의 합성어인 슈테크를 행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빅뱅 멤버인 지드래곤의 사인이 들어간 스니커즈의 판매 가격은 본래 22만원으로 출시되었지만 리셀 가격은 무려 1300만원으로 판매되기도 했다.하지만 한정판 운동화를 구하기 위한 과정은 굉장히 험난하다. 우선 수시로 해당 브랜드의 온라인 스토어를 계속해서 접속해야 한다.원하는 제품 공모를 할 수 있는 날짜와 시간 정보를 알아냈다면, 해당 날에 맞추어 접속한 뒤 공지된 조건에 맞추어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선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데, 접속자가 대거 몰리다 보니 꼭 인터넷 속도가 빠른 장소에서 시도해야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겨우 운이 닿아 당첨이 되었다면 이젠 드디어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 과정 또한 조금 복잡하다.우선 정해진 매장에서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가서 사야한다. 아무렴 직접 매장에 가서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응모 가능한 매장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렇게 운이 좋아 당첨되어 매장을 찾아갔다면 이젠 운동화를 수령하기 위한 기나긴 대기 줄에 합류해야 한다.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면 인터넷으로 응모했던 회원 정보와 구매하려는 사람이 일치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본인인증이 시작된다. 신분 확인 후 마지막으로 사이즈를 체크해본 뒤 드디어 수령 받게 된다. 이런 번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웃돈을 주고서라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운동화 컬렉터가 아닌 이상 굳이 프리미엄 가격을 붙여 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라플을 하나의 놀이로 인식하여 재미로 응모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나도 여러 번 응모하다 보니 조금 욕심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진 트렌드에 발맞추어 즐기고 있는 정도다. 그치만 해가 바뀌며 운의 흐름이 조금 바뀌었을 테니 당분간은 조금 기대해보기로 한다.

2022-01-04

마지막 장을 쓰는 마음

마지막 구절의 마침표를 가뿐하게 찍는 작가가 존재할까? 구상 단계에서는 분명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이야기들이 제멋대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를 헤매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더듬거리며 지나가는 감각과 함께 한없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그렇게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작가는 계속해서 이야기의 끝을 생각해야 한다. 끝내기에는 아쉽고, 소설적 사건의 봉합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만 같고, 자신의 편협함과 모자람을 들켜버린 것만 같아도 말이다. 작품을 끝내고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마지막 장을 쓰지 못한다면 작품은 미완으로 남는다. 제아무리 빼어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그것은 뛰어난 작품은커녕 완성품 자체로 인정받을 수 없다. 매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떠하든 창작자는 나름의 마무리를 기필코 내어놓아야만 한다.이따금 여러 자리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 힘들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어렵다는 이들도 있지만 힘차게 시작했던 이야기의 완결을 도무지 지어낼 수가 없다는 고민도 적지 않다.스스로 구축한 세계에 애착을 두게 되면 허투루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거기에서 오는 미련으로 이야기를 한없이 붙잡고 있다 보면 그것은 완성작이 아니라 가능성으로만 존재하게 되며 하드웨어 깊은 곳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다.소설뿐만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끝을 내는 일은 어렵다. 끝이라는, 어쩐지 발음마저도 단호한 이 단어는 냉정하고 무정하며 쌀쌀맞은 느낌까지 든다. 희망찬 포부를 안고 시작했던 일이 끝날 수밖에 없을 때의 참담한 심정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올해는 더욱 그랬다. 꿈꿔오던 것들을 펼쳐낸 이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기 일을 끝내는 상황을 목도할 때마다 마음이 시려왔다. 마지막을 결정하기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깊은 고뇌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시절의 마무리는 어떤 방식으로 지어지는 것일까 의문하면서 우리는 한 해를 보내왔다.사람 간의 관계도 그렇다. 끝끝내 함께일 것만 같았던 주변의 누군가도 언젠가는 보내주어야 할 때가 온다. 관계의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상황이 또 있을까. 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역시 괴롭다. 그러한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찾아올 수도 있고 부스러지는 가루처럼 조금씩 천천히 다가올 수도 있다.어떠한 것이든 끝을 내는 일에는 항상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따라오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일이 수반되며 상상과는 다른 자비 없는 현실이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이런 이야기가 위로가 될까. 모든 마무리는 매끈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를 해냈다는 사실이다.가수 ‘별’의 노래 ‘12월 32일’에서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돌아온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가 나온다. 온다고 약속했던 이는 결국 오지 않았고 새해가 밝았기에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 지금은 새해가 아니라 12월 32일이고, 다음날은 33일이라고, 그리하여 그가 올 때까지 영원히 12월에 남겠다는 절절한 마음을 고백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유예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그것이 일이든, 시간이든, 관계이든. 충분히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 끝을 고할 수 있었다면 삶은 이렇게나 복잡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시간을 붙잡으려는 미련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시간 밖에서 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로 미완성으로 남은 작품들은 나만의 하드웨어에 끝도 없이 쌓여갈 것이며 막무가내로 흐트러진 관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변을 괴롭힐 것이다.다사다난했던 2021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마지막 구절을 쓰고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두렵고, 아쉽고, 서운하면서도, 잘 가, 고마웠어, 다음에는 좀 더 잘 해볼게, 다시는 오지 마,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쓰는 마음으로.

2021-12-28

서툰 삶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 나의 인생을 내 손으로 망치고 말았다.’ 연말이면 매번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했나. 또다시 감당하지 못할 일에 손을 대고, 그걸 수습하느라 정신없이 보낼 따름이었지 않나.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당장 급한 일에 목이 매달려 스스로를 재촉하며 살아왔을 따름은 아닌가. 1년을 바삐 움직이고, 무언가를 마구잡이로 해치워왔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은 부러진 나의 마음이다.나의 마음은 쳇바퀴처럼 돌고 돌아서,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마음과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마음이 매일같이 빙글거린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고, 그렇다고 무언갈 하고 있을 때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빈정거리게 된다. 의욕은 그 순간 속에서 빠르게 타버린다. 정성들여 시작한 일도 어느새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일로 뒤바뀌어 있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는 것처럼 끝내버리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해진다. 처음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단지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기만을 소망하는 무기력한 마음.처음부터 나도 그런 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엔 좀 더 의욕적인,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런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단지 비례의 문제에 불과할 따름인 것을. 언제고 나의 마음은 손쉽게 쏟아져 텅 비어버리고, 지금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주길 바라게 되는 것을. 마음을 가득 채워줄 그런 순간을 기다리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 그때쯤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주인공도 감독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단지 내 삶의 관리인에 불과해져버렸다는 것을. 나는 내가 살아가는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늘 내 주변에는 문제가 가득했고, 그런 문제들을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삶은 더욱 피폐해져갈 따름이었으니까. 늘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던 인생. 그게 나의 지난 삶이다. 딱히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지 나의 삶에는 남들도 겪는 문제들이 조금 복합적으로, 그리고 조금 더 많을 뿐이다. 나보다 더 많은 문제들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손 쓸 수 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것이 단지 앎에 불과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나는 내 삶에 대해 부정하거나 빈정거리기보다는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애쓰고 싶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내 삶을 다른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지금의 내가 부러진 마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온 탓이다. 나는 왜 살아가는 가에 대해 생각했어야만 했다. 단지 관리인으로 머물고 싶은 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올 한 해 내가 쓴 글들을 천천히 읽어본다. 나의 마음이 부러진 지도 꽤 오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온전하지 못한 문장들과 충분하지 않은 의미들. 그건 나의 마음이 오래도록 부러져 있었다는 뜻이다. 글은 잔인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의미가 아닌, 문장의 형태로 말이다. 단단하게 끝맺지 못하고 길게 늘어져 긴장을 잃어버린 문장들을 바라본다. 이것이 나의 책임, 이것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핑계로도 갈음될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잘못이다.내년이 되어도,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의미 따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걸음을 멈출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의미라는 건 그걸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다시 소박해지고 싶다. 한두 가지 문제쯤은 누구나 안고 가는 것이라고, 모든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낼 필요는 없다고.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하나쯤은 손에 꼭 쥐고 있으라고. 그것만은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부러진 마음에 마음을 덧댄다. 걸을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게 걸음을 멈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긴 밤을 보낸다.

2021-12-28

아버지와 부대찌개

아버지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 가방공장 사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유복한 환경에서 유년을 보냈다. 우리 집이 있었고, 옥상엔 아버지의 골프 연습 시설이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엄마는 평일 오전에 에어로빅과 꽃꽂이를 했다. 그러나 IMF 사태로 아버지 공장은 부도를 맞고, 집안 곳곳엔 차압딱지가 붙었다. 아버지는 지방을 전전하는 행상이 되어 일 년에 한 번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아버지가 일 년여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에어쇼 행사장에서 무슨 일을 한다며 놀러오라고 했다. 아버지 본다는 생각에 설레어 토요일 방과 후 성남 비행장으로 갔다. 비행기들이 일으킨 모래바람 너머 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채 소시지를 굽고 있었다. 파인애플을 꼬치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던 군것질거리를 실컷 먹는다며 마냥 즐거웠고, 아버지는 웃었다. 빨간 모자챙 아래 그 웃음이 얼마나 애처로운 것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돼 있었다. 머리가 굵어 아버지가 어려웠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하게 됐다. 같이 목욕탕에 갈 수 없을 만큼 멀고 어색해졌다.아버지는 십 여 년 전 충남 당진 대호만 물가에 컨테이너 집을 짓고 정착했다. 된장과 청국장을 담가 팔고, 낚시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서툰 손으로 닭도리탕이나 라면을 끓여 내고, 평생 좋아한 낚시 실컷 하면서 편하게 사시는 듯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하는 날까지 나를 포함한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만큼 무뚝뚝한 분이다.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이 잘 됐다. 위를 절제했으므로 식사량이 줄어 몸집이 작아진 아버지, 약해진 아버지는 아들이 감당해야 할 슬픈 풍경이다. 그해 여름 대호만에 갔더니 아버지가 전복을 넣고 옻닭을 삶아주셨다. 고기에는 손도 못 대고 국물만 뜨는 아버지, 아버지 앞이라 울진 못하고 그저 먹기만 하는 나, 내가 먹어 치운 닭 한 마리, 뼈대만 남아 앙상한 낚시 좌대, 아버지 따라 야윈 대호만 물, 먼지 쌓인 아버지 낚싯대, 햇살 내려앉은 장독대, 덜 마른 빨래, 일찍 덮어버린 에어컨, 아무것도 모르는 뒤란의 닭과 개들, 유난히 푸른 하늘, 반짝반짝 빛나는 약통… 내게 각인된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어린 나를 목마 태우던 젊고 건강한 사내에서 힘없는 촌로로 대체된 지금, 나는 빨간 모자를 쓰고 소시지를 굽던 옛날의 아버지 나이가 됐다.얼마 전, 아버지가 천안 단국대병원에서 정기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수면내시경 검사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떤 내색을 잘 안하는 아버지는 그동안 동네 친구분과 함께 병원에 다녔는데 이번엔 추수철이라서 동행이 어렵다고, 그래서 “혹시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10시면 끝날 거야” 내게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동네 친구분을 보호자로 하여 병원에 다니셨다니, 아들 눈치를 보시다니, 속상하고 죄송했다.차가 막혀 30분 늦게 도착하니 당진서 먼저 온 아버지는 노란 검사복을 입고 병원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청력이 약해져서 간호사가 묻는 말에 내가 몇 번 대신 대답했다. 혈압 재고 내시경실로 가 검사 받으실 동안 나는 수납하고 원내 약국에서 약 처방을 받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잘 부축해드리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오늘 내내 어지러울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쳐보였다. 아버지를 부축하고 걸었다. 힘껏 붙잡고 싶은데 힘껏 붙잡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들의 마음이다. 부축도 견인도 아닌 동작으로 아버지 팔에 손을 얹은 채 말없이 걸었다.밥 먹고 가자 하셔서, 검사 2시간 이후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먼저 올라가…” 아버지 혼자 식사하실 게 눈에 밟혀 병원 권고를 무시하고 근처 백반집에 들어가 앉았다. 아버지 입맛에 맞게 청국장이나 우렁된장을 시키려는데, 아버지가 부대찌개를 가리켰다. 햄과 소시지 같은 걸 드시는 줄 몰랐다. 아버지의 뜻밖의 취향, 세월은 흐르는데 내가 모르는 아버지가 너무나 많다.어쩌면 아들 입맛에 맞추려고 부대찌개를 시키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부대찌개를, 아들은 우렁된장을 생각하는 어긋남이 아버지와 아들의 평생이다. 지금은 어정쩡한 부축에 실린 아들의 가벼움과 아버지의 무거움 사이를 걷고 있지만, 부대찌개를 먹고 아들은 살찌고 아버지는 깃털처럼 가벼워질 것이다. 부축하는 팔에 점점 힘이 많이 들어갈 것이다. 늘 그랬듯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주앉은 밥상 위에 부대찌개 끓는 소리만 들렸다.

2021-12-21

겨울의 기억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어떤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겨울”이라 답한다.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지만, 우선 눈 내리는 풍경을 마주하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봄과 여름, 겨울에 미뤄둔 고민이나 일들을 한꺼번에 실행하기도 하고, 고마운 이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용기내어 보내기도 한다.그렇게 한 해를 얼렁뚱땅 마무리 지으며 새 시작 앞에서 겨우 의연한 척 해본달까. 그게 일 년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계절인 겨울에 내가 해보곤 하는 일들이다.눈을 보며 먹는 겨울 간식도 좋아한다. 겨울밤만 되면 속이 답답하다는 엄마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잦다. 군고구마나 옥수수, 감자 같은 걸 한 솥 크게 삶아 쟁반 째로 내어오면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가족은 금세 거실로 모여든다. 겨울 간식이 가족간의 따스한 정을 나누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고구마의 맛이 심심해질 때쯤엔 손으로 찢은 잘 익은 김장김치를 올려 먹고, 목이 막힐 쯤엔 차가운 동치미 한 사발을 들이켜 퍽퍽함을 씻어낸다. 이불 안에서 손이 노래 질 때까지 까먹는 귤의 맛도, 폭닥한 외투 속에 붕어빵을 안고 뒤뚱뒤뚱 집으로 향하는 것도 이 계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이쯤 되니 내가 겨울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다.만성 비염을 앓고 있는 난 매일 코가 닳아 있지만, 그래도 겨울을 좋아하는 건 아무렴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겨울에 태어났단 점이다.2001년 겨울이다. 엄마는 셋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만삭이었던 엄마는 출산 시기가 앞당겨 오자 나와 둘째를 데리고 잠시 외할머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어느 새벽 급격한 태동을 느낀 엄마는 급히 나주병원으로 옮겨갔고, 어린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확인하자마자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럽게 울음을 쏟아냈다.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외할머니는 허벅지를 찰싹 때리더니 언니는 동생 앞에서 절대 울어선 안 된다며 쏘아봤다. 열손가락 모두 금과 옥반지를 끼고 있던 할머니의 손은 얼마나 맵고 매몰찼던지. 동생이고 뭐고 내 마음 하나 이해 못해주는 할머니가 미워 더 큰 소리로 울어대면 할머니는 애써 등을 진 채 외면했다.외할머니는 동네에서 멋쟁이라 불릴 만큼 반짝이는 옷을 즐겨 입었고 그만큼이나 흥도 많으셨다. 누가 보건 말건 기분이 좋으실 땐 춤을 추곤 하셨는데, 검정색 라디오를 이리저리 똑딱이다 보면 댄스의 시작을 알리는 시끄러운 트로트가 쿵광거리며 흘러나왔다.실크 소재의 검은 상하의를 갖춰 입고선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내밀며 나아가는 그 스텝은 어린 내가 보기엔 얼마나 난해하고 우스꽝스러웠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다 유쾌했던 어린 날의 추억들이다.외할머니는 호랑이 선생님 역할도 하셨다. 넌 이제 초등학생이니 구구단 정도는 눈을 감고서도 외워야 한다며 2단부터 9단까지 엄격히 가르치셨는데, 이일은 이 이이는 사, 이삼은 육… 그 특유의 리듬감에 맞춰 낮게 외는 소리는 그때 외할머니에게 눈물 콧물 빼며 배운 것이다.추가로 전국 8도 지도를 펼쳐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경기도-평안도-황해도-함경도 순으로 한 번에 외는 수업도 들어야만 했다. 무사히 수업을 이수한 덕분인지 지금도 낯선 지명을 들을 때면 아아, 거기 경상북도에 있는 곳? 하며 직감적으로 알아맞히곤 한다. 이런 게 조기교육의 결과인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장난감이나 책 한 권 없는 지루한 일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창문을 내다보는 일이었다. 엄마는 열 밤을 자고 온다고 했고, 그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에 분명 동생을 품은 엄마가 등장할 거라 생각했으니까.그때부터 창문을 보는 습관이 생겼달까. 사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 몰랐지만 글을 쓰다 보니 틈만 나면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이유가 위의 경험 때문이란 걸 방금 깨달았다.눈이 잔인할 만큼 거세게 내리는 날엔 늘 크고 작은 이별이 있었다. 늘 예고 없는 헤어짐은 한 겨울 속이었고, 극단으로 스스로를 몰아 방치하는 것도 전부 극심한 추위 속이었다.거듭 돌이켜 보면 이별과 슬픔으로 이루어진 계절인데도 어쩐지 나는 차갑고 매운 바람 부는 겨울이 와야 비로소 나의 오랜 집 안에 들어선 듯하다. 다시금 떠올려보자면 분명 울적하고 지루한 시간이지만 그것이 나를 지탱하고 있음을 안다.

2021-12-21

비판하기의 책임감

타인의 장점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Pixabay 글을 쓴다는 직업의 특성상 내 글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잘 보았다는 인사치례 정도의 말이 대다수이지만, 개중에는 나의 글을 세밀하게 읽고 문제점을 지적해주는 고마우신 분들도 있곤 한다. 그런 의견을 들을 때면 소중한 독자라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런 지적들에 괜시리 서운한 마음이 들어 마음에 상처를 받곤 한다. 비판과 비난은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내 귀는 종종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대상에 대해 이성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문제점을 찾아낸 후 이를 개선할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비판이라면, 비난은 대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감정적으로 힐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겠다. 분명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보면 둘을 구분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에서 이 둘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건설적인 비판을 가장하고 대상을 깎아내릴 뿐인 경우도 적지 않으며, 비난하듯 감정적인 표현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이면엔 대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전제돼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비난인지, 혹은 조금은 감정적인 비판인 것인지를 구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비판은 수용하고 비난은 멀리하라는 건 누구든 알고 있지만, 그건 내가 나의 마음을 지킬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면 타인의 비판은 얼마든지 내 마음을 꺾어버릴 방아쇠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타인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내가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지적인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타인의 작품에 대해 마치 폭로하듯 문제점을 지적하곤 한다. 그러한 나의 행동이 나의 가치를 올려주기라도 한다는 듯 말이다.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런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한낱 식사를 하더라도, 그 음식에 대해 평가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더 나은 사례를 말하느라, 그들은 종종 내가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이겠으나, 이런 종류의 평가들은 대개 그것을 만족하며 먹는 이를 향해 “네가 제대로 하는 집을 안 가봐서 그래”라는 비난 아닌 비난으로 끝맺는 경우가 많아 함께하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곤 한다.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건 비판이 단지 대상에 대한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비판이라는 건, 타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다른 대상에 대해 말한다는 건 생각 이상의 책임을 요구한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문제점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 말을 듣게 될 타인이 경험하게 될 감정적 소요에 대한 책임.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태도와 말을 잘 정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한 것과 무책임한 것은 다르다. 굳이 일침을 날린다며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들을 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만약 내가 당신의 비판을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책임감은 가져달라는 부탁이기도 하다.어쩌면 이런 나의 태도 자체가 굉장히 유아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지적받고 싶지 않고, 평가받고 싶지 않은 그런 아이 같은 생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더 잘할 수 있잖아’라는 식으로 무책임한 비판과 비난을 듣는 것이 때로는 나를 지치게 만든다. 왜 나는 구태여 글을 쓰고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몰려올 정도로 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실 나는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근근이라도 꾸준히 잘 해나가고 싶은 것이고, 그런 종류의 비판이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한 칭찬도 때로는 구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과 작품에 대해 평가할 때면 자신에 대한 것보다 수십 배는 엄격해져 무책임한 비판을 쏟아내기 일쑤다. 마치 창작을 하는 사람보다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자신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처럼.사람들은 때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앞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은 감수해야 한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건 무언가를 만들어본 적도, 앞에 나서 본 적도 없는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타인의 문제를 지적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 정말로 어려운 건 타인의 장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을 타인보다 우위에 서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자신을 증명하는 건 그 사람이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지, 쉬운 일을 반복할 때가 아니다.

2021-12-14

술 한 잔의 힘

술 마시기를 즐기는 편이다. 술에 관한 대단한 지식이 있다든가 그렇다고 소주를 궤짝으로 마시는 엄청난 술꾼도 아니기에 정말이지 ‘즐긴다’라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술의 세계는 넓고 주당은 많지만 나의 식견은 짧으니 이렇게 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지. 어쩌겠는가. 감히 외쳐본다. 나는 술이 좋아.어쩌다 나는 술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집안 내력은 아니다. 나의 부모님은 모두 독실한 크리스천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그들이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늦은 저녁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아버지가 “통닭 사 왔다!”고 외치는 건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술사랑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얻게 된 후천적 결과물인 셈이다.나를 술의 세계로 인도하고 혹독하게 단련시킨 건 대학 동기들이다. 우리는 서울 아현동과 신촌 일대를 누비며 어제도 내일도 마시고 또 마셨다. 따로 약속할 필요도 없었다. 단골 술집에 가면 나의 동료들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지는 해를 보면서 건배를 외치고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귀가하던 날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신촌의 어느 술집 사장님은 우리가 자리에 착석함과 동시에 서비스로 모둠 튀김을 내어줄 정도였다.그때의 나는 술보다 술자리가 더 좋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글 쓰는 청년들, 어딘가 이상하고 비뚤어진 구석이 있는 인간들과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찌나 재밌던지. 날이 어두워지면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과 함께 실컷 떠들면서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눴다. 술 한 잔에 낯선 이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목소리가 커졌으며 선명한 정신일 때는 하기 힘든 이야기들도 술술 흘러나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함께 술을 마시는 행위가 늘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술병이 쌓여갈수록 더 그랬다. 이성이 풀어지면서 드러나는 민낯은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곯아떨어지는 사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벌컥 내 거나 남들과 시비가 붙는 사람, 집에 가겠다고 택시를 부르는 사람, 가겠다는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함께 술을 마시는 일에는 서로의 흑역사는 묻어두자는 암묵적 약속이 수반되는 것이 아닐까. 부끄러운 행동을 하나하나 들추어내자면 끝이 없으니.나 역시 다양한 술버릇이 있다. 그나마 공개할 수 있는 버릇 중 하나는 극도의 감정 과잉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다지 재미없는 상대의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고 별로 슬프지 않은 일에도 펑펑 눈물을 흘린다. 눈앞에 있는 땅콩이 너무 조그매서 눈물이 나고 금이 간 소주잔의 모양에 마음이 깨질 듯 아프다. 창피한 모습이지만 널뛰는 감정을 아무렇게나 표출하는 기분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언제부터일까.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던 술자리에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하고 나 자신의 행동을 극도로 검열하게 되었으며 아무 옷이나 훌렁훌렁 걸쳐 입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들이켜는 술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주종과 관계없이 꼴딱꼴딱 잘 들이키는 편이지만 요즘에는 특히 와인을 즐겨 마신다. 계속 들이켜도 배가 부르지 않고 이렇다 할 안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좋다. 길쭉한 잔에 와인을 꼴꼴꼴 따른 뒤 입안에 잠시 머금고 목구멍 뒤로 꼴깍 넘기면 고단한 하루가 서서히 끝나는 것이 느껴진다. 술기운이 스르르 온몸을 감싸면 아,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곤 하는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술을 마시니 알겠다. 온전한 정신으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두침침하게만 느껴지는 고민에 명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날들이 늘어간다. 모든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 그런 날에는 술 한 잔의 힘이 필요하다.항상 취한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술기운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던 나는 다음 날이면 다시 소심하고 무력한 인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취기로 걸었던 전화를 후회하고 상대에게 뱉은 말을 자책하며 내가 아닌 내가 한 약속에 발목이 잡힌다.그럼에도 아직 술 한 잔은 내게 여전한 위안이 된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골라 담는 맥주와 샤워를 마친 후에 마시는 와인, ‘요즘 일 때문에 힘들지? 저녁에 만날까?’ 친애하는 친구에게 오는 연락이 가진 위로의 힘이 소중하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한 잔의 술을 마신다. 내일의 나는 나약할지라도. 일단 지금은 건배.

2021-12-14

혼자도 잘 삽니다

부모님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외면하던 때가 있다. 대학 졸업을 막 앞둔 시점, 마땅히 취업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데다 졸업 후 부모님이 생각하는 ‘응당 그래야만 하는 성과나 길’이 희미하던 때였다.나도 부모의 입장에서 뚜렷한 성과 없이 갈팡질팡하는 자식을 본다면 걱정이 들 게 분명하지만, 인생에 있어 누구나 방황하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고 그러니 다시 중심을 찾을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시길 내심 바랐다.결국 졸업 직후 직장을 구할 때까진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며 살아보기로 했다. 간간이 하던 아르바이트를 직원 스케줄로 바꾸어 하루 9시간씩 근무했다. 동시에 대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자격증을 위한 여러 학원과 센터를 다녔다. 아주 가끔 청탁이 오면 시를 썼고, 시집 제의를 받았을 땐 시집을 묶기 위한 창작자의 삶도 잠깐 살았다.그렇게 창작자와 생활노동자를 오가는 동안에도 늘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오십 통이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고 열 곳 정도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취업난속에서 길을 해매고 있단 현실이 씁쓸했다.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지만 늘 그대로 머무르는 듯 보였는지, 앞서 사회 경험을 겪은 이들의 조언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빈번이 생겼다. 낮엔 음식점에서 일하고 퇴근 후 시를 쓰는 날 보며 내 재능이 아깝다며 안타깝게 보는 이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왜 굳이 글을 쓰냐며 이해할 수 없다던 이도 있었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조언은 늘 끊이질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늘 궁금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가?약 3년 동안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예상치 못한 일을 매일 마주했다. 다양한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났고, 그들의 생각과 취향을 어떠한 이익이나 목표 없이 시시콜콜 나누어 즐거웠다.시도조차 해 볼 생각 없었던 암벽 타기를 하고, 런닝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낯선 향신료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았던 베트남 쌀국수와 맵고 얼얼한 마라탕의 맛에 눈을 뜬 건 그때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다양한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동안 자기 객관화와 확신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초중고교와 대학교를 나오며 늘 무한 경쟁과 성적 편가르기에 예민해져 있던 나는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타인의 세계를 어떠한 조건 없이 기웃거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행복의 기준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다,최근 비혼을 주장하는 20-30세대가 증가함에 따라 이를 보며 자폭 세대라 부른단 사실을 알았다.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낳지 않아 출산율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마치 2030세대가 자폭하려는 듯 보여서 였을까.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비혼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건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내 집 마련이 힘겨운 현실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는 건 판타지적인 사치에 가깝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 청년 취업난이 극심한 현실에서 나는 내가 낳은 아이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낳기 좋은 현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이 잔혹한 되물림을 굳이 반복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많은 2030세대는 의무나 목표로써 출산을 택하지 않길 희망한다. 결혼은 내 인생의 업적과 성공률을 지표하지 않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애초부터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가야하는 세대에겐 출산과 결혼은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다. 더는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뼈저리게 학습해왔기 때문이다.이러니 결국 남은 딱 한 가지의 선택지인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나에겐 일과 취미가 그렇다.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내 몸 하나 잘 건사하는 건강한 어른으로 지내고 싶다. 나의 선택에 확실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유롭고도 자주적인 삶을 산다면 충분히 만족스럽다.하지만 결혼과 출산을 외면하거나 도피한단 뜻은 아니다. 형식에 벗어나서 비혼도 행복을 추구하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또는 결혼을 희망하는 예비부부와 아이를 낳기 희망하는 이들에게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오도록 정치와 법률적 제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질 것이다. 누구의 잘못을 꼬집기보단 각 세대가 머리를 맞대어 미래 세대가 살기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2021-12-07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2022학년도 대학 수능 시험이 무사히 치러졌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맞이한 두 번째 수능인데, 지난해만큼 혼란이 생기지는 않아 다행이다. 날씨도 도와줘서 ‘수능 한파’ 없이 포근한 늦가을 날씨 속에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으니 이제 푹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못 잤던 잠도 몰아 자길 바란다. 물론 논술, 면접고사로 또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야 할 테지만 말이다.지난봄부터 가을까지 격주 금요일마다 한 남자고등학교에 가 강의를 했다. 문예창작부 동아리 학생들을 지도하는 외부 강사로 초빙되어 작년 그리고 올해, 두 해 동안 학생들을 만났다. 드론, 악기, 합창, 요가 등 여러 동아리들이 있는데, 문예창작부에는 우선지망한 동아리 정원초과로 떠 밀려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 2학년생 서른 명 중 자기 의지로 온 건 예닐곱 남짓. 학교는 ‘문집’이라는 결과물에만 관심이 있지 동아리 수업 과정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의욕 없이 좀비처럼 끌려와 앉은 학생들은 엎드려 졸거나 수학 문제집을 풀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서너 명은 눈이 빛났다. 그 눈빛들과 함께 벚꽃 지나고 장마 지나고 단풍까지 왔다. 지난 10월, 마지막 수업을 했다. 학교 행사로 한 주 거른 것의 보강이어서, 담당교사는 출석 의무 없이 학생들 자율에 맡겼다. 서른 명 중 절반인 열다섯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정된 두 시간 수업이 학교 사정에 의해 30분으로 단축됐다. 그저 학생들과 인사나 나누기로 하고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먼저 “개인은 엄격한 비개성화 연습을 거쳐, 자신을 온통 가로지르는 다양함, 자신 속을 헤집는 강렬함들을 향하여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된다”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문장을 들려주었다.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 ‘비개성화 연습’을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돼서 여행, 예술, 사랑 등 세상의 온갖 감동들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가치관과 세계인식을 전환케 하는 낯선 충격들을 직접 찾아 나서라는 의미에서였다.그리고 20대, 30대를 먼저 살아본 입장에서 사족처럼 말을 보탰다. 하나, 운전면허를 최대한 빨리 따라. 둘, 여행을 다녀라. 셋, 일기를 써라. 넷, 고전 영화를 보고 고전 음악을 들어라. 다섯, 비속어ㆍ욕설을 쓰지 마라. 여섯, 모든 여성에게 친절해라. 일곱, 직접 요리를 해라. 여덟, 꾸준히 운동해라. 아홉, 자기계발서를 읽을 바엔 그냥 책을 읽지 마라. 열, 취미를 가져라. 열하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젊은)꼰대 소리를 했다.그러고는 내 은사이신 장석주 시인의 시 ‘내 스무 살 때’를 읽어주었다. 장석주 시인은 내가 스무 살이던 해의 어느 늦가을, 고종석 작가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 ‘성년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를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에게 읽어준 적 있다. 그 글에는 “순금의 정신은 상상 속의 엘도라도가 아니라 바로 네 둘레에 있을 수도 있다 (…) 독립적이 되도록 애써라. 소수자들과 연대하려고 애써라”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때 온몸이 떨리는 감동을 받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참 한심했었지, 그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는 일마다 실패 투성이었지 (…) 불안은 나를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둡기만 했지/ 그랬으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다 속을 달리는 등 푸른 고등어 떼처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으니, 산책의 기쁨도 알지 못했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을 건넬 줄도 몰랐지”(장석주, ‘내 스무 살 때’)마지막 수업으로는 짧고, 인사치고는 꽤 긴 30분이 끝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지루한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며 기뻐하는 의식만이 아님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며칠 지나 한 학생에게 “문학에 관심이 생겼어요. 선생님 덕분에 시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앞으로 제가 쓴 글들을 한 번씩 보여드려도 될까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세상은 멈춰도 마음은 멈추지 않는다. 어디론가 가고 또 어디론가 온다. 그렇게 서로 닿는다.수능을 마친 학생들 모두 이제 세상을 향해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되어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금은 자기 안에 있다는 비밀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21-11-23

층간 소음이라는 딜레마

화이자 2차를 맞고 돌아온 토요일 오전이었다. 1차 때 부작용을 심하게 앓던 터라 일주일 전부터 컨디션 관리에 들어갔었고, 지레 겁먹었던 시간에 비해 접종은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차 때도 접종 당일엔 아무런 느낌이 없다 2-3일째부터 부작용이 시작되었으니 무리하지 말자 싶어 재빨리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암막 커튼을 치고 잠을 자려는 찰나에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반년 전에 이사온 옆집. 그 주인이 키우는 작고 하얀 말티즈였다.후에 알았지만 이는 분리불안 증세 중 하나로 보호자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초조함과 불안을 느껴 하울링을 낸다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사는 낡은 오피스텔은 방음이 전혀 되질 않는 다는 것이었다. 짧게는 한 두어시간만에 끝나지만 대게는 주인이 올 때까지 울음이 이어져 소음이 내내 지속된다. 이 문제는 6개월 째 매일 진행되고 있었고, 사실 강아지 울음소리 말고도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는 큰 티비 소리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이 문제를 그냥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참다못한 어느 날엔 포스트잇으로 정중히 부탁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강아지가 분리불안을 앓고 있단 걸 전혀 몰랐으며, 앞으론 주의하겠다는 다소 심플한 대답이었다. 그 뒤론 조금 소리가 잦아드는 듯 했지만 역시나 길게 가진 못했고 얼마 못 가 모든 상황이 전과 똑같아 졌다.이것 말고도 많은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주해야 하는 이웃이니 모든 걸 감안하고 이해해보고 싶었지만, 특히 몸이 아프거나 예민한 날엔 어찌할 수 없이 날이 섰다. 결론은 음료수를 들고 찾아가보기도, 경비실에 안내 방송을 부탁 드려봐도 진전되는 부분이 하나 없어서, 이 사람은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과연 있는 것인지. 정말 뾰족한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득해지고 말았다.그러다 며칠 전 뉴스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층간소음 문제가 급증하고 있단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온라인 수업이나 재택근무로 인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전보다 늘다보니 층간 소음 관련 민원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것인데, 한국환경공단의 자료를 빌려와보자면 올해 1월부터 시작하여 8월까지의 층간소음 민원 전화상담 접수 건수는 총 2만2천861건으로 지난해의 1만7천114 건을 뛰어 넘는 급증세를 보였다고 한다.하지만 문제는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센터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환경부와 국토부가 운영하는 층간 소음 센터에선 변호사나 주택관리사 등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소음을 측정하고 중재하는 방안도 마련되어 있지만 사실 이마저도 명쾌한 해결 방법이 되진 않는다. 최근 5년간 600여 건의 측정을 시도했으나 층간소음으로 인정받은 건 단 7%밖에 되질 않을 정도로 미미한데다 대부분 그저 ‘중재’를 권고한다는 것에 그치고 만다.이를 보며 많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실 그리 도움 되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건축법 규정이나 개선점 하나 없이 두루뭉술한 말이 오가는 동안 층간 소음에 대한 피해 사례는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가장 최근엔 인천 한 빌라에서 층간소음 문제로 인한 칼부림 사건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단 이유로 보복하기 위해 아랫집을 찾아가 칼을 휘두른 것인데, 바로 옆엔 경찰까지 있던 상황이었지만 커져 가는 상황을 말리지 못하고 끝내 피해자가 발생하고 말았다.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선 큰 발소리를 줄여달라는 한마디에 5분도 안 되어 피해자의 집을 두드리며 죽이겠다는 협박을 한다. 동영상으로도 증거물이 남아있지만 접근 금지 등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층간 소음으로 인한 피해 사례는 점점 가열화되고 있는데 법은 여전히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피해자는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끝내 피해자여야만 하고 가해자는 끝끝내 죄를 저질러 사건을 일으킨다.언제부턴가 집이 마음 불편한 곳이 되었는지 생각하다보면 서글퍼진다. 이웃 간에 원만한 대화로 이 문제가 정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든 게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젠 내 집 안 조차 결코 안심할 수 없다.

2021-11-23

싸워야 할 때를 안다는 것

나는 유난히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말싸움이라고는 져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세 살 터울인 친오빠를 필두로 학교 친구들, 동네 언니들, 심지어는 선생님들과도 언쟁을 피하지 않았다.말끝마다 “왜요?” 하고 묻는 아이들의 화법에는 묘한 힘이 있다. 생각의 여지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혹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해보아라”와 같은 말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스스로 증명하라는 것과 같다.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싸움을 하다 보면 상대는 제풀에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싸움의 특성에 관해서 깨달았다. 상대를 공격하면서 드러나는 무시무시한 폭력성과 뒤따라오는 허무함. 상대를 이긴다는 건 정말 이기는 일이 아니었고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이겼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했다.어떤 것도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쁜 상황만 생겨났다. 어째서 나는 이들과 언쟁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의문이 길어지자 묘한 회의감이 찾아왔다.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그만 갈등도 피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한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꾹 눌러 삼켰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외면하거나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해버리는 방향을 선택했다.칼날은 차라리 목구멍 안에 감추고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누군가는 내가 점잖아졌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싸움의 지난한 과정이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뭔가에 분노한다는 건 굉장한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이 특정한 상대를 향해 있을 때는 더욱더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버리면 끝날 일이지만 싸우려고 하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잘못뿐만 아니라 내 잘못까지도 자연스럽게 들춰지게 된다.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비겁하고 치졸한 인간인지 꺼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이 힘겹고 아프고 성가실 수밖에 없다.회사 선배가 습관처럼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다는 친구의 고민을 들었다. 지적하기에는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함부로 건의했다가는 사이가 틀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그분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냥 좋게 생각해.”라는 말이 내 입에서 기어코 튀어나왔을 때야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시위대 때문에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며 ‘아, 정말 피곤하다’라고 생각한다든지, 부당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시스템을 바꾸려는 목소리를 낼 때 ‘그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면서 넘겨왔던 날들. 어리석고 게으른 생각으로 점철된 시간들.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이런 나의 모자람을 친구에게 들킨 것이 창피했다.이제까지의 나의 싸움은 얕보이기 싫어서 내는 큰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입을 다무는 건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아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를 아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는 것일 테다. 그래야만 하니까.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들은 기꺼이 싸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위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배제된 이들의 존립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단 한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때를 떠올린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내게는 더 많다. 이 고요한 시간은 누군가의 투쟁으로 인해 받고 있는 특혜라는 생각을 한다. 그 치열한 분투를 내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

2021-11-16

낭만이 사라진 세계에서

한국 영화에서 ‘느와르’라는 장르는 더 이상 한때의 유행이 아니다. ‘초록 물고기’, ‘비트’에서부터 ‘친구’를 거쳐 ‘비열한 거리’, ‘신세계’, ‘차이나타운’, ‘불한당’과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범죄 조직을 소재로 하는 느와르 영화는 이미 한국 영화의 한 축이 되었다. 현실의 부정함과 비정함에 대해 폭력으로 응수하는 느와르의 문법은 우리가 현실에서 상상하지만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것을 저지르고,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분투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그 속에서 유오성은 빼놓을 수 없는 배우인데, 한국형 느와르의 정점을 찍은 ‘친구’에서 준석을 통해 보여준 그의 연기는 이후 수많은 느와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연기의 교본이 되었다. 우정과 의리, 그리고 비정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비극 속에서, 그의 천부적인 표정 연기는 느와르적 인물이 취해야 할 감정연기의 표본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 그가 최근 ‘강릉’이라는 영화를 통해 느와르 장르에 다시 복귀했다. 여기에서 유오성은 그간 보여준 연기 경력을 느와르라는 틀 속에 모두 녹여낸 것 같은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그가 연기한 길석이라는 캐릭터는 이전의 유오성식 느와르 연기와는 분명 결이 다르다. 비슷한 위치에 놓인 인물과의 정쟁으로부터 빛을 발하던 이전의 인물 연기와 달리, 여기에서 길석은 조직 내에서 든든한 아우이자 형이라는 다소 다른 인물로 제시된다. 그 속에서 유오성은 의리와 우정을 중요시 여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규율을 위해 상대를 단죄해야만 하는 인물을 충실하게 연기해낸다.여기에서도 다시금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표정 연기다. 첫 장면에서부터 바다를 배경으로 진한 파랑 계열의 톤 속에서 터져나오는 그의 표정 연기는 영화 전체를 압축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이후로도 그의 표정 연기는 영화의 터닝 포인트마다 등장하여 그 장면의 개연성을 표정만으로 납득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해안도로의 격투 장면에서부터 리조트의 옥상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의 스토리란 바로 이 장면의 유오성의 표정 연기를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속에서 유오성은 길석의 입을 빌어 ‘더 이상 낭만은 없다’고 말하며 경쟁 조직의 두목을 무참히 칼로 찌른다.영화를 모르는 평자의 평이겠으나, 사실 영화로서의 ‘강릉’은 좋은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기존의 영화들을 통해 반복된 느와르의 문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지만 개연성의 부족으로 인해 번번이 극적 긴장을 상실하며, 개연성의 부족을 학습된 관객의 느와르적 감각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인물의 설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설정처럼 강제로 주입된다. 그렇다보니 인물의 성격과 심정을 유추할 수는 있으나, 몰입되지는 않는다.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는 관객에게 플롯이 가지는 내적인 개연성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느와르적 문법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며 그것에 기대어 따라가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길석의 대사를 듣고 나면 왠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의도적인 장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기대하는 의리와 조직의 규율, 그로인해 초래되는 비극이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현실은 ‘돈’ 때문에 벌어지는 한 편의 살인극에 불과하다는 것. 영화가 여러 개연성을 위한 장면을 생략한 것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은 게 아니라 더는 그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 말이다. 우리가 느와르를 통해 기대하는 것들은 하나의 낭만에 불과하고, 현실은 돈 때문에 벌어지는 멋없고 잔인하며 무정할 따름인 피바다에 불과하다는 것, 어쩌면 그게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영화의 의미였던 것은 아닐까.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영화의 첫 장면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유오성이 길석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 표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의리와 우정이 낭만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 그런 낭만마저도 돈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그것이 아직 건재하게 살아있다는 ‘척’을 해야만 하는 인물의 슬픔. 우리가 그나마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척을 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는 메타 픽션적인 교훈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리라.

2021-11-16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새로운 씬

지난 여름부터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 푹 빠져있다.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는 국내를 대표하는 여자 댄서들이 참가하여 댄스 경연을 펼치는 배틀 프로그램이다.첫 화부터 뜨거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매 회가 거듭할수록 대단한 파급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예능 부분에서 4주 연속 콘텐츠 기능력 1위를 차지했으며 비드라마 화제성 부분에선 5위의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2021년 최고의 화제 프로그램이라는 수식어와 걸맞게 SNS에만 접속해도 스우파의 인기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그들이 만들어낸 유행어가 밈이 되어 돌아다니고, 팀별로 펼치는 댄스 경연 장면은 하이라이트 편집본으로 제작되어 조회수 2억 회에 달하고 있을 정도다.게다가 라이브 무대로 열리는 콘서트 또한 1분도 안 되어 서울 포함 총 5곳 지역의 표가 전부 매진될 정도라니, 아이돌 못지않은 거대 팬덤을 지니게 된데다 화보촬영과 인기 예능 출연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사실 그간 여러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대부분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비슷한 플랫폼과 서사를 지녔음에도 이와 반대로 스우파가 뜨거운 화제성을 낳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그동안의 경연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냈으며 단순 스토리와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흥미만을 이끌어내는 것에 그쳤다.하지만 이러한 전형적인 폼에 질린 시청자들은 스우파에서도 어김없이 진행됐던 악마의 스토리에 속지 않았다.오히려 시청자들이 잘못된 편집점을 찾았을 정도였고 전 출연진이 여성인만큼 강렬하고도 능동적인 우먼 파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화려한 춤과 노래를 뽐냈던 아이돌 발굴 경연 프로그램과는 달리 정제되어 있지 않은 말투와 리액션을 보여주어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는 호평이 크다.그들은 춤을 통해 자신만이 품고 있는 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해내며 정형화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롭고도 힘 있는 결을 보여줬다는 것이다.경연이기에 라이벌 구도가 선명히 드러나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 초반에는 있었지만 가질 수밖에 없던 오해를 풀면서 그들은 서로의 열정을 위로하고 공감하며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 분출로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시선을 잡아끄는 퍼포먼스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머뭇거림보다는 직진에 가까운 열정과 충실함에는 숨을 멈추고 멍하니 장면을 보게 한다.음악이 시작되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신체의 일부분을 높게 들거나 뻗으며 상대를 제압하거나 표정으로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가벼운 손짓과 눈빛엔 정확한 감정과 의도를 담아 스테이지를 장악한다.춤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댄서들은 인상 깊은 씬을 여럿 보여주었다.파이널 무대로 선 ‘훅’팀은 ‘엄마가 아이에게’라는 곡으로 그간 보여주었던 파워풀하고 재기발랄한 춤에서 벗어나 수화를 통해 모성애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춤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많은 언어를 전달하여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 사실을 알았다.‘프라우드먼’팀에서 보여준 무대 또한 잊지 못할 것 같다.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보여준 무대에선 남성과 여성이라는 고착화된 관념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은 의견과 리듬 그리고 가치관을 통해 이루어져 있으며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여성 또는 남성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사실 경쟁 무대인만큼 가장 화려하고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어야 눈에 잘 띄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잘 만들어진 무대나 익숙함을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것을 무대 위로 이끌어 보여주었다는 것에 감명 깊었다.댄서란 무대 위의 가수 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 오는 걸로만 생각했었다.하지만 한 명의 가수와 무대를 빛내게 하는 것은 여러 댄서들의 퍼포먼스와 열정 덕분이라는 걸. 한 분야에 있어 진심을 다하는 이들의 행보는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던 가쁜 경험이었다.비단 댄서만이 아닌 이 스트리트 위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도 해당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눈에 띄지 않지만 묵묵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2021-11-09

밥섬 식도의 위대한 밥상

동해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서해만이 가진 ‘쓸쓸한 아름다움’이 사무치기도 한다.고요하고 내밀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서해의 작은 섬 식도로 간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60세대 2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적 0.86㎢의 작은 섬이다.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여객선 안에는 격포에 장을 보러 갔다가 섬으로 돌아오는 어르신 몇이 전부였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객선이 접안하자 어르신들은 손수레와 보따리를 양손에 짊어지고 다시 섬을 밟았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낚시가방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식도에 올 때면 늘 찾는 한 민박으로 향했다. 서해의 작은 섬들이 보통 그렇듯 식도에도 변변한 식당은 없고, 그나마 민박과 밥을 겸하는 서너 곳이 다.그런데 섬에 상수도 공사가 벌어져 공사 노동자들이 지내느라 빈 방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식도리 이장님이 근처를 지나다가 자기네 집에서 묵으라고 하신다. 이장님 집도 민박과 식사를 겸하는데, 공사 인부들이 묵긴 하지만 남는 방이 있다고 했다.이장님 차에 사모님과 함께 셋이 끼어 타고는 마을 몇 군데를 다니며 멸치를 내려다 줬다. 집에 도착하니 이장님께서 안방을 내어주며 편하게 쓰라고 하신다. 너그러운 인심이 따뜻한 물살을 퍼뜨렸다.가방을 풀고, 낚시 준비를 해서는 방파제 석축에 섰다. 혼자 고요함을 찾아 온 섬, 마음에서 수런거리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우럭을 먹을 만큼만 잡고 낚시를 접었다.욕심을 버리는 순간 그동안 내 안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석축에 부딪치는 파도가 뭐라고 말을 한다. 할 말을 오래 참아 붉어진 입술처럼, 저녁노을이 나를 보며 옴짝달싹한다. 일찍 떠오른 낮달이 허밍으로 노래한다. 먼 산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단풍잎이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외부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와 풍경과 내가, 세계와 내가 경계 없이 몸을 섞을 때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 깊은 곳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우럭 몇 마리 챙겨 이장님 집에 오니 인부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방마다 고단한 몸을 누였고, 이장님 가족은 거실에 앉아 화투 놀이하느라 정신없다. 사모님이 식당에 있는 반찬과 찌개를 마음껏 꺼내 먹으라 하신다.우럭 회 한 접시 뜨고, 반찬통을 열었다가 그만 황홀해지고 말았다.꽃게장, 어묵볶음, 장조림, 오이소박이, 방풍나물, 멸치볶음, 버섯볶음, 파김치, 알타리김치, 물김치 등 온갖 맛깔스런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릇 하나에다 반찬 두세 가지씩 함께 담았다. 냄비에는 묵은지와 비계 숭덩숭덩한 촌돼지 고기가 가득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한 그릇 떠서 상에 올리니, 마음부터 배부른 위대한 밥상이 완성되었다.식도(食島)가 왜 ‘밥섬’인지 이제야 알겠다. 예로부터 어장이 풍부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는 섬, 먹거리보다 인심이 더 풍요롭다.“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이재무, ‘위대한 식사’)라는 시가 절로 떠오르는 밥상 앞에서 뭉클해졌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을 밥 한 덩이와 함께 목구멍으로 쑥 넘기고, 차가운 소주로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는 동안 저녁은 깊고, 저쪽 거실에서는 찰싹찰싹, 화투패 달라붙는 소리가 풀벌레 울음처럼 정다웠다.아침놀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6시 50분. 기상 악화로 7시 20분 첫 배 이후엔 배가 안 뜬다는 방송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서려는데, 사모님이 아침 먹고 가라 하신다. 공사 인부들과 함께 앉아 또 한 번 뜨거운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인부들과 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비록 짧은 몇 분이지만, 나는 낯선 식구들과 말없이 정든 밥상을 떠나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나는 ‘밥섬’ 식도에서 그 밥 한 끼를 먹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생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2021-11-09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의 여러 시집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 時代(시대)의 사랑’이다. 시를 잘 모르던 시절, 제목이 너무 예뻐서 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시집에 사랑에 대한 잠언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안에 든 건 그로테스크하고 무참한 인간의 슬픔이었기에 많이 놀랐던 것 같다.생각해보면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에 걸린 잠언이나 경구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랑은 대상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니까. 사랑은 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깊이만큼의 처참함을 간직한다. 그 안에는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도, 그리하여 그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이 時代의 사랑’의 한편에 아름다운 처량한 마음이 있어, 다른 한편에는 그로 인해 찢겨지고 비참해진 마음이 같은 크기로 놓여 있는 것처럼. 그처럼 ‘나’의 마음이 아름다움과 처참함으로 양분되는 건 분명 사랑의 힘일 것이다. 그뿐일까.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내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모두 사랑의 능력이다.이 모든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나 자신이 비루하고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라도, 그 시대의 사랑은 결코 다른 사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비참하게 된다 할지언정,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랑에게 나의 삶의 중심을 양보하는 것, 그게 ‘이 時代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었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그래서 내게 80년대의 사랑이란, 마치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루어지는 모험과도 같이 느껴진다. 절박하고, 비참해지기도 하는 사랑. 사랑이 이루어질 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모험 같은 사랑은 왠지 사랑이 아닌 인정투쟁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그 시대가 그만큼 사랑 외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혹은 자신의 다른 의미를 쟁취할 길이 없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랑’에게 자신의 삶의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흔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현실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에 따라 사랑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꾼다.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모순형용적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사랑 외에 다른 인정의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가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제는 사랑을 통해서조차 그와 같은 것들이 이룰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사랑은 가장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사랑이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빠져가고 있다고.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제는 조건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이 사랑의 성패를 결정한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속에서나 혹은 액정 너머로만 존재할 뿐이다. 예쁜 선남선녀가 좋은 경제적 조건 하에 어떤 고난 없이 서로를 위하는 그림 같은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더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은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최승자의 시 속 화자가 구원받지 못한 형상이 되었던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구원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사랑조차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 사랑에 무관심해져버린 것 같다고.우리는 늘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 말은, “비록 이토록 처참한 나지만 사랑해줘”라는 투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은, 사랑을 위해 더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에 부쳐서, 사랑을 위해 무리할 힘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걸지도. 그 모든 힘듦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던 사랑은 이제 과거에만 남았다.

2021-11-02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걸까. 무수한 언어가 별처럼 모여 일상을 구성하고 있다. 빈번하게 마주치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말을 꺼내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의 발화를 고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말은 혀끝에 모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우며 철근처럼 무겁다. 온종일 마음에 남아 있다가도 잠깐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게도 속성도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폭신폭신한 말도 함부로 다루게 되면 무엇보다 날카로운 흉기로 바뀌기 마련이다.거짓말에 속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온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탈함과 무력함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음을 할퀸다. 영혼에 생채기가 나면 쉽게 치유되기 어려워 한동안은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도덕적으로 매우 어긋난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금기로 존재한다.거짓말을 단순히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있다. 정치인이 내뱉는 거짓말처럼 허망한 발화도 있지만 상대를 위해서 거짓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아픈 진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 거짓말은 부정적인 언사라기보다 다정하고 슬픈 발화에 가깝다.소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짓말의 장르다. 허구로 구성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말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틀린 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표현임은 확실하다. 소설은 무엇보다 현실을 냉엄하게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찬찬히 그려나가며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이거 다 거짓말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면서 텍스트를 따라간다. 허구의 세계를 살아가는 허구의 인물을 응원하고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에 투영하기도 한다. 거짓이라는 형식을 통해 도리어 진실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과하다 느껴질 만큼 달콤하다. 거짓말처럼 나쁜 것이 좋아지고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런 순간이 온대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순간을 믿기 어려워하고 불행에 익숙한 사람처럼 매일을 살아간다. 거짓말처럼 기쁜 날을 앞에 두고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성거리기도 한다.어째서 그런 것일까. 거짓의 달콤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은 우리의 발목을 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눈을 뜨면 달콤한 거짓말의 세계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한 거짓말은 가장 강력한 찰나로 작용한다.그러한 찰나가 그저 무의미한 것은 아닐 테다. 가끔 우리는 세상에 그리고 상대에게 현명하게 속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기꺼이 속아주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진실 한 스푼을 발견하게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맛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리한 상대를 치켜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아프면서 아프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속고 속이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다. 나는 그 진부한 연극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그것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오해이며 소중한 이해다.우리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한다. 가끔은 서로의 말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말은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말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내야 할 때도 있다.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행을 숭고하게 여기고 기꺼이 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이며 세계를 이해하는 노력이 되기 때문이다.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도래하는 날을 상상한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희망찬 내일을 바란다.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낙관 또한 지난한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일 테다.

2021-11-02

한글 생각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1947년 조선어학회가 편찬한 ‘우리말큰사전’의 머리말 일부다.일제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온갖 고난을 겪은 ‘우리말’이 흩어진 글자와 단어들, 방언과 속어들, 기억들, 옛 이야기들, 꿈과 마음들, ‘엄마’와 ‘윤슬’과 ‘미리내’와 ‘개여울’들, 그 모든 처절한 뼈와 살들을 겨우 한 데 모아 몸을 갖췄다. 한글학자들의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전 세계에 현존하는 약 3천 개의 언어 중 고유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단 20여개에 불과하다.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헌신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모이’는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주인공 김판수(유해진)는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간다. 그는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즉자적인 인물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말은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말은 곧 ‘우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자적 존재로 변화한다.판수의 자기존재 전환은 까막눈인 그가 한글을 깨우쳐 나가는 학습과 함께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 우리말을 지키고자 민중이 흘린 피, 땀, 눈물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그리스 크레타 섬은 400년 동안 터키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다. 크레타 출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미할리스 대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노인은 웃었다. “내가 고생고생하면서 글자를 배운 이유, 이제 알겠지? 이 마을 벽이란 벽은 한 군데도 빼놓지 않을 테다. 교회 종탑에도, 회교 사원에도, 내 죽기 전에 써둘 테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한 글자씩 쓰고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자기 솜씨를 감상했다. 그는, 가로로 긋고 세로로 긋기만 해도 목소리, 그것도 우렁찬 함성이 되는 신비에 어리둥절했다. 이런 부호가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그저 텅 빈 채 묵묵히 서 있던 담벽과 대문이 이제 소리 높이 자기네 희망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은 말의 해방이 곧 정신의 해방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총탄 빗발치는 전장에서 싸운 독립군 못지않은 것이다.우리는 한국어를 지켜낸 이들의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와 소설을 쓰고 읽고, 줄임말과 합성어와 신조어 등으로 우리말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해야 한다.‘말모이’ 후반부에 판수의 중학생 아들 덕진이 여동생 순희를 업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요양병원에 5년째 누워 있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할머니는 일본군 전투기 활주로가 있던 마을에서 태어나 청력이 온전치 않았다. 당연히 말의 배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요이땅’, ‘벤또’, ‘요시’ 같은 일본말을 자주 했는데, 볕 좋은 날이면 혼자 마당에 앉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하셨다.“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우리말큰사전’ 머리말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다. “조선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모두 ‘엄마’, ‘아빠’, ‘해’, ‘달’, ‘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배우며 울긋불긋 말의 꽃이 피어나던 모국어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얼마 전 한글날이었다. 2012년 공휴일로 재지정된 후 역사적 의미보다는 ‘노는 날’로 여겨진다. 국문학과 졸업 시험에 토익 성적을 제출해야 하고,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풍조 속에서 이런 글은 고리타분한 것일지 모른다.다만, 드라마와 케이팝 열풍으로 전 세계인들이 한글을 주목하는 지금, 나는 우리말이 세계시민의 ‘제2외국어’쯤 되는 꿈을 꿔본다. 그러면 한국에서 노벨문학상도 나올 것이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망상은 볕 좋은 주말 낮잠에 이미 전송해뒀다.

2021-10-26

비접종자가 살아가는 법

최근 화이자 1차 접종을 맞았다. 평소 피부알레르기를 심하게 앓고 있던 터라 백신 접종을 망설이고 있었지만, 백신 미접종자로 회사 내 카페와 식당 출입이 제한되자 오랜 고민 끝에 접종을 결심하게 됐다.그 전에 물론 피부과도 몇 차례 들러 여러 의사 소견을 들어봤지만 큰 위험은 없겠으나 부작용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고 했다.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해서 접종을 결심하게 되었고 실제로 백신 접종을 해주었던 의사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호쾌하게 주사를 놓아주었다.그렇게 화이자 1차를 맞은 첫날과 이틀은 무리 없이 지나갔다. 괜히 겁먹은 건 아닐까 생각하던 와중 문제는 3일째부터 시작됐다.심장 부분이 아프면서 저릿하더니 목에는 이물감이 걸린 듯 호흡이 불편해졌다. 먹는 즉시 게워냈고 두통과 울렁거림도 찾아왔다. 근처 약국에 들려 증상을 호소했더니 진통제를 추천해줬다.다음날, 진통제를 먹고 나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오전 업무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향했다.회사 근처 내과 2곳을 들렸으나 백신 이상증세 환자는 예약이 아니라면 당일 진료를 보지 않는단 황당한 말을 들었다. 듣자하니 이상증세 환자 예약은 2주나 밀려 있어서 오늘 신청하면 2주 뒤에나 진료 볼 수 있단 말을 했다. 그 말을 두 군데서 들으니 아찔해졌다.그렇게 병원을 나와 다음 내과를 찾으러 지도를 켰으나 이미 회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들 밖에 남지 않았다.응급실 밖에 답은 없는 것인지, 그곳에선 기다림 없이 진료와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곧 회사로 돌아가야 했고, 책상 위에는 맡은 업무가 한참이나 밀려있었다.결국 급한 마음에 눈앞에 보이는 이비인후과에 들어갔고, 다행히 그곳에선 진료를 받아주었지만 대기시간이 무려 삼사십 분 즈음 걸렸다. 겨우 진료를 보았는데 의사와 간호사의 얼굴은 지칠대로 지쳐 보였다.의사는 나 같은 환자가 하루에도 많이들 온다며, 이런 증세는 아주 흔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앓고 있는 증세에 맞게 약 몇 가지를 처방해줬다. 별 수 없었다. 30분 간 수액을 맞고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회사에선 맡은 업무를 하며 나와 같은 이상증세를 겪는 이들을 인터넷과 유튜브로 찾아보았다. 가슴 통증은 물론이고 겨드랑이 멍울, 두드러기, 미각 후각 상실은 물론이고 심할 경우 시각 상실,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겨드랑이 멍울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앓고 있는데 이러한 부작용을 제대로 명시하고 있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또한 정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대처도 피해 지원도 나서지 않고 있는 상태이니 난감했다. 이상증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원 정보 또한 인터넷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급한대로 근처 응급실에 연락해보니 3시간 대기는 물론이고, 각종 검사 비용은 오롯이 내가 떠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검사를 받고 나면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런 와중 10월 23일자로 전국민 70% 백신 접종 완료율을 도달했다. 방역당국이 단계적 일상회복 전환 기준을 내세운 퍼센트율을 넘어선 것이다. 단계절 일상회복은 곧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인데 위드 코로나란 코로나19의 완벽한 종식을 막는다기 보단, 그간의 방역 체계를 바꾸어 코로나 19와의 공존을 준비해야 한다는 전환 개념이다.현재 위드 코로나 시대에 직면하게 되면서 백신 패스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정부는 접종 완료자에 한해 공공시설 이용 제한을 완화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신 접종을 마친 이에겐 백신 패스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는 QR정보로 접종 여부를 파악하여 경기장이나 다중이용 시설 출입 이용이 허용된다.그러나 백신 패스가 강행되는 분위기가 되자 접종을 중단하려는 이들이나 미접종자들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백신 접종에 개인의 선택권이 전혀 존중받는단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기저 질환 환자는 애초부터 선택권이 없을뿐더러, 나의 경우에도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주변의 압박과 환경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이렇게 맞는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부작용과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단 외면의 상황에 처하니 이젠 2차를 맞을 엄두가 안 난다.더군다나 부스트샷 권장과 새로운 AY 4.2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이라니. 미접종자들이 점점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은근한 압박과 함께 계속해서 소외될 뿐이다.

2021-10-26

공정과 평등이라는 게임의 룰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여러 문화들을 어떠한 제한 없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가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된 덕분에 우리 세대는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들을 아주 손쉽게 향유할 수 있었다. 만화, 영화, 음악,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문화들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공유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나의 10대를 사로잡은 것은 게임이었다. 삼국지, 영웅전설, 랑그릿사, 울티마 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게임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화려한 그래픽과 비장한 스토리에 사로잡힌 우리는 꼼짝없이 밤을 새어가며 전국의 통일과 세계의 안위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이 되어갔다.내가 게임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 이유가 있다. 1등을 강요하지만 어떻게 1등을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나의 노력보다 늘 더 노력하는 누군가로 인해 경쟁 속에서 뒤처지기만 했던 현실과 달리 게임의 세계는 공정과 평등을 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 강해질 수 있으며, 노력은 결과와 늘 일정하게 비례했다. 다른 것 필요 없이 단지 컴퓨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이 세계를 현실보다 사랑했던 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세계는 현실보다 공정했다. 노력을 하고, 그 노력에 따라 공평한 결과를 분배받을 수 있는 세계. 모든 기회가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세계. 물론 ‘리니지’와 같은 MMORPG 게임에서는 빈부의 격차와 힘의 논리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또한 게임의 룰에 따라 얼마든, 언제든, 누구든 뒤집을 수 있었다. 필요한 건 게임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노력 두 가지 뿐이었다. 우리가 그 세계 속에서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건 이와 같은 게임의 룰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 또한 이젠 옛날의 얘기에 불과하다. 게임의 룰은 더 이상 모든 유저에게 공평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현실의 자본력이 게임 속 판도를 결정하는 가운데, 게이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들보다 많은 지식이나 노력이 아니라 게임 밖 현실에서의 재력이다. P2W(Pay to Win)이 기본 법칙이 된 게임 속에서 플레이를 통해 강해지는 것보다 같은 시간 돈을 벌어 그 돈을 게임에 쏟아 강해지는 것이 더 효율적이게 된다면, 과연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게임일까? 이와 같은 구조는 게임의 룰이 왜곡되고 변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게임의 룰은 모든 유저에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게임의 룰 또한 유저의 자본력에 의해 그 적용이 얼마든 달라진다.90년대와 2000년대의 게임사가 유저 친화적 입장에서 게임을 디자인하고, 유저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 정착시키고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과 달리, 이제 게임사는 유저들에게 더욱 경쟁을 부추기며 그러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으로 과금을 강요한다. 그 과정에서 게임의 룰은 더 많은 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되며, 이와 같은 과정은 유저들을 지치게 만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가뜩이나 수저 계급론이 팽배해진 현실 속에서 게임 속 세계마저 현실과 유사하게 돌아가도록 구성된다면, 이를 환영할 게이머는 과연 몇이나 될까? 최근 나타난 NC소프트의 부진은 이와 같은 게임사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들이 예전과 같은 게임의 룰을, 공정과 평등이라는 기본적 원칙이 지켜지는 세계를 원한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게임의 룰이 공정하고 평등할 때, 그리고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게임 속 세계는 나름의 합리성을 통해 지속된다. 그와 같은 게임의 룰이 깨질 때, 유저들은 게임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전 게임의 향수에 빠지거나 클래식 버전의 게임에 몰입하는 건 단순한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공정과 평등이라는 게임의 룰이 지켜지는 세계를 원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게임이 현실을 닮아가는 것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에게 도피할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선언과 같기 때문인 것일까. 그렇다면 이 글이 게임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2021-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