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봄이다. 서늘한 밤 목련 주우며 거니는 산책로도 좋고, 얇은 경량 패딩 하나 입고 가벼운 걸음으로 걷는 것도 즐겁다. 겨울 길거리에서 만나는 녹차호떡이나 크림 붕어빵을 파는 트럭은 보기 어려워져서 아쉽지만, 그럼에도 주머니 안쪽에 3천 원씩 품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다.
퇴사를 한 뒤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서 그간 못 갔던 병원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났지만 어쩐지 금방 시들해졌다. 여유 시간엔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기 위해 양말에 꽃 자수 놓는 법도 배워보고, 펀칭니들이나 썬캐쳐 만들기 등 손으로 집중할 수 있는 취미에 몰두해 보려 했지만 이 또한 쉽게 질리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집 근처 마트 안에 있는 토이 샵에서 뽑기 기계를 발견했다. 기계 앞에 내 또래로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지 순간 장난감 샵에 들어온 게 맞는지 다시금 확인 했다. 대부분 팔에 플라스틱 바구니를 끼고선 한창 뽑기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인기 캐릭터를 뽑을 수 있는 기계 앞에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을 정도로 진귀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직원분께 여쭈어보니 인기 캐릭터인 경우엔 매장에 입고된 지 4시간 만에 뽑기 상품이 동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호기심에 친구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뽑기에 시도해보았다. 동전을 차곡차곡 넣어 레버를 돌릴 때 묵직하면서도 경쾌하게 돌아가는 움직임이 어찌나 짜릿하던지! 동그랗고 매끄러운 플라스틱 케이스가 배출구로 떨어지는 소리도 유쾌한데다 형형색색의 캡슐을 쥐고 있으니, 어린 시절 문방구 앞에서 납작이 수그려 뽑곤 했던 해맑은 열정이 단숨에 기억나고 말았다.
레고나 인형, 스티커나 다이어리 등 키덜트족들의 취향을 겨냥한 제품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어른(adult)이지만 아이(kid)시절 좋아하던 감성과 취향을 추구하고 즐기는 키덜트 족은 이미 식음료, 뷰티, 패션 업계 아울러 놀라울 만큼 커다란 시장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콘텐츠진흥원의 자료를 참고해보자면 국내 키덜트 시장 규모는 지난 2014년 5000억원대에서 지난해 1조6000억원까지 성장했고 추후 최대 약 11조원까지 성장할 것이라 예측했다. 특히 뷰티나 패션 쪽에서도 큰 확장세를 보이고 있는데 뷰티 브랜드 이니스프리는 찰스 M. 슐츠의 만화 피너츠(스누피) 캐릭터와 협업하여 한정 에디션을 출시했고 의류 브랜드인 빈폴 또한 스누피 캐릭터와 콜라보한 제품을 내놓았다. 이탈리아 대표 명품 브랜드인 구찌는 2020년 쥐띠 해를 맞이하여 미키마우스X구찌 컬렉션을 선보였었으며 출시 후 완판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또한 밀레니얼 세대의 어린 시절 즐겨 먹던 먹거리를 다시금 재현한 포켓몬 빵 시리즈, 초등학교 문방구에서 팔던 간식 세트 등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먹거리들이 뉴트로 트랜드 흐름에 발맞추어 반가운 모습으로 재등장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소풍 필수품이었던 뿌요 소다 또한 24년 만에 재출시 되었는데, 집 근처 편의점에서 나의 첫 탄산 음료였던 뿌요소다를 발견하자마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만큼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 느낌이었달까.
물론 강렬한 추억 여행을 하게 해준 건 뽑기였다. 뽑기 기계가 있는 마트 주위만 가도 기분이 절로 상기되는데다, 어느새 뽑기를 하러 가기 위해 산책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뽑기에 한참 빠져들 때쯤 느낀점이 하나 있다. 원하는 걸 뽑기 위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너무나 당연하지만 막연히 심취해 있다 보면 갖고 싶은 제품을 뽑기 위해 잔뜩 욕심이 올라 무작정 돈을 밀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결국 필요 없는 제품만 실컷 뽑다가 덩그러니 남은 씁쓸한 욕심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자제력을 잃고 낭비를 저지른 날엔 바다 깊숙이 머무르고 있는 해녀를 생각한다. 딱 자신의 숨만큼만 있다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녀처럼 내게 딱 주어진 몫만을 고려하여 행동할 것. 열정과 중독은 비슷한 듯 싶으면서도 분명한 한 끗 차이를 지니고 있다. 뽑기로 다시금 지혜로움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