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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혼자도 잘 삽니다

부모님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외면하던 때가 있다. 대학 졸업을 막 앞둔 시점, 마땅히 취업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데다 졸업 후 부모님이 생각하는 ‘응당 그래야만 하는 성과나 길’이 희미하던 때였다.나도 부모의 입장에서 뚜렷한 성과 없이 갈팡질팡하는 자식을 본다면 걱정이 들 게 분명하지만, 인생에 있어 누구나 방황하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고 그러니 다시 중심을 찾을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시길 내심 바랐다.결국 졸업 직후 직장을 구할 때까진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며 살아보기로 했다. 간간이 하던 아르바이트를 직원 스케줄로 바꾸어 하루 9시간씩 근무했다. 동시에 대학원에 등록하기도 하고, 자격증을 위한 여러 학원과 센터를 다녔다. 아주 가끔 청탁이 오면 시를 썼고, 시집 제의를 받았을 땐 시집을 묶기 위한 창작자의 삶도 잠깐 살았다.그렇게 창작자와 생활노동자를 오가는 동안에도 늘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오십 통이 넘는 곳에 이력서를 넣었고 열 곳 정도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취업난속에서 길을 해매고 있단 현실이 씁쓸했다.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지만 늘 그대로 머무르는 듯 보였는지, 앞서 사회 경험을 겪은 이들의 조언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빈번이 생겼다. 낮엔 음식점에서 일하고 퇴근 후 시를 쓰는 날 보며 내 재능이 아깝다며 안타깝게 보는 이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왜 굳이 글을 쓰냐며 이해할 수 없다던 이도 있었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조언은 늘 끊이질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늘 궁금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가?약 3년 동안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예상치 못한 일을 매일 마주했다. 다양한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났고, 그들의 생각과 취향을 어떠한 이익이나 목표 없이 시시콜콜 나누어 즐거웠다.시도조차 해 볼 생각 없었던 암벽 타기를 하고, 런닝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고, 낯선 향신료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았던 베트남 쌀국수와 맵고 얼얼한 마라탕의 맛에 눈을 뜬 건 그때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다양한 방식으로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동안 자기 객관화와 확신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초중고교와 대학교를 나오며 늘 무한 경쟁과 성적 편가르기에 예민해져 있던 나는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유로워졌다. 타인의 세계를 어떠한 조건 없이 기웃거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에 행복의 기준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다,최근 비혼을 주장하는 20-30세대가 증가함에 따라 이를 보며 자폭 세대라 부른단 사실을 알았다.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낳지 않아 출산율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마치 2030세대가 자폭하려는 듯 보여서 였을까.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비혼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건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내 집 마련이 힘겨운 현실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는 건 판타지적인 사치에 가깝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 청년 취업난이 극심한 현실에서 나는 내가 낳은 아이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낳기 좋은 현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이 잔혹한 되물림을 굳이 반복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많은 2030세대는 의무나 목표로써 출산을 택하지 않길 희망한다. 결혼은 내 인생의 업적과 성공률을 지표하지 않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애초부터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가야하는 세대에겐 출산과 결혼은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다. 더는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님을 뼈저리게 학습해왔기 때문이다.이러니 결국 남은 딱 한 가지의 선택지인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나에겐 일과 취미가 그렇다.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내 몸 하나 잘 건사하는 건강한 어른으로 지내고 싶다. 나의 선택에 확실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으면서 자유롭고도 자주적인 삶을 산다면 충분히 만족스럽다.하지만 결혼과 출산을 외면하거나 도피한단 뜻은 아니다. 형식에 벗어나서 비혼도 행복을 추구하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또는 결혼을 희망하는 예비부부와 아이를 낳기 희망하는 이들에게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오도록 정치와 법률적 제도에 꾸준히 관심을 가질 것이다. 누구의 잘못을 꼬집기보단 각 세대가 머리를 맞대어 미래 세대가 살기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2021-12-07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

2022학년도 대학 수능 시험이 무사히 치러졌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맞이한 두 번째 수능인데, 지난해만큼 혼란이 생기지는 않아 다행이다. 날씨도 도와줘서 ‘수능 한파’ 없이 포근한 늦가을 날씨 속에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했으니 이제 푹 쉬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못 잤던 잠도 몰아 자길 바란다. 물론 논술, 면접고사로 또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야 할 테지만 말이다.지난봄부터 가을까지 격주 금요일마다 한 남자고등학교에 가 강의를 했다. 문예창작부 동아리 학생들을 지도하는 외부 강사로 초빙되어 작년 그리고 올해, 두 해 동안 학생들을 만났다. 드론, 악기, 합창, 요가 등 여러 동아리들이 있는데, 문예창작부에는 우선지망한 동아리 정원초과로 떠 밀려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 2학년생 서른 명 중 자기 의지로 온 건 예닐곱 남짓. 학교는 ‘문집’이라는 결과물에만 관심이 있지 동아리 수업 과정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의욕 없이 좀비처럼 끌려와 앉은 학생들은 엎드려 졸거나 수학 문제집을 풀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서너 명은 눈이 빛났다. 그 눈빛들과 함께 벚꽃 지나고 장마 지나고 단풍까지 왔다. 지난 10월, 마지막 수업을 했다. 학교 행사로 한 주 거른 것의 보강이어서, 담당교사는 출석 의무 없이 학생들 자율에 맡겼다. 서른 명 중 절반인 열다섯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정된 두 시간 수업이 학교 사정에 의해 30분으로 단축됐다. 그저 학생들과 인사나 나누기로 하고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먼저 “개인은 엄격한 비개성화 연습을 거쳐, 자신을 온통 가로지르는 다양함, 자신 속을 헤집는 강렬함들을 향하여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된다”던 철학자 질 들뢰즈의 문장을 들려주었다.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통해 ‘비개성화 연습’을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돼서 여행, 예술, 사랑 등 세상의 온갖 감동들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가치관과 세계인식을 전환케 하는 낯선 충격들을 직접 찾아 나서라는 의미에서였다.그리고 20대, 30대를 먼저 살아본 입장에서 사족처럼 말을 보탰다. 하나, 운전면허를 최대한 빨리 따라. 둘, 여행을 다녀라. 셋, 일기를 써라. 넷, 고전 영화를 보고 고전 음악을 들어라. 다섯, 비속어ㆍ욕설을 쓰지 마라. 여섯, 모든 여성에게 친절해라. 일곱, 직접 요리를 해라. 여덟, 꾸준히 운동해라. 아홉, 자기계발서를 읽을 바엔 그냥 책을 읽지 마라. 열, 취미를 가져라. 열하나, 군대를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젊은)꼰대 소리를 했다.그러고는 내 은사이신 장석주 시인의 시 ‘내 스무 살 때’를 읽어주었다. 장석주 시인은 내가 스무 살이던 해의 어느 늦가을, 고종석 작가가 한국일보에 기고한 글 ‘성년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를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에게 읽어준 적 있다. 그 글에는 “순금의 정신은 상상 속의 엘도라도가 아니라 바로 네 둘레에 있을 수도 있다 (…) 독립적이 되도록 애써라. 소수자들과 연대하려고 애써라”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그때 온몸이 떨리는 감동을 받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참 한심했었지, 그땐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는 일마다 실패 투성이었지 (…) 불안은 나를 수시로 찌르고/ 미래는 어둡기만 했지/ 그랬으니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가/ 바다 속을 달리는 등 푸른 고등어 떼처럼/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랬으니, 산책의 기쁨도 알지 못했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도 몰랐고/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따뜻한 말을 건넬 줄도 몰랐지”(장석주, ‘내 스무 살 때’)마지막 수업으로는 짧고, 인사치고는 꽤 긴 30분이 끝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지루한 시간이 마침내 끝났다’며 기뻐하는 의식만이 아님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며칠 지나 한 학생에게 “문학에 관심이 생겼어요. 선생님 덕분에 시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앞으로 제가 쓴 글들을 한 번씩 보여드려도 될까요?”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세상은 멈춰도 마음은 멈추지 않는다. 어디론가 가고 또 어디론가 온다. 그렇게 서로 닿는다.수능을 마친 학생들 모두 이제 세상을 향해 스스로 열린 상태가 되어 진정한 자기 이름을 얻게 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 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금은 자기 안에 있다는 비밀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2021-11-23

층간 소음이라는 딜레마

화이자 2차를 맞고 돌아온 토요일 오전이었다. 1차 때 부작용을 심하게 앓던 터라 일주일 전부터 컨디션 관리에 들어갔었고, 지레 겁먹었던 시간에 비해 접종은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차 때도 접종 당일엔 아무런 느낌이 없다 2-3일째부터 부작용이 시작되었으니 무리하지 말자 싶어 재빨리 집으로 향했다.집으로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암막 커튼을 치고 잠을 자려는 찰나에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근원지는 반년 전에 이사온 옆집. 그 주인이 키우는 작고 하얀 말티즈였다.후에 알았지만 이는 분리불안 증세 중 하나로 보호자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초조함과 불안을 느껴 하울링을 낸다는 것인데, 문제는 내가 사는 낡은 오피스텔은 방음이 전혀 되질 않는 다는 것이었다. 짧게는 한 두어시간만에 끝나지만 대게는 주인이 올 때까지 울음이 이어져 소음이 내내 지속된다. 이 문제는 6개월 째 매일 진행되고 있었고, 사실 강아지 울음소리 말고도 새벽 3-4시까지 이어지는 큰 티비 소리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이 문제를 그냥 참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참다못한 어느 날엔 포스트잇으로 정중히 부탁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강아지가 분리불안을 앓고 있단 걸 전혀 몰랐으며, 앞으론 주의하겠다는 다소 심플한 대답이었다. 그 뒤론 조금 소리가 잦아드는 듯 했지만 역시나 길게 가진 못했고 얼마 못 가 모든 상황이 전과 똑같아 졌다.이것 말고도 많은 부분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주해야 하는 이웃이니 모든 걸 감안하고 이해해보고 싶었지만, 특히 몸이 아프거나 예민한 날엔 어찌할 수 없이 날이 섰다. 결론은 음료수를 들고 찾아가보기도, 경비실에 안내 방송을 부탁 드려봐도 진전되는 부분이 하나 없어서, 이 사람은 문제를 개선할 의지가 과연 있는 것인지. 정말 뾰족한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득해지고 말았다.그러다 며칠 전 뉴스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층간소음 문제가 급증하고 있단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온라인 수업이나 재택근무로 인해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전보다 늘다보니 층간 소음 관련 민원이 계속해서 증가한다는 것인데, 한국환경공단의 자료를 빌려와보자면 올해 1월부터 시작하여 8월까지의 층간소음 민원 전화상담 접수 건수는 총 2만2천861건으로 지난해의 1만7천114 건을 뛰어 넘는 급증세를 보였다고 한다.하지만 문제는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센터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환경부와 국토부가 운영하는 층간 소음 센터에선 변호사나 주택관리사 등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소음을 측정하고 중재하는 방안도 마련되어 있지만 사실 이마저도 명쾌한 해결 방법이 되진 않는다. 최근 5년간 600여 건의 측정을 시도했으나 층간소음으로 인정받은 건 단 7%밖에 되질 않을 정도로 미미한데다 대부분 그저 ‘중재’를 권고한다는 것에 그치고 만다.이를 보며 많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사실 그리 도움 되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건축법 규정이나 개선점 하나 없이 두루뭉술한 말이 오가는 동안 층간 소음에 대한 피해 사례는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가장 최근엔 인천 한 빌라에서 층간소음 문제로 인한 칼부림 사건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했단 이유로 보복하기 위해 아랫집을 찾아가 칼을 휘두른 것인데, 바로 옆엔 경찰까지 있던 상황이었지만 커져 가는 상황을 말리지 못하고 끝내 피해자가 발생하고 말았다.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선 큰 발소리를 줄여달라는 한마디에 5분도 안 되어 피해자의 집을 두드리며 죽이겠다는 협박을 한다. 동영상으로도 증거물이 남아있지만 접근 금지 등의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층간 소음으로 인한 피해 사례는 점점 가열화되고 있는데 법은 여전히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피해자는 아무런 보호 조치 없이 끝내 피해자여야만 하고 가해자는 끝끝내 죄를 저질러 사건을 일으킨다.언제부턴가 집이 마음 불편한 곳이 되었는지 생각하다보면 서글퍼진다. 이웃 간에 원만한 대화로 이 문제가 정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모든 게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젠 내 집 안 조차 결코 안심할 수 없다.

2021-11-23

싸워야 할 때를 안다는 것

나는 유난히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말싸움이라고는 져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세 살 터울인 친오빠를 필두로 학교 친구들, 동네 언니들, 심지어는 선생님들과도 언쟁을 피하지 않았다.말끝마다 “왜요?” 하고 묻는 아이들의 화법에는 묘한 힘이 있다. 생각의 여지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혹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까닭을 제대로 설명해보아라”와 같은 말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스스로 증명하라는 것과 같다.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싸움을 하다 보면 상대는 제풀에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가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싸움의 특성에 관해서 깨달았다. 상대를 공격하면서 드러나는 무시무시한 폭력성과 뒤따라오는 허무함. 상대를 이긴다는 건 정말 이기는 일이 아니었고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을 보면서 이겼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했다.어떤 것도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쁜 상황만 생겨났다. 어째서 나는 이들과 언쟁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런 의문이 길어지자 묘한 회의감이 찾아왔다.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그만 갈등도 피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분명한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다.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꾹 눌러 삼켰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외면하거나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하고 이해해버리는 방향을 선택했다.칼날은 차라리 목구멍 안에 감추고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누군가는 내가 점잖아졌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내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싸움의 지난한 과정이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뭔가에 분노한다는 건 굉장한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이 특정한 상대를 향해 있을 때는 더욱더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외면해버리면 끝날 일이지만 싸우려고 하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상대의 잘못뿐만 아니라 내 잘못까지도 자연스럽게 들춰지게 된다.누군가를 비난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편협하고 비겁하고 치졸한 인간인지 꺼내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한 과정이 힘겹고 아프고 성가실 수밖에 없다.회사 선배가 습관처럼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다는 친구의 고민을 들었다. 지적하기에는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함부로 건의했다가는 사이가 틀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그분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냥 좋게 생각해.”라는 말이 내 입에서 기어코 튀어나왔을 때야 나는 내가 ‘너무 쉽게’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시위대 때문에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며 ‘아, 정말 피곤하다’라고 생각한다든지, 부당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시스템을 바꾸려는 목소리를 낼 때 ‘그도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면서 넘겨왔던 날들. 어리석고 게으른 생각으로 점철된 시간들.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이런 나의 모자람을 친구에게 들킨 것이 창피했다.이제까지의 나의 싸움은 얕보이기 싫어서 내는 큰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입을 다무는 건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나는 싸우지 않아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진정으로 싸워야 할 때를 아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꺼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는 것일 테다. 그래야만 하니까.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그들은 기꺼이 싸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위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배제된 이들의 존립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단 한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때를 떠올린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내게는 더 많다. 이 고요한 시간은 누군가의 투쟁으로 인해 받고 있는 특혜라는 생각을 한다. 그 치열한 분투를 내가 잊지 않기를 바란다.

2021-11-16

낭만이 사라진 세계에서

한국 영화에서 ‘느와르’라는 장르는 더 이상 한때의 유행이 아니다. ‘초록 물고기’, ‘비트’에서부터 ‘친구’를 거쳐 ‘비열한 거리’, ‘신세계’, ‘차이나타운’, ‘불한당’과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범죄 조직을 소재로 하는 느와르 영화는 이미 한국 영화의 한 축이 되었다. 현실의 부정함과 비정함에 대해 폭력으로 응수하는 느와르의 문법은 우리가 현실에서 상상하지만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것을 저지르고,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분투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그 속에서 유오성은 빼놓을 수 없는 배우인데, 한국형 느와르의 정점을 찍은 ‘친구’에서 준석을 통해 보여준 그의 연기는 이후 수많은 느와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연기의 교본이 되었다. 우정과 의리, 그리고 비정함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비극 속에서, 그의 천부적인 표정 연기는 느와르적 인물이 취해야 할 감정연기의 표본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런 그가 최근 ‘강릉’이라는 영화를 통해 느와르 장르에 다시 복귀했다. 여기에서 유오성은 그간 보여준 연기 경력을 느와르라는 틀 속에 모두 녹여낸 것 같은 표정 연기를 보여준다. 그가 연기한 길석이라는 캐릭터는 이전의 유오성식 느와르 연기와는 분명 결이 다르다. 비슷한 위치에 놓인 인물과의 정쟁으로부터 빛을 발하던 이전의 인물 연기와 달리, 여기에서 길석은 조직 내에서 든든한 아우이자 형이라는 다소 다른 인물로 제시된다. 그 속에서 유오성은 의리와 우정을 중요시 여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규율을 위해 상대를 단죄해야만 하는 인물을 충실하게 연기해낸다.여기에서도 다시금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표정 연기다. 첫 장면에서부터 바다를 배경으로 진한 파랑 계열의 톤 속에서 터져나오는 그의 표정 연기는 영화 전체를 압축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이후로도 그의 표정 연기는 영화의 터닝 포인트마다 등장하여 그 장면의 개연성을 표정만으로 납득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해안도로의 격투 장면에서부터 리조트의 옥상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전까지의 스토리란 바로 이 장면의 유오성의 표정 연기를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속에서 유오성은 길석의 입을 빌어 ‘더 이상 낭만은 없다’고 말하며 경쟁 조직의 두목을 무참히 칼로 찌른다.영화를 모르는 평자의 평이겠으나, 사실 영화로서의 ‘강릉’은 좋은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기존의 영화들을 통해 반복된 느와르의 문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지만 개연성의 부족으로 인해 번번이 극적 긴장을 상실하며, 개연성의 부족을 학습된 관객의 느와르적 감각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인물의 설정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설정처럼 강제로 주입된다. 그렇다보니 인물의 성격과 심정을 유추할 수는 있으나, 몰입되지는 않는다. 이는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영화는 관객에게 플롯이 가지는 내적인 개연성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느와르적 문법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며 그것에 기대어 따라가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길석의 대사를 듣고 나면 왠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의도적인 장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기대하는 의리와 조직의 규율, 그로인해 초래되는 비극이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현실은 ‘돈’ 때문에 벌어지는 한 편의 살인극에 불과하다는 것. 영화가 여러 개연성을 위한 장면을 생략한 것은 그것을 보여주지 않은 게 아니라 더는 그와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 말이다. 우리가 느와르를 통해 기대하는 것들은 하나의 낭만에 불과하고, 현실은 돈 때문에 벌어지는 멋없고 잔인하며 무정할 따름인 피바다에 불과하다는 것, 어쩌면 그게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영화의 의미였던 것은 아닐까.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영화의 첫 장면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유오성이 길석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 표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의리와 우정이 낭만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 그런 낭만마저도 돈에 휩쓸려 사라져버린 세계에서 그것이 아직 건재하게 살아있다는 ‘척’을 해야만 하는 인물의 슬픔. 우리가 그나마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척을 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는 메타 픽션적인 교훈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리라.

2021-11-16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새로운 씬

지난 여름부터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 푹 빠져있다.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는 국내를 대표하는 여자 댄서들이 참가하여 댄스 경연을 펼치는 배틀 프로그램이다.첫 화부터 뜨거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매 회가 거듭할수록 대단한 파급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예능 부분에서 4주 연속 콘텐츠 기능력 1위를 차지했으며 비드라마 화제성 부분에선 5위의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2021년 최고의 화제 프로그램이라는 수식어와 걸맞게 SNS에만 접속해도 스우파의 인기를 쉽게 실감할 수 있다.그들이 만들어낸 유행어가 밈이 되어 돌아다니고, 팀별로 펼치는 댄스 경연 장면은 하이라이트 편집본으로 제작되어 조회수 2억 회에 달하고 있을 정도다.게다가 라이브 무대로 열리는 콘서트 또한 1분도 안 되어 서울 포함 총 5곳 지역의 표가 전부 매진될 정도라니, 아이돌 못지않은 거대 팬덤을 지니게 된데다 화보촬영과 인기 예능 출연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사실 그간 여러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대부분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비슷한 플랫폼과 서사를 지녔음에도 이와 반대로 스우파가 뜨거운 화제성을 낳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그동안의 경연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냈으며 단순 스토리와 악마의 편집으로 자극적인 흥미만을 이끌어내는 것에 그쳤다.하지만 이러한 전형적인 폼에 질린 시청자들은 스우파에서도 어김없이 진행됐던 악마의 스토리에 속지 않았다.오히려 시청자들이 잘못된 편집점을 찾았을 정도였고 전 출연진이 여성인만큼 강렬하고도 능동적인 우먼 파워에 집중하기 시작했다.화려한 춤과 노래를 뽐냈던 아이돌 발굴 경연 프로그램과는 달리 정제되어 있지 않은 말투와 리액션을 보여주어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다는 호평이 크다.그들은 춤을 통해 자신만이 품고 있는 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해내며 정형화되어 있던 여성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롭고도 힘 있는 결을 보여줬다는 것이다.경연이기에 라이벌 구도가 선명히 드러나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 초반에는 있었지만 가질 수밖에 없던 오해를 풀면서 그들은 서로의 열정을 위로하고 공감하며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 분출로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시선을 잡아끄는 퍼포먼스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머뭇거림보다는 직진에 가까운 열정과 충실함에는 숨을 멈추고 멍하니 장면을 보게 한다.음악이 시작되면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신체의 일부분을 높게 들거나 뻗으며 상대를 제압하거나 표정으로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가벼운 손짓과 눈빛엔 정확한 감정과 의도를 담아 스테이지를 장악한다.춤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댄서들은 인상 깊은 씬을 여럿 보여주었다.파이널 무대로 선 ‘훅’팀은 ‘엄마가 아이에게’라는 곡으로 그간 보여주었던 파워풀하고 재기발랄한 춤에서 벗어나 수화를 통해 모성애를 담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춤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많은 언어를 전달하여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기도 한 사실을 알았다.‘프라우드먼’팀에서 보여준 무대 또한 잊지 못할 것 같다.맨 오브 우먼 미션에서 보여준 무대에선 남성과 여성이라는 고착화된 관념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은 의견과 리듬 그리고 가치관을 통해 이루어져 있으며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여성 또는 남성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다는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사실 경쟁 무대인만큼 가장 화려하고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어야 눈에 잘 띄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잘 만들어진 무대나 익숙함을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것을 무대 위로 이끌어 보여주었다는 것에 감명 깊었다.댄서란 무대 위의 가수 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 오는 걸로만 생각했었다.하지만 한 명의 가수와 무대를 빛내게 하는 것은 여러 댄서들의 퍼포먼스와 열정 덕분이라는 걸. 한 분야에 있어 진심을 다하는 이들의 행보는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던 가쁜 경험이었다.비단 댄서만이 아닌 이 스트리트 위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도 해당 되는 것임이 분명하다.눈에 띄지 않지만 묵묵히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2021-11-09

밥섬 식도의 위대한 밥상

동해도 근사하지만, 때로는 서해만이 가진 ‘쓸쓸한 아름다움’이 사무치기도 한다.고요하고 내밀한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서해의 작은 섬 식도로 간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60세대 200명이 채 되지 않는, 면적 0.86㎢의 작은 섬이다.섬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여객선 안에는 격포에 장을 보러 갔다가 섬으로 돌아오는 어르신 몇이 전부였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객선이 접안하자 어르신들은 손수레와 보따리를 양손에 짊어지고 다시 섬을 밟았다. 나도 그분들을 따라 낚시가방을 들고 배에서 내렸다.식도에 올 때면 늘 찾는 한 민박으로 향했다. 서해의 작은 섬들이 보통 그렇듯 식도에도 변변한 식당은 없고, 그나마 민박과 밥을 겸하는 서너 곳이 다.그런데 섬에 상수도 공사가 벌어져 공사 노동자들이 지내느라 빈 방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 식도리 이장님이 근처를 지나다가 자기네 집에서 묵으라고 하신다. 이장님 집도 민박과 식사를 겸하는데, 공사 인부들이 묵긴 하지만 남는 방이 있다고 했다.이장님 차에 사모님과 함께 셋이 끼어 타고는 마을 몇 군데를 다니며 멸치를 내려다 줬다. 집에 도착하니 이장님께서 안방을 내어주며 편하게 쓰라고 하신다. 너그러운 인심이 따뜻한 물살을 퍼뜨렸다.가방을 풀고, 낚시 준비를 해서는 방파제 석축에 섰다. 혼자 고요함을 찾아 온 섬, 마음에서 수런거리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우럭을 먹을 만큼만 잡고 낚시를 접었다.욕심을 버리는 순간 그동안 내 안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석축에 부딪치는 파도가 뭐라고 말을 한다. 할 말을 오래 참아 붉어진 입술처럼, 저녁노을이 나를 보며 옴짝달싹한다. 일찍 떠오른 낮달이 허밍으로 노래한다. 먼 산 나뭇가지에서 흔들리는 단풍잎이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른다.외부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와 풍경과 내가, 세계와 내가 경계 없이 몸을 섞을 때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 깊은 곳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우럭 몇 마리 챙겨 이장님 집에 오니 인부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방마다 고단한 몸을 누였고, 이장님 가족은 거실에 앉아 화투 놀이하느라 정신없다. 사모님이 식당에 있는 반찬과 찌개를 마음껏 꺼내 먹으라 하신다.우럭 회 한 접시 뜨고, 반찬통을 열었다가 그만 황홀해지고 말았다.꽃게장, 어묵볶음, 장조림, 오이소박이, 방풍나물, 멸치볶음, 버섯볶음, 파김치, 알타리김치, 물김치 등 온갖 맛깔스런 반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릇 하나에다 반찬 두세 가지씩 함께 담았다. 냄비에는 묵은지와 비계 숭덩숭덩한 촌돼지 고기가 가득 들어간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한 그릇 떠서 상에 올리니, 마음부터 배부른 위대한 밥상이 완성되었다.식도(食島)가 왜 ‘밥섬’인지 이제야 알겠다. 예로부터 어장이 풍부해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는 섬, 먹거리보다 인심이 더 풍요롭다.“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 점 떠있고 냉수 사발 속으로/ 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뿐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이재무, ‘위대한 식사’)라는 시가 절로 떠오르는 밥상 앞에서 뭉클해졌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을 밥 한 덩이와 함께 목구멍으로 쑥 넘기고, 차가운 소주로 달아오른 가슴을 식히는 동안 저녁은 깊고, 저쪽 거실에서는 찰싹찰싹, 화투패 달라붙는 소리가 풀벌레 울음처럼 정다웠다.아침놀이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6시 50분. 기상 악화로 7시 20분 첫 배 이후엔 배가 안 뜬다는 방송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서려는데, 사모님이 아침 먹고 가라 하신다. 공사 인부들과 함께 앉아 또 한 번 뜨거운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인부들과 나는 한솥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비록 짧은 몇 분이지만, 나는 낯선 식구들과 말없이 정든 밥상을 떠나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나는 ‘밥섬’ 식도에서 그 밥 한 끼를 먹었다. 이만하면 성공한 생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2021-11-09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의 여러 시집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 時代(시대)의 사랑’이다. 시를 잘 모르던 시절, 제목이 너무 예뻐서 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시집에 사랑에 대한 잠언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안에 든 건 그로테스크하고 무참한 인간의 슬픔이었기에 많이 놀랐던 것 같다.생각해보면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에 걸린 잠언이나 경구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랑은 대상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니까. 사랑은 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깊이만큼의 처참함을 간직한다. 그 안에는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도, 그리하여 그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이 時代의 사랑’의 한편에 아름다운 처량한 마음이 있어, 다른 한편에는 그로 인해 찢겨지고 비참해진 마음이 같은 크기로 놓여 있는 것처럼. 그처럼 ‘나’의 마음이 아름다움과 처참함으로 양분되는 건 분명 사랑의 힘일 것이다. 그뿐일까.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내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모두 사랑의 능력이다.이 모든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나 자신이 비루하고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라도, 그 시대의 사랑은 결코 다른 사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비참하게 된다 할지언정,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랑에게 나의 삶의 중심을 양보하는 것, 그게 ‘이 時代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었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그래서 내게 80년대의 사랑이란, 마치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루어지는 모험과도 같이 느껴진다. 절박하고, 비참해지기도 하는 사랑. 사랑이 이루어질 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모험 같은 사랑은 왠지 사랑이 아닌 인정투쟁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그 시대가 그만큼 사랑 외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혹은 자신의 다른 의미를 쟁취할 길이 없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랑’에게 자신의 삶의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흔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현실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에 따라 사랑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꾼다.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모순형용적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사랑 외에 다른 인정의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가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제는 사랑을 통해서조차 그와 같은 것들이 이룰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사랑은 가장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사랑이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빠져가고 있다고.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제는 조건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이 사랑의 성패를 결정한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속에서나 혹은 액정 너머로만 존재할 뿐이다. 예쁜 선남선녀가 좋은 경제적 조건 하에 어떤 고난 없이 서로를 위하는 그림 같은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더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은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최승자의 시 속 화자가 구원받지 못한 형상이 되었던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구원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사랑조차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 사랑에 무관심해져버린 것 같다고.우리는 늘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 말은, “비록 이토록 처참한 나지만 사랑해줘”라는 투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은, 사랑을 위해 더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에 부쳐서, 사랑을 위해 무리할 힘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걸지도. 그 모든 힘듦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던 사랑은 이제 과거에만 남았다.

2021-11-02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걸까. 무수한 언어가 별처럼 모여 일상을 구성하고 있다. 빈번하게 마주치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말을 꺼내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의 발화를 고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말은 혀끝에 모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우며 철근처럼 무겁다. 온종일 마음에 남아 있다가도 잠깐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게도 속성도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폭신폭신한 말도 함부로 다루게 되면 무엇보다 날카로운 흉기로 바뀌기 마련이다.거짓말에 속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온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탈함과 무력함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음을 할퀸다. 영혼에 생채기가 나면 쉽게 치유되기 어려워 한동안은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도덕적으로 매우 어긋난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금기로 존재한다.거짓말을 단순히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있다. 정치인이 내뱉는 거짓말처럼 허망한 발화도 있지만 상대를 위해서 거짓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아픈 진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 거짓말은 부정적인 언사라기보다 다정하고 슬픈 발화에 가깝다.소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짓말의 장르다. 허구로 구성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말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틀린 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표현임은 확실하다. 소설은 무엇보다 현실을 냉엄하게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찬찬히 그려나가며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이거 다 거짓말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면서 텍스트를 따라간다. 허구의 세계를 살아가는 허구의 인물을 응원하고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에 투영하기도 한다. 거짓이라는 형식을 통해 도리어 진실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과하다 느껴질 만큼 달콤하다. 거짓말처럼 나쁜 것이 좋아지고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런 순간이 온대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순간을 믿기 어려워하고 불행에 익숙한 사람처럼 매일을 살아간다. 거짓말처럼 기쁜 날을 앞에 두고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성거리기도 한다.어째서 그런 것일까. 거짓의 달콤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은 우리의 발목을 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눈을 뜨면 달콤한 거짓말의 세계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한 거짓말은 가장 강력한 찰나로 작용한다.그러한 찰나가 그저 무의미한 것은 아닐 테다. 가끔 우리는 세상에 그리고 상대에게 현명하게 속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기꺼이 속아주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진실 한 스푼을 발견하게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맛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리한 상대를 치켜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아프면서 아프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속고 속이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다. 나는 그 진부한 연극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그것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오해이며 소중한 이해다.우리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한다. 가끔은 서로의 말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말은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말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내야 할 때도 있다.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행을 숭고하게 여기고 기꺼이 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이며 세계를 이해하는 노력이 되기 때문이다.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도래하는 날을 상상한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희망찬 내일을 바란다.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낙관 또한 지난한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일 테다.

2021-11-02

한글 생각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1947년 조선어학회가 편찬한 ‘우리말큰사전’의 머리말 일부다.일제의 한글 말살정책으로 온갖 고난을 겪은 ‘우리말’이 흩어진 글자와 단어들, 방언과 속어들, 기억들, 옛 이야기들, 꿈과 마음들, ‘엄마’와 ‘윤슬’과 ‘미리내’와 ‘개여울’들, 그 모든 처절한 뼈와 살들을 겨우 한 데 모아 몸을 갖췄다. 한글학자들의 감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전 세계에 현존하는 약 3천 개의 언어 중 고유한 사전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단 20여개에 불과하다.2019년 개봉한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헌신한 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말모이’는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주인공 김판수(유해진)는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간다. 그는 소매치기로 먹고 사는 즉자적인 인물이지만, 우연한 계기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말은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말은 곧 ‘우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자적 존재로 변화한다.판수의 자기존재 전환은 까막눈인 그가 한글을 깨우쳐 나가는 학습과 함께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어의 아름다움, 우리말을 지키고자 민중이 흘린 피, 땀, 눈물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그리스 크레타 섬은 400년 동안 터키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했다. 크레타 출신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미할리스 대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노인은 웃었다. “내가 고생고생하면서 글자를 배운 이유, 이제 알겠지? 이 마을 벽이란 벽은 한 군데도 빼놓지 않을 테다. 교회 종탑에도, 회교 사원에도, 내 죽기 전에 써둘 테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한 글자씩 쓰고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자기 솜씨를 감상했다. 그는, 가로로 긋고 세로로 긋기만 해도 목소리, 그것도 우렁찬 함성이 되는 신비에 어리둥절했다. 이런 부호가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그저 텅 빈 채 묵묵히 서 있던 담벽과 대문이 이제 소리 높이 자기네 희망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조선어학회 한글학자들은 말의 해방이 곧 정신의 해방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 그들의 헌신과 노력은 총탄 빗발치는 전장에서 싸운 독립군 못지않은 것이다.우리는 한국어를 지켜낸 이들의 위대한 희생을 기억하면서, 노래를 지어 부르고, 시와 소설을 쓰고 읽고, 줄임말과 합성어와 신조어 등으로 우리말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해야 한다.‘말모이’ 후반부에 판수의 중학생 아들 덕진이 여동생 순희를 업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요양병원에 5년째 누워 있는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할머니는 일본군 전투기 활주로가 있던 마을에서 태어나 청력이 온전치 않았다. 당연히 말의 배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는 ‘요이땅’, ‘벤또’, ‘요시’ 같은 일본말을 자주 했는데, 볕 좋은 날이면 혼자 마당에 앉아 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하셨다.“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우리말큰사전’ 머리말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다. “조선말은 조선 사람에게 너무 가깝고 너무 친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조선 사람에게서 가장 멀어지고 설어지게 되었다”고. 우리는 모두 ‘엄마’, ‘아빠’, ‘해’, ‘달’, ‘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배우며 울긋불긋 말의 꽃이 피어나던 모국어 마을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얼마 전 한글날이었다. 2012년 공휴일로 재지정된 후 역사적 의미보다는 ‘노는 날’로 여겨진다. 국문학과 졸업 시험에 토익 성적을 제출해야 하고,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풍조 속에서 이런 글은 고리타분한 것일지 모른다.다만, 드라마와 케이팝 열풍으로 전 세계인들이 한글을 주목하는 지금, 나는 우리말이 세계시민의 ‘제2외국어’쯤 되는 꿈을 꿔본다. 그러면 한국에서 노벨문학상도 나올 것이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망상은 볕 좋은 주말 낮잠에 이미 전송해뒀다.

2021-10-26

비접종자가 살아가는 법

최근 화이자 1차 접종을 맞았다. 평소 피부알레르기를 심하게 앓고 있던 터라 백신 접종을 망설이고 있었지만, 백신 미접종자로 회사 내 카페와 식당 출입이 제한되자 오랜 고민 끝에 접종을 결심하게 됐다.그 전에 물론 피부과도 몇 차례 들러 여러 의사 소견을 들어봤지만 큰 위험은 없겠으나 부작용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고 했다.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해서 접종을 결심하게 되었고 실제로 백신 접종을 해주었던 의사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호쾌하게 주사를 놓아주었다.그렇게 화이자 1차를 맞은 첫날과 이틀은 무리 없이 지나갔다. 괜히 겁먹은 건 아닐까 생각하던 와중 문제는 3일째부터 시작됐다.심장 부분이 아프면서 저릿하더니 목에는 이물감이 걸린 듯 호흡이 불편해졌다. 먹는 즉시 게워냈고 두통과 울렁거림도 찾아왔다. 근처 약국에 들려 증상을 호소했더니 진통제를 추천해줬다.다음날, 진통제를 먹고 나서도 전혀 나아지지 않자 결국 오전 업무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향했다.회사 근처 내과 2곳을 들렸으나 백신 이상증세 환자는 예약이 아니라면 당일 진료를 보지 않는단 황당한 말을 들었다. 듣자하니 이상증세 환자 예약은 2주나 밀려 있어서 오늘 신청하면 2주 뒤에나 진료 볼 수 있단 말을 했다. 그 말을 두 군데서 들으니 아찔해졌다.그렇게 병원을 나와 다음 내과를 찾으러 지도를 켰으나 이미 회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들 밖에 남지 않았다.응급실 밖에 답은 없는 것인지, 그곳에선 기다림 없이 진료와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곧 회사로 돌아가야 했고, 책상 위에는 맡은 업무가 한참이나 밀려있었다.결국 급한 마음에 눈앞에 보이는 이비인후과에 들어갔고, 다행히 그곳에선 진료를 받아주었지만 대기시간이 무려 삼사십 분 즈음 걸렸다. 겨우 진료를 보았는데 의사와 간호사의 얼굴은 지칠대로 지쳐 보였다.의사는 나 같은 환자가 하루에도 많이들 온다며, 이런 증세는 아주 흔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앓고 있는 증세에 맞게 약 몇 가지를 처방해줬다. 별 수 없었다. 30분 간 수액을 맞고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회사에선 맡은 업무를 하며 나와 같은 이상증세를 겪는 이들을 인터넷과 유튜브로 찾아보았다. 가슴 통증은 물론이고 겨드랑이 멍울, 두드러기, 미각 후각 상실은 물론이고 심할 경우 시각 상실,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겨드랑이 멍울은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앓고 있는데 이러한 부작용을 제대로 명시하고 있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또한 정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대처도 피해 지원도 나서지 않고 있는 상태이니 난감했다. 이상증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원 정보 또한 인터넷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급한대로 근처 응급실에 연락해보니 3시간 대기는 물론이고, 각종 검사 비용은 오롯이 내가 떠맡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검사를 받고 나면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런 와중 10월 23일자로 전국민 70% 백신 접종 완료율을 도달했다. 방역당국이 단계적 일상회복 전환 기준을 내세운 퍼센트율을 넘어선 것이다. 단계절 일상회복은 곧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인데 위드 코로나란 코로나19의 완벽한 종식을 막는다기 보단, 그간의 방역 체계를 바꾸어 코로나 19와의 공존을 준비해야 한다는 전환 개념이다.현재 위드 코로나 시대에 직면하게 되면서 백신 패스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정부는 접종 완료자에 한해 공공시설 이용 제한을 완화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백신 접종을 마친 이에겐 백신 패스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는 QR정보로 접종 여부를 파악하여 경기장이나 다중이용 시설 출입 이용이 허용된다.그러나 백신 패스가 강행되는 분위기가 되자 접종을 중단하려는 이들이나 미접종자들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백신 접종에 개인의 선택권이 전혀 존중받는단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기저 질환 환자는 애초부터 선택권이 없을뿐더러, 나의 경우에도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주변의 압박과 환경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이렇게 맞는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부작용과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단 외면의 상황에 처하니 이젠 2차를 맞을 엄두가 안 난다.더군다나 부스트샷 권장과 새로운 AY 4.2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이라니. 미접종자들이 점점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은근한 압박과 함께 계속해서 소외될 뿐이다.

2021-10-26

공정과 평등이라는 게임의 룰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넉넉한 환경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여러 문화들을 어떠한 제한 없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가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된 덕분에 우리 세대는 일찍이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들을 아주 손쉽게 향유할 수 있었다. 만화, 영화, 음악,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문화들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공유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나의 10대를 사로잡은 것은 게임이었다. 삼국지, 영웅전설, 랑그릿사, 울티마 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게임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화려한 그래픽과 비장한 스토리에 사로잡힌 우리는 꼼짝없이 밤을 새어가며 전국의 통일과 세계의 안위를 위해 싸우는 주인공이 되어갔다.내가 게임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 이유가 있다. 1등을 강요하지만 어떻게 1등을 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나의 노력보다 늘 더 노력하는 누군가로 인해 경쟁 속에서 뒤처지기만 했던 현실과 달리 게임의 세계는 공정과 평등을 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노력을 통해 우리는 얼마든 강해질 수 있으며, 노력은 결과와 늘 일정하게 비례했다. 다른 것 필요 없이 단지 컴퓨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이 세계를 현실보다 사랑했던 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그런 의미에서 게임의 세계는 현실보다 공정했다. 노력을 하고, 그 노력에 따라 공평한 결과를 분배받을 수 있는 세계. 모든 기회가 평등하게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세계. 물론 ‘리니지’와 같은 MMORPG 게임에서는 빈부의 격차와 힘의 논리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또한 게임의 룰에 따라 얼마든, 언제든, 누구든 뒤집을 수 있었다. 필요한 건 게임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노력 두 가지 뿐이었다. 우리가 그 세계 속에서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건 이와 같은 게임의 룰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 또한 이젠 옛날의 얘기에 불과하다. 게임의 룰은 더 이상 모든 유저에게 공평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현실의 자본력이 게임 속 판도를 결정하는 가운데, 게이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들보다 많은 지식이나 노력이 아니라 게임 밖 현실에서의 재력이다. P2W(Pay to Win)이 기본 법칙이 된 게임 속에서 플레이를 통해 강해지는 것보다 같은 시간 돈을 벌어 그 돈을 게임에 쏟아 강해지는 것이 더 효율적이게 된다면, 과연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게임일까? 이와 같은 구조는 게임의 룰이 왜곡되고 변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게임의 룰은 모든 유저에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게임의 룰 또한 유저의 자본력에 의해 그 적용이 얼마든 달라진다.90년대와 2000년대의 게임사가 유저 친화적 입장에서 게임을 디자인하고, 유저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 정착시키고 그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과 달리, 이제 게임사는 유저들에게 더욱 경쟁을 부추기며 그러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으로 과금을 강요한다. 그 과정에서 게임의 룰은 더 많은 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정되며, 이와 같은 과정은 유저들을 지치게 만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가뜩이나 수저 계급론이 팽배해진 현실 속에서 게임 속 세계마저 현실과 유사하게 돌아가도록 구성된다면, 이를 환영할 게이머는 과연 몇이나 될까? 최근 나타난 NC소프트의 부진은 이와 같은 게임사의 태도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들이 예전과 같은 게임의 룰을, 공정과 평등이라는 기본적 원칙이 지켜지는 세계를 원한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게임의 룰이 공정하고 평등할 때, 그리고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믿을 수 있을 때 게임 속 세계는 나름의 합리성을 통해 지속된다. 그와 같은 게임의 룰이 깨질 때, 유저들은 게임을 떠나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전 게임의 향수에 빠지거나 클래식 버전의 게임에 몰입하는 건 단순한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공정과 평등이라는 게임의 룰이 지켜지는 세계를 원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게임이 현실을 닮아가는 것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에게 도피할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선언과 같기 때문인 것일까. 그렇다면 이 글이 게임에 대해 말하고 있음에도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2021-10-19

예술과 우울

예술가의 뇌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뇌와 비슷하다는 견해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미미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우울한 감정이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정신 분석가들의 결론이 아니더라도 이것은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로 칭해지는 이들은 때때로 우울증을 앓았다. 빈센트 반 고흐, 슈베르트, 말러, 헤밍웨이…. 이들의 작품은 섬세하며 이성적인 동시에 감정을 건드리고 추동력이 있으며 한없이 경계가 넓어지는 경험과 함께 강한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에트바르트 뭉크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대표작으로 칭할 수 있는 ‘절규’를 보고 있노라면 시각적 이미지로 국한되지 않고 청각과 촉각적 지점까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그림에서 얼굴에 손을 대고 있는 인물은 정면으로 관객을 향하고 있다. 관객에게 자신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형태다. 거기에서는 공포가, 절규가, 찢어지는 것과 같은 비명이 흘러나온다. 같은 주제로 그린 그의 소묘 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덧붙여 있다.“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았다.”정수리 위로 해가 내리쬐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적인 날, 친구들과 길을 걸어가던 뭉크는 문득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관찰한다면 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내적으로 발동된 잠재된 불안과 두려움에 가깝다. 그러나 뭉크에게 그것은 분명 실재하는 감각이었을 것이다.그와 함께 같은 거리를 산책하던 친구들은 느끼지 못했던 원천적인 고통과 슬픔. 뭉크에게 그토록 섬세한 감정의 파동을 일게 했던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뭉크에게 죽음은 머나먼 추상적 개념이 아니었다.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를 폐렴으로 잃었고, 같은 해 남동생 역시 같은 병으로 죽었다. 강압적으로 그를 통제하던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났다. 뭉크는 “나는 인류에게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다. 하나는 신체적인 허약함이고, 하나는 정신병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과도한 불안증세와 심지어 환각 증세까지 겪게 되면서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던 전적도 있다.그의 작품을 그의 삶과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보다 확실히 예민하게 감각하는 사람이었음은 확실하다. 그의 내면에서는 강렬한 추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명명하기에는 부족한, 정신이 망가졌다는 것으로 국한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뭉크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표현해내려고 노력했다.그건 뭉크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가끔 유령처럼 속삭이는 텅 빈 목소리를 듣게 된다. 삶의 무용함, 혼란, 외로움, 불가능한 이해와 관계, 붙잡을 수 없는 감정들…. 그것을 듣는 일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불가해하고 어리석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해내는 것 역시 그러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위대한 작품들은 개인의 고통스러운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우리의 생각의 끝은 어딜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하여 그 생각의 끝에 도달하게 되면 거기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매번 생각의 과정 중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 그것을 단지 ‘죽음’이라는 관념으로 치환할 수는 없다.예술가들은 그곳에 끝끝내 가닿기 위해 늦은 밤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마음껏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 불분명하고 고통스러운 행위가 그들을 좌절시키고 또 기적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2021-10-19

우리들의 오징어게임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모든 국가에서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다. 외국인들은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등 한국의 골목 놀이에 열광한다. 프랑스 파리에 오픈한 오징어 게임 체험관에는 드라마 속 놀이들을 직접 해보려는 파리지앵들이 긴 줄을 서기도 했다. 거액의 상금이 걸린 살인 게임이라는 설정이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독특한 의상, 기묘한 화면의 구도와 색감이 청년 세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것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무엇보다 빈부격차, 양극화 등 세계 공통의 시대적 요소를 담아낸 것이 주요했다. 특히 젊은 세대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데, 청년들은 드라마 속 캐릭터들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성기훈, 조상우, 강새벽, 알리, 지영 등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생의 벼랑 끝에 몰려 더는 갈 데가 없는 이들이다. 게임에서 탈락하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을 건 데스매치에 참가한다. 현실에서의 삶이 더 지옥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국 서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이 사람도 살아야 하고, 저 사람도 살아야 한다. 꼭 살아서 상금을 차지해야 할 각자의 사정이 있다. 하지만 단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 게임을 거듭할수록 생존자는 줄어들고 탈락자의 목숨 값인 상금은 오른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물리적 힘, 두뇌 회전 속도, 행운과 불운의 차이지만, 현실의 지옥 대신 차라리 목숨을 걸고 인생 역전을 노리는 이들의 절박함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가장 역겨운 장면은 깡패 덕수와 한미녀의 화장실 정사 신도 아니고, 자신을 따르던 외국인 노동자 알리를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한 상우의 야비함도 아니다. ‘VIP’로 불리는 세계 각국의 부자들이 동물 가면을 쓴 채 마치 경마를 즐기듯 가난한 사람들의 살인 게임을 관람하던 대목이다. 시청자들은 그제야 ‘오징어게임’이 사람을 체스마로 삼은 부자들의 유희였음을 알고 씁쓸함을 느낀다. 사채업자에게 신체 포기각서를 써주고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456번, 외국인 노동자로 고국의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199번, 북한에 있는 엄마를 데려오고, 보육원에 맡긴 동생과 함께 지낼 방 한 칸을 얻어야 하는 67번… 이 모든 ‘사람’의 간절함이 VIP들에게는 그저 벌레들의 우스꽝스런 몸부림으로 보일 뿐이다. 라운지에서 게임을 내려다보는 VIP의 시선으로 화면이 전환될 때,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의 삶이 농락당하는 것 같은 당사자성을 감각하게 된다.대장동 개발 비리에 수많은 공직자와 여야 정치인들이 연루되었다. 국민의힘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은 화천대유로부터 50억 원의 퇴직금을 받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을 수사했던 박영수 전 특검도 특혜 의혹에 휩싸여 있다. 국민들의 박탈감과 분노가 극에 달한 가운데 문재인 정부는 전세자금대출과 신용대출을 규제하면서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주거 안정 기회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집값을 올려놔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게 해놓고, 전세를 장려하더니 막상 전세대출을 막아버린 것이다. 정부가 가계부채를 줄이겠다며 대출을 틀어쥐는 동안 33세의 한 중국인이 89억 원짜리 도곡동 타워팰리스 펜트하우스를 전액 은행 대출로 매입한 사실이 알려져 국민들을 허탈하게 했다. 한편 내년 1월부터 암호화폐 과세가 시행되는데, 주식에 비하면 갈취라 할 만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투자자 보호는 하지 않고 세금만 걷겠다는 정부 방침에 2030 투자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 차버리는 기성세대의 행패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금요일 저녁,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다음 문장을 골똘히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배달대행 라이더 어플에서 피크타임이라며 높은 단가에 배달하라고 부추긴다. 원고도 쓰고 강의 준비도 해야 하는데…. 빗길 운전은 위험하다. 하지만 단가가 높다. 고민을 거듭하다 한 5만원이라도 벌고 오자며 우비를 챙겨 입고 스쿠터에 시동을 걸었다. 몇 건의 배달을 마치고 집에 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 판에선 살아남았지만 다음 판에선 죽을 수도 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빗길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에서, 거리두기로 파리만 날리는 식당에서 우리들의 오징어게임은 계속 된다. 한국사회의 VIP인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은 저 높은 곳에서 가면을 쓴 채 낮은 데서 벌어지는 비참한 생계의 분투를 웃으며 지켜볼 것이고, 우리끼리 죽고 죽이게 할 것이다.

2021-10-12

루저들의 참혹한 놀이터

오징어게임 열풍이 한창이다.‘오징어게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로,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생존 게임에 참석하게 된 기훈(이정재 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벼랑 끝에 몰린 삶을 사는 기훈은 상금에 혹하여 게임에 참석하게 되고, 이는 곧 목숨이 걸린 기이한 생존 게임으로 이어진다.게임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 줄다리기와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등 어릴 적 동심을 떠올리게 하는 단순 게임으로 구성되어 있다.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게임에 탈락하는 순간 가차 없이 게임 관리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오징어게임은 국내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 90개 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최근엔 미국 인기 토크쇼인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서도 오징어게임 출연진의 인터뷰가 진행될 정도였으니 이전에는 쉽게 보지 못했던 실로 대단한 인기다.인기를 몸소 체감했던 건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오징어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 해외 유명 먹방 유튜버들 또한 달고나 먹방을 진행하며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야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만연한 사회 계층과 빈부 격차 문제를 한 회도 빠짐없이 끈질기게 담아내고 있다.구조조정 후 이혼을 하게 된 기훈은 빚에 쫓기는 동시에 돈 때문에 치료를 포기한 어머니를 잃기도 한다. 돈의 부재로 극단의 벼랑에 몰린 기훈은 온갖 소외와 부당함으로 괴로움을 겪는 인물이며 한국 사회의 소외 계층 시선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도 한다.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단순 놀이가 생존 게임으로 이어진 점도 흥미로운 포인트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설탕 뽑기 등 외국인들의 시각에선 처음 보는 놀이이기에 새로울 것이며, 단순하고 명쾌한 놀이는 흥미를 벗어나 죽음으로 곧장 이어지는 신선함도 담고 있다.게임 플레이 또한 플레이어 간 공평함을 기준으로 정해놓았지만 점차 온갖 실수와 꼼수로 관문을 통과한다. 게임 주최 측 또한 이를 암묵적 허용하며 즐긴다.이는 한국 사회의 경쟁과 생존의 현실을 담아낸 것은 물론, 선과 악이 긴밀히 섞인 캐릭터들이 연달아 등장하며 흥미를 자극한다.오징어게임을 시청하는 이들은 드라마 내 대사를 바탕으로 밈을 형성하고 있다.실시간 SNS으로 글과 영상으로 패러디되고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전 세계적인 유행의 흐름을 보이고 있다,감독은 루저들끼리 싸우고 그 루저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다룬 것이라 밝히며 이어 현실에 게임을 돌파하는 멋진 히어로는 없는 것이라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순수와 선으로 이루어진 100% 인간상은 없다는 것이다.그래선지 기훈 또한 모든 관문을 평이하게 통과하지 않는다. 선과 악 사이에서 몸 붙이며 순수와 잔혹 사이를 아슬아슬 넘나든다.어린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도 엄연히 승과 패가 난무하는 장소다. 제일 마지막인 오징어게임도 그렇지 않은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선 안에서 게임이 진행되며, 돌진하는 이는 막는 이를 몸으로 밀치며 일정 장소에 도달해야 한다. 막는 이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돌진하는 이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한다.이 단순하고도 거친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는 일정한 성취감을, 패배하는 이에겐 슬픔과 당혹감, 그리고 선망과 두려움 같은 얼굴빛이 읽힌다. 이러한 상황은 어딘가 늘 불편하다.경쟁 사회에서 한 두어 발자국 물러난 채로 관조하고 시니컬해지는 것도 마냥 옳다는 건 아니다. 이 모든 게 인간의 도덕성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시스템 문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누군가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라 말하기도 하지만, 난 충분히 파장을 일으킬 만큼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9시간 내내 시선을 곧잘 붙들어 놨으니까.세계인들이 한국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주목하여 K-붐을 일으키는 것 또한 기쁜 일이다.미국 CNN 방송 홈페이지에도 오징어게임이 한국어로 소개되고, 한국어로 진행한 영상도 볼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흐름임은 확실하다.

2021-10-12

선생의 책임감

얼마 전 한 대학의 비대면 수업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오픈 채팅을 통해 강의를 진행한 것, 교수 자신이 집필한 교재를 구입 후 인증하라고 요구한 것, 인증하지 못한 학생을 수업에서 강제로 배제한 것이 논란의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 사례가 네티즌들의 공분을 산 건, 결정적으로 그가 했던 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재를 준비하지 못한 학생을 향해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강의가 부실해지는 느낌”이라며 “강의를 망치려는 사람”, “강의를 부실하게 만드는 것을 도저히 넘어갈 수 없다”고 비난하며 그를 수업에서 배제했다.네티즌들이 가장 문제 삼은 것은 그의 태도였다. 정작 본인 또한 오픈 채팅을 통해 대학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로서 성실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단지 교재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을 힐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이었다는 것이다.내가 느낀 분노의 초점은 그가 한 대학의 강의를 맡은 교수로서 책임감 있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그는 교수로서, 한 강좌의 선생으로서 학생들에게 최상의 수업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학기 수백만 원을 학비로 내고 제공받는 수업에서 그와 같은 강의 방식을 채택하진 않았을 것이고, 학교 측 또한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정을 옹호하고 싶지는 않은 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최상의 수업을 제공하고자 최대한의 노력을 행해야 하는 게 교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보고 배웠던 교수들은 모두 그러했다. 어떤 사정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수업을 제공하고자 하는 책임감.그리고 이 책임감에는 학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선생은 제자가 뛰어나기에 선생을 자처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제자가 못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선생을 자처해야 하며, 혼을 내서라도 그를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힐난하고 비난했으며, 그를 타일러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수업에서 배제하는 방향을 택했다. 마치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악덕 상인처럼…. 그 순간, 그는 선생이길 포기했다. 그는 스스로 학점을 사고파는 악덕상인이 되기를 선택했다.만약 그가 선생이고자 했다면, 그는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가 교재를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교재를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쳤을 것이다. 비록 혼을 내서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보다 나은 수업을 위해 오픈 채팅보다 나은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어떤 것이 학생에게 더 나은 선택인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어떠한 고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가 보인 행동이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고. 우리가 기대하는 어른이란,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에 합당한 지혜를 베푸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쉽사리 우리에게 지혜를 제공하지 않는다. 혹자는 그것을 질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테지만, 우리가 질문을 하지 않는 건 질문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질문에는 권위로, 요청에는 묵살로 대응받은 경험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위축시켰기 때문이다.좋은 질문이 나오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야만 한다. 그리고 질문에는 대답이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시켜줘야만 한다. 권위 대신 해답을 제시하는 것, 혹은 해답을 찾기 위한 방법을 일러주는 것. 우리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일을 함께해줄 사람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학생들이 선생을 공경하지 않는 것 또한 문제겠지만, 공경 받을 만한 선생이 줄어드는 것 역시 문제인 셈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수업이 학생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회생활을 위한 방식을 가르치고, 문제를 직면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리하여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그렇다면 저 사례 속에서, 선생은 학생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일까. 도대체 그는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일까.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던 채현국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그에게도, 그의 학교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2021-10-05

눈을 감을까 뜰까, 그것이 문제로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추리 소설만 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그녀는 최고의 추리 소설 작가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녀는 80여 편의 추리 소설을 발표했으며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역사상 가장 위대한 추리 소설 작가로 꼽히며 명실상부 영원한 ‘추리의 여왕’이자 캐릭터와 플롯을 능수능란하게 운용하는 작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작품은 재미있다. 영국의 시인 소피 한나는 아가사 크리스티만큼이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추리 소설을 많이 쓴 작가는 없다고 말했으니, 나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이토록 위대한 작가로 유명세를 날리던 아가사 크리스티는 1930년부터 1956년까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6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게 된다.이것은 당대의 독자들에게 철저한 비밀에 부쳐진 사실이었다. 이렇게 발표한 작품들은 기존의 아가사 크리스티의 플롯을 따라가지 않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분명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소설에서 벗어나서, 인간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인생의 내밀한 지점을 파헤치며 벼랑에 내몰린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그중에서도 ‘봄에 나는 없었다’는 뛰어난 작품이다. 나는 우연히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에서 집어온 책이었는데, 다 읽을 때까지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이라고 예상조차 못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와, 이 작가 정말 대단한데?’하고 작가의 이력을 확인하고 굉장한 혼란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소설의 주인공은 유능한 변호사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을 가진, 그야말로 완벽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주부, 조앤이다. 그녀는 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사막의 기차역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사막을 걷는 것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생각에 잠기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무시무시한 고요 속에서 그동안 묻어두었던 날카로운 과거의 조각들이 그녀를 아프게 찌르기 시작한다.조앤의 딸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정말 몰랐다. 왜냐하면 결코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자신에게 되묻는다.‘나는 정녕 제대로 살아왔는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괴롭기만 하다.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의심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진실일까? 그게 진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조앤은 생각과 고민을 멈춘다. 그리고 현실로, 거짓되지만 안온한 집으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이러한 고민에 빠진 또 다른 문학적인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햄릿’이다.햄릿은 그의 숙부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유명한 구절은 영문학사 전체에서 제일로 꼽히는 명대사이다. 진실을 파헤치고 복수의 칼날을 뽑을 것인지, 혹은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한 채로 삶을 지속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놓인 것이다. 혹자는 햄릿이 결단을 미루는 우유부단한 인간상이라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렇지 않다.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태도를 결정한다. 햄릿은 비극적 운명과 대면하기를 선택하고 숙부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로 인해 자신 역시 비참한 죽음에 내몰릴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조앤과 햄릿의 고민의 지점은 같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완전히 상반된다. 조앤은 삶에 자리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그럴듯한 현실 속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햄릿은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고 끝까지 마주한 뒤에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간다. 과연 누가 옳은가. 우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 줄 수 있고,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러한 질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최대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진실을 분명히 봐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눈을 감을 것인가, 뜰 것인가.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섬뜩한 삶의 굴레 안에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어떤 인물에도 탄식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택하더라도 후회할 수밖에 없다. 그 아이러니가 바로 소설을 읽는 이유다.

2021-10-05

가치를 삽니다, 미닝아웃

최근 옷장 정리를 하면서 내가 가진 물건을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한 때 유행이었지만 낡은 브랜드 후드티, 지하상가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검정 코트, 언제 산지 기억도 안 나는 화장품들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한 가득 산을 이루고 있으니, 나의 소비습관이 한참이나 잘못되었단 걸 깨닫고 말았다.그 뒤론 물건을 살 때 고려하는 부분이 까다로워졌는데, 첫 번째는 합리적인 가격이다. 턱없이 비싸거나 또 지나치게 저렴한 것은 의심부터 하고 본다. 과한 소비를 경계하되, 너무 저렴한 것은 겨우 한 계절 입고 버리게 되므로 적당한 가격에서 오래 쓸 수 있는 것으로 고른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번째는 바로 제품이 지닌 가치다. 단순히 상품성만 지닌 물건이 아닌, 지속 가능 소재로 만들어진 친환경적인 소재나 리사이클링 제품, 특정 스토리가 담겼거나 옳은 가치관을 품은 제품을 우선적으로 고르게 됐다.이를 미닝아웃이라고 칭하는데, 미닝아웃이란 Meaning(신념)과 Coming out(정체를 드러내다) 두 가지 단어가 결합된 단어로, 자기 가치관과 사회적 신념을 소비를 통해 드러내는 행위를 말한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제품이 지닌 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구매하는 것이다. 미닝아웃은 MZ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 세대) 사이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인종 차별이나 성차별 반대 문구가 쓰인 옷을 입는다거나, 일정 금액 이상이 위안부 할머니에게 기부되는 제품들을 애용한다거나, 세월호 리본을 가방이나 의류에 달고 다니는 등, 개인적 신념을 소비를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SNS에서도 미닝아웃의 흐름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와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공유하고 놀이처럼 즐기기도 한다.대부분의 업사이클링 제품은 다소 가격이 나가는 편이다. 버려진 물건이 재활용되기까지 까다로운 공정 과정을 거친다. 사용 가능한 부분을 선별하여 세척하고 가공하는 과정엔 많은 시간과 자본이 들어간다고 한다. 미닝아웃을 지향하는 이들은 물건을 고를 때의 주요 선택 기준은 가격이 아닌, 나의 소비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또한 업사이클링 제품은 전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기도 하다. 같은 제품일지라도 버려진 물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디테일적인 부분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희소성과 특유의 감성, 그리고 특수한 가치 발견으로 더욱이 미닝아웃적을 지향하는지도 모르겠다.또한 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 등 환경 문제에 대해 더욱 많은 이들이 집중하고 있다. 개인 텀블러나 에코백 사용, 플라스틱 사용을 일절 줄이는 제로 웨이스트, 비건 지향 등 과거 일부 층에서만 지향했던 흐름들이 점차 많은 사람들로 확대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이 흐름에 발맞추어 몇몇 기업에선 친환경적 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환경보호를 위해 물병을 두른 라벨지를 삭제한다거나, 폐지를 이용해 크라프트 보드를 사용하는 것,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전면 중지하고 종이 빨대를 쓰는 등 가치소비 운동의 흐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사실 난 소비 습관이 엉망인 편이다. 가장 저렴한 물건이나 의류를 하나 산 뒤에, 고장나거나 해진 경우엔 바로 버리고 새로 사곤 했으니까. 심지어 옷의 경우엔 취향도 없고 나와 어울리는 스타일도 몰라서 주로 유행에 맞춰 구매하기도 했다.그래서 의미 있는 가치를 의식하고 나서부턴 전과는 조금 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눈에 띄는 옷을 빠르게 구입한다거나, 현재 유행하고 있는 옷을 쉽게 사는 편리함이 없으니까. 친환경 브랜드인지 이것저것 따져가며 비교해야 하고, 전과는 다른 시간과 돈이 배로는 들기 때문이다.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도 그렇다. 가공육 사는 것을 줄이고, 방사사육 달걀을 선별하여 골라보는 등. 조금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유난을 떨게 되는 것은 좋은 소비를 통한 만족감이 꽤나 컸기 때문이다. 나의 변화가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몫 안에선 조금씩 동참해보는 중이다.

2021-09-28

어떤 시참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국어사전은 시참(詩讖)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는 일”이라고. 백석은 1936년에 짝사랑하는 여인 박경련을 만나러 무작정 통영에 갔다가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는 슬퍼서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통영 2’)라고 썼는데, 이듬해인 1937년 봄 박경련은 백석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신현중과 백년가약을 맺는다.“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는 명구를 ‘자화상’에 새긴 서정주는 그 시의 다른 대목에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고 쓰고는 정말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았다. 자기 평생이 친일, 독재 미화 등 오욕으로 얼룩지리란 걸 젊은 날의 방황 속에서 이미 알았을까?2005년 등단한 신기섭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나무도마’에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이라는 어두운 문장이 있다. 그의 시에는 유난히 죽음에 대한 묘사가 많았는데, 그는 그해 12월 4일, 눈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는 섬뜩하다. “옥상에 흰 눈이 쌓이고 있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새벽에 출장, 영천행. 무언지 모를 불길한 기분… 옥상에 쌓이는 눈은 나 아니면 아무도 밟아줄 사람이 없다”는 독백이 시참이 된 것이다.“한 나라가 다시 살고 다시/ 어두워지는 까닭은/ 나 때문이다. 아직도 내 속에 머물고 있는/ 광주여, 성급한 목소리로 너무 말해서/ 바짝 말라 찌들어지고/ 몇 달 만에 와보면 볼에 살이 찐,/ 부었는지 아름다워졌는지 혹은 깊이 병들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고향, 만나면 쩔쩔매는/ 고향, 겁에 질린 마음을 가지고도/ 뒤돌아 큰 소리로 외치는 노예, 넘치는 오기/ 한 사람이, 구름 하나가 나를 불러/ 왼종일 기차를 타고 내려오게 하는 곳/ 기대와 무너짐, 용기와 패배,/ 잠, 무서운 잠만 살아 있는 곳, 오 광주여”라고 노래한 이성부의 시 ‘광주’는 1980년 5월 이후 쓰인 것이 아니다. 이 시는 1972년에 발표됐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어떤 시는 그것을 쓴 시인의 자기 운명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시는 훗날 공동체가 겪을 사건의 예지몽이 되기도 한다.“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라고 쓴 이원의 시 ‘검은 모래’는 그래서 더 아프고 슬프고 무섭다. 시인의 직관은 미래의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이 시는 2013년 여름에 발표됐다. 시인이란 존재는 샤먼과도 같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그것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기형도는 1989년 초에 발표한 시 ‘빈집’에서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썼다. 그리고 얼마 뒤인 3월 7일, 파고다극장에서 심야영화를 보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만29세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기형도, ‘엄마 걱정’) 시인은 유년 시절에도, 어른이 돼서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걱정했는데, 이승에서의 생보다 더 길고 오랜 저세상에서도 내내 엄마 걱정을 했을 것이다. 지난 22일, 시인의 어머니인 장옥순 여사께서 소천했다. 아들과 남편이 잠든 안성천주교묘원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됐다.에디뜨 피아프가 부른 ‘사랑의 찬가’엔 “신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시겠지요”라는 노랫말이 있다. 연인 마르셀 세르당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서 찢긴 가슴으로 부른 노래다. 그 또한 아름다운 시참일 것이다. 이제 시인은 오래 기다리던 ‘엄마’를 하늘에서 만나게 됐다. “어둡고 무서웠”던 죽음의 세계에도 재회의 기쁨 있으리라.

2021-09-28

예민함이라는 능력

“넌 참 예민하고 피곤하다.” 어렸을 때부터 듣던 말이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친구들에게도 자주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 말을 들으면 발끈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한참 동안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이 내가 예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깨달은 일이다.본인이 예민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타인의 사소한 언행이 일순간 날카롭게 바뀌어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경험을 말이다. 어떤 순간은 가시처럼 박혀서 꽤 오랫동안 깊은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일이 굉장히 언짢고 불편하다. 이러한 성정에 공감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쁘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던 거야. 뿌옇던 유리창이 맑아지는 것처럼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정말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불합리한 것들을 발견해냈다. 그건 아주 미세한 지점이었다. 식탁 위의 맛있는 반찬은 항상 오빠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던가,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쥔 사람은 늘 엄마라는 식의 일들. 나에게 레이스가 달린 불편한 옷을 선물하는 아빠는 어째서 활동성 좋은 옷을 입고 명절에 음식을 만들고 치우는 식구들은 왜 여자들뿐인가. “이건 불공정하다”라고 소리치면 “예민하고 유난이다”라는 답만 돌아왔다.왜 남자애들은 학교 운동장을 누비면서 축구를 하고 제멋대로 웃통을 벗어젖히는 동안에 여자애들은 구석에 그려진 좁은 선에 갇혀 서로를 향해 공을 던져야 하는가. 같은 반 친구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걔들은 원래 그렇다고, 착한 네가 참으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에 교복 셔츠 위로 브래지어 자국이 비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겹의 옷을 더 껴입는 일, 선생님의 폭언에도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일, 우등생의 실적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활동을 포기하는 일은 여린 마음을 무자비하게 찌르기에 충분했다.나는 끊임없이 분노했다. 그러한 태도로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부당하다는 말을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불편해했다. 예민하고 피곤한 사람이라는 판단은 어린 나를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비난으로부터 나를 방어해야 했다. 나는 주문처럼 외쳤다. ‘이 세계는 원래 그렇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어찌 보면 간편한 일이었다. 그저 내 성격을 탓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무던해지려고 애썼다. 다양한 삶의 지점에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끼던 물건이 마모되어 돌아와도 무례한 언사를 들어도 참아냈다. 그리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러면 많은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니까 나의 사춘기는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나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를 명명백백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었다. 나의 비뚤어진 부분을 발견하고 온 힘을 다해서 거부하지만 결국 그런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예민함을 받아들였다. 글을 쓰게 되면서 예민함은 귀한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민하다는 것은 삶에서는 불행일지 모르지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힘이 된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균열의 지점을 포착하는 능력이 이 예민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때때로 길가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골똘히 쳐다본다. 그들의 고단한 걸음걸이를, 해를 등지고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분명 내게 보이지 않는 서사가 있을 것이라고. 머리맡에 다양한 이야기가 잔뜩 운집해 있기에 언제 쏟아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가시 돋친 서사에 기꺼이 손을 댄다. 따갑고 아프지만 내 안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기민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그러니 자신의 예민한 성정으로 괴로워하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아주 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경계를 발견하여 아낌없이 꺼내어 놓는 일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그리하여 확장되는 시야는 분명 유의미하다고. 어쩌면 그토록 불편한 우리가 이토록 부당한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고 말이다.

2021-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