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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지나며

등록일 2022-08-02 19:11 게재일 2022-08-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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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방학의 목표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설정했다.

지금 우리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청명한 하늘을 마주하면 한없이 들뜨다가도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실온에 둔 음식처럼 기분이 상한다. 푸르른 바다와 싱그럽게 자라는 식물의 줄기를 상상하지만, 습도만큼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듯한 찝찝함이 온종일 가시질 않고 에어컨 없는 공간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다.

이 여름, 나는 휴식에 관해 골몰한다. 문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달구는 한낮에도, 창 너머로 후텁지근한 바람만 불어오는 늦은 밤에도,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하면 어쩐지 숨이 가빠진다.

학교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방학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일 때의 방학과 선생이 되어서 체감하는 방학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게 방학은 그저 마냥 즐거운 기분이라면 후자는 숨을 쉴 유일한 기회다.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는 동아줄 같은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서 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임해야지만 다음 학기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동료들과 손을 맞잡고 다짐했다. 열심히 쉬다 옵시다, 우리.

몇 달 전부터 나는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궁리했다. 비행기 표를 사서 이국의 휴양지에 다녀올까. 괌이나 하와이 같은. 아니면 서울 근교의 세련된 호텔에서 며칠 머물면서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온종일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주말에는 사람들로 붐벼서 쉽게 갈 수 없던 유명한 식당이나 평일 오후의 미술관도 떠올렸다. 그렇지만 내게 필요한 휴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아니라 비움이 필요했다. 그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던가 좋은 곳을 구경하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번 방학의 목표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설정했다. 방학 계획표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노트북과 책도 내려놓았다. 떠오르지 않으면 한 문장도 발화하지 말자. 텍스트를 읽고 싶으면 그때 소설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당에 앉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지리산에 올라가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에 감탄하고 천년을 살았다는 소나무와 마주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다가 지겨워지면 평상에 누워 낮잠을 잤고 해가 넘어가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이 일을 삼십 년이나 해냈어?”하고 내가 물으면 “자식을 키우려면 뭔들 못하겠느냐”고 부모님은 대꾸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에 찾아가 회상에 젖기도 했다. “우리 꼬마가 이렇게 자랐어!”하고 외치던 목사님의 손은 너무나 다정했고 나는 어느덧 한 시절을 통과해왔다는 감각을 느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누구에게나 방학은 필요하다. 직장인에게도 여름방학을 달라는 말은 그저 실없는 농담이 아닐 테다. 짧은 휴가로는 충족될 수 없는 긴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똑같은 삶이 쳇바퀴 돌 듯 지나간다. 물결처럼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 고이고 응축되면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여름은 부패하기 쉬운 계절이니,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다. 휴식은 육체와 마음을 재정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일로 나아가고 더불어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게 한다.

이렇게 나의 방학이 지나가는 중이다. 풀벌레가 시끄럽게 우는 여름밤,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내년에 계약 만료가 되는 월셋집과 손봐야 할 소설의 무수한 장면들, 매일매일 체감하는 나의 부족함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밖에도 처리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이 가득하지만 잠시 눈을 감기로 한다. 그 대신 여름의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던 강의 표면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를 떠올린다. 이제 며칠 후면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고 지켜야 할 약속을 이행하며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학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마치 문을 닫듯 상념은 잠시 거기에 놓아두고 나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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