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을 하면 환기되는 기억이 있다. 음식을 먹는다던가, 냄새를 맡는다던가, 촉감을 느끼는 것으로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던 과거의 사건이 소환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게 추동되는 일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일직선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던 시간이 아무렇게나 뒤엉키는 것을 느끼고 일순간 길을 잃은 것 같은 감각을 체험한다. 까맣게 잊고 싶은 기억이나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기억은 우리들의 내부에서 각자의 형태로 위치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인 마르셀은 홍차에 마들렌을 먹으면서 그 맛과 향기에 과거의 기억으로 넘어가게 된다.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 있는 문장과 종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한 문장으로 축약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해 언어로 표현해내려는 작가의 예술적인 성취에 가깝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위치한 인간의 삶을 적어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던 작업이었을 것이다.
내게도 마르셀의 마들렌과 같은 음식이 있다. 물을 적게 넣고 면을 잘게 부수어서 끓여 먹는 라면이 그것이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만들어준 요리로 지금 와서 그때의 맛을 재현하려고 해도 늘 실패하기 일쑤다. 어쩌다 비슷한 맛이 감각되는 날이면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친구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과 살았다. 그때 우리는 고작 열한 살이었다. 친구에게서는 늘 물에 젖은 냄새가 났고 이따금 청결하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보였다. 어느 날엔가 친구는 자기 집에 나를 초대했다. 허름한 빌라의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서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던 친구의 아버지와 신발장까지 달려 나오던 친구의 동생,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내부의 이미지가 여전히 생생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친구는 찬장에서 라면 세 개를 꺼내서 잘게 부수었다. 친구의 아버지와 동생, 나는 모여 앉아서 친구가 만든 라면을 먹었다. 그러다 동생이 실수로 국물을 옷에 흘렸다. 친구는 동생의 옷을 벗기고는 화장실로 가져가서 빨래를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기분이었더라. 분명한 건 친구와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타인의 삶을 인식하면서 경험하는 부조화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편안하고 익숙한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끼리 공유하던 농담에 와하하 웃는 친구의 씩씩한 얼굴과 가족끼리 도란도란 나누는 일상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형태 같은 것.
최근 폭우로 도시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천둥소리와 번쩍이는 번개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떠올랐다.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죽은 캐서린의 환영을 바라보며 외치는 히스클리프의 절규가 생각났고 나는 침대 맡에 앉아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몇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다음 날 뉴스를 읽었다. 반지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일가족이 사망하였다는 기사였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는 듯했다. ‘반지하를 없앤다’는 대책을 내어놓는 서울시의 입장을 마주하고는 더욱 그랬다. 문제로 보이는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식의 행정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겪어왔다. 그로 인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들의 외침을 계속해서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나는 얼마나 안전한 위치에서 감상에 젖어있었는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내가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물이 차오르는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결코 공평한 일이 아니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들면 누군가의 삶이 보인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곁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며 삶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알지 못하는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기만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얼마나 별로인 인간인지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발화해야 한다. 끝끝내 실패로 종결될지라도. 각자의 삶을 헤아리려는 노력은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자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