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정해진 에너지가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요즘이다. 근무 시간 내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쓰노라면 일순 머리가 핑 돌기도 한다.
연비가 좋지 않아. 내 몸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골골대면서 모처럼 찾아오는 휴일엔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시간을 다 쓴다. 어쩌면 나는 게으른 사람인 걸까? 소중한 주말을 멍하니 흘려보내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쉽게 우울해진다.
그러다 최근, 나 자신을 변호하기 좋은 말을 발견하게 됐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가 한 이야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긴장감이 높다. 특히 변화가 있거나 새로운 걸 할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긴장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그 긴장을 완화시키려고 누워있는 거다. 게으른 게 절대 아니다.”
그녀의 말에 위안받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집순이’, ‘집돌이’들, 특히 언제 어디서나 누워있는 것을 생활화하는 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그렇다. 우리를 단순히 게으른 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뿐.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집순(돌)이’들도 두 부류로 나눠진다. 집에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쪽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쪽. 당연히 나는 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쪽이다. 침대 밖을 나오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은 문자 그대로 강행군이나 다름없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만남,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발걸음조차 무겁다. 누군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말을 꺼내는 상대의 의도를 돌아보게 되고 대화 도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침묵이 불안하고 스스로의 말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피로감이 쌓이는 것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봤을 때 내향적인 사람은 어딘가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자신만큼의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바깥으로 뻗어가지 않고 안쪽으로 향한다는 것. 모두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 상대를 이해하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
내향적인 사람, 다시 말해 내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요즘 뭐 하고 살아?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은 내향인들에게 있어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받은 것과 비슷하다. 약속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약속 당일까지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디서 만나야 하지? 만나서 먹어야 할 음식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누어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 시간대는 사람들이 붐빈다던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버린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목소리로 외치고 싶다. 알아요. 나도 이런 내가 싫단 말이에요.
싫어도 별수 없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으로 여러 장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변형의 형태를 보라.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은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거미에 물려 하루아침에 슈퍼 파워를 갖게 되는 서사를 담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에서 탈피하여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탄생하는 상상은 즐겁지만 결국 허구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내향인은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슬프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수다스럽고 불필요한 자기 대변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향인의 누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싶다.
당신의 지인이 연락을 잘 받지 않는다던가, 만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그것은 당신이 싫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지난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하여 가진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껴서 사용하는 중이며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미덥지 않더라도 약간의 애정으로 내향인을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