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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방인에게 친절하다. 2005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갔다. 10월의 선선한 바람과 온화한 가을볕이 좋았다.아야 소피아 성당,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예레바탄 지하 궁전, 갈라타 타워 등 이름난 관광지들을 다녔다.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이틀째 날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고 늦은 저녁 호스텔에 오니 감기 기운이 돌았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조류독감 진원지가 튀르키예였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약을 먹어야하는데, 짐 부피를 줄인다며 온갖 비상약을 다 뜯어 넣어온 게 문제였다. 뭐가 감기약인지 몰라 소화제, 설사약, 멀미약, 진통제, 감기약 등이 섞인 알약 열 알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잤다. 멀쩡했다.다음날은 멀리 신시가지까지 걸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 놓인 갈라타 다리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고등어와 정어리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잡은 고기는 곧장 케밥 장수가 사 가서는 그릴에 구운 뒤 빵에 끼워 ‘고등어 케밥’으로 팔았다. 저렴한 길거리 음식이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는 사치여서 노릇노릇한 냄새에 침이 고이는 걸 겨우 참아 지나쳤다.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저물녘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숙소로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차비도 없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데이비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외모는 튀르키예 사람인데, 아마 영어 이름을 말한 것 같다. 퇴근 후 귀가 중이던 그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함께 걸어줬다. 그의 친절한 동행 덕분에 갈라타 다리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다리만 건너면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였다. 다리 중간까지 같이 온 데이비스는 배고프지 않느냐며 고등어 케밥 두 개를 사서는 전부 다 내게 건넸다. 양손에 케밥을 들고선 다리 끝까지 혼자 걸었다. 걷다가 돌아보니 데이비스가 다리 가운데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만난 천사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 세계질서는 이념이 아닌 문명 대립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는 튀르키예를 들었다.튀르키예는 과거 오스만 튀르크 시대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지정학적 긴장이 팽팽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중세 오스만 제국을 배경 삼아 오늘날 튀르키예의 정체성 문제를 매혹적인 추리서사에 담아냈는데, 소설 속 연쇄살인범은 오스만 제국이 서양에 예속될 걸 두려워했지만,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융성하며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충돌은 여전한데, 2000년대 들어 EU 가입을 추진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유럽을 지향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국민들이 분열됐다. 특히 쿠르드족과의 갈등은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정학적, 문명적 갈등은 지금 아무 의미가 없다.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무려 4만5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도, 서양도 동양도 없다. 그저 사람, 지극히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18년 전 캄캄한 이국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내 처지처럼,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천사 데이비스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웠던 이스탄불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구호단체인 ‘희망브리지’에 성금을 기부했다. 고등어 케밥 두 개 값의 스무 배쯤 되는 돈이다. 데이비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엔 턱없이 적다.역사적으로 그리스는 튀르키예와 앙숙이다. 튀르키예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적대심은 우리의 반일감정 이상이다.이번 지진 피해에 그리스는 가장 먼저 물자와 구조인력을 보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이웃 국가다. 튀르키예 국민과 그리스 국민을 나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한 대목을 옮긴다. “네 앞에 인간이 있다. 튀르키예인이면 어떻고 그리스인이면 어떠하냐.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다 인간이란 것이다. 입이 있고 가슴이 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이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튀르키예의 정체성은 유럽도 이슬람도 아니다.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2023-02-21

과학이라는 타자

최근 OpenAI사에서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가 화제다. 독일의 통계 자료 사이트인 Statista에 따르면 ChatGPT는 공개 이후 100만 가입자를 확보하는 데에 단 5일이 걸렸다고 하며, 넷플릭스(3.5년), 트위터(2년), 페이스북(10개월), 인스타그램(2.5개월) 등에 비교해 ChatGPT를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지금껏 우리가 마주하지 못한 규모의 것이라 할 수 있다.그간 여러 유형의 대화형 인공지능, 특히 사용자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된 언어모델형 AI가 여러 유형이 있었음에도 ChatGPT가 화제가 되고 있는 까닭은 이 프로그램이 우리의 상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 가령 특정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 코드를 알려달라고 하면 ChatGPT는 이에 해당하는 코드는 실시간으로 알려주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공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 ChatGPT는 답변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추가적인 생각을 덧붙여 알려준다. 흡사, 모니터 너머에 지식의 신이라도 기거하고 있다는 듯.신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ChatGPT는 아직 완벽하진 않다. 인터넷 정보를 기반으로 질문자에 답변하며 학습해나가는 탓에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답변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분야의 질문에 대해서는 제한된 지식만을 갖추고 있어 적절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조금 평가 절하를 해보자면, ChatGPT는 모든 지식을 갖춘 신이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 포털 사이트의 정보 검색 능력이 고도로 강화된, 그리하여 신뢰도에 있어 기존의 포털 사이트의 검색 값과 신뢰도를 월등히 뛰어넘는 강화된 검색 엔진에 가깝다.그럼에도 ChatGPT로 인한 변화는 이미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사례를 말해보자면, 대학계에서는 ChatGPT를 활용한 과제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 중이다. 가령, ChatGPT를 이용해 만든 코딩 과제, 혹은 에세이 과제는 표절인가 아닌가. 이것이 표절이라면 어떤 대상을 표절한 것인가. ChatGPT를 이용한 과제물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실제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는 이미 ChatGPT를 활용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대학에서는 ChatGPT 활용을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공고를 한다.아마도 대학은 학생들의 ChatGPT를 비롯한 대화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활용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것이, 인터넷의 보편화 이후 학생들의 과제물 표절 문제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해x캠퍼스’를 비롯한 과제물 판매 사이트에서부터 각종 백과사전식 지식 제공 사이트에 이르기까지, 과제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때문에 대학 역시 학생들의 표절 여부를 가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취하고 있으나, 그와 같은 접근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오히려 대학에서 ChatGPT를 비롯한 인공지능형 기술의 사용법을 학생들에게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대다수의 과제는 위키로 통칭되는 사전형 지식 사이트의 정보를 참고하고 있으며, 평가의 기준은 지식의 적확성이 아닌 그것을 활용하는 학생의 능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어떻게 ChatGPT의 활용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기술의 윤리적 활용 방안에 대해서 말이다.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따라붙는다. 우리는 과연 ChatGPT의 답변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 ChatGPT는 과연 인간과 다른 방식의 판단능력을 가진 과학이 만든 타자인가. 사람들이 ChatGPT가 내놓는 답변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ChatGPT의 성능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을 기다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예컨대, 나를 대신해 정답을 말해주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내 생의 독재자 말이다. 대상에 대한 잘못된 가치평가는 잘못된 열광을 낳으며, 잘못된 열광은 늘 비극으로 끝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광도, 금지도 아닌 대상에 대한 적확한 지식이다.과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재고하는 것, 그것이 가장 시급하다. 인공지능은 당신의 삶을 인도할 대타자가 아니라 다만 도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3-02-14

어떤 이별

관계 맺음에 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더욱 안정감을 느낀다.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책 읽는 것을 즐기고 사람들로 꽉 찬 공간에 홀로 놓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둘러싼 배경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고독은 빨리 찾아온다. 쓸쓸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면 이상하리만치 기묘한 평온함이 느껴지고 그런 상태야말로 가장 나다운 지점이라고 여기고 있다.동시에 나는 사람과 사랑을 믿는다. 누군가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킬킬대는 순간 역시 소중한 일상 중 하나다. 부끄러움 없이 마음을 내놓으면 되돌아오는 진심에 위로받는다. 내가 힘들 때 중요한 부분을 붙들어주는 것도 타인이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마음속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관계를 맺을 때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면도 있다. 삼십 대에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관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도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학생들이야말로 위태로웠던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준 특별한 관계다.처음 학교에 발을 디뎠던 날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 그 천진한 호기심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내 안의 모자람을 모조리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학생들이 무심히 뱉는 사사로운 말이 비수처럼 꽂혀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고 사소한 순간에도 쉽게 주눅 들었다. 나는 더욱 기민하게 나를 의식하게 됐다. 그 난처함을 눈치챘던 것일까. 학생들은 나의 시시한 오답도 정답으로 믿었고 최선을 다하여 무한한 사랑을 건넸다.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골똘히 고민하다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다 어쩌면 지금이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예하게 삶을 바라봤다면 좀 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면 뭔가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선생이 해줄 수 있는 유의미한 조언이 될 것이었다. 비단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 앞에서 현명하지 못했던 일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나는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무해한 역할도 꿈꿨다. 그러나 선생은 좋은 말만 건넬 수 없고 맹목적인 낙관만을 외칠 수도 없었다. 현실은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끝끝내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던가.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계속해서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저 거들먹거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그로 인해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어느덧 2월. 바로 엊그제가 졸업식이었다. 학교에 와서 처음 만났던 친구들이 삼 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떠나는 날이었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스무 살이 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모두의 얼굴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당연하게 지속될 줄만 알았던 우리의 시간에 안녕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이제 졸업생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만의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살면서 여러 관계를 맺고 다양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가끔은 아프거나 무너지는 일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건 가르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었으니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졌으니까.내가 아닌 타인의 미래를 간절히 그려본 적이 있던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글을 통해 타인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고 이름 붙여지기 힘든 모종의 감정을 나누었다. 그건 처음 만나는 형태의 우정이었다. 마음을 다했으므로 어떤 후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크고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았다. 미련처럼 맺혀있는 마음을 졸업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갈무리했다.떠남으로 완성되는 관계가 있다. 헤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종결되었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더 큰 설렘을 남긴다. 함께 나눴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다가올 내일을 상상하는 일. 그것을 떠올리면 그제야 우리가 한 뼘 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2023-02-14

‘독’

연극 ‘독’(최보윤 작, 김진욱 연출)을 관람했다. 정말 오랜만에 본 소극장 연극이었다. 10주년을 맞은 극단 ‘웃어’의 신작이다. 극단은 안혜경, 정애화, 허동원, 한은선 등 오랜 연기 내공을 지닌 탄탄한 배우들과 실력파 작가, 연출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학로 드림시어터 소극장은 평일임에도 객석이 꽉 찼다. 지난해 12월 29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1월 21일 폐막 예정이었지만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2월 5일까지 연장 공연을 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관객 기근에 시달리던 공연 예술계에 싱그러운 봄비의 마중물이 되어준 듯하다.혜영은 촉망 받는 화가다. 경매에 출품한 작품이 수억 원에 거래되고, 여러 미술 전문 저널에 소개되는 등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모두 받고 있다. 남편 정호는 미술품 경매 업체의 임원으로 아내의 그림에 날개를 달아준다. 둘은 미대 선후배 사이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화목한 결혼 생활 가운데 두 사람의 커리어도 점점 탄탄해지고, 혜영의 임신까지 경사가 겹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연락이 끊긴 대학 후배 서현이 나타난다. 혜영 혼자 있는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무례하게 행동하다가 묘한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집을 나선다. 그 한마디 말에서부터 혜영의 의심과 불안이 피어난다. 처음엔 작은 불씨였던 것이 나중에는 커다란 불길이 돼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남편과 다투고, 급기야 임신 중절을 시도하기까지 한다.혜영과 정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때 무대는 다시 혜영과 서현이 등장하던 첫 장면으로 전환된다. 거기서 연극은 혜영과 서현의 시점을 첫 장면과 정반대로 바꾸면서 모호한 분위기의 열린 결말로 끝난다. 최보윤 작가의 말대로 “하나의 현상은 여러 얼굴을 갖고, 진실은 여러 겹이다”라는 메시지를 묵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기억이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며, 진실이란 늘 상대적 가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같은 현상이나 사건이라도 저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너무 맹신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도 서늘하지만 보다 섬찟하게 다가온 것은 ‘생각 하나의 파괴력’이다.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장석남, ‘맨발로 걷기’)는 시구는 낭만적으로 읽히지만, 생각 끝에서 꽃이 피고, 그 꽃은 덤불이 되고, 덤불은 점점 자라나 사방을 휘감아 숲을 이루고, 덤불숲에 불이 붙는 순간 커다란 산불이 돼 모든 걸 태워버린다.지옥은 마음에 심겨진 작은 생각 하나에서부터 만들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에서 멜(마리옹 꼬튀아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심겨진 그 단 하나의 생각, 세계가 세계가 아니고 현실이 현실이 아닐 거라는 그 어처구니없는 의심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남편인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평생 동안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연극 ‘독’에서도 서현이 혜영의 마음 안에 떨어뜨린 독 같은 한 방울의 의심이 모든 걸 마비시킨다. 생각 하나가 삶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사실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독’이 위험한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의심만큼 무서운 게 편견이다. 특정 지역민들에 대한 편견, 일부 직업군에 대한 편견,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등 독 같은 생각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편견은 결국 ‘나’에게 익숙한 것 외에는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보수주의가 되고 만다. 불신, 의심, 편견은 관계를 망치고, 나를 망치고, 결국 세계를 망친다.어느 시인은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라고 토로한 바 있다. 지금 당신이 고통스런 번민으로 괴롭다면, 지옥 같은 나날들 가운데 있다면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마음 깊은 곳으로 가는 길에 쳐져 있는 장막들을 헤집고 나면, 그 안에는 좁쌀만큼 작은 생각 하나가 시퍼런 독을 뿜고 있을 것이다. 티눈처럼 작고 하찮은 그 생각 하나 때문에 지옥을 짊어지고 있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 생각 하나를 뽑아내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는 평화롭다.

2023-02-07

봄을 향해서

후리지아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을 가졌다. /언스플래쉬 며칠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에 걸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서 의사 선생님께 재차 물었으나 확실한 양성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코로나에 걸려 앓을 때 나는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를 나는 무사히 지냈으니, 이 정도면 슈퍼항체를 갖고 있는 것 아니냐며 여기저기 우쭐거리며 다녔었는데, 그간의 입방정에 벌을 받듯 한순간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버렸다.확진 이후 계속 집에 머무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일차 오전은 가벼운 감기인가 싶었지만 오후가 되자마자 몸에 열이 오르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도저히 의자에 앉아있을 힘이 없어 재택근무를 중단하고 어쩔 수 없이 휴가 신청을 냈다.연달아 3일 정도 휴가를 낼 수 있어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약 먹을 시간에만 겨우 눈을 떠서 죽과 약을 삼켰고 다시 잠이 드는 하루하루가 반복됐다. 체감상 7일은 침대 위에서 보낸 것 같은데 날짜로는 겨우 3일 정도 지나가 있었다.그래도 다행스럽게 3일 정도 지나자 TV를 보면서 잘 앉아 있을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고, 딸기나 포도 같은 달고 신 과일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드디어 다 나았나 생각이 들 때 쯤 두통과 울렁거림이라는 위기가 찾아왔다.백신 1차를 맞고 찾아 왔던 부작용과 느낌이 흡사했다. 증상이 바뀌면 약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서 다시 병원에 찾아가 약을 바꾸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구토감과 지끈지끈한 두통이 계속 괴롭혔다. 잘 쉬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문득 집을 둘러보았을 때, 마음속에 작은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폭풍의 한가운데인 눈 안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 눈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세차게 휘몰아치는 회오리에 힘없이 휘말려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쉬는 동안 밀리고 밀린 업무, 평소보다 더 속도를 내야하는 잔업,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나 벗어 놓은 빨랫감 등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괴로움이 눈 너머의 바깥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눈을 질끈 감고 외면하려 애써 보았지만 어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과연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무사히 일을 해낼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번갈아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느꼈다.그러던 와중에 친구가 먹을거리와 함께 노란 후리지아 한 다발을 집 앞에 두고 갔다. 마트에서 한 다발 저렴하게 묶어서 파는 것을 사왔다는데, 꽃집에서 잘 손질된 꽃이 아니라 그런지 따로 컨디셔닝이 필요한 꽃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포장지와 테이프를 풀어 꽃을 꺼내고 가위로 줄기를 사선으로 살짝 자른 후 시든 이파리들은 손으로 떼어냈다. 친구 말대로 물에 소금을 살짝 넣으니 처음 받았을 때의 모양보다 더 꽃잎을 드러내며 화사하게 피었다.칙칙하고 어두운 집 안에 대뜸 환한 노란 색을 놓으니 시선이 은근슬쩍 꽃에게로 갔다. 화병이 없어 급한 대로 집에서 제일 큰 플라스틱 물병에 담아 놓았지만 그래도 꽤 그럴싸한 모양이 되었다. 멀리서 보는 후리지아는 갓난아이의 꽉 쥔 주먹 모양 같고 꽃잎은 힘없이 보드랍다. 비록 양쪽 코가 잔뜩 막혀 향을 맡을 순 없었지만 꽃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매번 꽃을 사는 친구를 보며 사실 잘 이해를 못 했었지만 꽃이 주는 사소한 활력과 더해지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특히 후리지아는 겨울을 끝내고 봄을 처음 알리는 꽃이라 알려져 있는 만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을 지니고 있다. 연약하고 작은 잎으로 이루어진 꽃이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만큼은 기분 좋은 에너지와 생기를 주기엔 충분했다.후리지아는 향이 정말 좋다던데,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단순한 이유가 생기자 두통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어느 때엔 약보다 꽃이 더 좋은 법이다.

2023-02-07

타인에 대한 환상

사실 나는 유행하는 드라마는 꼭 그 시기를 놓쳐서 보게 된다. 괜히 호들갑 떨기는 싫고, 그렇다고 재밌다는 데 안보기도 그렇다보니 꼭 시기를 한참 놓쳐서 보게 된다. 물론 프리랜서라는 직업 탓에 제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워서 그런 탓도 있지만, 괜히 덩달아 사람들의 유행에 합류하기도 싫고, 그렇게 덩달아 보기시작하면 꼭 “이번 주 xx화 봤어?! 대박!”이라며 공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봤어! 완전 대박!” 하면서 같이 호들갑 떨어주는 게 서툴러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그래도 재밌는 걸 놓치긴 싫어서, 비수기 때면 나는 종종 여러 시즌짜리 드라마도 하루 종일 틀어놓곤 한다. 강의도 없고 나갈 일도 없이 집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냥 하릴 없이 드라마를 켜놓고는 그 앞에 노트북이며 담요며 커피며 생강차며 과자며 사탕이며 온갖 것들을 부려놓곤 일도 하고 빨래도 개고 괜히 먼지도 닦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이번 방학엔 ‘나의 아저씨’를 하루에 한 편 정도씩 아껴가며 보고 있다. 처음엔 그냥 생각 없이 틀어놓고 있다. 보다보니 묘하게 이선균과 아이유 양쪽 모두에 공감을 하며 보게 되었다. 어렸을 적 빚쟁이에 시달려본 기억이라거나(이건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모르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마저도 이유도 없이 무서워하거나 증오하게 되는 경험이란), 혹은 한 가족의 아들이자 가장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무게라거나.이제 방영한지도 오래인 드라마라 조금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이 드라마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워 조금 놀랐었다.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철없는 척을 통해 감당하고 겪어내고, 때로는 이겨냈던 것과 달리 주인공인 두 남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감내하며 살아왔다는 점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인물들의 철없어 보이는 모습이, 두 사람을 더 극단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보기엔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의 구조는 동일해 보였다고나 할까.인상적이었던 건 두 사람의 모습 뿐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향한 타인의 시선과 말들도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너는 항상 속 깊고 타인을 위하며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지’라는 타인의 무의식적인 기대도, ‘너는 원래부터 질도 안 좋고 태도도 불량하니 앞으로도 그렇겠지’라는 타인의 태도도, 겉보기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너는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한다’라는 압력처럼 느껴졌다. 그런 타인의 태도마저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일부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이기에, 그토록 서로의 속내를 깊게 알아차리며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겐 조금 개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겠지만, 아마 나처럼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하지만 조금 슬픈 건, 두 사람이 깊고 너른 행복을 맞이하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해 속단할 수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왠지 두 사람이 끝내 마주하게 될 엔딩이라는 건 기껏해야 평범한 삶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여전히 특별하고 각별해 보이는 건, 둘 모두 타인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 없이 서로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기분을,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의 색채를 바꿔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서로를 향해 드러나는 순간, 기대는 압박으로 바뀌고 관계는 비틀리기 시작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정말로 필요한 건, 누군가 나의 삶을 뒤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닐까.드라마를 통해 사람을, 인생을 배운다는 게 좀 허황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결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종 우리의 다툼과 불화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나의 너무 높은 기대 탓에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누군가 보기엔 두 사람이 타인에 대한 기대 없이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메마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배려를 위한 가장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그래서 나는 아직 이 드라마의 끝을 알지 못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기에 적어도 서로를 원망하게 되거나 파국을 맞이하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물론 이건 드라마니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겠다. 작가도 사람일 테니 나도 기대를 좀 내려놔야지.

2023-01-31

‘힘내’ 보다는 ‘힘 빼’

설 연휴가 지나고 남은 건 2023년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다. 이젠 꼼짝없이 새로운 해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깊어진 주름을 보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촌 동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누군가가 봤을 때 나 역시도 어느 부분이 훌쩍 지나있겠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떤 변명도 불필요해진다. 2월의 문턱 앞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서 있다.정말이지 작년은 바빴고 나 자신을 살피기는커녕 방치와 학대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었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삶을 제대로 운용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일을 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탐닉하려는 마음으로 경주마처럼 뛰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도 쉽게 지쳤고 가까운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에도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힘들다는 핑계로 눈앞에 놓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다른 것보다 마감 날짜를 넘기는 일이 가장 싫었다. 소설을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 새벽에 기상해 컴퓨터를 켰고 퇴근 이후에는 쓰러지듯 잠들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은 늘 부스스했고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위경련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응급실 문을 두드리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물론 무언가를 탓한다면 탓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다기보다는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진 것에 가까웠다. 어떠한 압박과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주변에 떠도는 무수한 언어를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싶었다.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한다.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고. 불필요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습작생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힘 빼’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비문을 조심하라는 말이나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라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힘을 빼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은근히 기분 나쁘기까지 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소설을 쓰는 나를 응원하며 ‘힘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실질적인 조언이었다. 뭔가를 많이 바랄수록, 어떤 일에서 잘하려고 할수록, 글에도 삶에도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억지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힘껏 세상을 정의 내리려 하면 글도 삶도 이상한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이었다.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고 찍는 마침표도 존재할까. 나는 뭔가를 간절히 바랐기에 더욱 애를 썼다. 이제 그것은 작년의 나로 남겨두기로 한다. 절대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맘껏 달려봤으니 오히려 개운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힘을 빼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수영장에서 그렇다. 발이 닿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 몸은 무거워진다. 팔다리를 허우적댈수록 더욱 가라앉을 뿐이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다 보면 신기하게도 몸은 물 위로 둥둥 뜨기 마련이다.요가 동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을 억지로 구부리거나 힘을 주어 어떤 자세를 만들려고 하면 자칫하다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중력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자세가 만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힘내’라는 말보다 ‘힘 빼’라는 말이 듣고 싶은 새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힘을 주고 태어나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조한 마음으로 동동거리면 무자비하게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이젠 알고 있으므로. 거대한 배를 만들어야만 세상이라는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맨몸으로도 얼마든지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다. 나만의 속도로 파도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유영하는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언제가 됐든 기쁘게 기다릴 작정이다.

2023-01-31

방이라는 관

“요즘 관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시내에 있는 고시원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 이렇게 작은 관에서라도 마음 편히 지내자 마음먹었죠. 믿을지 모르시겠지만 사실 4년 전 제가 지금 가진 돈으로 아파트도 살 수 있었답니다.” (황수아 희곡, ‘가로묘지 주식회사’ 부분)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인 황수아의 ‘가로묘지 주식회사’는 집값 폭등으로 고시원 임대료마저 감당 못하게 된 무주택자들이 관에 세 들어 산다는 내용의 세태 풍자극이다. 미친 주거난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관마저 구하기가 어렵다.‘관(棺)’은 육체의 노화, 질병, 불의의 사고, 절망감에 의해 삶에서 죽음으로 떠밀린 인간의 최후 거처다.황수아는 관을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이들의 마지막 ‘방’으로 묘사하며 고시원의 하위 주거 형태로 두는 핍진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사실 그 관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원룸, 옥탑, 반지하, 고시원, 달방에 뚜렷하게 나타난다.그곳들에서 발생한 무수한 고독사들을 떠올리면 1인가구의 좁고 습하고 냄새나는 방은 확실히 관이다.지난해 여름, 폭우에 침수된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일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방이 관이 된 것이다.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김성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던 2004년의 시는 18년 지나 시참(詩讖)이 됐다. 한국사회의 외피는 화려해졌지만, 찬란한 빛은 더 짙은 그늘을 키웠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쓰러졌다. 집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반지하동굴’에 산다. 관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는다.침실과 거실과 부엌과 현관의 구별이 없는 방, 좁은 공간에 억지로 문 하나 끼워 넣어 화장실을 겨우 둔 방, 그마저도 없어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방, 집이라고 하기엔 거기 사는 그 자신도 민망해서 ‘방’이라고 부르는 방, 여기 계속 살다간 죽을 것 같은 방, 이미 내가 죽은 방, 사람이 죽어도 사람이 모르는 방, 닦아내고 긁어내고 집게로 건져서 사람이었던 주검을 수습해야 하는 방, 관인지 방인지 모르겠는 방, 아니 관. 그곳이 바로 한국사회의 원룸이다.원룸은 집을 포기하고, 집 비슷한 것을 포기하고, 그나마 집 같은 것을 또 포기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사는 곳이다.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 삼백에 삼십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지하실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방공호가 아닌가/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아요”(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라는 노래에서 무주택자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으로 방을 구하러 다닌다.신월동에서는 옥탑 투어를 하고, 녹번동에서는 지하실 탐사를 한다.고작 “삼백에 삼십”으로는 옥상 연탄창고나 지하 방공호 같은 방 밖에 빌릴 수 없다.“삼백”은 사회초년생이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지닌 전재산이고, “삼십”은 한 달에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의 거주비용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공간은 계급이 된다. 이제는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에게 ‘임거’(임대아파트 거지)라고 부르는 세상이다.이 계급사회에서 원룸은 가장 비천한 세계다. 브랜드 아파트, 단독주택, 고급 빌라, 역세권 오피스텔이 카스트를 이룬다면, 계급 바깥의 원룸에 사는 장애인, 독거노인, 미혼모, 청년 예술가, 취업 준비생은 불가촉천민들이다.모두 다 소중한 생명이자 존엄 있는 인간, 하나의 개별적 우주이지만,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입장권인 ‘지상의 방 한 칸’이 없어 소외된 자들이다.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사회 진출을 포기한 채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설 연휴에 사람들은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가지만, 이들에게는 돌아갈 집도 떠나갈 집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의 틈입을 차단한 그 방들이 부디 관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때다. 복지는 늘 사각지대를 향해야 한다.

2023-01-24

연두가 주는 믿음

기나긴 겨울이다. 겨울의 낮은 짧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면 일부러 짬을 내어 산책을 한다. 귀한 겨울 볕을 맞으며 몸을 움직여보지만 급하게 밀어 넣은 점심 식사 때문인지 속은 더부룩하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다.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안양천 주변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갈 때 쯤, 어느덧 시계는 12시 50분을 가리킨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커피 한 잔을 사서 다시금 자리로 돌아갈 때엔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를 불현듯 검사 받는 듯한 시큰둥한 기분이 더해진다. 그럴 때엔 자연스레 손바닥에 말랑하게 잡히는 책 한권을 떠올린다. 연두색 표지 속 콜리플라워와 와인잔 그리고 아티초크가 그려진, 소설가 한은형 작가님의 ‘오늘도 초록’이란 책이다.‘오늘도 초록’은 한 손으로 들고 읽기 좋은 작은 판형과 자유자재로 잘 구부러지는 부드러운 표지, 모난 곳 없는 둥그런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무광 재질의 얇은 종이는 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 종이를 펄럭일 떄마다 기분 좋은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가방 속에 넣어 다니는 책이지만, 물론 가장 좋은 건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글의 내용이다. ‘이 모든 것은 완두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식물의 연두색에 꼼짝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완두콩 때문에 알게 되었다. 슈퍼에서 완두콩을 보면 늘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에. 어쩌자고 망사 주머니도 연두색인지… 연두색 망사 틈으로 보이는 완두콩의 꼬투리… 색과 형태가 완벽하다. 이 꼬투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가르고, 벌려, 콩알들이 얼굴이 내미는 순간을 보는 건 도무지 지루하지가 않은 것이다.’ (본문 중에서)‘그리너리 푸드’의 주제로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보면 금새 배고파진다. 맛의 묘사와 음식의 생김새가 생생하게 묘사되고 전개되어 희미하던 입맛을 깨우고 눈빛을 반짝이게 한다.‘연한 낙지와 함께 먹는 은은한 미나리의 맛’, ‘달고 시큼한 장아찌의 냄새’, ‘말랑하고 순수한 아보카도의 맛’, ‘입 안을 자극하는 포도잎 쌈의 쌉쌀함’이나 ‘입맛을 돋우는 민트와 쿠민의 색’ 등 책에 등장하는 식재료들은 얼핏 보아도 비슷한 연두와 초록색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자신을 초록주의자라 칭하며 값나가는 필레미뇽의 소고기 스테이크보다 함께 곁들어 나오는 구운 야채를 더 좋아하고, 몸과 마음이 초록의 기운에 반응하는 사람이라 설명한다. 초록을 먹지 않고 두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초록과 연두를 대하는 열렬한 예찬은 깊고 풍요로워 단숨에 연두의 세계로 몰입되게 한다.또한 저자는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연두빛의 서양호박인 주키니를 맛있게 먹고 나선 다음날 주키니를 사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이후 때에 따라 주키니에 버터를 넣거나 오일을 넣거나 새우를 넣어 자신의 입맛에 가장 맛있는 레시피를 만들어낸다. 재료의 조화와 조합에 신경을 쏟는 것은 물론, 먹는 시간에 따라 재료를 다르게 넣어 새로운 요리를 구상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식재료를 더 맛있게 연구하고 요리해 결국 내 입맛에 꼭 맞는 레시피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끌림을 끌어와 나의 것으로 누리어 삶의 애정을 더하는 자세가 무척 근사해 보였다. 저자가 정성스레 내어 놓고 이야기하는 모든 연두와 초록으로 이루어진 음식 외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생한 숨이 방울방울 매달려 부지런히 반짝이는 것 같달까. 봄을 알리는 색이라 불리는 연두는 메마른 겨울을 뚫고 새로운 생명을 틔워 자라난다는 점에서 싱그럽고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지녔다. 또한 노랑과 초록의 중간색에 자리한 연두는 일상 속에서 새싹, 어린이, 자연 등의 색채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정신의 평화를 갖게 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책에서 연두를 발견한 이후로는 이제 막 고개를 드는 연두를 느긋이 바라보게 되었다. 연두가 품은 조용한 평화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다가오는 계절을 기대하게 되는 기분 좋은 믿음을 갖게 한다.회사 옆에 자리한 안양천의 산책로는 물길을 따라 고르게 깔려 있다. 퇴근 시간 이후 러닝을 할 때에 주로 택하는 장소기도 하다. 걷고 달리는 이 땅은 머지않아 새로운 연두의 세계가 펼쳐질 테니, 겨울 내내 쌓아 왔던 습관과 생활에 대한 애정을 착실히 들고선 새로운 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2023-01-24

꼬리 없이 사는 사람들

‘꼬리 자르기’라는 말이 있다. 공동체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 명에게 책임을 지울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꼬리를 자르는 대표적 동물은 도마뱀이다. 이규리의 시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 아무렇지도 않게 / 몸이 몸을 버리지요”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마뱀은 별 쓸모없는 꼬리를 먹이로 내어주고 본체는 그사이에 도망간다. 꼬리는 꿈틀거리며 적을 유인한다. 마치 여전한 생명력이 있다는 듯이. 온전하게 안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일부를 내어준다는 것이 ‘꼬리 자르기’의 핵심이다.인간에겐 꼬리가 없다. 대신 꼬리가 있었다는 흔적은 있다. 꽁무니에 살랑거리는 꼬리가 있었어도 꽤 멋졌을 텐데. 왜 없어졌을까. 인간이 이족보행을 하게 되면서 꼬리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빨리 달리거나 앉을 때 꼬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이젠 쓸모가 없어져 흔적으로 남은 기관. 그런 것이 인간에겐 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 남은 신체 기관들도 모두 유의미하진 않다. 이를테면 사랑니. 뽑아버려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이빨은 유용성은커녕 고통만 안겨주는 기관이다. 맹장이야말로 없어도 되는 대표적인 장기다. 잡식성으로 주식이 변화한 인간에게 식물성 먹이를 분해하는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그러니 지금 인간의 형태가 완전하다고도 할 수 없다. 손가락이 열두 개였다면 더욱 빠르게 컴퓨터 자판을 칠 수 있을 것이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다면 시야가 더욱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당장 내일 새로운 신체 기관이 만들어진다고 한들 당장엔 불편할지 몰라도 금방 적응하게 될 것이다.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 발전해온 생명체는 끝끝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될 순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인류가 어떤 모양으로 진화하게 될지는 결코 모를 일이다.동물의 꼬리, 그중에서도 강아지의 꼬리는 감정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강아지는 확실한 감정적 동요가 있을 때 꼬리를 움직인다. 기쁘거나 반갑거나 신나거나 화나거나 슬플 때. 움직이는 모양은 기분에 따라 다르다.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흔들 때도 있고 꼿꼿하게 세우기도 하며 축 늘어뜨리기도 한다. 이토록 선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존재라니.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사랑스럽단 말인가.만약 인간에게도 꼬리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의사소통하는 용도로 쓰인다면, 그러한 신체 기관으로 인해 감정을 결코 속일 수 없게 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고 진정성을 외치는 정치인의 발화가 우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상대의 꼬리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선이 되며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언어는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통제할 수 없는 꼬리를 붙드는 것보다 거짓말을 내뱉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의 꼬리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감정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궁극적인 수단이니까. 꼬리가 없어야만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인간에게 여전히 꼬리가 남아있다면 누군가는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꼬리 자르기’를 할지도 모른다.거침없이 자기의 신체를 자르는 도마뱀은 비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는 숭고한 지점이 있다. 자기 살을 내어주고 심장을 지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자른다. 그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 된다. 문제는 잘려 나간 사람들, 그러니까 불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버려진 사람들이다.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이 유일한 미래인 자들. 혹은 자신이 잘린 꼬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관성적으로 꿈틀거리는 자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건 이런 것이다.단단한 꼬리뼈를 만져본다. 꼬리가 사라진 줄도 모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당연하게 여기던 내 육체에 진실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잘린 꼬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2023-01-17

어린 어른은 운전을 배운다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어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운전을 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언어’를 배움으로써 상징계에 진입하듯이, 운전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도로에 진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소리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이제껏 어른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작 운전’을 힘줘 말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도로’ 위의 암묵법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금의 과장이 섞였을 따름이지.조금 별개의 얘기지만, ‘올 해엔 노력하지 않겠다’고 말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운전을 배우고 있다. 사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나는 주기적으로 파주와 화전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 쯤 걸리고, 퇴근 시간에 막히기라도 했다간 3시간이 걸리는 때도 있다.가뜩이나 차가 많은 한국에서 나까지 차를 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거니와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나까지 힘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껏 차를 끌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학생의 치기어린 생각이었고, 막상 사회 초년생이 되어 1년을 살아보니 시간 강사에게 자가용은 필수에 가깝다. 가끔 특강이라도 할라치면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 걸리기 십상이니, 하루가 그냥 슥 지나가는 경우도 많아 시간이 아까울 때도 많았고. 솔직히, 지하철에서 책 읽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도 계속 쓰고 있어야 하고, 겨울에는 롱패딩을 입은 사람이 많아 앉으나 서나 고욕이다.그렇다보니 ‘올 해엔 노력하지 않겠다’는 마인드가 ‘올 해엔 기필코 차를 사리라’로 바뀌고 말았다. 일단 마음먹은 김에 곧장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수업을 들을 때 든 생각은 ‘운전 못 하겠다’.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에 대한 설명과 도로 위에서 좌회전, 우회전 하는 법, 표지판 보는 법, 차에 대한 기초 지식 등등 온갖 것들이 쏟아지는 데 정말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과-인문대로 이어지는 순수혈통 문과생인데다, 그간 차에 관심도 없었다보니 선생님들이 하는 소리가 무슨 기계공학의 정수에 대한 설명쯤으로 느껴졌다.그렇게 학과 수업을 3시간 듣고, 다행히도 필기시험은 한 번에 합격. 무슨 패기인지 오전에 필기시험을 보는 날 장내 운전 연수를 신청해놔서 바쁘게 면허학원으로 직행해 처음으로 차를 몰았다. 엑셀도 밟아보고 브레이크도 밟아보고 좌회전도 해보고 우회전도 해보고. 옆에 선생님이 앉아있어 마음은 편했지만 머리속으로는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못하겠다. 나 같은 놈은 도로에 풀어놓으면 절대 안 돼.’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에는 선생님의 교습 스타일 탓이 크다. 나는 이론을 배우고 그걸 적용하고 해석하는 소위 먹물형 인간인데, 선생님은 자꾸 나보고 ‘감을 익히세요. 외우려고 하지 마세요’ 따위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닌가. 참고로 나 같은 인간은 ‘감’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체계에 대한 이해 없이 무언가를 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실수할까봐 벌벌 떠는 인간이라 그렇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내 질문에는 ‘감’이라는 마법의 단어만 난사했다. 그리고 그건 도로 연수 때에도 이어졌다. 나는 우회전이 ‘도로 상황에 따라, 다른 차량의 운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진입’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뭐라고? 그냥 상황 봐서 ‘감’으로 하라구요? 제 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제 감을 모르면 어떡해요?그렇게 어찌어찌 연수를 다 마치고, 다행히 시험에도 합격해서 2종 면허를 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어떻게 내가 시험을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면허를 따는 것과 실제 자차로 운전하는 건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면허를 따면서 느낀 게 있다면, 한국 사회의 운행 방식은 도로 위의 ‘차’의 운행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 이론이나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감’과 ‘상황’을 중시하고,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맞춰서 움직이면서도 급할 땐 ‘빵!’ 하고 클락션 세게 눌러주고 등등. 한국 사회의 도로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국 사회의 도로 위의 관습이 사회 구석구석에 녹아있는 걸까. 어쩌면 선후 관계는 없는 걸지도. 마침 ‘태계일주’라는 프로그램에서 볼리비아의 교통상황이 나온다. 와. 저긴 더 개판이네. 한국은 양반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한 해의 시작이다.

2023-01-17

지구의 눈물, 팜유

팜유 채취로 서식지가 사라지고 있는 오랑우탄. /언스플래쉬 얼마 전 M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는 전현무, 박나래, 이장우의 베트남 여행기가 그려졌다. 세 사람은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해 얼굴이 자주 붓고 기름기가 번들번들한데, 이 공통점을 가지고 그룹 이름을 ‘팜유 라인’으로 지었다. 팜유 라인은 베트남 달랏의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레스토랑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장장 스무 시간에 달하는 식사를 했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모인 세 사람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방송에서는 팜유라는 단어가 수백 번 등장했다. ‘팜유즈’, ‘팜유 라인’, ‘팜유 원정대’, ‘팜유 세미나’ 등등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방송이 나간 후 인터넷 검색창과 연예 기사란은 온통 팜유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급격히 팜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 인식을 가졌던 사람들이 팜유에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 팜유는 정감 있고, 유쾌하며, 무해한 것이 됐다. 출연진들과 작가, 피디가 신중했어야 하는 지점이다. 가벼운 웃음의 소재로 쓰였지만, 팜유의 진실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지난 70여 년 동안 오랑우탄 개체수는 지구상에서 전체 80퍼센트 감소했다. 그 결과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서식지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30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숲 4천 만 헥타르가 사라졌다. 우리나라 면적의 네 배다. 가구, 종이, 선박 제조 등에 쓰이는 목재를 얻기 위해 대규모 벌목이 자행됐다. 벌목보다 더 심각한 건 야자유, 바로 ‘팜유’ 채취다. 식용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는 공산품들 중 식품, 샴푸, 치약, 비누, 화장품 등의 원료명에 팜핵유, 팜올레인유, 팜스테아린이 적혀 있으면 야자유가 함유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보르네오섬에서는 인간이 암컷 오랑우탄을 포획해 화장을 시키고 란제리를 입힌 후 인간 남성들을 고객으로 하는 매춘 학대를 저지르기도 했다.‘나 혼자 산다’는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1인 가구 시대에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보여주며 공감을 얻던 초기의 취지는 이제 사라지고, 유명인들의 럭셔리 라이프가 전시되거나 친한 연예인들끼리 어울려 노는 친목 과시만 남았다. 그래도 전에는 환경 문제나 사회적 약자의 소외 양상 등 시의성 있는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흥미만 남았다. 시청자들은 ‘나 혼자 잘산다’라든가 ‘너희들끼리 산다’라고 비꼬는 중이다.이번 ‘팜유’ 에피소드는 ‘나 혼자 산다’의 문제와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바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 없음’이야말로 ‘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수십만 명 환경운동가들의 간절함보다, 일상에서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보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이미지 하나가 훨씬 더 파급력이 크다. 팜유는 ‘지구의 눈물’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방금 배달된 장미 한 다발/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설마 이 꽃들이 케냐에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장미 한 다발은/ 기나긴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주로 고속도로에/ (…) 도시의 사람들은/ 장미 향기에 섞인 휘발유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아니라/ 칠에서 십삼 리터의 물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휘발유가 필요하겠지/ (…)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나희덕,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부분) 꽃의 아름다움을 잠시 소유하기 위해 인간의 탐욕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결국 세계를 황폐하게 한다. 시인은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고 제안한다.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 희생되고 버려지는 것들을 생각해보자고 설득한다. 탄소 발자국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가 쓰는 물건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다. 또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삶이 자연과의 촘촘한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함께 잘산다’가 될 수 있다. ‘팜유 라인’ 멤버들은 생각해야 한다. 팜유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를. 물론 우리도 알아야 한다.

2023-01-10

편지를 쓰는 일

2023년의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 아침에는 떡만둣국을 끓여 먹었고, 한가로운 오후엔 집에만 누워 있기 심심해서 동네 대형 서점에 갔다. 그곳에서 새로 나온 여러 책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편지지가 놓인 작은 매대를 발견했다. 딱히 편지 보낼 일이 없지만 무언가 편지지를 꼭 사야만 할 것 같았고, 왜인지 무엇이든 써야만 할 것 같아 가장 화려한 색의 편지지를 골라 샀다.편지에는 다양한 말들이 적히지만 주로 안부나 소식, 간단한 용무 따위를 적어 상대에게 보낸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류 최초의 원거리 통신 방식이었으며 고대에서부터 근대까지는 직접 종이에 글을 써서 상대방한테 전하는 중요 통신 수단이었다.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편지는 중요한 일을 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이메일이나 문자 등으로 간단한 소식과 안부를 주고받고, 중요한 업무 내용을 전달하면서 손으로 적는 편지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소중한 이와 다툼이 있거나 중요한 회의를 나눌 때에는 문자보다는 반드시 만나 얼굴을 보며 대화를 한다. 실시간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단순한 텍스트는 오해를 낳기 쉽고 정확한 소통을 나누기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손으로 적어내는 편지는 낭만적인 부분이 있다. 특히나 수신인이 정해져 있는 편지에는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라 일정하게 적어낸다. 그간 말로는 전하기 힘든 사랑의 말을 정돈하여 적어내기도 하고 응원과 희망 같은 밝고 환한 언어들을 잔뜩 힘주어 눌러 담기도 한다. 그렇게 담아낸 마음은 시간 간격을 두고 수신인에게 전달된다.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기 보단 그간 하지 못했던 말을 우회하여 전달하고 싶을 때에 주로 편지를 택해 쓴다.가만 보면 편지를 담는 편지 봉투의 생김새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면서도 믿음직한 형태를 띠고 있다. 어떤 편지 종이든 크기에 맞는 편지지가 짝꿍처럼 같이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편지지는 빈 틈 없이 봉투에 꼭 맞아 들어간다. 편지 봉투는 편지지를 보호하기 위해 편지지보다 긴밀하게 두꺼우면서 사방이 막힌 네모반듯한 정직한 형태를 지녔다. 값비싼 물건을 감싸는 천 덮개나 보자기처럼 어딘가 믿음직스러워서 애정 어리게 보게 되는 구석이 있다.수신인이 없는 편지도 있다. 미처 보내지 못하는 편지나 나에게 쓰는 편지는 꼭 일기와도 같다. 김광석의 ‘편지’라는 곡은 이미 나의 곁을 떠나버린 수신인을 향하여 가닿지 못할 말을 노랫말로 적었다. 더는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너에게 담담하게 이별을 읊조리며 체념하며 너의 행복과 안녕을 빈다. 격정과 분노를 뺀 정제된 언어는 편지 속의 글과 닮았고, 덜어내었기에 감미롭고 담담하기에 슬프다.미국의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에밀리 디킨슨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인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랐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생의 말년엔 집밖에 나가지 않고 은둔자로 보냈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 동안 1천775편의 시, 1천49통의 편지, 124편의 산문을 썼으나 단 7편의 시만 발표했다.말년엔 모든 소통을 편지로 하였는데, 특히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친오빠의 아내였던 수잔 길버트 디킨슨과는 약 300여 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보냈다고 한다. 은둔 생활 중 유일한 소통의 수단은 편지였을 정도로 그녀는 주로 고독을 말하며 썼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특히나 편지와 관련된 ‘그에게 가는구나! 행복한 편지여!’ 시에선 ‘그’라는 대상에게 가기 위해 얼마나 ‘내 손가락들이 허둥대는지’,‘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지’,‘문장이 얼마나 힘겹게 쓰이는지’에 대해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문장으로 적어 편지에 봉인한다. ‘그에게 가는구나! 행복한 편지여!’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감정과 부끄럽고 서툰 마음을 편지를 쓰듯 간결하면서도 자유로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애정이 담긴 위트와 애달픈 긴장을 느낄 수 있어 더욱 느릿느릿 읽어 내려갔던 시다.결국 나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무언가 쓰고 싶었던 이유에는 까닭 없는 명랑함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편지는 첫 문장이 어색하고 다소 어두울 지라도, 내용의 끝에 다다를수록 아주 간단히 명쾌한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한 해의 시작 앞에서 무언가 두렵다거나 또는 지나친 걱정을 앞세우더라도 끝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나를 위한 건강한 사랑을 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해도 무엇이든 명랑하게, 무사한 안녕을 빌어본다.

2023-01-10

세차를 잘하는 어른

올겨울은 정말이지 겨울 같다. 이게 무슨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소리인가 싶지만, 세포 하나하나가 열렬히 소리치는 중이다. 세상에! 진짜 겨울이야! 쏟아지는 함박눈을 보면서 양손을 모았다.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반짝반짝한 겨울. 춥고 차갑고 꽁꽁 얼어붙은 그야말로 겨울다운 겨울. 첫눈 오던 날엔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과 전망 좋은 카페에 있었다.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우리가 스노우볼 안에 있는 장난감처럼 느껴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친애하는 이들의 와하하 웃는 얼굴과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 속의 김. 비딱한 모양의 눈사람 오너먼트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 추운 날씨가 무엇보다 싫은 나조차도 설레게 만드는 그런 겨울.이토록 낭만적인 풍경 뒤에 남은 건 지극히 지난한 현실이다. 미끄러운 도로와 질퍽질퍽해진 거리, 더러워진 자동차다.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차 문에 손을 대기가 두려울 정도다. 이젠 진짜 세차해야지, 생각하면 눈 소식이 있고 기온은 영하를 웃돈다.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사회적 체면이 서지 않을 정도로 더럽다. 미루고 미루다가 안 되겠다 싶어 손 세차장을 찾았다. 신년이니까. 새로운 해에는 몸도 마음도 깨끗해야 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라는 말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순간이 오면 이상하게 현실감각이 축소된다. 세차장 입구에 들어서면서도 머뭇거렸다.이렇게 추운 날 세차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일까, 반신반의하면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나에게 세차란, 특히 내 손으로 하는 세차란, 너무도 어른의 영역이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나보다 삶을 더 제대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 비단 세차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의 영역이란 각종 세금을 미납하지 않고 꼬박꼬박 제때 내는 것. 출퇴근을 성실히 이행하며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낯선 사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것. 복잡하게만 느껴지는 제도적 시스템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뭐 그런 것들이었다.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익숙하게 종합소득세를 신고하고 자동차세를 내며 이런저런 계약서를 검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손 세차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어렸을 때 세차장에서 훔쳐봤던 어른들의 우아한 손놀림이 이젠 무엇보다 슬픈 몸짓으로 느껴진다. 지금처럼 입김이 솔솔 나는 한겨울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기 차를 쓸고 닦았던가. 아마 나와 같은 상태였겠지. 더러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나의 게으름을 증명하는 일인 것 같아 부끄럽고 동시에 나 자신과 주변을 정돈하는 일을 관성처럼 해내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기합을 넣어본다. 물을 뿌리는 동시에 얼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물줄기를 타고 구정물이 죽죽 흐른다. 세제를 풀어 커다란 차의 구석구석을 닦다 보면 땀이 나고 팔다리가 저려온다. 얼마나 비싼 차라고 이런 수고로움을 감당하나 싶다가도 다시 열심히 손을 움직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일찍 일어나서 억지로 머리를 감고 비척비척 출근길에 올라 잦은 분노와 스트레스를 참아가면서 번 돈으로 산 물건이다. 이제 나는 노동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었고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 그렇지만 고작 그 정도를 경험했다고 해서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그런 의문이 찾아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무엇을 배웠던가. 매 순간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 넘쳐난다. 결승선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되고 싶던 적도 있었다. 이젠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결승선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내겐 지금까지의 삶보다 앞으로 더 긴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건 그만큼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얼룩을 발견했다. 미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나는 어쩜 이런 작은 일도 촘촘하게 완수하지 못할까. 스스로를 채찍질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신년 목표는 그런 어른이 되는 것으로 정했다. 세차를 잘하는 어른. 아니,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지저분한 차를 보면서 한숨을 쉴지언정 결국에는 세차장으로 터벅터벅 향하는 어른. 그 정도면 충분하다. 까치발 든 아이처럼, 한 뼘이 채 안 되는 높이를 얻었다는 것에 으쓱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성장에도 크게 기뻐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2023-01-03

노력하지 않을 겁니다만?

또 한 살 먹었다. 아….연말 내내 독감을 앓느라 새해가 된 줄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약 먹고 빨래 돌리고 방 정리도 하고, 아파서 하지 못했던 설거지며 온갖 잡무를 한바탕 해치우고 잠깐 숨 돌릴 겸 TV를 켰다가 오늘이 1월 1일인 걸 알았다. 앓아눕는 동안 시간 감각이 마비된 건지, 여전히 12월의 어디쯤인 것 같다. 왠지 나 혼자 외딴 시간 속을 헤매는 기분. 어쨌든 새해구나. 한 살 더 먹었네.별다른 감흥이 없다. 이십 대 때에는 새해 인사와 덕담에 핸드폰이 터질 것 같았는데 올 해엔 그런 연락도 뜸하다. 왠지 2022년의 인간관계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다. 새해 인사도 별로 못 받을 만큼 인간관계를 소홀히 했구나! 평생 새해 인사나 덕담 같은 걸 성실히 하지 않은 업보(?)를 이제 돌려받는 것 같다. 홀가분하다.사실 난 연말 연초의 분위기가 좀 그렇다. 좋다 싫다 라기보다는 그냥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어야 하나, 그런 기분이 든다. 어딜 나가도 사람으로 넘치고, 다들 억지로라도 신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호들갑. 그 단어가 딱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 해를 끝낸다는 건 분명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는 아닐 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일을 신나는 축제처럼 보내야 한다고 강박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치, 억지로 슬프고 괴로운 일들을 잊으려고 술을 퍼붓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기분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연말 모임에 최대한 불참을 했더니, 몸과 마음은 편하다. 독감이 좋은 핑계가 되었던 것 같다.작년 한 해는 참 정신없었다.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해. 그 전에도 돈을 벌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적은 돈이나마 월급을 받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물론 월급은 들어오자마자 대출금이며 할부금이며 공금이며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다음 달에도 비슷한 돈을 번다는 건 생각보다 꽤 큰 안정감을 줬다.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기분. 이제, 원하는 걸 하나씩 마련하고 좋은 걸 하나씩 가져도 된다는 사회의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전셋집으로 이사를 왔고, 이제는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며 차를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여전히 통장 잔고는 항상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에 기분이 제법 묘하다.안정감.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삶을 살게 되었지만(사실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대신 건강이 심히 안 좋아졌다. 학기 내내 수업과 원고 마감에 치여 살면서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 수준이 되어 이상한 불면에 시달릴 즈음부터는 자기 전마다 술을 마셨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덕분에 영상 실조라는 어이없는 진단도 받아봤고, 골다공증 초기라는 황당한 진단도 받았다. 그런데도 마음은 전보다 편하다니. 정말 묘한 기분이다.사실 병원에서 좋지 않은 진단 결과를 받았을 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뭐랄까, 열심히 몸을 돌보지 않고 살고 있다는 공증을 받은 기분이랄까. 그게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줬다.지금까지의 내 삶의 모든 불행과 사건사고가 내가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탓인 것만 같은 이상한 불안감에 시달렸었는데, 몸이 심히 안 좋아지고 나니 그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삶에 불행이 찾아든다면, 그건 내 탓은 아니겠네. 내가 어쩔 수가 없는 일이겠네 하는 기묘한 안심. 이걸 안심이라고 불러도 되나 싶긴 하지만.그래서 올 한 해에는 그다지 열심히 살지 않아볼 계획이다. 돈도 열심히 안 모을 거다. 자동차나 사고, 할부금만 갚을 정도로 살 거다. 진심이다. 열심히 사는 거 별로 좋은 거 아닌 것 같다. 아프기나 하고, 괜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나 시달리고, 몸도 망치고 기분도 망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행동하기나 하고. 행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거고, 뭔가를 사려고 노력하지도 않아볼 계획이다. 작으나마 전셋집에 차까지 구했으면 됐지 뭘. 그런 기분으로 책방에 갔고, 시집을 두 권 샀다. 아. 만화책이나 살 걸. 왜 난 또 시집을 샀지? 직업병인 것 같다. 올 해엔 진짜 공부도 열심히 안 할 거고, 일도 열심히 안 할 거다. 그런 기분으로 또 마감을 하나 끝냈다. 서른여섯 살이 되었다.

2023-01-03

작고 연약한 것의 힘

세계적인 거장 파보 예르비가 도이치캄머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이 협연자로 함께 섰다. 12월 13일 경기아트센터, 12월 15일 서울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2022년 나의 마지막 클래식, 30대의 마지막 음악이었다.1부에서 도이치캄머필과 클라라 주미 강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61번을 협연했다. 그런데 늘 강렬하던 강주미의 광휘가 전처럼 빛나지 않았다. 무대에 입장할 때 표정은 밝고, 몸짓은 풍부하며, 소리는 깊고 섬세했다. 그런데 빛만 차분해졌다.일부러 빛을 줄인 게 아닐까. 클래식 연주자의 이데아는, 자신의 천재성은 사라지고, 작곡가의 위대함만 나타나는 순간일 것이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바이올리니스트의 화려한 기교보다 전체적인 조화와 서정성을 강조한 작품이다. 베토벤 이후 비르투오소 시대에 카덴차가 만들어져 붙었다고 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완성되는 순간, 소유권이 창작자에서 향유자로 이전되므로 베토벤 역시 불가침의 신화는 아니다. 새로운 해석과 파격이 허용되는 것이 클래식의 역설적인 매력이다. 하지만 연주자가 작곡가 위에 자신을 올려두려 할 때 해석은 탐욕이 되고, 원작의 가치는 훼손된다.‘나’를 지우고 ‘베토벤’을 부조(浮彫)시키는 것. 요하임, 크라이슬러, 이자이 등 위대한 비르투오소들에 의해 카덴차가 붙으며 새로운 해석들이 추가된 곡을 연주하면서도 강주미는 1806년 베토벤이 소망한 ‘조화’를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빛을 줄였다. 그러고 보니 무대 앞이 아닌 오케스트라 안으로 들어가 연주하고 있었다. 현란한 카덴차 중에도 빛은 은은해서 세거나 튀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악장 중반 여리디여린 피아니시시모로 총천연색 같이 선명한 음을 내면서 깊은 비브라토까지 아우르며 투티와 합해지는 순간이었다.발레리는 “수단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은 강도(剛度)다. 왜냐하면 다른 말보다 강한 말을 쓰는 데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피아노보다 투티나 포르티시모를 쓰는 데, 정원보다 우주를 쓰는 데 더 많은 힘이 드는 건 아니니까”라고 했다.모두들 크게 외치고, 큰소리로 말하는 시대다. 강하고 센 것들만 살아남는 세상이다. 큰 나무들로 울창한 숲에서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 캄캄한 그늘에서 침묵과 입 맞추는 작은 빛을 본 적 있나? 강주미의 연주에서 나는 작고 섬세한 것의 힘을 느꼈다. 어깨와 등의 잔근육들마저, 금빛 드레스의 주름들마저 모두 작은 것, 여린 것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아름답고, 연약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주를 이루는 중이다. 나는 가장 여린 음에서 가장 큰 마음을 들었다. 그것은 베토벤 원본의 위대함, 그 조화로움에 대한 존경일 것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도이치캄머필은 챔버오케스트라다. 교향악과 실내악의 중간 형태라 할 만큼 몸피가 작다. 대형 오케스트라의 절반 정도인 40여 명이 무대에 올랐다. 파보 예르비의 악단 구성 역시 작고 섬세한 힘을 지향하는 듯하다. 이들의 연주에서 나는 어떤 다정함을 느꼈다. 연못에서 물고기를 옮겨올 때 물고기만 꺼내는 게 아니라 물과 부들과 이끼와 연잎과 소금쟁이와 돌까지 함께 ‘떠’ 오는, 그런 류의 다정함이다. 마지막 앵콜인 시벨리우스 ‘축제의 안단테’에는 세상을 둥글게 감싸 안는 숭고하고 선한 힘이 있었다. 현악 파트만으로도 대형 오케스트라의 짙고 웅장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 울림을 나는 ‘위로’라고 부르고 싶다.“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나희덕, ‘귀뚜라미’)세상이 온통 하얀 별천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패러디하자면, 음악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새해에도 음악은 계속 흐를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작고 연약한 것들을 향해, 흰빛이 되어.

2022-12-27

가을배추와 겨울나기

겨울은 기다림이 있기에 지루하지 않다. /언스플래쉬 겨울 냉장고에 절대 떨어지지 않는 식재료가 있다. 바로 가을,겨울 대표 채소인 배추다. 배추의 어원은 중국에서의 ‘백채’가 변하여 배추가 된 것인데, 추운 겨울을 견뎌내는 소나무의 기운을 닮은 채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11~12월에 출하되는 가을배추는 잎 부분이 더 달고 아삭하단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 겹씩 뜯어 생으로 아삭아삭 베어 먹는 맛도 훌륭하지만 찌개나 무침, 전, 볶음 등 다채로운 재료와 함께 무한으로 활용하여 먹을 수 있는 재미가 큰 식재료다.배추는 겹겹이 쌓여 하나의 덩어리 진 둥근 형태를 띠고 있다. 추위로부터 바짝 웅크린 자세나 개어둔 겨울 이불의 모양 같기도 하다. 무게는 잎으로 속이 꽉 차 있기 때문에 한 손으로 들었을 때엔 제법 묵직하다.배추를 칼로 반을 가르면 구수한 향이 퍼지며 숲을 닮은 노란 잎이 빽빽이 드러낸다. 손금 마냥 쭉 뻗어 있는 잎맥은 얇고 가늘수록 맛이 좋다. 노란 잎을 손으로 하나씩 뜯어 물로 씻어낼 때엔 부드럽게 흔들리지만, 반대로 배추의 밑동과 뿌리는 무척 하얗고 단단하다는 점도 재밌다.배추는 따로 손질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손질이 편리하고 요리할 때 손이 적게 가서 좋다. 또한 배추는 뿌리부터 잎까지 버릴 부분 없이 먹을 수 있는 알뜰한 재료다. 칼륨, 칼슘, 철분 등을 풍부히 지니고 있으며 특히 칼슘은 밥이나 고기 등의 산성 식품을 빠르게 중화시키어 혈압을 낮추는 데에 도움을 준다. 바깥 부분의 푸른 잎엔 비타민 C가 풍부히 분포되어 있어, 겨울날 면역력 강화와 감기 예방에도 좋다. 특히 배추의 비타민C는 불을 사용하여 열을 가해도 손실률이 낮기 때문에 끓이거나 튀겨도 충분히 비타민C를 섭취할 수 있단 이점이 있다.찬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배추를 넣은 된장국을 만든다. 멸치 육수와 된장, 두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배추만 있다면 빠른 시간 안에 간단히 끓여 낼 수 있다.익숙한 된장국에 배추를 넣으면 더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 배춧국은 입에서 부드럽게 넘어가 속을 금방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헛헛한 겨울의 계절을 포근히 감싸는, 수수하면서도 투박한 배추의 맛은 다른 계절보다 특히 겨울에 잘 어울린다.2022년 겨울이 찾아왔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잔뜩 몸을 움츠리곤 빠르게 걷고 하지만, 집 근처 나무들을 마주할 때엔 걸음을 멈추고선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곤 한다. 겨울철 나뭇가지를 잘 살펴보면 동그란 봉오리가 작게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흔히 겨울눈이라 불리는데 나무가 다음해의 봄의 삶을 대비하여 만들어놓는 일종의 예비 꽃과 잎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나무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의 겨울눈을 만든다는 것인데, 목련나무는 여러 겹의 껍질을 쌓아 튤립 모양 형태고 두르고 바깥 부분엔 털을 이용하여 겨울눈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칠엽수는 끈적한 진액을 통해 겨울눈을 감싸 매서운 찬바람으로부터 겨울눈을 보호하며 겨울을 보낸다. 얼핏 보면 가지 위로 작은 알배추가 피어난 듯한 모양이다. 이듬해를 바라보는 겨울의 눈이라니, 씩씩하게 맺힌 겨울눈을 마주하다 보면 겨울의 찬바람을 뚫고선 집을 향해 갈 수 있는 굳센 기운을 얻을 수 있다.잔뜩 움츠린 겨울은 생장을 멈추고선 나 자신을 보호하며 잠시 잠들지만, 봄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 겨울눈 속에 꽁꽁 잠들었던 꽃과 이파리를 크게 펼쳐낼 것이다. 이듬해의 찬란한 봄을 위한 겨울의 기다림은 충분히 유의미하며 가치 있기에 지루하지 않다.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한 가로수를 걷다보면 나무의 몸통 주위로 뜨개로 만든 겨울옷이 둘러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래피니 니팅(Graffiti Knitting)’이라는 용어로 털실로 뜨개옷을 짜서 나무나 동상 등에 입히는 작업이다. 그렇게 겨울옷을 입은 나무들은 겨울 내내 얼지 않고 온기를 품고선 살아간다. 형형색색 뜨개 옷을 입은 나무들이 거리를 지키고 서 있을 때,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으면 무언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든다.어둡고 추운 막막한 겨울이므로 무언가를 자꾸만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되고 나눔과 함께의 가치가 실현되었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정말 더는 춥지 않다.

2022-12-27

당신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꽃같이 젊디젊은 나이에 하늘로 간 영혼들을 두 번 죽이는 유족들”, “#우려먹기_장인들”, “자식팔아_장사한단소리_나온다”, “#나라구하다_죽었냐”. 지난 12일 국민의힘 소속의 창원시 의원 김미나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다. 아마도 그는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과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향해 쓴소리를 하려던 것이겠지만, 그 소리는 쓰지도 않았고 달지도 않았다. 그건 단지 인신공격에 불과했을 뿐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약해져 있는 사람을 향한, 불필요한 인신공격.심지어 김 의원은 지난 달 말에도 방송사 인터뷰에 참여한 한 유족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기도 하였다. “지 XX를 두 번 죽이는 무지몽매한 XX”라며 “자식 팔아 한 몫 챙기자는 수작”, “당신은 그 시간이 무얼 했길래 누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가! 자식 앞세운 죄인이 양심이란 것이 있는가”. 엄연히 “지 XX”, “자식 팔이” 등의 원색적이고 악의적인 워딩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의원의 해명은 다음과 같았다. “유족들을 이용하는 단체를 향한 발언이지 유족들을 향한 발언이 아니다. (중략) 유족들이 들었을 때 부적절한 내용이 있다고 하면 죄송하다”.아마도 김 의원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으리라. 참사를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사건은 불의에 벌어진 참사일 뿐,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계기 삼아 정권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김 의원의 생각이 이와 같다면, 이건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생각이다. 그것이 불의에 벌어진 참사이며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와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기회가 우리에게는 여러 번 있었다.예컨대,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다스린다는 말은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축적하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 정리하고 수습하고 바로 잡는 일을 의미할 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그 다스림의 자리는 특정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그 자리에 위치하더라도, 그것은 법이 정한 기간 내에서의 점유일 뿐,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잠시 ‘다스림’의 자리를 점유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것, 그리하여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막는 것에 있다.김 의원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슬퍼진다. 그와 같은 ‘정치’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모두 망각한 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자기보전적인 말하기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자신이 행해야 할 정치와 다스림의 근본에 대한 고민을 망각하고, 자신을 그 자리와 동일시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고 여겨지는 정치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능력과 책임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동일시한 것에 대한 공격과 그것에 대한 방어만이 존재할 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인문학 강사로서 그의 말이 한층 더 처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와 같은 정치적 방어의 언어가 어떠한 논리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시의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서, 유가족의 말에 자리하고 있는 논리에 대해 논리로서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이 택한 것은 논리적으로 유가족의 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 자체를 공격하고, 그들을 부도덕한 정치적 악의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하고자 했다. 그것도, 아주 원색적인 표현들을 남용하면서.진실과 거짓에 대한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김 의원을 비롯해 막말을 쏟아내는 여러 의원들을 바라보며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진실은 단순히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연루된, 그렇기에 자신의 양심을 걸고 지켜야 하는 거짓 없는 사실,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막말을 일삼는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어떤 것을 진실로 여기며 살아가는가. 어떤 진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러한 말을 쏟아내는가. 그리하여, 당신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당신이 원하는 국가란 정녕 어떤 모습인 것인가.

2022-12-20

말랑말랑하면서 단단한 것

예리하지 못한 사람에겐 그만큼의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다. /언스플래쉬 누군가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상대의 말에 관해 곱씹고 생각해보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인다. 고치고 싶은 나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다. 상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대하는 나름의 배려일까. 혹은 생각의 편협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방어적으로 취하는 행동이 아닐까. 무엇이 됐든 나는 상대의 의견에 긍정하는 형태를 자주 취하고 돌아서면 매번 후회하기 일쑤다.특히 그것이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될 내용이었을 때, 상대의 생각에 힘을 실어주면 안 되었을 때,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취한 단순한 행동이었을 때, 나는 나의 나약함에 무너지고 만다. 왜 면전에 대고 말하지 못하지? 그건 틀렸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고. 무분별한 긍정과 무책임한 승낙 사이에 있는 건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는 얄궂은 태도다.모두와 다 잘 지내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행동하는 게으른 관성이다.글을 쓸 때는 살짝 용감해진다. 몇 번이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내 생각을 가장 가깝게 표현해낼 수 있는 언어를 찾을 수 있다. 거칠고 뾰족한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리한다. 그러나 나는 당연하게도 내 마음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내가 뱉어내는 이야기는 오해를 사기 쉽고 가장 싫어하는 나의 부분까지 들키고야 만다.글이란 참 이상한 것이라서 교묘하게 돌려서 보여주려고 해도 결국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은근히 탓하는 마음까지도 드러나게 된다. 내가 적은 문장은 수정될 수 없으며 끝끝내 내 뒤를 따라다닌다.어쩌면 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가닿은 언어는, 그것이 고약한 내용일수록,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미래의 나 역시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아서 나는 매일같이 나의 언어를 의심한다.정말 그렇다.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쉬운 것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데… 좀 더 뻔뻔해져도 될 텐데… 그게 어렵다. 긍정도 부정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의도적으로 딱 잘라 선을 그어보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그건 내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자기혐오의 일종일 수도 있고 흔한 자기 검열의 발현일지도 모른다.언젠가 그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분명한 태도를 해명하고 싶다는 욕구와 내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이불처럼 덮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떤 면에선 필연적인 오독이 필요하니까. 단 하나의 오해도 없이 타인을 안다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는 우유부단함으로 점철된 사람일 수 있고 불편하리만큼 내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사실이다.어떤 면에서는 예리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또 그만큼의 말랑말랑한 구석이 있다. 냉철하고 적확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잘하는 부류가 있다. 딱 잘라 표현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운용한다. 어떤 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순 없다. 자기 태도가 옳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찾아오는 자만을 경계해야 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적의 손을 동시에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답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현상을 찬찬히 마주하려고 하지만 누구보다 성급하고 저돌적인 면이 있다. 모순으로 똘똘 뭉쳐있으나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첨예하면서도 여유로운.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그런 것이 어디에 있겠나 싶으면서도 또 아주 없을까, 골똘히 생각해본다.그러니까 그것은 복숭아의 성질과 비슷하다. 복숭아라는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각각 고유의 특질을 지닌 맛 좋은 과일. 물복과 딱복이 섞인, 어떤 부분은 말랑하고 또 어느 부분은 단단한 그런 복숭아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그래, 이런 형태도 있는 거지.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 깨닫는 것. 반성하고 후회하면서도 ‘나’라는 구심점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것. 그뿐이다.

2022-12-20

공 차는 소년들이 돌아온다

중학교 때 매년마다 ‘교내 구기대회’라는 학급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한 2주간 치러지는데 각 학년 결승전은 전교생이 다 나와서 관람하는 대형 이벤트였다. 구기대회 시즌이 되면 축구공의 PVC 냄새가 대기 중에 떠다녔다.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져 텅 빈 운동장에 가 혼자 연습하고 등교했다. 아직도 코끝에 희미하게 남은 축구공 냄새를 감각하면 가슴이 뛴다.1997년, 1학년11반 대표로 첫 출전한 구기대회 1라운드 경기에서 나는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대굴욕을 맛봐야 했다. 나 때문에 우리 반 탈락했다. 이를 갈고 칼을 갈고 발을 갈며 와신상담, 겨울방학 내내 볼만 찼다.이듬해 우리 2학년3반은 플레이메이커 정찬범, 포워드 오조원, 라이트윙어 박찬영, 풀백 윤상호, 그리고 중원과 사이드를 오가며 중앙 침투도 하는 윙어 겸 새도우 스트라이커 이병철까지, 전력이 꽤 탄탄했다.12강 1라운드, 5반과 붙었다. 수비 후 속공 상황에서 오조원이 중앙선 위로 치고 나가는데, 정찬범이 “병철아 같이 올라가줘” 외쳤다. 질풍처럼 달려 어느새 나란히 침투하는 중에 오조원이 내게 패스했고, 그걸 받아서는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드리블해 골키퍼 키를 살짝 넘기는 아웃사이드 칩킥으로 골을 넣었다. 구기대회 첫 골이었고, 2002년 안정환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한 것보다 4년 앞선 감각적 플레이였다.다음 6강 라운드에서는 1반의 내 친구 박진형과 공격수와 골키퍼로 마주하는 운명의 장난에 괴로웠으나 승부 앞에 우정 따위는 없었다. 문전 혼전 중 수비 맞고 굴러 나온 세컨드 볼을 박진형 가랑이 사이로 넣으며 친구에게는 굴욕을, 우리 반에는 승리를 안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4강전, 아침부터 설사를 심하게 해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연장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고, ‘신이 만든 단두대’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1년 전 실축의 대굴욕이 PTSD가 될 법도 한데, 자신 있었다. 겨울방학 동안 수없이 연습한 그 슛을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라. 1번 키커로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발 인사이드킥으로 오른쪽 골망을 갈랐다.대망의 결승전. 8반의 이홍규는 별명이 ‘야신’이었다. 인류가 축구를 시작한 이래 최고의 골키퍼라는 러시아의 전설 레프 야신을 방불케 했다. 오직 골키퍼 덕분에 결승까지 올라온 8반이었다.전반전에 우리 반이 선제골을 넣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 리드를 지키던 후반전 중반, 상대진영 오른쪽 코너에서 박찬영이 땅볼 패스를 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 20미터 지점, 굴러온 공을 힘차게 찬 내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로켓처럼 날아간 공은 몸을 날린 야신의 장갑 위로 솟아 크로스바 밑동을 때리고는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구기대회에 푸스카스상이 있다면 무조건 수상했을 골이었다.그해 가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대표로 내가 상장을 받았는데 상장에 내 이름이 적힌 걸로 보아 아마도 내가 대회 MVP인 게 분명했다. 이듬해 3학년 대회에서도 두 골을 넣었는데, 한 골은 중앙선 부근에서 상대 골키퍼가 나온 걸 보고 롱슛을 한 게 들어갔고, 또 한 골은 후방에서부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폭풍 드리블을 해 강력한 땅볼슛으로 왼쪽 골망을 갈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손흥민이 그걸 좀 비슷하게 찬다. 그때 인근의 봉천여중 애들이 내가 축구하는 걸 보러 왔다. 남녀공학을 다녔라면 90년대 농구대잔치 연세대 우지원 인기는 그냥 능가했을 것이다.그 시절 축구는 우리들의 ‘세계’였고, 구기대회는 월드컵이었다. 나는 봉천중학교 구기대회에 통산 3회 출전해 7경기에서 5골을 기록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스트라이커였다. 그 모든 골 장면들이 24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우리나라가 1998 월드컵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진 새벽, 운동장에 가 울면서 공을 찼다. IMF의 설움과 겹쳐 더 서러웠다. 2002 월드컵에서 그 눈물은 환희로 바뀌었다.지난 한 10년은 동네 학교 운동장이 썰렁했다. 그 많던 공 차는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리에게 짜릿한 감동과 환희를 줬다. 이제 공 차는 소년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손흥민과 황희찬, 이강인을 흉내 내느라 밥도 거르고 운동장을 뛰어다닐 것이다. 모두들 먼 훗날 추억할 골 하나씩 넣었으면 한다.

20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