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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 ‘향수’)아까시 꽃냄새가 흐르고, 청보리밭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면 충북 옥천 안남면 지수리, 금강 청동여울의 봄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금강의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나는 봄마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서 루어 낚시를 즐긴다. 루어 낚시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길, 금강휴게소에서 라바댐 지나 금강4교, 보청천 합수부 원당교 앞 엘도라도 펜션, 청마교, 합금교, 가덕교 콧구멍다리 또 지나 부연 먼지를 일으키며 비포장길을 달리다 멀리 지수리 취수탑이 보이면 마음의 가속 페달을 더 세게 밟게 된다.언제 와도 고향집 같은 ‘등나무가든’에 짐을 푼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는 집이다. 주인 어르신 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낚시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이 집을 찾았는데, 그렇게 드나든 지 벌써 10년쯤 됐다.할아버지 할머니와 여기 함께 살던 손자는 자기가 키우는 햄스터를 내게 자랑하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새 대학생이 돼 타지로 나갔다고 한다.아저씨는 숙원사업이던 마당 연못을 만들어 5짜 쏘가리 두 마리, 4짜 붕어 몇 마리, 잉어, 마자 등등을 넣어두셨다.내가 마당에 주차하고 내리자마자 이것 좀 보라며 얼마나 자랑을 하시는지.아주머니는 대뜸 “더 훌륭해졌네” 하신다. 나는 뭐가 훌륭한지 모르면서, 어떡해야 훌륭해질 수 있는지 모르면서 어떻게든 훌륭해지기로 마음먹는다.낚시 준비를 해서 청마대교 밑 여울로 들어갔다. 쏘가리가 나오면 제일 좋고, 끄리 손맛만 봐도 좋다. 역시나 막무가내 우당탕탕 끄리가 루어에 달려든다.힘이 제대로 붙은 끄리들을 연신 낚아내며 손맛을 즐기고, 잡자마자 사진만 찍고 다시 놓아주는 걸 반복하는데, 저쪽 다리 건너편에 한 백발 어르신이 앉아 낡고 엉성한 낚싯대로 낚시 중이다. 물고기는 못 잡고 강물 위로 흐르는 구름과 바람과 봄볕만 빈 바늘로 건져내고 있다. 그러다 겨우 끄리 한 마리를 잡아내셨다. 하지만 그 한 마리 낚은 게 전부다.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르신이 낚싯대를 접더니 겨우 잡은 그 한 마리 맛없는 끄리를, 기생충 감염의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녹슨 칼로 회 떠 초장 찍어 잡수는 게 아닌가. 나는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어르신이 좀 측은했다. 어르신은 내가 팔뚝만 한 끄리 수십 마리를 잡았다가 다시 놔주는 걸 다 봤을 테고, 낡고 망가진 낚싯대와 빈 그물이 꼭 자신의 나이든 처지처럼 여겨져 쓸쓸했을지도 모른다.끄리 몇 마리를 잡아 어르신께로 갔다. 도마에 묻은 핏물과 마구 썰어 뭉개진 회가 비위생적으로 보였지만 괘념치 않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끄리회 한 점을 정말 맛있게 씹으며 소주를 들고 계신 어르신께 “끄리회 맛있죠. 회 뜨기 좋은 놈으로만 몇 마리 챙겼는데 혼자 먹기엔 많네요.” 큰놈 세 마리를 드리고는 말없이 다시 내 낚시 자리로 왔다. 보리밭에는 초록 바람이 불고, 강물냄새가 머리칼에 배여 마음까지 향기로운 봄날의 금강……오후 다섯 시, 맑은 강물과 해거름이 뒤섞여 금강이 그야말로 금빛 비단처럼 미끄러진다. 낮 동안 잠잠했던 아까시 향기가 노란 송홧가루와 함께 강물에 실려 오는데, 아아 그 달콤하고 아찔한 들숨!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나는 석양에 취해 꽃내음에 취해 그리고 여기저기서 퍽퍽 루어를 때리는 끄리의 손맛에 취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황홀하다. 아까시 향기와 노을이 강과 나를 삼킬 때, 그 오감의 충만함에 내 영혼도 삼켜진다.늦은 저녁, 등나무가든 마당 평상 위에 아주머니께서 닭도리탕 술상을 봐두셨다. 이 집은 백숙, 닭도리탕, 민물매운탕 등을 하는데, 아주머니 솜씨가 끝내준다. 매콤한 닭도리탕에 술잔을 비우는 사이 다리 밑을 흐르는 여울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화음을 이룬다.맑고 향기로운 평화가 감도는, “밤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금강 지수리, 세월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2023-06-06

수식에 잡아먹히지 않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와 ‘새벽의 약속’ 등의 작품을 남긴 로맹 가리는 말했다. “나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내 삶에 의해 살아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가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삶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로맹 가리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에밀 아자르를 빼어놓을 수 없다.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는 자신의 이름 이외에 어떤 것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을 발표하고 대중적인 흥행과 동시에 작품성까지 인정받게 된다. 1980년에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을 하면서 놀라운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에밀 아자르가 사실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에밀 아자르의 정체에 관해 추측하던 사람들은 문장과 문체의 유사성에 집중하면서 그가 로맹 가리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와 기자들은 “로맹 가리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다”고 말했고 “로맹 가리는 이미 끝난 작가.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도 단언하기도 했다.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글을 썼다. 거기에 그는 책을 어떻게 출판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을 적어놓았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이 작가를 얼마나 구속할 수 있는지를 말하며 그를 두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오만함을 고발한다.이것은 비단 한 작가의 일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어 준 얼굴”은 우리에게도 존재하며 일상적인 삶에서 쉽게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불량한 태도로 학교에서 모두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학생이 있다. 그의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러던 어느 작문 시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이야기를 과제로 내어놓은 학생이 있다. 이름을 지우고 진행된 평가이기에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불량 학생의 작품. 그 역시 자기 작품이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게 될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날 이후로 불량 학생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학생으로 불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작가의 꿈을 꾸게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자기를 꾸며주는 수식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불량한 학생의 글을 마음 다해 꼼꼼하게 읽어봤을까? 더 나아가 그것이 정말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그것도 나고, 저것도 나다. 타인의 평가 혹은 사회적 시선,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서 우리는 진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평생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다. 더 좋은 대학 출신이 되고 싶고,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더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것들이 나를 더 대단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내가 만든 수식에 내가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본질이 사라지고 수식만 남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저 삼성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보면 어쩐지 불편해진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건 두려운 일이다.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조차 자신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가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은 나 자신의 시선마저 신뢰하기가 힘들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는 건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찾아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무슨 말을 들었을 때 행복한지, 어떤 작가의 책을 읽었을 때 가슴이 뛰는지. 그런 작업이 지속되면 자연스레 나만의 중심이 잡힌다.삶을 살다 보면 인생의 물살이 우리를 밀어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물살에 휩쓸릴 순 없다. 스스로 중심을 잡고 전진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인지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을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마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23-05-30

인류를 위협하는 것은 정말 AI일까?

최근 미국의 비영리단체 ‘퓨처 오브 라이프 인스티튜트’(이하 FoLI)에서 ‘거대 AI 실험 일시중지 공개서한’을 공개했다. 서한의 주된 내용은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인간의 통제 가능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따라서 전 세계의 AI 개발사들이 6개월 동안 ‘GPT-4’ 이상의 강력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고 이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과학기술적 모색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FoLI의 입장이다.서한이 공개되었을 때 대중을 놀라게 했던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 스티브 워즈니악(애플 창업자), 유발 하라리(역사학자) 등 업계의 유명인사 및 석학들이 이 서한에 참여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다만 SF 영화의 설정 정도로 치부되었던 AI 기술이 인류에게 핵무기, 인간복제 기술과 같은 현실적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때문에 FoLI는 인간과 경쟁하는 AI는 사회와 인류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최소 6개월 간 AI 시스템 훈련을 중단하고, 그 기간 동안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에 의한 감시, 감독을 위한 안전 프로토콜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업계는 이 서한에 대해 부정적인 분위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AI 기술 개발 일시 중단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 방안은 아니라고 말하며, 중단을 수행할 주체는 누구이며 모든 기업과 국가에게 강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워싱턴 대학 컴퓨터공학 명예교수 페드로 도밍고스는 반세기 이상 사용된 인터넷 기술에 대한 규제 및 제한조차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AI 기술에 대한 규제 방안을 6개월 안에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지 현실적인 측면을 지적한다.물론 AI 기술이 갖는 위험성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다. 가령 노동 시장을 예로 들자면 최근 중국의 경우 AI 기술의 도입에 따라 약 2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근시일 내에 전체 일자리의 1/4에 해당하는 약 3천600만 개의 일자리가 AI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특히 인적 관리 측면에서 대다수의 플랫폼 노동자들이 AI에 기반한 알고리즘 시스템에 의한 관리 속에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면, 노동시장은 이미 AI 기술로 인해 그 저변에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대중이 느끼는 AI의 위험성을 마냥 현실적인 것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AI의 위협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지만, 공포감은 SF 영화를 비롯한 창작물에서 기반한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 물론 새로운 기술의 발달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발생시켜 인류에게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의학 분야와 군사 관련 분야에서 초래된 경험적인 것이겠으나, AI 기술의 실질적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체감에는 인간이 아닌 이종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SF적인 과장이 뒤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러한 비현실적인 공포가 이미 일어난 노동시장과 컨텐츠 시장에서의 변화를 은폐한다는 사실이다. 축약해 말하자면, 상당수 노동자는 이미 AI 기술로 인해 변화한 시스템에 종속돼 있으며, 소비와 향유 역시 알고리즘에 의해 제어되고 있다. 그럼에도 AI가 근미래에 인류에게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중의 비현실적 공포를 부추기는 동시에, 대다수의 인류가 처한 실질적인 종속과 지배의 구조를 비가시화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더불어 지금 AI 기술에 반대하고 있는 기업가들이 실질적인 AI 기술 시장의 잠재적 참여자들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이 과연 인류라는 대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각 기업의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한 것인지 모호하게 만든다.물론 신기술의 개발과 발전에 따른 부작용은 인류가 늘 주의해야 하는 사안. 우리는 이미 핵무기를 통해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악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의 발전을 둘러싼 담론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게 있다. 여기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가치를 비롯한 정신적인 가치들 뿐인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형성을 둘러싼 거대 기업들의 각축인 것일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실질적인 위협일까,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비이성적인 공포일까. 공포를 부추기고, 공포를 먹고 사는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의심해야 하는 것은 AI 기술일까, 아니면 기술 담론의 참여자들일까.

2023-05-30

MBTI 덜어내기

관계란 참 어렵다. 특히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일을 하다 그 사람과의 마찰이 생길 때, 또는 타인을 처음 마주할 때 어떤 MBTI 유형일지 궁금해진다.MBTI란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미국 심리학자 캐서린 브릭스가 그의 딸인 이사벨 마이어스을 가르치던 중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성격유형 이론을 근거로 만든 심리검사이다.캐서린 브릭스가 구분한 성격유형은 ‘에너지 방향’, ‘인식 기능’, ‘판단 기능’, ‘생활 양식’의 네 가지 경향으로 구성되며, 4쌍(8가지)의 지표 중 검사 결과를 조합하면 총 16종류의 성격 유형이 나온다.인터넷에 MBTI를 검색해보면 ‘MBTI별 00일 때 반응 모음’, ‘MBTI 별 성격 차이’ 알아보기, ‘유형별 궁합’, ‘유형별 완벽주의 순위’ 등의 수많은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만회, 141만 회 등 높은 조회수를 나타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두어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MBTI 관련 콘텐츠는 늘 끊이지 않는 밈을 생산해내며 이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슈를 통해 무분별히 정보를 수집하여 수용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도 크다. ‘판단 기능의 F’는 무조건 공감을 잘 할 것이고, ‘생활 양식의 J’는 무조건 계획을 잘할 것이라는 오해를 하기 쉽다. 또는 나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특정 엠비티아이를 선호하거나, 또는 상극이라는 이유로 나와 맞지 않다고 속단해버릴 가능성도 있다. MBTI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개별의 지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해버린 것이다.한 구인사이트에는 ‘열정적이며 혁신적’인 ENFP를 구한다는 마케터 모집 공고가 올라오기도 했고, 일부 기업은 특정 MBTI 성격 유형은 지원하지 말라거나, 혹은 특정 유형을 선호한다는 모집 공고를 올려 논란이 된 바 있다. 개인의 능력과 잠재성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단순 MBTI의 검사 결과지를 통해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여 특정 MBTI를 우대한다거나, 선호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차별과 오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만 것이다.실은 나 또한 MBTI 과몰입러로,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처음 만날 때 MBTI를 물어보게 됐다.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떤 점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에 대해 파악했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려 했다. 타인을 알아가려는 여러 시도와 노력, 대화가 아닌 MBTI에 맞춰 간편하게 그들을 알아가는 쉬운 속단의 방식을 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MBTI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여길 때 오히려 타인에 대한 무시와 배제를 쉽게 선택해버리는 것이 된다.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하며, 나도 모르게 특정 MBTI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며 계속해서 비좁은 시선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단순 콘텐츠로 즐기며 유머러스하게 소비하는 것은 좋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을 함부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아야 함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안도감, 타인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모든 인간관계가 조금 더 간편해지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건 실은 알량한 자존심일 뿐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타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늘 긴장감이 맴돈다. 하지만 그 긴장감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든 행위는 관계를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만든다. 여러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 애쓰며 탐구하려는 노력은 결국 더 다양한 세계를 포용할 수 있게 한다.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관계를 일찍 끊어버리고 단정지어 버린 몇몇 타인들이 있다. 단순히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흥미로운 관계를 놓쳐버린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의 편견, 그리고 너무 MBTI의 틀에 맞추어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하는 일은 없어야 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나를 알아가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때문에 MBTI를 통해 획일화된 나의 모습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얼마나 나를 오해하기 쉽고 넘겨짚기 쉬운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면서 다양한 내면을 가졌으므로 나를 알아가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당연하게도 어렵고 복잡한 일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선 MBTI에 몰입하여 구분지어 버리는 과장을 덜어내야 한다.

2023-05-23

록키와 김남국의 실존주의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 록키는 3회전짜리 삼류 복서다. 좋은 선수가 될 재능이 있음에도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인생을 낭비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무패의 세계 챔피언 아폴로와 타이틀 매치를 갖게 된 것이다. 예정된 상대 선수가 부상을 입어 이탈했는데, 누구도 선뜻 대체자로 나서지 못하던 와중에 록키에게 기회가 왔다. 무명 선수도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에 광대 역할로 부려진 록키가 과연 1라운드라도 버틸 수 있을까.서른 살이 되도록 삶의 동기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진지해본 적 없는 록키는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적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한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눈물겨운 훈련을 다 마치고 마침내 시합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밤거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와선 애인인 애드리안에게 토로한다.“랭킹에도 들지 못하는 내가 뭘 하겠어. 열심히 훈련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가 내 머리를 부숴버려도 상관없어. 15라운드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누구도 그와는 끝까지 못했지.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냈다는 걸 알게 될 거야”록키는 챔피언 아폴로와 명승부를 펼친다.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난다. 15라운드가 끝나는 순간, 록키는 두 발로 선 채 마지막 종소리를 듣는다. 아나운서가 록키를 인터뷰한다. 질문이 이어지는데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만 부르짖는다. “애드리안! 애드리안!” 울부짖는 그를 향해 애드리안이 멀리서 달려온다. 아폴로가 근소한 판정승을 거뒀다는 결과가 발표되지만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링 위로 올라온 애드리안이 “I love you!” 외치며 록키를 끌어안는다. 영화는 챔피언벨트, 돈, 대중의 관심, 명예 따위 세상이 쳐주는 가치들 대신 15라운드를 버텨낸 무명 복서의 개인적 승리를,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생의 목적과 가치를 증명한 사내의 뜨거운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는 연인의 환한 미소를 비추면서 페이드아웃된다.니체는 죽음이라는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아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허망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거기에 자기존재를 다 던져 몰두하는 사람을 ‘초인’ 혹은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록키’는 실존주의적 영화고, 록키는 초인이며 영웅이다. 질 것이 뻔한 시합에서 자기 승리를 발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애드리안과 끌어안을 때, 록키는 관중들의 환호성이나 카메라들이 터뜨리는 플래시 등 경기장의 온갖 소란과는 완전히 독립된 그만의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린다. 자기 삶의 동기를 이데올로기나 신앙 등으로부터 명령받아 타자가 요구하는 가치의 도구로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개척하면서 그 과정에 자신을 있는 힘껏 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록키는 승리, 명예, 돈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무소속 김남국 의원의 자유가 궁금하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중에도 코인 거래에 열중한 것을 보면 자기가 정한 가치에 몰두하는 실존주의자가 맞는데, 가난을 장신구로 걸치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온 걸 생각하면 모순적이다. 그냥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은 돈”이라고 떳떳하게 밝혔다면 그도 편했을 것이다. 돈 말고도 권력이니 명예니 바라는 게 많으니까 두려울 것도 많고, 두려운 게 많으니까 자유롭지 못하다. 당적을 벗었지만 여전히 매여 있는 사람 같다. 무소속인데 오히려 더 강하게 소속된 느낌이다.‘정치적 실존’ 말고 진짜 실존을 위해 의원직까지 다 벗어던지는 게 어떨까. 그리고 코인 거래를 하면 된다. 그래야 돈이 실존인 삶에 다른 눈치 안보는 자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2023-05-23

체통을 지키시라

얼마 전 실천문학사에서 시행한 설문조사가 화제다. ‘출판의 자유권에 대한 설문조사’와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가 그것이다. 이 설문조사에서 실천문학사측은 여론의 압력으로 인해 출판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세태 속에서 헌법이 보장한 기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설문조사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다소 억울한 듯 들리는 이 이야기는 고은 시인의 작품이 최근 계간지 실천문학에 실린 것과 그의 신작 시집 ‘무의 노래’가 마찬가지로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실천문학사는 ‘이전부터 성폭력을 비롯한 추문에 깊이 휩싸여 있었으며, 2017년 최영미 시인의 작품 ’괴물‘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와 같은 추태가 폭로당한 고은 시인이 어떠한 인정이나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없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올해 초, 실천문학사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이번 사태로 인해 심려를 끼쳐드린 분들께 출판사 대표로서 깊이 사과드린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음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공식적인 사과문을 내놓고, 또 자숙의 의미로 계간지를 한 해 휴간하겠다고 밝혔던 실천문학사가 다시금 본인들을 향한 여론을 정면 반박하며 이와 같은 설문조사를 시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실천문학사의 공지사항에서는, 이러한 입장의 변화가 문학 전문 인터넷신문인 ‘뉴스페이퍼’와 이승하 교수의 왜곡 기사가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해, 이들의 잘못된 기사가 자사의 이미지를 실추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타 미디어를 통해 잘못된 정보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왜곡이 여론의 압력으로 작용하여 헌법에 보장된 기본 권리인 출판의 자유가 침해되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자신들이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설문조사를 시행하겠다는 것이 주된 골자다.그런데 이 설문조사에는 어딘가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2차로 시행된 ‘출판의 자유권리 억압 사태에 대한 원인 분석 설문 조사’의 문항을 예로 들자면, 여기에서 실천문학사는 고은 시인을 “평생 농사만 짓던 농부”로 비유하며, 그러한 “농부가 범죄를 저질러 5년간을 복역하고 나와서 다시 농사에 종사하는데 주위에서 평생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아울러, 그 “농부가 수확한 벼”를 도정한 “정미소에 대해 범죄인을 도와준 사악한 정미소라며 판매중단을 압박하는 것은 범죄입니까? 정의입니까?”라고 묻고 있다. 이어지는 설문에서는 위의 이야기를 “시만 쓰던 모 시인이 추문에 휩싸여 5년간을 자택감금 당하듯 살았고”라고 바꿔 물으며 그 본의를 전달하고 있다. 이 설문조사의 마지막에서는 지록위마의 고사를 인용하며, 일부 언론 기관과 그에 관련된 인사들이 자신들을 향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가 옳은 것이냐고 묻기까지 하고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궁금한 건, 과연 실천문학사가 ‘설문조사’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문인, 일반 독자, 언론인들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적극적인 의견 참여를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상 그 문항들은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편향해 작성하고, 그걸로 모자라 고은 시인과 관련된 사태를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이 설문조사를 대체 무엇이라 생각해야 되는지. 자신들이 이미 ‘범죄를 저지른 농부’에 비유하고 있듯이, 그는 분명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어떠한 법적 처벌도, 범죄 행위에 대한 인정도,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하지 않은 그가 과연 무슨 대가를 치렀단 말인가. 여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잠적을 하고, 가짜가 자신을 사칭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석연찮은 변명으로 일관해왔던 그가 치른 대가란 대체 무엇인가.과연 실천문학사의 이같은 설문조사를 정상적 행위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건 자신들을 향한 여론을 호도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들의 첫 설문조사에는 이런 문항이 존재한다. 고은 시인의 5년 만의 신간 시집 출간을 두고 언론사의 객관적이지 못한 보도 행태가 프레임을 조작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정당하냐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은이 저지른 어떠한 범죄 행위에 대한 시인도, 그의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지 않다. 과연 프레임을 조작하고, ‘지록위마’를 행하고 있는 건 누구일까. 그들이 한국 문학에서 ‘실천문학’이라는 사명이 갖는 의미에 걸맞게 스스로의 권위를 더는 실추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3-05-16

무림 고수가 되고 싶다면

어떤 세계든 ‘고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그리하여 그것에 통달해 버린 몸짓을 보여주는 이들을 보면 우리는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게 된다.고수는 멀리 있지 않다. 무거운 짐을 얹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단한 하체에서, 빛의 속도로 김밥을 말아내는 손에서, 눈을 감고도 라면의 종류를 척척 맞추는 미각에서, 우리는 고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무협 소설의 무림은 고수 중에서도 고수가 되고 싶은 자들로 넘쳐나는 세계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한다. 무릇 강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일. 주변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일이다.키오스크가 점원을 대신하고 AI 챗봇이 친구가 되어주는 21세기에 갑자기 무림은 또 무슨 말인가 싶지만, 꿈꾸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은 멈추지 않는 상상력에 기반을 두었으니. 현실은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만 상상 속의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군자가 되고 싶은가? 천하를 호령하는 가문의 가주를 원하는가? 명망 높은 문주가 되어 세간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무림인들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구경꾼을 꿈꾸는 자는 없을 것이다. 무림 고수의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라고 못 할 것 있겠는가. 이곳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강자를 꿈꾸는 세계다.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한 훈련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둔 고수를 찾아갔더니 청소나 빨래와 같은 집안일부터 제대로 해내라고 다그칠 수도 있다. 다 뜻이 있겠거니 여기며 마루를 반짝반짝 닦아도 돌아오는 건 불호령뿐. 새벽같이 일어나 온갖 잡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의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제야 스승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당신에게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을 알릴 테다.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면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옆 문파의 누구는 벌써 무형검을 익혀 강호를 주름잡았다고 하고 어느 산골에서 태어난 아이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다고 한다. 거기에 수많은 악의 조직은 뭘 먹고 그렇게 강한 것인지. 오직 나만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만 같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엄마 친구 아들’은 21세기뿐만 아니라 무림에도 존재한다. 주변에 휘둘리면 끝이 없는 법. 자신만의 도(道)를 지키면서 정진, 또 정진해야 한다.자, 이제 그간의 노력을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 훌륭한 정권 찌르기를 연마했더라도 방구석에서 홀로 고수가 될 순 없다. 그간 익힌 기술로 마교의 천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된 아이의 이마에 딱밤이라도 때려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니까.세상에 힘차게 발을 디딘 당신, 반드시 실패하리라. 내가 왔노라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무관심뿐일 수 있다. 자신보다 곱절은 강한 자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기도 하고 오만에 빠져 우스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끔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할 테다.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마음이 소란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은둔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방구석에서 정권 찌르기를 연습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패배감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칼을 빼어들었으니 무라도 썰어보겠다며 기합을 넣는 의지를 보여야만 한다. 거기에서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고수는 하늘에서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작다고 여겨지는 일부터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한 뼘 자라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수험생의 문제집 독파 일수도, 매일매일 해야 하는 가사 노동 일수도, 회사원의 출퇴근일 수도 있다.소설은 끝나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 넘치는 무공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못 되어도 괜찮다.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다 새우 등 터진 구경꾼의 하루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으리라. 툴툴 털고 일어나 내 앞에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것. 치킨에 맥주, 싸움 이야기까지 곁들이며 친구들과 낄낄대는 밤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무림의,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고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3-05-16

이상한 평론가 김갑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 참석한 배우 박은빈씨. /연합뉴스 ‘문화평론가’ 김갑수가 배우 박은빈의 백상예술대상 수상 소감을 저격했다. “울고불고 눈물 콧물 흘렸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자신만의 생각과 작품을 하면서 겪은 고뇌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스피치가 딸리니 ‘감사합니다’만 남발한다고 혹평했다. “18살도 아니고 30살이나 먹었으면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송혜교에게 배우라”는 훈수까지 빼먹지 않았다.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렸고 다 구리다. 첫째, ‘무절제한 감정의 격발’은 오히려 그 자신이 범하고 있다. “울고불고” 운운은 저열한 인상비평이다. 소감을 다 들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들었다면 박은빈이 ‘자기 생각과 작품에서의 고뇌’를 충실히 밝혔음을 모를 리 없다. 그냥 “울고불고” 하는 게 눈꼴 시렸던 것 같은데, 과잉된 자의식 격발이야말로 꼴 보기 싫다.“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전보다 (사람들이) 친절한 마음을 품게 할 수 있기를, 또 (우리 사회가) 각자의 고유한 특성들을 다름이 아닌 다채로움으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했습니다. 제가 우영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자폐인에 대한 생각들이 편견에서 기인한 건 아닌지 매 순간마다 검증해야 했습니다”라던 박은빈의 수상 소감과 김갑수의 발언을 두고 보면 누구 스피치가 더 딸리는지는 자명하다. 정신적 성숙도 딸린다. 다양성에의 존중,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를 말한 박은빈의 품격에 비하자면 평론가의 교조적 태도는 치기나 다름없다.둘째, “아끼는 마음으로 얘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오만한 위계의식이 틀려먹었다. 수직적 꼰대이즘은 무엇이든 구별 짓고 등급을 매겨 규격화, 영토화한다. “송혜교와 탕웨이 정도가 교과서”라니, 감정마저도 표준화하려는 그가 설마 들뢰즈도 안 읽은 걸까? 셋째, “세계가 지켜본다는 걸 인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라는 해명은 전형적인 사대주의 열등감이자 스노비즘이다. 결국 “남 보기 부끄럽다”는 것 아닌가? 그가 추앙하는 아카데미였다면 박은빈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모든 이들이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수상 소감은 오직 그녀의 시간이고, 개별성에 대한 존중과 관용이야말로 서구 사회의 근간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넷째, ‘내로남불’이다. 그는 2015년 한 방송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 육성이 나오자 눈물을 흘린 바 있다. 그 눈물은 맞고 이 눈물은 틀리다면 과한 자기확신이다. 다섯째, 사회 보편인식과 괴리되었다. 박은빈의 눈물은 비판하면서 학교 폭력으로 타인의 생을 망가뜨린 황영웅의 비열한 미소는 옹호했다. “애들끼리 때리면서 크는 거지”라는 건데, 그는 2015년, 작품 활동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아들의 소설책 출간을 팔 걷고 도왔다. 아들과 함께 잡지사 인터뷰에 나가기도 했다. 자기 아들이 학폭의 피해자였더라도 가해자를 옹호했을까? 박은빈은 아역 배우 시절을 거쳐 부모 찬스 없이 혼자 힘으로 성장했다.여섯째, 자기경험을 절대화하고 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영광을 경험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북받쳐 저절로 토해지는 환희를 알지 못한다. 일곱째, 시대 모드와 동떨어졌다. 이제는 감정을 절제하고 점잔 빼야 했던 유교적 옛날이 아니다. 그의 강퍅함에서는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도사가 보인다. 여덟째, 대중을 폄하하고 있다. 지식인 특유의 우월의식인데, 김수영 시인은 대중의 위대함을 믿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그러하다. 아홉째, 귀걸이 코걸이다. 만약 박은빈이 제임스 카메론처럼 “I’m king of the world!”라고 외쳤다면? 오만방자하다고, 겸손을 알라고, 세계가 보고 있다고, 여자는 ‘킹’이 아니라 ‘퀸’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열째, ‘관심병’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이정진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네가 멋있어 보이냐?”고.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처음 들어가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이성복,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는 시가 떠오른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대사를 옮기고 싶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아.” 꼰대 지식인의 너절하고 애처로운 관심 끌기에도 아랑곳없이 박은빈의 광채는 더욱 찬란하기만 하다.

2023-05-09

봄과 여름 사이를 지나며

봄에서 여름 사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폭식을 끝낸 것처럼 공허함이 자리한다. 소화시키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인데, 가슴팍을 두드려보고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아 몸을 움직여 보아도 목까지 차오른 더부룩함은 사라지지 않는다.요즘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집에서 쉬고 있는 와중에도 해치워야 할 집안일이 차례대로 떠올라 괴롭다. 이번 주말엔 겨울 내내 가장 많이 붙어 있었던 전기장판을 정리해야 하고, 겨울 이불도 빨래해서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야 한다. 7월 말엔 4년 간 살던 집을 떠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해서 그간 창고 속에 쌓아 둔 쓸모를 잃은 짐들은 버리거나 나누어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야 하는 번거로운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와중에 하루하루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신을 차리면 달력이 넘어가고 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낮과 밤이 바뀌어 있다. 이 길이 출근하는 길인지 퇴근하는 길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매일매일 꿈결 같은 몽롱한 삶을 살고 있다.퇴근 후 집에 들어가면 대체로 6시. 샤워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고 잠을 잔다. 다시금 눈을 뜨면 오후 9시.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빵 한 조각이나 요거트를 대충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엇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재미와 자극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오늘도 어김없이 무료함과 피로를 소화시키고 있는데 재채기가 나와 쉼을 방해했다. 요즘 미세먼지가 심한 탓인가 싶어 인터넷에 날씨 검색을 했더니, 5월 6일자로 입하에 들어섰다고 한다. 24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후다.봄과 여름 사이, 환절기는 꼭 미열을 앓고 있는 것만 같이 달뜨고 불편한 감정이 든다. 예상치 못하게 여름의 냄새가 훅 퍼질 때에 생각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몇 가지가 있다.여름이 되면 가족끼리 수영장에 놀러 가곤했다. 내가 살던 지역의 커다란 야외 수영장이었다. 그곳은 얕은 물과 깊은 물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당시의 나는 키가 작아 깊은 물에 들어갈 수 없었다. 늘 얕은 물속에서 깊은 물에서 놀고 있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튜브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호기롭게 깊은 물가를 서성였는데, 하필 어떤 대학생 무리의 손에 잡혀 예고도 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세 네 번 머리가 수면 바깥과 안을 드나들었을 때 쯤 그들은 단순히 장난이었다며 해명했지만 어린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무리 중에 한 명이 겁에 질린 나를 알아채고선 물 밖으로 꺼냈고, 내팽겨치듯 홀로 물 밖에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맵고 뜨거운 목구멍 속 일렁이는 분노와 나약함으로 산산조각 부서지던 그때의 여름. 처음으로 크게 겁을 먹은 때였고, 이후로 겁을 먹을 때면 누군가 밀어 버리기 전에 스스로 깊은 물로 뛰어들어 버리곤 했다. 물론 본질적으로 타고난 성격 탓도 있겠지만.여름이 깊게 남긴 쓸쓸함은 가라앉아 있다가도 계절이 찾아오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에게 여름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몸처럼 억눌린 통증이 시작되는 계절이라고 해야 할까. 실은 몇몇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여름은 정말 사랑할 수 없는 계절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40도 가까이 육박하는 무더위는 걸어 다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이마에 맺히는 땀 때문에 애써 드라이한 앞머리는 볼품없어 진다. 자외선에 자극받아 올라오는 빨간 두드러기들은 얼마나 가렵고 신경 쓰이는지. 장마철 엄청난 비를 퍼부었다가도 다음날 뜨거운 태양빛을 쏟아 붓는, 시시때때로 날씨를 바꾸는 심술궂은 변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무력하게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오는 여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여름날 쓸쓸했던 여럿 기억들은, 트라우마를 마주할 때까지 그 쨍하고 눈부신 빛 속에서 잔인하게 빛나고 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눈부심을 마주해야 한다는 듯이.상처는 아물 때 가렵다. 쓸쓸함을 긁다보면 애틋함으로 번진다.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서툴고 쓸쓸한 기억들이 여름이 지나 가는 동안 다시금 내면 깊이 가라 앉아 나를 이룬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에서 겨울로 변화할 때마다 쓸쓸함을 간직하는 내면의 깊이가 미묘히 깊어지고 있다. 그러니 봄과 여름 사이에서 그저 유유히 흔들리는 수밖에.

2023-05-09

어떤 청년들의 시대

이서수 작가의 소설 ‘미조의 시대’는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조가 어머니와 함께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는 이야기이다. ‘미조’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5천만 원이 있다. 하지만 5천만 원은 2020년대 서울에서 그리 크지 않은 돈이다. 더군다나 괜찮은 집을 구하기엔 더더욱 더. 때문에 ‘미조’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낙후된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그나마 나은 환경을 찾아다닌다.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세계를 헤매는 민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다. 아마 그 기원을 찾자면 이집트인들의 핍박으로부터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키고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 모세의 이야기가 시초에 가깝지 않을까. 시초로부터 무한히 반복되어 온 ‘터전 찾기’의 서사. 이러한 서사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를 포함한 공동체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타자로부터 해방을 ‘원하고’, 그리하여 모진 수난 끝에 그것을 ‘얻는다’.무언가를 ‘원하고’, 또 그것을 결국에는 ‘얻어낸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서사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얻어낼 것에 대한 필요성과 갈망이다. 얻어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서사는 당위를 획득한다. 모세의 민족 서사가 그러한 당위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집트인들의 도저한 핍박과 수탈이다. 그것이 잔인하게 묘사될수록, 인물의 갈망과 그에 따른 행위는 설득력을 얻는다.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플롯을 드라마나 영화 따위의 미디어물로 만들 때에는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최대한 악랄하게 묘사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이에 대한 가장 정교한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악당들은 자신의 악랄한 의도를 숨기지 않고 말과 표정으로 드러내며, 주인공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행위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과한다. 예컨대 그와 같은 악당의 얼굴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권리인 ‘자유’를 억압하는 타자의 형상이다.하지만 ‘미조의 시대’에서 악당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미조’는 재개발이라는 수난을 피해 자신과 어머니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떠나지만, 소설은 결코 악당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세의 서사가 이집트인이라는 명확한 타자를 제시함으로써 탈출의 당위성과 목표를 확고하게 드러내주었다면, ‘미조의 시대’는 그러한 타자를 감춤으로써 이 서사를 더욱 도저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소설의 구체적인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도저함은 더욱 구체적이게 되는데, 가령 이들은 모세의 민족과 같이 현실보다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이들이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5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물려주었지만, 그 돈은 서울에서 이들이 원하는 것을 현실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때문에 둘은 ‘더 나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 그 흘러듦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속도 속에서 5천만 원이라는 돈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이들은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구체적인 악당이 제시되지 않는 서사 속에서, 이들을 향한 핍박과 수난, 폭력의 역사는 훨씬 교묘하고 저열하게 제시된다. 이집트인의 구체적인 폭력이 자리하던 곳에는 ‘문제는 충분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라는 불투명한 폭력과 죄의식이 분출된다. 때문에 핍박과 수난은 이들에게 동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책감과 무기력함을 불어넣는다. 문제의 원인을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교묘한 폭력이 만연하는 곳.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무대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최근 어떤 조사에서 30대의 평균 소득이 월 500만원이라는 조사결과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월 500만원을 버는 사람이 과연 그토록 흔할까? 그럼에도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나’에게 닥친 경제적 불행과 그로인한 수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금 ‘네’가 불행한 것은, 네가 평균에도 못 미치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통계와 평균의 마법이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눈속임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집트인’은 차라리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악행을 자행할 때에도 인간의 얼굴과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이 모든 불행이 오직 너의 탓이라고 속삭이지는 않았으니까.

2023-05-02

감자수프를 먹는 오전 열 시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능력은 중요하다. /언스플래쉬 “최근 심하게 스트레스받는 일 있으셨어요?”의사의 말에 고개를 저으려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간 얼마나 무수한 질문에 괜찮다고 답했던가. 특히 직장에서 그랬다. 상사의 무례한 언사를 웃어넘겼고 부당한 요구를 묵묵하게 받아냈다.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면 응당 피곤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만 입 다물면 된다고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되뇌었다. 다 이렇게 산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건 유난이라고.“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아요.”나는 ‘그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다’며 흐흐 웃었다. 몸 여기저기가 망가졌다는 진단을 들으면서도 생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경련으로 응급실을 들락거리고 염증 때문에 수술하면서도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인가 하며 스스로를 탓했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타고난 체력이 약하다는 것이 원망스럽게만 느껴졌고 내가 어떤 면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그도 그럴 것이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 학생으로 머물렀고 세상과 직접 부딪히며 관계 맺는 일보단 책상 앞에 앉아 읽고 끼적이는 시간이 더 길었다. 현실을 살아내려고 하니 몸이 아픈 것이라고 밖엔 설명할 수 없었다. 엄살 부리는 것이라는 혐의를 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그런 생각이 병을 깊어지게 하는 주범이에요.”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사의 조언이었다. 다른 생각은 불필요했다. ‘몸이 아프다. 그러니 푹 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이유를 덧붙이게 되면 그 일은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교묘하게 본질에서 벗어나기 마련이었다.특히 어떠한 결과에 따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건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했다. 능력 이상의 것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현명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해내야 한다고 막연하게 외치는 것보다 눈앞에 놓인 것에 최선을 다하되 그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가뿐하게 털어내는 것. 어렵지만 평생에 걸쳐 훈련해야 할 인생의 과제였다.긍정과 낙관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많은 것이 술술 풀릴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소설 쓰기의 시작이라고 외쳤지만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괴로웠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도저히 채워지지 않았고 스스로가 위선자처럼 여겨졌다. 항상 그랬다. 나를 가장 열심히 괴롭히는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올해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돌보겠다고 결심했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아팠던 시간, 나는 나의 어려움을 알고 도와주는 사람들의 다정함을 경험했고 그러한 선의가 늘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평소였다면 침대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을 오전 열 시에 노트북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자주 가는 카페에 들러 감자수프를 주문했다. 수프는 예쁜 그릇에 정갈하게 담겨 나왔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 정성으로 끓인 것이었다. 숟가락으로 떠서 꿀꺽 삼키자 뱃속 깊은 곳까지 따끈따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 기사를 통해 아이돌 가수의 비보를 접했다. 전날 새벽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 알 것 같다고.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 속에서 헤매는 감각. 그건 최근의 내 상태와 비슷했다. 두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렸다. 상실감은 뱃속을 데워주는 수프의 온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였다. 동시에 햇볕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고 초여름이 가까워져 온다는 실감이 들었다. 잎사귀 사이로 부서지는 빛과 파도처럼 일렁이는 나무 그늘을 바라봤다.나는 앞으로 몇 번의 계절을 지날 것이며 그때마다 무수히 아프고 슬플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오전 열 시의 찬란함과 온 몸에 퍼지던 감자수프의 온기를 떠올리겠다. 이토록 사소한 하루가 생을 버티게 하는 달콤한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2023-05-02

지옥이 된 도시

유튜브에서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좀비처럼 흐느적대는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를 봤다. 펜타닐은 헤로인보다 50배 이상 강력한 마약인데, 원래 말기 암 환자가 고통을 덜기 위해 쓰는 진통제라고 한다. 몇 해 전부터 미국 사회에 조용히 확산되더니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버렸다. 펜타닐은 강력한 뇌 손상을 일으키고, 중추신경을 파괴한다. 이 마약에 중독되면 허리를 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해 제자리를 맴돈다.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살풍경 너머로 익숙한 배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2019년 10월,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Rocky’의 흔적을 찾아 하루 종일 걸었다. 영화 속 록키의 비좁고 냄새나는 아파트, 트레이너 미키의 체육관, 거리의 아카펠라 싱어들이 노래를 부르던 모퉁이가 모두 켄싱턴에 있다. 그곳이 미국 동부 최대의 마약 시장인 줄도 모르고, 몰라서 용감한 건지 아니면 언뜻 험악해 보이는 거리의 인상에도 객기를 부린 건지 홍대 거리 걷듯 혼자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며칠 뒤 밴쿠버에 가선 현지 지인 부부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 숙소가 있는 웨스트엔드에서 약속 장소까지 한 시간 남짓 걸어가는 동안 이스트 헤이스팅 스트리트와 차이나타운을 관통했다. 걸어서 왔다고 하니 부부가 놀랐다. 밴쿠버에서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를 지나왔다는 것이다. 하긴, 지나는 길에 경찰로부터 소지품을 검사 당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긴 했다.필라델피아에서도 밴쿠버에서도 자칫 험한 일을 겪을 뻔했다. 지금 다시 걸어 다니라면 안할 것 같다. 겨우 4년이 지났는데, 나이 든 것이다. 미 동부 최대 마약시장과 살인, 강도, 총기 사고가 빈번한 밴쿠버 우범지대를 쏘다니며 위험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것은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라는 데서 어떤 안정감 같은 걸 얻은 까닭일 테다. 아니면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쉽게 낭만과 환상에 취하게 해 현실감각을 둔화시킨 탓인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 어리석다. 그저 운이 좋아 아무 일 없었다.그런데 사람이 좀비가 되어 버린 도시는 그냥 우범지대가 아니다. 우범지대나 치안부재 같은 말은 인간 이성이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나 쓴다. 유튜브 영상 속에 펼쳐진 지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고장 난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느릿느릿 경련하는 사람들 모습 아래 ‘참혹한 인간 추락의 거리’라는 자막이 섬뜩하다. 그 자신이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자살한 헤밍웨이의 문장을 생각하는 새벽이다.“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글쎄, 이제는 파멸과 패배가 다르지 않은 세상인 듯하다. 펜타닐에 중독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노상방뇨를 해 켄싱턴 거리에는 소변 웅덩이가 곳곳에 생길 정도라고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서울 강남의 클럽에서는 암암리에 마약이 거래돼 강간, 강도, 불법촬영 등에 이용되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서 마약 중독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가 5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가 배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또 며칠 전에는 호텔과 클럽 등에서 필로폰을 투약하고 집단 환각 파티를 벌인 남성 60명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 더는 마약 청정국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인 불안감과 시민들의 요구에 비해 마약사범 처벌은 솜방망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켄싱턴의 악몽이 서울에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자유의식은 이곳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을 뿌리로 한다. 뉴욕, 워싱턴, 보스턴과 함께 손꼽히는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도시가 지금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이다. 4년 전 가을, 미스트 같은 가을비를 맞으며 걸었던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는 신시가지에 비해 쇠락해 스산했지만, 크고 근사한 명소나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 화려한 다운타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정감과 투박한 온기가 있었다. 마약상들이 판치는 우범지대라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사람으로 계속 살 수 있을까? 그 지옥이 우리의 일상으로까지 전염될까 두렵다.

2023-04-25

일상 속 낭만 더하기

낭만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낭만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실은 그 전까진 낭만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낭만이란 어린이의 허무맹랑한 상상력에 가까우며 오히려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꿈꾸는 꿈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지난날의 나는 삶을 비관적인 것으로 대했다. 때때로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좋지 않은 일이 더 큰 크기로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다가올 불행에 대처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도 생을 대했다. 좋은 운이 찾아와도 차분함을 유지하려 불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불운이 찾아올 때는 고통이 지나갈 때까지 슬픔으로 깊게 잠겼다.실은 나는 우울감을 쉽게 느끼는 본성을 지녔지만, 우울에서 금방 빠져 나와 다시금 씩씩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우울 속을 옅게 부유하다 다시 수면 바깥으로 나와 유유자적 수면 위를 헤엄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이면을 보며 무기력하게 방바닥을 기어 다니다가도 바깥 산책을 하면 금방 눈을 반짝이고 만다. 대가 없는 친절과 배려, 그리고 오랜 기간 묵묵히 선을 지향하는 이들을 마주하면, 그래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이라고 고갤 끄덕이며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하지만 작년 한 해의 나는 지나치게 무기력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부터 모든 의욕을 잃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너무 많은 신경과 노력을 쏟아버린 탓일까. 쓸쓸하게 타 버린 성냥처럼 또 다른 쓸모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망해했다.도피와 외면을 일삼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이 와버렸을 땐, 내가 택해버린 건 잠이었다. 하루 온종일 잠의 뿌리를 내리는 동안 나를 질타하는 이도 회피하는 이도 있었으나 나를 깨우기 위해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자주 집에 찾아와 잠을 깨우고 밥을 먹이고 산책을 하며 심심한 농담과 함께 주말 약속을 잡던 고마운 사람이다.나의 우울은 같은 크기를 지닌 우울이 나를 알아보고 진정 나를 이해해줄 수 있으며, 슬픔은 슬픔을 구원할 수 있다 여겼으나 실은 슬픔은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외려 깊은 슬픔은 옆에 있는 이를 슬픔의 늪으로 깊게 끌고 들어갈 뿐이다. 슬픔에 처한 타인의 심정을 공감하고 헤아릴 순 있겠으나, 타인이 지닌 슬픔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두드려 나를 깨우던 이에게도 타인을 절대 구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외로움만을 안겨줄 뿐, 그렇게 계속 실패로 기록되는 관계는 머지않아 단절된다.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외로움은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고 깊고 복잡할수록 타인에게 이해 받고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한결 삶이 편해졌다. 외로움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겪는 고행이자 의무로 여기니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낭만에 대해 오히려 시선이 갔다. 삶을 무턱대고 비관하기보단 유연하게 대처하며 세상의 긍정적이고 밝은 면도 궁금해졌다고 해야 할까.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요즘은 일상의 낭만을 더하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 쓸모없을수록 의미 또한 부재할수록 좋다. 꽃 한 다발을 사서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 작은 꽃의 이름을 익히는 것, 서점에서 즉흥적으로 골라온 시집을 사서 읽는 것,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여행 계획을 짜는 것,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한 일정을 짜는 것, 프로틴 쿠키나 그릭 요거트 바 만들기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동안 일상은 더 디테일해졌고 행복으로 가까워졌다.4일 전에 사온 꽃이 금방 머리를 숙여 시든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시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제철음식을 먹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 수고가 들더라도 마음의 결은 더 촘촘해지고 부드러워진다.5월에는 놀이공원을 갈 것이고 6월엔 오사카와 교토 여행을 간다. 주말에는 다시 러닝을 하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한 레시피를 뒤적인다. 이 모든 걸 즐기기 위해선 또 일을 해야 한다. 건강히 일하며 일상의 낭만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누리는 삶, 이렇게 적어 놓고 나니 현재 나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다.

2023-04-25

AI라는 미지

OpenAI社에서 개발한 프로그램 ChatGPT가 화제다. 사용자의 질문에 답변해주는 인공지능 채팅 프로그램인 ChatGPT는 생활과 관련된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어학, 공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각종 분야의 전문학술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답변할 수 있는 분야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러 분야 직종에서 활발하게 사용될 것으로 전망된다.나 또한 글쓰기 강사이다 보니 학생들에게 글쓰기와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ChatGPT를 부분적으로 학습시키고 있다. 복잡한 부분까지 가르치기에는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 무리이기에, 프로그램의 간단한 구조와 답변 방식, 글쓰기에 있어 활용할 수 있는 부분 등을 가르치고 있다. 시의성 높은 화제를 찾는 방법에서부터 ChatGPT가 답변해준 화제를 바탕으로 개요를 짜는 방법 등 글쓰기에 필요한 사전 작업에 응용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헌데 일선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ChatGPT를 가르치다보니, 예상외의 반응이 느껴져 신기했다. 아이들은 내 생각과 달리 ChatGPT를 활용하는 것에 거부감이 컸다. 레포트를 쓰는 데에 ChatGPT를 활용했다가 감점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반응에서부터, ChatGPT를 쓰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한다는 반응에 이르기까지. 예컨대, ChatGPT를 쓰는 건 정당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다. ChatGPT는 결국 검색 엔진이고, 검색 결과를 문장 형태로 출력해 보여주는 것일 뿐인데, 아이들은 ChatGPT를 일종의 치팅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글을 쓰고 결과물을 만드는 데 있어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출판물만을 제 가격을 지불하여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ChatGPT에 대해서는 이런 반감을 느끼는 걸까. 이런 반응은 아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나와 같은 세대들도 회의용 문서를 작성하거나 연구를 하는 등에 있어 이러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을 일종의 치팅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사실 ChatGPT가 해주는 일이란, 인터넷을 검색하고 정리하고 요약하는 과정을 대신해주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들을 ChatGPT가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존재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사실 ChatCPT는 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인간의 주관적 감각에 기반한 정보, 예컨대 대상에 대한 호불호를 비롯한 주관적 정보를 출력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터넷을 통해 접근 불가능한 정보는 취급할 수 없으며, 인간이 만든 정보를 바탕으로 답변하기에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ChatGPT 또한 답변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ChatGPT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바로 결정과 책임이다. 그들은 우리의 일 가운데 일부를 대신해주는 것일 뿐,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결정과 책임. ChatGPT가 항상 올바른 답변만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모델 자체의 한계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건 모든 인간이 만든 도구가 지닌 한계이기도 하다. 어떤 도구도 인간을 대신해 결정하고 책임을 져줄 수는 없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만이 결정과 책임을 질 수 있다. 지금보다 훌륭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되더라도, 결정과 책임이라는 최소한의 자유의 영역은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 장치의 신. ChatGPT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인용하며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사용자로서 느끼는 인상은 ChatGPT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계 장치의 신도 아니고, 아주 간단한 답변조차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그럼에도 사람들은 ChatGPT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반감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자신의 업무를 대신해버릴 것이라는 공포에서부터, 그들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리라는 SF적인 공포, 혹은 프로그램이 잘못된 답변을 제공하면 어떡하냐는 공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포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런 설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공부를 해야 하고, 지식을 계속해 축적해 나가야만 한다고. 우리가 ChatGPT를 비롯한 인공지능이 내놓는 답변의 정당성과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에 준하는 수준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건 기술이 아닌 지식이다.

2023-04-18

평점으로 평하지 않기

책상 앞에 앉아 활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고단하게 느껴지던 주말, 강원도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짙고 푸른 바다를 기대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막상 몇 시간이고 운전하노라니 어깨가 아프고 허리가 저릿저릿했다. 고생한 것에 비해 해변에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이렇게 힘들게 와서 아무거나 먹을 순 없지’하는 생각으로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별점과 평가로 점철된 음식점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내기 위해 끙끙거렸다. 그렇게 보고 싶던 바다를 앞에 두고 네모반듯한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보기만을 반복, 평점에 따라 선택한 식당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했다.그러한 경험은 여행지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 전반에서 평점에 의지하는 우리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배달앱의 별점을 따져가며 음식을 주문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할 때도 후기를 따라간다. 좋아하는 평론가가 높은 별점을 주었다는 영화를 우선순위로 선택하며 좋지 않은 평을 했다고 하면 ‘유치한 작품인가 보다’하고 지레짐작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도 그렇다. 평론가들이 손을 들어주는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것처럼 읽히고 각종 출판사에서 부여한 상을 받은 작가들의 신작 위주로 작품을 찾아 읽게 된다.어쩌다 이렇게 평점에 의지하게 되었을까? 인생은 시험이 아니라고, 만점을 받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뭔가에 너무 쉽게 점수를 매기고 또 거기에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무언가를 별 다섯 개로 평가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 언뜻 보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개개인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일은 꼭 필요하기도 하다. 평점에 도움을 받는 일도 많다. 정말 좋은 것들이 선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꼭 부정적으로 보아야만 하나 싶기도 하다.바야흐로 정보 과잉의 시대다. 뭔가를 구매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하면 비슷한 상품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현명하게 골라내지 못하면 우매한 소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따져보다가 하루가 다 가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이미 그것을 경험해본 사람들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이제 큐레이터의 활동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를 선별하여 전달해주는 전문가의 필요성이 늘어났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떠나 생활면으로 확장되었다. 가구, 식물, 의복, 음식과 생필품에서도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전문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가다 보면 편리하고 무언가를 소비할 때 실패할 위험성이 낮다. 동시에 새로운 무언가를 편견 없이 직접적으로 겪어보는 일이 드물어질 수밖에 없다.매일매일 최신의 것이 자꾸자꾸 등장한다. 바쁘고 빠르게 시간은 흘러간다. 그 안에서 최선의 것을 소비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안전한 것만 추구하다 보면 전형성이라는 틀에 갇히게 된다. 유연함은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우리는 실패에 관대하지 못하다.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하루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고 취향이 아닌 영화를 보면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린 것만 같다. 그것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지만 기분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매일 실패해야 한다. 그러한 실패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시선과 판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그것은 성공에 가깝다.자본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에 차등을 둔다. 높은 별점을 받은 식당이나 물건이 더 많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것은 마치 공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물건이나 공간을 넘어서 인간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개개인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존엄까지도 수치화된 세계는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가깝다.무언가를 선택할 때 평점에 현혹되지 말자는 당연하고도 어려운 결심을 해본다. 놀라운 사건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근사한 관계는 오해에서부터 시작된다. 별 다섯 개로 규정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때 비로소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2023-04-18

봄꽃의 에피파니

산수유와 매화가 먼저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고, 목련 핀 다음 벚꽃과 라일락 피던 시절은 추억이 됐다. 지구 환경을 생각하면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상고온으로 개화 순서가 뒤죽박죽이 돼 한꺼번에 핀 봄꽃들을 보며 어쨌든 눈과 마음 즐거운 봄이다.벚꽃과 개나리가 색을 나누어 늘어선 강변을 걷는데, 내가 보는 봄꽃 풍경이 불현듯 특별하게 느껴졌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의 엄마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열어보기 전에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한 대사를 아직 기억하는지 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초콜릿 상자’가 떠올랐다. 봄꽃은 매년 피지만 2023년의 봄꽃은 오직 이 봄에만 볼 수 있다고,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찰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했다.상상해보자. 인간이 100년을 산다고 했을 때, 우리는 초콜릿 100개가 든 상자를 선물 받은 것과 같다고. 칸 하나에 든 초콜릿은 그 해에 먹지 않으면 폐기된다. 누군가는 100개를 다 먹고, 또 80개를 먹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한 개도 까먹지 못한 채 상자를 반납한다. 이때 ‘초콜릿’은 봄꽃의 화사함, 여름의 무성한 녹음, 가을 단풍, 차고 맑은 첫눈의 다른 이름이다. 매년 돌아오지만 그해의 초콜릿은 오직 그 해에만 먹을 수 있다.제임스 조이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이 갑자기 그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벗고 진리의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불렀다. 에피파니는 ‘나타남’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피파니아(epiphaneia)에서 유래한 단어다. 종교에서는 순간적으로 계시를 느끼거나 비전을 보게 되는 직관적 경험, 즉 ‘신’을 보는 체험을 말한다. 문학작품에서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 혹은 독자가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며, 작가가 일상 속의 평범한 소재를 통해 독자에게 계시나 깨달음을 주는 기법을 뜻하기도 한다.조용필의 ‘고추잠자리’에는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라는 노랫말이 있다. 볕 좋은 가을날 야트막한 뒷동산에 올라 네잎클로버 찾고, 코스모스 꺾으며 놀던 한 소년이 잠깐 낮잠에 들었다 깼다. 때로 낮잠에서 깨면 무서울 정도의 이질감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런 모양이다. 저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존재의 기원과 실존의 유한함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한 순간 근원적인 고독감과 혼란감이 소년을 집어삼킨다. ‘가을빛 물든 언덕’이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벗고 섬뜩한 진리를 드러낸 에피파니의 순간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걸…”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에는 데이트 하는 연인이 등장한다. 영화 보고, 맛집 가고, 사진도 찍고,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중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자기야,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나도 오늘이 생각날까?” 정말 그 ‘나중’이 됐는데, 그녀는 내 곁에 없고, 아무 기억도 없다. 사랑의 기억과 애틋한 약속들, ‘의미’를 지닌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각적 인상인 동시에 일종의 상징 언어인 미소 또한 흩어진다. 긴 세월이 흐르고 남은 것은 그저 ‘웃음소리’뿐이다.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오직 소리라는 감각만 주체에게 남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떠다니는 어느 추억의 거리에서, 남자는 에피파니를 경험한 것이다.이 봄,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나란히 피어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잉어들이 연안에서 헤엄치고, 오리가 수면에 내려와 앉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내가 기다리는 건 에피파니의 얼굴이다. 평범한 일상적 장면이 특별해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의 빛깔과 질감과 음악이 달라진다. 그 체험을 통해 나는 너무 오래 묵은 내 세상을 갈아엎고 새 꿈과 새 맘을 가져보려는 것이다. 초콜릿 상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에피파니는 초콜릿을 열심히 꺼내 먹으려는 이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나가서 걷고, 열고, 보자.

2023-04-11

취향 넓히기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분명히 고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옷을 고를 땐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고 좋아하는 커피 취향은 어떤 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 수고를 들여서라도 지식을 익히고 깊게 파고든다. 선호의 기준과 취향이 명확해서 그들이 사는 삶은 무언가 견고하고 완벽해 보인다.취향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취향을 갖고 있던가? 내 주변 인물들은 어떤 단어로 나를 설명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거지?나는 내 자신이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다. 이것저것 일을 벌리는 건 많이 하지만 꾸준히 한다거나 뛰어나게 잘하는 것이 없다. 좋아하는 운동도 잘 모르겠다. 한때 런닝이 너무 좋아서 동호회도 가입하고 런닝용 운동화와 운동복까지 다 갖추었건만 날이 추워지면서부턴 뛰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관심사 밖으로 밀려났다. 좋아한다며 요란을 떨던 마음이 식을 때 무언가 심심한 듯한 허무함이 든다. 그래서 런닝복이나 운동화를 안 보이는 곳에 깊게 숨겨두고 외면하고 있다.최근 퇴근 후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침대 위에 누워 하루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가벼운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짧게 압축한 게임 영상이나 예능 편집 영상 등 무언가를 이해하고 행하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주로 찾아본다. 또는 피로감과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유명 패션 브랜드 사이트에 접속 후, 실시간 옷 인기 순위 기준으로 마음에 드는 옷을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그러면서 인기 순위에서 고른 패션 아이템들이 곧 나의 취향이자 센스 있는 안목이라 생각하며 으쓱해진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고민조차 할 수 없도록 스스로 취향과 개성을 실종하게 만드는 못된 습관임이 분명하다.하지만 취향을 갖는다는 건 어렵다. 취향을 갖기 위해선 일정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을 끊으려면 회원권 비용을 내야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각종 활동비부터 내야한다. 비즈십자수나 펀칭니들 같은 새로운 취미를 도전해볼까 싶으면 만만치 않은 재료비부터 든다. 여유 없이 생활에 쫓기게 되는 순간 취향은 사치라 여겨진다.그래서 나는 새로운 취향에 관심이 가면 얼마 못가 금방 시들해졌다. 취향을 위한 지속적인 소비나 수집을 하는 이들을 보면 낭비를 일삼는 피곤한 삶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취향을 위한 소비는 과한 지출이라 여겼으며, 내가 당장 얼마나 벌며 얼마나 저축을 하는 지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어긋나 있었는지, 올바르고 분명한 취향을 지닌 이들을 보며 깨달아 버렸다. 취향을 확보한다는 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즐겁고 유쾌한 것을 인지하여 취향에 자유롭게 빠져들다 보면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소중히 다루게 된다. 아리송한 삶 속에서 취향의 가치를 발굴하여 지속하는 것은 건강하고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세상의 불합리함을 보며 삶은 불공평하고 덧없다며 심드렁하게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보단 삶의 유한함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끈질김이 중요한 태도였다. 취향을 찾기 위한 호기심으로 나의 가치를 닦아 빛내어 나아가 더 올바른 이념과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음이 분명했다.이번 주말에 나는 내 취향에 걸맞은 반지를 3개 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각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 집에 가는 내내 호들갑을 떨었다. 언젠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옷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이 잘 정돈되어 삶을 살아가는 만족감이 강하게 드는 때가 올 것이다.집에 돌아와 반지를 벗어놓고선 타인의 취향으로 덧칠된 방을 둘러보았다. 나를 찾기 위해 깊이 파고드는 과정은 궁극적 목표에 비해선 다소 요란해 보이지만, 그런 어설픔도 무언가 애틋해서 벗어둔 반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당시의 얼굴빛은 근래 들어 가장 환했을 것이다.

2023-04-11

여전히 우리는 삶이 서툴러서

삶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있을까? /Pixabay 한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친구가 전화로 하소연을 해왔다. 아이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수업이야 당연히 지루한 거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번엔 유독 아이들이 무시하는 것 같다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아이들은 쳐다보질 않는 것 같다고. 분명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화면보호기가 켜진 모니터처럼, 그런 눈빛으로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속상할 일도 아니고 직업이니 익숙해져야 하는 일인데도, 아이들이 자꾸만 자기를 헛것처럼 바라보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고.친구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긴 했지만 딱히 떨리지도 않았고,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오래전 안 좋았던 일을 말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속상하다’는 말을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미안했다. 해줄 얘기가 딱히 없어서, 그런데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아서.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다가, ‘최소한 너라도 편했으면 좋겠어. 수업을 좀 대충하더라도 말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위로인 척 건네주었다.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수업을 한 날 밤이면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수업은 이미 끝이 났는데도, 내 머릿속은 계속 수업을 하던 상태 그대로다. 개념을 설명하고, 개념에 맞는 예시를 들고, 예시에 맞는 농담을 던지고, 아이들이 웃던 안 웃던 혼자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고, PPT를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손동작을 하고, 그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넘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 2시고, 내일은 9시에 수업인데 하는 부담감까지 더해져 부정적인 생각들이 샘솟기 시작한다.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나는 이름과 얼굴을 외운 학생이 참 드물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학생들 이름이야 있지만, 얼굴과 함께 외운 학생은 거의 없었다. 수업 시간이면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과장된 목소리와 억양으로 크게 떠들며 학생들을 일일이 바라보는 척 했지만, 사실 내가 바라보는 건 늘 아이들 사이의 빈 공간이나 시계, 벽, 창문, 교실 바닥,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들 눈을 제대로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졸고 있을 때면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나를 평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내가 누구를 가르쳐도 되는 걸까, 난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못 느끼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떠오르곤 한다.친구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학생들이 그 친구를 바라보듯 학생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날들도 있곤 하니까. 마치, 내 과장되고 거짓되고 부풀려진 자아를 아이들이 늘 꿰뚫어 볼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으니까. 늘 수업을 할 때면 학생들에게 미안해진다. 나는 너희에게 좋은 선생님은 아닐 것 같구나.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너무 부담스럽구나. 그냥,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버티는 아저씨 한 명에 불과한 것만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얼마 전 10년째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물론 술김에.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야기들 배부른 소리인 것만 같고 못할 소리인 것만 같으니까. 헌데 친구는 진지하게 들어주곤 이런 말을 했다. 너 그거 딱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고. 원래 회사 다니는 애들도 2년차에 딱 너 같은 소리 한다고. 처음 1년은 멋모르고 지나가고, 2년차 돼서 일이 좀 익숙해지니 내가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익숙해지는 과정이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답해줬다.우리는 종종 익숙해지는 과정이 선형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하지만 어쩌면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게 선형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을 지 모르겠다. 익숙함의 과정에는 종종 이런 시기가 있을 지도 모르는 셈이다. ‘잘 해나가다가도 한 번씩 꼬꾸라지기’, ‘어처구니없는 실수 한 번씩 저지르기’,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리기’ 등등. 어쩌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의 일을 지속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익숙함이라는 걸 지도 모르겠고. 나도, 친구들도, 모두 그 과정 속에 놓여있다 보니, 아직은 삶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니까. 그러니 마음이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속상해지더라도, 늘 속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2023-04-04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시인이 보내는 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언스플래쉬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박연준 시인은 자신의 시 ‘밤의 식물원’에서 말한다. ‘시 쓸 때 내 얼굴엔/밤/비/뱀이 내리고/층층나무 열한 그루 사이를/옮겨 다니며 숨는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시는 ‘밤의 머리카락’처럼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하며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기 쉽고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일지도 모른다.나는 시인들이 좋다. 시보다 시인이 좋을 때도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시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고뇌하는 밤. 빈종이 위로 채워지는 낯선 언어. 그것을 쓰는 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시인에 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하였을 테다. 아버지는 시를 썼다. 썼다는 말은 이미 종결된 사건으로 느껴지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는 지금도 시를 쓴다. 이따금 그것을 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적 불씨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다.나의 아버지는 멋을 아는 사람이다. 외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에도 능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안다. 삶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고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부단히 노력한다.돌이켜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딜 가도 멋지게 차려입는 것은 물론이었고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중심을 차지했다. 언젠가는 뒷머리를 말꼬리처럼 길러서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백석의 시집이 잘 어울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 다니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봐, 우리 아빠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여전히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싶다.아버지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사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그런 불행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로 인해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나는 나와 닮은 어느 청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제대로 된 삶을 손에 쥐기 위해서 부단히 발을 구르던 한 남자를. 어느덧 나는 그의 나이와 비슷해지고 그의 몸짓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낭만에 매몰되는 순간 무너지는 현실적 삶이 있다. 이상만큼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알고 있다. 책상 앞에 앉은 시인의 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을 견디면 모든 걸 마주했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낯선 언어를 쓰는 손은 현실과 뒤엉켜 생채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밤을, 그 손을, 어떤 본질을 끝끝내 움켜쥐려는 애달픈 마음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떤 고민이 찾아오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그가 내어주는 답은 늘 명쾌하고 선명하다. 그는 현실을 살면서 낭만을 꿈꿨던 어른이다. 내가 글 쓰는 삶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위경련이 일어났다던 아버지. 나의 예민함과 날카로운 기질까지 작가적 영역으로 치환시켜준 아버지. 그는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고마운 조력자다.감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가 내뱉었던 문장으로 구성된 딸이다. 세상의 유려한 문장에 마음이 요동쳐도 중요한 순간엔 내 안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보일 리 없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마음. 그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건네준 것이다.

2023-04-04

꿈의 물고기를 만나다

세상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인생이 나를 배반한다. 노력의 결과는 허망한 실패이고, 뜻밖의 고난에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올해 마흔이 됐는데, 내 꼴이 딱 그렇다. 한 대학교의 전임교수 공개채용에서 최종 3인까지 올라갔지만 공개강의와 면접까지 치르고서 탈락했다. 내 나름으로는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다시 기회가 있을까? 찢기고 패인 마음을 우선 달래야만 했다. 구두와 양복을 눈에서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고 낚시 장비를 챙겼다. 제주도에 열흘쯤 내려가서 아무 생각 없이 낚시만 하다 오려고.낚시에서 마음을 비우면 인생도 좀 달관하지 않을까? 하지만 넙치농어만큼은 꼭 잡고 싶었다.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꽤 오랜 세월 낚시를 하면서 바다와 강에 사는 온갖 물고기들을 만났다. 2019년에는 러시아 아무르강에 가서 타이멘과 파이크, 레녹을 잡기도 했다. 그런데 늘 마음 한켠엔 어두운 방이 있고, 그 어둠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예리한 은빛 섬광이 어른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그 매혹적인 섬광은 넙치농어의 것이다. 2017년 초, 제주 현지 전문가의 넙치농어 낚시 영상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저렇게 멋진 물고기가 있다니!그 당시 겨울 제주도에 가 ‘맨땅에 헤딩’을 감행했다. 넙치농어는 난류성 어종으로 회유하는 성질이 있는데, 제주 남쪽인 서귀포 일대와 가파도, 지귀도, 마라도 등에서만 잡을 수 있다. 그 위쪽으로는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어렵다는 넙치농어 낚시에 도전한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치고,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언 손이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그 와중에 실수로 낚싯대를 부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4박5일간의 넙치농어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건 내가 할 낚시가 아닌가보다 하고 단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서귀포에 넙치농어가 꽤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6년을 기다려 넙치농어에 재도전하는 날이 밝았다.몇 개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겨우 포인트에 진입했다. 거센 파도가 사방을 뒤덮는, 야성적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첫 캐스팅(낚시를 던지는 행위) 후 릴을 감으며 지형을 파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캐스팅, 천천히 릴을 감는데 퍽! 하는 입질, 넙치농어를 걸었다.꾹꾹 처박으면서 암초를 향해 돌진해 낚싯줄을 끊으려는 질주가 굉장했다. 어느 정도 힘을 빼 거의 제압했다고 생각한 그때, 그만 놓쳐버렸다. 넙치농어의 필사적인 바늘털이에 당하고 만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경계심이 강한 넙치농어는 잡았다가 놓치게 되면 다른 개체들까지 예민해진다. 나는 또 다시 교수 채용 탈락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 돼 버렸다.포기할 수는 없었다. 부지런히, 아니 처절하게 두드려보기로 했다. 우측에서 좌측, 좌측에서 우측 부채꼴 모양으로 30분쯤 캐스팅을 반복했을까? 흰 포말에 덮였다가 검은 이마를 드러내는 암초 옆에서 또 한 번의 강력한 입질을 받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넙치농어였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챔질을 확실하게 하고 낚싯대를 옆으로 눕혔다. 수중 암초를 향한 폭발적인 질주가 몇 차례 있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다 녀석이 허공으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순간 심장이 터질 듯했다. ‘오냐, 살려는 몸부림이 처절하구나.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한다. 네 얼굴을 봐야만 내가 살겠다. 그러니 오너라!’끌려오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거칠게 저항했다. 발 앞 바위틈으로 처박는 바람에 낚싯줄이 날카로운 바위에 쓸리기 시작했다. 줄이 끊어질 것 같아 서슴없이 물로 들어가 바위 반대편에 서서 침착하게 릴을 감았다. 한 평생 같은 십 초가 지나고, 드디어 은빛 실루엣이 수면에 넘실거렸다. 빛나는 은린 갑옷을 입은, 6년을 기다린 내 꿈의 물고기 넙치농어였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68센티미터. 큰 사이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게는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인생고기다. 대학 교수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대학 교수보다 넙치농어를 잡아본 사람의 수가 훨씬 적을 것이다. 누가 더 귀한가? 나는 넙치농어를 잡은 사람이다. 거친 제주바다가 내게 준 선물은 넙치농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용기와 의지,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이다.

2023-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