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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에 맞게 사는 일

등록일 2023-10-17 18:36 게재일 2023-10-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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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공간은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변한다. /언스플래쉬

최근 장염을 오랜 기간 앓았다. 평범한 식사가 어려웠고 앉아 있기도 괴로울 정도로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심했다. 몸이 아프다보니 퇴근 후에는 바로 집에 가서 잠들기 바빴고, 주말엔 집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보냈다.

집은 이사 온지 세 달이 다 되어갔지만 아직도 어수선한 짐들이 마구 쌓여 있었다. 옷장 속 서랍 안, 컴퓨터 책상 아래, 신발장 구석 등 물건들이 규칙 없이 멋대로 굴러 다녔고, 특히 냉장고 안은 언제 사두었는지 각종 식재료들이 형체만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 장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수선한 집 안에 내내 있다보니, 불필요한 물건과 청소가 필요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 뒤론 조금씩 닦고 청소하며 쓸모없는 건 비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런 나의 변화를 읽었는지 각종 청소법과 살림하는 법 영상을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살림 고수들의 살림법은 대단했다. 깨끗하게 씻은 페트병을 반으로 갈라 계란 보관함으로 쓴다던가, 커피 트레이를 활용해 신발을 보기 좋게 보관한다거나 일회용 쓰레기봉지를 청소용품으로 재활용해서 화장실 벽을 닦는 등 재사용 할 수 있는 것들은 모아 한 번 더 쓸모 있게 쓰고 있었다. 수십 개의 영상을 보다보니 나 또한 재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아끼며 필요에 맞게 정리해 나가는 생활 습관은 궁상맞기 보단, 삶을 조금 더 공들여 가꾸어 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살림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니 스스로 여러 규칙을 정하게 되었는데, 우선 외식을 자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의 고단함을 자극적인 음식으로 해소하려 했으나 이젠 가능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다. 꼭 살이 덜 찌고 건강한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직접 식재료를 손질하고 불에 구워 간단하게라도 먹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녁 식사와 동시에 다음날 먹을 점심 도시락도 싸고 가능한 설거지도 바로바로 하려니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그래도 건강한 음식과 깨끗한 주방, 필요한 양념과 그릇들을 언제나 여유롭게 꺼내 쓸 수 있다는 것에 안정감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또 채소와 과일은 집 근처 마트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른다. 예전엔 매번 먹고 싶은 음식을 때에 맞춰 반나절 만에 배송해주는 인터넷에서 주문을 했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딱 한 번 금요일 퇴근길에 장을 본다. 기존 식재료는 모두 다 먹어치우고선 장을 보는 규칙을 세우고 필요한 재료는 미리 체크해서 필요한 것만 사서 집에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와선 채소와 과일 손질을 한 후 야채 통에 넣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미루고 했던 청소나 정리정돈이 이젠 조금은 익숙해져 전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움직이곤 한다.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일정한 루틴을 통해 삶의 노하우는 생기고 노하우가 쌓일수록 점점 더 생활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나간다.

늘 루틴대로 깨끗한 주방과 삶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수 있다면 참 좋지만, 실은 몸이 아픈 날이나 피곤한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배달 어플을 켜며 스스로 항복하고 만다. 아직 완벽한 살림 고수가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며 그날 꼭 먹고 싶었던 음식을 시킨다. 배달 온 음식 양이 너무 많으면 우선 용기에 소분부터 하고선 딱 먹을 만큼의 일인분만 남기고선 먹는다. 오롯이 그릇에 담긴 일인분의 몫은 오늘의 집안일을 해내지 못했다는 부채감을 줄여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집이라는 공간은 변화하고, 그럴수록 집은 나의 취향과 성격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누군가 집이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필요 이상으로 화가 많이 나는 날에는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서랍 안의 먼지를 털고 닦으며 물건을 재정돈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닦아내고 나면 겉으로 드러나는 화가 줄고 불현듯 덧없게 느껴진다.

청소는 짧게 해도 금방 허기를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분노 대신 부엌 앞에 서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끌어준 건강한 간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이렇게 나의 삶은 조금 더 단순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꼭 필요한 쓰임에 맞게 물건과 감정을 활용하고 소비하며 쓰는 삶,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만족감을 느끼며 가을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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