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들이마시면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에 텅 빈 공명을 만드는 계절이다.
햇빛은 녹슬고, 바람은 속을 시리게 한다. 불현듯 쓸쓸해지거나 쉽게 회상에 잠기는 것을 두고 흔히 가을을 탄다고 한다. 날씨와 풍경의 변화 등으로 신체의 리듬이 변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증후군인데, 감성이 풍부해지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지며,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 텅 빈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가을을 타는 이에게 음악만큼 좋은 약은 없다.
가을엔 주로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듣는다. 폴 사이먼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과 노랫말이 아트 가펑클의 솜사탕 같은 하이 테너 보컬로 울려 퍼질 때, 귀에도 단풍이 든다. 아침엔 ‘Wednesday morning 3AM’이나 영화 ‘졸업’에서 밴 크로포드가 연기한 로빈슨 여사의 테마곡 ‘Mrs. Robinson’을 듣는다. 무명 시절, 폴 사이먼의 연인이었다가 그가 유명해지자 그 명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다며 사이먼을 떠난 캐시라는 여인을 노래한 ‘Kathy’s song’, 또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그린 ‘April come she will’을 오후에 들으면 눈물이 맺힌다.
이 계절 노을이 지는 안양천변을 걸을 때는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에른스트의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좋다. 타오르고 퍼붓고 맹렬하던 것들이 쇠잔해지는 풍경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바이올린 선율에 붉은 넝쿨로 열리는 여름의 마지막 장미를 떠올리면서, 내가 가진 음악의 기억은 엘튼 존으로 비약한다.
장미는 여름꽃이지만 가을에 피는 경우도 있다. 가을 장미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다. 낙화를 앞둔 쓸쓸함에 꽃잎의 빛깔은 어둡고, 차가운 서리를 머금으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엘튼 존의 ‘Candle in the wind’는 여름 장미처럼 화려하게 피었다가 가을 장미처럼 쓸쓸하게 진 두 여인에게 바치는 노래다. 한 사람은 노마진 베이커, 즉 마릴린 먼로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다이애나 스펜서,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비다.
이 곡은 원래 마릴린 먼로를 애도하는 곡인데,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식 때 다이애나와 절친했던 엘튼 존이 자신의 원곡을 개사해서 불렀다. 원곡의 첫 소절인 Goodbye Norma Jean(노마진 베이커는 마릴린 먼로의 본명)을 Goodbye England’s Rose로 바꿔 부른 이 곡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로 기록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비가 내리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모르면서. 당신을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난 아이에 불과했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고 당신의 전설도 꺼져버렸죠”라는 원곡의 후렴구는 “당신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죠. 해가 져도 사그라지지 않고 비가 내려도 꺼지지 않는 당신의 발자취는 영국의 가장 푸른 언덕을 따라 항상 이곳에 깃들죠. 당신의 초는 오래전에 다 타버렸지만 당신의 전설은 영원할 거예요”로 개사되었다.
엘튼 존은 공연에서 종종 원곡을 부르긴 하지만, 1997년 버전의 ‘Candle in the wind’는 부르지 않는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추모하는 곡을 상업적인 자리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가 이 곡을 라이브로 부른 건 다이애나의 장례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마릴린 먼로와 다이애나 왕세자비 둘 다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화려한 장미처럼 보인 삶이었지만 사실 바람 속의 촛불 같은 생이었다. 대중에 의해 섹스심벌 마릴린 먼로로 살아야 했던 노마진 베이커, 영국 왕실의 정치적 목적과 대외 선전의 도구로 살아야 했던 다이애나 스펜서. 이 둘의 삶과 죽음은 전혀 다르면서도 꼭 닮아 있다. 노마진 베이커는 20세기 할리우드의 아이콘으로, 다이애나 스펜서는 전 세계의 헐벗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사랑을 전해준 봉사와 희생의 상징으로 인류에 기억되고 있다. 둘 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로 세상에 남은 것이다.
가을은 음악을 깊은 사색으로 바꾸는 계절이다. 세피아톤으로 펼쳐진 가을 햇살 아래, 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단풍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팍팍하고 지루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