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사상 논증이 한창이다.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 이전 논쟁이 그 주인공이다. 요지는 이러하다. 흉상의 인물이 현 대한민국의 정신에 맞지 않으며,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던 사람도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국방부와 육사측은 독립운동보다는 창군 이후 군사적 분야에 대해서만 흉상을 비치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흉상 철거 사유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아서는 국방부와 육사의 발언은 꽤나 합당해 보인다. 여전히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 정권과 군사적 대립을 이어가는 상황이므로, 공산당 전력이 있는 사람을 육사의 정신을 표상하는 흉상으로 배치하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으로 들리기 때문. 하지만 그 대상이 홍범도 장군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아한 구석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다. 홍범도 장군은 심지어 2016년 박근혜 정부 시기 해군 97전대 소속의 손원일급 잠수함에도 명명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은 단순히 육사의 흉상 이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잠수함 명칭 개변 및 국군사에서의 홍범도 장군은 흔적 지우기라는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홍범도 장군이 레닌 시기 소련 공산당 인사였음은 의심할 바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대 세계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이 북방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1920년대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의 백군과 연합해 전선을 펼치고 있었기에, 만주 군벌 및 일본군과 대립하던 홍범도 장군으로서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해 전선을 구성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러시아 공산당은 향후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친 스탈린 시기 공산당과는 사실상 다른 집단이며, 2차대전 당시 연합국에 속해 있었다는 역사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이들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것을 빨갱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 빨치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정규 유격 게릴라 부대를 통칭하는 파르티잔(Partisan)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자면 아전인수 격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국방부측은 여기에 덧붙여 홍범도 장군이 사할린 한인 부대가 러시아 인민혁명군에게 제압당한 자유시 참변에 개입하였기에 진성 공산당원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사학계에서는 해당 사건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역사 논쟁으로까지 확산될 전망이다.
그럼에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광복군 인사의 흉상 이전에 찬성하는 ‘제대군인자유노동조합’의 김영교 공동대표는 최근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에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과 공동 진행한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육사 공산주의자 흉상 존치 규탄대회’에서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그의 무덤을 파묘해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러한 흉상 이전 찬성 측의 발언과 근거를 확인하고 있자면, 흡사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있었던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한 논쟁과 임시 정부를 대한민국의 근간에서 부정하려했던 뉴라이트 계열의 논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육사와 국방부측에서 이와 같은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의 자리에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 밴플리트 장군의 흉상을 설치하려 계획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백선엽 장군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육군 소속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자서전에 직접 서술한 친일행위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더불어 맥아더 장군과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사와 한국사에 있어 많은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육사의 정통성을 기리는 충무관 흉상으로 제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소의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우리의 역사에서는, 이 둘을 대체할 정도의 영웅이 없었다는 말인가?
많은 부분에서 최근의 논란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있었던 역사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특정한 인물이나 역사적 단체의 위상을 상향하려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 역사를 부정하고, 없는 역사를 만들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행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힘든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가운데, 없는 문제까지 만들어내는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