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 슬슬 새로운 운동을 도전해볼까 싶어 주말마다 배드민턴장에 나가고 있다. 배드민턴을 많이 쳐본 적이 없어 막상 코트 위에 서니 다소 자신감이 떨어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배드민턴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
배드민턴을 치는 동안은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날쌔게 날아오는 공을 끈질기게 바라보다 정확한 타이밍에 공을 쳐내야만 상대의 공에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잠을 깨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것인지 아니면 든든하게 배를 채워줄 따뜻한 라떼를 마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불현 듯 떠올라도 잽싸게 저 멀리 날려 보내야 한다.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동안 날아오는 공은 어느덧 바닥에 구르고 있으니 말이다.
상대에게 공을 보내는 흐름 또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칫하다 공을 치기 쉽게 주면 상대는 그 틈을 타서 강한 스매싱과 스트로크를 사용하여 거센 공격을 퍼붓는다. 조금이라도 집중을 놓으면 이미 승리의 흐름은 상대의 손에 쥐어져선 상대가 예측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 게임이 끝나고 마는 것이다.
선수들의 시합 영상을 보면 숨 쉬는 법을 잊을 정도로 몰입된다. 수비를 하는 동안은 춤처럼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다가도 공격할 타이밍이 되면 다이빙하듯 등을 구부리며 잽싸게 공을 보내기 위해 돌진한다. 그렇게 공이 오가는 동안은 마치 둘이 하나가 되어 추는 쌍무(雙舞)가 펼쳐지는 무대를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배드민턴은 몸을 던져 수비를 함과 동시에 공격의 방향까지 생각해 내어야 한다는 것도 참 매력적이다. 방어와 공격이 빠르게 오가는 동안은 땅과 부딪히는 운동화의 마찰 소리와 라켓으로 공을 칠 때의 타구음 소리만 날 뿐. 코트라는 주어진 반경 안에서 불필요한 소음 없이 이어지는 조용하면서도 열렬한 싸움이란 점이 더욱 마음에 든다.
최근 여러 모임 자리를 가게 되면서 불필요한 상황에 놓여 난처했던 적이 있었다. 본인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또는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인다거나, 필요에 따라 타인을 낮추어 스스로 돋보이게 만드는 거친 언행을 보며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그런 부담스러운 대화에 비하면 코트 속 불필요한 소음이 제거된 채 열렬히 경기에 임하는 배드민턴 플레이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배드민턴 경기에서 욕심은 과한 공격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공이 코트 밖으로 벗어나는 범실을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 이기고 싶단 욕망만으로 힘을 너무 많이 주거나 공격의 흐름만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돌아오는 건 실패라는 결말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낮게 몸을 웅크리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공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든 빠르게 칠 준비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급하면 공을 빠르게 치게 되고 불필요한 생각에 빠져 들면 타이밍을 놓쳐 공을 쳐낼 수 없게 된다. 나의 실력과 장점을 잘 아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어떤 점에 강하면서 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야만 원하는 방향으로 게임의 흐름을 이끌 수 있다.
잠이 들기 전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의 안세영 선수 경기 영상을 본다. 결승 전 경기도중 심한 무릎 부상이 크게 왔음에도 그녀는 기권하지 않고 오히려 경기를 리드한다. 자신의 소신과 기량을 펼쳐 오히려 상대를 위압하는 그녀의 모습에선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었다.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하고 스스로 개척해나갔을 노력의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빛내게 하는 것은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아니다. 타인이 가지지 못한 것을 미리 내가 쥐었다고 해서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 아닌, 그 사람만이 가진 특유의 정신력 그리고 고난을 대하는 집념과 기량에서부터 오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일요일 오후, 점심에 다다를 때 쯤 라켓과 셔틀콕을 챙기고서 실외 배드민턴장으로 향한다. 저 하얀 코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수많은 고난 사이에서 어떤 집념을 가지고 저 수많은 공을 쳐낼 것인지. 금요일 아침부터 든 생각을 일요일 오후가 다되어서야 황급히 마무리 지어 본다. 고귀한 기량은 불끈 쥔 두 주먹과 튼튼한 다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을, 월요일을 조금 더 가뿐하게 맞이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스매싱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