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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아지트, 순대국집

등록일 2023-11-07 18:08 게재일 2023-11-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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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로가 돼주기도 하는 순대국. /Pixabay

나의 취미는 요리다. 그렇다고 집에서 빵을 굽거나 파스타를 하는 건 아니다. 술안주를 직접 만들어먹는 게 좋달까. 코로나 시절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기 어렵다보니 집에서 혼술을 하는 취미가 생겼는데, 매번 시켜먹기가 부담스러워 간단한 요리를 해먹다 보니 생긴 취미다. 처음에는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같은 간단한 찌개 종류부터 해먹기 시작했는데, 요즘엔 유튜브에 편리한 레시피가 많아 이것저것 해먹어보는 중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집에서 도저히 해먹기를 포기한 술안주(?)가 두 개 있는데, 감자탕과 순대국이다. 둘 다 30대 남자의 소울푸드 같은 요리인데, 집에서 하자니 손이 너무 많이 가기도 하고 냄새가 온 집안에 남다보니 집에서 해 먹는 건 아예 포기했다. 하지만 소주를 좋아하는 나에게 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음식인지라, 감자탕이나 순대국에 혼술이 땡기는 날이면 집 근처의 가게에서 포장을 해 먹곤 한다.

그러다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사실 순대국밥은 집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 감자탕은 그래도 포장을 해서 먹어도 우거지며 고기며 참 맛있게 먹고 밥까지 뚝딱 볶아먹는데(배가 아무리 불러도 볶음밥은 못 참는다. 소주 안주로 볶음밥을 어떻게 참아) 이상하게 순대국은 집에서 먹으려면 손이 안 간다. 분명 가게에서 먹을 때랑 똑같이 해먹어도 도저히 그 맛이 나질 않는다. 희한한 일이다.

사실 나에게는 좋은 순대국 집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맛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술을 마시고 할 때는 맛보다 중요한 요소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냄새. 자고로 순대국 집은 돼지고기와 부속고기를 오래 삶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색. 벽지며 천장에 살짝 누런 느낌이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주인이 너무 친절하지 않아야 한다. 가끔 말을 걸고 필요한 거 있냐고 묻거나 반찬을 아무 말 없이 리필해주는 경우들이 있는데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친절이라면 친절일 테지만, 이상하게 부담스럽단 말이지. 게다가 반찬을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로썬, 그런 친절은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어쩌면 순대국의 맛이라는 건 단지 음식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런 부수적인 요소를 통해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당히 허름해서 격식 차릴 필요 없는 그 느낌 속에서 평소엔 잘 보지도 않는 야구를 보며 순대국을 기다릴 때의 그 여유로움. 시게 익은 김치와 깍두기를 한 입씩 먹어보고, 양파와 고추를 쌈장에 찍어 먹으면서 소주를 한 잔 따라 미리 마실 때의 그 알싸한 느낌. 펄펄 끓는 뚝배기에 담긴 순대국에 숟가락을 미리 담궈두고, 정구지와 새우젓, 다대기와 들깨가루, 모자란 간은 소금 살짝 넣고 고추기름과 마늘 다진 게 있는 집에선 그것들을 살짝 넣고,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재료들이 잘 섞이게 만들 때의 그 기분. 숟가락을 꺼내 입으로 슥 해주고, 그 맛에 소주를 한 잔 비우곤 국물을 마실 때의 그 따끈한 맛이란….

그렇게 소주를 한 잔 한 잔 비우고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세상 일 따위 어찌되든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기분도 든다. 어쩌면 내가 순대국에 소주를 좋아하는 건 맛보다는 그런 일련의 느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 오늘 열심히 살았다, 이제 술도 한 잔 했으니까 오늘 하루는 그냥 쉬자하고, 뇌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지는 그 기분이 너무나도 좋다. 그런 나에게 순대국집이란 지치고 힘들 때, 구석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찾는 나만의 작은 아지트인 셈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작년 이사를 했을 때에도 나는 제일 먼저 순대국 집부터 찾아다녔다. 맛과 적당한 친절과 적당한 허름함을 갖춘, 혼자를 위로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숨어들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 신기하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 순대국 집을 하나 찾고 나면, 비로소 새로운 동네와 친해진 기분이 든다. 이곳에서도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도 들고. 여기서도 이런 저런 일이 많겠지만 그럴 때마다 여기 와서 순대국에 소주 한 병 뚝딱하면 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오늘도 순대국 집에는 수많은 혼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다.

문득 그 모습들이 살아고자 힘껏 힘을 내는 모습들 같아 측은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에겐 그런 장소가 하나쯤 필요한 것 아닐까?

누구도 자신을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따끈한 국물과 차가운 소주에 온 몸을 느슨하게 풀어줄 시간.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 순대국을 먹으러 간다. 당신에게도 그런 시간과 장소가 하나쯤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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