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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절망적인 희망

착하다는 말이 싫다. 나는 3자매 중 장녀이면서 동생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난다. 동생들은 늘 보살펴야 하는 존재였으며 가장 소중한 물건은 거듭 양보해야만 했다. 자연스레 나는 물건과 사람에 대한 애착을 줄였다.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친구가 생기게 되는 순간 얼마 못 가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었다.동시에 동생들을 보살핌으로써 착한 언니, 착한 딸로 인정받는 것이 당시엔 큰 칭찬으로 여겨졌다. 타인에 대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 인정받는 사랑은 동생들뿐만 아니라 늘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나의 덕목이자 행동지침이 되었다.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친구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그들의 기분을 살피기 위해 지나치게 조용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과장하여 행동했다. 공부는 못해도 상관없지만 나쁜 길로 빠져 부모의 마음을 속 썩이는 나쁜 딸만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엄마와,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착하게 커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아빠의 말을 제일 좋은 칭찬으로 여기던 때였다.나는 착하다는 말이 정말 싫지만, 사실 지금도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선 극도로 말을 아낀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타인의 하는 말의 처음부터 끝까지 귀담아 들으려 노력하며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신경을 쓴다. 조금이라도 나의 허점을 보이게 된다면, 그래서 실수가 많은 허무맹랑한 사람이라고 여겨져 결국 쟤는 참 괜찮은 애야, 라는 말을 듣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 또는 감정에 대해 주도적으로 사고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을 착한아이 콤플렉스라 부른다. 착한아이 콤플렉스란 늘 위축되어 있으며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내가 원하고 느끼는 것을 지속적으로 억누른 것을 말한다.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나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하지만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하는 순간이 쌓이고 결국 나조차 스스로를 인정해 주지 못하게 되면 타인과의 관계 단절이 찾아온다. 실은 타인을 위한 진짜 호의가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그 가식적인 비좁은 마음이 드러났을 때에 내면이 위축되고 쓸쓸함만이 남아 자리한다.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닮고 싶은 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닮고 싶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만18세 나이에 MBC 강변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가수 이상은의 ‘담다디’는 밝은 멜로디이지만 가사를 뜯어보면 그대는 나를 떠나려고 하는 상황이다. 그대가 나를 떠나려고 하는 원치 않는 상황임에도 이상은은 나를 떠나지 말라며 쾌활한 노래를 부른다. 곡에서 가장 명랑한 부분이면서 계속 반복되는 가사인 ‘담다디’엔 의미가 없다. ‘담다디’의 뜻을 정확히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나를 떠나려는 커다란 상실을 열렬히 해석하여 젊은 날 이별의 슬픔을 자유롭게 노래하기 때문이다.강변가요제 당시 날씨는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상황이지만 대부분 많은 이들에게 쾌청한 날 속의 밝은 무대로 오래토록 기억된다. 실연의 아픔과 슬픔을 행복한 멜로디로 표현하여 신나는 무대를 만들어 내는 것, 흐린 곳에서의 밝고 환한 멜로디는 얼마나 닮고 싶어지는지 모른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프랑스 문학가이자 ‘슬픔이여 안녕’으로 알려진 프랑수아즈 사강은 삶은 하나의 끔찍한 농담이며, 인간이 공포에 질린 고통에 가장 좋은 해독제로 유머를 꼽은 바 있다.사강은 사람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희망이며, 삶은 공연이 끝난 희극처럼 그 결말을 다 알고 있는 유쾌한 극으로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여기서 사강이 말하는 희망은 생존을 희망하라거나 고통을 극복하자는 단순한 희망이 아닌, 절망적인 희망이다.절망적인 희망이란 용납할 수 없는 타인이 있을지라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여 유쾌한 농담으로 희망을 지향하는 것이다. 유쾌하고 터무니없는 행동엔 이유가 없으며, 때문에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동이라 말한다.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무런 대가도 보답도 바라지 않는 무상의 행동일지 모른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펼치고서 이상은의 ‘담다디’를 듣는 주말 오후, 괴로움 속에서 무상의 ‘담다디’를 흥얼거려 본다.

2023-03-28

‘덕질’은 구원입니다

‘덕질’이라는 말이 있다. ‘수집가’의 뜻을 가진 신조어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행위를 뜻한다.쉽게 말하자면 그냥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기도 하고, 조금 더 깊게 이야기하자면 뭔가에 미쳐하는 행동을 ‘덕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미친 듯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는 건 포켓몬 스티커 덕질이고, 미친 듯이 아이돌 관련 굿즈를 사 모으는 건 아이돌 덕질인 셈.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취향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것, 그걸 위해 얼마든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 그게 덕질인 셈.최근엔 ‘진격의 거인’에 미쳐 하루 종일 그것만 보고 지냈다. 집에 콕 박혀서 식음을 전폐하면서까지, 그 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가슴 졸이면서. 그렇게 한 일주일을 살고 나면, 일상의 스트레스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다. 그게 중요해? 지금 엘런이 거인이 됐는데? 아르민이 불타 죽게 생겼는데?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나한테는 나름 현실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힐링인 셈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쁜 시즌이 되면 흐름이 뚝 끊어지게 돼서, 강제로 ‘탈덕’ 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3월은 바야흐로 ‘탈덕’의 계절이다. 강의가 시작되고, 계간지의 새 시즌이 시작되는 시기니까. 프리랜서는 일 할 수 있을 때 일해 둬야 비시즌에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취미나 취향이나 애정보다 일이 앞서는 시기인 셈이다. (물론 이런 말을 했더니 출판사 팀장님은 나에게 “방학이 있는 삶에 감사하라”고 잔소리를 하시긴 했지만...) 좋아했던 모든 일로부터 멀어져 강의를 준비하고, 특집 원고를 준비하고, 새로 시작할 연구를 준비하고. 그나마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 삶이 싫진 않지만, 바쁘게 일만 하면서 살다 보니 사는 낙이 없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이런 때엔 술마저 맛이 없다. 마치, 일찍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먹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기분이 든다.최근엔 1학년 대상의 글쓰기 수업을 위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하는 수업이다 보니 왠지 재밌게 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 생글생글 웃기도 하고 재밌는 이야기도 나름 많이 준비해 가곤 한다. 그렇다보니 아이들 앞에서 수업을 할 때에는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곤 하지만, 막상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혼자 있을 때면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든 내일 수업을 또 준비하고, 다른 할 일들도 해야 하는데, 정작 집에 돌아오면 마음이 지친 것인지 침대에 몸져눕듯 쓰러져 한 시간쯤 잠들어버린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먹기 싫은, 어른의 투정인 셈.그런 하루 중에 유튜브 알림이 울린다. 좋아하는 인디 밴드의 뮤직 비디오가 유튜브에 공개되었다는 알림. 겨우 손가락 움직일 힘만 남아, 가까스로 알림을 클릭한다. 검은 창에 유튜브의 마크가 뜨고,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와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다. 와, 음악 진짜 좋다. 영상 진짜 멋있게 찍었네. 대박. 대박. 보컬 엄청 잘생기게 나왔어. 얘들 왜이래. 진짜 대박 나겠다. 이제 나만 아는 밴드 아니겠다. 속상한데 더 성공했음 좋겠다. 너네라도 성공해라. 난 이번 생은 글렀다. 와 근데 노래 진짜 좋네. 영상 대박 멋있어. 완전 대박. 어, 이거 만화 오마쥬인가? 소년 만화 주인공 같네. 멋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실리카겔’이라는 밴드의 ‘Mercurial’을 그렇게 하루 종일 보고 들었다. 가사의 의미와 뮤비에 나온 오브제들을 보며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면서 이상하리만치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 버티길 잘했다 싶은 기분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심미적인 만족감 같은 걸까? 사실 잘은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들뜨고 내일도 또 들어야지 싶고.내일도 또 들어야지, 지하철에서 뮤비 봐야지, 영상도 더 찾아봐야지. 어디 인터뷰나 코멘트 한 거 없는지 찾아봐야지, 그런 소소한 생각을 하다 잠들었다. 그런 때면 왠지 어릴 때 생각이 난다.좋아하는 게임 하나에 몰입해, 혼자 게임 세계에 대해 상상하고 이런 저런 살을 붙이고, 내일은 뭘 해야지 하고 계획하며 두근거리던 기분. 분명히 별 것 아니지만, 나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1인용 위안 같은 것들. 참 별 것 아니긴 한데, 그 사소하고 작은 ‘덕질’ 하나에 하루의 의미가 바뀐다. 버티고 버틸 뿐인 삶에서, 내일을 두근거릴 수 있는 삶으로. 그렇게, 오늘 나의 하루는 구원받는다. 사소한 애정이 나의 하루를 이토록 두근거리게 해줄 수 있다니 스스로에게 감탄하면서.

2023-03-21

나는 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보면 동시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고들 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물론이고 대중의 내밀한 욕망까지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인터넷 서점 사이트만 들어가 봐도 그렇다. 읽으면 부를 거머쥐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책과 욕심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바람처럼 살아가자는 책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러한 양극의 발화야말로 우리 시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점이다.‘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외침과 ‘이번 생은 망했다’며 자조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기 쉽다. 세상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으나 보이지 않는 손에 어퍼컷을 맞고 KO패 당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살면서 누구나 냉소와 허무를 맞닥뜨리기 마련이고 그날그날 편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렇게 나태하게 살 순 없다고, 더욱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혼란한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명백한 답을 찾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그런 면에서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를 고발하고 집단적인 폭력에 관해 파헤치는 내용의 프로그램은 공개와 더불어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그 어떤 이유라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행위들. 어떠한 가치를 향한 의지가 크면 클수록 자기 존엄성보다 희생이 앞설 수밖에 없다.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행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가감 없이 벌인다.다큐멘터리에서는 눈이 찌푸려질 만큼 자극적이고 적나라하게 피해 상황을 보여준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는 상황이나 권위를 내세우던 사람이 몰락하는 과정, 한 인간을 무분별하게 신격화하는 것의 위험성과 사람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모습까지. 모두 인간이 행한 일이며 종결되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 우리 주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진리를 알고 그를 통해 구원받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정답을 나 혼자 알고 있다는 사실만큼 달콤한 것이 또 있을까. 당장의 현실은 고달플지 몰라도 믿고 따르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또 얼마나 위로가 되는가.책을 덮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나가라는 자기계발서의 조언을 따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나가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 정답이 있다고 보장되어있는 한, 누구나 자신만만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다.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적극적인 자기 확신과 맹목적인 자기 믿음은 다르다. 한 사이비 교주를 체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애써왔던 사람은 그의 실체를 마주하고 이렇게 보잘것없고 겁 많은 사람을 쫓던 것이 허무했노라고 고백한다. 어떤 인간도 완전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붙잡는다.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에 가깝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했던 그 유명한 변론을 떠올려 보라. 그가 유일하게 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의문하고 의심하고 전복하면서 철학과 과학과 종교는 발전되어 왔다. 사랑과 행복 같은 관념은 늘 선행적으로 존재한다. 결국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본질이다.언젠가 외부 강의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소설을 써야 소설가로 데뷔할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보다 거기에 무언가를 대답하려고 했던 나 자신에게 당황했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정답이라고 내어놓을 수도 있던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질문자의 얼굴에서 실망의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나는 그때 어떤 답을 주려고 했던 걸까. 어쩌면 이제껏 그것을 답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모르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어떤 상황에선 모르겠다는 발화가 명쾌하고 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끝끝내 어려운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의 영역보다는 앎의 영역에 가깝다. 자기 의심과 자기 확신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는 그 걸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2023-03-21

글을 쓰지 않는다는 건

아직까지도 글은 솔직함이고, 폭죽처럼 진실이 절정을 향해 터뜨려질 때에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시는 더욱 그렇고 에세이나 칼럼 같은 산문도 마찬가지다.하지만 난 이 모든 걸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다는 의지조차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모든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시 쓰기가 그랬고, 모든 사물과 대상과 사람에 대한 본질을 꿰뚫을 수 없다면, 나아가 이야기 속 진실을 모른 채 쓰는 글쓰기라면, 그것은 어리석고도 우스운 객기라 생각하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그래서 나는 기록을 멈췄다. 읽기를 멈추고 사유를 멈추고 시 쓰기를 멈췄다. 단 몇 줄짜리 시에 이토록 거짓과 위선이 가득하다니 환멸이 났다. 진실이 빠진 글은 누군가의 생각과 글을 그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 글쓰기는 당장의 나의 월세가, 밥이, 옷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대학 졸업 이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유지했다. 화장품을 팔거나 음식을 나르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했다. 필요하다면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를 쪼개어 바삐 움직였다. 글 쓰는 것 외에도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했고 지금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후회되는 점은 그 일을 하기에는 너의 재능이 아깝다는 무례한 말을 받아치지 못하고 오히려 거듭 무기력해졌다는 점이다. 동시에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타인에 대한 눈맞춤도, 정작 나의 마음도 모르면서 써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채 더듬더듬 햇빛이 드는 자리에 앉으려 애쓴, 당시의 혼란과 오기에 너무 집착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일을 하다 간혹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 년에 세 네 번, 문예지에서 청탁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나를 시인이라 칭하며 작품을 청탁할 때의 민망함, 잊히지 않았다는 안도감, 어떤 작품을 써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 마감일이 다 되어서야 급히 써내려가는 초조함, 그렇게 마주했을 때 내 것 같지 않은 문장들, 모든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되고 있는지 되짚을 여유와 용기가 없다는 진실을 마주하며, 불현듯 이 모든 게 쓸모없다고 여겨졌다.좋아하는 책을 모아둔 책장도, 서점 베스트셀러 칸에 자리 잡은 책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볼 때에도, 안면만 튼 작가들의 신작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쏟아지는 광경에 느끼는 소외감도.하지만 이런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건 아직까지도 글을 쓰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속해서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고 나는 어떻게든 쓰고 있으며, 글을 쓰고 다루는 모든 이들이 묵묵히 빛나고 있다고 있는 점에서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나는 현재 그 빛남에 출발조차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고 돌아 내가 책장 앞에서 책을 만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제 미련한 유난스러움을 멈추고 묵묵한 글쓰기를 하겠다는 머쓱한 결론에 도착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속 같은 짧은 시간 안에 즐거움을 주는 인스턴트식 만족감이 나를 기쁘게 하는 건 맞지만, 영상이 끝나고 검은 화면에 내가 잠깐 비출 때의 스스로를 못나다고 생각하는 것, 방구석에 앉아 혼자 너무 편하게 생각 없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은 계속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분명히 할 말이 있는 사람이고, 그 말을 정확히 세상에 던지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요즘은 내가 쓰고 싶은 글보다 생활 유지를 위해 써야만 하는 글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기업의 홍보성 글이나 광고 카피 등의 업무적인 글쓰기는 광고에 따른 타겟층이 정해져 있기에 사용자에게 기대하는 의도나 목적, 그로 인해 얻어지는 예측성과를 정확하게 설정한다. 문구 또한 소비자가 카피를 읽는 즉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작성한다. 호기심을 자극하여 즉각적인 참여나 구매 등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다행히 일은 꽤나 적성에 맞다. 치밀하고 정확한 글쓰기와 내가 쓰고 싶은 글쓰기 사이에서 공통점과 적절한 균형을 찾아 애쓰고 있고, 모든 글쓰기가 꽤나 내게 도움이 되고 있단 점에서 요즘의 나는 글과 함께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23-03-14

2층 아저씨의 참기름

시각, 청각 장애인인 할머니에게 제공된 국민임대주택에서 엄마가 산다. 할머니 부양하는 동거인이라 입주 자격이 된다. 옥상에 빨랫줄 당기고, 스티로폼박스 화분을 놓아 상추, 고추 심을 수 있는 그 집에서 14년째 사는 중이다.영어유치원 급식 일하러 갔더니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가 “할머니가 언니 돈 모으라고 안 돌아가고 버티시는 거”라 했단다. 하긴 최소한의 월세와 공과금만 내면 되니 주거비용을 많이 아끼긴 했다. 할머니가 요양병원 들어간 후 엄마는 반려견 순돌이랑 둘이서만 지냈는데, 순돌이는 3년 전 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시어머니 병구완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밖에 나가 일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직 변변히 자리 잡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3층짜리 낡은 연립주택 1층에는 1년에 몇 천 건씩 민원을 넣어 ‘민원왕’으로 티브이에도 나온 악성 민원인 아주머니가 살고, 2층에는 80대 중반 어르신이 산다. 3층에 사는 엄마는 ‘2층 아저씨’와 살갑게 지냈다. 그분은 젊어 재혼 후 자식들에게 버림 받았다. 아내 되신 분이 금방 돌아가셔서 쓸쓸히 혼자 늙었다. 옥상 오르내리며 이불빨래 널 만큼 정정하셨는데 암 수술 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몸피가 반으로 홀쭉해졌다.엄마는 영어유치원 급식 반찬 남은 게 있으면 비닐에 싸서 아저씨 갖다 드리고, 할머니 면회 갔다가 병원 1층 죽 가게에서 소고기죽 사서 갖다 드리고, 행정복지센터에서 김 두 상자 받으면 한 상자 드리고, 내가 낚시로 잡은 생선 갖다 주면 그것도 나눠 드리고, 명절 음식 해다 드리고, 내 생일날 일부러 잡채 더 해서 갖다 드리고 했다. 좋았다 나빴다 하다가 또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을 안 하신다. 며칠 전 집 앞으로 이삿짐 차가 오고, 수십 년 연락 끊고 지낸 딸이 와선 엄마에게 고맙다고…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셨단다.얼마 전, 서울의 한 오피스텔에 살던 80대 여성이 분신을 시도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미처 하지 못해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오랜 기간 생활고에 시달렸다. 관리비가 7개월이나 연체된 상황에서 방을 비워줘야 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다.지난 1월엔 생활고를 겪던 70대 어머니와 40대 딸이 함께 극단 선택을 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장사를 할수록 빛만 늘어나고, 월세는 밀려가고,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 계층임에도 전기요금 등을 성실하게 납부해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이 오히려 찾아내지 못했다. 유서에는 “장사하면서 빚이 늘었다”, “보증금 500만원으로 밀린 월세를 대신해달라”고 적혀 있었는데, 더 가슴 아픈 건 “폐를 끼쳐 미안하고 미안합니다”라는 문장이다.“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그 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윤동주는 ‘팔복’의 마지막 문장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썼다. 멀찌감치 관망하는 자의 손쉬운 위로가 아니라 슬퍼하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 슬픔에 영원히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이웃의 고통을 보며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는 사람, 더운 가슴에 바람이 이는 사람, 고운 마음에 아픈 노래 울리는 사람, 그 아름다운 사람을 나는 엄마에게서 본다.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 늙은 사람이 더 늙은 사람을 보살피고,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 곁에 있다.2층 아저씨 냉장고를 열어 보니 파 썰어놓은 것, 참기름, 된장 따위가 있어서, 아까워 챙겨오셨단다. “모르는 사람이면 그냥 버렸을 텐데 가족처럼 지낸 분이니까 챙겨왔다”고. 엄마는 오랜 이웃을 잃었고, 이웃이 남긴 참기름, 된장, 대파로 저녁을 지을 것이다. 누군가 살려고 가꾼 것들이 다른 이의 삶을 마저 가꾼다. 삶이 없어도 삶이 이어진다.“봄에 옥상에다 뭐 안 심어?”라는 내 물음에 엄마는 “2층 아저씨가 화분이랑 다 해놨으니까 엄마가 상추 고추 심고 호박도 심어야지” 했다.

2023-03-14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프로게이머를 불러다 면박을 주는 일들.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이면 실제로도 사람을 죽이고 싶으냐고 묻고, 게임 머니를 얼마나 가지고 있냐 묻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냐고 묻고. 물론 그때엔 사회 전반적으로 게임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소했던 시기였긴 하다. 하지만 무례한 질문들을 던져댄 패널들의 모습이란, 무지가 얼마나 사람을 무례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런 질문들은 흡사 도박 중독자에게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지금은 사람들의 게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나 배틀 그라운드 같은 게임의 흥행과 맞물려 한국 게이머들이 세계무대에서 선전하면서, 그들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 이제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싶냐는 등의 무례한 질문에 시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문화를 대변하는 사람들이면서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 잡게 됐다. 많은 것이 변한 것이다.하지만 정말 그럴까? 게임 시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종종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다. 얼마 전 문제가 됐었던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조작 문제나, 과도한 과금 유도, 사행성 논란뿐만 아니라, 블록체인이나 NFT를 융합하여 게임을 통한 수익 모델을 홍보하는 경우들을 보라. 이런 게임 시장의 세부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이 게임을 통해 원하는 것은 문화의 융성이나 즐거움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부 게임이라 하기엔 대다수의 한국 개발 게임들이 비슷한 루트를 걷고 있기에 우리가 게임을 바라보는 인식은 어딘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게임은 문화인 동시에 산업이다. 더불어 하나의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수익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것이 마냥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돈이 벌려야 다음 게임도 만들고 할 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것이다. 왜 게임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가. 게임으로 돈을 벌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흔히 캐시 카우로 불리는 일부 게임을 통해 게임사는 과연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물론 모든 게임사가 그렇다는 건 일반화의 오류다. 분명 적지 않은 회사들이 더 나은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회사들은 게임을 단지 돈으로 밖에 바라보지 않는다. 익명 게시판에 달린 수많은 게임회사 직원들이 게임 소비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라. 그들은 게이머들을 단지 호구로만 바라볼 뿐, 자신들이 이끌어가는 문화의 향유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의 게임 회사들이 이런 관점으로 유저들을 바라본다면, 그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대만 해도 동아시아 게임 산업을 이끌어간다고 평가받던 한국 게임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 이제 한국 게임은 더 이상 동아시아 게임 업계의 강자가 아니며, 단지 뽑기를 비롯한 사행성 게임과 과도한 과금 유도에 주력할 뿐인 도박성 게임만이 판치는 국가란 인상이 강하다. 그 10년 사이, 중국과 일본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가꾸고 스타일을 만들어갔던 것과 대조된다.그와 같은 국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게임 회사가 유저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한국 게임 회사는 좀처럼 유저들이 왜 게임을 하는가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단지 유저들이 비교 우위를 통한 우월감을 원해 게임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근 10년 사이에 변화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만이라기 보단, 게임 회사가 자신들의 상품의 목적과 판매 방식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그건 단지 비교 우위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사적, 시각적, 청각적 재미나 손맛이라 불리는 컨트롤의 재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게임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 유저들이 원하는 건 그처럼 다양한 재미지, 단순히 내가 남들보다 강하다는 느낌이 아니다.그래서 한국 게이머들은 점점 한국 게임을 떠난다. 재미의 요소는 보강하지 않으면서 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는 한국 게임 회사들에 지쳐서. 유저를 단지 돈주머니로 바라보는 게임회사들에 정이 떨어져서. 이게 단순히 게임의 문제뿐인 것은 아니다. 문화를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볼 때는 문화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한국 게임 업계의 몰락은 이런 태도의 부재가 어떻게 시장을 망가뜨리는가에 대한 선례가 될 것이다.

2023-03-07

우연과 필연 사이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 책장을 덮은 후에도 꼼짝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뭔가를 손에 쥐었다는 감각인데 그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진실이라고 해야 할까.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나를 읽고 쓰는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필립 로스의 소설을 처음 읽던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대던 스무 살이었고 도서관의 책장을 뒤적거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나는 젊은 날을 휘발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떤 우울, 무기력,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 발붙이고 서 있다는 죄책감과 세상을 향한 묘한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날 책장에서 꺼내든 책이 필립 로스의 ‘울분’이었던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울분’의 주인공인 마커스는 신중하고 책임감 있으며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마커스에게 말한다. “너는 창창한 미래를 앞에 둔 청년이야. 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것은 어쩌면 자식을 둔 흔한 부모의 염려일지도 모르고 시대적인 필연성이었는지도 모른다.아버지는 마커스의 죽음을 두려워하며 집착을 멈추지 않았다. 마커스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는 일밖에 없다고 여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마커스의 발악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마커스는 집을 떠나 대학에 입학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고자 하고 어떤 규정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의 목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전쟁에 끌려가지 않고 법대에 진학해 법률가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중했고 조심했다. 어떤 부분은 미성숙하기도 했고 또 어느 부분은 놀라우리만치 자기중심적이기도 했다.그런 마커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단 하나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채플 수업에서의 대리 출석이 발각되었을 때, 반성문과 매주 수업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자는 학생과장의 말을 수용할 수 없던 것 역시 일순간의 치기가 아니다. 삶의 이면에 고요히 잠복하던 어떤 울분이 그의 마지막 선택을 추동하게끔 했던 것이다. 마커스는 퇴학당하고 징병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그 결과 마커스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이러기만 했다면 또 저러기만 했다면, 모두 함께 모여 오랫동안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그렇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의 룸메이트나 애인이 아니었다면, 채플 수업이 아니었다면, 마커스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과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비극으로 향하지 않는 길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는 것, 감정을 억누른 채 어떤 것도 분출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는 주먹으로 학생과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좆까, 씨발.”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만약 마커스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른다. 학생과장의 뜻대로 하여 무탈하게 대학을 졸업했다면 그는 윤택한 삶의 법률가가 되었을 수 있다. 여러 선택의 끝에는 무수한 마커스의 미래가 있고 그것이 희극이 될지 비극이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떤 삶을 살든 그의 끝은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을 마주한 아버지가 외쳤듯이. “내가 옳았잖냐, 마커스. 내 눈에는 그게 오는 게 보였단 말이다.”위대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전혀 다른 결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아주 사소하게 벌어지는 우연적 사건으로 인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운명으로 향하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이.미국의 작가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도서관을 두리번거리던 스무 살의 청년에게 닿게 된다. 청년은 작품을 읽으며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매우 평범한 어느 날의 사건이 삶의 어느 곳에 잠복해 있다가 어떠한 결과를 이끌게 될지는 끝내 두고 볼 일이다.

2023-03-07

기억의 알맹이를 여러 개 갖고 있다는 것

올해 나는 한번도 도전해 보지 못했던 취미를 시작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하며 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새해부터 새로운 일을 잔뜩 벌려 놓고 보니 사실 과거의 익숙한 것이 훨씬 나아 보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예전에 했던 익숙한 일과 취미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다보니 시작선 앞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움츠리는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결국 올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우연히 책 한권을 마주했다.김영하의 ‘작별 인사’ 작품 속 주인공 철이는 안드로이드 휴먼이다. 철이의 아버지는 유명한 IT 회사의 연구원이며 휴머노이드를 만들어 인류의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 철저히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라 굳게 믿고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있는지 의문도 없이 살아가다 어느 날 사건에 휘말려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모든 것이 생소한 날 것 그대로의 수용소에서 철이는 금방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혹독한 현실 속에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재정립하며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을 성장이라 깨닫는다.철이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만나 우정의 관계를 맺으며 소속감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추억이란 개념을 처음 입력하게 된다.동시에 철이는 의식과 존재란 무엇이며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파고들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다시금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므로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통과 수반된 사건은 기억되기 쉽다. 예기치 못한 순간과 갑작스런 변수는 분명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이라는 깊은 자국을 남긴다. 물론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 또한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지만, 내겐 행복의 기쁨이 기억에서 차지하는 크기보다 조금 더 고통의 기억이 깊게 새겨진다.고통과 함께 동반되는 좌절과 우울감은 분명 괴롭지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중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의 의식은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는 경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기억에 깊이 남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되게 하고, 다시금 장애물 앞에 도달했을 때의 유연성과 여유를 가지게끔 한다. 고통을 이겨내 의연하게 생을 살아가는 기억의 알맹이를 여럿 갖고 있는 것이 내겐 중요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오랜 기간 써내려 갈 숙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영화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전에 없는 고난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이 처한 공간을 청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마녀배달부 키키’ 속에서 주인공 키키는 어린 나이에 아무 능력도 없는 채로 집을 떠나 마녀수행을 가는 장면에서 위기가 시작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주인공은 어느 날 이유 없이 인간 세상과 다른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 가버리고 만다. 불현듯 낯선 세계에 진입한 것도 당황스럽지만 갑작스레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여 홀로 위기 속에 남겨진다.그러한 위기 속에서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는 첫 단추로 청소를 택한다. 고통의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건의 위기와 절정을 지나 결론에 도달하여 씩씩하게 이야기를 완성한다.삶의 고통 뒤에 따르는 가치는 대부분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때문에 고통을 자세히 보고 사유하며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과 가치는 아주 긴밀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사실은 지금 나를 둘러싼 수많은 스트레스에 적절히 나를 던질 필요가 있다는 안도를 마주하게 된다. 고통을 향신료처럼 요리하여 고독을 즐기는 방법은 늘 생소하고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2023-02-21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방인에게 친절하다. 2005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갔다. 10월의 선선한 바람과 온화한 가을볕이 좋았다.아야 소피아 성당,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예레바탄 지하 궁전, 갈라타 타워 등 이름난 관광지들을 다녔다.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이틀째 날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고 늦은 저녁 호스텔에 오니 감기 기운이 돌았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조류독감 진원지가 튀르키예였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약을 먹어야하는데, 짐 부피를 줄인다며 온갖 비상약을 다 뜯어 넣어온 게 문제였다. 뭐가 감기약인지 몰라 소화제, 설사약, 멀미약, 진통제, 감기약 등이 섞인 알약 열 알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잤다. 멀쩡했다.다음날은 멀리 신시가지까지 걸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 놓인 갈라타 다리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고등어와 정어리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잡은 고기는 곧장 케밥 장수가 사 가서는 그릴에 구운 뒤 빵에 끼워 ‘고등어 케밥’으로 팔았다. 저렴한 길거리 음식이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는 사치여서 노릇노릇한 냄새에 침이 고이는 걸 겨우 참아 지나쳤다.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저물녘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숙소로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차비도 없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데이비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외모는 튀르키예 사람인데, 아마 영어 이름을 말한 것 같다. 퇴근 후 귀가 중이던 그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함께 걸어줬다. 그의 친절한 동행 덕분에 갈라타 다리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다리만 건너면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였다. 다리 중간까지 같이 온 데이비스는 배고프지 않느냐며 고등어 케밥 두 개를 사서는 전부 다 내게 건넸다. 양손에 케밥을 들고선 다리 끝까지 혼자 걸었다. 걷다가 돌아보니 데이비스가 다리 가운데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만난 천사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 세계질서는 이념이 아닌 문명 대립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는 튀르키예를 들었다.튀르키예는 과거 오스만 튀르크 시대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지정학적 긴장이 팽팽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중세 오스만 제국을 배경 삼아 오늘날 튀르키예의 정체성 문제를 매혹적인 추리서사에 담아냈는데, 소설 속 연쇄살인범은 오스만 제국이 서양에 예속될 걸 두려워했지만,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융성하며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충돌은 여전한데, 2000년대 들어 EU 가입을 추진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유럽을 지향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국민들이 분열됐다. 특히 쿠르드족과의 갈등은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정학적, 문명적 갈등은 지금 아무 의미가 없다.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무려 4만5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도, 서양도 동양도 없다. 그저 사람, 지극히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18년 전 캄캄한 이국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내 처지처럼,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천사 데이비스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웠던 이스탄불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구호단체인 ‘희망브리지’에 성금을 기부했다. 고등어 케밥 두 개 값의 스무 배쯤 되는 돈이다. 데이비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엔 턱없이 적다.역사적으로 그리스는 튀르키예와 앙숙이다. 튀르키예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적대심은 우리의 반일감정 이상이다.이번 지진 피해에 그리스는 가장 먼저 물자와 구조인력을 보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이웃 국가다. 튀르키예 국민과 그리스 국민을 나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한 대목을 옮긴다. “네 앞에 인간이 있다. 튀르키예인이면 어떻고 그리스인이면 어떠하냐.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다 인간이란 것이다. 입이 있고 가슴이 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이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튀르키예의 정체성은 유럽도 이슬람도 아니다.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2023-02-21

과학이라는 타자

최근 OpenAI사에서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가 화제다. 독일의 통계 자료 사이트인 Statista에 따르면 ChatGPT는 공개 이후 100만 가입자를 확보하는 데에 단 5일이 걸렸다고 하며, 넷플릭스(3.5년), 트위터(2년), 페이스북(10개월), 인스타그램(2.5개월) 등에 비교해 ChatGPT를 둘러싼 대중의 관심은 지금껏 우리가 마주하지 못한 규모의 것이라 할 수 있다.그간 여러 유형의 대화형 인공지능, 특히 사용자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질문에 답하도록 설계된 언어모델형 AI가 여러 유형이 있었음에도 ChatGPT가 화제가 되고 있는 까닭은 이 프로그램이 우리의 상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 가령 특정 연산을 수행하는 컴퓨터 코드를 알려달라고 하면 ChatGPT는 이에 해당하는 코드는 실시간으로 알려주면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공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철학적 질문을 던지면 ChatGPT는 답변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추가적인 생각을 덧붙여 알려준다. 흡사, 모니터 너머에 지식의 신이라도 기거하고 있다는 듯.신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ChatGPT는 아직 완벽하진 않다. 인터넷 정보를 기반으로 질문자에 답변하며 학습해나가는 탓에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답변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분야의 질문에 대해서는 제한된 지식만을 갖추고 있어 적절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조금 평가 절하를 해보자면, ChatGPT는 모든 지식을 갖춘 신이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 포털 사이트의 정보 검색 능력이 고도로 강화된, 그리하여 신뢰도에 있어 기존의 포털 사이트의 검색 값과 신뢰도를 월등히 뛰어넘는 강화된 검색 엔진에 가깝다.그럼에도 ChatGPT로 인한 변화는 이미 우리 생활을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 사례를 말해보자면, 대학계에서는 ChatGPT를 활용한 과제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 중이다. 가령, ChatGPT를 이용해 만든 코딩 과제, 혹은 에세이 과제는 표절인가 아닌가. 이것이 표절이라면 어떤 대상을 표절한 것인가. ChatGPT를 이용한 과제물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실제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는 이미 ChatGPT를 활용한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대학에서는 ChatGPT 활용을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공고를 한다.아마도 대학은 학생들의 ChatGPT를 비롯한 대화형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활용을 결코 막지 못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 것이, 인터넷의 보편화 이후 학생들의 과제물 표절 문제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해x캠퍼스’를 비롯한 과제물 판매 사이트에서부터 각종 백과사전식 지식 제공 사이트에 이르기까지, 과제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다. 때문에 대학 역시 학생들의 표절 여부를 가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취하고 있으나, 그와 같은 접근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오히려 대학에서 ChatGPT를 비롯한 인공지능형 기술의 사용법을 학생들에게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 대다수의 과제는 위키로 통칭되는 사전형 지식 사이트의 정보를 참고하고 있으며, 평가의 기준은 지식의 적확성이 아닌 그것을 활용하는 학생의 능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어떻게 ChatGPT의 활용을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기술의 윤리적 활용 방안에 대해서 말이다.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따라붙는다. 우리는 과연 ChatGPT의 답변을 100% 신뢰할 수 있을까. ChatGPT는 과연 인간과 다른 방식의 판단능력을 가진 과학이 만든 타자인가. 사람들이 ChatGPT가 내놓는 답변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ChatGPT의 성능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을 기다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예컨대, 나를 대신해 정답을 말해주고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내 생의 독재자 말이다. 대상에 대한 잘못된 가치평가는 잘못된 열광을 낳으며, 잘못된 열광은 늘 비극으로 끝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광도, 금지도 아닌 대상에 대한 적확한 지식이다.과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인공지능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재고하는 것, 그것이 가장 시급하다. 인공지능은 당신의 삶을 인도할 대타자가 아니라 다만 도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3-02-14

어떤 이별

관계 맺음에 관해 생각하는 요즘이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더욱 안정감을 느낀다.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책 읽는 것을 즐기고 사람들로 꽉 찬 공간에 홀로 놓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를 둘러싼 배경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고독은 빨리 찾아온다. 쓸쓸한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면 이상하리만치 기묘한 평온함이 느껴지고 그런 상태야말로 가장 나다운 지점이라고 여기고 있다.동시에 나는 사람과 사랑을 믿는다. 누군가를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킬킬대는 순간 역시 소중한 일상 중 하나다. 부끄러움 없이 마음을 내놓으면 되돌아오는 진심에 위로받는다. 내가 힘들 때 중요한 부분을 붙들어주는 것도 타인이다.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마음속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건 결국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관계를 맺을 때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면도 있다. 삼십 대에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관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도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학생들이야말로 위태로웠던 나를 단단하게 붙잡아준 특별한 관계다.처음 학교에 발을 디뎠던 날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 그 천진한 호기심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도 모르는 내 안의 모자람을 모조리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학생들이 무심히 뱉는 사사로운 말이 비수처럼 꽂혀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고 사소한 순간에도 쉽게 주눅 들었다. 나는 더욱 기민하게 나를 의식하게 됐다. 그 난처함을 눈치챘던 것일까. 학생들은 나의 시시한 오답도 정답으로 믿었고 최선을 다하여 무한한 사랑을 건넸다.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골똘히 고민하다가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다 어쩌면 지금이 후회로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예하게 삶을 바라봤다면 좀 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면 뭔가가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선생이 해줄 수 있는 유의미한 조언이 될 것이었다. 비단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 앞에서 현명하지 못했던 일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나는 좋은 선생이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무해한 역할도 꿈꿨다. 그러나 선생은 좋은 말만 건넬 수 없고 맹목적인 낙관만을 외칠 수도 없었다. 현실은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끝끝내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던가.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못 되었으니까. 계속해서 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저 거들먹거리고 있는 건 아니냐고. 그로 인해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리하여 어느덧 2월. 바로 엊그제가 졸업식이었다. 학교에 와서 처음 만났던 친구들이 삼 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떠나는 날이었다. 열일곱 고등학생이 스무 살이 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모두의 얼굴과 함께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당연하게 지속될 줄만 알았던 우리의 시간에 안녕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이제 졸업생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하여 자신만의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살면서 여러 관계를 맺고 다양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가끔은 아프거나 무너지는 일들도 생겨날 것이다. 그건 가르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겪었으니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해졌으니까.내가 아닌 타인의 미래를 간절히 그려본 적이 있던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누군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했던 시간이었다. 글을 통해 타인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고 이름 붙여지기 힘든 모종의 감정을 나누었다. 그건 처음 만나는 형태의 우정이었다. 마음을 다했으므로 어떤 후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크고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더 많았다. 미련처럼 맺혀있는 마음을 졸업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갈무리했다.떠남으로 완성되는 관계가 있다. 헤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이제 우리의 시간은 종결되었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더 큰 설렘을 남긴다. 함께 나눴던 일들을 가슴에 품고 다가올 내일을 상상하는 일. 그것을 떠올리면 그제야 우리가 한 뼘 자란 것처럼 느껴진다.

2023-02-14

‘독’

연극 ‘독’(최보윤 작, 김진욱 연출)을 관람했다. 정말 오랜만에 본 소극장 연극이었다. 10주년을 맞은 극단 ‘웃어’의 신작이다. 극단은 안혜경, 정애화, 허동원, 한은선 등 오랜 연기 내공을 지닌 탄탄한 배우들과 실력파 작가, 연출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대학로 드림시어터 소극장은 평일임에도 객석이 꽉 찼다. 지난해 12월 29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1월 21일 폐막 예정이었지만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2월 5일까지 연장 공연을 했다. 그동안 코로나로 관객 기근에 시달리던 공연 예술계에 싱그러운 봄비의 마중물이 되어준 듯하다.혜영은 촉망 받는 화가다. 경매에 출품한 작품이 수억 원에 거래되고, 여러 미술 전문 저널에 소개되는 등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모두 받고 있다. 남편 정호는 미술품 경매 업체의 임원으로 아내의 그림에 날개를 달아준다. 둘은 미대 선후배 사이로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화목한 결혼 생활 가운데 두 사람의 커리어도 점점 탄탄해지고, 혜영의 임신까지 경사가 겹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연락이 끊긴 대학 후배 서현이 나타난다. 혜영 혼자 있는 집에 불쑥 찾아와서는 무례하게 행동하다가 묘한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집을 나선다. 그 한마디 말에서부터 혜영의 의심과 불안이 피어난다. 처음엔 작은 불씨였던 것이 나중에는 커다란 불길이 돼 스스로를 고통에 몰아넣고, 남편과 다투고, 급기야 임신 중절을 시도하기까지 한다.혜영과 정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때 무대는 다시 혜영과 서현이 등장하던 첫 장면으로 전환된다. 거기서 연극은 혜영과 서현의 시점을 첫 장면과 정반대로 바꾸면서 모호한 분위기의 열린 결말로 끝난다. 최보윤 작가의 말대로 “하나의 현상은 여러 얼굴을 갖고, 진실은 여러 겹이다”라는 메시지를 묵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기억이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며, 진실이란 늘 상대적 가치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같은 현상이나 사건이라도 저마다 다르게 감각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러니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을 너무 맹신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도 서늘하지만 보다 섬찟하게 다가온 것은 ‘생각 하나의 파괴력’이다.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장석남, ‘맨발로 걷기’)는 시구는 낭만적으로 읽히지만, 생각 끝에서 꽃이 피고, 그 꽃은 덤불이 되고, 덤불은 점점 자라나 사방을 휘감아 숲을 이루고, 덤불숲에 불이 붙는 순간 커다란 산불이 돼 모든 걸 태워버린다.지옥은 마음에 심겨진 작은 생각 하나에서부터 만들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에서 멜(마리옹 꼬튀아르)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심겨진 그 단 하나의 생각, 세계가 세계가 아니고 현실이 현실이 아닐 거라는 그 어처구니없는 의심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남편인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평생 동안 고통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연극 ‘독’에서도 서현이 혜영의 마음 안에 떨어뜨린 독 같은 한 방울의 의심이 모든 걸 마비시킨다. 생각 하나가 삶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은 사실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독’이 위험한 게 아니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만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의심만큼 무서운 게 편견이다. 특정 지역민들에 대한 편견, 일부 직업군에 대한 편견,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 등 독 같은 생각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편견은 결국 ‘나’에게 익숙한 것 외에는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보수주의가 되고 만다. 불신, 의심, 편견은 관계를 망치고, 나를 망치고, 결국 세계를 망친다.어느 시인은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 네모난 작은 새장이어서(…) 지옥은 참 작기도 하구나”(이윤설, ‘내 가슴에서 지옥을 꺼내고 보니’)라고 토로한 바 있다. 지금 당신이 고통스런 번민으로 괴롭다면, 지옥 같은 나날들 가운데 있다면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마음 깊은 곳으로 가는 길에 쳐져 있는 장막들을 헤집고 나면, 그 안에는 좁쌀만큼 작은 생각 하나가 시퍼런 독을 뿜고 있을 것이다. 티눈처럼 작고 하찮은 그 생각 하나 때문에 지옥을 짊어지고 있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그 생각 하나를 뽑아내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는 평화롭다.

2023-02-07

봄을 향해서

후리지아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을 가졌다. /언스플래쉬 며칠 전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에 걸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서 의사 선생님께 재차 물었으나 확실한 양성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코로나에 걸려 앓을 때 나는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던 시기를 나는 무사히 지냈으니, 이 정도면 슈퍼항체를 갖고 있는 것 아니냐며 여기저기 우쭐거리며 다녔었는데, 그간의 입방정에 벌을 받듯 한순간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버렸다.확진 이후 계속 집에 머무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일차 오전은 가벼운 감기인가 싶었지만 오후가 되자마자 몸에 열이 오르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도저히 의자에 앉아있을 힘이 없어 재택근무를 중단하고 어쩔 수 없이 휴가 신청을 냈다.연달아 3일 정도 휴가를 낼 수 있어서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약 먹을 시간에만 겨우 눈을 떠서 죽과 약을 삼켰고 다시 잠이 드는 하루하루가 반복됐다. 체감상 7일은 침대 위에서 보낸 것 같은데 날짜로는 겨우 3일 정도 지나가 있었다.그래도 다행스럽게 3일 정도 지나자 TV를 보면서 잘 앉아 있을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고, 딸기나 포도 같은 달고 신 과일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드디어 다 나았나 생각이 들 때 쯤 두통과 울렁거림이라는 위기가 찾아왔다.백신 1차를 맞고 찾아 왔던 부작용과 느낌이 흡사했다. 증상이 바뀌면 약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서 다시 병원에 찾아가 약을 바꾸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구토감과 지끈지끈한 두통이 계속 괴롭혔다. 잘 쉬는 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문득 집을 둘러보았을 때, 마음속에 작은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폭풍의 한가운데인 눈 안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 눈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세차게 휘몰아치는 회오리에 힘없이 휘말려 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쉬는 동안 밀리고 밀린 업무, 평소보다 더 속도를 내야하는 잔업,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나 벗어 놓은 빨랫감 등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괴로움이 눈 너머의 바깥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눈을 질끈 감고 외면하려 애써 보았지만 어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초조함과 과연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무사히 일을 해낼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번갈아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느꼈다.그러던 와중에 친구가 먹을거리와 함께 노란 후리지아 한 다발을 집 앞에 두고 갔다. 마트에서 한 다발 저렴하게 묶어서 파는 것을 사왔다는데, 꽃집에서 잘 손질된 꽃이 아니라 그런지 따로 컨디셔닝이 필요한 꽃이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포장지와 테이프를 풀어 꽃을 꺼내고 가위로 줄기를 사선으로 살짝 자른 후 시든 이파리들은 손으로 떼어냈다. 친구 말대로 물에 소금을 살짝 넣으니 처음 받았을 때의 모양보다 더 꽃잎을 드러내며 화사하게 피었다.칙칙하고 어두운 집 안에 대뜸 환한 노란 색을 놓으니 시선이 은근슬쩍 꽃에게로 갔다. 화병이 없어 급한 대로 집에서 제일 큰 플라스틱 물병에 담아 놓았지만 그래도 꽤 그럴싸한 모양이 되었다. 멀리서 보는 후리지아는 갓난아이의 꽉 쥔 주먹 모양 같고 꽃잎은 힘없이 보드랍다. 비록 양쪽 코가 잔뜩 막혀 향을 맡을 순 없었지만 꽃을 마주하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매번 꽃을 사는 친구를 보며 사실 잘 이해를 못 했었지만 꽃이 주는 사소한 활력과 더해지는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다. 특히 후리지아는 겨울을 끝내고 봄을 처음 알리는 꽃이라 알려져 있는 만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는 꽃말을 지니고 있다. 연약하고 작은 잎으로 이루어진 꽃이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만큼은 기분 좋은 에너지와 생기를 주기엔 충분했다.후리지아는 향이 정말 좋다던데,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단순한 이유가 생기자 두통도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어느 때엔 약보다 꽃이 더 좋은 법이다.

2023-02-07

타인에 대한 환상

사실 나는 유행하는 드라마는 꼭 그 시기를 놓쳐서 보게 된다. 괜히 호들갑 떨기는 싫고, 그렇다고 재밌다는 데 안보기도 그렇다보니 꼭 시기를 한참 놓쳐서 보게 된다. 물론 프리랜서라는 직업 탓에 제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워서 그런 탓도 있지만, 괜히 덩달아 사람들의 유행에 합류하기도 싫고, 그렇게 덩달아 보기시작하면 꼭 “이번 주 xx화 봤어?! 대박!”이라며 공감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봤어! 완전 대박!” 하면서 같이 호들갑 떨어주는 게 서툴러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그래도 재밌는 걸 놓치긴 싫어서, 비수기 때면 나는 종종 여러 시즌짜리 드라마도 하루 종일 틀어놓곤 한다. 강의도 없고 나갈 일도 없이 집에서 일하는 날이면 그냥 하릴 없이 드라마를 켜놓고는 그 앞에 노트북이며 담요며 커피며 생강차며 과자며 사탕이며 온갖 것들을 부려놓곤 일도 하고 빨래도 개고 괜히 먼지도 닦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이번 방학엔 ‘나의 아저씨’를 하루에 한 편 정도씩 아껴가며 보고 있다. 처음엔 그냥 생각 없이 틀어놓고 있다. 보다보니 묘하게 이선균과 아이유 양쪽 모두에 공감을 하며 보게 되었다. 어렸을 적 빚쟁이에 시달려본 기억이라거나(이건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모르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마저도 이유도 없이 무서워하거나 증오하게 되는 경험이란), 혹은 한 가족의 아들이자 가장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무게라거나.이제 방영한지도 오래인 드라마라 조금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이 드라마가 생각보다 깊고 어두워 조금 놀랐었다.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철없는 척을 통해 감당하고 겪어내고, 때로는 이겨냈던 것과 달리 주인공인 두 남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감내하며 살아왔다는 점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인물들의 철없어 보이는 모습이, 두 사람을 더 극단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보기엔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면의 구조는 동일해 보였다고나 할까.인상적이었던 건 두 사람의 모습 뿐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을 향한 타인의 시선과 말들도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너는 항상 속 깊고 타인을 위하며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지’라는 타인의 무의식적인 기대도, ‘너는 원래부터 질도 안 좋고 태도도 불량하니 앞으로도 그렇겠지’라는 타인의 태도도, 겉보기엔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너는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한다’라는 압력처럼 느껴졌다. 그런 타인의 태도마저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삶의 일부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이기에, 그토록 서로의 속내를 깊게 알아차리며 서로에 대해 알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겐 조금 개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겠지만, 아마 나처럼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하지만 조금 슬픈 건, 두 사람이 깊고 너른 행복을 맞이하지는 못하리라는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아직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해 속단할 수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왠지 두 사람이 끝내 마주하게 될 엔딩이라는 건 기껏해야 평범한 삶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여전히 특별하고 각별해 보이는 건, 둘 모두 타인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환상 없이 서로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의 기분을,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의 색채를 바꿔줄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서로를 향해 드러나는 순간, 기대는 압박으로 바뀌고 관계는 비틀리기 시작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정말로 필요한 건, 누군가 나의 삶을 뒤바꿔 주리라는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닐까.드라마를 통해 사람을, 인생을 배운다는 게 좀 허황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결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종종 우리의 다툼과 불화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나의 너무 높은 기대 탓에 일어나기도 하는 법이니까. 누군가 보기엔 두 사람이 타인에 대한 기대 없이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메마름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배려를 위한 가장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그래서 나는 아직 이 드라마의 끝을 알지 못하지만, 그런 두 사람이기에 적어도 서로를 원망하게 되거나 파국을 맞이하게 되거나 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물론 이건 드라마니까, 너무 큰 기대는 금물이겠다. 작가도 사람일 테니 나도 기대를 좀 내려놔야지.

2023-01-31

‘힘내’ 보다는 ‘힘 빼’

설 연휴가 지나고 남은 건 2023년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다. 이젠 꼼짝없이 새로운 해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한다. 얼마 전까지도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깊어진 주름을 보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촌 동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누군가가 봤을 때 나 역시도 어느 부분이 훌쩍 지나있겠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떤 변명도 불필요해진다. 2월의 문턱 앞에서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서 있다.정말이지 작년은 바빴고 나 자신을 살피기는커녕 방치와 학대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었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지난 몇 년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에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삶을 제대로 운용하고 싶었다. 글을 쓰고 일을 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경험을 탐닉하려는 마음으로 경주마처럼 뛰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도 쉽게 지쳤고 가까운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에도 다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힘들다는 핑계로 눈앞에 놓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다른 것보다 마감 날짜를 넘기는 일이 가장 싫었다. 소설을 쓸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 새벽에 기상해 컴퓨터를 켰고 퇴근 이후에는 쓰러지듯 잠들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은 늘 부스스했고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위경련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응급실 문을 두드리며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물론 무언가를 탓한다면 탓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다기보다는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 않아진 것에 가까웠다. 어떠한 압박과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주변에 떠도는 무수한 언어를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싶었다.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생각한다.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고. 불필요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고. 그러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힘을 빼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습작생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힘 빼’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비문을 조심하라는 말이나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라는 등의 구체적인 조언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힘을 빼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모호했으며 은근히 기분 나쁘기까지 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소설을 쓰는 나를 응원하며 ‘힘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실질적인 조언이었다. 뭔가를 많이 바랄수록, 어떤 일에서 잘하려고 할수록, 글에도 삶에도 계속해서 힘이 들어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억지스럽게 손을 움직이고, 있는 힘껏 세상을 정의 내리려 하면 글도 삶도 이상한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이었다.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아무런 의도도 갖지 않고 찍는 마침표도 존재할까. 나는 뭔가를 간절히 바랐기에 더욱 애를 썼다. 이제 그것은 작년의 나로 남겨두기로 한다. 절대 무의미한 몸짓이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맘껏 달려봤으니 오히려 개운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힘을 빼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수영장에서 그렇다. 발이 닿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그러면 몸은 무거워진다. 팔다리를 허우적댈수록 더욱 가라앉을 뿐이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숨을 쉬다 보면 신기하게도 몸은 물 위로 둥둥 뜨기 마련이다.요가 동작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을 억지로 구부리거나 힘을 주어 어떤 자세를 만들려고 하면 자칫하다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들숨과 날숨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힘을 빼면 자연스럽게 중력의 무게가 느껴지면서 자세가 만들어지는 것이 느껴진다.‘힘내’라는 말보다 ‘힘 빼’라는 말이 듣고 싶은 새해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힘을 주고 태어나 힘을 빼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조한 마음으로 동동거리면 무자비하게 가라앉는다는 사실을 이젠 알고 있으므로. 거대한 배를 만들어야만 세상이라는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맨몸으로도 얼마든지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다. 나만의 속도로 파도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유영하는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언제가 됐든 기쁘게 기다릴 작정이다.

2023-01-31

방이라는 관

“요즘 관 구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시내에 있는 고시원 임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니 이렇게 작은 관에서라도 마음 편히 지내자 마음먹었죠. 믿을지 모르시겠지만 사실 4년 전 제가 지금 가진 돈으로 아파트도 살 수 있었답니다.” (황수아 희곡, ‘가로묘지 주식회사’ 부분)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인 황수아의 ‘가로묘지 주식회사’는 집값 폭등으로 고시원 임대료마저 감당 못하게 된 무주택자들이 관에 세 들어 산다는 내용의 세태 풍자극이다. 미친 주거난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은 관마저 구하기가 어렵다.‘관(棺)’은 육체의 노화, 질병, 불의의 사고, 절망감에 의해 삶에서 죽음으로 떠밀린 인간의 최후 거처다.황수아는 관을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이들의 마지막 ‘방’으로 묘사하며 고시원의 하위 주거 형태로 두는 핍진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사실 그 관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원룸, 옥탑, 반지하, 고시원, 달방에 뚜렷하게 나타난다.그곳들에서 발생한 무수한 고독사들을 떠올리면 1인가구의 좁고 습하고 냄새나는 방은 확실히 관이다.지난해 여름, 폭우에 침수된 서울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일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방이 관이 된 것이다.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기,/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김성규,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던 2004년의 시는 18년 지나 시참(詩讖)이 됐다. 한국사회의 외피는 화려해졌지만, 찬란한 빛은 더 짙은 그늘을 키웠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쓰러졌다. 집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반지하동굴’에 산다. 관 속으로 들어가 뚜껑을 닫는다.침실과 거실과 부엌과 현관의 구별이 없는 방, 좁은 공간에 억지로 문 하나 끼워 넣어 화장실을 겨우 둔 방, 그마저도 없어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방, 집이라고 하기엔 거기 사는 그 자신도 민망해서 ‘방’이라고 부르는 방, 여기 계속 살다간 죽을 것 같은 방, 이미 내가 죽은 방, 사람이 죽어도 사람이 모르는 방, 닦아내고 긁어내고 집게로 건져서 사람이었던 주검을 수습해야 하는 방, 관인지 방인지 모르겠는 방, 아니 관. 그곳이 바로 한국사회의 원룸이다.원룸은 집을 포기하고, 집 비슷한 것을 포기하고, 그나마 집 같은 것을 또 포기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사는 곳이다.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 삼백에 삼십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지하실로 온종일 끌려 다니네/ 이것은 방공호가 아닌가/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아요”(씨 없는 수박 김대중, ‘300/30’)라는 노래에서 무주택자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으로 방을 구하러 다닌다.신월동에서는 옥탑 투어를 하고, 녹번동에서는 지하실 탐사를 한다.고작 “삼백에 삼십”으로는 옥상 연탄창고나 지하 방공호 같은 방 밖에 빌릴 수 없다.“삼백”은 사회초년생이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지닌 전재산이고, “삼십”은 한 달에 지불할 수 있는 최대치의 거주비용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공간은 계급이 된다. 이제는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들에게 ‘임거’(임대아파트 거지)라고 부르는 세상이다.이 계급사회에서 원룸은 가장 비천한 세계다. 브랜드 아파트, 단독주택, 고급 빌라, 역세권 오피스텔이 카스트를 이룬다면, 계급 바깥의 원룸에 사는 장애인, 독거노인, 미혼모, 청년 예술가, 취업 준비생은 불가촉천민들이다.모두 다 소중한 생명이자 존엄 있는 인간, 하나의 개별적 우주이지만,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입장권인 ‘지상의 방 한 칸’이 없어 소외된 자들이다.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사회 진출을 포기한 채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설 연휴에 사람들은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가지만, 이들에게는 돌아갈 집도 떠나갈 집도 없다.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의 틈입을 차단한 그 방들이 부디 관이 되지 않도록, 사회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때다. 복지는 늘 사각지대를 향해야 한다.

2023-01-24

연두가 주는 믿음

기나긴 겨울이다. 겨울의 낮은 짧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면 일부러 짬을 내어 산책을 한다. 귀한 겨울 볕을 맞으며 몸을 움직여보지만 급하게 밀어 넣은 점심 식사 때문인지 속은 더부룩하고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다.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안양천 주변을 따라가며 이런저런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갈 때 쯤, 어느덧 시계는 12시 50분을 가리킨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커피 한 잔을 사서 다시금 자리로 돌아갈 때엔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를 불현듯 검사 받는 듯한 시큰둥한 기분이 더해진다. 그럴 때엔 자연스레 손바닥에 말랑하게 잡히는 책 한권을 떠올린다. 연두색 표지 속 콜리플라워와 와인잔 그리고 아티초크가 그려진, 소설가 한은형 작가님의 ‘오늘도 초록’이란 책이다.‘오늘도 초록’은 한 손으로 들고 읽기 좋은 작은 판형과 자유자재로 잘 구부러지는 부드러운 표지, 모난 곳 없는 둥그런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무광 재질의 얇은 종이는 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 종이를 펄럭일 떄마다 기분 좋은 촉감을 느낄 수 있다. 전체적인 만듦새가 마음에 들어 가방 속에 넣어 다니는 책이지만, 물론 가장 좋은 건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맛있는 글의 내용이다. ‘이 모든 것은 완두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식물의 연두색에 꼼짝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완두콩 때문에 알게 되었다. 슈퍼에서 완두콩을 보면 늘 마음이 급해졌다. 어서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에. 어쩌자고 망사 주머니도 연두색인지… 연두색 망사 틈으로 보이는 완두콩의 꼬투리… 색과 형태가 완벽하다. 이 꼬투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가르고, 벌려, 콩알들이 얼굴이 내미는 순간을 보는 건 도무지 지루하지가 않은 것이다.’ (본문 중에서)‘그리너리 푸드’의 주제로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다보면 금새 배고파진다. 맛의 묘사와 음식의 생김새가 생생하게 묘사되고 전개되어 희미하던 입맛을 깨우고 눈빛을 반짝이게 한다.‘연한 낙지와 함께 먹는 은은한 미나리의 맛’, ‘달고 시큼한 장아찌의 냄새’, ‘말랑하고 순수한 아보카도의 맛’, ‘입 안을 자극하는 포도잎 쌈의 쌉쌀함’이나 ‘입맛을 돋우는 민트와 쿠민의 색’ 등 책에 등장하는 식재료들은 얼핏 보아도 비슷한 연두와 초록색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자신을 초록주의자라 칭하며 값나가는 필레미뇽의 소고기 스테이크보다 함께 곁들어 나오는 구운 야채를 더 좋아하고, 몸과 마음이 초록의 기운에 반응하는 사람이라 설명한다. 초록을 먹지 않고 두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초록과 연두를 대하는 열렬한 예찬은 깊고 풍요로워 단숨에 연두의 세계로 몰입되게 한다.또한 저자는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연두빛의 서양호박인 주키니를 맛있게 먹고 나선 다음날 주키니를 사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이후 때에 따라 주키니에 버터를 넣거나 오일을 넣거나 새우를 넣어 자신의 입맛에 가장 맛있는 레시피를 만들어낸다. 재료의 조화와 조합에 신경을 쏟는 것은 물론, 먹는 시간에 따라 재료를 다르게 넣어 새로운 요리를 구상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낯선 식재료를 더 맛있게 연구하고 요리해 결국 내 입맛에 꼭 맞는 레시피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끌림을 끌어와 나의 것으로 누리어 삶의 애정을 더하는 자세가 무척 근사해 보였다. 저자가 정성스레 내어 놓고 이야기하는 모든 연두와 초록으로 이루어진 음식 외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생한 숨이 방울방울 매달려 부지런히 반짝이는 것 같달까. 봄을 알리는 색이라 불리는 연두는 메마른 겨울을 뚫고 새로운 생명을 틔워 자라난다는 점에서 싱그럽고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지녔다. 또한 노랑과 초록의 중간색에 자리한 연두는 일상 속에서 새싹, 어린이, 자연 등의 색채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정신의 평화를 갖게 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책에서 연두를 발견한 이후로는 이제 막 고개를 드는 연두를 느긋이 바라보게 되었다. 연두가 품은 조용한 평화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다가오는 계절을 기대하게 되는 기분 좋은 믿음을 갖게 한다.회사 옆에 자리한 안양천의 산책로는 물길을 따라 고르게 깔려 있다. 퇴근 시간 이후 러닝을 할 때에 주로 택하는 장소기도 하다. 걷고 달리는 이 땅은 머지않아 새로운 연두의 세계가 펼쳐질 테니, 겨울 내내 쌓아 왔던 습관과 생활에 대한 애정을 착실히 들고선 새로운 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2023-01-24

꼬리 없이 사는 사람들

‘꼬리 자르기’라는 말이 있다. 공동체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 명에게 책임을 지울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꼬리를 자르는 대표적 동물은 도마뱀이다. 이규리의 시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 아무렇지도 않게 / 몸이 몸을 버리지요”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마뱀은 별 쓸모없는 꼬리를 먹이로 내어주고 본체는 그사이에 도망간다. 꼬리는 꿈틀거리며 적을 유인한다. 마치 여전한 생명력이 있다는 듯이. 온전하게 안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일부를 내어준다는 것이 ‘꼬리 자르기’의 핵심이다.인간에겐 꼬리가 없다. 대신 꼬리가 있었다는 흔적은 있다. 꽁무니에 살랑거리는 꼬리가 있었어도 꽤 멋졌을 텐데. 왜 없어졌을까. 인간이 이족보행을 하게 되면서 꼬리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다. 빨리 달리거나 앉을 때 꼬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이젠 쓸모가 없어져 흔적으로 남은 기관. 그런 것이 인간에겐 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 남은 신체 기관들도 모두 유의미하진 않다. 이를테면 사랑니. 뽑아버려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이빨은 유용성은커녕 고통만 안겨주는 기관이다. 맹장이야말로 없어도 되는 대표적인 장기다. 잡식성으로 주식이 변화한 인간에게 식물성 먹이를 분해하는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그러니 지금 인간의 형태가 완전하다고도 할 수 없다. 손가락이 열두 개였다면 더욱 빠르게 컴퓨터 자판을 칠 수 있을 것이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다면 시야가 더욱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당장 내일 새로운 신체 기관이 만들어진다고 한들 당장엔 불편할지 몰라도 금방 적응하게 될 것이다.치열한 생존 경쟁을 통해 발전해온 생명체는 끝끝내 완전무결한 존재가 될 순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인류가 어떤 모양으로 진화하게 될지는 결코 모를 일이다.동물의 꼬리, 그중에서도 강아지의 꼬리는 감정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강아지는 확실한 감정적 동요가 있을 때 꼬리를 움직인다. 기쁘거나 반갑거나 신나거나 화나거나 슬플 때. 움직이는 모양은 기분에 따라 다르다.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흔들 때도 있고 꼿꼿하게 세우기도 하며 축 늘어뜨리기도 한다. 이토록 선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존재라니. 이 얼마나 위험하고도 사랑스럽단 말인가.만약 인간에게도 꼬리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의사소통하는 용도로 쓰인다면, 그러한 신체 기관으로 인해 감정을 결코 속일 수 없게 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진심을 들여다볼 수 있고 진정성을 외치는 정치인의 발화가 우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상대의 꼬리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시선이 되며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언어는 얼마든지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쏟아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통제할 수 없는 꼬리를 붙드는 것보다 거짓말을 내뱉는 것이 훨씬 편안하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의 꼬리가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감정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궁극적인 수단이니까. 꼬리가 없어야만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인간에게 여전히 꼬리가 남아있다면 누군가는 진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으로 ‘꼬리 자르기’를 할지도 모른다.거침없이 자기의 신체를 자르는 도마뱀은 비정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는 숭고한 지점이 있다. 자기 살을 내어주고 심장을 지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자른다. 그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 된다. 문제는 잘려 나간 사람들, 그러니까 불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버려진 사람들이다.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이 유일한 미래인 자들. 혹은 자신이 잘린 꼬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관성적으로 꿈틀거리는 자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건 이런 것이다.단단한 꼬리뼈를 만져본다. 꼬리가 사라진 줄도 모른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당연하게 여기던 내 육체에 진실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잘린 꼬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2023-01-17

어린 어른은 운전을 배운다

사람들은 스무 살이 넘으면 어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운전을 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에서 ‘언어’를 배움으로써 상징계에 진입하듯이, 운전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도로에 진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소리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이제껏 어른이 아니었다는 얘기. 그런데 이렇게까지 ‘고작 운전’을 힘줘 말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도로’ 위의 암묵법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금의 과장이 섞였을 따름이지.조금 별개의 얘기지만, ‘올 해엔 노력하지 않겠다’고 말한지 2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운전을 배우고 있다. 사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나는 주기적으로 파주와 화전에 가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 쯤 걸리고, 퇴근 시간에 막히기라도 했다간 3시간이 걸리는 때도 있다.가뜩이나 차가 많은 한국에서 나까지 차를 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거니와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 온난화 문제에 나까지 힘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껏 차를 끌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건 학생의 치기어린 생각이었고, 막상 사회 초년생이 되어 1년을 살아보니 시간 강사에게 자가용은 필수에 가깝다. 가끔 특강이라도 할라치면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 걸리기 십상이니, 하루가 그냥 슥 지나가는 경우도 많아 시간이 아까울 때도 많았고. 솔직히, 지하철에서 책 읽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도 계속 쓰고 있어야 하고, 겨울에는 롱패딩을 입은 사람이 많아 앉으나 서나 고욕이다.그렇다보니 ‘올 해엔 노력하지 않겠다’는 마인드가 ‘올 해엔 기필코 차를 사리라’로 바뀌고 말았다. 일단 마음먹은 김에 곧장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수업을 들을 때 든 생각은 ‘운전 못 하겠다’.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에 대한 설명과 도로 위에서 좌회전, 우회전 하는 법, 표지판 보는 법, 차에 대한 기초 지식 등등 온갖 것들이 쏟아지는 데 정말 하나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문과-인문대로 이어지는 순수혈통 문과생인데다, 그간 차에 관심도 없었다보니 선생님들이 하는 소리가 무슨 기계공학의 정수에 대한 설명쯤으로 느껴졌다.그렇게 학과 수업을 3시간 듣고, 다행히도 필기시험은 한 번에 합격. 무슨 패기인지 오전에 필기시험을 보는 날 장내 운전 연수를 신청해놔서 바쁘게 면허학원으로 직행해 처음으로 차를 몰았다. 엑셀도 밟아보고 브레이크도 밟아보고 좌회전도 해보고 우회전도 해보고. 옆에 선생님이 앉아있어 마음은 편했지만 머리속으로는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못하겠다. 나 같은 놈은 도로에 풀어놓으면 절대 안 돼.’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이유에는 선생님의 교습 스타일 탓이 크다. 나는 이론을 배우고 그걸 적용하고 해석하는 소위 먹물형 인간인데, 선생님은 자꾸 나보고 ‘감을 익히세요. 외우려고 하지 마세요’ 따위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닌가. 참고로 나 같은 인간은 ‘감’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체계에 대한 이해 없이 무언가를 할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실수할까봐 벌벌 떠는 인간이라 그렇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내 질문에는 ‘감’이라는 마법의 단어만 난사했다. 그리고 그건 도로 연수 때에도 이어졌다. 나는 우회전이 ‘도로 상황에 따라, 다른 차량의 운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진입’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뭐라고? 그냥 상황 봐서 ‘감’으로 하라구요? 제 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제 감을 모르면 어떡해요?그렇게 어찌어찌 연수를 다 마치고, 다행히 시험에도 합격해서 2종 면허를 땄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어떻게 내가 시험을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면허를 따는 것과 실제 자차로 운전하는 건 다른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도 면허를 따면서 느낀 게 있다면, 한국 사회의 운행 방식은 도로 위의 ‘차’의 운행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 이론이나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감’과 ‘상황’을 중시하고, 타인의 상황에 자신을 맞춰서 움직이면서도 급할 땐 ‘빵!’ 하고 클락션 세게 눌러주고 등등. 한국 사회의 도로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한국 사회의 도로 위의 관습이 사회 구석구석에 녹아있는 걸까. 어쩌면 선후 관계는 없는 걸지도. 마침 ‘태계일주’라는 프로그램에서 볼리비아의 교통상황이 나온다. 와. 저긴 더 개판이네. 한국은 양반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한 해의 시작이다.

2023-01-17

지구의 눈물, 팜유

팜유 채취로 서식지가 사라지고 있는 오랑우탄. /언스플래쉬 얼마 전 MBC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는 전현무, 박나래, 이장우의 베트남 여행기가 그려졌다. 세 사람은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해 얼굴이 자주 붓고 기름기가 번들번들한데, 이 공통점을 가지고 그룹 이름을 ‘팜유 라인’으로 지었다. 팜유 라인은 베트남 달랏의 온갖 맛있는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레스토랑부터 길거리 음식까지 장장 스무 시간에 달하는 식사를 했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모인 세 사람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방송에서는 팜유라는 단어가 수백 번 등장했다. ‘팜유즈’, ‘팜유 라인’, ‘팜유 원정대’, ‘팜유 세미나’ 등등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방송이 나간 후 인터넷 검색창과 연예 기사란은 온통 팜유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급격히 팜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 인식을 가졌던 사람들이 팜유에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 팜유는 정감 있고, 유쾌하며, 무해한 것이 됐다. 출연진들과 작가, 피디가 신중했어야 하는 지점이다. 가벼운 웃음의 소재로 쓰였지만, 팜유의 진실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지난 70여 년 동안 오랑우탄 개체수는 지구상에서 전체 80퍼센트 감소했다. 그 결과 보르네오 오랑우탄은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서식지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30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숲 4천 만 헥타르가 사라졌다. 우리나라 면적의 네 배다. 가구, 종이, 선박 제조 등에 쓰이는 목재를 얻기 위해 대규모 벌목이 자행됐다. 벌목보다 더 심각한 건 야자유, 바로 ‘팜유’ 채취다. 식용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쓰는 공산품들 중 식품, 샴푸, 치약, 비누, 화장품 등의 원료명에 팜핵유, 팜올레인유, 팜스테아린이 적혀 있으면 야자유가 함유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보르네오섬에서는 인간이 암컷 오랑우탄을 포획해 화장을 시키고 란제리를 입힌 후 인간 남성들을 고객으로 하는 매춘 학대를 저지르기도 했다.‘나 혼자 산다’는 장수 예능 프로그램이다. 1인 가구 시대에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소박한 일상을 보여주며 공감을 얻던 초기의 취지는 이제 사라지고, 유명인들의 럭셔리 라이프가 전시되거나 친한 연예인들끼리 어울려 노는 친목 과시만 남았다. 그래도 전에는 환경 문제나 사회적 약자의 소외 양상 등 시의성 있는 문제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흥미만 남았다. 시청자들은 ‘나 혼자 잘산다’라든가 ‘너희들끼리 산다’라고 비꼬는 중이다.이번 ‘팜유’ 에피소드는 ‘나 혼자 산다’의 문제와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바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 없음’이야말로 ‘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수십만 명 환경운동가들의 간절함보다, 일상에서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보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이미지 하나가 훨씬 더 파급력이 크다. 팜유는 ‘지구의 눈물’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방금 배달된 장미 한 다발/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설마 이 꽃들이 케냐에서부터 온 것은 아니겠지/ 장미 한 다발은/ 기나긴 탄소 발자국을 남겼다, 주로 고속도로에/ (…) 도시의 사람들은/ 장미 향기에 섞인 휘발유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다/ 한 송이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가 아니라/ 칠에서 십삼 리터의 물이 필요하단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휘발유가 필요하겠지/ (…)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나희덕, ‘장미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부분) 꽃의 아름다움을 잠시 소유하기 위해 인간의 탐욕은 자연을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결국 세계를 황폐하게 한다. 시인은 “오늘은 보이지 않는 탄소 발자국을 따라가 보자”고 제안한다. “한 다발의 장미가 피고 질 때까지” 희생되고 버려지는 것들을 생각해보자고 설득한다. 탄소 발자국을 추적하다 보면 우리가 쓰는 물건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다. 또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삶이 자연과의 촘촘한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함께 잘산다’가 될 수 있다. ‘팜유 라인’ 멤버들은 생각해야 한다. 팜유는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를. 물론 우리도 알아야 한다.

202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