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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등록일 2023-07-11 18:22 게재일 2023-07-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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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주거를 위한 부조리한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시대다. /Pixabay

한국에서 집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가정’이 존재하는 공간이자 육체적·심적 휴식의 공간으로서 바깥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Home의 의미. 다른 하나는 물리적 공간이자 물질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서 거주지 외의 용도 및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서 House의 의미다. 한국어에서 ‘집’은 일상적으로 두 가지의 의미를 맥락에 따라 구분할 뿐, 별도의 구별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보니 우리의 일상에서 ‘집’이란 ‘집’이면서, ‘집’이 아닌 경우들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

예컨대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와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아·청소년기의 한국인은 실질적인 구매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 가까울 확률이 높으므로 ‘집’이란 가정을 위한 공간으로서 Home의 의미가 클 것이고, 청장년기의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실질적 구매의 대상이자 투자의 대상으로서의 House의 의미가 혼재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평론가 이소는 이와 같은 ‘집’의 두 가지 용례를 바탕으로 한국 소설의 경향에 대한 글을 썼다. 여기에서 이소는 한국소설에서 나타나는 ‘집’의 의미를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하는데, 이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House’는 있지만 ‘Home’은 없는 상태’라는 분류다.

얼마 전 학생들과 ‘집’이라는 단어를 써서 한 문단짜리 글을 쓰는 수업을 했다. 본래 목적은 짧은 문장 여러 개로 하나의 문단을 완성하고, 그 문단을 활용해 개요를 짜는 방법을 연습해보는 것이었다. 집이란 무엇인지 간단한 비유를 써서 정의를 내리고, 그와 같은 정의를 내린 까닭에 대해 3문장 정도를 서술하는 것. 내가 놀랐던 건 아이들의 정의가 대개 유사했다는 것이다. ‘집은 잠자는 곳이다’라는 정의. 비유라고 할 수 없는, 단지 기능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인 메마르고 삭막한 정의. 그게 내 수업을 듣는 20대들이 ‘집’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였다.

사실 자취를 하거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등 가정을 떠나 생활하는 학생들에게 ‘집’이란 생각만큼 편한 공간이 아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온 동거인과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다. 거실이나 화장실, 부엌 등을 공유하는 형태의 쉐어 하우스는 그나마 서로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기에 나은 편이지만, 휴식이나 생활을 위한 공간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은 때때로 불쾌의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 화장실이 분리된 원룸형 형태의 고시원이라면 그나마 사정이 낫다 할 수 있겠지만, 가벽에 벽지를 발랐을 뿐인 불법 개조 형태가 대부분인 탓에 타인의 소리와 냄새는 매순간 ‘나’의 공간을 침범한다.

더욱 심난해지는 건 그와 같은 공간들이 단지 대학가 혹은 직장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조리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평 남짓한 공간에 40만원 가까운 월세를 내야 하거나, 4평 남짓한 원룸에 60만원이 넘는 월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마저도 학기 중에는 학생들이 많아 구할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이와 같은 사례가 대학가뿐일까. 쪽방촌으로 눈을 돌리면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화장실을 비롯한 공용공간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거나 난방이나 수도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1평 남짓한 쪽방에, 임대업자들은 30만원 가까운 월세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부조리한 폭리 앞에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학교나 직장 가까이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임대업자의 폭리 앞에서 철저하게 ‘을’일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을 평생의 집이 아닌, 충분한 돈을 모을 때까지 거쳐 가는 ‘주거경로’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쪽방에 거주하는 주거 빈곤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목돈을 구할 수 없고, 당장에 수십만 원의 돈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빈곤 계층의 사람들에게, 월 30만원의 쪽방이란 노숙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청년이라는 이유로,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빈곤계층이라는 이유로 주거에 있어 부조리한 폭리를 방조하고 강요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와 같은 주거 빈곤 계층은 주거비용을 줄이기 위해 잠만 잘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공간을 찾아 헤맨다. ‘집’이 ‘집’일 수 없는 시대, 각각의 이유로 주거를 위한 부조리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내할 수밖에 없는 시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들조차도 자본주의라는 미명하에 용납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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