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빌라왕’ 전세 사기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의 등기부등본을 열람해봤다. 아연실색했다. 집은 가압류된 상태고, 임대인 앞으로 무려 48억9천만 원의 채권이 있었다. 임차인들에게 전세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해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대신 변제한 금액이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물었다. 소유 주택이 170여 채나 된다고 했다. 전세계약이 만료되어도 보증금을 반환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이 계약돼 자꾸 늘어났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명의만 빌려준 ‘바지 임대업자’인 듯했다. 뒤에 전문 사기 세력이 있는, 전형적인 전세 사기 수법이었다.
계약 만료까지 1년도 더 남았지만 보증금을 다 날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대처했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인 친구에게 전세금 반환 소송을 위임했다. 소송 과정에서 임대인은 연락이 두절됐는데, 아마 구속 수감되었거나 잠적해버린 것 같다. 극단적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고 들었다. 부디 그건 아니길 바란다. 어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다. 적게는 수십 채, 많게는 수백 채의 빌라를 보유한 악성 임대인들 중에는 경제력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나 노숙자, 무직자가 많다.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명의를 빌려줬다가 사기범이 된 것이다. 탐욕도 죄고, 무지도 죄라지만 그 사람들 처지도 참 안됐다.
1월부터 진행된 소송은 다섯 달 걸려 지난주에 승소 판결이 났다. 이제 이 집을 강제경매에 넘긴 후 내가 직접 낙찰 받으려 한다. 경매 낙찰까지 또 몇 달이 걸릴 것이고, 낙찰 받은 후에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기존의 전세대출을 갚아야 한다. 아직 복잡한 절차들이 많이 남아 있고, 모든 게 순조롭지만은 않을 테지만 ‘내 집 마련’의 희망을 가져 본다. 내 경우는 그래도 좀 낫다. 집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많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2년만 살 생각이었던 집을 울며 겨자 먹기로 낙찰 받는다.
얼마 전 전세 사기 특별법도 시행이 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되면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겉으로는 활달한 척했지만 사실 이 일로 상반기 내내 골치 아팠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논문을 쓰는 것도, 시와 평론을 발표하는 것도 다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간신히 여름까지 잘 왔다. 다시금 ‘존버’(끝까지 버티는 정신을 뜻하는 신조어)의 위대함을 본다. 어떻게든 버티고 발버둥 쳤더니 살아날 구멍이 생겼다.
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 작용했지만, ‘불행 중 비극’으로, 전세 사기를 당해 스스로 삶을 저버린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화가 난다. 손쓸 새도 없이 집이 이미 경매에 넘어가고, 낙찰자가 나와도 보증금에서 국세, 지방세, 은행 등 선순위 채권을 떼고 나면 피해자가 돌려받는 건 푼돈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건지지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채 거리로 쫓겨나는 경우도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한 피해자들의 경우가 대개 그러하다. 그러니 전세 사기 특별법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임차인들의 전세금을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진작 마련됐어야 한다. 특별법이 시행돼 이제는 임차인의 보증금이 최우선순위로 변제되고, 피해자가 원한다면 주택의 경매를 유예하거나 우선 낙찰 받을 수도 있다. 그밖에도 생계 지원이나 저금리대출 등 여러 피해 보상 대책이 마련이 되었지만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임대인은 돈을 받고 임차인에게 집을 빌려준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임차인은 집을 비우고 임대인은 돈을 돌려준다. 이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이 당연한 상식이 통하지 않을 만큼 대한민국이 후진적인 나라인가? 전세 사기가 판을 치게 된 것은 제도가 미비한 탓이다. 제도에는 허점이 많고, 부동산 업자나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을 만큼 내용이나 용어가 어려워 사기꾼들이 악용하기 좋다. 처벌도 가볍다. 타인의 재산을 갈취해 삶을 망가뜨린 자들이다. 중형에 처하는 게 마땅하다.
며칠 전,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에 가 전세사기피해자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고 왔다. 평일 오전인데도 상담 창구에 긴 줄이 서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센터를 찾는다고 한다.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우스갯말이 있다. “이게 나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