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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등록일 2023-08-15 17:57 게재일 2023-08-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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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과 불안을 저 멀리로 보내고 싶어진다. /언스플래쉬
강박과 불안을 저 멀리로 보내고 싶어진다. /언스플래쉬

태풍 카눈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기도 힘든 강풍이 불었지만 나는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렸다. 우산을 썼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옷이 잔뜩 젖어 버스 가죽 시트에 앉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버스 안에선 실시간으로 태풍으로 인한 피해 뉴스 기사를 읽었다. 안타까웠다. 왜 절망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찾아와 안그래도 고통 속에 머무는 인간의 삶을 휘저어 놓는 걸까. 아직 읽지 못한 피해 기사가 수두룩했지만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태풍의 절정에 다가서는 듯 버스는 바람에 거세게 흔들렸고 차창에 부딪히는 물방울은 소란스러웠으며, 두통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버스 2개를 마저 갈아타고 인천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작은 섬 영종도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 간단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새하얗고 보드라운 흰색 이불을 몸에 덮고선 거센 바람과 빗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바깥과 달리 방 안의 낯선 적막이 온몸을 휘감아 소름이 돋았다. 시계를 보니 대략 한 시 반. 평소 이 시간에는 오후 업무를 다시 해내기 위해 억지로 커피를 들이켜고 있을 시간이었다.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선 안개가 내려 앉아 먹먹히 젖은 바다와 빗소리로 부산스러운 영종도의 풍경에 귀를 기울였다. 현실의 고단함을 이렇게 외면하는 것이 정말 맞는 걸까 싶지만, 어떤 상황은 정면 돌파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인내하는 것에서부터 해결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려보았다.

낯선 공간이 조금씩 익숙해질 때쯤, 집에서부터 챙겨온 김영민 저자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꺼내들었다. 손길이 가는대로 아무 장이나 펼쳐 보았더니 시시포스 신화 이야기로 글이 시작된다.

꾀가 많고 교활한 시시포스는 제우스의 분노를 사 저승에 가게 된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자신의 못된 지혜를 이용해 저승의 신 하데스를 속이고 장수를 누린다. 곧이어 속임수가 발각되었고, 신을 속인 벌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김영민 저자는 이 신화의 이야기를 꺼내오며 ‘시시포스와는 달리 권태를 이기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돌을 아래로 굴린다’고 말한다. 생은 본래 허무하며, 외려 인간은 허무함을 잊기 위해 반복되는 노동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이어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닌 즐기는 노동이 되어야 그나마 노동은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은 신산한 삶을 견디게 하는 레시피다. 슬픔이 닥칠 때는 절망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금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 생각하라’고 말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까. 하지만 생의 허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을 땐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라’는 말이 듣고 싶어진다. 김영민 저자의 말처럼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그가 말하는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허무를 받아들이는 여유와 마음의 탄력을 상기해보는 것이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강박과 불안을 파도 소리에 실어 저 멀리, 도무지 내가 떠올릴 수 없는 곳까지 밀려 보내본다. 하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이게도 나를 괴롭힌 허무와 어떻게 하면 더 잘 지낼 수 있는지, 허무를 어떻게 더 길들이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열렬한 고민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행복해져야 하는가? 일상의 허무를 잊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왔으나 실은 막연한 행복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으로 허무를 대하는 법에 골똘해지기 위해 이곳에 당도한 것임을 깨닫는다.

사방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고 비는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쳤다. 풍경이 조금 더 선명히 보이고 해변가에는 폭죽을 터뜨리는 이들이 보인다. 발코니에 앉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작은 소음을 지켜본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생의 의문들이 싸구려 폭죽처럼 낮게 솟아오르다 힘없이 꺼진다.

그 풍경을 오랫동안 지켜보기 위해 얇은 겉옷을 걸치고 의자를 고쳐 앉았다. 쉼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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