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관크와 인공지능, 그리고 아우라

지지난주 주말 서울 예술의전당 회원 음악회에 다녀왔다. 매년 가을마다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것)의 뿌듯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2년씩 세 번, 6년째 예술의전당 골드회원을 유지 중인데, 회원 음악회 한 번이면 연회비 10만원이 아깝지 않다. 아니 황송할 정도다.거장 정치용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최나경과 협연했다. 1부는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와 메르카단테 ‘플루트 협주곡 e단조’, 2부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으로 꾸려진 무대였다.음반과 유튜브로만 듣던 월드스타 최나경의 연주를 눈앞에서 보니 쥐떼들이 왜 피리 소리 따라가다 연못에 빠져 죽었는지 알겠다. (내가 또 쥐띠다) 메르카단테 협주곡 1악장 플루트 솔로의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음악은 세계를 여럿으로 분리하기도 하고, 이미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합하기도 한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는 걸까, 넋 놓고 들었다. 현악단의 합주 때 악기를 내려놓고 독주를 기다리는 그녀 표정과 몸짓도 다 음악이었다.앙코르로 연주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은 그저 경이로움이었다. 플루트를 모르지만, 플루트로 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다 본 것 같았다. 특히 바이올린의 피치카토 주법을 플루트로 소리 낼 때마다 무슨 마술을 보는 기분이었다.2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곡 자체가 지닌 격정적이고 강렬한 에너지와 그것을 차분하게 통제하고 조율하고 극대화시키는 정치용 지휘자 사이의 상응이 아름다웠다. 2악장은 다른 교향곡들의 4악장 이상으로 세게 치닫고, 4악장은 몇 개의 클라이맥스가 있는지 다 셀 수 없을 정도. “불행한 결혼에 몹시 고민하던 시기의 산물”이라는 곡 해설을 읽고 미혼이지만 이해 완료되었다. 음악 듣고 결혼과 더 멀어진 느낌이랄까.모든 현악기가 피치카토로 연주하는 3악장에서도, 태풍처럼 몰아치는 4악장의 격랑 속에서도, 앙코르곡 슈트라우스 ‘관광열차 폴카’의 경쾌함 가운데서도 단원들 표정은 편안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쾌했다. ‘소통’을 중시한다는 정치용 지휘자의 부드러운 리더십은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연상케 했다. 커튼콜 때 각 파트 단원들을 일일이 일으켜 박수 받게 한 다정함 역시 아름다웠다.단 하나 아쉬운 건 역시 ‘관크’(타인이 영화나 연극 등을 관람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의 신조어. 관객+크리티컬의 줄임말)다. 플루트 협주곡 마지막 3악장이 무르익을 때 내 옆옆 자리서 울려 퍼진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음악을 찾지 못했어요. 주변 소음이 너무 심하지 않은지 확인해주세요” 소리가 크기도 했고, 오래 지속되기까지 했다. 지난 3월 크리스티안 짐머만 내한공연 때도 똑같은 관크가 발생했다고 한다. 본인도 당황했겠지만 한 사람이 느낀 당혹감은 2천명 관객이 빼앗긴 감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발레리를 인용하자면 “음악의 세계와 소음의 세계는 분명히 갈라져 있다. 하나의 소음이 하나의 고립된 사건임에 비해 하나의 음악은 저 혼자서 우주를 만든다. 연주회장에서 한 악기가 떨어 울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의 시작이라는 느낌, 한 세계의 시작을 갖게 된”다. 그런데 “어느 연주회장에서 교향악이 울려 퍼져 위압하는 동안에 만일 의자 하나가 넘어진다든가, 누가 기침을 한다든가, 문이 닫혀진다든가 하는 일이 생긴다면, 당장에 우리는 무언지 모를 파열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 순간 베니스 유리와도 같은 본성의 그 무엇이 깨어지거나 금간 것”이다.완벽하게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인공지능은 음악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음악을 소음으로 인식했다. 내가 어제 연주회장에서 본 것은 기술복제시대의 한계다. 모든 걸 데이터화해 무한 반복하는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 즉 아우라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날 콘서트홀에 울려 퍼진 인공지능의 음성에도 최나경의 아우라는, 음악의 한 우주는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음악이 이겼다. 인간이 기술을 이겼다.연주회가 끝나고,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린 음악당 광장을 걸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좋았다. 멀리 있는 것이 잠시 가까이 온 그 느낌, 아우라였다.

2022-10-04

돈쭐내드립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자극하는 짜장면. 내가 사는 동네에 ‘복무춘’이라는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나는 매일 그 집 앞을 지나간다. 춘장 볶는 냄새, 양파와 돼지고기가 커다란 웍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 달콤새콤한 탕수육 소스 향기, 윤기가 반들반들한 짜장면과 얼큰해 보이는 짬뽕… 시각과 후각, 청각을 모두 사로잡아 유혹하는데, 미치겠다. 다른 음식들도 침샘을 자극하지만 짜장면만큼 강력하진 않다. 짜장면은 내 소울 푸드다.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계산하려는데,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한다. 아주머니께서 그냥 다음에 갖다 달라신다. 아니, 요즘 어떤 세상인데. 금방 은행 들러 현금 뽑아 갖다 드렸다.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오자 옛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어릴 때 동네에 영빈관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집이었다. ‘아빠 친구 식당이니까 짜장면 한 그릇쯤 그냥 주겠지’ 싶어서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친구랑 그 집엘 가 “저 가방공장 아들인데요” 했더니 정말 공짜로 먹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랬다. 하루는 친구들 잔뜩 데리고 가 “나만 믿어” 큰소리치고 짜장면 한 그릇씩 먹였다. 어깨가 으쓱했다.이제 와 기억하니 내가 “가방공장 아들”이라고 했을 때 주인 내외분은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누구라고?” 한참 골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같다’가 아니라 ‘다’, 확실하다. 그 시절 동네엔 영빈관 말고도 신흥원, 양자강 등 다른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 엄마가 다른 집과 착각했거나 영빈관 주인께서 아버지와 친우관계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맹랑한 소년의 터무니없는 공짜 주문이었지만, 내가 올 때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데리고 오는 날에도 “곱빼기로 줄까”, “밥도 줄까”, “더 먹어라” 하셨다. 자식 같아 귀엽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정이 있던 시절이었다.요즘 온라인에서 ‘돈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돈’과 ‘혼쭐’의 합성어인데,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의미다. 결식아동이나 독거노인들을 돕는 등 남몰래 선행을 해온 사실이 알려지거나 정직한 양심으로 오랜 세월 장사했음에도 건물주의 갑질 등 횡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른바 ‘착한 가게’들을 찾아가서 매상을 잔뜩 올려주는 게 ‘돈쭐’이다.한 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떼 쓰는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가진 돈 전부인 5천원을 꼭 쥔 채 치킨집 앞을 서성였다. 장사가 안 돼 가게 앞에 나와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던 치킨집 사장님은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5천원어치만 먹을 수 있냐고 묻는 형제에게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치킨을 푸짐하게 내줬다. 코로나로 매출이 반토막 나 월세마저 밀렸지만, 돈은 받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알사탕을 쥐어줘 보냈다. 그 후로 초등학생 동생은 몇 번 더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미담은 고등학생인 형이 치킨집 본사로 편지를 보내 알려지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연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가게 상호와 위치를 공유해 그야말로 잔뜩 ‘돈쭐’을 내줬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수년째 지방 어딘가에, 엄마는 식당에, 포장지 공장에, 인력사무소에. 그래서 나는 학교 마치면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 폐지 줍고, 혼자 사당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 던지고 공 차고, 혼자 철가방 들고 분식집 오토바이 배달하고 그랬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고 어디서 싸우다 두드려 맞고 그랬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새벽길에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 혼자 기도했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해달라고.이젠 그 비틀거리던 날들도 다 추억이 됐지만, 짜장면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향기롭다. IMF 사태로 아버지 가방공장 망하고, 얼마 안 가 영빈관도 없어졌다. 기억난다. 춘장 볶는 냄새가 달큼했던, 사진관 맞은편 속옷가게 건물 그 지하 식당. 엄마가 돈 빌렸다는 계란집을 피해서 일부러 빙 돌아 숨어 들어가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이 있던 그 중국집. 지금도 어디선가 장사하고 계시다면, 그분들을 찾아가 돈쭐을 내드리고 싶다.

2022-09-20

가을비와 감자수프

가을비가 내린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비릿한 물의 냄새가 난다. 올해는 비와 관련된 사고가 많았으므로 젖은 아스팔트나 짙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그저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한 곳에 오래 맺혀 있는 장면을 응시한다. 가늘고, 연약하고, 지나치게 투명한 비. 세상 위로 두터운 솜이불이 덮인 듯 침울하고 잠잠하다.변화하는 계절에 앞서 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일이 있다. 첫째는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에 외풍 새지 않도록 창문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PVC 재질의 얇은 투명막을 창문 표면에 붙이고, 틈 사이사이엔 ‘뽁뽁이’라 부르는 롤에어캡을 촘촘히 두른다. 그리고 지난 봄 한 쪽에 잘 개켜두었던 두꺼운 천을 가져와서 그 위를 덮는다. 그럼 투명막과 뽁뽁이가 가려져서 훨씬 보기 좋다.간단 보수가 끝났다면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을 꺼낸다. 세탁해야 하는 옷과 그만 버려야 하는 옷들을 분류한다. 지나치게 상태가 좋은 건 중고 장터에 팔기도 하고, 영 상태가 엉망인건 버리기도 한다.그렇게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금방 배고파진다. 가을 더위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금새 열이 오르고 금방 식는다.근사한 식사를 차리기엔 미처 체력이 도와주지 않고, 그렇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엔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감자를 얇게 썰어 버터와 우유를 넣고 푹 끓여내는 감자 수프다. 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의 맛이 어우러져 단짠딴짠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다 따스한 목넘김이 좋은 요리다.재료 준비는 간단하다. 버터 한 두어 조각, 양파, 감자, 우유, 크림, 체다 치즈 정도만 있으면 된다. 중간 크기의 감자 2-3개를 찬 물에 잘 씻은 다음 얇게 썬다. 한손에 단단하게 잡히는 감자의 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찬 물에 부드럽게 흘려 흙탕물을 씻겨 낼 때의 기분이 좋다.짙은 갈색의 껍질을 벗겨내 하얗고 미끌미끌한 감자의 속을 드러내는 과정 또한 케케묵은 반복의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재료 준비가 다 됐다면 준비한 냄비에 버터를 넣고 녹힌 뒤 양파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양파의 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썰어둔 감자와 종이컵 기준 물 2컵을 넣고 10분 정도 익힌다. 감자가 쉽게 으깨질 정도로 익었다면 우유 2컵 반과 생크림 2컵을 넣는다.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유’와 ‘생크림’이다. 우유나 크림 대신 물을 넣으면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감칠맛이 줄어든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뒤에 끓인 감자를 믹서기에 넣어 간다.나는 스프에 감자가 어느 정도 씹히는 걸 좋아해서 제형을 봐가며 적당히 갈아준다. 간 감자 수프를 다시 냄비에 담고 모짜렐라 치즈 2장을 넣어 2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후추나 파슬리를 뿌려 먹거나,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렇게 만든 감자수프는 마트에서 파는 수프 팩과는 또 다른 맛이다.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들어 먹는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게다가 보글보글 수프가 끓을 때의 소리와 냄새는 백 마디의 여러 말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감자 수프가 그릇에 담긴 모양새는 순하고도 무해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가을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계절이다.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으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럼 여름 내내 멈추어 있던 주방을 다시금 닦고 빛내어 윤택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된달까.그간 소음으로 느껴지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조금씩 새곤 했던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 인상 찌푸려졌던 뜨거운 불이 이제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구비해 두는 가을 다람쥐처럼, 생활의 애정과 부지런함을 품고선 가을의 한복판으로 나서 본다.

2022-09-20

88년, 서울

영화 ‘서울 대작전’(감독 문현성)은 80년대 후반의 서울을 배경으로 올드카의 향연이 눈에 띠는 영화이다. 쏘나타, 포니 픽업, 르망, 프라이드, 스텔라, 그랜저, 포터, 프레스토, 베스타, 코란도 등 다양한 올드카들이 멋지게 튜닝된 모습으로 서울 공도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간의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재미라 할 만 하다.하지만 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 영화가 ‘88년의 서울’을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 모습은 그간의 작품들에서 그려진 ‘현실감 있는 서울’의 모습과는 다르다. CG를 통해 구현된 서울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느낌에 가까우며, 이는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80년대를 재현해내는 방식과 닮아있다. 더불어 극의 초반에 자신의 차를 압류당하고 빌린 차를 튜닝해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플롯의 구성은 최근의 카 체이싱 영화 뿐만 아니라 ‘니드 포 스피드’와 같은 게임 속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채롭다.하지만 이는 ‘서울 대작전’이라는 영화가 80년대의 서울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서울의 모습은 촌스러움과 ‘힙’한 느낌이 한껏 과장된 채 서로 공존하는 문화적 혼종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은 재현의 실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작품의 실패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진단이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서울 바이브”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자. 그때 그 시절과는 맞지 않는 ‘바이브’라는 단어는, 이들이 원하는 바가 충실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자신들의 리듬으로 재구성된 문화적 구성물임을 선언한다. 관객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부터 거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영화의 미학적 지향이 그 시절을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발칙하다고 할 만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제멋대로 비틀고 찢어 조합했을 뿐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간 레트로를 지향해온 다방면의 문화 컨텐츠가 자꾸만 놓치고 마는 과거의 요소를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노력한다. 예컨대, 그간의 레트로를 표방하는 컨텐츠들이 당대의 문화적 요소를 조망하면서 의도적으로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흐린 눈으로 지나쳐간 것과 달리, ‘서울 대작전’은 88년 서울의 뒷모습을 영화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88올림픽의 재개발로 집이 사라진 철거민들의 모습과 그 위에 나붙은 세계화, 축제, 올림픽, 발전과 같은 표어들. 독재 정권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인물들의 모습. 깡패보다 악랄한 정권의 부역자들과 이들을 스쳐가듯 날아가는 검게 그을린 흰 비둘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그와 같은 부분적 요소들을 거쳐 다시 영화를 바라보자면, 이 영화가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결 뚜렷해진다. 그것은 과거를 재현하고 곱씹으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재구성된 문화적 혼종성의 공간을 통해 이들이 욕망하는 바는 관습과 관행으로 물든 한국적 정치경제적 체질과의 단절이다. 이는 영화의 플롯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 정권과의 단절을 원하는 신 정권과도 단절하길 원한다. 예컨대 이들에게 88년 서울이란 여전히 독재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지 못한 채 ‘새로움’과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썼을 뿐인 구시대에 다름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88년의 서울’이라는 상징적 시공간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패스티쉬의 방식으로 묘사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레트로’를 지향하고 표방하는 문화 컨텐츠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위험성이 거세되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향락의 대상으로 전락한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내재된 정치경제적 불안의 요소들마저 새로운 감각을 통해 문화적으로 재현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서울 대작전’이 실패하는 바가 있다면, 그와 같은 재현이 보다 미학적이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학적 실패는 영화 전체를 퇴행적 좌파의 꿈으로 읽어낼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기도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 그 시절을 얼마나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이 던지는 메시지란 “그땐 좋았었지”같은 싸구려 노스텔지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란 “그리하여 우리에게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2022-09-13

낭만과 실용 사이

아이폰의 새로운 시리즈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괜스레 통장 잔고를 확인해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쓰던 핸드폰의 속도가 어쩐지 급속도로 느려진 것만 같다. 카메라 화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건 느낌에, 그립감도 만족스럽지 않고, 액정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용량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투정을 늘어놓게 된다. 아이폰 시리즈에 추가된 기능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유하기만 해도 금방 편리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내가 얼마나 많은 기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헤아려본다.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펜슬, 에어팟과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폰, 초경량 노트북…… 요리하다가 ‘시리야, 8분 타이머’하고 외치면 정확한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펜과 노트는 물론이거니와 지갑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이런저런 기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다 보면 문득 아, 얼마나 편안한 세상인가, 하고 감탄하게 된다.스마트해져 가는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소비하게 되는 것들도 있다. 애플워치를 사고 싶은 이유는 친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터치 한 번으로 집 안의 모든 것이 제어된다는 리모컨에 눈독 들이는 것은 인터넷에서 마주친 광고 때문이다. 많은 물건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발 빠르게 주시하지 않으면 늦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도 안 되게 편리하다’는 추천에 구입한 로봇청소기에는 뽀얀 먼지가 내려앉았고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토스터는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이 모든 소비가 정말 나의 의지는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작년 12월, 나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동네로 이사 왔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층 빌라들로 이루어진 단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개성 강한 맛집과 카페들이 넘친다는 것도 좋았다. 커다란 마트나 병원처럼 편리에 의한 공간은 부족하지만 산책할 수 있는 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 집이 꼭대기 층이라는 것이었다. 승강기가 없는 건물의 4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가게 되면 숨이 가빠오고 거기다가 손에 든 짐이라도 많은 날엔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훌륭한 발명품인지 여실히 깨닫는 요즘이다.재밌는 점은 승강기가 버젓이 존재하는 건물에서도 사람들은 일부러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건강상의 목적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를 사용하여 걷는 감각을 느끼고자 할 때가 있다. 온갖 단점이 넘쳐나는 복층 구조가 ‘자취생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자명하다.인간은 실용적인 것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 ‘밤늦은 항구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는 마음이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 안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상품보다 다음날 시들어버리고 마는 꽃 한 송이가 주는 설렘도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 눈물 흘리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 때론 우리 삶을 지탱하는 놀라운 힘이 될 때가 있다.물론 인간은 낭만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낭만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것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예상치 못한 부조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이며 책임보다 무책임의 영역에 더욱 가깝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만나게 되는 직장인의 무거운 발걸음에서 낭만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날 아침 출근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너무 싫은 사람마저도 사랑해버리겠다는 포부를 외치는 사람은 상사의 무차별적인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말단 직원이 아닐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치면 낭만이라는 단어는 허무하게 휘발되고 만다. 먹고 사는 일은 낭만보다는 실용에 무게를 더 싣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때때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쉽다. 세상은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답답한 곳으로 느껴진다. 모든 것을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는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고뇌할 수밖에 없다.그러니까 살아간다는 건 낭만과 실용, 이 두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타협하면서도 허상에 가까운 관념을 꿈꾸기 위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아무렇게나 소비하는 것.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낭만과 실용을 오가며 고민하는 것 자체가 감상적 태도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폰과 꽃 한 송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늘을 지나고 조금 더 선명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내일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보기로 한다.

2022-09-13

폭력을 특별하게 하기

군 복무 당시 후임병들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일삼은 20대 해병대 예비역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해병대 제1사단에서 군 복무를 한 그는 후임병 3명을 폭행하고 상해를 가했는데, 횟수만 200여회에 달하고, 성고문도 일삼았다.재판 과정에서 “후임병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랬다며 혐의를 인정했고, 이에 재판부도 “군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며 꾸짖었다. 하지만 “피고인 본인도 후임병 시절 상급자로부터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사건 책임은 피고인에게만 돌리기 어렵고, 상급자들에게 군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드라마 ‘D.P.’는 군대 내 가혹행위와 성폭력, 온갖 부조리함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남성 시청자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 드라마에서 조석봉 일병은 폭력의 피해자다. 입대 전 순박한 미술학원 선생님이었던 그는 선임들의 가혹행위에 시달리면서 점차 폭력을 학습한다.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폭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부당한 힘에 동조하는 것, 그것이 양심과 정의에 반하는 일이라도 구조에 편입하는 것만이 폭력의 피해자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다.조석봉은 후임 병사들을 집합시켜 얼차려를 준다. 그러자 이등병 중 고참인 안준호 이병이 만류한다. 폭력의 대물림을 끊자는 안 이병의 말에 조석봉이 답한다.“네가 뭘 얼마나 맞았다고. 디피라서 부대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조석봉의 대사는 군대의 위계질서, 나아가 폭력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구동되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군대에서 남성들은 함께 구타당하면서 공동체의 유대감을 획득한다.“맞아야 정신차린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려면, 그 자신이 먼저 충분히 맞아야 한다. 군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는 통과의례 성격을 띤다. ‘마음의 편지’를 쓰거나 탈영을 해서 학대를 회피하는 것은 낙오자가 되는 일이다. 맞아야 때릴 수 있다. 폭력을 유지시키는 메커니즘이란 결국 ‘폭력을 특별하게 하기’다.얼마 전 국방부의 홍보 영상이 논란을 일으켰다. 문제가 된 건 “군대라도 다녀와야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이야기하지”라는 대사다.군대에 다녀오지 않으면, 혹은 군대를 갔다 하더라도 ‘제대로’ 군 생활을 못하면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통념이기도 하다. 한국 남자들은 어릴 적부터 ‘용인된 폭력’을 배운다. 동생이 두드려 맞고 오면 보복해줘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자 친구를 지켜야 한다. 이때 폭력은 정당화된다. 보복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쪼다’가 된다.군대는 ‘보복할 수 있는 남성’, ‘지킬 수 있는 사나이’를 양성하는 곳이다. ‘적’을 응징하는 합법적 폭력을 체화한 ‘전사’를 길러내기 위해 ‘순수한 폭력’이 권장된다. 김현은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서 “순수하고 합법적인 폭력의 초월성은 나쁜 폭력의 내재성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군대는 때때로 불순하고 비합법적인 폭력을 순수하고 합법적인 폭력으로 만들면서 초월성을 부여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초월적 폭력의 피해자로 남지 않으려면 방관자, 가해자, 투사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데, 가장 쉬운 게 가해자 되기다. 조석봉은 가해자가 되는 쪽을 택했으나 가해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채 투사로 전환한다. 부대를 탈영해 전역한 선임을 찾아가 복수하지만, 투쟁의 결말은 비참한 총기자살로 맺어진다. 폭력의 대물림에서 이탈하고, 폭력의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 몸부림치며 저항했지만, 결국 스스로를 가장 끔찍한 폭력의 과녁으로 만들며 죽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속죄양은 공동체를 통합시킨다. “상호적 폭력에서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라는 김현의 말을 상기해본다. 상급자들의 성폭력과 피해 사실을 은폐하는 공군 내부의 거대한 부조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예람 중사를 비롯해 군대에서 남성에게 학대당한 여성들의 사례를 추가하자면, 군대라는 집단의 특수성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중심의 젠더 권력으로 확장된다. 이 남성중심의 젠더 권력, 페니스 파시즘이 속죄양을 도륙하는 섬뜩한 제의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故 변희수 하사에게 쏟아진 댓글의 십자포화, 일인에 대한 그 만인의 폭력은 참으로 잔혹하지 않았나.

2022-09-06

최소한의 일만 하고 살기?

여러 군데 회사 면접을 보러 다니다 보면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야근에 관련된 질문이다. 야근이 종종 있을 텐데 해낼 수 있는지, 본인 업무 말고 추가 업무가 주어진다면 잘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사실 나는 이전에 이런 질문에 “저는 퇴근 이후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일과 쉼이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할 때에 일을 더 열심히 잘 하는 것 같다”라는 답변을 한 이력이 있다. 당연히 면접관의 마음에 들었을 리 없다. 분명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면접관의 인상이 급격히 찌푸려지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최근 미국 청년 세대에선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신조어로 떠오르고 있다. ‘조용한 사직’은 실제로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 범위 외에 희생은 거부하겠다는 뜻으로, 회사에선 나에게 주어진 일만 행하고 퇴근 후엔 회사 바깥에서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를 뜻한다.‘조용한 사직’의 시작은 미국 20대 엔지니어 자이들플린의 틱톡 계정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17초 분량의 영상에선 ‘주어진 일 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만두겠다.’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하는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자이들플린은 ‘조용한 사직’이란 업무 시간 내 최선을 다해 일을 한 다음, 근무 시간 이외에는 일과 다른 본인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며 강조한다. 위 동영상은 340만회라는 어마어마한 조회수를 기록하였고, 각종 SNS에선 #조용한 사직이 달린 헤시태그 게시글이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청년 세대 사이에서 ‘조용한 사직’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생겨났다. 아리아나 허핑턴 스라이브글로벌 CEO는 자신의 SNS에 “조용한 사직은 단지 일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만두는 것”이라며 일침을 가했고, 캐나다 억만장자라 알려진 케빈 오리어리는 “원하면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공하는 방법”이라며 ‘조용한 사직’을 추구하는 청년 세대를 비판한 바 있다.돌이켜 나는 왜 전 직장을 그만두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사직이유서엔 건강상의 이유라고 모호하게 써내려갔지만, 사실 목적 없이 습관처럼 행해지는 야근 때문이었다. 나는 1년도 안 된 신입이었고 내가 맡은 업무는 강도가 세지 않은 단순 업무에 불과했다. 굳이 야근을 해야만 끝낼 수 있는 업무가 전혀 아니었지만, 그 시간까지 자리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 인정받는 분위기가 존재했고 이윽고 야근이 정말 당연시하게 되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상사의 피드백을 기다리기 위해 2시간 내내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고, 늦은 시간 귀가길 마저 업무 연락에 답하기 위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휴대폰 진동이 끊이질 않으니 잠은 또 얼마나 설쳤는지. 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경험이라던가, 일의 노하우를 배운다거나, 성취감이 따랐다면 그리 쉽게 퇴사를 외치진 않았을 것이다.‘조용한 사직’을 두고 세대 간 주장이 엇갈리지만, 사실 조용한 사직을 추구하는 것은 그저 개인의 취향에 가깝다. 세대를 떠나 일과 승진, 급여를 중요시하게 생각한다면 본인의 개인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회사에 희생하며 기꺼이 일을 배울 것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해내며 에너지를 조절하고, 회사 이후의 삶에 힘을 쏟고 취미를 즐기고 자기계발에 몰두할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고 선택의 문제이지 굳이 한 세대를 꼬집어 무날카롭게 비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사실 야근이 당연시하게 행해지는 한국 사회에서 ‘조용한 사직’을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개인에게 주어진 업무는 1인분이 아닌 2-3인분의 일이라 내게 주어진 것만 해도 야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실 난 야근은 얼마든지 해도 된다. 그저 나의 업무 범위 이상으로 일할 때 승진이나 급여 보상 등의 혜택이 따라왔으면 한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과 통제권 그리고 적절한 보상과 체계라는 경험이 따라온다면 그 누구도 발 벗고 나서서 회사에 ‘희생’하지 않을까. ‘조용한 사직’을 생각하다보면 조금 씁쓸해진다.

2022-09-06

빚내서 집 사라던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부총리가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고 대놓고 말하던 시절이. 그것도 다음 해의 경제부양정책에 대한 발표에서 말이다.그 무렵 많은 이들이 은행 대출을 끼고 집을 샀다. 매매가와 전세가가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자 본격적인 갭투자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미국이 점진적으로 완화 기조로부터 긴축 기조로 전환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우리에게 미국의 금리 인상도 견뎌낼 힘이 있다며, “빚을 줄일 수 없다면 가계소득을 더 늘리면 된다”는 독특한 성장론을 설파하기까지 했다. 그게 고작 7년 전이다.그 무렵 그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한겨울이나 다름없는데 각종 규제로 인해 여름옷을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규제 완화의 시급성을 설파했었다. 그 이후 정부는 LTV, DTI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고, 같은 해 9월에는 부동산 종합 대책을 통해 건설사가 보다 쉽게 아파트를 짓고 팔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부동산 시장에는 무수히 많은 돈이 흘러갔고, 거래가 활성화되었으며, 아파트에서부터 주상복합, 빌라, 오피스텔, 대지 등 온갖 종류의 부동산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기만 하면 가격이 오르는 마법 같은 부동산 덕분에, 시드도 없는 3~40대 직장인들조차 어떻게든 돈을 빌려보려 은행을 찾아가던 시절이었다.그렇게 부동산은 미친 듯이 가격이 올랐다. 집값은 거품에 불과하다고, 집값은 언제고 곧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 믿었던 이들에게 집은 이제 영원히 가질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집을 샀어야 했다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라도 집을 샀어야만 했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많다. 하지만 소위 영끌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지금 상황이 마냥 순조롭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점차 얼어붙어가는 세계 금융 시장의 여파로, 한국의 금리도 점점 더 오를 것이 전망되는 가운데 부동산 시장마저 점차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일각의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의 부동산 가격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해 물건을 던지는 사람의 가격으로 평준화될 것이라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20억대의 프리미엄 아파트라 할지라도, 대출이자를 견디지 못한 누군가 급매를 내놓는 순간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고 말 것이라는 소리다.그 무렵 증가한 가계 빚은 2015년과 2016년만을 합쳐도 무려 250조원이 넘는다. 그렇게 부양된 부동산 정책 속에서, 실제로 수혜를 입은 사람들은 사실상 강남 3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부동산을 구매한 사람들은 사정이 낫지만, 2020년대 들어 집을 구매한 사람의 입장에선 부동산 폭락이 곧 파산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빚을 더 늘려서라도 부동산을 부양해 달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 시키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무작정 부동산 시장을 살리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상품의 가격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더불어 내가 부동산과 관련된 전공자도, 경제학 전공자도 아니니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와 같은 시장의 분위기가 정상이냐는 의문이다. 주택 구매로 인한 혜택은 다주택 보유가 가능한, 그러면서도 금리 인상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이미 IMF 직후 어떻게 부동산과 금융 흐름이 경제적 부유층에게 향해 가는지를 경험한 바 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최근의 부동산 시장의 흐름은 흡사 코인 시장이나 주식 시장의 수축과 유사해 보인다. 예컨대, 부동산 불패라는 한국의 신화는 이미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상향 만을 반복해오던 부동산 시장 역시 상품의 논리를 따르는 시장이었다는 것이고, 신화라는 말이 그렇듯 ‘부동산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 역시 믿음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부동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이상한 믿음과 신념의 시장에서 정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트렌드를 쫒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그러나 확실한 건, 그렇게 얻어낸 금융소득이 무로부터 창조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주식 시장이 그러하고 코인 시장이 그러하듯이, 부동산 시장에서의 경제적 이득 역시 무로부터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해, 내지는 다른 시장에서의 자본의 이동을 전제한다. 부동산 시장에 더 많은 돈이 몰린다는 건, 곧 누군가 손해를 보거나 다른 시장에서 활용되어야 할 자본의 규모가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다소의 비약을 행한다면, 지금의 한국 경제는 부동산 시장이 말려죽이고 있는 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022-08-30

척하지 않는 척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언스플래쉬 솔직한 사람을 동경한다. 떠오르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럽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동안 타인에게 좌지우지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발 딛고 서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점철된 사람을 만나면 어떤 면에서는 놀랍기도 하다. 내면에 침잠해있는 생각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여도 거리낄 것 없다는 태도, 거기에서 솔직함이 시작되는 것이니까.나는 나 자신을 꾸며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과거형으로 쓰자니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가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꽤나 괴로워했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보단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들에 집착했고, 그런 것들이 내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준다고 믿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그것은 취향에 관한 고민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색이라던가 흥미롭게 읽은 책, 물건을 선택할 때는 무엇을 중점으로 보는지, 즐겨 듣는 음악이나 최근에 관심을 두는 사회적 이슈는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수많은 요소는 한없이 난잡했으며 주류도 비주류도 아닌 애매한 방향에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 것은 얼마나 싫어하는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손을 뻗어 직접 선택하는 무언가가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왜 이런 것을 좋아해?’, ‘너는 왜 이런 사람이랑 어울려?’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의 무례함에 화가 나는 것보다 오히려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허구의 인물과 상황을 내어놓으면서 나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진실한 이야기를 쓰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는 지점에 매료된 것이다. 등장인물의 발화는 내 것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것이었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나의 문장을 완벽하게 장악한다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역할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고 나머지의 영역은 어떤 미지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우연적 사건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물론 작품을 내어놓는 일은 또 다른 지점에서의 부끄러움을 야기했다. 특히 ‘작가로서의 나’는 정말이지 못 봐줄 정도로 한심했다. 어린 시절 내가 상상했던 작가는 좀 더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부족함이 차고도 넘쳤으므로 몸집을 부풀려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미진함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거리낌 없는 이들을 마주하노라면 나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러한 발화를 하기 위해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야, 내 안에는 이렇게나 께름칙한 구석이 많아. 꺼내고 나면 개운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욱 엉클어졌다. 내가 가진 최소한의 존엄이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건 솔직한 게 아니었다. 솔직한 척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십대는 이러한 고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신랄하게 살아가고 싶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연속.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치열하게 궁리해왔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 속에 위치한 나 자신을 본다. 낮은 조도 속에서 잔잔한 음악을 듣는 시간이 좋다. 단맛이 나는 음료보다는 쌉쌀한 커피가 더 취향이고 왁자지껄한 공간보다 방 안에 고요하게 앉아 사색에 잠길 때 온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야 조금씩 알 것 같은 내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진다.솔직한 척, 대단한 척,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척했던 나는 이제 지난 일이 되었다. 그때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지만 어쩌면 나는 지금 ‘척하지 않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찾아올 때도 있다. 이전도 지금도 나는 늘 서툴다. 나를 가장 모르고 있는 사람이 나인 것만 같다. 이 어쩔 수 없음 안에서 매일같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가다듬는다. 그러다 보면 훗날에는 지금의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형태의 내 모습을 갖게 될 것이고 그 어떤 것보다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고 위안하기로 한다.

2022-08-30

건강하게 마주보기

최근 SNS애서 ‘프루아나족’이 심상찮게 보인다. 10~20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프루아나는 프로(Pro)라는 뜻을 지닌 ‘찬성’과 거식증을 뜻하는 애너렉시아(Anorexia)의 합성어이다. 지나치게 마른 몸을 추구하고 집착하며 거식증에 걸리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루에 500칼로리 섭취하지 않기, 먹고 토하기, 나프탈렌 같은 위험 물질을 혀 위에 올리며 식욕을 억제할 정도로 극단적인 행위를 택하기도 한다.SNS에서 프로아나를 검색하면 키 160cm에 몸무게 35kg 유지하는 팁, 물 단식 하는 법 등의 게시글이 주로 보인다. 이들은 날씬한 몸을 넘어서서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사진을 올리며 마른 몸매가 되기 위한 팁을 공유한다.사실 나도 청소년기부터 20대 초반까지 약 5년 간 식이장애를 앓았다. 밥 한 숟가락, 반찬 몇 젓가락, 방울토마토의 개수를 세며 칼로리 계산에 집착하거나 또는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불안해서 무작정 굶는 방법을 택하는 때도 있었다. 절식을 택하며 엇나간 성취감과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쯤 불현듯 통제할 수 없는 식욕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과자 5봉지를 해치우곤 했고, 남은 봉지 앞에선 세상이 무너질 듯한 죄책감을 겪기도 했다. 24살 이후론 먹고 싶은 것을 적절히 먹고 즐기는 방법도 알게 되었지만 사실 지금도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에선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음식 앞에선 왜 자꾸만 작고 초라해지는 걸까. 책 ‘또, 먹어버렸습니다’의 김윤아 저자는 식이장애 전문 상담사로, 과거 6년 동안 식이장애를 겪었다. 폭식과 절식의 반복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저자는 식이장애란 ‘다이어트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이라 칭하며, 우선 마음이 자신을 봐달라고 외치는 신호를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먹는 행위는 가장 빠르고 쉽게 결핍과 불안을 채워준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쾌락을 쫓다보면 문제가 된다. 먹는 즐거움에도 내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폭식증의 경우 음식은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낮에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맵거나 짠 자극적인 음식을 먹다보면 내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거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도피성 회피는 잘못 발현되어 거식이나 폭식, 식이 장애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먹는 행위는 큰 기쁨을 빠르고 쉽게 가져다주지만, 이는 가장 단순하게 불안을 옆으로 잠시 치워두는 행위임을 기억해야 한다.저자는 우선 불안을 마주하여 ‘불안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금 불안을 느끼고 음식으로 도피하더라도,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받아들인 뒤에 조금 도피하는 것과 자신이 불안한지도 모른 상태에서 잘못된 굴레에 빠져드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콕 집어 말한다. 정확한 불안을 알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을 정면 돌파할 수 있다.다이어트는 장기적인 숙제다. 단순히 뚱뚱한 몸매에서 불편을 느껴 무작정 시작하면 얼마 못가 금세 무너지고 만다. 내가 왜 체중감량을 하려고 하는지, 나에 대해 잘 살펴보면 마음 깊은 곳에 허기나 불안, 우울이나 스트레스 또는 인정 욕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식이 장애는 몸의 건강도 망치지만 인관관계에 있어서도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의 기력이 없는데다,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를 먹고 마셔야 하니 자연스레 약속 자리가 불편하고 어려워진다. 식이 장애는 자신이 잘못되어가고 있단 걸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그 굴레에서 빠져 나와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많은 전문가는 음식은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는 것을 인지하고,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이외에 보상이 될 만한 활동을 다양하게 만들어 놓는 것을 해결책으로 권한다. 성취를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동만으로도 음식만큼의 만족감이 채워진다는 것을 알면 점점 쉬워진다는 것이다.나 혼자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씁쓸해지지만,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모든 이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체중 감량을 하고 그보다 더 큰 기쁨과 건강을 얻었으면 좋겠다. 나 또한 다이어트에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하되, 체중 감량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정확히 짚어보며 더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2022-08-23

민어의 노래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난 바닷길/ 깊게 패인 여울물 소리에 새우떼의 선잠을 깨우는/ 밴댕이와 알 품은 병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전장포 앞바다에서는/ 서남쪽 흑산해에서 진달래꽃 피기를 기다렸다가/ 뻘물 드리우는 사리물 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김옥종 시인의 ‘민어의 노래’ 1연이다. 목포 출신인 시인은 한때 조폭에 몸담았으나 격투기로 진로를 바꿔 세계적인 격투 대회 ‘K-1’에 진출했다. 데뷔전서 패한 후 은퇴, 주방장으로 변신해 민어 횟집을 운영하다 전남 광주에 ‘지도로’라는 식당을 새로 열었다. 학창 시절부터 주먹 세계에 있을 때도 시를 써온 그는 2015년 문학지 ‘시와 경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5년 만에 첫 시집 ‘민어의 노래’(휴먼앤북스)를 출간했다.“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는 문장을 읽으면 당장이라도 장비를 챙겨 민어낚시에 나서고 싶다. 민어배 선장들은 민어가 부레로 뿌우욱 뿌우욱 내는 소리를 추적해 배를 댄다. 여름철 최고의 보양식으로 각광 받으며 값이 치솟기에, 큰놈 한 마리만 잡아도 뱃삯 본전 뽑고도 남는 게 민어 낚시다.그런데 이 민어 낚시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선 멀다. 제철 민어를 낚으려면 고흥이나 해남, 신안으로 가야 하는데 민어 찾아 이천 리 대장정이다. 둘째, 힘들다. 그늘도 없는 바다 위, 뙤약볕을 맞으며 낚시하기란 정말 고역이다. 장거리 운전과 쪽잠으로 지친 몸은 새벽 출항에 이미 파김치가 돼 해가 뜰 무렵이면 푹푹 삭는다. 셋째, 안 잡힌다. 초릿대가 훅 꺾여 챔질해 보면 얄궂게도 장대, 백조기, 메퉁이가 올라온다. 민어는 경계심이 높아 입질이 굉장히 약다.왕복 유류비에 선비, 기타 부대비용까지 감안하면 민어는 잡아서 먹는 게 아니라 사 먹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너 사람이서 인당 6~7만원씩 걷어 사 먹는 게 훨씬 편하다. 그걸 알면서도 낚시꾼 마음이 또 그렇지 못하다. 낚시꾼만큼 유혹에 약한 사람들도 없다. 물고기를 유혹하기 위해 스스로 유혹당하는 족속들이 아닌가. 마침 고흥 나로도와 거금도에서 민어가 제대로 터졌다는 소식에 귀가 팔랑였다. 한 사람이 열댓 마리 우습게 잡는다고 하니 안 가고 배길쏘냐.나로도 가는 길, 민어에 얽힌 웃기는 추억 하나 떠올랐다. 임자도 출신 김두안 시인 초청으로 시인들이 놀러 갔다. 널찍한 한옥집에 도착하니 8킬로그램짜리 민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어회에 소주 마시는 동안 김두안 시인이 썰을 풀기 시작했다. 신안 앞바다는 고려시대 보물선들이 많이 침몰했는데, 자기는 어릴 적에 상평통보로 짤짤이를 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바닷가에 굴러다니는 술잔 하나를 주워 왔는데, 거기 술을 따르니까 술잔 속에서 웬 소복 입은 여자가 장구를 치더란다. 김두안 시인의 ‘혼이 담긴 구라’가 민어회 맛을 돋웠다. 그 술잔은 결국 못 봤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날 새벽 일찍 배에 올라 열심히 낚시했다. 조과는 거의 꽝에 다름없는 몰황이었다. 퉁치라 불리는 민어 새끼 두 마리, 퉁치만 한 백조기 한 마리가 조과의 전부였다. 그나마 일행 중에서 내가 나은 편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잘 나온다더니, 역시 소식 듣고 가면 지각이다. 결국 민어 유혹에 실패해서는 어시장에 가 갯장어나 좀 샀다. 올라오는 길에는 보성에 들러 짱뚱어탕을 먹었다. 어시장 좌판과 미식의 유혹에 넘어간 어리석은 낚시꾼이 바로 나다.“ 세월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 민어 몇 마리 돌아왔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새우 놀던 모래밭을 파헤쳐/ 집 지을 때부터 플랑크톤이 없던 모래밭에/ 새끼를 품어내지 못한 오젓, 육젓이 밴댕이를 울리고/ 깡다리를 울리고/ 병어를 울리고/ 내 입맛 다실 갯지렁이도 없는 바다에 올라 칼끝에 노래하던/ 민어의 복숭아 빛 속살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김옥종, ‘민어의 노래’ 3연)아아, 낚시꾼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이다. 민어 몇 마리 못 잡았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내년 여름, 바다에 올라 초릿대 끝에 노래하는 민어의 복숭아 빛 속살을 반드시 다시 보고 말리라!

2022-08-23

각자의 삶을 기억하기

책을 덮고 고개를 들면 누군가의 삶이 보인다. /언스플래쉬 어떤 경험을 하면 환기되는 기억이 있다. 음식을 먹는다던가, 냄새를 맡는다던가, 촉감을 느끼는 것으로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던 과거의 사건이 소환된다. 그것은 아주 사소하게 추동되는 일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일직선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던 시간이 아무렇게나 뒤엉키는 것을 느끼고 일순간 길을 잃은 것 같은 감각을 체험한다. 까맣게 잊고 싶은 기억이나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기억은 우리들의 내부에서 각자의 형태로 위치한다.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지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인 마르셀은 홍차에 마들렌을 먹으면서 그 맛과 향기에 과거의 기억으로 넘어가게 된다. 장황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 있는 문장과 종잡을 수 없는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한 문장으로 축약될 수 없는 세계를 포착해 언어로 표현해내려는 작가의 예술적인 성취에 가깝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위치한 인간의 삶을 적어내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던 작업이었을 것이다.내게도 마르셀의 마들렌과 같은 음식이 있다. 물을 적게 넣고 면을 잘게 부수어서 끓여 먹는 라면이 그것이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만들어준 요리로 지금 와서 그때의 맛을 재현하려고 해도 늘 실패하기 일쑤다. 어쩌다 비슷한 맛이 감각되는 날이면 그때의 기억이 소환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친구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과 살았다. 그때 우리는 고작 열한 살이었다. 친구에게서는 늘 물에 젖은 냄새가 났고 이따금 청결하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보였다. 어느 날엔가 친구는 자기 집에 나를 초대했다. 허름한 빌라의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서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던 친구의 아버지와 신발장까지 달려 나오던 친구의 동생,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던 내부의 이미지가 여전히 생생하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친구는 찬장에서 라면 세 개를 꺼내서 잘게 부수었다. 친구의 아버지와 동생, 나는 모여 앉아서 친구가 만든 라면을 먹었다. 그러다 동생이 실수로 국물을 옷에 흘렸다. 친구는 동생의 옷을 벗기고는 화장실로 가져가서 빨래를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이었다.그때 나는 어떤 기분이었더라. 분명한 건 친구와 내가 겪고 있는 삶의 무게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타인의 삶을 인식하면서 경험하는 부조화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편안하고 익숙한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끼리 공유하던 농담에 와하하 웃는 친구의 씩씩한 얼굴과 가족끼리 도란도란 나누는 일상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형태 같은 것.최근 폭우로 도시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렸고 천둥소리와 번쩍이는 번개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떠올랐다. 황량한 들판 위의 외딴 저택. 죽은 캐서린의 환영을 바라보며 외치는 히스클리프의 절규가 생각났고 나는 침대 맡에 앉아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몇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다음 날 뉴스를 읽었다. 반지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일가족이 사망하였다는 기사였다. 머리가 새하얗게 질리는 듯했다. ‘반지하를 없앤다’는 대책을 내어놓는 서울시의 입장을 마주하고는 더욱 그랬다. 문제로 보이는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식의 행정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겪어왔다. 그로 인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이들의 외침을 계속해서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나는 얼마나 안전한 위치에서 감상에 젖어있었는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내가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물이 차오르는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결코 공평한 일이 아니다.책을 덮고 고개를 들면 누군가의 삶이 보인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곁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며 삶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알지 못하는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기만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얼마나 별로인 인간인지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계속해서 발화해야 한다. 끝끝내 실패로 종결될지라도. 각자의 삶을 헤아리려는 노력은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자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2022-08-16

타인의 리듬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우영우가 자동문을 지나가지 못해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본 우영우의 동료는 이렇게 얘기한다. “왈츠를 춘다고 생각해요. 쿵짝짝, 쿵짝짝.” 둘은 천천히 리듬에 맞춰 발을 굴리고, 그렇게 왈츠의 리듬으로 하나의 문을 함께 통과한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인물 ‘우영우’의 좌충우돌 사회 적응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 장애를 가진 인물인 탓에 이 드라마는 보통의 법정 드라마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을 갖는다. 때로는 범죄를, 때로는 일상적인 민사를 다루면서도 사실은 법리가 아닌 인간을 다루는 드라마. 그러나 흔한 법정 드라마와 달리, 이 이야기는 ‘우영우’와 그의 동료들이라는 프리즘을 거치며 여러 갈래의 빛으로 다채롭게 쏟아진다. 때로는 의뢰인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감정적으로 변하기도 하며, 자신이 변호해야 하는 변호인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하는 등, 여러 이야기와 감정들이 쏟아진다.그리고 그렇게 쏟아진 감정들은 다시금 우영우라는 인물의 인격과 특성을 거쳐 하나의 이야기로 종합된다. 예컨대 너무나 상식적인, 그러나 상황으로 인해 우리가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 사회적 정의에 대한 것들 말이다. 예컨대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장애’라는 특성은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연출적 장치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말하기가 허락되지 않던 이야기들을 발설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로서의 역할 또한 겸하고 있다.그러나 이 장치로서의 ‘장애’가 만능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의 초반부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장애가 노출되는 방식은 재능과 비사회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갈음된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암기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상황과 맥락 속에 녹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래얘기 금지!”라는 동료 변호사의 대사는 그런 그녀의 특징을 잘 드러내준다. 예컨대 그것이 하나의 재능으로 갈음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드라마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계속해서 연출하며 나름의 노력을 다하는 셈이다.때문에 우영우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하는 발언과 행동을 상황과 맥락에 맞추어 재가공하는 절차를 수행한다. 배려라기엔 너무나 충분하고 사회적이라 하기엔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동료들의 태도 속에서 ‘우영우’라는 인물은 하나의 재능과 하나의 모자람을 갖춘 독특하면서도 평범한 한 사람의 직장 동료로 자리매김해 나간다.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상사인 ‘정명석’이다. 인터넷에서는 ‘서브아빠’라는 별명으로도 불릴 만큼, 그는 우영우를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멘토와 멘티로서 대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드라마의 특성과 메시지로 인해 다소 작위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석의 모습은 ‘나’와 다른 타인을 대하는 하나의 교본적인 모습이라 할 만 하다. 그는 우영우라는 인간을 한 명의 변호사로서 ‘한바다’라는 거대 로펌의 위상에 걸맞는 역량을 보여주길 기대하며 그녀를 대하는 것이지, 그녀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편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명석의 눈 속에서, 우영우의 ‘장애’는 인격과 철저하게 분리된 하나의 특성일 따름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우리는 종종 장애를 가진 이를 대할 때, 그 사람이 가진 장애를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곤 한다. 과잉된 배려와 친절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태도 속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닌 시혜의 대상으로 존재할 따름이기에, 이와 같은 시혜적 태도 또한 하나의 차별이자 배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선과 태도의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나’는 장애를 가진 ‘저 사람’과 다르다는 배타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위하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되지만,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태도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과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표출이기도 하다.다시금 1화로 돌아가 보자. 우영우가 회전문을 통과하지 못해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모습 속으로. 우리는 한 번이라도 회전문이라는 것이 그토록 위협적이거나 난해한 장애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그와 같은 회전문이 누군가에게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본 적이 있을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함께 왈츠를 추며, 같은 리듬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우리가 우영우를 바라보면서, 그녀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궤적을 함께 지켜봐야만 하는 이유이다.

2022-08-16

나를 더 잘 아는 방법

퇴사를 한 뒤의 나의 하루 일과는 단순해졌다. 여섯시 반쯤 일어나 물을 한컵 마시고 몸무게를 잰 다음, 냉장고 앞에 서서 아침은 무얼 먹을까 생각한다.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 때문에 배가 차게 느껴진다면 따뜻한 국물 요리를, 요리하기 어려울 만큼 집이 너무 덥다면 가성비 좋은 식당에 가서 끼니를 해결한다.오전 여덟시쯤 되면 노트북과 안경 간단한 필기구를 챙겨 카페로 나간다. 그리곤 재취업을 위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손본다. 초중고 학교 이력, 각종 자격, 전에 어떠한 일들을 했는지 몇 줄의 문장들과 사진으로 나를 설명하다 보면 나는 과연 쓸모 있게 증명될 수 있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든다. 그렇게 빈약한 이력서를 횡설수설 고치다보면 어느덧 오후 세네시가 된다.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면 문제의 ‘그 시간’이 찾아온다. 운동을 해도, 밀린 집 청소를 해도, 또는 새로운 게임을 하거나 좋아하는 지인을 만나도 무기력함과 지루함을 쉽게 감출 수 없다. 이렇게 일상이 희미하게 지워지는 것 같거나, 삶의 주도권이 어딘가에게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는 나 자신을 철저히 객관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번아웃을 앓는 내게 작은 도움이 되고 있는 건 규칙적인 생활습관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리추얼 라이프란 생활 습관을 알게 되었는데 리추얼이란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일상 안에서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을 뜻한다. 물 2리터 마시기,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기 등 자신이 정한 생활 습관을 반복하며 나를 의미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전에 언급했던 ‘갓생 살기’의 목표 설정은 단순히 행할 수 있는 것과 그에 따른 성취감과 행복 추구였다면, ‘리추얼’은 반복적인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식화하는 습관’에 가깝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 마시기를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복 물 한잔에 의미를 부여하여 의식하고 정서적 활동을 더하여 나의 긍정적인 일상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리추얼 라이프의 실천을 돕는 플랫폼인 ‘밑미’는 구경만으로도 재밌다. 육아 일기 쓰기, 피아노 연주 기록, 주말 제철 식재료 요리,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등 최소 6인에서 20명까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통된 리추얼을 행하고 기록을 남긴다. 리추얼을 통해 나의 취향과 생각의 틀을 확고히 굳히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수행을 공유한다.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강박은 내려놓고 내가 지루하다 생각하는 시간에 이름을 붙여주고, 키워드를 정해주다 보면 어느덧 긍정의 기운이 찾아온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시너지는 배가 된다.두 번째로 도움이 되었던 건 ‘갤럽 강점 검사’다. MBTI가 성격유형 검사라면 갤럽 강점 검사는 개인의 타고난 소질이나 재능을 알려주는 유료 검사다. 총 177개의 질문을 20초 안으로 대답해야 하고 총 검사시간은 35분이 걸린다.강점과 약점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강점이 될 수도 있고,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쩔쩔 맬 때엔 약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가장 첫 번째 특성으로 ‘공감’이 나왔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마치 나의 감정처럼 느끼고, 상대방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특성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좋게 말하면 이해와 배려심이 넘치는 타입이라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공감이란 감정을 약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나 외부에 잘 동화되는 특성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가진 부정적인 기운을 그대로 흡수하여 나의 기분까지 흐트리는 경향이 있었다.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미안해서 곤란한 일을 맡을 때엔 혼자 도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강점을 잘 알아두면 해결책을 찾기도 쉬워진다. 긍정적인 시너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을 주위에 채워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일이 많은데 부탁해서 미안하지만, 이라는 대화로 선 공감 후 부탁을 요청하여 건강한 방법으로 해결해보잔 솔루션을 찾기도 했다.내가 가진 특성 중 어떤 것을 잘 활용해 볼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어떻게 적용시켜 볼지 생각하게 된 좋은 계기였다. 일과 관련된 방향과 삶의 전반적인 방향 또한 조금 더 뚜렷해 진 것 같아 마음의 짐이 조금 덜어졌다.

2022-08-09

내 집 아닌 내 집

이사를 했다. 3년 만에 하는 이사라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이참에 짐 정리도 할 겸 불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버리기로 했다. 다행히 친구가 이 집으로 들어오겠다 해서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은 양도할 수 있었다. 집주인에게는 7월까지만 살고 나갈 거라 미리 얘기도 해둔 터였고, 더구나 다음 세입자를 구해놓았다고 얘기까지 해놓았기에 모든 게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막상 짐을 빼고 이사를 마치고, 친구와 계약을 일주일 앞둔 상황이 되자 집주인은 별안간 월세를 올릴 거라고 통보를 해왔다. 300에 40짜리 작은 옥탑에 갑자기 45만원을 받겠으니 친구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친구도 나처럼 사회초년생인지라 한 달에 45만원을 월세로 지불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작은 옥탑에 보증금 300, 월세가 45만원. 친구가 이사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사실 그 옥탑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같은 가격대에서는 크기도 상대적으로 넉넉했고, 옥탑인 탓에 채광도 좋았다. 대학원생이던 나에게 학교까지 도보로 20분이라는 건 매우 큰 장점이었다. 나에게 맞춤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집이었다. 문제는 그게 옥탑이었다는 거고.생각보다 옥탑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옥탑이 구축의 개인 주택에 달린 옥상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살던 곳은 다른 무엇보다 단열이 문제였다. 여름이면 옥탑은 오븐처럼 뜨겁게 달궈졌고, 겨울이면 온몸이 얼어버릴 정도로 외풍이 심했다. 에어컨과 선풍기, 보일러와 전열기는 옵션이 아니라, 옥탑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수품에 가까웠다. 그래도 단열이 되지 않는 탓에 곳곳에 물이 맺혀서 곰팡이가 피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집이었다.그런 집에 월세로 45만원을 달라니. 매달 전기세며 보일러세로 일반 가정집의 2배는 족히 나오는 집인데 월세마저 올려달라는 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300에 40은 3년 전 시세라고 했다. 결국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주인에게 300에 40이 아니면 계약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아마 이 집을 그 가격에 월세를 놓는 게 상당한 무리라는 건 집주인도 알고 있었을 거다. 당장 부동산에만 가 봐도 300에 40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 옥탑을 한 달에 45만원이나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집주인은 우리가 가난한 고학생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새로 들어올 사람과 나의 관계마저 알고 있었으니 그런 무리수를 둬본 것이겠지. 게다가 짐도 여기에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고. 그러니 “300에 40은 3년 전 시세”라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겠지.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지라곤 고작 더 낙후한, 대신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을 찾아 가는 것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으니까.창신동 쪽방촌의 주거 실태와 주거 빈곤층의 실상을 밝힌 이혜미 기자의 ‘착취도시, 서울’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빈곤 비즈니스’,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되, 빈곤을 벗어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닌, ‘빈곤을 고착화’하는 산업. 가뜩이나 돈 없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해, 마땅한 노력 없이 불로소득으로 폭리를 취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형태.”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누군가에게는 현명한 투자라 생각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곤궁을 고착화시키는 현실의 아이러니. 물론 알고 있다. 집주인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일 거라고 믿고 싶다.가난한 사람은 월세가 오를까봐, 집에서 쫓겨날까봐 늘 두려움에 떤다. 비록 그 집의 평당 임대료가 서울 전체 아파트의 평당 평균 임대료의 몇 배를 상회할 지라도, 당장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으니 한 달 수입의 절반 가까이를 월세로 지불하면서 살아간다.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모으기는커녕 점점 더 낙후된 곳으로 이동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낙후된 주거 환경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쪽방촌, 고시촌, 원룸 촌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가난하기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 속에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하지 않는 것, 아이를 낳지 않는 것뿐이라 생각하면서.

2022-08-02

여름방학을 지나며

지금 우리는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청명한 하늘을 마주하면 한없이 들뜨다가도 지나치게 무더운 날씨에 실온에 둔 음식처럼 기분이 상한다. 푸르른 바다와 싱그럽게 자라는 식물의 줄기를 상상하지만, 습도만큼 불쾌지수가 높아지고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듯한 찝찝함이 온종일 가시질 않고 에어컨 없는 공간은 상상조차 못 할 정도다.이 여름, 나는 휴식에 관해 골몰한다. 문자 그대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쉴 수 있을지 고민한다. 따가운 햇볕이 정수리를 달구는 한낮에도, 창 너머로 후텁지근한 바람만 불어오는 늦은 밤에도, 쉬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기분이다. 어느덧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음을 상기하면 어쩐지 숨이 가빠진다.학교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방학이 있다는 것이다. 학생일 때의 방학과 선생이 되어서 체감하는 방학의 무게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에게 방학은 그저 마냥 즐거운 기분이라면 후자는 숨을 쉴 유일한 기회다.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는 동아줄 같은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서 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임해야지만 다음 학기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 동료들과 손을 맞잡고 다짐했다. 열심히 쉬다 옵시다, 우리.몇 달 전부터 나는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궁리했다. 비행기 표를 사서 이국의 휴양지에 다녀올까. 괌이나 하와이 같은. 아니면 서울 근교의 세련된 호텔에서 며칠 머물면서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온종일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주말에는 사람들로 붐벼서 쉽게 갈 수 없던 유명한 식당이나 평일 오후의 미술관도 떠올렸다. 그렇지만 내게 필요한 휴식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아니라 비움이 필요했다. 그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던가 좋은 곳을 구경하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리하여 이번 방학의 목표는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으로 설정했다. 방학 계획표 따위는 그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노트북과 책도 내려놓았다. 떠오르지 않으면 한 문장도 발화하지 말자. 텍스트를 읽고 싶으면 그때 소설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자.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당에 앉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지리산에 올라가 입이 떡 벌어지는 경치에 감탄하고 천년을 살았다는 소나무와 마주했다.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다가 지겨워지면 평상에 누워 낮잠을 잤고 해가 넘어가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이 일을 삼십 년이나 해냈어?”하고 내가 물으면 “자식을 키우려면 뭔들 못하겠느냐”고 부모님은 대꾸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에 찾아가 회상에 젖기도 했다. “우리 꼬마가 이렇게 자랐어!”하고 외치던 목사님의 손은 너무나 다정했고 나는 어느덧 한 시절을 통과해왔다는 감각을 느꼈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누구에게나 방학은 필요하다. 직장인에게도 여름방학을 달라는 말은 그저 실없는 농담이 아닐 테다. 짧은 휴가로는 충족될 수 없는 긴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똑같은 삶이 쳇바퀴 돌 듯 지나간다. 물결처럼 흘러가야 하는 시간이 고이고 응축되면 썩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특히 여름은 부패하기 쉬운 계절이니,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다. 휴식은 육체와 마음을 재정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일로 나아가고 더불어 내일로 나아갈 힘을 얻게 한다.이렇게 나의 방학이 지나가는 중이다. 풀벌레가 시끄럽게 우는 여름밤,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다. 내년에 계약 만료가 되는 월셋집과 손봐야 할 소설의 무수한 장면들, 매일매일 체감하는 나의 부족함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밖에도 처리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이 가득하지만 잠시 눈을 감기로 한다. 그 대신 여름의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던 강의 표면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를 떠올린다. 이제 며칠 후면 나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고 지켜야 할 약속을 이행하며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방학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마치 문을 닫듯 상념은 잠시 거기에 놓아두고 나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2022-08-02

단순함의 미학

‘탑건: 매버릭’엔 1980~90년대 낭만적 허세가 있다. /영화 홈페이지 ‘탑건: 매버릭’을 봤다. ‘남산의 부장들’ 이후 2년 6개월 만에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코로나로 인해 극장에 가길 꺼려했고, 같이 영화 볼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볼 만한 영화가 없어 통 극장에 가질 않았다. 그런데 1986년 개봉한 ‘탑건’의 후속편이라니, 또 주변에서 재밌다고 난리 치니 극장에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청소년 관람불가였음에도 비디오 가게에서 ‘탑건’을 빌려 봤다.오프닝 화면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좀 뭉클해졌다. 1986년작과 똑같은 음악, 똑같은 구도의 시퀀스, 본편의 오리지널리티를 고스란히 되살려낸 연출이 1980~90년대 향수를 자극했다. 80년대에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으므로 별로 할 말이 없지만, 90년대라면 다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를 90년대에 보냈다. 그 시절에 보고 듣고 읽은 영화, 음악,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가 철 지난 항공점퍼를 입고, 레이밴 선글라스를 끼고,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이륙하는 전투기와 나란히 달리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다.한 줄 감상평을 남기자면, “다시 군대에 가고 싶을 지경”이다. 오랜만에 가슴 뜨거워지는 영화를 봤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스펙터클한 영상미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투박하고 간단하지만 명료해서 좋았다. 선이 굵고 호방해서 통쾌했다. 석양, 해변 럭비, 술집 골든벨, 오토바이, 레이벤 선글라스, 록 밴드 음악, 제복 등 구닥다리 형식으로 폼 잡는 게 좋았다. 그게 흥행의 이유라는데, 사실 ‘주말의 명화’ 시절 영화들은 다 그랬다.‘다이하드’, ‘리셀웨폰’ 같은 액션 영화들은 물론이고, 팔씨름 하는 영화(‘오버 더 톱’), 양치기 돼지가 주인공인 영화(‘꼬마돼지 베이브’), 누가 오래 잠수하나 시합하는 영화(‘그랑블루’)도 있었다. ‘가을의 전설’이나 ‘브레이브 하트’, ‘늑대와 춤을’ 같은 영화는 서사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상미가 압권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모래시계’만 봐도 마지막 장면은 지리산 노고단의 겨울 석양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역광 속 뒷모습을 담았다. 단순하지만 멋이 있었다. 아니, 단순해서 멋있었다.요즘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다 복잡하기만 하다. 내밀한 세계로, 미시적인 세계로만 파고들다보니 작고, 어렵고, 난해하다. 천재적이지만 멋이 없다. 근래 한국소설을 읽다보면, 장편도 아니고 단편임에도 자기가 설정한 이야기의 복잡성에 갇혀서, 작가 스스로 미로를 헤매는 그런 작품들을 종종 보게 된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계산적이고, 복잡다단하고, 속을 알 수 없다. ‘탑건: 매버릭’을 보며 제일 반가웠던 건 1980~90년대의 낭만적 허세,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함이었다.얼마 전 한 영상이 화제가 됐다. 중년 남성이 커피숍 키오스크 사용법을 몰라 주문에 애를 먹자 애꿎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욕설을 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주 겪는 일이라는 듯 유쾌하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큰소리부터 지른 소위 ‘개저씨’를 비난하는 여론 가운데 키오스크 시스템이 디지털 문명에 익숙지 않은 고령 세대를 소외시킨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 키오스크뿐인가? 스포츠 경기, 공연, 항공권 예매도 이제는 온라인 서비스나 무인 시스템으로 거의 전환됐다. 각종 보안 인증 시스템도 문제다. 공인인증서는 폐지됐다지만 더 복잡한 것들이 생겨났다. 지난 5월 종합소득세 신고를 위해 국세청 홈택스에 접속했다가 짜증나 죽는 줄 알았다. 세금 신고와 납부를 장려하려면 관련 용어와 절차부터 좀 쉽게 바꾸면 안 될까? 세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한자어와 수식들을 보면서 ‘일부러 이러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오만해진다. 오래된 것은 모두 낡고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긴다. 사회 시스템도, 영화도, 음악도, 문학도 모두 첨단을 지향하는데, 첨단으로 가는 방법이 많아질수록 절차는 복잡해진다. 그 복잡함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폐쇄된 세계 안에 가두게 한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자꾸 틀려 집에 못 들어가거나 웹 사이트 패스워드를 분실해 영영 ‘온라인 미아’가 되기도 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다. ‘탑건: 매버릭’에서 매버릭은 중요한 순간에 늘 망설이는 루스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지 마.”

2022-07-26

고물가 시대 생존법

장을 보러 갈때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금겹살이라 불리는 돼지고기는 쳐다보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자두나 복숭아, 수박 같은 여름 과일도 가격 보고 놀라 금세 내려놓고 만다.높은 가격에 섣불리 카트에 담지 못하다 결국 향하는 건 세일코너.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카트에 물건을 담을 떄마다 더해지는 가격 계산을 하다보니, 언제부턴가 장보기가 숙제마냥 피로하게 느껴진다.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점심을 밖에서 해결해야 할 때도 난감하다. 냉면은 1만원 중반대를 훌쩍 뛰어 넘는데다가, 비빔밥이나 국밥도 9천원이나 달한다. 만 원 아래로 사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굉장히 제한적이니, 이제 외식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잘 하지 않게 되었다.물가 폭등 현상은 비교적 소득이 적은 20대에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최근 여러 신조어도 생겨났는데, 물가 상승으로 직장인들의 점심값 지출이 늘어난 상황을 뜻하는 ‘런치 플레이션’, 앱을 통해 돈을 아끼는 ‘앱테크족’. 외식을 지양하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끼니를 해결하는 ‘냉털족’ 등이 생겨났다.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1년 차인 초년생 친구는 점심을 저렴하게 해결하기 위해 편의점 서비스에 구독했다고 한다.편의점 구독 서비스란 단어가 생소해서 알아보았더니. 2000원에서 4000원 사이의 월 이용료를 내면 약 20~30%정도 상품을 할인가에 살 수 있는 멤버십 제도였다. 물론 상품 가격마다 다르지만 도시락은 약 1000원에서 1500원에서 정도 할인 받아 살 수 있었고, 커피 또한 할인받아 1000원 아래로 즐길 수 있었다.먹거리 외에도 와인이나 맥주 같은 주류, 또는 생리대와 마스크 같은 생활용품도 다양하게 보였다. 결제시 통신사 할인이나 기타 할인까지 더할 수 있으니, 월급 빼고 다 오른 웃픈 현실에서 편의점 구독화하기는 필수처럼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인터넷에서 물건을 살 때도 이젠 최저가 검색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정 쇼핑 사이트에서 물건 구매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쇼핑 플랫폼이 주목받고 있다.G마켓이나 11번가, CJ온스타일 등 250여개 브랜드와 제휴를 맺어 할인 정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고, 일일이 쇼핑몰 사이트를 방문하는 것이 아닌, 해당 플랫폼 페이지를 통해 물건을 구입하면 결제 금액의 일부를 현금으로 환급해주는 방식이다.본가에서 나와 1인가구를 꿋꿋이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이토록 아껴서 뭘 하나’ 싶을 정도로 시시하지만 유쾌한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이 있다.대중교통 비용을 할인해주는 알뜰교통카드 발급이나 일정 금액 이상 꾸준히 저축시 2배 이상의 금액을 더해주는 저축 제도, 또는 소셜커머스 플랫폼에서 이벤트로 저렴하게 나온 핫딜 구매가 등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안부를 묻는다.최근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았고 나 또한 만족스레 이용하고 있는 건,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 구입이다. 생각보다 농산물은 맛이나 영양소에 큰 변화가 없더라도 작은 흠집이 있다거나 모양이 이상하거나, 또는 판로가 부족하여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여러 이유로 버려질 위기에 처한 농산물들을 저렴한 가격에 배달해주는 여러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검색만 해도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업체를 선택하면 된다. 대부분 배달 주기도 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고 선호하지 않는 채소가 있다면 뺄 수 있어서 편리하다.가지나 감자, 방울토마토, 브로콜리, 초당 옥수수 등 다양한 종류를 소량으로 박스에 담아 보내주고, 시세 대비 30% 저렴한 가격인 약 2만원 안쪽으로 살 수 있으니 1인 가구에 적합하다.물가 오름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원인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져 있어 해결책이 쉽지 않다.아직도 지구 한 편에서는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 전 세계 공통적으로 쉬이 풀 수 없는 지난한 일임을 인지하고 나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책을 찾아보려 한다. 또한 정부에서 물가 안정을 위한 대책이 지속적으로 강구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본다.

2022-07-26

도둑맞은 가난

매 선거철마다 보이던 풍경 가운데 하나. 선거를 앞둔 후보가 가난한 쪽방 촌에 2~3일 가량 머물며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다. 대한민국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가난한 우리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진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이런 쪽방촌이 무수히 남아있다.영국의 래퍼 겸 작가인 대런 맥가비는 이와 같은 광경을 ‘가난 사파리’(돌배게, 2020)라 부르며 꼬집는다. 정부와 시민단체로부터도 평소 때에는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다가, 선거철이 되면 관심이 집중되는 광경을 비꼬는 말이다. 2017년 영국의 켄징턴 북부에 위치한 임대아파트 그렌펠 타워 화재사건으로 150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정부와 언론은 빈민층의 실태를 집중조명 했지만, 여론의 관심은 금새 더 자극적인 화제로 옮겨갔고, 빈민층에 대한 관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맥가비는 그와 같은 사회적 풍경을 진열창 앞의 안전한 거리에서 원주민을 잠시 구경하며 동정을 표하다가,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며 이를 ‘사파리’에 비유한 것이다.우리가 이와 같은 영국의 풍경에 선거철 정치인들의 모습을 겹쳐 본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 그렇게나마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가난을 잠시나마 보고 듣고 경험해보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거주민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인 민폐만 끼치며 어떠한 배려도 보이지 않은 채, 떡볶이를 먹고 국밥을 먹고 라면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모습에서 무슨 진정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단지 가난을 소비할 뿐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말이다.이것을 단지 정치인들만의 문제라 말할 수 있을까. 매년 이즈음이 되면 생기던 대학생 쪽방촌 체험도 그렇다. 정작 그곳에 사는 주거민의 동의는 구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체험 프로그램 속에서, 가난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테마 체험에 불과하다. 브라질의 호싱야, 인도 뭄바이의 다라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타운십 등지에서 이루어진 슬럼가 투어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한 때의 감정적 여흥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여행을 하며 이국의 정서를 체험하듯 가난을 잠시 체험해볼 뿐이다.사람들은 가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가 가난하고 불우했다 생각하지만, 그와 같은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 앞서 거론한 지역에서의 절대적 가난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가난이란,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여러 제반으로 인해 충족되지 못했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거나 현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 수준이 모자랐던 시간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이란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은 잔인하리만치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여전히 가난한 것은 자신과 달리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가난은 생을 위협하는 재난이 아니라, 자신이 정복해온 삶의 여정의 트로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내면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난을 부정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른 가난한 사람들을 배척한다. 적어도 자신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부정하고 그들의 노력을 부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사회의 중산층이라 여기지만, 하루하루 몰려오는 빈곤에 따른 여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나 비슷한 생활수준의 타인에게 분노하게끔 만든다. 예컨대, 자신의 노력으로 쟁취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이 빼앗거나 무임승차한다는 식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인터넷 공간만 돌아봐도 자신의 실제적 가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자신은 이미 가난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반, 자신은 가난하다 말하지만 실제 경제적 수준은 절대적 가난과는 한참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반이다. 진정한 절대적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여러 방식으로 그들의 삶은 감춰지고 사라진다. 문제화되지 않기에, 그와 같은 사람들과 공간은 한국 사회에서 없는 것으로 셈해지고 만다.이제는 TV 프로그램마저 달동네와 쪽방촌을 조망하지 않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름의 힘든 삶을 가난으로 포장해 보여줄 뿐이다. 소설가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보다 훨씬 더 질이 안 좋은, 심지어 그와 같은 ‘가난장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재이다. 부디 이번에는 그 많은 공약과 정책들이 무사히 이행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2022-07-19

내향인으로 살아남기

내향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언스플래쉬 사람마다 정해진 에너지가 있다는 말을 온몸으로 깨닫는 요즘이다. 근무 시간 내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쓰노라면 일순 머리가 핑 돌기도 한다.연비가 좋지 않아. 내 몸은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자책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골골대면서 모처럼 찾아오는 휴일엔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침대에 누워있는 것으로 시간을 다 쓴다. 어쩌면 나는 게으른 사람인 걸까? 소중한 주말을 멍하니 흘려보내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고 쉽게 우울해진다.그러다 최근, 나 자신을 변호하기 좋은 말을 발견하게 됐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가 한 이야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누워있는 아이를 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긴장감이 높다. 특히 변화가 있거나 새로운 걸 할 때는 긴장을 많이 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긴장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그 긴장을 완화시키려고 누워있는 거다. 게으른 게 절대 아니다.”그녀의 말에 위안받은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무수한 ‘집순이’, ‘집돌이’들, 특히 언제 어디서나 누워있는 것을 생활화하는 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다. 그렇다. 우리를 단순히 게으른 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 사회를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할 뿐.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집순(돌)이’들도 두 부류로 나눠진다. 집에서도 바쁘게 움직이는 쪽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쪽. 당연히 나는 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쪽이다. 침대 밖을 나오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집 밖으로 나서는 일은 문자 그대로 강행군이나 다름없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만남,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발걸음조차 무겁다. 누군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말을 꺼내는 상대의 의도를 돌아보게 되고 대화 도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침묵이 불안하고 스스로의 말을 끊임없이 검열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피로감이 쌓이는 것이다.외향적인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봤을 때 내향적인 사람은 어딘가 불편하게 보일 수 있다. 자신만큼의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고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내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려 보기를 권한다. 바깥으로 뻗어가지 않고 안쪽으로 향한다는 것. 모두의 에너지가 향하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 상대를 이해하기가 조금은 수월해진다.내향적인 사람, 다시 말해 내향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오해를 사는 일의 연속이다. ‘요즘 뭐 하고 살아?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은 내향인들에게 있어 강도 높은 업무를 부여받은 것과 비슷하다. 약속이 정해지는 순간부터 약속 당일까지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디서 만나야 하지? 만나서 먹어야 할 음식은? 어떤 주제의 대화를 나누어야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 시간대는 사람들이 붐빈다던데 차라리 다른 곳에서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상대를 만나기도 전에 완전히 지쳐버린다.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억울한 목소리로 외치고 싶다. 알아요. 나도 이런 내가 싫단 말이에요.싫어도 별수 없다.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으로 여러 장르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변형의 형태를 보라. 마블 코믹스의 ‘스파이더맨’은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거미에 물려 하루아침에 슈퍼 파워를 갖게 되는 서사를 담고 있지 않은가.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 자신에서 탈피하여 완벽하게 다른 것으로 탄생하는 상상은 즐겁지만 결국 허구에 그칠 수밖에 없다. 내향인은 자신이 내향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이것은 슬프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뿐이다.그러니까 이 글은 수다스럽고 불필요한 자기 대변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향인의 누명을 한 꺼풀 벗겨내고 싶다.당신의 지인이 연락을 잘 받지 않는다던가, 만남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그것은 당신이 싫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는 자신의 지난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하여 가진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아껴서 사용하는 중이며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미덥지 않더라도 약간의 애정으로 내향인을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20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