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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들의 시대

등록일 2023-05-02 20:13 게재일 2023-05-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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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는 빈부격차를 눈속임하는 게 아닐지. /Pixabay

이서수 작가의 소설 ‘미조의 시대’는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조가 어머니와 함께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는 이야기이다. ‘미조’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5천만 원이 있다. 하지만 5천만 원은 2020년대 서울에서 그리 크지 않은 돈이다. 더군다나 괜찮은 집을 구하기엔 더더욱 더. 때문에 ‘미조’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의 낙후된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그나마 나은 환경을 찾아다닌다.

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세계를 헤매는 민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익은 것이다. 아마 그 기원을 찾자면 이집트인들의 핍박으로부터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키고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맨 모세의 이야기가 시초에 가깝지 않을까. 시초로부터 무한히 반복되어 온 ‘터전 찾기’의 서사. 이러한 서사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를 포함한 공동체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타자로부터 해방을 ‘원하고’, 그리하여 모진 수난 끝에 그것을 ‘얻는다’.

무언가를 ‘원하고’, 또 그것을 결국에는 ‘얻어낸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서사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얻어낼 것에 대한 필요성과 갈망이다. 얻어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갈망이 크면 클수록, 서사는 당위를 획득한다. 모세의 민족 서사가 그러한 당위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집트인들의 도저한 핍박과 수탈이다. 그것이 잔인하게 묘사될수록, 인물의 갈망과 그에 따른 행위는 설득력을 얻는다.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플롯을 드라마나 영화 따위의 미디어물로 만들 때에는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최대한 악랄하게 묘사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이에 대한 가장 정교한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악당들은 자신의 악랄한 의도를 숨기지 않고 말과 표정으로 드러내며, 주인공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행위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과한다. 예컨대 그와 같은 악당의 얼굴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권리인 ‘자유’를 억압하는 타자의 형상이다.

하지만 ‘미조의 시대’에서 악당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공 ‘미조’는 재개발이라는 수난을 피해 자신과 어머니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떠나지만, 소설은 결코 악당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세의 서사가 이집트인이라는 명확한 타자를 제시함으로써 탈출의 당위성과 목표를 확고하게 드러내주었다면, ‘미조의 시대’는 그러한 타자를 감춤으로써 이 서사를 더욱 도저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소설의 구체적인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도저함은 더욱 구체적이게 되는데, 가령 이들은 모세의 민족과 같이 현실보다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이들이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5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물려주었지만, 그 돈은 서울에서 이들이 원하는 것을 현실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때문에 둘은 ‘더 나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간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 그 흘러듦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속도 속에서 5천만 원이라는 돈이 그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이들은 더 낙후된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다. 구체적인 악당이 제시되지 않는 서사 속에서, 이들을 향한 핍박과 수난, 폭력의 역사는 훨씬 교묘하고 저열하게 제시된다. 이집트인의 구체적인 폭력이 자리하던 곳에는 ‘문제는 충분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자신’이라는 불투명한 폭력과 죄의식이 분출된다. 때문에 핍박과 수난은 이들에게 동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책감과 무기력함을 불어넣는다. 문제의 원인을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교묘한 폭력이 만연하는 곳.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무대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이다.

최근 어떤 조사에서 30대의 평균 소득이 월 500만원이라는 조사결과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월 500만원을 버는 사람이 과연 그토록 흔할까? 그럼에도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나’에게 닥친 경제적 불행과 그로인한 수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금 ‘네’가 불행한 것은, 네가 평균에도 못 미치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통계와 평균의 마법이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눈속임하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집트인’은 차라리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악행을 자행할 때에도 인간의 얼굴과 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들은 이 모든 불행이 오직 너의 탓이라고 속삭이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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