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신다고요? 낭만 있네요.
최근 어떤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업무를 하면서 늘 문장을 다루고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에만 있다 보니 작가라는 직업이 대단할 것 없이 느껴졌는데, 전혀 다른 업에 종사하는 그에게는 글 쓰는 직업이 신비로운 일처럼 다가온 모양이었다. 어느덧 일상의 지루한 노동이 된 글쓰기가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영역으로 다가갔다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묘한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상념은 나를 교실 속으로 데려간다.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나가는 예술고등학교에서 나는 지금 고3 수험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푸릇푸릇한 아이들의 두 눈. 작가가 되겠다던 열망으로 반짝이던 눈빛이 원고지와 씨름하는 나날 속에서 묘하게 흐릿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가끔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의 눈빛처럼 공허하게 번져 보이기도 하는데, 그 속에서 나는 이 아이들이 낭만 대신 지루함과 지난함을 먼저 배워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 마음, 왜 모르겠는가.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영영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벽 앞에 서 있는 기분. 소설 쓰기는 쉽게 열리지 않는 문과 같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좌절하게 순간은 새삼스럽지 않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기미가 없는 문 앞에 놓인 무력감.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는 감각에 있을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창작 이론 대신 백지와의 눈싸움을 더 빨리 습득해 버렸다. 온종일 문장과 씨름하다가 책상 위로 풀썩 쓰러지는 것은 기본. 연필을 빙글빙글 돌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기도 하고 가끔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뿜어 내기도 한다. 내게 획기적인 방법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참 난감하다. 마치 일부러 비기를 숨기고 일부러 제자를 괴롭히는 스승이 된 것 같다. 그러나 더 좋은 소설을 쓰는 방법은 계속해서 읽고 책상 앞에 앉아 고민하는 것뿐인 걸. 지루함을 견디고 한 줄을 써내는 힘.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창작 기술이다.
만일 그날 그에게 소설을 쓰는 과정에 관하여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삶과 예술에 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을 달래보자면 이렇다.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것으로 글쓰기는 시작된다. 멀리서 봤을 때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도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서로 치고받는 중이다. 마침내 그중 하나를 골라 쓰면 곧바로 후회가 따라붙는다. 필연적으로 다시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 한 문장을 고르기 위해 열 문장을 버려야 하고 가끔은 쓴 걸 모조리 날려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선택과 후회의 굴레 속에서 결국 남는 건 단 한 줄의 문장이다.
어린 시절 내가 상상한 소설가는 경쾌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가졌더랬다. 건반을 두드리듯 빠른 속도로 소설 한 편이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상상했던 삼십 대의 모습이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듯, 작가가 된 내 모습 역시 맞춤법조차 헷갈리는 허술함으로 가득하다. 그런 나 자신을 미덥지 않아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허술함이 내 글의 출발점이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이어가며 허공에 대고 말을 걸듯 문장을 적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불 꺼진 방에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는 모습은 분명 누추한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어떤 희열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글쓰기는 손익 계산의 바깥에서 작동한다. 수익과 손해로 따져 보자면 낭비의 극치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현대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곧 생존이니까. 굳이 한 문장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이라니. 주식이라면 진즉 손절하고도 남았어야 옳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계산법이 통하지 않는다. 더딘 성과를 받아 들여야 하는 노동. 쓸모없는 것들의 총체. 그리고 그 무용함 속에 인생의 쓸모를 발견하는 시선.
이런 점에서 쓰는 행위는 정말 낭만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함을 기꺼이 껴안고 책상 앞에 앉는 마음. 그러한 집념 자체가 곧 낭만일 수도 있겠다. 낭만 혹은 지루한 노동. 둘 중 무엇으로 명명하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분명한 건 낭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마감조차 반짝여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그가 그러한 대사를 내뱉는 순간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날 나는 웃음으로 답하며 속으로 생각했었지. 아, 이번 주 칼럼은 이걸로 쓰면 되겠다!
/문은강(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