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덥지만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 분다. 소나기 그친 저녁, 빗물 고인 거리에 비친 가로등 불빛에서 단풍을 예감하는 지금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을 떠올리는 건 박해일과 탕웨이의 트렌치코트 차림이 근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여름 그리스와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나는 언어의 한계를 체감했는데, 언어의 불완전함 속에서 비언어는 오히려 언어보다 더 풍요로운 소통의 도구가 되어주곤 했다. ‘헤어질 결심’은 비언어 소통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커뮤니케이션에는 비언어에 의한 소통도 있다. 재밌는 것은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보다 비언어에 의한 소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웃음, 울음, 표정, 눈빛, 몸짓, 스킨십, 노래, 춤 등이 모두 비언어에 해당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언어 소통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비언어적 신호는 언어적 표현에 비해 의식의 검열이나 통제가 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언어는 때때로 감정과 생각, 정서를 언어보다 더 진실하게 전달하기도 한다.
극중 한국인 엘리트 형사 해준과 중국인 여성 서래의 첫 만남은 형식적인 대화로 시작된다. 사망자의 유족으로 경찰 조사에 응하는 서래와 수사관으로서 그녀를 대하는 해준은 의례적인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서래가 일반적인 어법에서 벗어난 엉뚱한 한국어 “마침내 죽을까 봐”를 발화한 순간 해준의 사무적인 태도는 해제되고 둘의 거리는 급격히 밀착된다. 언어적 세계에 있는 해준이 비언어적 세계의 서래에게 이끌린 이 사건은 상징계의 질서에 길들여진 주체가 자기 앞에 불현듯 열린 비언어적 상상계를 경험하고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인 실재로서의 사랑을 욕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서래는 한국어가 질서로 작용하는 언어적 세계에서 눈빛, 표정, 몸짓 등의 비언어를 활용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앞서 말했듯 소통은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언어보다 비언어를 통해 훨씬 풍부한 소통이 가능하다. 이성적 존재인 해준과 감성적 존재인 서래는 서로에게 비언어에 해당하는 한국어(해준에게는 서래의 어눌한 한국어, 서래에게는 해준의 유창한 한국어)를 통해 가까워진 후 표정과 몸짓, 숨소리, 침묵을 통해 농밀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모티프가 된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의 윤희중과 하인숙이 노래라는 비언어를 통해 가까워진 것과 닮아 있다. 해준은 언어소통이 원활한 아내와 감정 없는 잠자리를 갖지만, 대화가 쉽지 않은 서래와는 스킨십 없이도 풍부한 감정적 교류를 한다.
언어적 세계에는 상징계의 의미질서, 논리, 이성, 합리성, 제도, 사회적 규범 등이 있고 비언어적 세계에는 상상계의 몽상, 감성, 비합리, 자유, 초월, 위반 등이 있다. 언어적 존재인 해준이 비언어적 존재인 서래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부터 ‘기도수 사망사건’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서래의 정체 또한 짙은 안개와도 같은 불확실성을 점점 더해가게 된다.
김승옥의 고향이자 무진의 모티프가 된 장소인 순천의 송광사에서 펼쳐지는 해준과 서래의 데이트 장면에서 두 사람은 말보다 몸짓과 표정, 침묵으로 더 많은 대화를 한다. 해준이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서래가 해준의 입술에 립밤을 칠해주는 행위는 언어보다 훨씬 직설적으로 감정을 전한다. 이러한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서래의 세계에 적응하게 된 해준은 서래가 기도수 살인사건의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마해버리며 자신이 원래 속해있던 언어적 세계를 망가뜨리게 된다. 이때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라는 해준의 대사는 환상을 쫓느라 현실을 파괴한 자의 고백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해준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어색한 한국어 문법으로 자신의 절망감을 발화하는 장면은 그가 서래의 세계, 즉 어눌한 한국어로 함의되는 비언어, 감성, 환상의 세계로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나이 들수록 옛날 광고 카피처럼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이가 소중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 속에, 의미와 개념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지 않나. 수다스러운 매미 울음이 귀뚜라미의 나지막한 허밍으로 바뀌는 이 계절, 말없이 그냥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함께 노을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냥 일어나 걸으면서 말없이 헤어지는 사람 하나 곁에 있으면 좋겠다. 가을엔 말과 헤어질 결심을 세워본다.
/이병철(시인·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