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겨 보는 TV프로그램이 딱 하나 있다. SBS에서 방영중인 ‘골 때리는 그녀들’이다. ‘골때녀’라고도 부르는 이 프로그램은 2021년 6월부터 현재까지 방영중인 축구 예능이다. 여성 출연진들이 팀을 이루어 축구(엄밀히 말하면 풋살에 가까운)경기를 펼치는데 보통 한 주에 한 경기씩 방영 해 주곤 한다. 한 팀에 6명씩 등장 예정인 팀을 포함하여 11팀이 등장하며 각각의 팀은 국가대표팀 출신 전직 축구선수들이 감독을 맡아 이끈다. 나는 요즘 방영하는 그 어떤 TV쇼보다 이 프로그램에 더 열광하고 있다.
프로그램에서는 각각의 출연자들을 ‘선수’라고 일컫는다. 합당하지 않은 표현일 수 있다. 출연자들 중에는 ‘구척장신’팀의 허경희, ‘국대패밀리’팀의 박하얀, ‘액셔니스타’팀의 정혜인과 박지안, ‘원더우먼’팀의 마시마 유 같은 에이스들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동호인인 그들을 엘리트 선수들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그다지 민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들이 축구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이 ‘선수’들은 본인들이 정말로 선수인 것처럼 축구에 미쳐있는 것 같다. 훈련이 많은 팀은 거의 한 달 내내 모여서 훈련을 한다고 하고, 경기시간 동안 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깨를 부딪치고 몸을 날린다. 무릎이 깨지고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가 나도 이들은 이내 털고 일어나 그라운드를 누빈다. 아깝게 골을 놓치면 월드컵 16강이 걸린 경기에서 골 포스트를 맞추는 슛을 때린 양 분개하고, 골을 넣으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골을 넣은 듯 진심으로 환호를 한다. 모두가 이렇게 축구에 진심인데, 선수라는 호칭 좀 붙여주는 일에 굳이 인색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전원 모델로 구성된 구척장신 팀의 주장이자 스트라이커인 이현이. 어느덧 불혹을 넘은 그는 프로그램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는, 골때녀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출연자다. 지금이야 출연자들의 전체적인 실력이 매우 향상되어 있지만, 프로그램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초보 수준의 축구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이현이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무섭게 성장하더니 지금은 다른 모든 팀들이 두려워하는 공격수가 되어 있다.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뜨거운 선수이기 때문이다. 큰 눈을 희번덕거리며 긴 다리로 경기장을 겅중겅중 누비는 그의 모습은 가끔 감탄을 넘어서 애처로움마저 자아내곤 한다. 다리에 쥐가 나면 주먹으로 내리치며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고 모두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보이면 크게 소리치며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곤 한다. 이기면 누구보다 뜨겁게 기뻐하고 지면 누구보다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가 샤넬, 구찌, 에르메스 등의 패션쇼에 등장하던 탑모델이라는 사실이나, 두 아이를 기르고 있는 엄마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가장 뜨거운 가슴으로 뛰어들었던 어느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 역시 그의 땀과 눈물을 보면 시인을 꿈꾸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 머리를 쥐어뜯던 어느 밤과 밤새 합주를 하다가 손끝과 기타 줄에 맺힌 피를 닦아내던 어느 새벽의 감각이 떠오르곤 한다.
개개인의 열정 외에도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동료애다. 지난 주에는 ‘월드클라쓰’ 팀과 ‘개벤져스’ 팀의 경기가 방영되었다. 이 경기에서 진 팀은 당분간 리그에서 퇴출되어 경기를 뛸 수 없게 되는 것이었는데 분전 끝에 ‘개벤져스’가 김혜선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패배했다. 팀에서 가장 열심히 뛰었던 김혜선은 경기가 끝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져서 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임이 분명했다. 동료들은 패배로 쓰린 자신의 마음을 챙기기보다는 먼저 김혜선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주로 개인 작업에 골몰하곤 하는 내가 한때 밴드 동료들과 웃고 울던 시절이 떠올랐다. 함께 웃고 울어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뜨거웠던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가슴에 잠들어있던 어떤 마음을 다시 깨워내는 것은 모든 문학과 음악의 꿈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그들은 공 차는 행위를 통해 매주 해내고 있다. 그들은 매주 내게 한 주 동안 필요한 만큼의 도파민과 어떤 문학과 음악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만큼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모든 선수들이 몸과 마음을 다치지 않고 오랫동안 뜨거운 경기를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강백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