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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의 에피파니

등록일 2023-04-11 18:15 게재일 2023-04-1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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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나가야 만날 수 있는 봄꽃들.

산수유와 매화가 먼저 피고, 진달래 개나리 피고, 목련 핀 다음 벚꽃과 라일락 피던 시절은 추억이 됐다. 지구 환경을 생각하면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이상고온으로 개화 순서가 뒤죽박죽이 돼 한꺼번에 핀 봄꽃들을 보며 어쨌든 눈과 마음 즐거운 봄이다.

벚꽃과 개나리가 색을 나누어 늘어선 강변을 걷는데, 내가 보는 봄꽃 풍경이 불현듯 특별하게 느껴졌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의 엄마가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열어보기 전에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른다”고 한 대사를 아직 기억하는지 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초콜릿 상자’가 떠올랐다. 봄꽃은 매년 피지만 2023년의 봄꽃은 오직 이 봄에만 볼 수 있다고,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찰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했다.

상상해보자. 인간이 100년을 산다고 했을 때, 우리는 초콜릿 100개가 든 상자를 선물 받은 것과 같다고. 칸 하나에 든 초콜릿은 그 해에 먹지 않으면 폐기된다. 누군가는 100개를 다 먹고, 또 80개를 먹기도 하는데 어떤 이는 한 개도 까먹지 못한 채 상자를 반납한다. 이때 ‘초콜릿’은 봄꽃의 화사함, 여름의 무성한 녹음, 가을 단풍, 차고 맑은 첫눈의 다른 이름이다. 매년 돌아오지만 그해의 초콜릿은 오직 그 해에만 먹을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면이 갑자기 그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벗고 진리의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불렀다. 에피파니는 ‘나타남’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피파니아(epiphaneia)에서 유래한 단어다. 종교에서는 순간적으로 계시를 느끼거나 비전을 보게 되는 직관적 경험, 즉 ‘신’을 보는 체험을 말한다. 문학작품에서는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 혹은 독자가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며, 작가가 일상 속의 평범한 소재를 통해 독자에게 계시나 깨달음을 주는 기법을 뜻하기도 한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에는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 구름만 흘러가고 나는 어지러워. 어지럼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라는 노랫말이 있다. 볕 좋은 가을날 야트막한 뒷동산에 올라 네잎클로버 찾고, 코스모스 꺾으며 놀던 한 소년이 잠깐 낮잠에 들었다 깼다. 때로 낮잠에서 깨면 무서울 정도의 이질감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런 모양이다. 저 구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태어나 처음으로 자기존재의 기원과 실존의 유한함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한 순간 근원적인 고독감과 혼란감이 소년을 집어삼킨다. ‘가을빛 물든 언덕’이 평범함이라는 가면을 벗고 섬뜩한 진리를 드러낸 에피파니의 순간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걸…”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에는 데이트 하는 연인이 등장한다. 영화 보고, 맛집 가고, 사진도 찍고, 사랑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중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자기야, 나중에 세월이 한참 지나도 오늘이 생각날까?” 정말 그 ‘나중’이 됐는데, 그녀는 내 곁에 없고, 아무 기억도 없다. 사랑의 기억과 애틋한 약속들, ‘의미’를 지닌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각적 인상인 동시에 일종의 상징 언어인 미소 또한 흩어진다. 긴 세월이 흐르고 남은 것은 그저 ‘웃음소리’뿐이다.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오직 소리라는 감각만 주체에게 남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떠다니는 어느 추억의 거리에서, 남자는 에피파니를 경험한 것이다.

이 봄, 벚꽃과 개나리, 목련이 나란히 피어 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잉어들이 연안에서 헤엄치고, 오리가 수면에 내려와 앉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내가 기다리는 건 에피파니의 얼굴이다. 평범한 일상적 장면이 특별해지는 순간, 나를 둘러싼 세계의 빛깔과 질감과 음악이 달라진다. 그 체험을 통해 나는 너무 오래 묵은 내 세상을 갈아엎고 새 꿈과 새 맘을 가져보려는 것이다. 초콜릿 상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에피파니는 초콜릿을 열심히 꺼내 먹으려는 이에게 허락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나가서 걷고, 열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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