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분명히 고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옷을 고를 땐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고 좋아하는 커피 취향은 어떤 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며,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 수고를 들여서라도 지식을 익히고 깊게 파고든다. 선호의 기준과 취향이 명확해서 그들이 사는 삶은 무언가 견고하고 완벽해 보인다.
취향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취향을 갖고 있던가? 내 주변 인물들은 어떤 단어로 나를 설명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나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거지?
나는 내 자신이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도 없다. 이것저것 일을 벌리는 건 많이 하지만 꾸준히 한다거나 뛰어나게 잘하는 것이 없다. 좋아하는 운동도 잘 모르겠다. 한때 런닝이 너무 좋아서 동호회도 가입하고 런닝용 운동화와 운동복까지 다 갖추었건만 날이 추워지면서부턴 뛰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관심사 밖으로 밀려났다. 좋아한다며 요란을 떨던 마음이 식을 때 무언가 심심한 듯한 허무함이 든다. 그래서 런닝복이나 운동화를 안 보이는 곳에 깊게 숨겨두고 외면하고 있다.
최근 퇴근 후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침대 위에 누워 하루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 가벼운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짧게 압축한 게임 영상이나 예능 편집 영상 등 무언가를 이해하고 행하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주로 찾아본다. 또는 피로감과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유명 패션 브랜드 사이트에 접속 후, 실시간 옷 인기 순위 기준으로 마음에 드는 옷을 장바구니에 담아둔다. 그러면서 인기 순위에서 고른 패션 아이템들이 곧 나의 취향이자 센스 있는 안목이라 생각하며 으쓱해진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고민조차 할 수 없도록 스스로 취향과 개성을 실종하게 만드는 못된 습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취향을 갖는다는 건 어렵다. 취향을 갖기 위해선 일정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을 끊으려면 회원권 비용을 내야하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동호회에 가입하려면 각종 활동비부터 내야한다. 비즈십자수나 펀칭니들 같은 새로운 취미를 도전해볼까 싶으면 만만치 않은 재료비부터 든다. 여유 없이 생활에 쫓기게 되는 순간 취향은 사치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취향에 관심이 가면 얼마 못가 금방 시들해졌다. 취향을 위한 지속적인 소비나 수집을 하는 이들을 보면 낭비를 일삼는 피곤한 삶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취향을 위한 소비는 과한 지출이라 여겼으며, 내가 당장 얼마나 벌며 얼마나 저축을 하는 지가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어긋나 있었는지, 올바르고 분명한 취향을 지닌 이들을 보며 깨달아 버렸다. 취향을 확보한다는 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고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즐겁고 유쾌한 것을 인지하여 취향에 자유롭게 빠져들다 보면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소중히 다루게 된다. 아리송한 삶 속에서 취향의 가치를 발굴하여 지속하는 것은 건강하고도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것이다.
세상의 불합리함을 보며 삶은 불공평하고 덧없다며 심드렁하게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것보단 삶의 유한함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끈질김이 중요한 태도였다. 취향을 찾기 위한 호기심으로 나의 가치를 닦아 빛내어 나아가 더 올바른 이념과 인간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음이 분명했다.
이번 주말에 나는 내 취향에 걸맞은 반지를 3개 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각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만족감에 가슴이 벅차 집에 가는 내내 호들갑을 떨었다. 언젠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옷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이 잘 정돈되어 삶을 살아가는 만족감이 강하게 드는 때가 올 것이다.
집에 돌아와 반지를 벗어놓고선 타인의 취향으로 덧칠된 방을 둘러보았다. 나를 찾기 위해 깊이 파고드는 과정은 궁극적 목표에 비해선 다소 요란해 보이지만, 그런 어설픔도 무언가 애틋해서 벗어둔 반지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당시의 얼굴빛은 근래 들어 가장 환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