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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와 김남국의 실존주의

등록일 2023-05-23 19:43 게재일 2023-05-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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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록키’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영화 ‘록키’에서 주인공 록키는 3회전짜리 삼류 복서다. 좋은 선수가 될 재능이 있음에도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인생을 낭비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무패의 세계 챔피언 아폴로와 타이틀 매치를 갖게 된 것이다. 예정된 상대 선수가 부상을 입어 이탈했는데, 누구도 선뜻 대체자로 나서지 못하던 와중에 록키에게 기회가 왔다. 무명 선수도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 일종의 이벤트성 경기에 광대 역할로 부려진 록키가 과연 1라운드라도 버틸 수 있을까.

서른 살이 되도록 삶의 동기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어떤 일에도 진지해본 적 없는 록키는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적 기회 앞에 최선을 다한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눈물겨운 훈련을 다 마치고 마침내 시합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밤거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와선 애인인 애드리안에게 토로한다.

“랭킹에도 들지 못하는 내가 뭘 하겠어. 열심히 훈련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상관없어. 시합에서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가 내 머리를 부숴버려도 상관없어. 15라운드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누구도 그와는 끝까지 못했지. 내가 그때까지 버티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록키는 챔피언 아폴로와 명승부를 펼친다. 피투성이 얼굴로 쓰러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난다. 15라운드가 끝나는 순간, 록키는 두 발로 선 채 마지막 종소리를 듣는다. 아나운서가 록키를 인터뷰한다. 질문이 이어지는데도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만 부르짖는다. “애드리안! 애드리안!” 울부짖는 그를 향해 애드리안이 멀리서 달려온다. 아폴로가 근소한 판정승을 거뒀다는 결과가 발표되지만 승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링 위로 올라온 애드리안이 “I love you!” 외치며 록키를 끌어안는다. 영화는 챔피언벨트, 돈, 대중의 관심, 명예 따위 세상이 쳐주는 가치들 대신 15라운드를 버텨낸 무명 복서의 개인적 승리를,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생의 목적과 가치를 증명한 사내의 뜨거운 눈물을,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주는 연인의 환한 미소를 비추면서 페이드아웃된다.

니체는 죽음이라는 예정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의미 있는 삶을 살아도 결국 죽음을 맞는다는 허망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을 스스로 부여하면서 거기에 자기존재를 다 던져 몰두하는 사람을 ‘초인’ 혹은 ‘영웅’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록키’는 실존주의적 영화고, 록키는 초인이며 영웅이다. 질 것이 뻔한 시합에서 자기 승리를 발견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가치들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애드리안과 끌어안을 때, 록키는 관중들의 환호성이나 카메라들이 터뜨리는 플래시 등 경기장의 온갖 소란과는 완전히 독립된 그만의 세계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누린다. 자기 삶의 동기를 이데올로기나 신앙 등으로부터 명령받아 타자가 요구하는 가치의 도구로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개척하면서 그 과정에 자신을 있는 힘껏 던질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록키는 승리, 명예, 돈 따위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무소속 김남국 의원의 자유가 궁금하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 중에도 코인 거래에 열중한 것을 보면 자기가 정한 가치에 몰두하는 실존주의자가 맞는데, 가난을 장신구로 걸치고 서민 코스프레를 해온 걸 생각하면 모순적이다. 그냥 “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은 돈”이라고 떳떳하게 밝혔다면 그도 편했을 것이다. 돈 말고도 권력이니 명예니 바라는 게 많으니까 두려울 것도 많고, 두려운 게 많으니까 자유롭지 못하다. 당적을 벗었지만 여전히 매여 있는 사람 같다. 무소속인데 오히려 더 강하게 소속된 느낌이다.

‘정치적 실존’ 말고 진짜 실존을 위해 의원직까지 다 벗어던지는 게 어떨까. 그리고 코인 거래를 하면 된다. 그래야 돈이 실존인 삶에 다른 눈치 안보는 자유가 생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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