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계든 ‘고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그리하여 그것에 통달해 버린 몸짓을 보여주는 이들을 보면 우리는 마음 깊이 존경을 표하게 된다.
고수는 멀리 있지 않다. 무거운 짐을 얹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단한 하체에서, 빛의 속도로 김밥을 말아내는 손에서, 눈을 감고도 라면의 종류를 척척 맞추는 미각에서, 우리는 고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무협 소설의 무림은 고수 중에서도 고수가 되고 싶은 자들로 넘쳐나는 세계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한다. 무릇 강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일. 주변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일이다.
키오스크가 점원을 대신하고 AI 챗봇이 친구가 되어주는 21세기에 갑자기 무림은 또 무슨 말인가 싶지만, 꿈꾸는 것만큼 강한 것은 없다. 인류의 눈부신 발전은 멈추지 않는 상상력에 기반을 두었으니. 현실은 당장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만 상상 속의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군자가 되고 싶은가? 천하를 호령하는 가문의 가주를 원하는가? 명망 높은 문주가 되어 세간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무림인들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구경꾼을 꿈꾸는 자는 없을 것이다. 무림 고수의 자리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라고 못 할 것 있겠는가. 이곳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강자를 꿈꾸는 세계다.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한 훈련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둔 고수를 찾아갔더니 청소나 빨래와 같은 집안일부터 제대로 해내라고 다그칠 수도 있다. 다 뜻이 있겠거니 여기며 마루를 반짝반짝 닦아도 돌아오는 건 불호령뿐. 새벽같이 일어나 온갖 잡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온몸의 근육이 골고루 발달한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제야 스승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당신에게 본격적인 훈련의 시작을 알릴 테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면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옆 문파의 누구는 벌써 무형검을 익혀 강호를 주름잡았다고 하고 어느 산골에서 태어난 아이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다고 한다. 거기에 수많은 악의 조직은 뭘 먹고 그렇게 강한 것인지. 오직 나만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만 같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잘 벌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엄마 친구 아들’은 21세기뿐만 아니라 무림에도 존재한다. 주변에 휘둘리면 끝이 없는 법. 자신만의 도(道)를 지키면서 정진, 또 정진해야 한다.
자, 이제 그간의 노력을 세상에 보여줄 때가 왔다. 훌륭한 정권 찌르기를 연마했더라도 방구석에서 홀로 고수가 될 순 없다. 그간 익힌 기술로 마교의 천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된 아이의 이마에 딱밤이라도 때려야 할 것 아닌가. 물론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니까.
세상에 힘차게 발을 디딘 당신, 반드시 실패하리라. 내가 왔노라 소리쳐도 돌아오는 건 싸늘한 무관심뿐일 수 있다. 자신보다 곱절은 강한 자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기도 하고 오만에 빠져 우스운 실수를 저지르기도 할 것이다.
가끔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할 테다.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마음이 소란한 까닭이라고 생각하며 은둔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방구석에서 정권 찌르기를 연습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패배감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칼을 빼어들었으니 무라도 썰어보겠다며 기합을 넣는 의지를 보여야만 한다. 거기에서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고수는 하늘에서 하루아침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작다고 여겨지는 일부터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한 뼘 자라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수험생의 문제집 독파 일수도, 매일매일 해야 하는 가사 노동 일수도, 회사원의 출퇴근일 수도 있다.
소설은 끝나도 우리 삶은 계속된다. 넘치는 무공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못 되어도 괜찮다. 고수들의 싸움을 구경하다 새우 등 터진 구경꾼의 하루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으리라. 툴툴 털고 일어나 내 앞에 주어진 일을 묵묵하게 해내는 것. 치킨에 맥주, 싸움 이야기까지 곁들이며 친구들과 낄낄대는 밤을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이 무림의,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고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